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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8일 일요일 오후 02시 39분 36초
제 목(Title): 퍼온글/이건수 중국의 강력한 국가에 대한 


원우논집에서 퍼왔습니다.

연구논문 2

 


이건수
석사과정 98학번

[논평] 장경섭 
[논평] 한남운 
 중국의 `강력한 국가'에 대한 연구

-- 유교적 전통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1. 서론

1978년 이후 중국은 사회주의 체제하의 그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의 대담한 폭과 
깊이로, 강력한 경제 개혁을 추진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허용된 자유화와 
개방화는, 모택동 시대의 중국과 차별되는, `상대적으로' 보다 다원화된 사회의 
성립을 가져왔다. 인민공사의 해체는 농민들을 다양한 종류의 노동자로 
전환시켰으며, 소유제 구조의 변혁은 세분화된 형태의 `신경제유형'을 출현시켰다. 
또한 변호사, 회계사, 주식투자가 같은 새로운 전문직도 등장하였는데, 이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의 기생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한편 이러한 경제 개혁과 뒤이어 터져나온 천안문 사건은, 중국의 정치 민주화에 
대한 몇몇 서방 학자들의 낙관적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중국 사회는 국가주의도 
유교의 부흥도 아닌, 일종의 연방주의 형태의 지방분권화가 활성화되어 가고 
있으며, 따라서 기존의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로는 점차 증대되는 국민들의 불만과 
요구를 수용하지 못하고 사회의 안정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형태는 
다를지라도 선택이 아닌 필요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될 것이라는 
전망이다.(Goldman, 1995, 263; Friedman, 1989, 251-64)

하지만 이러한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중국의 국가권력은 시장원리에 의해 
대체되기보다는 오히려 새롭게 강화되고 있으며, 신권위주의 논쟁, 문화열 논쟁 
등과 함께 유교의 영향력 또한 되살아나는 듯한 분위기다.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에 대해선 몇가지 주목할만한 설명이 있다. 특히 Walder의 
고객주의적 국가-사회 관계론, 이와 비슷한 맥락의 국가(간부)-사회(사영기업가) 
공생론 등은 개혁기 중국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Walder, 1986, 
162-89; Wank, 55-71) 중국의 경우 국가에 대비되는 형태로의 시민사회가 형성되기 
보다는, 공공자원의 분배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와 기업인이 
결탁함으로써, 양자 모두 이득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와 같은 구조적 설명틀은 관계내의 안정성은 비교적 잘 설명해주는 반면, 
그러한 `선택된 관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무마와 체제통합과정에 대해선 별로 
시사해주는 바가 없다. 또한 경제적 변수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와 
결부되어 나타나고 있는 이데올로기 논쟁과 그것의 역할에 대해선 거의 침묵한다. 
사실 중국의 강력한 국가, 강력한 정치, 강력한 권위, 강력한 이데올로기 등은 
개혁 이후의 중국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전통 중국, 모택동기의 중국, 그리고 
개혁 이후 오늘날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특징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물론 동일 추세의 지속이 항상 같은 원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단정지울 순 
없다. 하지만 이러한 연속성을 그저 쉽게 간과하는 것 보다는, 그것의 기저에 혹시 
존재할지 모르는 중국 사회에 특징적인 사회구조적 속성을 탐구해보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본 논문에서는 강력한 국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유교 
사회가 성립, 발전하게 된 전통중국의 역사적, 사회구조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조건이 과연 현대중국의 그것에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있는지에 
대해, 모택동기의 중국과 개혁이후의 중국을 나눠, 비교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2. 전통 중국의 경우

1) 전통 중국의 사회구조

전통 중국의 사회구조에 대한 기존의 지배적 시각은 이른바 동양적 
전제주의론이다. 하여 이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갈 경우, 중국은 군주 한 사람만이 
자유를 누리고 인민은 모두가 군주에 예속되어 있는 사회로 파악되게 
된다.(西嶋定生, 1994: 26-8)

그런데 이러한 내용의 동양적 전제주의론은 최소한 춘추전국 이후의 중국사회엔 
적용되기 힘들다. 왜냐하면 전제적 군주지배의 조건으로 상정되는 사적소유의 
결여와 강고한 공동체의 존재, 대규모 치수관계 사업의 국가차원 시행 등은 중국의 
실제 사회상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토지의 공동체적 소유와 공동체적 생산은 
춘추전국시대에 벌써 무너지기 시작하여 진대에 이르면 토지사유제가 확립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5년이 지난 후 "백성은 스스로 관부에 가서 토지를 
등기하라" 고 명령을 내린 것은 진대에 이미 토지사유제가 전국적인 범위로 확립된 
지표다.(박원호, 1992: 160) 

