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3일 금요일 오전 02시 54분 21초 제 목(Title): 김병윤/진보의 통속적이해에 대한 재고 기획연재 우리에게 진보란 무엇인가? 3. 기술 결정론 혹은 미래학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진보의 통속적 이해에 대한 再考 일상에 깊이 뿌리내린 기술결정론 비판 진보는 우리가 그리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단어다. 그러나 정작 '진보'라는 말의 실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면 이에 대해 답을 하기란 그리 녹녹하지 않다. 가령 사회주의가 진보라는 호칭를 획득했던 데에는 원시공산주의 사회에서 사회주의에 이르는 '역사법칙'을 상정했고 사회주의가 이전의 사회보다는 더 좋은 것이라는 사회적 동의 ― 비록 소수집단일지라도 ― 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즉, 무엇을 진보적이라 하기 위해서는 그 무 엇은 언젠가는 도래할 것이라는 역사철학적인 논의에 기반하고 그것을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가 수반되어야 진보라는 호칭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과 다를 바가 없을 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90년대 초반을 경과하면서 역사법칙에 대한 회의와 반성이 대두되고 북한을 비롯한 현존 사회주의의 실상이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사회주의를 진보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유보조항을 덧붙이거 나 현실에 없는 이상적인 모습으로 제시해야 했다. 좌파적인 시각과 행동이 진보적인 또는 미래를 만들어 가는 이미지를 획득했던 과거에 비해 지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진보적' 또는 '개척적'의 이미지는 많이 다르다. 새로운 영역을 찾아 나서는 젊은 벤처기업가, 세련된 매너와 국제적 마인드를 갖춘 전문경영인, 연구에 몰두하는 연구자들이 도리어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진보적인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역전은 우리나라에만 일어나는 독특한 현상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유럽 좌파들은 과학과 기술 에 대해 대체로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지만 최근 유럽의 '집권좌파'들은 유연한 입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최근에 내한한 기든스는 기존의 좌파들이 과학과 기술에 대해 너무 비판적이었다며,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산업발전으로 이어져서 유럽의 현안인 실업문제의 극복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서 좌파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좌파의 변신을 요구하는 이런 목소리에는 전통적으로 우파의 편에 있었던 미래학자들의 목소리가 섞여있는 것같아 더욱 찜찜하다. 토플러, 벨, 나이스비트 따위의 미래학자들은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변화들에 기반해서 미래를 나름대로 예견하는 데, 이들의 미래'학'은 예언의 음조를 띄고 있다. 미래가 어떠어떠하게 될 것이라는 이들의 말은 다르게 생각하면 '협박'이다: "이미 정해져있는 미래를 충실하게 따라가는 것이 좋은 일이니 이 예언을 벗어나지 말라." 미래학의 일반적 논리구조가 기술적인 변화에서부터 사회적인 조직의 변화를 설명한다는 틀을 가진다는 점에서 미래학은 기술결정론적이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미래학의 기술결정론적 성격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제기되었지만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기술결정론적인 사고는 일상에 널리 퍼져있다. 기술결정론적인 사고가 어디에서 연원했고 그것이 진보에 대한 믿음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그리고 기술결정론적 사고가 갖는 문제들에 대해 지적을 해보겠다. 1. 진보에 대한 통속적 이해 진보는 가치내재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특정한 윤리적 태도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는 입장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간의 역사를 통틀어 보편적으로 추구되어오던 가치가 있음을 들어 그것에 충실하면 진보라는 입장도 존재한다. 어떤 경우도 진보의 선험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다는 문제를 갖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진보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하겠다. '통속적'이라는 관형어 때문에 그것이 쉽게 거부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誤算)이다.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수 있는 것은 나름의 물질적인 토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좋은' 상태를 물질적인 영역과 정신적인 영역으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물질적인 것으로는 풍요로움, 장수(長壽), 쾌적함 등을 들 수 있고, 정신적인 것으로는 자유를 들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은 계량화될 수 있기에 현실에서 '객관적'인 모습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획득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 대해서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또는 정신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는다. 