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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8일 일요일 오전 03시 11분 11초
제 목(Title): 토론/조은 가족제도의 운명과 새로운 공동�


 

가족제도의 운명과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

 

조 은

 

 

 

  [1] 20세기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일상생활을 개체화ㆍ표준화ㆍ제도화했다면 
21세기는 바로 이러한 개체화ㆍ표준화ㆍ제도화한 삶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이다. 21세기 가족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이러한 성찰이 필요한 제도이다.

  20세기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한국 가족의 모습을 잠깐 스케치해보자. 먼저 
강남의 중산층 아파트의 대형 사진틀 속에 있는 가족. 안정된 직장을 가진 40대의 
남편과 적당히 살림때가 묻은 아내, 시험 지옥에 시달리지만 웃고 있는 아들과 딸, 
네 식구의 화목한 가정의 그림이다. 우리 사회 다른 한쪽에는 보험금을 노리고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딱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는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이 있다. 또다른 한편에는 IMF 경제위기로 주가가 폭락한 틈에 
2세들에게 주식을 대거 상속시킨 재벌가족도 있다. 또한 70세가 넘은 할머니가 
50년 넘게 함께 산 할아버지를 상대로 "내일 죽더라도 나 오늘 이혼하고 싶다"고 
소송을 제기하고 이 노부부의 가정이 "깨져야" 하는가 아닌가로 여론과 법원이 
고심하는 가족도 있다. 그리고 미국으로 입양되었다가 골수암을 앓는 바람에 
조국의 핏줄을 찾은 성덕 바우만군, 양아들이 아니라 그냥 아들이라고 말하는 그의 
미국인 양부와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생모의 이야기로 언론을 채운 가족이 있다. 
또 있다. 컴퓨터에 결혼사진을 올리고 자녀를 몇명 둘 것인가를 합의한 싸이버부부 
가족도 있다. 

  가족이 그렇게 간단치 않은 제도임을 입증하는 여러 모습들이다. 가족이 
소유제도나 계급구조와 무관할 수 없으며 상속제도나 교육제도뿐 아니라 
사회보장제도와도 무관하지 않고 테크놀로지의 수준 및 산업구조, 그리고 전통적 
사회구성원리와 조직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된 제도임을 확인시켜준다. 가족제도의 
운명이나 미래를 이러한 여러 제도의 변화에 연관시키지 않고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이 21세기에 한국의 가족제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가 '정확히' 예견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가족제도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논의를 전개하기로 한다. 

  21세기 가족제도를 끌어갈 두 축은 가부장적 자본주의사회와 정보기술사회라고 
전제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가족만이 아니라 경험으로서의 가족, 그리고 
담론으로서의 가족까지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타진해본다면 
논의는 훨씬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제도로서의 가족은 부계 직계 가족조직의 
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핵가족이 중심이지만, 경험으로서의 가족은 제도와는 
별도로 훨씬 다양한 형태를 띨 수밖에 없고 가족담론은 다양한 입장과 의견이 
맞부딪치는 각축장이 될 것이다. 

 

  [2] 가족제도의 운명에서 먼저 논의되어야 할 사항은 가족 기능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가족의 기능은 큰 변화를 
겪었으며 가족이 전통적으로 해왔던 기능의 상당부분을 다른 제도에 이관했다.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가족 기능의 이전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교육제도가 팽창하면서 가족이 맡았던 사회화 기능을 학교들이 떠맡고 
유아원과 놀이방 등의 등장으로 가족의 사회화 기능은 더욱 축소되었다. 노유약자 
보호 기능도 병원이나 복지제도에 일부 이전되었고 가족원에 대한 지위 부여 
기능도 약화되었다. 그동안 이러한 기능의 전이는 상당부분 상품화를 통해 
해결되었다. 그러나 가족을 대체해 노유약자 보호, 지위 부여, 사회구성원의 
재생산, 사회화 등의 기능을 모두 수행할 다른 제도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으며 
21세기에도 이런 모든 기능을 종합적으로 수행하는 제도로서의 가족의 운명은 크게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과 기능의 수행방법에는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변화의 방향을 유도하는 담론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이 논의되어야 한다.  

