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1일 수요일 오후 04시 27분 23초
제 목(Title): 서양이 우리에게 씌운 원리주의라는 색안경
http://spn.snu.ac.kr/theday/read_theday/8ho_9812/서양.html
에서 퍼왔습니다.




서양이 우리에게 씌운 '원리주의'라는 색안경 



김태호, 손원준 | 화학과



-------------------------------------------------------------------------------
-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공기 테러나 무차별 인명 살상도 
마다하는 이슬람원리주의가 문명세계의 새로운 위협세력으로 세계 도처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분쟁과 테러가 있는 곳에는 예외 없이 무슬림들이 있다" 
대충 이런 식이다. 무역센터 폭파사건(뉴욕), 프랑스 항공기 납치사건(알제리) 등 
최근의 거의 모든 테러는 '이슬람 원리주의(또는 근본주의 fundamentalism)'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서방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사회주의 세계'의 붕괴 이후, 
언론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와 학계에서도 이슬람은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못말리는 비행사}에서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이 웃기는 악역으로 등장한 
것이나,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서구 세계의 새로운 '敵'으로 이슬람 
세계를 지목한 것이나 모두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이슬람 세계와 이슬람 사상에 대한 이러한 편협한 시선은 
이슬람을 한 덩어리로 싸잡아 파악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서구인의 눈―그리고 
서구인이 되기를 갈망하는 일부 동양인의 눈―에는 이슬람 사회주의당의 후세인과 
배외적 신정국가의 호메이니가 한 패거리로 보일 것이다. 물론, 그들은 어떤 
의미―미국(=세계)의 말을 안 듣는 '세계(=미국) 평화의 적'이라는 의미―에서는 
한 패거리이다. 



서방에 의해 조작된 이슬람 원리주의
원래 원리주의(fundamentalism)라는 용어는 1920년 미국에서 과격한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세속화 반대운동에 처음 붙여졌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전간기(戰間期)에 미국 사회에서 급속한 도시화와 아울러 농촌 사회의 
해체가 일어나면서, 그에 저항하는 농민 또는 농민 출신 도시 서민의 보수적 
심리가 미국의 건국이념이었던 기독교를 반동적인 모습으로 되살려 놓았는데, 
'천년왕국 운동'과 결부되어 정치·사회·문화 영역에서 나타난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후대의 학자들이 '원리주의 운동'으로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미국 기독교의 특정한 양태를 지칭하던 '원리주의'라는 단어는 곧 다른 
종교를 서술하는 데에 쓰이기 시작했다. 2차대전 이후 고전적 제국주의 시기의 
종식과 함께 나타난 신생 독립국들에서 서구식의 세속화에 반대하는 운동이 
등장하는데, 서구 학자들에게는 이것이 근대화·도시화에 반대하며 복고적·반동적 
심성을 부추기는 운동으로 보였고, 미국 원리주의 운동의 종교적·反도시적 성격에 
착안하여 이들 운동에 '○○ 원리주의 운동'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던 것이다. 
이슬람원리주의는 1940년대 서구식 정치질서와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이슬람운동에 서방세계가 갖다 붙인 용어이다. 

이슬람세계에서 이슬람원리주의란 용어는 없다. 이슬람권에서는 단지 서구의 
가치체계에 대항해서 이슬람정신에 입각한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자 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있었을 뿐이며, 이들 운동은 이슬람 부흥운동(Islam Revivalism ), 
이슬람 개혁운동(Islam Reformism), 이슬람化 운동(Islamization) 등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고 서방 언론에서 보도하는 '원리주의 테러집단'도 원리주의라는 
이름보다는 "이슬람 급진주의(Islam Radicalism)의 한 과격한 분파"라는 설명이 
더욱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역사성
서구에서 세기말의 새로운 현상인양 호들갑떠는 것과는 달리, 이슬람 세계에서 
이슬람 부흥운동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 가치의 존중, 꾸란과 
하디스(무함마드의 언행록)에 철저히 근거한 이슬람式 삶의 확립이라는 대전제는 
이슬람 공동체('움마')의 형성과 함께 견지되어 온 사회의 운영 목표였다. 

