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21일 수요일 오후 04시 14분 25초 제 목(Title): 문성혁/ 에릭 홉스봄 사상탐구 http://spn.snu.ac.kr/theday/read_theday/8ho_9812/이론.html 에서 퍼왔습니다. 사상탐구 사상탐구 에릭 J. 홉스봄 : 이론의 원천으로서의 역사, 역사의 그릇으로서의 이론 문성혁 | 카피레프트 모임 ------------------------------------------------------------------------------- - 토니 블레어의 이론적 스승이라는 앤서니 기든스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던 지난 10월, '제 3의 길'의 원산지인 영국에서는 {맑시즘 투데이(Marxism Today)}의 특집호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토니 블레어와 '새 노동당'의 현 노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어쩌면 매우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는 한 기고문이 실렸다. 얼핏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어느 얼치기 맑스주의자의 객기라고 코웃음 칠 이도, 그 글의 필자가 누구인지 알고 난 뒤에는 입을 다물었을 법하다. 왜냐하면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현존하는 최고의 맑스주의 역사가' 에릭 J. 홉스봄이었기 때문이다.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여든 셋이 되는 이 노대가(老大家)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 앞에서, 정치적/학문적 입장과는 무관하게 누구라도, 어지간한 배짱이 없고는 '감히' 함부로 논평을 내지 못할 것이다. * * * 에릭 존 에른스트 홉스봄(Eric John Ernst Hobsbawm)은 1917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태계 아버지와 오스트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 어났다. 1931년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했다가, 히틀러 가 집권하면서 아버지의 고향인 영국으로 옮겨가 결국 거기에 정착했다. 캠브릿지의 킹즈 칼리지에서 역사를 전공하였으며, 2차 대전에 참전한 후, 1950 년에 {페비안주의와 페비안들, 1884-1914}로 박사 학위를 받음으로써 학업을 마쳤다. 1947년부터는 런 던 대학 버백 칼리지 사학과 강사로 부임하였고, 여 기서 1982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1946년부터 1956 년 사이에는 모리스 돕(Maurice Dobb), 크리스토퍼 힐(Christopher Hill), 로드니 힐튼(Rodney Hilton), 에드워드 톰슨(Edward P. Thompson) 등과 함께 '공산당 역사가 모임'을 구성하여 왕성한 역사 연구 활동을 벌임으로써 영국 맑스주의 역사학의 전성기 를 열었고, 1952년에는 이들과 공동으로 학술 잡지 {과거와 현재(Past & Present)}를 창간하였다. 1956 년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 및 헝가리 사태 이후 에는, 영국 공산당의 공식 노선에 대한 당내의 비판 적 토론을 위한 매개물로 에드워드 톰슨 등이 창간 했던 {더 리즈너(The Reasoner)}와, 그 후신인 {신 좌파평론(New Left Review)}에 간여하였고, 영국 공산당이 발행했던 {맑시즘 투데이}의 편집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현재 뉴욕 사회과학연구원 및 런 던 대학 버백 칼리지의 명예교수로 있으며, 영국과 미국 아카데미의 회원이기도 하다. 20세기 후반에 인문/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라면, 그 분야와 시대에 상관없이, 한 번쯤 그의 글 을 거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고 할만큼, 홉스봄은 여러 분야에서, 그것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격조 높은 저술들을 수많이 생산해 내었다. 그 중에서 도 특별히 역사학자로서 그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 는 분야로 우선 노동사를 꼽을 수 있다. 주로 노동 운동의 조직적/제도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던 기존의 노동사 연구와는 달리, 그는 '노동계급'사로 서의 노동사, '노동계급'의 '경험'을 총체적으로 조망 하는 역사로서의 노동사를 발전시키고자 했다. {노 동의 전환점(Labour's Turning Point, 1880-1990)} (1948), {캡틴 스윙(Captain Swing)}(1969, George Rude와 공저) 등의 연구 외에도 많은 수의 노동사 연구 논문을 썼는데, {노동하는 인간(Labouring Men)}, {노동의 세계(The Worlds of Labour)} 등 에 이들 중 상당수가 수록되어 있다. 그는 또한 산 업화 이전의 도시 및 농촌 노동대중의 경험에 대해 많은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특히 이 분야에서는 그 의 국제적인 시야를 확인할 수 있다. 