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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8일 일요일 오전 03시 36분 59초
제 목(Title): 김영호/토론 아시아경제위기 이후의 세계자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의 세계자본주의 재검토

 

김영호

 

 

 

  [1] 냉전 후 자본주의는 강력한 도전자 사회주의가 패퇴함으로써 역사적 승리를 
구가하는 듯했다. 때마침 출간된 푸쿠야마(F. Fukuyama)의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이 세계적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산물이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 논리는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으로 
역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러스틴(I. Wallerstein)은 경쟁자가 없으면 자신도 
저항력을 잃고 쇠퇴해버린다는 논리 위에서 자본주의는 이제 50년도 못 가서 
쇠퇴해버릴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월러스틴의 자본주의 쇠퇴론은 바로 
자본주의 승리론의 논리적 귀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냉전 후 자본주의의 내부분열로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의 경쟁이 
격화되었다. 마침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하고 그것이 금융위기를 거쳐 
경제위기로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일본 경제위기와 연계되고 다시 러시아와 
중남미를 거쳐 미국경제를 위협하면서 세계경제 전체에 공황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자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세계자본주의의 위기가 거론되고 
세계자본주의의 재정비ㆍ재구축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월가 
투기자본의 대부 쏘로스(G. Soros)조차 '글로벌자본주의에 내재한 다섯 종류의 
결함'을 지적하고 자본주의 위기를 강도높게 경고하고 나섰다.

  우리는 냉전 후와 아시아 경제위기 후의 세계자본주의 상(像)이 사뭇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시선을 냉전 후의 자본주의에서 아시아 위기 
이후의 자본주의로 옮겨 재검토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시기의 자본주의는 연속적인가 단속적인가. 냉전의 종결이 
자본주의의 변화 내지 신전개를 가져왔는가, 아니면 냉전의 종결조차 자본주의의 
변화 내지 신전개의 귀결인가. 동아시아 경제위기가 세계자본주의 위기를 
불러일으켰는가, 아니면 세계자본주의의 결함이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가져왔는가. 
세계자본주의의 현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이에 대한 부분적 개혁을 추구할 것인가, 
대체모델을 추구할 것인가, 혹은 자본주의 자체의 변혁을 추구할 것인가.  

 

  [2] 자본주의의 변화가 냉전의 종결을 가져왔는가, 아니면 냉전의 종결이 
자본주의의 신전개를 가져왔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결코 간단하지 않지만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자본주의의 진화가 냉전의 종결을 가져왔으며 냉전의 종결이 
자본주의의 변화를 더욱 촉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자본주의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수많은 나라에서 서로 반응을 주고받으면서 일어나는 많은 경제적 움직임 중에서 
특히 헤게모니 국가 미국에서의 자본-노동 관계의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미국은 
'황금의 30년'(947~76)을 경과하면서 노동3권의 신장에 의한 임금상승에 따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가 점차 중단되는 이변을 맞는다. 상대적 저임금 
국가의 제품이 수입되어 가격경쟁력과 이윤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자본은 제조업의 설비투자로 가지 않고 해외 직접투자와 금융부문, 연구개발 
부문으로 흘러간다. 해외 직접투자는 미국 기업의 다국적기업화를 통하여 
세계무역을 기업 내 무역으로 변질시키며, 다국적기업의 제품을 미국시장에 
역수출함으로써 미국의 무역적자를 가속화하였다. 생산자본의 금융자본으로의 
전환은 점차 은행과 증권과 채권의 업무 경계를 파괴하고, 경제적 국경을 
파괴하면서 금융혁명을 일으킨다. 연구개발은 자본의 기술적 구성을 고도화하면서 
특히 정보화의 기술적 기반을 확립한다. 이러한 자본의 진화와 더불어 국제화가 
전개된 것은 UN, GATT, IMF 그리고 집단안보체제를 비롯한 국제씨스템의 제도적 
인프라가 갖추어졌기 때문이며, 다국적기업의 일반화와 교통^정보의 혁명은 다시 
글로벌화를 촉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 노동력의 상대적 교섭력을 약화시켰다. 미국 기업이 
다국적기업으로 변신할수록 미국 내의 실업은 증가하고 노동자의 상황은 악화된다. 
기술개발, 특히 자동화ㆍ지능화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현장에서 노동의 역할이 
축소되고 '노동의 종언'이 초래되었다. 아울러 미국 기업의 다국적기업화가 
심화될수록 미국의 조세수입이 줄어들고 그것은 재정적자를 확대하여 각종 
복지정책을 후퇴시켰다. 