이러한 '삶의 방식으로서의 이슬람' 사상은 근대에 이르러 식민지 지배를 
경험하면서, 종교적 민족주의의 형태로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발아되었다. 중세의 찬연했던 이슬람 문화를 회상하며, 이슬람 세계가 서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앞선 과학과 기술의 습득을 받아들이되, 이슬람정신의 강화와 
이슬람식 사회체제를 성립해야 된다는 이념적이고 개혁적인 주장이었다. 

다만 이슬람 운동의 극히 일부가 서구의 끊임없는 경제적 착취와 이슬람 
가치체계에 대한 침탈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면서 과격주의와 폭력주의가 
생성되었다. 서방 세계에서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이것이 이슬람 부흥운동의 
전부인 양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소수의 폭력적인 성향의 배경에는 폭력 이외의 
다른 저항의 수단을 앗아가 버린 서구 자신의 책임이 엄연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보전에만 급급하면서 
다른 공동체의 고유한 사상과 가치를 짓밟고도 자신의 것만이 절대선이라 생각하는 
서구의 독선이, 바로 이슬람 급진주의의 최대 후원자인 셈이다. 

이것은 국가 운영에 이슬람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는 국가에서보다 이슬람을 철저히 
박해하고 있는 곳에서 급진적이고 과격한 이슬람 운동이 호응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백하다. 미국의 힘을 빌어 민중을 탄압하던 팔레비 왕조가 이란의 
神政국가의 탄생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알제리에서 FIS(국민구국당)이 집권 
직전까지 간 것도 오랜 군부독재와 프랑스의 지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튀니지나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이 끈질기게 저항하는 것도, 무슬림 국가 중에서 
서구화와 세속화가 가장 성공했다고 하는 터키에서조차 이슬람을 정강으로 
표방하는 복지당이 이스탄불과 앙카라등 대도시의 시장선거를 석권하고, 
세속공화국 75년만에 처음으로 집권하게 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국가개념
마울라나 마우두디에 따르면, 현대적 의미의 이슬람 국가형태는 '이슬람 聖法에 
기초한 완전한 神政主義 국가'이며, 이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려면 다음과 같은 
원칙이 필요하다. 

★정치 이론의 기본 원칙: 
일원적 유일신관(tawhid)과 신의 절대권력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 의해 건설되었던 사회적,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알라)만이 절대적 주권의 주인이고 행사자이다. 동시에 신만이 진정한 
입법자이고, 절대적 사법권을 갖는다. 국가는 그 운용이 신법인 이슬람법의 
테두리를 벗어날 때 통치의 정당성을 상실한다. 

★국가체제(신정민주주의 : theo-democracy) 
대중 주권의 원칙에 절대성을 주지 않고, 신의 주권 원칙에 입각한다. 국가를 
운용.통치하는 자는 칼리프(신의 대리인)로 존재한다. 국가 원수는 스스로의 
권위로 법을 제정할 수도, 함부로 법을 폐기할 수도 없다. 대중은 그들의 주장이 
신의 규범틀에 어긋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민주주의를 향유할 수 있다. 신법에 
대한 해석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이슬람 학자들의 전원 합의에 의존한다. 

★국가의 목적: 
대중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설정한 이상적인 조건에서 금기된 사항을 멀리하고 
권장된 사항을 적극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는데 있다. 
국가의 의무는 따라서 대중을 도덕적으로 함양시키는 교육과, 신의 뜻에 걸맞는 
사회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조성하고 유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가치관: 
모든 행위는 공동체 차원에서 다루어지며, 사회 도덕률이라는 전체적인 가치관을 
항상 염두에 둔다. 

★사상적 관용: 
이슬람 국가는 통치자나 국민 모두가 이슬람이라는 공통의 이데올로기에 기초를 
둔다. 그러나 이질적인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전체 공동체로서의 
이슬람의 가치를 파괴하거나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들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존중되고 보호된다. 