  그동안 가족기능의 다른 제도로의 이행이나 가사노동의 사회화는 국가가 때로 
개입했지만 많은 경우 자본주의라는 틀 내에서 '시장'에 의해 주도되어왔다. 
21세기에는 국가와 시장 대신 제3]터의 조직과 역할에 좀더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제까지 공사(公私)영역의 분리와 가정과 일터의 분리, 그리고 이에 기반한 
성별분업의 위계구조에 따라 조직되었던 가정과 가사가 재구조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경계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으며 이러한 공사영역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담론이 요구된다. 예를 들면 아이 키우기를 국가가 맡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상품화해서 해결할 것인가, 또는 노인부양의 책임을 국가가 맡도록 
할 것인가 개별 가정의 책임으로 돌릴 것인가의 논란에서 방향을 틀어 제3의 
방법을 모색해볼 만하다. 이는 공사영역에 대한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서는 
길이기도 하고 국가와 시장이 식민화한 일상생활을 살려내는 일이기도 하며, 
개체화의 문제를 보전(補塡)하는 불가피한 전략적 선택도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개별가족으로는 한계에 부닥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일이기도 하다. 환경 
살리기, 지역사회 살리기, 또는 핵추방이나 평화운동 등 장기적으로 따뜻한 
가족관계와 일상적 삶을 살려내는 공동체운동에 개별가족이 부분적으로 참여하면서 
이를 정책화하거나 정치화하는 일은 정의적(情誼的)이고 감정적 연대의 단위로 
가족을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때 부계 혈연에 기반한 가족의 개념은 최소화될 것이며 새로운 공동체 구성의 
기본 단위들이 좀더 다양화될 것이다. 비정부기구(NGO)나 비영리기구(NPO) 또는 
시민사회기구(CSO) 등 이른바 시민사회의 권력화를 추진하거나 사회화하는 
단위로서 가족의 기능이 중요시되고 이는 전체주의적이지 않으면서 
개인주의적이지도 않은 '부분공동체'의 활성화와 연관될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에서 실험이 시작된 공동육아협동조합 등은 이러한 '부분공동체' 운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21세기 가족제도 변화의 한 축이 정보사회의 도래라고 할 때 정보기술의 
발달은 당연히 가족관계와 가족의 기능, 감성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텔레비전의 등장이 가족관계에 변화를 가져왔듯이 초고속정보망이 가정까지 
구축되는 2020년대에는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가족관계에 많은 
변화가 초래될 것이다. 

  전자미디어가 개인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도구가 되는 사회는 전화가 
외부세계와 가족을 연결하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도구였던 사회와는 전혀 다른 
가족 커뮤니케이션의 양상이 선보일 수밖에 없다. 가족성원들은 외부와 연결되는 
개인회선을 보유함으로써 가족원보다는 네트워크에 의존한 인간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고, 세대가 다른 부모와 자녀는 각각 자신의 행동원칙과 시간대를 
가짐으로써 가족의 개인화가 더욱 가속되고 부부끼리도 개인화된 네트워크가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물리적 몸은 가정에 있지만 지속적으로 바깥 사회관계망과 시간을 
보냄으로써 가족의 의미가 재정의될 것이다. 가족성원들이 가족매체와 개인매체를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즐기면서도 긴급시에는 가족성원들과 일시적 
지지(支持)를 주고받는 네트워크형 가족이 '새로운 가족'으로 등장할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될 때 가치와 생활세계를 달리하는 전통적 부계 혈연가족은 긴장과 
'해체'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가족이 갖는 지위 부여나 '도구적 기능'보다는 
삶의 양식을 함께 누리는 문화적 공동체로서의 가족의 의미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또한 정보사회에서는 가정과 일터의 완전한 융합은 아니더라도 가정과 일터의 
분리가 현재만큼 엄격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제도와 노동조직이 가정과 일터의 
부분적 융합을 전제로 재구조화될 것이다. 가족성원이나 부부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여성들만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정서적ㆍ성적(性的) 역할이 
좀더 강화될 수도 있다. 남성들이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가정적이고 
섬세하며 잔신경을 쓸 줄 아는 새로운 남편상이 정보사회 가정의 이상형으로 
부각되는 한편, 가정관리ㆍ사무직 노동자인 동시에 성적인 매력도 지닌 
'신가정주부'의 여성상이 환영받을 것이다. '집안의 천사'나 '밀착된 모자관계'가 
산업사회의 산물이라면 정보사회에서는 '어머니 같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상징이 
될 수도 있다. 반대로 성애가 아니라 일을 통해 부부는 더욱 긴밀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 당연히 친밀함의 구조와 기능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아동이 처해 있는 교육환경도 변화하고 인터넷 등 집에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교육을 받는 기회도 늘어나므로 주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던 교육이 상당부분 집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단순히 가족이 학교 기능을 재탈환한다기보다는 
교육제도 자체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사회화 기구로서 가족의 기능도 재평가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모든 가족에서 균일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4] 정보사회의 진전은 싸이버공간에서 연애하고 결혼도 하는 싸이버가족의 
등장도 예고한다. 이렇게 되면 결혼개념에 변화가 오고 직접 만나는 일 없이 
가상공간에서 부부생활을 하는 '싸이버부부'도 가능하다. 싸이버결혼이나 
싸이버부부는 현실 가족관계의 실험의 장도 되지만, 나아가 성ㆍ사랑ㆍ결혼 등을 
둘러싼 개념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자신이 만든 이상형의 파트너와 
가상공간에서 연애를 하거나 싸이버]스를 하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연히 
이러한 파트너는 배타적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배타적 사랑에 
기반한 성과 결혼의 결합을 이상시하던 낭만적 가족의 각본이 변화할 것이며 
친밀함의 구조변동을 또 한차례 경험할 수도 있다. 싸이버공동체는 여태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공동체의 개념 또한 바꾸어놓을 것이다.