  국가와 노동의 상대적 후퇴와 자본과 시장의 상대적 강화가 일어난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론이 등장한다. 
신시장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시장은 비시장영역을 시장영역으로 흡수^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비시장영역 그 자체도 시장원리로 운영하게 하였고, 정보화를 매개로 
시장의 국경을 파괴하여 명실공히 세계시장을 형성하였다. 또한 눈에 보이는 
제품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디어나 지식까지 지적재산권으로 
상품화하였고, 글로벌 스탠더드로 수확체증의 시장세계를 확립하였다. 그 결과 
기업경영은 '핵심역량'에 집중하고 그외는 아웃쏘싱(outsourcing)하는 형태로 
바뀌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신시장혁명의 물결이 점차 커지면서 어느날 냉전의 벽이 
허물어졌고, 그로 인해 이 물결은 더욱 도도하게 흘러넘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물결은 특히 금융부문에 의해 주도되었다. 세계자본주의는 
노동ㆍ설비투자ㆍ연구개발 주도형 축적체제를 넘어 금융주도형 축적체제에 이른 
것이다. 금융주도형 축적체제는 정보혁명과 결합하여 전지구적으로 범위가 
확대되면서 근로시간뿐만 아니라 비근로시간까지 포섭하고 있다. 세계의 1일 
통화거래액은 80년대초부터 급등하기 시작하여 1997년에는 약 1조 6천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1일 무역거래액의 약 17~25배에 해당한다. 
무역거래와 관계없이 머니게임으로 돈이 오가는 것이다. 실은 컴퓨터 모니터상에서 
전자화폐형태로 움직일 뿐이다. 금융글로벌화로 '지리의 종언'이 현실화된 것이다. 
아울러 사람들은 저축 중 일정 부분을 '뮤추얼펀드' 등을 통해 주식이나 채권, 
파생상품 등의 자산에 투자하는데 거기서 얻는 이익이 근로소득보다 큰 몫을 
차지하게 되고 그 몫이 더욱 커지자 소득자본주의에서 자산운영자본주의로 
전화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러나 금융의 글로벌화와는 달리 실물경제부문은 
오히려 지역화 혹은 3대륙화 추세를 보인다. 세계의 생산이 미국의 수입수요 
그리고 미국의 무역적자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추세가 수정ㆍ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3] 아시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글로벌화의 결함 혹은 금융주도형 
축적메커니즘의 함정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아시아 각국의 내적 대응능력의 
결함에 의한 것인가? 전자의 입장에 따르면 그것은 자본주의의 위기가 오늘날 
동아시아의 위기로 부분적으로 표출된 이른바 '빙산론'이 된다. 후자의 입장을 
따르면 동아시아 각국의 위기가 러시아,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전염된다는 이른바 
'위기전염론'이 된다.

  이에 대한 대답 역시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상호의존관계 심화로 대내적 
문제와 대외적 문제의 구분이 매우 복잡해지고 있어, 문자 그대로 
복잡계(complexity)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다소 성급한 결론을 
내린다면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조건지운 것은 일본과의 '항상무역적자'에 의한 
'항상외채누적'이며, 결정한 것은 국제투기자본과 한국의 축적구조의 누적적 
위기에서 생긴 취약한 내적 대응능력의 상호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금융자본주의의 글로벌화 그 자체를 옹호한 논리로 미국의 재무차관 써머스(L. 
Summers)의 발언을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제트기 발명 덕분에 세계 어느 곳에나 
자유롭고 신속하게 그리고 값싸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사고가 발생하며 그 결과는 대단히 치명적이다. 그럼에도 자본자유화는 제트기와 
마찬가지로 원칙적으로 바람직한 것이다. 개도국들로 하여금 필요한 자본과 
아이디어와 기술을 얻어 더 빨리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트기의 사용을 금지하기보다는 제트기의 안전착륙을 위해 활주로를 연장해야 
하듯이 각국은 자본이동을 제약하기보다는 금융씨스템을 개선해야 한다." 사실 
금융주도형 세계시장의 형성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데 
비행기사고가 자주 일어나고 사고를 당하는 것이 주로 신흥 자본시장개방국이라면, 
그 비행기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따라서 개선해야 할 것은 채무국의 
국내씨스템이 아니라 오히려 G7을 중심으로 한 채권국의 국제씨스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세계은행 부총재 스티글리쯔(J. Stiglitz)의 '파도와 
배'비유가 적절하다. "자본자유화는 개도국들을 파도치는 거친 바다로 내모는 것과 
같다. 손질이 잘 안된 작은 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파도가 매우 높을 때는 완전한 
큰 배도 가라앉을 수 있다." 이러한 발언은 저명한 국제경제학자 바그와티(J. 
Bhagwati)의 다음과 같은 비판과도 통한다. "무역자유화와는 달리 자본자유화에 
대한 이론적인 근거가 빈약하다. 또한 자본자유화의 득에 대한 실증은 극히 미미한 
반면 이의 부작용에 대한 증거는 풍부하다."