이와 같이 이슬람 부흥운동이 지향하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등한 사회적·법적 지위와 권리를 향유하고, 민족·종족·신분·직업·출신성분 
등의 차이에 의한 어떠한 불이익도 당하지 아니한다. 또한 이러한 사상은 일인의 
권력 독점에 의한 전제주의나 독재를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이 이슬람 국가의 
근본 체제이고, 이슬람식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의 생성과 발전
근대 이슬람 부흥운동의 주된 면모는 다음과 같다. (1)이슬람은 처음부터 완성된 
최종의 종교였기 때문에, 변질된 이슬람으로부터 순수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2)이슬람은 근본적으로 정교일치의 단일 유기체이기 
때문에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다. (3)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대항한 문화적 
총체운동으로, 반외세·반세속을 공통분모로 이슬람의 정통성과 이슬람권을 
보호·발전시키는 것이 근본 취지이다. (4)이슬람의 전통을 토대로 하면서 앞선 
서구의 과학과 제도를 받아들이는 '전통과 근대화'의 이상적인 조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근대 이전의 이슬람 부흥운동 
이슬람 부흥을 표방하는 움직임은, 서구열강이 중동-아랍세계를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이전에 이미 이슬람 사회내부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슬람권에서 개혁을 통한 이슬람 정통주의의 강화를 시도한 
움직임은 9세기 중엽의 아흐마드 이븐 한발('한발리 학파'의 창시자) 이후 
지속적인 흐름으로 나타난다. 특히, 14세기에 이븐 타이미야라가 주도한 
'살라피(salafi)'운동은 신비주의, 범신론, 사변적 신학, 미신적인 요소로부터 
이슬람의 정화를 주장하였다. 
18세기 중엽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등장한 '와하비(Wahabi)운동' 역시 이러한 전통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와하비 운동을 이슬람 부흥운동의 시작으로 보는 것이 
중동연구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운동은 이슬람이 성립된 후, 1200년 동안 
누적되어 온 신학적 변질과 사회적 악습에 대한 반발로 출발하였다. 특히 당시 
이슬람 사회에 만연하던 이슬람 신비주의(Sufism)가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위주의 기복신앙으로 흘러가자, 압둘 와합(Abdul Wahab, 1787 사망)은 이를 
배척하고 청교도적인 순수한 이슬람을 회복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그는 이슬람 
사회가 쇠퇴하게 된 이유는 이슬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반대로 무슬림들이 
이슬람의 정신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슬람 본연의 정신과 고유한 
전통을 부흥함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부흥운동이 19세기 중엽까지의 이슬람 세계내의 개혁 움직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리비아에서는 사누시아(Sanusiya)운동이 일어나 정권을 잡았고, 
인도에서는 무슬림 각성운동이,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흐마드의 마흐디 운동이 
각각 변질된 이슬람의 타파와 참된 이슬람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유럽 팽창기의 이슬람 부흥운동 
18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유럽열강의 동진은 와하비 운동에 고무되어 있던 이슬람 
세계의 부흥 움직임을 더욱 촉진하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1798-1801)은 
유럽의 근대문화가 중동에 소개되는 전환점이었고, 이로 인해 중동의 근대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아랍 지식인들에게 
외세의 통치에서 아랍을 해방시키려는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시켰으며, 서구문명의 
수용을 위해 합리주의를 채택하게 했다. 나약한 자신의 처지와 부인할 수 없는 
서구의 발전 사이에서 번민하던 사상가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로 알 타흐타위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이슬람권 밖에서도 행복과 풍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체제의 합리적이고 현대적인 해석을 강조했다. 알 타흐타위의 
온건한 개혁사상은 후일 세속적 근대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지만, 전통적인 
이슬람 부흥론자들의 견해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 이슬람 부흥운동의 주류는 매우 진취적이었으며, 부패하고 무능한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의 가치를 통하여 유럽침탈에 대비하고자 했다. 종교적 
동기에서 출발한 이 운동은 정치-사회적 변혁과 투쟁의 강도를 높이며 외세를 
반대했기 때문에, 와하비 운동을 제외하면 대부분 기성세력과 그 후원 세력인 
유럽열강의 탄압을 받아 실패하였다. 