  쎅슈얼리티의 다원성이 증대ㆍ심화될 소지도 더욱 커질 것이다. 성적 행동이 
재생산이나 대물림에 연결되는 한 '쎅슈얼리티'는 제약과 통제 속에 있게 된다. 
그러나 앞으로는 재생산 기능으로서의 성의 의미는 탈색되고 자녀 출산을 위한 
성보다는 쾌락을 위한 성이 더욱 일반화함에 따라 쎅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이 
변화하고 이를 둘러싼 기존의 가치가 전복되며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급진적 
담론이 형성될 가능성도 높다. 한국사회에서 성의 지향성이 개인들간의 상호작용과 
결사형성의 독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지만 21세기에는 성혁명이 좀더 
구체화될 것이며 라이프스타일로서 성이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동성애의 
커밍아웃(coming-out)과 함께 동성애자들의 정치적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고 
성정치(sexual politics)가 정치 판도에서 차지하는 지위도 커질 것이다.

  쎅슈얼리티의 재구성과 함께 남성과 여성의 역할분담과 분업구조도 획기적 
변화를 전망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는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인구학적 
요인과도 관련이 있으며 여성의 생애주기와 생활단계의 싸이클 변화와도 관계된다. 
예전에는 여자의 일생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수의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데 
매어 있었다면, 이같은 임무는 빠르면 30대 늦어도 40대에 끝나고 '아이들을 위한 
존재'로서의 어머니는 여성의 일생에서 일시적이고 짧은 한 단계가 될 것이다. 
교육과 경제활동 참여에서 여성과 남성의 큰 차이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자녀 양육의 책임이 없는 모성은 
다수의 여성들에게는 여전히 환상이며 낡은 성별 귀속역할에서 여성이 쉽게 해방될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다. 여성들이 모순적 역할 배당과 이중부담에 끌려다닐 
가능성이 21세기에도 사라진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여성 노동력이 노동시장에 
참여하게 됨으로써 남성들은 가족의 유일한 부양자로서 짊어져야 하는 멍에에서 
차츰 해방되었지만 그 멍에의 해방에 상응하는 권위까지 내놓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부양을 받지 못하면서 남성에 예속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갈등은 
더욱 커질 것이다. 