  금융주도형 글로벌시장주의에 대한 옹호론으로 시장균형화론이 있다. 금융의 
진입진출은 마치 진동추처럼 결국 평형으로 귀결된다는 시장신뢰의 논리이다. 
그러나 설사 진동추처럼 평형으로 돌아온다 할지라도 진동의 폭이 너무 큰 경우 
균형으로 돌아오기 전에 작은 나라의 작은 외환시장은 파멸되어버린다. 더구나 
헤지펀드(hedge fund)들이 관리하는 자금은 4천억 달러 정도이고 그 돈의 
10~30배까지 들었다 놨다 할 수 있어 몇몇 경제대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은 
이들의 공격대상이 되는 순간 초토화되어버린다.

  더구나 쏘로스의 지적처럼 글로벌 금융시장이 중심과 주변 구조로 되어 있고, 
중심부의 금융자본이 주변부 금융시장에 출몰하여 '붕(boom)ㆍ꽝(bust)' 형태로 
이익을 걷어간다면, 그것은 금융판 '해적'들의 '시장의 습격'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글로벌 금융자본의 공격에 대해 신흥 자본시장개방국들 혹은 
개발도상국들이 사실상 무방비상태에 가까웠던 것이 사실이고 보면, 아시아 각국의 
경제적 기초와 내적 대응능력의 중요성과는 별도로,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범은 
글로벌 금융자본이 아닐 수 없다. 금융자본주의의 글로벌리제이션 자체가 갖는 
정글적ㆍ카지노적, 혹은 람보적 성격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글로벌 금융자본주의하에서 중심부의 금융자본이 주변부에 침투해 
실물경제부문의 과잉투자를 유발하고 아울러 금융부문을 거품처럼'붕'띄웠다가 
빠져나가면 환율ㆍ주가ㆍ부동산가격이 폭락하고 기업도산이 줄을 잇고 실업자가 
폭증하여 그야말로 경제와 사회가'꽝'하고파괴된다. 한국의 경우 무려 300억 달러 
이상이 하루아침에 빠져나갈 정도였다. 이를 말레이시아 수상 마하티르는 이렇게 
말한다. "헤지펀드는 통화의 평가절하를 기다리다가 그 기회를 포착하는 순간 
몇백만 달러의 이익을 챙긴다. 그러나 그 결과 해당국 국민은 비참한 빈곤상태로 
전락한다. 말레이시아 링키트화(貨)도 60%나 떨어졌지만 어느 나라는 통화가치가 
600%나 떨어져 몇백만 명이 극도의 빈곤과 기아를 강요당했다. 우리의 돈이 
도둑맞은 것이다."

  그러나 미국경제 역시 표면상의 호황지속과 실업율 감소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거품의 확대와 분배 불균형과 빈부격차의 심화라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97년의 경우 납세자의 상위 0.5%가 미국 소득의 11%를 차지하였고, 상위 5%가 미국 
소득의 20%로 확대되었다. 또 미국 내 총재산 가운데 하위 40%의 가계가 차지하는 
비중은 단 0.2%에 불과했고, 상위 1%의 가계가 미국 재산의 약 40%를 장악하고 
있었다. 아울러 학력간 격차도 더욱 심화되고, 의료보험 수가가 높아지면서 
의료보험 가입을 포기하는 빈곤층의 수도 날로 늘어나고 있다.

  브와예(R. Boyer) 교수는 금융주도형 축적체제는 미국에는 어느정도 지속가능한 
것 같지만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러나 
상대적 고이자와 고투자수익으로 외국으로부터의 대미투자 증가가 계속될 때 
미국에서의 금융주도형 축적체제가 지속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거품현상이고 
마침내 거품이 꺼지게 되면 상황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여기서 우리는 다시 두 개의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제국주의 
세계체제가 완성된 후 세계자본주의는 결국 단 하나의 새로운 선진국도 탄생시키지 
못하고 만 것이 아닌가, 아시아 경제위기는 현대 세계자본주의의 불임성(不姙性)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불임성이 명백해질 때 세계자본주의 
존속의 가치가 세계 속에서 어느 정도인정될 수 있을까.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의 
도전 실패 이후 다시 동아시아 기적의 좌절은 선진국의 수요시장 상실을 의미하고 
결국 선진국도 불황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월러스틴은 적대자가 없어 
자본주의가 쇄망한다고 보았지만, 주변부가 쓰러짐으로써 상호의존관계가 깊은 
중심자본주의도 결국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다.