한편 진의 통일제국 이후 중국의 사회경제적 단위는 목가적 공동체가 아닌 
자영가족이었다. 중국에서 개개의 가족은 생산단위일 뿐만 아니라 과세단위이기도 
했으며 공과금은 항상 가족의 수에 의해 책정되었다. 또한 최근의 연구는 중국의 
치수사업이 중앙정부 차원이 아닌 자영농가 내지 지방민 단위의 사업이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다. 따라서 대규모 치수사업의 필요성에 의한 전제군주의 지배라는 
가설은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송영배, 1992: 257, 139-156)

물론 주대의 혈통귀족이 무너진 이래 중국의 권력구조가 황제를 중심으로 
중앙집권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집권화된 권력구조하에서 황제는 모든 권력, 
명예, 사회적 특권의 원천으로 여겨졌으며 `법률상' 전제군주로 행세하였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황제는 결코 유일한 지배자는 아니었다. 많은 경우 황제는 
`실질적' 지배계급의 신성한 상징에 불과했으며 따라서 그는 그가 대변하는 
사람들의 이해에 부합되는 동안에만 안전했다.(송영배, 1992: 128)

농경이 중심이었던 중국에서 황제가 대표한 실질적 지배계급은 다름아닌 
지주계층이었다. 중국에서 토지소유와 관료제간의 관계는 불가분의 역동적 관계에 
있었으며, 중앙집권적 관료제란 궁극적으로 지주들의 정치적 수단이었다. 
하류계층을 포함한 다양한 계층으로부터 부상한 지주들은 자신의 이익을 확장하기 
위해 정치권력과 결탁하는 한편, 관직을 매수함으로써 관료집단에 합류하였다. 
반면 높은 지위의 관료에 오른다는 것은 많은 부를 가져다 주었다. 황제가 주는 
봉록과 상급을 근거로 하여 대관료들은 상당한 재산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결국 
황제는 단지 봉건지주계급의 정치적 대표인물이 조직한 통치집단을 통해, 각종의 
복잡한 형식을 이용하여 추대한 최고의 정치적 대표인물이었을 뿐이다.(박원호, 
1994: 184; 송영배, 1992: 173-85) 

중국의 지배층이 지주-관료계급이었다면 피지배층은 당연히 그들의 대극에 위치한 
농민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계급구조는 대체적으로 지주 대 농민의 관계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구조를 가진 중국사회는 에버하르트의 지적대로 귀족신분이 
존재하지 않는 이론상으로 열린 사회였다. 상층 지배계급인 지주-관료층은 권력의 
기반을 혈통적 지위가 아닌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에 둔 집단이기에, 
이론상으론 누구나 출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漢)왕조 초기나 
송대(宋代) 이후의 중국에선 사회적 상승의 사례는 상당히 많았다.(민두기, 1994: 
340) 바로 이 점이 춘추전국 이후 중국의 계급구조가 주대(周代)중국이나 
고대서양의 그것과 현격하게 구별되는 측면이다.

 

2) 강력한 국가의 보완물 - 유교

그렇다면 이렇듯 일견 불안정한 사회구조를 지닌 중국사회가 오히려 `강력하고도 
안정적인 봉건국가' 로 비춰질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무엇이 중국의 
취약한 지배구조를 굳건한 그것으로 치장해 주었을까? 혹 중국의 강력한 정치, 
강력한 국가(왕권), 강력한 이데올로기 등은 견고한 지배구조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취약한 지배구조의 보완물이 아니었을까? 

이러한 주장에는 몇가지 근거가 있다. 우선 중국사회의 강력한 왕권과 정치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유교는, 주나라의 안정적 종법봉건제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의 혼란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등장했다. 둘째 중국 역사상 유교의 
영향력이 다소 주줌했던 때는 위진남북조-수 당에 이르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 
당시의 계급구조는 폐쇄적이고 안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중국의 일반적 
사회구조와 차별된다.(1) 셋째 계급구조와 경제여건 등에서 거의 동일한 상황하에 
있던 진(秦)과 한(漢)을 비교할 때, 법가를 채택한 진의 지배층이 불과 16년만에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 반면, 유가를 통치이데올로기로 삼은 한은 무려 400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했다.