  남녀간의 갈등이 가족담론에서뿐 아니라 제도변화에서도 중요한 쟁점이 될 
것이다. 따라서 가족생활에 대한 공동체적 대안의 다른 한편에서는 남녀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과 결혼에서의 남녀관계의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하는 방안이 
모색될 것이다. 더이상 생계책임자가 아니면서 가부장적 위치를 지키고자 하는 
남편과 경제적 독립을 통해 종속적 위치에서의 탈피를 원하는 아내들의 관계는 
결혼관계에 대한 끝없는 토론을 야기할 것이며 이혼율의 증가와 부계중심 
가족제도에 대한 도전이 조직화될 가능성도 높다. 가깝게는 호주제도 폐지를 
내다볼 수 있으며 부모성 함께 쓰기 운동 등이 힘을 얻어 부계중심의 가족 경계 
개념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남성들보다는 여성들의 
공동체운동이 더욱 활발하고 실험적이며 급진적이고 기대할 만하다. 

  우리보다 앞서 가족의 변화를 심하게 겪고 있는 서구사회를 잠깐 참조해보자.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회학자들은 '가족에 대한 전쟁' '양성(sexes)간의 전투' 
'친교의 테러' 등 가족이라는 언어 기상계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으며 남성과 
여성의 모든 종류의 동거형태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심각성을 지적한다. 이 
갈등들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사실은 더이상 사적이고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5] 전체적인 산업구조의 변화와 사회구성의 원리에서 볼 때 개인주의화의 
방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개인주의화'는 여성과 남성에게 전혀 다른 의미로 
부과될 것이다. 여성들은 여성의 희생을 담보로 하는 가족의 집합적 공동체성과 
끊임없는 갈등관계에 시달릴 것이며 남성들은 생산의 영역에서 요구하는 개인적 
경쟁과 이동성에 상반되는, 즉 가족원을 위해 희생하고 가족의 집합적 공동생활에 
열중하라는 요구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주의화'는 20세기 중반에 
나타난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 고안물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주의화는 개인적 자율화를 더욱더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반적 조건하에서 
전개되고 개인은 전통적 속박과 부양관계에서는 풀려났지만, 그 대신 표준화되고 
통제받는 노동시장과 타자화되는 소비시장의 공략과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은 개인을 탈주체화하고 유행ㆍ사회정책ㆍ경제주기ㆍ시장에 
예속시켰다. 만약 서구에서 진행된 이러한 개인주의화로 방향이 잡히면서 새로운 
공동체적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면 21세기 한국사회는 울리히 벡(Ulich Beck)이 
이야기하는 '위험사회'(risk society)보다도 더욱 위험하고 위태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실제로 20세기말 한국의 가족은 그러한 위험사회의 징후로 내파(內破)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의 작은 반란은 '간 큰 남자' 씨리즈로 우스개화되었고, 
'고개 숙인 아버지' 씬드롬 속에서 숨도 못 쉴 만큼 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족주의는 그동안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아시아적 가치 또는 유교 가부장제는 
점차 지배담론의 위치를 상실할 것이다. 아시아적 가치로 포장된 유교 가족주의는 
사실은 가족이 생산공동체였던 대부분의 사회에서 중요한 가치이자 기본적인 
사회조직 원리였다. 아시아 사회는 좀더 늦게까지 가족이 생산공동체였으며 이른바 
동아시아의 친가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지연된 근대화와 관련된다. 
가족주의를 중요시한다는 유교문화권 또는 아시아적 가치의 실질적 내용은 여성과 
연소자의 희생과 억압에 기반한 가족질서와 그러한 가족질서에 기반하여 
사회질서를 유지한 사회였으며 이의 미화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고안물과도 
무관하지 않다. 

  21세기 새로운 공동체는 아시아적 또는 유교적 가족주의 가치를 부활시킴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며 이를 얼마나 철저하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아시아적 자본주의의 
원동력으로 미화되고 남녀유별 논리가 정당성을 얻게 되는 신보수주의 가족담론의 
부활을 경계해야 한다. 이에 대한 대항담론이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가족주의가 기반으로 하는 '가문을 위한 약자의 희생'이라는 도구적 
인간관계의 재생산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며 한국사회를 살려낼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도 비관적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구호적이고 적당히 안이한 가족관이나 공동체관은 
파기되어야 한다. 경쟁적이고 피상적인 사회관계를 파기하고 우리 속의 다양한 
주체를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기획하는 일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면서 무엇보다 깊이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새로운 공동체의 기반과 단위를 
어떻게 책정할 것인지, 그리고 세계자본주의화의 흐름 속에서 민족공동체는 어떻게 
위치지울 것인지도 새로운 숙제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시도된 공동체운동이 
너무나 유토피아적이거나 종합적 또는 전체주의적이었다면 21세기의 공동체는 모든 
것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함께하고 개별화할 부분은 남겨놓는 
'따로 또 같이' 공동체가 그 대안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공동체와 기존의 
가족제도가 어떻게 만날 것인가는 21세기 한국 가족이 풀어야 할 큰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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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1