  자본주의 글로벌리제이션은 지그재그를 그리면서 결국 어쩔 수 없는 대세를 이룰 
것이고 따라서 한국자본주의 또한 이 대세에 따라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 글로벌리제이션의 객관적 비전을 제시하고 룰을 제정하고 
공정성을 보증할 국제적 제도가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무역ㆍ투자ㆍ금융의 자유화가 크게 신장되고 국가간 상호의존관계가 심화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뒷받침하고 끌고가는 국제제도는 브레튼우즈체제의 연장형태에 
머물러 있다. 이는 2차대전의 전승국 특히 미국 중심으로 짜여진 체제인데, 이로 
인해 탄생한 IMF와 IBRD는 미국의 안에 따라 채권국 일방통행형 국제금융기구로 
되었다. 이 기구들은 고정환율제가 폐지되었을 때 폐지 혹은 개편되었어야 했다. 
월가에 가까운 IMF가 국제금융질서를 뒷받침하고 있다면 그것을 두고 
아메리카나이즈의 국제기구라고는 할 수 있어도 진정한 글로벌리제이션의 
국제기구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로버트 웨이드(R. Wade)와 프랭크 
베네로쏘(F. Veneroso)가 '월가ㆍ미재무부ㆍIMFㆍ복합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70년대 이래 거듭되는 국제금융의 혼란과 그 연장선상의 아시아 
경제위기는 글로벌리제이션의 제도적 기구 미비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자본주의의 한계가 우선 국제투기자본의 약탈적 활동에서 
나타난다면, 무엇보다도 단기투기자본의 규제가 중요하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투자자본에서 단기투기자본을 분리하기 어렵고, 단기투기자본 규제가 건전한 
투자자본의 활동까지 제약한다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금융자본의 투명성이 
보장되고 정보모니터링이 이루어진다면, 기술적으로 규제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규제방법으로는 중국ㆍ말레이시아ㆍ홍콩ㆍ일본ㆍ칠레 모델 등이 있고, 어느 한 
나라만이 추진하기에는 위험도가 높아서 국제적 공동보조가 필요한 
토빈세(Tobin稅)를 도입할 수도 있다. 프리드먼(M. Friedman)의 지적처럼 IMF는 
투자자를 일방적으로 보호하여 투기의 '도독적 해이'(moral hazard)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채무자뿐만 아니라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를 제재하는 
국제기구가 필요하다. 최근 중국정부는 꽝뚱(廣東)국제투자신탁을 파산처리하면서 
국내 채무자를 일방적으로 보호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IMF와는 대조적이다. IMF가 
채권자 일방통행형이라면 중국정부는 채무자 일방통행형 조처를 취한 것이다. 
쌍방통행형 국제금융질서와 그것을 대변할 국제기구가 아쉬운 것이다.

  거대 금융자본의 공략에 대응하는 형태로 지역협력기구가 부상하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EU의 단일 중앙은행 설립과 유로화의 출현도 그러한 맥락에서 
평가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도 일본을 중심으로 엔의 국제화와 
AMF(아시아통화기금) 설립이 추진되고, 아세안을 중심으로 아세안 역내결제기구와 
역내통화가 추진되고 있다. 중국 역시 위안화의 국제화 구상을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에서도 엔화나 위안화가 아닌 제3의 국제통화 출현이 기대되고 있다.

