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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4일 토요일 오전 12시 22분 32초
제 목(Title): 인터뷰/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영남대 영문과 교수, 녹색평론 발행인 겸 편집인) 
"인류의 문명은 결코 진보하지 않았다"
김 성 윤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4학년>

  "사진 찍는 줄 알았으면 인터뷰하지 않았을 텐데." 
  인터뷰 도중 카메라를 조준하려하면 고개를 푹 숙인다. 사진기자가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대구에 가기전 몇 번의 통화에서 뭔가 느꼈기 때문일까. 그런 모습은 
전혀 거북스럽지가 않다. 
  "사진 한 장이 환경을 얼마나 파괴하는 지 아나? 사진 찍는 건 싫어." 하긴 그가 
만드는 '녹색평론' 어디에도 사진은 볼 수 없다. 흔하디 흔한 환경파괴 사진 한 
장조차 찾아볼 수 없다. 

  △생태주의, 생명사상, 녹색운동 등 비슷한 개념들이 많다. 개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의해달라 

  자연 복구가 긴급하다는 위기의식에서 그린무브먼트(Green Movement), 즉 
녹색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사상이 시작됐다면, 명칭이야 그 정도로 지정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녹색운동의 본질은 자원재활용이나, 자연정화 등 부분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환경위기는 생각의 꼬투리일 뿐, 모든 오염의 원인을 찾고 
일반사람들을 설득하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상이 생명사상이 아닌 게 
없다. 모든 사상이 생명을 위한 것이 아닌가. 내가 하는 일도 녹색운동을 
실천하려는 집단적 움직임 가운데 지속적인 매체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녹색평론'을 보면 '과거로의 회귀'를 강조하고 있는데 

  회귀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 과거는 어둡고, 현재와 미래만이 밝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하는데 실상은 그 반대의 모습이 아닌가. 나는 
인류의 문명이 진보의 궤적을 그려왔다는 데 반대한다. 가끔 그러한 비판들이 있긴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 가정이 틀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가야 한다. 

  △인류의 문명이 '진보'해오지 않았다면 현대의 문명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현대 대량산업문명이 수십년 동안은 지속이 가능할지 몰라도 약자와 자연에 대한 
사회의 억압수준으로 볼 때, 이 문명은 우선 지속가능하지가 않다. 현대 문명의 
물질적 토대는 곧 자연이 아닌가. 이 토대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빈부격차가 커져만 가고 있는 모습이라든지, 인간이 심리적·정신적 행복으로부터 
차단된 채 옛날의 풍요로움을 박탈당한 모습도 지금의 문명이 과거보다 훨씬 
가난해졌다는 것을 입증한다. 

  문명이 생기면서 권력이 창출되고, 권력은 자연히 인간을 교만하게 만들었다. 
인간의 교만함은 권력이 없는 자, 그리고 자연마저 억압과 착취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로 들어와서 이러한 파괴는 극에 다다른 
지경이다. 인간은 타인과 자연 앞에서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인디언 문화나 제3세계를 주목하는 것도 어느 정도 대안적인 의식에서 
비롯됐다고 이해하면 되는가 

  문명의 시작이란 타락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원시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그들에게 
문명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문화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의 연구에서도 그들이 문화를 갖고 
있음이 입증되지 않았는가. 

  우리보다는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부유한 문화를 발견할 수 있다. 인디언들은 
모닥불을 피우는 것에서도, 고기를 먹는 것에서도 그 혼(spirit)과의 결합을 
발견한다. 즉 영성과 합치함으로써 생명과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 
있어 그러한 행동들은 산소나 단백질의 분자작용에 불과하다. 그들이 갖고 있는 
영성, 신비성이 우리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을 벗어나 사회적으로 
인도의 간디를 주목하는 것도 그의 사상이 "나와 인도의 민중은 하나"라는 영성적 
정치를 말함으로써, 기본적으로 만물일체(萬物一體), 천지동근(天地同根)이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운동의 관점에서 뉴미디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또 뉴미디어 
시대에 녹색운동은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겠는가 

  상당히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컴퓨터는 이른바 진보운동을 하는 단체들에게 
매우 요긴하긴 하다.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비논리적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의 생각으로는 컴퓨터 문화가 이런 식으로 확장된다면 
큰 재앙을 가져올 것 같다. 그 재앙은 운동단체들이 받는 혜택에 비해 매우 큰 
것이다. 