 

근대의 지적 전통과 가족의 개념

 

 

 

        김경일(金炅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21세기 가족제도의 모색에 대한 문제제기를 제한된 지면에 압축하는 것은 아마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특히 금세기가 다해가는 1999년의 세계적 차원에서 
지식세계가 밟아온 지난 100여년간의 변화를 감안해볼 때 더욱 그러하다. 넓게 
보아 서구적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점증하는 회의를 
배경으로, 설명과 예측이 자신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생각해왔던 사회과학자들은 
예측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과학적 설명조차도 하나의 거대서사(grand 
narrative), 또는 허구(fiction)라는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금세기초에 
기원하여 냉전기에 절정을 이뤘던 과학주의와 계몽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변화는 가위 혁명적인 것이다.

  조금 범위를 좁혀서 보면 가족을 공동체의 준거기준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사회주의나 협업 등과 관련하여 거시적 차원에서의 종합성이나 영속화에 대한 
비전을 통해 공동체를 파악했던 시각과는 다른 변화의 궤적을 반영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전이는 길게는 구쏘비에뜨 체제의 관료주의화가 진행된 1930년대, 
짧게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몰락한 1989~91년을 계기로 이루어졌다. 아주 
구체적으로 보면 21세기 가족제도는 한국이라는 국지적 맥락에서 작용하는 사회적 
세력과 힘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로서의 미래에 구현될 현실이다. 

  이러한 기준들에서 볼 때 조은 교수의 발제문에는 장기적ㆍ거시적 수준에서의 
지적 세계에 일어난 변화들의 결여, 부분적 반영, 또는 신구의 혼재라는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세기말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적으로 
발제문은 가족의 변화에 작용하는 사회적 요소들을 '진단'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처방'(정책)을 제시한다는 고전적 사회과학자의 역할에 입각하고 있다. 
그리고 발제자의 논의가 가장 돋보이는 것은 아마도 처방이라는 측면에서의 제안일 
것이다. "전체주의적이지 않으면서 개인주의적이지도 않은 '부분공동체'의 
활성화"와 그것의 사례로서 공동육아협동조합을 든다든지, 또는 "모든 것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만 함께하고 개별화할 부분은 남겨놓는 
'따로 또 같이' 공동체"의 대안 제시가 그것이다.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이러한 제안은 평자가 보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19세기 
후반 이래 20세기 전반에 걸친 공동체의 지성사적 맥락을 계승한 것이다. 그것을 
가족과 연관시키는 작업은 전혀 다른, 때로는 상반되는 패러다임에 속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따뜻한 가족관계"와 "일상적 삶을 살려내는 
공동체운동"이 동일한 차원에서 병치ㆍ양립될 수 있을까? 발제자는 아마도 
"공사(公私)영역에 대한 근대적 이분법"을 넘어선 그 어떤 것을 모색하는 듯하다. 
그러한 탐색이 무의미하거나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정반대로 이러한 
인식이 지니는 의미가 새롭게 그리고 높이 평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의적이고 감정적 연대의 단위로 가족을 복원"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들에 대한 
논의가 탈락된 대안 제시는 막연하고 공허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처방이 진단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모순의 복합이 발제자의 진단에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예컨대 한편에서는 "성애가 아니라 일을 통해 
부부는 더욱 긴밀한 관계가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또다른 맥락에서는 "쾌락을 
위한 성의 일반화"에 따라 쎅슈얼리티에 대한 급진적 담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서구사회에서 '가족에 대한 전쟁' '양성(sexes)간의 
전투'로 일컬어지는 가족에 몰아치는 폭풍우와 갈등의 심각성은 정보사회의 도래에 
따른 "가족관계와 가족의 기능, 감성구조"의 변화에 대한 유토피아적 서술에서는 
사라져버린다. 