★제국주의 시기의 근대적 이슬람 부흥운동 
이와는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정치-사회적 동기에서 범세계적인 흐름을 이해하면서 
시작된 근대적 부흥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이 시기의 운동은 종교적 순수성 
강조는 물론, 사회전반에 걸친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변혁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이슬람 개혁운동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초에 
본격적으로 태동된 이슬람 부흥운동은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이 서구 유럽의 
식민통치하에서 경제적 수탈과 민족적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는 
계몽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의 흐름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 단계는 서구의 
도전에 대한 무슬림들의 보다 직감적인 반응으로 당시 서구의 급격한 발전 양상을 
애써 외면하면서 영광스러웠던 이슬람의 과거를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집약된다. 둘째 단계는 서구식 방법으로 이슬람을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시도였다. 그들은 서구과학의 우수성에 크게 감명받았으나,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았으며, 서구식 교육으로 새롭게 습득한 방법론을 통해 이슬람이 서구 기독교 
이데올로기에 대해 우위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했다. 그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들에게 무슬림으로서의 자긍심과 이슬람문화의 위대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 주었다. 셋째 단계는 반식민지 분위기가 고조되자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사회운동이 행동화하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행동철학은 서구의 
도전에 대한 대응은 그것을 회피하여 과거 전통이나 영광 속으로 숨어드는 것도, 
상대의 문물을 받아들여 소화하는 것도 아닌 강력하고도 공격적인 자기 확신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해 나간 부류가 흔히 원리주의자라 
불리는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정치적 영광과 원래의 순수성을 재건하는데 
확신에 찬 모습으로 논의를 단순화시켰다. 하지만, 그들은 서구의 발전 상황과 
문물의 우수성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낡은 이슬람의 과거에 연연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서구의 지적, 정치적 지배에 대항하는 이슬람의 수호자로 
자부하였다. 자마티 이슬라미의 창시자인 파키스탄의 마울라나 마우두디가 바로 이 
부류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20세기 이슬람 개혁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후대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 
이는 이란 출신의 자말루딘 아프가니(Jamal al-Din Afghani)였다. 그는 이슬람의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하면서 유럽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이론적 당위성을 
정립하는 동시에 범이슬람주의를 설파했다. 탁월한 정치선동가였던 아프가니는 
외교와 설득으로 각 국가 권력층을 계몽하고, 일반 서민과의 대중적 접촉을 통해 
오스만제국의 술탄을 정점으로 한 이슬람세계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의 정치이론을 
계승하여 더욱 높은 차원으로 발전시킨 이가 무함마드 압두이다. 압두는 
아프가니와는 달리 개별국가 중심의 애국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배척했다. 그는 
이슬람을 총체적으로 부흥시켜 유럽의 비평과 공격에 대항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는 이슬람 원리와 가치체계의 적절한 재해석을 시도했다. 
더욱이 그는 이슬람의 정통교리가 확립된 후 1000년만에 처음으로 이슬람 신학의 
영역에 이성을 끌어들였다. 이슬람과 과학을 자유롭게 접목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토대 위에 방법론을 달리하는 수많은 이슬람 개혁론자들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개혁에 앞장섰다. 

★1차 대전 이후 급진적 이슬람부흥운동의 대두 
1차 대전 이후 이슬람 부흥운동가들의 노력과 이상과는 반대로 이슬람세계의 
세속화는 급속히 진전되었다. 동시에 서구의 침탈과 정치-경제적인 예속 상태도 
갈수록 심화되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개혁론자들의 입지는 좁아졌고, 분노한 
급진주의가 점차 세력을 얻어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집트의 악명 높은 
'무슬림 형제단(Ikwhan al-Muslimin)'이 태동하였다. 1928년 이집트의 청년교사 
하산 알 반나는 이슬람식 생활양식에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적용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그 대안으로 그는 도덕과 윤리의 틀로 
이집트인을 이슬람 정신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무슬림형제단' 운동을 시작했다. 
'무슬림형제단' 운동의 핵심은 1930년에 작성된 하산 알 반나의 서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서한에서 그는 서구문명의 기만성을 규탄하고, 이슬람의 우월성을 온화한 
문체로 설득력 있게 논술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이슬람 국가와 서구열강과의 
외교관계 수립이나 이슬람권 내의 소수기독교도 및 유대교도에 대한 처우와 문화적 
자주성에 대해서 전통적인 관용을 보이고 있다. 그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특히 자연과학은 이슬람의 존귀함을 증명해 주는 필수적인 학문으로 권장했다. 
나아가 예배와 단식과 같은 전통적인 이슬람 관습을 당시 사회적 여건 아래서는 
군사력 강화보다 부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 운동은 일반적으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슬림들의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에 관심을 두면서 계몽적 성격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1947년 유엔이 
아랍인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분할하고, 이듬해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자 
'형제단'은 당시 폭발직전의 아랍대중들의 분노를 대변하면서, 극단적인 노선으로 
돌아섰다. 반제국주의와 이스라엘 타도를 외치며, 그들과 결탁한 기존 
정치세력들에 대한 극렬한 정치투쟁을 전개했다. 결국 1948년 말, '형제단'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그들의 지도자인 하산 알 반나 마저 
암살되었다. 그 후 '형제단'은 지하로 숨어들면서 극단주의의 상징으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급진적 원리주의자'라 부른다. br>


