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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6일 금요일 오전 01시 01분 00초
제 목(Title): 김두식/80년대의 위기와 시몬 페레스 


80년대의 위기와 시몬 페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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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전쟁 

1978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조인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여받기는 했어도, 아랍 여러 
나라에 대한 베긴의 투쟁이 이로써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노벨 
평화상은 잘못 주어졌다고 생각해도 된다. 1982년 6월 6일 이스라엘군은 레바논을 
침공한다. 사실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끝나고 1949년 3월 23일 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의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관계는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6일 전쟁 때조차도 레바논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 그런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 9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모두 쫓아내면서부터였다. 후세인 국왕의 학살을 피해 다수의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투사들이 남부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겼던 것이다. 당시 
레바논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약체의 레바논 정부는 125만에 달하는 
기독교인들과 150만 명에 달하는 모슬렘 교도들 사이의 투쟁을 제대로 통제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다. 레바논은 PLO와 시리아군, 좌익 민병대, 기독교 
민병대(팔랑제, Phalange)에 의해 장악되었고, 7년에 걸친 기나긴 내전에 
돌입했다. 남부지역은 PLO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스라엘 접경지역을 PLO에게 
내어줄 수 없었던 이스라엘은 기독교 민병대를 지원했다. 레바논 접경지역에서의 
이스라엘과 PLO의 충돌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1978년에는 이스라엘군이 대규모 
작전을 벌여 레바논 내부로 진입했으나 곧 유엔의 중재에 의해 빼앗은 땅을 
돌려주기도 했다. 1981년의 총선에서 다시 리쿠드 당이 승리하면서, 메나헴 베긴 
수상은 강경파의 대표격인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장군을 국방장관에 
임명했다. 샤론은 곧 남부 레바논의 PLO거점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고, 작전명은 
"갈릴리의 평화"로 명명되어졌다. 6월 6일의 개전과 동시에 전세계는 이스라엘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나섰다. 베긴 수상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작전의 목적은 
단지 PLO로 하여금 현재 국경선에서 40킬로미터 북방으로 물러나도록 하는 것 
뿐"이라고 설명했다. 작전은 라파엘 에이탄(Rafael Eitan) 참모총장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라파엘 에이탄은 1956년 시나이 전쟁 당시 밀타 수로(Milta Pass)로 
낙하된 공수부대 지휘관이었다. 

최초의 목표는 3일만에 성취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순식간에 PLO군을 격파했고, 
다수의 무기를 습득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내친 김에 
PLO의 사령부가 있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로 진격하여 PLO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를 아예 끝장내 버리자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확전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은 6월말 공습을 시작하여 
베이루트에 있는 500채 이상의 건물을 박살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전쟁의 
확산은 침략전쟁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두 달간의 베이루트 포위과정에서 이스라엘군에 의해 자행된 폭력과 잔혹행위는 
두고두고 이스라엘의 오점으로 남았지만 결국 8월 12일 이스라엘군은 동부 
베이루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동부 베이루트 점령 직후 8월 24일 실시된 
총선에서 친이스라엘 인사인 팔랑제 지도자 바쉬르 제마엘(Bashir Gemayel)이 
레바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5년 이후 기독교민병대를 이끌었던 제마엘은 
젊고 잘생긴데다가 영어도 잘했다. 1년 전만 해도 세계의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제마엘이었지만,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그는 졸지에 국제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4일 바쉬르 제마엘은 폭탄테러에 의해 암살당한다.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즉각 서부 베이루트를 
침공했다. 메나헴 베긴은 서부 베이루트 침공을 "바쉬르 제마엘 대통령 암살 이후, 
예상되는 기독교 민병대들의 적대 행위로부터 모슬렘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완전히 고양이가 쥐 걱정해 주는 꼴이었다. 나치 독일의 "방어적 
구금"개념을 연상케 하는 이 발언은 곧 거짓말로 판명되었다. 

9월 16일 남부 베이루트에 위치한 두 군데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는 
이스라엘군이 조명등을 비춰주는 가운데 기독교민병대가 난민촌 안으로 진입한다. 
이 밤 동안 기독교 민병대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극은 최소한 2,300명(이스라엘군 
집계 474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아리엘 샤론은 이런 학살극이 벌어질 줄 전혀 
모르고 기독교 민병대를 지원했노라고 변명하지만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이스라엘 
역시 기독교민병대의 학살행위를 방조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9월 25일 이스라엘에서는 반전시위가 벌어졌다. 국민 전체의 10퍼센트를 넘는 무려 
40만 명이 참여한 이 시위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시위였다. 
이스라엘에서는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카한 특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위원회는 
샤론의 즉각 사임 또는 해임을 권고한다. 