  발제자의 주장대로 21세기 가족제도를 이끌어갈 두 축이 가부장적 
자본주의사회와 정보기술사회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전자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사실상 거의 생략되어 있는 반면, 후자는 일부 미래학자들의 장밋빛 환상과 비슷한 
유토피아로 대체되고 있는 것에는 만족할 수 없다. 평자가 보기에 후자는 
세계화ㆍ지구화의 전반적 추세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세계자본주의의 상호모순적 
균일화와 다극화를 통해 창출되는 생산과 고용의 구조, 민족주의와 국경 개념의 
변화, 정치와 대의제도에 대한 대안적 도전, 또는 대중문화 영역의 세계적 확장 
등의 여러 요인들을 복합적으로 고려한 상태에서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자의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관련해서는 특히 80년대 이후 한국 여성사와 
페미니즘에서 집중적 연구가 이루어져온 주제 중의 하나가 이 문제인만큼, 그 
성과를 반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 예컨대 한국사회에서 가족이 지니는 
이중성과 아울러 그것을 통해 표상되는 공동체의 전횡과 지배에 주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한국에서의 가족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에서 
그것은 연고주의와 관련된 부정적 이미지를 제공한다. 한국사회에서 연고주의는 
혈연이나 지연, 또는 학연 등에 의한 동질성의 공유를 바탕으로 부정적이고 
퇴행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한국사회는 근대화 과정에서 그것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제도나 기제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가장 근대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에 사는 고소득의 교육수준이 높은 젊은 세대에서 오히려 그러한 
사고방식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역설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 가족은 원초적 감정과 정서로 표상되는 긍정적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다. 행복한 가족이나 아이들의 성장, 또는 가족의 건강 등에 대한 관심은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강화되어온 가족주의적 주제들을 표현한다.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에서 보듯이, 예측할 수 없는 사고나 재난이 빈번해짐에 따라 이에 
대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것과 아울러 정서적 안정을 느끼는 대상으로 가족이 
주목되었는가 하면, 다원주의적 가치가 지배적으로 됨에 따라 헌신과 아이덴티티 
추구의 대상으로 가족의 존재가 부상하고 있다. 현대 기계문명의 불확실성과 
도구성이 지구화되어나가는 보편적 추세 앞에서 서구와는 달리 가족이 오히려 
근대화와 더불어 성장해왔다는 점에서 한국사회에서 가족에 부여되는 비중은 좀더 
강화될 수 있었다. 직업이나 계급 등에 기반한 옆으로의 연결조직들을 거의 
발전시키지 못하였으며, 이와 관련하여 공공의 영역에서 일정한 종류의 소외감을 
경험하면 할수록 일상생활에서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은 교수가 적절하게 분석하듯이 가족의 기능 변화와 상품화를 통한 그것의 
전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족이 여전히 강력한 사회적 힘을 가지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인 것은 여기서 기인한 강력한 공동체적 표상을 바탕으로 
가족이 전제와 지배의 도구로 작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가족이라는 
전체에 대한 헌신은 궁극적으로 가장에 대한 복종으로 수렴되면서 정치적 
의미에서의 지배논리와 친화력을 가지는 것은 비단 한국사회만이 아닌 동아시아 
국가들의 일반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체적 표상 아래서는 유교적 체면이나 
가식의 전통과 도구화된 서구적 의미의 쎅스 사이에서 관능과 욕망의 표출을 
둘러싸고 방황하는 부부의 성애라든지, 다른 어느 사회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근원적인 세대차이와 그로 인하여 실체조차도 모호한 문화적 변동을 경험하고 
있는 부모-자녀 관계 등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토론 2

 

가족과 공동체의 변증법을 넘기 위하여

 

 

 

       서동진(徐東振)  

         문화평론가

 

 

 

  조은 교수의 발제문은 매우 큰 청사진을 담고 있다. 청사진을 그려낼 때에는 
몇가지 전제가 있을 법하다. 그 가운데 하나는 청사진으로 찍힐 수 있는 명백한 
대상의 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청사진으로 찍힐 그것이 있다는 전제를 
공유해야 현재와 미래의 청사진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그것이란 당연히 역사적 변화 속에서 해독될 수 있는 객관적 실체로서의 
가족이겠다. 하지만 세기의 변화를 가로지르며 읽힐 수 있는 투명한 실체로서의 
가족이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은 발제자도 인정하는 듯하다. 그 역시 
일의(一意)적이고 보편적인 가정에 부합하는 가족이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비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제자는 청사진을 그리려 한다. 