세계자본주의에서는 국가의 후퇴와 시장의 진전이 현저하여 일종의 
'시장원리주의'혹은'신자유주의'를 이루고 있지만, 유럽 쪽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여전히 강조되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민주사회주의적 진보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다. 이른바 '제3의 길'을 구체화하는 EU의 '제3의 통화정책'에서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플레이션을 감수하고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고 하여, 분배의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케인즈적 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북유럽에서는 자산시장 불균형 
경향에 국가가 개입하는 자산중시정책을 실시하여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국가는 
일방적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장과 국가의 균형을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지속되는 것이다. 미국에서조차 최근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가 파산했을 때, 
시장논리에 맡기지 않고 정부가 긴급 금융지원으로 구제조치를 취하여 국가의 
건재를 보여주었다. '정부의 실패'를 시장이 보완해주고 '시장의 실패'를 정부가 
보완해주는 형태로 변형되면서도 균형이 지속되는 것이다.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도처에서 IMF 개혁론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론이 결국은 IMF 강화론으로 귀결되는 한계를 경험하였다. IMF 내에 금융위기 
조기경보체제를 도입하고 긴급구제금융액을 늘리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근본적으로 채권국 일방통행형 성격을 갖고 채권자의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는 경향 
자체는 변함이 없다. 이제 브레튼우즈체제의 부분적 개선 수준을 넘어 그것을 
대체하는 신브레튼우즈체제가 요청되고 있다. 세계경제의 글로벌리제이션의 현실을 
대변해줄 진정한 글로벌리제이션 기구가 절실하게 필요하게 된 것이다. 국내 
금융씨스템에 예금보험제나 유동성공급기구 등의 안전망이 갖추어져 있듯이 이제 
글로벌 금융씨스템에서도 비슷한 안전망이 갖춰져야 할 것이다. 아울러 채무국의 
실질적 참여와 룰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유연한 질서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마이크로 차원의 참가제도와 함께 글로벌 차원에서의 참가형 질서이며 따라서 
참가에 의한 쌍방통행형 윈ㆍ윈 게임의 질서라고 해도 좋다. 최근 하버드대학의 
싹스(J. Sachs) 교수는 G7 국가만이 아니라 한국 등의 채무국도 포함하는 16개국 
회의를 제의한 바 있다. 이것은 브레튼우즈체제 때의 케인즈안을 연상시키는 
제의이다. 채무국의 참여를 보장하는 질서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우리는 2차대전 후의 브레튼우즈체제나 GATT체제가 1930년대 대공황의 쓰라린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모색되고 추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한 
학습효과를 살려 세계자본주의의 재구축은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쓰라린 경험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부터 모색되고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IMF위기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안이한 낙관론에 사로잡혀서는 안된다. 
한국은 엄청난 기업도산과 참담한 실업의 고해에서 허덕이고 있고, IMF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일방적 시장개방을 강요받았다. 정부의 개혁은 사실상 구조조정이었고 
구조조정은 사실상 정리해고였다. 정리해고된 노동자가 외국자본의 투자 증가와 
벤처기업의 발흥으로 재흡수되기를 기대하지만, 그것은 노동자의 운명을 신기루에 
맡긴 것과 다름없다. 씰리콘밸리의 모델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과 구조조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개혁은 사회경제적 약자에 유리한 
조처이며 구조조정은 사회경제적 약자에 불리한 조처라는 점에서 매우 다르다. 
'유사성의 비유사성'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개혁을 외면하고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구조조정조차 적당히 하고 경기활성화나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다. 우리는 정부가 IMF와의 재교섭을 진정한 
글로벌리제이션을 지향하는 차원에서 추진하기를 기대한다. 경제위기가 대내외적 
요인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면 위기극복 또한 대내적인 개혁과 대외적인 개혁의 
결합의 형태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보다도 경제위기의 직접 피해자인 노동자와 도산기업가들의 적극적 
활약을 기대하고 싶다. 가급적이면 함께 피해를 본 아시아 각국의 노동자와 
도산기업가를 포함한 국제시민연대형 활약을 기대하고 싶다. 그러한 연대활동을 
통하여 자본의 세계화를 시민사회의 세계화로 대응하는 길을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이코노미스트의 역할을 
기대하고 싶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이 전후 새로운 자본주의 발생의 모태이었듯이 
아시아 금융위기와 그 세계적 파급이 21세기 세계자본주의 재구축의 모태가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발단은 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정직한 반성 
그리고 그 대안모색에 내재되어 있다. 우리가 구한말 국채보상운동의 발원지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세계화를 모색하면서 '대구라운드'를 추진해보려는 것도 
그러한 시도의 일환이다. 1929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 70주년을 맞이하여 케인즈 
최후의 말을 상기해두고 싶다. "이코노미스트는 문명의 대변자가 아니라 문명의 
가능성의 대변자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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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론 1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물음

 

 

 

         정성진(丁聲鎭)  