농민 및 농경 사회에 관한 그의 연구는 영국에 국한되는 것이 아 니라 유럽 전체 및 북아프리카, 나아가 라틴아메리 카까지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초적 반란자 들(Primitive Rebels)}(1959), {비적들(Bandits)} (1969 ; [국역] 황의방 옮김, {의적의 사회사}, 한길 사, 1978) 등의 저작에서 그는, 자본주의적 세계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곧 그것에 적응해야 했던, 그 리고 아직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들의 열망을 표현 할 구체적인 언어를 찾지 못하고 있던 민중들의 삶 과 그들의 "사회적 비적 행위"를 파헤치고 있다. 이 연구들에서 그는 일관되게 "아래로부터의 역사(history from the bottom up)"를 지향했 다. 즉 그는 하층계급이 단순히 역사의 수동적 희생물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를 만들어 나간 능동적 참여자였음을 실증적인 연구들을 통하여 생생히 보여 주었으며, 그런 가운 데, '속류 맑스주의'에서 흔히 정태적이고 몰역사적 인 '통계적 층'인 것으로 잘못 간주되곤 하는 "계 급"이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계급 경험"을 매개로 역동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것이자, 동시에 "스스 로를 형성해 가는" 것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번도 정통 맑스주의의 토대-상부구조 모델을 포기한 적 이 없었던 그는, 바로 이러한 역사 연구의 바탕 위 에서, '경제결정론' 혹은 '기술결정론'을 비판하며 보 다 '완전한' 생산양식 개념을 제시하였다. 즉 "생산 관계의 총체, 즉 물질적 생산력의 특정한 수준에 맞 춰진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사회조직"이라는 "보다 온전한 토대"를 인식할 것을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 "역사는 인간들의 물질적 환경의 반영일 뿐만 아니 라, 또한 이념을 위한 인간들의 투쟁"임을 역설하였 다. 그가 E. P. 톰슨 등의 동료들과 함께 제시한 '계 급' 및 '계급 투쟁'에 대한 이 새로운 접근 방식에 의해, 20세기 후반의 맑스주의에서 사회적 갈등과 사회 변화의 동인을 설명하는 틀거리는 새로운 전 기를 맞게 되었다. * * * 그러나 국내 독자에게 그의 이러한 구체적인 역 사 연구 성과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국내에서 그의 명성은 대체로 그의 '세계사' 저작들에 기인한 바 크다. 하기는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 국의 시대}(세 권 모두 한길 그레이트 북스, 1998로 다시 나와 있다)로 이어지는 '장기 19세기 3부작'과, 드물게 보는 탁월한 동시대사인 {극단의 시대}(이 용우 옮김, 까치, 1997)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만도 하다. '3부작'에서 그는, '장기 19세기'가 근본적으로 부 르주아를 위해,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부르주아 의 시대였음을 보여주었다. 즉 {혁명의 시대}에서는 그 형성과정을, {자본의 시대}에서는 그 팽창 과정 을, {제국의 시대}에서는 그것이 파국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부르주아 사회의 두 가지 토대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두 토대를 마련해 준 두 사건, 즉 프랑스 혁명과 산 업혁명이라는 "이중 혁명(dual revolution)"은 그의 근대사 연구의 출발점이다. 그는, 1848년 무렵부터 시작되는 "자본의 시대"에 부르주아는 더 이상 혁 명적이기를 멈추고 기존 엘리트와 합세하여 자국의 노동계급뿐만 아니라 비(非) 유럽인들을 착취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한다. 즉 바야흐로 자본주의 승리의 도도한 행진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9 세기 말이 되면 부르주아 사회는 절정에 이르는 듯 이 보였다. 세계는 하나의 통합된 경제질서에 속해 있었고, 비록 전(全) 지구적인 불균형은 심화되어가 고 있었지만 세계경제는 놀랄만한 역동성을 보여주 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홉스봄은 여기서 "부르 주아 사회의 역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즉 부르주 아 사회가 발전해 가는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그것 의 몰락을 가져올 요소가 함께 생성되어 왔다는 것 이다. 이를테면, 산업화와 함께 심화될 수밖에 없었 던 계급 갈등과 노동운동, 사회주의의 도전, 그리고 대중 민주주의의 발전, 여성의 반란, 도덕의 위기 등이 그것이었다. 전쟁의 참화 위에서 시작된 '단기 20세기'를 다룬 {극단의 시대}에서 홉스봄은, 역사가이면서도 동시 에 동시대인으로서, 자신이 직접 부딪혀 살아야 했 던 한 시대를 담담하게, 그러나 대단히 '비(非) 학술 적'인 방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는 '단기 20세기' 를 크게 세 개의 국면으로 나눈다. 우선, 제 1차 세 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이 각각 그 시작과 끝 을 이루고 그 사이에 혁명과 대공황 그리고 파시즘 이 끼어있는 '파국의 시대(the Age of Catastrophe)' 가 있고, 그리고 1973년까지 전후 세계 경제가 급속 히 팽창하고 엄청난 규모와 깊이의 사회/문화혁명 이 있었던 '황금시대(the Golden Age)'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세계 자본주의의 장기파동이 침체기에 접어들며 무엇보다도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는 '위 기의 몇 십년(the Crisis Decades)'이 있다. 