따라서 "유교가 안정과 평화시대의 통치철학이었다" 는 통념은 옳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통중국의 정치체제는 군주에 의한 일원적 집권구조로 정치적 
다원주의가 불가능했다" 는 식의 주장도 그다지 명쾌하지 못하다. 사회구조의 
측면에 국한시켜 볼 때, 중국의 지배구조는 오히려 대체로 불안정하고 
유동적이었으며 그리스의 귀족에 해당되는 강력한 지배계급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것이 바로 전통중국에서 강력한 통치이데올로기가 절실하게 
요구되고 발전한 이유다. 즉 유교는 불안정한 사회구조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충(忠), 효(孝), 제(弟), 예(禮) 등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한편으론 
지배계급내 단합을 도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지배계급의 반항심리를 
억제시킴으로써(2) , 불안정한 계급구조를 안정화시키는 기능을 수행했다.

결론적으로 전통 중국의 강력한 국가(왕권)는 견고한 지배구조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취약한 지배층간 연대의 결과였으며, 유교는 그러한 지배층의 결속과 
피지배층의 배제를 효과적으로 도움으로써 `강력한 국가'의 일급 보조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3. 모택동기의 중국

모택동은 레닌을 따라, 모든 결정이 정치적 입장, 관점,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며 또한 이는 당연히 당 간부들의 결정에 의해야 한다는, 
政治掛帥(politics takes command)를 통치술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인민의 
모든 말과 행동은 정치적 태도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평가되었는데 이는 
정치제일주의에 따라 紅(political loyalty)을 강조한 결과다. 모택동의 궁극적 
목적은 정치구호와 군중노선 등을 통해 보다 확실히 인민들의 사상을 개조 
통제하여, 단기간내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도윤수, 38-42)

그렇다면 이와 같은 공산치하의 `정치과잉'을 전통의 유산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5.4 운동 이전의 개혁가들은 비록 서방화(근대화)를 추구하긴 했어도 결코 전통의 
완전한 폐기를 주장하진 않았다. 하지만 거듭되는 실패 이후 5.4 운동기의 개혁 
혁명가들은 전통의 일소를 꿈꾸게 되는데, 공산혁명가들 또한 당시의 이러한 
태도를 이어받아 유교에 대한 매우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였다.(Lau, 218)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모택통기의 유교에 대한 태도는 크게 두 시기로 양분된다. 
우선 1949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맑시즘과 양립할 수 없는 요소는 
제거하고, 공산사회 건설에 유리한 요소는 받아들이는, `비판적 계승'의 정책이 
우세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유교의 완전한 폐기를 주장하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다음으로 1965-76 까지의 문혁기간 동안에는 유가적 가르침은 전면적으로 
부정되었다.(Chang, 235)

유교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태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 모택동기의 정치우선주의가 
과거 전통 중국의 유산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유교는 
불평등관계를 자연화함으로써 사회내 갈등요인과 불안정성을 제거하려 한 반면, 
마오주의는 보다 평등한 계급관계를 보다 빨리 쟁취해내는 방법의 일환으로 정치의 
힘을 차용했다. 모택동은 프롤레타리아 독재하에서는 정치가 경제에 미치는 작용이 
단순히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촉진시키는 수준을 넘어서 자본주의적 요소가 싹트지 
않는데에까지 미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무산계급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할 수 있기에, 정치는 모든 사업의 생명선이며, 모든 업무는 정치에 
양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의'에 대한 엄격한 제제에 집착했다는 점에서 마오주의는 유가보다는 오히려 
법가에 가까웠다. 실제로 모택동은 1958년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유가를 배척하고 법가를 채택했던 진시황을 "과거보다 현재를 중요시했던 사람" 
이라며 극찬했다. 즉 유교가 기존의 지배질서를 공고화하기 위한 강자들의 
결탁체였던 반면, 마오주의는 강자들의 효과적 제거를 목표로 전개된 `전제적 
법치'였던 셈이다.