         경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김영호 교수의 발제문은 21세기 자본주의 미래에 대한 직접적인 예측보다는 
동아시아 경제위기 후 노정된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검토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동아시아 경제위기에 대한 김교수의 분석과 
대안은 최근 일부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통념'으로 정착되고 있는 
'신자유주의 책임론''개혁적 케인즈주의'혹은'제3의 길'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는 김교수가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범은 글로벌 금융자본이 아닐 수 없다"고 
진단하고, 경제위기에 대한 대책으로서 "국제투기자본의 약탈적 활동" 특히 
"단기투기자본"의 규제와 케인즈와 싹스의 제의를 창조적으로 계승발전시키려는 
노력, 즉 "세계경제의 글로벌리제이션의 현실을 대변해줄 진정한 글로벌리제이션 
기구" 예컨대 "대구라운드"의 개최를 주장하는 데서 확인된다. '새로운통념'은 
21세기 인류가 다시 직면하고 있는 세계대공황의 배경을 앵글로-아메리카형 
자본주의에 특징적인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지상주의에 찾으면서도, 그의 대안을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근본적 변혁에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자본주의, 
예컨대 '라인형 자본주의',동아시아 '발전국가'모델,'제3의 길'같은'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민주적 협력적 자본주의'에서 찾는다. 

  이 점에서 '새로운 통념' 외견상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는 신자유주의론과 
마찬가지로, 소련과 동유럽 제국의 붕괴 후 득세하는 이른바 '자본주의 외 
대안부재론'을 공유하고 있다. 실제로 김교수는 "자본주의 글로벌리제이션은 
지그재그를 그리면서 결국 어쩔 수 없는 대세를 이룰 것"이기 때문에, 
"한국자본주의 또한 이 대세에 따라 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쓰라린 경험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 기초한 "세계자본주의의 
재구축"을 제창한다. 즉 21세기 세계와 한국이 나아갈 방향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자본주의의 케인즈주의적 개혁이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변혁은 아니라는 
것이 김교수의 결론인 듯하다. 평자는 이 글에서 '신자유주의 책임론''개혁적 
케인즈주의' '제3의 길'혹은'자본주의 외 대안부재론' 같은 김교수가 공유하는 
'새로운 통념'에 대해 몇가지 쟁점을 제기하는 것으로 토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책임론'은 동아시아 경제위기와 세계대공황의 근본 원인을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한 구조적 모순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 금융자유화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의 득세 및 이에 편승한 "글로벌 금융자본의 공격"과 
동아시아 외환위기로부터의 "전염"에서 찾는다. 예컨대 한국자본주의가 무너진 
것은 김영삼ㆍ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며, 따라서 김영삼ㆍ김대중 
정부가 신자유주의를 맹종하지 않았더라면, 또 초국적금융자본과 IMF가 강요한 
신자유주의를 수용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자본주의는 계속 잘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1997년 외환위기가 폭발하기 전 한국자본주의가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구조적 위기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초 신자유주의로의 선회는 현재 위기의 근본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60년대 이후 '30년 장기호황'을 지탱했던 국가자본주의적 축적구조가 
붕괴하면서 시작된 구조적 위기에 대한 정책대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도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제이션이 대두한 것은 전후 
'황금시대'가 70년대 들어 종식되고 구조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이윤율이 저하하는 
제조업부문에서 금융부문으로 자본이 이동한 결과 팽창한 초국적 금융자본의 
운동과 함께였다. 요컨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제이션은 세계자본주의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 즉 위기에 대한 지배계급의 대응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제이션에 제동을 거는 것으로 위기가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는 없다.

 둘째, 신자유주의적 위기 극복 시도가 동아시아 경제위기와 함께 파탄나면서 
한동안 홀대받던 케인즈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김교수도 
국제금융질서의 케인즈주의적 개혁, "채권국과 채무국 모두가 참여하는 쌍방통행형 
질서"의 수립을 제안한다. 그러나 케인즈경제학이 1930년대 대공황을 극복하고 
전후 '황금시대'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는'상식'은 사실과 다르다. 1930년대 
대공황은 케인즈적 개혁이 아니라, 파시즘과 2차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야만과 
파괴의 광란을 벌인 뒤에야 극복될 수 있었다. 케인즈적 '개혁자본주의'같은'제3의 
길'은 대공황기에는 실현불가능한 환상이며, 현실에서는 '군사케인즈주의'로 갈 
수밖에 없는, 즉 야만에 이르는 길이다. 오늘 '개혁적 케인즈주의'는 1930년대 
이후 케인즈주의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지배질서의 재구성('경제 살리기') 논리로 
봉사하고 있으며, 이른바 '중도좌파'의 유럽 정치 석권 이후 주목받는 '제3의 
길'혹은 '사회민주주으적 글로벌리제이션'도 실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제이션의 
변종일 뿐이다.