이렇게 구성되는 "극단의 시대"에 대해 그는, 삶의 모든 영 역에서 인간의 모든 활동이, 그리고 인간의 삶을 둘 러싼 모든 제반 요소들이 말 그대로 "극단"으로 치 달았던 시대였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이 시대가 막 바지로 향하면 향할수록, 이것의 특징을 표현하는 한 마디의 핵심어는 바로 "고삐 풀린 생산체제"였 다. 그가 보기에, 어쩌면 인류의 오랜 꿈, 즉 '평등, 자유, 사회정의, 노동에 대한 존경 등의 이상'을 실 현하려는 꿈이 현실화될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 겨주기도 했던 '현실 사회주의' 70년의 실험이 "잿 더미"로 돌아가고 만 것도 부분적으로는 바로 이와 같은 성장 이데올로기로 빠져들고 말았기 때문이었 다. * * * 홉스봄은 단지 한 사람의 학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실천적 좌파 지식인의 한 사 람이기도 하다. 그는 수시로 정세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들, 좌파 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자신의 제 언을 담은 글들을 발표해 왔다. 그리고 그런 글들에 서 우리는, '공산당 역사가 그룹'의 성원들 중에서도 비교적 '정통 맑스주의'에 충실한 편이었던 젊은 시 절 그의 정치적 입장이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 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또한 자신의 주장을 뒷 받침하는 훌륭한 역사학 저술들을 함께 제시함으로 써,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역사학자의 common sense'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역사학적 분석'의 결과임을 분명히 했다. 민족문제에 대해 그는 철저한 국제주의의 입장을 견지하는데,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1990 ; [국역] 강명세 옮김, 창작과 비평, 1994), {전통의 발명(The Invention of Tradition)}(1983, T. Langer 와 공편) 등에서 그는, '민족'과 '민족주의'는 대개 근대사의 역사적 산물로서 국가 형성 엘리트들에 의해 '위로부터' 고안되어 부과된 것이었으며, 종종 계급적 갈등을 중화시키며 사회를 통합하는 유용한 정치적 동원의 매개로 활용되어 오곤 했음을 보여 주었다. 유태계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젊은 시절 나 치의 인종주의로부터 직접 호된 경험을 당한 탓인 지, 그는 어떠한 종류의 인종주의나 민족주의에 대 해서도 대단히 비판적이다.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대해서도 그는 매우 단호한 입장을 취 한다. 그가 보기에, '정체성 정치'는 결국 전(全) 사 회적 이슈들을 포괄하지 못하는 부문주의의 한계에 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좌파'의 전술이 결코 될 수 없다. '좌파'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를 원하는 운동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 "계급 정치 (class politics)"를 추구해야 한다고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3부작'에서 분명히 보여주었듯이, 근대 이후 인류의 역사는 '부르주아'라는 하나의 "계급" 이 형성되어 오면서 - 그 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 던 것이 아니라 - 동시에 그 지배권을 심화 및 확 장해오는 과정이었고, 현재의 많은 문제들은 바로 이와 같은 구도를 해소함으로써야 비로소 어느 정 도 해결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현 재의 문제는 '정체성 정치'가 주장하는 바와 같은 그런 식으로는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 다. 그러나 가능한 해법들 중 하나였던 '현실 사회 주의'가 취했던 방식도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했다. {극단의 시대} 말미에서 홉스봄 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 패는 '생산력과 생산관계 의 모순으로부터 사회혁 명은 시작된다'는 칼 맑스의 고전적 명제를 우리에 게 확인시켜 주었을 뿐이라 이야기했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의 선언이 나온 지 150년이 흐른 지금에도 사회주의가 해결할 과제를 갖는 것이요, 사회주의가 여전히 과제로 성립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새로운 기획 에 대해서는 그도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다만, 이제 우리는 새로운 모색을 시도해야 한다고, 왜냐 하면 세계는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바 꾸지 않으면 우리 앞에는 암흑만이 있을 것이기 때 문에...