최근 들어 진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 계속 진보하고 있다는 것, 즉 자신들이 전세대들보다는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믿음은 물질적인 측면과 과학의 발전에서와 같은 정신적인 측면에서 계속 확인되었기에 지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은 흡사 구분되는 듯하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분리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우리에게 자리잡고 있는 암묵적 믿음이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체로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마르쿠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가 결국에는 인간의 내적 자연, 즉 본성에 대한 지배로 이어짐을 들어서 인간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고 하버마스도 마르쿠제의 기본적인 틀을 따르면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에 근거해야할 정당화과정이 과학과 기술에 따라 이용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현대사회에서 기술과 과학이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현실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이와 달리 물질적인 진보와 정신적인 진보를 연결짓기 위해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출발하는 논리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바로 그 이성에 기반한 사유에는 특성상 필연적으로 자유가 내재해야하고 이성적 사유는 대상에 대한 합리적 이해인 과학을 낳게 된다. 따라서 과학의 발전은 인류의 성장 또는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인간성의 실현이다. 과학의 비약적인 발전은 다시 대상에 대한 조작을 위한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인류는 과거에는 없던 산업을 창조해내고 발전시키게 된다. 산업의 출현과 발전으로 인해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동시에 물질적인 진보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논리에서는 자유로운 이성적 사유가 물질적 풍요까지를 결과할 수도 있는, 물질적인 진보와 정신적인 진보의 행복한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 쉽게는 물질적 풍요에 의한 여가의 창출이 다시 정신적인 행복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낙관도 가능하다. 2. 통속적 사고에 대한 비판 이성에 대한 신뢰에서 과학, 기술, 산업으로 이어지는 연쇄에는 신뢰하기 어려운 지점들이 존재한다. 이성이 인간을 얼마나 설명해줄 수 있는가, 이성은 과연 신뢰할만한가, 과학은 단지 이성의 산물인가, 과학은 자연 및 사회를 얼마나 잘 설명해주는 도구인가, 과학과 기술의 연쇄는 얼마나 견고한가, 기술이 발전하면 산업생산력이 증가하는가, 산업의 발전이 풍요를 야기할 수도 있지만 환경문제에서 드러나듯 그것이 도리어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일도 존재하지 않는가 등등. (1) 과학에 대한 신뢰는 얼마나 믿을만한가 과학이 갖고 있는 합리성의 신화에 대한 도전은 과학철학에서 시작해서, 과학지식사회학, 페미니스트 과학인식으로 확대되어가면서 범위와 깊이를 더해갔다. 과학철학에서는 관찰명제와 이론명제에 대한 논의와 이론체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순수하게 지금까지의 과학의 발전이 논리적·수학적 '합리성(rationality)'이 승리해온 것이 아니라 '우연성(contingency)'에 대한 관심을 돌려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관찰의 이론의존성'은 순수하다고 여겨졌던 관찰명제에 대한 도전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관찰이 광학적생리학적 연쇄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서부터 '순수한 관찰'이란 소박한 믿음은 무너진다. 과학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들의 의미들이 이론체계에 따라 상이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관찰명제를 구성하는 뉴턴 식의 사고방식에서는 물질의 특성으로 이해되었던 질량(mass)이라는 이론적 개념이 질량과 에너지의 상호관계를 얘기하는 아인슈타인의 사고방식에서는 다른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등 개념의 의미는 특정한 이론체계 내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이론체계(또는 패러다임)들 간에는 불가공약적(incommensurable)이다. 한편 뒤엥콰인(DuhemQuine)에 의해서는 관찰명제들이 이론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관찰명제에 의한 이론의 과소결정(indeterminancy)'이 제기되기도 했다. 과학지식사회학에서는 과학이론이 형성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하나의 과학적 주장이 논쟁을 거쳐서 안정화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지식사회학의 대상에서 자연과학을 제거했던 과거의 사회학적 전통을 넘어서 확실성을 보장한다고 여겨졌던 자연과학에까지 메스를 들이대면서 과학지식이 논리적 일관성과 합리성 이외의 협상이나 권위의 산물이기도 하며 불확실성을 내재하고 있다는 지적을 한다. 