  셋째, 동아시아 경제위기와 세계대공황은 이른바 '라인형'국가자본주의 역시 
앵글로-아메리카형 자유시장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위기를 피할 수 없으며 공황 
없는 자본주의란 한낱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국가의 시장 
개입과 창출을 통해 이룩된 동아시아 경제기적이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지상주의의 
허구성을 입증한 것이라면, 그 파국은 국가자본주의도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웅변한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가 어떤 형태를 
취하든─앵글로-아메리카형의 신자유주의적 자유시장경제이든, '라인형'의'사회적 
시장경제'이든, 동아시아 '발전국가'모델이든─공황은 숙명이라는 사실, 즉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공황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환기해주었다. 사실 케인즈가 공황의 타개책으로 고려했던 '투자의 
사회화'와'지대수위계급의 안락사'는 이미 자본주의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공황은 자본주의의 특정한 조직형태나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체제 일반에 내재한 모순의 필연적 폭발이며, 이는 자본 가치와 노동력 가치의 
대규모적^야만적 파괴를 통해서만, 또 일시적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 그래서 
1930년대의 대공황기처럼 '혁명인가? 야만인가?'라는 양자택일에 직면한 인류는 
21세기에도 자본주의 야만에 대한 혁명적 대안을 추구하는 투쟁을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 경제위기와 세계대공황은 21세기 인류에 대해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 시장과 국가의 이분법 구도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문제시할 
것을 다시 한번 촉구하고 있다. 이는 동아시아 경제위기와 함께 "세계자본주의 
불임성"이 명백해졌으므로, "세계자본주의의 존속의 가치"가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을까를 묻는 김교수의 질문에 대한 논리적 답변이기도 하다. 

 

 

토론 2

 

지식사회와 자본주의의 미래

  

  

 

         강구영(姜求永)  

         경제학 박사, 경제평론가

 

 

 

  자본주의의 미래를 경제체제의 변화라는 틀 안에서 전망하는 것도 한 가지 
유력한 방법이기는 하나, 새로운 세기를 맞는 지금으로서는 좀더 근본적인 사회 
전체의 변화를 가늠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 자체를 바꾼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평자는 김영호 교수의 발제문에 대해 몇가지 비판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그에 대한 짧막한 논평과 함께 평자가 생각하는 21세기 자본주의의 
미래상에 대해 의견을 제시하기로 한다. 

  김영호 교수는 발제문의 첫부분에서 "자본주의 내부분열로 자본주의 대 
자본주의의 경쟁이 격화되었다"고 주장하는데 내부분열의 내용이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지 않다. 아시아 경제위기가 이 경쟁의 산물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는 보여지나 전후관계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다음의 주제인 자본주의의 
변화가 냉전의 종결을 가져왔는지 그 반대인지를 규명하는 일 역시 자본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김교수가 지적한 대로 
세계경제체제 안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흐름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이 어느 곳을 
지향하는가를 전망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일 것이다. 
"소득자본주의"에서"자산운영자본주의"로 전화한다는 식의 표현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용어들을 사용하는 경우 마치 자본주의가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 쉽다. 평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자본주의의 
형태를 이러한 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제국주의 세계체제가 완성된 후 세계자본주의는 단 하나의 새로운 선진국도 
탄생시키지 못했다는 주장도 매우 강한 표현이다. 제국주의 세계체제라는 것은 
무엇이며 또 언제 완성되었는가? 이러한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자본주의 
발전과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것들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한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개인적 주장이라고 오해받기 쉽다. 선진국이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으며, 
또 선진국을 탄생시켰느냐의 여부가 자본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는 데 왜 중요한 
문제인지도 설명이 필요하다.

  산업사회는 우선 물적 생산이 그 축이었고, 물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층이 
권력을 소유했다. 이들은 물적 생산의 효율성을 증대하기 위하여 기계화 및 
자동화를 통하여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하였고, 그 과정에서 노동은 물적 
생산투입물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해고라는 말이구조조정이라는 
표현으로 미화(美化)되어버렸고, 탄력적 노동시장이라는 말도 결국에는 물적 
투입물의 하나인 노동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노동투입량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흐르고, 한편에서는 로봇이나 기타 
노동대체물의 발명으로 인해 그나마 남아 있던 단순노동은 더욱이 설자리를 잃게 
되었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노동자계급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세계화와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경쟁은 격화되고, 일반대중의 소득이 
향상되면서 소비자의 요구도 다양해졌다. 기성세대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신세대들의 주장이나 개성이 다양해지고 강해지면서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거세게 
몰아닥치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면 생존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므로, 기업들은 다양한 계층의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전을 흡수하여 생산으로 이어지게 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대량생산체제는 다양하고 개성적인 생산체제로 서서히 
전환되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정보이며 아이디어, 즉 지식이다. 