  왜 그럴까. 이를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청사진을 그려보려는 것은 대안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즉 비판의 동기로부터 비롯된 부수적인 논증의 
방식이라 여기면 된다. 하지만 아무렇든 가족에 대한 청사진 그리기가 깔고 있는 
주장은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듯싶다. 왜냐하면 지금 가족을 
문제삼는 것, 즉 사회를 읽기 위해 가족을 중요한 문제로 삼는 것 자체가 어쩌면 
결정적인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제자는 가족을 미래에 대한 구상의 중요한 
쟁점으로 삼는 사회의 해석학에 너무 쉽게 동의하는 듯하다. 신보수주의나 
유교주의적 가치의 등장과 위력을 좌시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절대 옳다. 그들은 
한결같이 가족을 들어 사회에 대한 진단과 해석을 제시한다. 일단 우리는 그것을 
가족과 사회의 변증법이라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족에 대한 다른 
입장을 내세움으로써 그런 변증법을 물리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게 유용할까. 
평자는 의견을 달리한다. 

  가족과 사회라는 두 개의 항 사이에 어떤 의미심장한 관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비판되어야 할 담론이기 때문이다. 평자는 그런 발제자의 청사진 그리기가 크게 
보자면 강박충동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가족과 공동체의 관계라는 물음이 
바로 그 강박충동이라 생각한다. 왜 가족을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물어야 할까. 
다시 말하자면 왜 공동체와 가족을 서로 대조적인 실재로 보는 어법(분명히 
이데올로기적이고 또 정치적인)에 휘말려들어야 할까. 

  여기서 자세히 주장할 수는 없지만 평자는 공동체라는 강박이 가족에 대한 
거개의 근대적 주장을 통제했다고 본다. 가족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탈규범적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보루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나 공동체의 욕구와 기능을 위해 
가족이 착취받고 지배당한다는 주장은 모두 같은 생각이다. 가족과 사회의 
맞짝관계를 인정하는 점에서 이들 주장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는 어떻게든 
넘어서야만 하는 그리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필요가 있는 근대적 담론이다. 비록 
그런 일이 당장 무익한 사변적 논쟁으로 비쳐도 이미 그런 식의 비판과 논전은 
효과를 보여왔다. 그것은 이미 발제문에서도 묻어난다. 담론으로서의 가족과 
일상적 체험으로서의 가족이라는 주장이 이에 다름아니다. 애석하게도 발제자는 
그런 문제의식을 의식하면도 여전히 예의 공동체라는 강박에 갇혀 있는 듯하다. 

  20세기 가족의 분석과 21세기 가족의 미래에 대한 구상에서 발제자가 의지하는 
변수는 개인적 선택과 사회적 유대의 두 가지 차원이다. 가족의 변화된 모습을 
제시할 때 내세우는 제3]터의 약진 역시 이 두 차원을 전제해서 나온 것이다. 
21세기의 가족에 대한 청사진으로 제시한 유력한 대안인 '제3의 방법'이란 결론 
역시 바로 그 두 차원에 대한 나름의 전제 없이는 불가능하다. 평자는 일단 이 
대안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먼저 개인적 선택과 사회적 유대라는 차원으로 가족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미 
종래의 가족에 대한 이해방식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발제자가 언급한 부분적 
공동체를 구상하고 형성하는 성찰적 개인의 존재는 그저 규범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 개인이 가족이라는 담론을 어떻게 조정하고 변형할 수 있는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 주장은 기왕의 가족에 대한 비판적 주장을 간단히 
몰수해버린다는 인상을 준다. 나름의 한계를 갖지만 가족이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 연령주의에 따른 지배와 예속을 낳았다는 비판은 여전히 중요하고 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적 주장이 제기했던 가족의 
짐을 성찰적인 개인의 선택과 책임, 나아가 제3]터의 역할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주장은 어떤 점에서도 분명하지 않다. 