그러나 실제 내용상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전통 유교와 마오주의간에는 
형식적 유사점이 존재한다. 모택동기의 정치구호, 군중노선 등의 전개방식에서 알 
수 있듯, 이 시기의 문화 역시 상명하달식으로 주입되었다. 즉 경제사회적 평등의 
이면에는 정치적 평등 내지 자발성이 아닌, 정치권력의 집중과 일반인민의 
수동성이 있었다.

문화혁명의 실패는 중국 사회의 이러한 모순을 반영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문혁은 중국전통문화를 소멸시키기 위한 반전통유교문화운동의 
정점이었으며, 동시에 대다수 중국인들이 지니고 있는 유가문화적 전통정치문화를 
새로운 사회주의 정치문화로 전환시키고자한 정치사회화의 과정이었다. 또한 
그것은 국가 집체 및 개인 이해의 사이, 민주주의와 중앙집중주의 사이, 지도부와 
피지도부 사이, 관료주의적 간부와 인민 사이 등에 나타나는 인민정부와 인민 
사이의 모순 타파를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반봉건적이었다.(장경섭, 1996, 308-9)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모택동과 급진좌파 지도부에 의해 발생되고 문화적 
전제주의에 의해 의도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는 다분히 전통적이고 
유교적이었다.(고영근, 1993, 156) 그리고 지향과 과정의 이러한 괴리속에서 
문혁은 결국 실패하였다.

 

4. 개혁기의 중국

1) 개혁이후의 사회 변모

경제개혁 이후 다양한 소유제가 인정되게 됨에 따라, 중국 사회내엔 개체호, 
사영기업 등이 등장했고, 이는 다시 상당한 정도의 빈부격차가 발생한 원인이 
되었다. 중국국가통계국의 조사에 따르면, 상위 소득자 20%의 하위소득자 20%에 
대한 비율은 1984년의 경우 2.8:1이었으나, 1987년에는 3.4:1로 높아졌다. 또한 
상위 10%의 하위 10%에 대한 비율이 1991년에는 4.2:1이었으나, 1992년에는 
4.8:1로 그 격차가 점차 벌어지고 있다. 고수익자들은 주로 전업호, 개체호들로 
기업경영계약, 기술자, 브로커, 시비스 부문 종사자, 외국인 기업 노동자 등이다. 
이들은 연수입이 10,000원에서 심지어는 100만원에 이르기도 한다. 연수입이 
10,000원이 넘는 사람은 5백만여명(전체의 2%)이고, 이 중 약 5,000여명은 
100만원, 200여명은 1000만원이 넘는데, 이들을 가리켜 "새로운 부르주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Chang, 32-5, 정민용, 35-6에서 재인용)

그리하여 개혁기 중국사회내엔 기존의 국가(간부)-인민간의 주종관계외에 새롭게 
경제적 지배-종속 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또한 이에 따라 개인적 부의 획득과 
축적을 위해 중국 인민들은 그들이 지닌 재능과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으며, 집단적 
차원에서도, 중앙과 지방 사이, 내륙과 해안 사이, 노동자와 농민 사이, 남성과 
여성 사이, 간부와 인민 사이에 한정된 경제적 기회와 재화를 확보하기 위한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장경섭, 310)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기존의 정치적 지배계급과 개혁기의 선부계급 사이에, 
뚜렷한 연속성이 관찰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개혁기의 극심한 
계급분화와 그 진행경로의 불확정성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힘은 전혀 축소되지 않고 있다. 즉 개혁기의 
국가권력은 사업허가, 정보제공, 규제 등의 방식으로 이행기의 혼돈을 축소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다. 또한 사적인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이같은 한정된 기회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당 국가 간부들은 그들의 정치적 권력을 경제적 부로 
변환시키고 있다.