  따라서 21세기는 물적 생산보다는 지식의 생산이 더욱 중요한 사회가 될 것이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것은 대학교수나 박사학위 소지자들의 이른바 고급지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의 생산과정의 효율성을 올리거나 효과성을 제고하는 
것부터 전혀 새로운 상품이나 아이디어를 도입하는 데 이르기까지, 새로운 
부가가치를 산출하거나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말이다. 

  물적 생산보다 지식의 생산이 더욱 중요해지면서 전통적인 산업의 구분도 
애매해졌다. 제조업과 써비스업의 구분이 모호해졌고, 전통적 의미에서의 제조업의 
쇠퇴가 곧 노동자계급의 몰락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제조업 부문에서 가장 강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일본의 실업률이 제조업 부문에서 경쟁력이 약하다는 미국의 
실업률을 상회하게 된 것은 이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은 동태적이고 진화하는 특성을 지녔으며, 마치 유기체와도 같다.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명백지(明白知)도 있지만, 경험이나 사고를 통하여 형성되는 
암묵지(暗默知)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식의 특징 때문에 지식을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만약 생산과정을 물적 투입과 물적 산출의 
관계에서 지식의 투입과 지식의 산출로 재정의한다면,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은 
바로 지식이 된다. 지식은 전적으로 개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생산관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자본가들을 비롯한 기득권층이 무엇을 어떻게 원하든지 이 변화는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본질 자체를 변화시킬 것이다. 자본을 소유한 사람보다는 
지식을 소유한 사람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고, 자본가와 노동자의 구분보다는 
지식노동자와 비지식노동자의 구분이 더 중요해질 것이다.

  지식사회에서는 개인이 조직보다 우선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일이 걸리겠지만 그러한 방향으로의 변화는 불가피할 것이다. 경쟁이 
심화되고 지식의 중요성이 강화되면서 전통적인 조직이나 통제방식은 점차 약화될 
것이다. 공식적 관계보다는 비공식적 관계가 더욱 중요해지며, 문서화된 규정이나 
법칙보다는 암묵적인 문화의 영향이 더 클 것이다. 경제 단위들이 서로 아웃쏘싱을 
할 수 밖에 없게 되면서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전통적 의미에서의 조직은 점차 
와해될 것이다. 특히 지식은 특성상 보편적이기 때문에 기존의 국가나 민족의 틀 
안에 묶어놓을 수 없다. 개인화의 추세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어떤 형태이든 
사람들을 묶을 수 있는 방법에 한계가 있게 될 것이다.

  기존의 조직, 특히 기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적 조직은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가장 발달했다는 미국에서조차 기업 내에서는 최고경영자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권력의 공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런데 지식사회가 도래하면 이러한 조직의 특성도 바뀔 것이다. 정보와 
지식을 공유하지 않으면 경쟁에 뒤떨어지기 때문에 각 조직은 어차피 지식을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며, 정보기술의 발달은 이를 더욱 촉진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변화는 곧 조직 내의 권력의 공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지식은 곧 힘이고, 따라서 지식을 공유하는 것은 권력을 공유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식과 권력을 공유하는 전제조건은 바로 경영의 투명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열린 조직으로의 이행이 이루어져야만 참다운 의미에서의 공유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열려 있고 권력이 공유되는 조직 안에서는 대립이나 분열보다는 협력과 
일치를 추구하게 된다. 사회 안에서 각 조직의 특성이 이렇게 변하면서 기존의 
공동체 개념도 바뀔 것이다. 인류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조화를 이루고 더 높은 
수준으로 진화하는 터전이 마련될 것이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사태가 이렇게 이상적인 방향으로 흐르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체제 안에서 특권을 향유하던 세력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특히 
물적 생산수단이나 자본을 소유한 계층의 이론적ㆍ실질적 반발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는 없다. 자본주의의 생존이나 변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인류사회의 변화가 더욱 큰 이슈이다. 지식사회가 
정착되면서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형태로 바뀔 것이며, 
자본주의라는 용어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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