  모든 문제를 생각해볼 때 약자의 편에서 생각해보자. 현재 컴퓨터사용자는 
여성보다는 남성, 노인보다는 청년층이다. 컴퓨터 사용의 편중으로 인해 종래의 
불평등 구조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도 나는 그 특이한 성질 
가운데 다양성을 지적하고 싶다. 특히 기계농업의 확대는 재배면적을 확대시켜 
단일경작(monoculture)을 유도하는데, 이는 달리 말해 단일문화(monoculture)를 
뜻하기도 한다. 기술의 발전이 생명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것이다. 또한 컴퓨터의 
탁월성을 거론하곤 하는데, 적어도 지혜로운 인간상을 만드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컴퓨터가 제공하는 것은 정보와 지식밖에는 없다. 한마디로 악마의 기술이 아닌가. 

  뉴미디어 시대의 녹색운동의 원칙은 소규모 참여정치를 통해 고르게 소박한 
생활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인간이 '교만함'을 버리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모르는 것'이 원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겸손해질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생긴다. 감수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게 된다. 

  △'배부른 자의 절제'를 강조하고 있는데, 녹색운동을 통해서 '배고픈 자의 
생존'은 얼마큼 충족될 수 있겠는가 

  사회적인 정의를 환경운동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겠는데, 브라질의 예를 들어봤으면 좋겠다. 언뜻 보면 환경을 강조하는 서양이 
아마존의 삼림파괴를 막는 것은 브라질의 산업화를 가로막는 '환경제국주의'로 
이해할 수 있다. '개발을 환경이란 이름으로 막는 것은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는데, 이는 개발과 환경이 서로 거스르는 관계임을 증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문제를 현상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에서 
기인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브라질 아마존 문제는 자체내의 모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주의 토지독점이라든지, 기계농업의 확대로 실업이 증가된다든지의 
문제를 보면, 오히려 브라질의 개발은 정치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가능하다. 

  진정한 녹색운동은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물론 그 이전에 인간의 교만심도 
문제이지만 말이다. 지금의 녹색운동도 시화호, 원전 등 환경문제들이 산적했지만, 
다국적 기업의 지배, 시장논리의 지배로부터 이탈해서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을 
해야 한다. 이를테면, 자동차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태맑스주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먼저 실천의 장에서 생태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지적할 수 
있다. 생태맑스주의는 미국이나 유럽을 중심으로 일부 지지를 얻고 있는 이론에 
불과하다. 지식인에 따라서는 이론이 곧 행동이라 말할 수 있지만 이론의 정교화, 
체계화 과정에서 지나치게 아카데믹화됨으로써 구체성이 결여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것은 역사를 일직선상에서 진보의 과정으로 보는 
문제이다. 맑스 역시 '사회주의가 실현되려면 물적 토대를 쌓기 위해 자본주의 
성숙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적어도 이 부분에 집착하지 않는 
맑스주의자가 없는 것 같다. 이는 자본주의의 공적을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말인데, 이런 역사관은 물질이 풍부해지는 
것을 '진보'라 보는 것으로써 부르주아적 철학과 별반 다를 게 없다. 지구의 
용량한계를 전혀 고려치 않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라는 것이 얼마나 허깨비 같은 
것인가. 녹색사상에서 정신을 중요시하는 것도 맑스의 유물론과 대치되는 것이다. 
결국 맑스주의와 녹색사상은 출발점에서부터 다른 것이다. 녹색사상은 살인뿐만이 
아니라 살생 자체를 금한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종교적 차원의 생각으로 풀이될 
수 있지만, 저 생물과 나는 하나라는 느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느낌이 
없으면 녹색운동의 비폭력주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와 녹색운동이 
만난다는 것은 처음부터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원래 문학평론을 하다가 녹색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문학과 
녹색사상간의 접점이 있을 듯 하다 

  문학평론은 작품해석 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삶을 이야기하는 텍스트를 본질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녹색사상 역시 그 
근본정신에 있어 문학과 다르지 않다. 또한 외국의 경우 생태주의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사회학자들에게 수용되는 반면, 우리나라는 문학·예술인이 제일 
민감한 것을 볼 수 있다. 박경리, 김지하, 박완서, 김성동 등이 환경운동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지 않는가. 특히 박경리의 '토지'를 보면 그녀의 작품 속에 
역사를 가르는 생명들이 무수하게 존재함을 감지할 수 있다. 

  △앞으로 '녹색평론'에서 중점을 두고자 하는 주제는 

  드물지만 귀농현상이라든지, 대안학교 설립 같은 일들이 가끔 있다. 기존 
패턴대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이것과 관련된 이론과 외국의 모습을 소개하고 
관심을 유도하고자 한다. 지금은 작지만 이런 탈출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녹색평론'이라는 매체를 통해 이 사회가 지금의 모습으로 지속되지 않게 
하려는 설득을 계속 시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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