국가-사영기업간의 밀접한 결탁관계를 주목할 때, 양자의 관계는 갈등적이라기 
보다는 공생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 하다. 따라서 개혁기 중국의 
갈등은 국가-시민사회간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선택된 자'와 `배제된 자' 사이의 
갈등이라고 볼 수 있으며, 국가에 대해 표출되고 있는 기층 인민들의 좌절과 저항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개혁기 중국의 사회상은 전통 중국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첫째 계급간 불평등과 계급구조의 불안정성이 
관찰된다. 둘째 경제적 불평등은 더 이상 악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등장하고 있다. 셋째 구성원간의 갈등과 불평등을 
조절하고 무마하는 데 있어, 국가권력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국가는 시민사회의 형성과 사회의 보다 급격한 다원화를 가로막는 
하나의 요인이 되고 있다. 넷째 전통사회의 왕-관료-지주 관계처럼, 개혁기의 
정치권력-경제권력간에는 강한 결탁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2) 이데올로기의 변모(비판계승론, 신유가, 신권위주의)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 모택동기의 유교에 대한 태도는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특히 
문화혁명 시기에는 67년 批孔과 批劉少奇, 71년 批孔과 批周恩來, 73년 批孔과 
批林彪 등 정치적 운동과 결합되어 유학을 논하는 것이 금기시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경제개혁과 더불어 78년 이후 유학과 관련된 연구가 점차 출현하기 
시작했고, 80년대 중반 이후엔 중국의 출로문제와 관련된 문화열이 조성되면서 
유교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초기의 논의에서는 현대화과정에서의 유교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가치판단이 주류를 이뤘으나, 논의가 발전하면서 점차 
상대적으로 긍정적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전병곤, 66)

그리고 그 결과 현대 중국내엔 신유가의 유학부흥론, 비판계승론, 서체중용론, 
철저재건론(전반서화론) 등의 유파들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이 중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비판계승론이다. 이 논의의 핵심은 중국의 문화이건 서구의 문화이건 
전통문화중에 유용한 부분은 계승하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버림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비판계승론은 중체서용이냐 아니면 
서체중용이냐는 고전 논쟁을 마감하고, `생산력의 발전에 유리한가, 사회주의의 
방향성을 담보하고 있는가, 민족단결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3가지 전제하에서 
중국의 신형문화를 창조하고자 한다.(전병곤, 77)

당정의 입장도 비판계승론에 가깝다. 당 지도부는 전통문화의 완전한 부정을 
주장하는 철저재건론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중체서용론이나 현대신유가의 
문화본위론 속에서 이론적 정당성을 찾고 있다.(한국철학, 19-20)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자'는 비판계승론의 주장 자체에서 어떤 
치명적인 하자를 찾기는 어렵다. 또한 그들은 대외적으로 봉건사회를 옹호하는 
사상체계로서의 유교는 부정한다고 말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과연 그들이 말하는 
`좋은 것', `봉건사회' 등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명확치 않다. 다만 그들이 
`경제발전에의 기여 여부' 를 좋고 나쁨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봉건사회를 거부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공허해진다. 특히 `치국평천하와 仁政의 사상은 정치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한다', `충효, 예절의 미덕은 갈등을 해소한다' 는 등의 이유로 경제발전에 
있어서의 유교의 장점을 나열하는 그들을 주목할 때, 비판계승론자들이 과연 
반봉건적인지 의심스럽다.

80년대 후반에 제기되었던 신권위주의론 또한 유교적 전통을 경제발전을 위해 
현실에 맞게 재창조하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신권위주의 논의는 천안문 
사건을 계기로 중국 내부에서는 더 이상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권력구도는 여전히 `유연한 경제와 강력한 정치 리더쉽'이라는 
신권위주의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기에, 이는 여전히 개혁개방시대의 중국정치를 
분석하는 유용한 틀로 간주될 수 있다.(오명호, 14)

신권위주의는 권력지도부의 강력한 리더쉽을 통해 경제발전을 가속화하여 실질적인 
자유와 민주를 달성하자는 논의라는 점에서 봉건적 구권위주의와 구별된다. 또한 
신권위주의는 개혁파에 의해 제시되었으며, 논의에 참여하고 있는 학자군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고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그런데 이들은 "정치안정 없이 경제성장 없다"는 목표를 전제하기 때문에, 
정치다원화를 추구하는 서구적 개념의 민주화와는 달리, 사회주의적 참여를 
유도함으로써 정치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며, 당 헤게모니의 관철과 이의 강화를 
목표로 한다.(오명호, 26)

이러한 점 때문에 신권의주의는 급진민주론자 진영으로부터 전제주의의 재연이며 
관료계층, 내지 기득권세력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박병석, 
46-7) 그들의 `궁극적 목표' 와 상관없이 그들의 주장과 방법이 과거 전통 유교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고, 위로부터 건립된 신권위가 다시 전통적 전제권위로 
회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급진민주론자들의 비판은 상당히 일리 있어 
보인다. 

 

5. 중국의 미래 - 유교 자본주의? 