라고만 이야기했다. 대신 그는, 하나의 중요한 원칙, 즉 "인민(the people)"이라는 원칙을 강조한 다. 전(前) 자본주의 시기 농촌 공동체에 대한 연구 로부터, 산업혁명기 노동 빈민의 생활 수준 논쟁을 거쳐, 새처리즘(Thatcherism) 하 장기실업자들의 삶 에 대한 천착에 이르기까지, 줄곧 "어떤 특별한 종 류의 사람이 아니라...그냥 평범한 사람들, 별로 흥 미롭지도 않고, '그저 머릿수나 채우는' 사람들..."의 삶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천명해 왔던 그는, 그 런 "사람들이 단순히 안락하게만이 아니라 함께 그 리고 위엄있게 사람다운 삶을 꾸려갈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조 만간 국가 및 국제 차원의 체계적이고 계획적인 조 치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 예견했다. 최근 발표한 글에서 그는, 동아시아의 경제 위기 와 러시아의 자유시장 도입 실패라는 현재의 두 사 건은 바로 이와 같은 조치들이 긴급히 필요함을 다 시금 확인시켜 주었다고 언급했다. 그가 보기에, '자 유방임, 즉 전 지구적 자유시장 경제의 우월성'을 '가정(假定)'하는 '신자유주의'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한 가정'을 '가정'으로 삼았기 때문에 '실현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고삐 풀린 생산체제"를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어처구니없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근본적으로는 "이미 끝장났 음이 판명난 신자유주의"의 가정을 역시 바탕에 깔 고 있는 토니 블레어 및 '새 노동당'의 '제 3의 길' 도 결국은 실패하고 말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는 '당위'의 문제이자 동시에 '역사적 사실'의 문제이기 도 하다. * * * 종종 이론가들, 사회과학자들은 '실재'와 '이념형' 을 구분하지 못하는 수가 있다. 역사학이 여전히 중 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역사적 실재'에 대한 탐 구를 통해 바로 그 혼동을 교정해 줄 수 있기 때문 이다. 이러한 작업의 바탕 위에서 이론은 끊임없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으며, 다시금 '실재'를 위해 충 실히 복무할 수 있다. 나아가, 시대를 아우르는 역 사학자의 직관은 이론과 실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 에 대한 훌륭한 지침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에릭 홉스봄은 일평생의 역사 연구를 통해 자칫 (맑스주의적인 의미에서의) 이데올로기로 흐를 수 도 있었을 20세기의 맑스주의에 무게를 실어 주었 다. 그의 연구는 시종일관 맑스주의의 원리들을 뒷 받침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것들을 끊임없이 혁 신하는 데에 바탕이 되는 것이었다. 이는 사료를 다 루는 그의 탁월한 솜씨와 시대를 종횡으로 누비는 천재적인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에게서 직 접 수학한 어느 국내 역사학자의 말마따나, "그가 역사학을 전공한 것은 역사학으로서는 행운이었다." 마찬가지로 그가 시온주의자가 되지 않고 맑스주의 자가 된 것은 시온주의로서는 매우 안타까워했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한편 그는 한 사람의 동시대인 으로서, 그리고 자신이 노동 대중의 편에 서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현재'라는 또 하나의 역사적 실재에 끊임없이 개입하고자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 지한 '유기적 지식인'의 삶에 대한 하나의 모범을 보여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학 연구들은 맑스주의 역사학 의 권위에 상당한 정도로 도전하고 있다. '부르주아 혁명'관을 부정하는 70년대 이후 수정주의적 근대 혁명사 연구들은 오늘날 어느새 '표준적' 역사 해석 의 자리를 차지해 가고 있으며, 역사학에서의 '언어 적 전환'은 '계급' 개념에 바탕하고 있는 맑스주의 역사 해석의 근본을 심각하게 흔들고 있음이 사실 이다. 물론 "장기 19세기"를 '부르주아 승리의 시대' 로, 그리고 "계급 투쟁"을 사회 변화의 주요 동인으 로 보는 홉스봄의 역사 해석이 여전히 우리 시대 역사 인식의 중요한 한 줄기를 형성하고 있음도 역 시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언제까지 지금과 같은 권위를 누릴 수 있을지를 전망하기란 쉽지 않으며, 나아가, 굽힐 줄 모르는 그의 완강한 '구좌파'적 태도를 "새로운 천년기"의 좌파들이 어 느 정도로 계승할 지도 불투명하기만 하다. 모든 이론이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시대 의 산물이다. 결국에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시 대가 요구했던 '홉스봄의 역사'를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가 '새로운 시대'와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과학이 추구하 는 바는 동일할 것이다. "Science for the People!"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