이런 관심은 페미니스트 인식론과도 친화적이다. 페미니스트 과학비판은 현대의 과학에 이미 성별차이가 내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쿤이 패러다임을 제기하면서 정작 말하고자 했던 것이 과학의 상대주의적 속성이었다기보다는 과학자들의 사고와 행동의 습성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페미니스트 과학비판은 한결 설득력이 있다. 과학자들이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교과서와 반복되는 실험 등을 통해서 특유한 사고의 전개방식이나 '은유'를 체화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정상과학적 활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이라는 점이 쿤이 주목했던 바다. 페미니스트 과학비판가들의 주장에 따르면 과학자들 ― 특히, 생물학이나 의학분야의 과학자들 ― 이 사용하는 은유에는 이미 남성과 여성에 대한 통념이 반영되어 있고 결과물인 과 학지식에까지 반영되고 있다. (2) 과학에서 기술로 이어지는 연쇄는 정당한가 과학의 발전이 기술로 낳는다는 주장은 매우 널리 퍼져있다. 과학이 발전하면 따라서 기술이 발전할 것이라는 어셈블리 라인(assembly line)식의 사고방식은 정당화되기 어렵다. 17세기의 과학혁명 이후에 일어난 18세기의 산업혁명은 시기적으로는 과학의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혐의를 받고 있지만 산업혁명의 대표적 산물인 와트의 증기기관은 잠열에 대한 줄의 이론에 기초했다기 보다는 기술적 전통에서 파생한 것이며 과학과 기술이 만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전기공학과 화학공학에서였으며 아직도 독립적인 전통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과학과 기술의 간격이 매우 근접하게 되는 핵물리학이나 반도체 공학, 생명공학 같은 분야들이 존재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대체로 다른 제도적 전통을 갖거나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진행되는 다른 활동이다. 과학자 사회와 기술자 사회는 구분되는 것이 보통이며, 과학이 '참'으로 인정되는 지식을 만들어내기 위한 작업이라면 기술은 '유용함'을 만들어내는 활동이라는 관심의 차이가 존재한다. 과학의 발전이 기술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은 과학지식이 바로 기술개발로 연결된다기 보다는 '과학적 방법이나 태도가 기술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과학에서 사용하는 수리적·정량적 방법을 기술영역에 원용하거나 과학적 교육을 받은 이들이 기술적인 환경에서 작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 과학이론이 직접 기술개발을 낳는다고 볼 수는 없다. 즉,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점점 잦아지고 있지만 기술과 과학은 서로 다른 관심을 갖고 있는 활동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또한 '기술'이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기술이란 말은 너무 폭넓은 개념이다. 기술이란 단어를 규정하기란 또한 '기술'이라는 단어의 쓰임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기술이란 말은 너무 폭넓은 개념이다. 기술이란 단어가 때로는 구체적인 인공물을 지칭하기도 하고, 지식을 의미하기도 하며, 단지 기예(技藝)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현대의 거대기술들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들 간의 상호관계나 시스템으로서의 기술이 중요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술을 규정하기란 진보를 규정하려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특정 기술의 발전은 오히려 다른 기술의 쇠퇴를 초래하기도 하며 과거 기술의 미덕을 침식하기도 하는 경우가 있다는 걸 볼 때, 기술이 발전한다고 할 때, 그것은 과연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라 는 점은 생각해볼 꺼리이다.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한 1세계 농업자본의 진출이 제 3세계의 농업을 얼마나 황폐하고 종속적으로 만들었는가. 초기에는 토착농업을 상업적 농업으로 변환시키는 데에서 출발했지만 최근 몬산토(Monsanto)같은 생명공학기업들은 제 3세계에 제초제를 팔면서 제초제에 견디는 종자까지 파는 등 제 3세계의 기술적 종속은 농업분야에도 지속되고 있고, 제 3세계의 자율성은 계속 침식되고 있다. (3) 기술이 발전하면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연구개발투자가 증가한다는 것과 생산성의 향상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리 유효한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다는 게 기술경제학계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생산성 패러독스다. 기술혁신은 단지 새로운 기술, 제품, 공정의 창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케팅에까지 성공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이기에 산업 수준에서 의미가 있는 혁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신기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다른 '지저분한' 사회적 과정들까지 성공적이어야 한다. 