지금까지의 논의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중국 사회에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강력한 
국가, 강력한 이데올로기라는 특징은 연속성의 측면에서도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개혁기 중국의 경우 그러한 연속성은 보다 뚜렷하게 
관찰된다. 그 사회 계급적 구조가 전통 중국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 유교의 
핵심 이데올로기에 대한 국가 차원에서의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현실 등은 그 
중요한 논거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결론에는 한계가 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경우 일반적으로 국가의 힘은 강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개혁기 중국 사회의 `강력한 국가' 나 `시민사회의 미발달'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획경제를 점차 
포기하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새롭게 강화되는 국가권력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면 후자의 시각이 갖고 있는 한계 또한 명확해진다. 

중국 당정은 개혁 이후에도 형식적으로는 사회주의를 강조, 고수하고 있다. 간부들 
자신이 경제적 기득권자가 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표면적 의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들의 `충심'을 믿는다고 해도, 과연 그러한 
주장이 관철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특히 경제적 불평등을 긍정하고 오히려 
부추기는 현실, 거래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경제로의 진입기회를 권위적으로 
제한하는 현실 등을 비추어 볼 때, `선부' 가 사회 전체로 골고루 확산되기보다는, 
간부-선부계급의 기득권층과 거기서 배제된 일반 인민간의 사회경제적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호요방의 전 비서였던 阮錫은 미래의 중국이 북유럽의 제도에 근접한 민주적 
반사회주의 반자본주의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하지만 유교 변수를 
고려하는 경우, 그러한 전망은 다소 이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유교는 항상 기층인민에로의 권력하방을 억제시켜왔고, 현재의 중국 또한 
그러한 전철을 되밟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오히려 국가의 주도하에 정치, 경제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는, 유교 자본주의에로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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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nk, David L., "Private Business, Bureaucracy, and political Alliance in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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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일본의 역사학자 미야자키는 그 차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당(唐)까지의 장원의 특색은 한 곳에 집중된 광대한 지면(地面), 지주와 
전호사이의 주종관계, 전호 상호간의 동일 취락으로서의 정신적 유대 등이다. 
하지만 송대에 들어서면 인민의 토지소유권이 확립되고, 토지구획이 세분화되어, 
한 곳에 집중된 대규모의 장원이 성립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장전(蔣田)이란 단순한 소작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기저기 산재한 영세한 토지의 
집합에 개념적으로 부여한 명칭에 불과하다. 따라서 지주-전호관계는 전대의 
봉건적 예속관계에서 자본주의적 고용관계로 변모되었다. 당대까지의 토지소유의 
목적이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고 자손을 위해 강고한 지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송 이후는 이익의 회수율이 좋은 투자의 대상으로서 토지소유가 
행하여져 거기서 나오는 소작료가 주요 관심사로 되었다." (민두기, 1994: 189)

2) 이를테면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사람이 효제하면서 
웃사람에 저항하는 것을 즐겨할 자는 없다. 웃사람에게 저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난을 일으키는 자는 아직 없었다... 효와 제는 인의 근본이다" (논어, 
學而)

 

             

논평

장경섭
서울대 교수, 사회학

국가-사회 관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동 서양이나 전근대 근대 시대를 막론하고 
핵심적인 정치적, 학문(사상)적 중요성을 가졌었다. 최근 중국을 위시한 사회주의 
국가 등의 체제개혁에 따라 전제적 관료주의 체제로부터 시민(인민)들의 자율적인 
경제, 사회, 정치 활동 공간이 분리되어 나옴으로써 시민사회의 (재)등장 가능성이 
시사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국가가 정치적으로 연성화되고 있다는 관찰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중국 등의 사례를 보면, 비록 시민들이 사경제 활동을 중심으로 사회경제적 
자율성을 넓혀 가고 있지만 동시에 공산당의 정치적 통제력도 복잡화, 정교화되고 
있다. 특히 급속한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가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신권위주의론이 공식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강력한 국가의 위상을 
기능적으로뿐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정당화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는데, 이는 
탈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산당의 독재를 유지하려는 딜렘마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딜렘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권위주의적 정치문화를 정당화시키는 
유교 전통을 재활용하려는 유혹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이건수 군의 글은 최근 중국의 이같은 정치사회적 상황을 유구한 역사적 맥락에서 
재검토해보려는 의미있는 시도로 평가된다. 다만 다음 몇가지 측면에서 보완이 
요구된다.