근대화 시기의 다양한 입장들
근대화를 주창했던 이슬람 부흥론자들은 한결같이 이슬람의 수호를 부르짖었지만 
그 방법론은 서로 달랐다. 종래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이 학문적인 접근을 통해 주로 
서구식 교육을 받은 식자층을 대상으로 서구화에 치중했던 반면, 원리주의자들은 
대중을 상대로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방법을 택했다. 교육기회의 확대, 대중매체의 
보급, 새로운 고용창출, 새로운 사회계층의 성장 등에 힘입어 20세기 중반까지는 
개방적 근대주의자들의 역할과 입지가 강화되었다. 

한편 세속적인 근대주의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원리주의 개혁사상의 대중성은 2차 
대전 이후 독립시기에 이르러 사회주의와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시도되었던 
제3세계 근대화의 모순이 가시화하면서 본격화된다. 그 시기는 이슬람의 정통성이 
회복되기는커녕, 세속적 민족주의자들이 소위 '타락한 서구주의'를 지향하면서 
승리를 거두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 이란의 레자 샤 
팔레비, 파키스탄의 아유브 칸, 이집트의 가말 압둘 낫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에 의해 추구되었던 세속화와 서구식 근대화 정책은 오히려 원리주의 
개혁론자들의 대응과 활동반경을 강화해 주었다. 

개혁성향의 이슬람 부흥주의자들은 이제 서구식 조직개념을 도입하고, 출판과 
매체의 첨단 메카니즘을 극대화하여 서구식 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과 젊은 
세대들에게 그들의 사상을 전파하고 홍보하였다. 그들의 전략은 서구제도의 모방이 
아니라 서구로부터의 독립과 최소한 대등한 관계를 이룩하기 위해 서구의 앞선 
기술을 활용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원했고, 권력의 쟁취를 
위해서는 급진주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근대화라는 미명아래 이슬람의 가치가 
상처받고, 무슬림들의 자존심이 유린당하는 시기에 이슬람 개혁론자들은 
조직적이고 분명한 태도로 이슬람의 정통성 부흥을 부르짖으며 대중속으로 파고 
들어간 것이다. 



♨ 다음에는…?
두번 연재로 끝날 줄 알았던 중동 이야기가 2번으로 끝나지 않고 3번째 연재까지 
끌고 갈 것 같다. 중동의 두 번째 연재분에서 다루기로 했던 세 가지 주제 중 
'원리주의' 이야기만 이번에 다루게 되었고, 나머지 두 가지(아랍 민족주의, 
이스라엘 문제)는 분량상 다음 회에 연재하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나누어 
쓴다고는 해도, 읽으면서 알 수 있을 테지만 이 세 가지 주제는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므로 이번 연재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하던 방식대로 책을 추천하면서 끝내지 못하게 된 것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 
없기 때문이다. 이슬람 부흥운동에 대해 쓰인 한글 책은 없다. 중동 역사나 이슬람 
사상을 소개하는 책 뒷편에 '오늘날의 이슬람'과 같은 식으로 짤막하게 
소개되거나, 전문연구자들이 각종 매체에 투고한 칼럼과 같이 단편적인 글만이 
있을 뿐이다. 전회에 추천했던 {중동사}(김정위, 대한교과서)의 '부록'에 실린 글 
정도가 일반인이 쉽게 구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영어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것은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므로 삼가도록 하겠다. 

다음 연재에는 이스라엘 문제가 나오고, 사담 후세인의 '정체'―그는 서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전쟁광은 아니다. '아랍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이라크의 바스 黨에 
대해 알아야 이라크와 후세인에 대해 좀 더 나은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이스라엘 문제는 2차대전 시기 강대국의 모순된 중동정책에서 
잉태된 것이므로, 요즘 말없이 인기있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그 맥락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이 문제의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 이 글은 이번 학기 이슬람 개론 수업을 맡으신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이희수 
교수님의 호의을 얻어, 이전에 발표된 교수님의 글들을 바탕으로 쓰여졌습니다. 
교수님의 호의에 감사드리며, 혹시 이희수 교수님의 글이 필요하신 분은 나우누리 
'손돈'으로 연락 주시면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