한편 기술발전의 성과를 측정하는 위해 사용하는 지표인 특허의 수도 그리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암묵적 지식이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산업에서는 자신의 노하우에 대해 특허를 출원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특허를 출원할 동기도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연구개발투자나 특허의 수가 증가했다는 것으로 산업생산성의 증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은 그리 정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현재의 물질적 풍요를 가지고 온 것은 어디에 기인한 것인가는 결국 매뉴팩처와 공장제, 그리고 테일러주의에 이르는 노동의 사회적 조직양식의 변화에서 찾는 것이 정당하다. 기술발전에 따른 기계와 도구의 발전이 공장이라는 공간과 그에 따른 노동 조직을 야기했다기 보다는 자본가의 발생과 그에 따른 노동의 사회적 조직, 작업장 내 조직의 변화가 기계보다 선행했다는 점이다. 즉, 현재와 같은 생산력의 발전을 초래한 자본주의의 특성을 기계화로부터 찾기보다는 위계와 통제에 따른 노동의 사회적 조직의 변화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개별 자본의 노력의 결실이 기계화와 여러 기술혁신, 그리고 그에 이은 산업생산의 증대를 낳았던 것이다. 그리고 노동하는 개인들이 보다 많은 노동시간과 노동강도에 시달리고, 위험한 작업환경 에 처해졌다는 것, 노동이 지루해졌다는 것 등은 생산력 발전을 위한 희생으로 ― 흔히 말하는 기술발전의 장점과 단점이라는 식으로 ―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의 분할과 위계의 지속을 기본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서 야기되는 귀결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근의 기술혁신이 노동절약적인 방향으로 전개된 데에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목적이 아닌, 노동운동에 대한 대응에서 출발했다는 점은 기억해두어야 한다. 기술을 설계하는 공학자들의 존재조건도 기술발전이 왜 자본친화적인 지를 설명할 수 있다. 공학자들이 자신의 존재조건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작업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는 경영진의 요구에 충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니겠는가. 3. 결론: 기술결정론에 대한 비판의 정치적 함의 기술결정론을 비판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사회적인 여러 관계들이 기술의 설계, 도입, 배치과정에서 반영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조금의 관심만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에 대해 어셈블리라인 식의 사고를 부정하고, 기술결정론을 비판한다고 해도 과학과 기술이 전혀 연관이 없다거나 기술과 산업이 전혀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기술결정론을 비판하는 손쉬운(!) 일을 거듭해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는 것은 대안적인 정치 기획의 가능성과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 확대와 물질적 풍요의 연결이라는 논리와 더불어 현실에서 목격되는 변화들 ― 전보다 빨라지는 컴퓨터, 새로운 자동차, 신기능 TV 등등 ― 은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 중'이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기술과 과학이 객관성과 필연성의 외피를 둘러싸고 있는 동안에는 과학과 기술은 도전을 받지 않은 채 기존의 궤적을 충실히 따르게 된다. 결국 기술의 변화는 그것을 방조하는, 어쩌면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며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될 때에 우리는 적응이라는, 대응 아닌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 테크노크라시를 대안적인 미래로 그리는 것은 앞서 말한 과학의 속성에 대한 무지와 인간에 대한 기계적 관념의 소산일 뿐 아니라, 현재의 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는 보수적인 색채를 띄기 쉽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다시피 기술과 과학이 자율적인 발전궤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관계의 영향을 받거나 사회관계가 반영된 것이라면 기술과 과학은 또 하나의 싸움터다. 이런 의미에서 러다이트는 복권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기술의 도입을 입법과정으로 생각하자는 주장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하나의 법률이 사회에 도입되기 위해서는 발의, 시대와 공간에 맞춘 변용, 정당성 확보, 개정 등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법률은 사회적 합의의 문자적 표현이 되고 이렇게 만들어진 법률은 개인들의 삶의 경계를 규정한다. 기술은 인간의 활동을 규정하는 물리적 실체이기에 법률과 비슷하게 이해할 수도 있다. 날치기 입법과 법률의 무분별한 집행에 대해서는 분노하는 우리가, 낯선 기술의 도입과 운용에 대해서는 너무나 관대하지 않은가. 기술에서 사람을, 권력을 느껴야 한다. 과학에서 타협을, 부당한 권위를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과학과 기술을 다시 인간과의 관계 내에서 파악하는 데에서부터 진보에 대한 논의는 다시 출발되어야 하고, 이 과정을 통해 역사에서 인간의 위치를 다시 사고해야 할 것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