첫째, 유교와 국가권력의 관계를 논하면서, 막상 유교의 어떤 요소가 강력한 
국가를 가능케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빠져있다. 

둘째, 전통 중국을 분석하면서 왕권과 지주-관료 계급 사이의 권력 분점을 
제시하면서 이를 유교의 정치적 기능에 연결시켰는데, 공산정권 성립 이후의 
중국에 대해서는 국가권력을 모택동이나 등소평의 1인 군주에 집중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비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최고 지도자와 일반 당 정 간부 사이의 관계, 
중앙-지방의 관계등도 국가권력의 구조와 속성을 이해하는데 핵심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 

셋째, 개혁기의 상황 분석이 다양한 현실들을 어지럽게 나열하는데 그침으로써 
유교의 정치적 기능에 대한 초점이 흐려지고 있다. 특히 빈부격차의 증가 문제가 
국가-사회 관계 및 유교적 권위주의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좀더 체계적으로 
논하여야 할 것이다. 

이상의 문제점들을 보완하면, 이 글은 중국의 작금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나름대로의 기여 가치가 있는 논문이 될 것이다. 

 

             

논평

한남운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이글은 개혁기 중국의 `강력한 국가'에 관한 논의의 기반이 주로 경제적 
하부구조에 집중되어 있고 통치 이데올로기와 같은 상부구조에 연관된 논의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점은 이론적인 면에서나 혹은 최근 중국의 
정치권력층에서 소위 `정신문명건설'이라는 상부구조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한 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중국의 전통적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유교의 부활을 이것과 연관시키고 
있다. 개혁기 시장의 활성화와 일견 모순된 것처럼 보이는 중국의 `강력한 국가'를 
이끄는 이데올로기로서 유교의 부활의 가능성을 전통적 국가와의 역사적 맥락의 
유사성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통치이데올기로 부활하고 있다는 단서를 
개혁기에 등장한 유교에 대한 재평가에서 찾고 있다. 더 나아가서 중국이 
유교자본주의 길을 걸어갈 것을 전망하고 있다. 

우선 필자는 저자의 문제의식에 동의하면서도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특색과 발전을 
설명하는 도구로서 유교자본주의론이 가지는 실험성에 비추어보아 이를 탈사회주의 
국가에 적용한다는 면에서 `실험적 실험성'을 지닌 논의라고 이글을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유사한 역사적 맥락, 유교에 대한 재평가, 최근에는 주택까지 
상품화해버린 중국의 자본주의적 경도, 그리고 그 결론으로서 발전 및 
통치이데올로기로서 유교의 채택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매개변수 혹은 중간변수들이 존재하는 것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한편 유교적 전통의 중요성은 `유교'보다는 `전통'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중국의 강력한 리더쉽과 중앙집권적 당/관료체제의 존재에 의해 
실현되는 `강력한 국가'는 유교 이데올로기라기 보다는 유교이데올로기적 전통에 
의해 밑바침된다. 예를 들면 유교식 가부장적 리더쉽모델, 조화와 순응의 문화 
등이 강력한 국가를 가능케하는 정치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강력한 리더쉽의 통치이데올로기로서 사용되었던 마오저동의 
혁명론이나 덩샤오핑의 개혁주의, 그리고 최근에 장저민이 내세우고 있는 정신문명 
건설의 `내용속'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생산한 이데올로기가 쉽게 소비되도록 하는 
그 `기제속'에 바로 유교적 `전통'이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전통국가와의 계급적 배치의 유사성과 유교라는 `담론'의 
등장에서 연속성을 발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교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의 
연속성을 규명하는 것이 사실 유교적 전통과 개혁기의 강력한 국가를 이해하는 데 
더 필요한 논의가 될 것같다. 

유교적 전통을 가진 국가에서 유교이데올로기가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공식적인 담론에 등장하는 대표적 케이스는 싱가폴이라고 할 수 있다. 강력한 
가부장적 리더쉽인 리콴유는 화교중심의 사회속에서 자신의 리더쉽을 공고히 
하는데 그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기능적 등가물이 아직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공식적인 정치적 
담론의 차원에서는 유교이데올로기가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마지막으로 이글이 훌륭한 문제의식과 주제설정을 지니고 있다는 필자의 인상을 
언급하고 싶다. 필자는 이러한 점들을 배울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면서 이글에서 
다룬 주제와 연관된 저자의 논의가 더욱 발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목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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