  발제자는 정보기술의 발달, 감성구조의 변형, 성별분업의 상대화 등 많은 예를 
들어 종래의 가족이 수행하던 그런 기능이 문제적으로 될 것이라 본다. 하지만 
그것이 부분공동체의 활성화로 가야 바람직하다는 주장은 비약이다. 사회의 기초적 
단위로서 가족의 역할을 대신하는 다른 부문이 등장해도 종래의 인격적 
결합관계(예컨대 이성애적 부부 및 부모자식 관계)를 에워싸던 가족이라는 담론은 
남아 있을 수 있고 또 강해질 수도 있다. 발제자도 지적하듯 상품화와 국가화에 
의해 가족이 상대화되는 듯 보여도 여전히 가족은 사회의 방향을 가늠하는 중요한 
문제로 간주된다. 따라서 발제문에서 표나게 강조하는 일상적 경험으로서의 가족과 
담론으로서의 가족이라는 차원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듯하다. 게다가 전래의 
가족에서 수행되던 일들이 제3]터에 의해 수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가족의 역할과 
기능이 점차 국가화·사회화되어왔다는 주장과 닮아 있다. 그렇지만 제3]터가 역시 
가족의 일을 아무리 떼어간다고 해도 그 자리를 채우던 담론의 힘은 함께 떼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신보수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담론에 의해 동기화된 가족에 
대한 주장이 득세했다. 그런 점에 비춰볼 때 조은 교수의 글은 수세적이던 비판적 
진영으로부터 나온 진지하고 매력적인 대응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의 
가족 정치에 대한 대응이란 명분에서 종래의 주장과 동일한 담론의 규칙을 견지할 
필요는 없다. 아직은, 가족이 맡던 일을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맡도록 하는 사회의 
가족화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를 나누는 차이에 대해 더 많이 물어볼 필요가 있다.

 

 

■ 발제자의 답변

 

  두 토론문은 발제에 대한 적절한 비판과 함께 발제자의 고민을 공유하는 적당히 
도발적인 논평이다. 한 논평자는 왜 가족을 만들어내는 구조에 좀더 촛점을 맞추지 
않았느냐고 요구하고 다른 논평자는 왜 '관계'로서의 가족에 좀더 주목하지 
않느냐고 다그치는 균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에서는 더이상 근대가 아닌 시대의 
가족을 근대적 인식틀로 예측하고자 하는 우(愚)를 지적하면서 가족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더욱 설명적이기를 요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족과 공동체를 잇고자 
하는 강박충동에 사로잡혀 여전히 사회와 가족을 나누는 진부한 담론의 규칙을 
지킬 것인가를 묻는다. 이러한 이중적 요구와 주문은 바로 가족이 안고 있는 
이중성인 동시에 패러다임 변화를 고민하는 이 시대 인문사회과학도들의 이중적 
고민을 보여준다.

  생물학적 요소와 사회적 요소가 결합된 유일한 제도인 가족에 대한 탐구와 
예측은 이러한 이중성을 뛰어넘기가 힘들다. 봉건적 가족주의에 아직도 묶여 있는 
우리 가족관계의 미래는 근대적 인식틀로나마 설명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정보사회와 관련한 가족의 변화를 이야기한 것은 장밋빛으로 보아서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개념과 정의의 변화 가능성과 어떠한 선택이 있는가를 읽어내고자 한 
것이다.

  좀더 일상적인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보자. 이 글을 쓰다가 대학입시 면접 때의 
상투적인 질문에 대한 한 여학생의 답변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학생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물음에 "세종대왕이요"라고 답하더니 
"후궁을 너무 많이 거느린 것과 왕자를 너무 많이 낳은 것만 빼고요"라고 
덧붙였다. 내가 여교수여서 아첨하고자 했을까? 아니면 도덕적 가족에 대한 가치가 
이렇게 강고하게 우리 사회에 안착한 것일까? 그런 정도의 호기심을 잠깐 품은 
적이 있었는데 이제 더 생각해보니 우리는 '가족 같은 것'에 대해서까지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도록 교육받지 못했다. 미래의 가족에 대한 상상력에서도 
마찬가지일지 모르겠다. 역사적ㆍ비판적 감수성을 키우지 않은 우리들이 만들어낼 
가족과 가족담론, 그리고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은 우리들 그리고 발제자의 
인식틀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족의 경계 넓히기와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지속적 관심 표명은 근대적 지식인의 강박관념일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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