이스라엘군 장교들 중에서조차 이 전쟁의 참혹성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랍지역 공격을 명령받은 지휘관 중 당시 32세로 이스라엘 최연소 
여단장이던 엘리 게바(Eli Geva) 대령은 자신을 여단장직에서 보직해임해 달라고 
요청했다. 차라리 그냥 탱크부대 지휘관을 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부대가 
서부 베이루트로 진입할 것을 명령받을 경우, 양심상의 문제로 자신은 부하들과 
베이루트 시민들을 참혹한 전쟁에 내어줄 수 없으리라는 이유에서였다. 에이탄 
장군, 샤론 국방, 나중에는 베긴 수상이 직접 나서 게바 대령을 설득했지만, 게바 
대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에 큰 충격을 던졌다. 같은 시기 
베긴 내각의 일원으로 이르군 창설자 중의 한 명인 야코브 메리도르(Yaacov 
Meridor)가 이스라엘 점령지인 시돈으로 가 "아랍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다시는 
돌아오게 하지 말자"고 연설하지만, 이스라엘 장교들은 그에 대해 냉담했다. 
오히려 이 장교들 중의 일원은 "침묵에 대항하는 군인들"이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전쟁의 종식을 요구한다. 이스라엘 역사상 전례 없는 일도 일어났다. 약 9개월 
동안 무려 60명의 이스라엘 예비군이 레바논에서의 복무를 거부하고 감옥으로 간 
것이다. 

레바논 전쟁은 TV 매체가 전쟁의 참상을 생생히 증언해준 첫 번째 전쟁이다. 그 
이전까지 주된 보도수단은 신문이었다. 그러나, 1982년 레바논전쟁 때부터 
세계인들은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안방에 앉아 컬러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수 
있게 되었다. 욤 키푸르 전쟁과는 다른 여론이 형성되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시돈을 폭격하던 이스라엘군 전투기가 추락하자, 그 안에 있던 조종사의 시체가 
끌어내려져 시돈 사람들에게 얻어맞는 모습이 직접 방영되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핏덩어리가 되어있는 이스라엘군 조종사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전쟁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주었다. 포로로 붙잡힌 이스라엘 조종사들이 텔레비전에 나와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포로로 붙잡혀 있고, 좋은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야 누구라도 전쟁을 피부로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바논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신문보도를 통해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를 폭격하여 35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는 것과, 미국 ABC의 민완기자들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들고 뛰어다니면서 
폭탄이 터지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은 전혀 다른 효과를 낳았다. 이스라엘군의 
폭격이 지나간 뒤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도 충격이었다. 
공포에 질린 채 공습을 피해 대피하는 사람들과, 이스라엘군을 피해 북으로 북으로 
피난을 떠나는 난민들의 모습도 이 전쟁의 목적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것은 팔레스타인 난민촌 대학살의 현장이었다. 죽은 
아이들의 머리 위로 파리 떼가 날아다니고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아줌마들이 
뒤엉켜진 시체 더미들도 여럿 있었다. 

1983년 2월 이스라엘군은 레바논에서 추운 겨울을 보내야했다. 곳곳에서 
저격병들이 이스라엘군을 공격했고, 여기 저기 깔려있는 지뢰들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 했다. 1983년 5월 레바논과 이스라엘 사이에, 레바논 지역에서의 
모든 외국군(시리아군과 이스라엘군)이 철수하도록 한다는 협정이 맺어졌지만, 
시리아의 거부로 실현되지 않았다. 레바논 전쟁은 메나헴 베긴의 명백한 실패였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로 국민적 합의가 도출됨이 없이 확산된 전쟁이었고, 이 
전쟁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레바논 문제는 아직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점령지구 통치와 경제위기 

1980년대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위기의 시대였다. 점령한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통치도 쉽지 않았다.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분노하고 있었다. 
"여기는 원래 우리 땅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를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는가?" 
점령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이제는 수용소에서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여 청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수용소에서 자란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마치 수십 년 전 나치 
수용소에서 자란 유태인들과 같았다. 그들도 자기 나라를 갖고 싶었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다. 압제자는 아랍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다. 처음 팔레스타인인들이 
피난하여 마련한 거점은 요르단이었는데 거기서 쫓겨나면서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레바논에 정착했더니, 거기서도 쫓겨났다. 레바논 전쟁으로 
팔레스타인인들 뿐 아니라 레바논이라는 나라 자체가 거의 망해 버렸다. 청년들의 
투쟁은 과격해져갔다. 1983년부터 가자 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서 간간이 이스라엘 
점령군과 팔레스타인 데모대 사이의 투석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안보보다 더 심각한 것은 경제문제였다. 1984년의 인플레는 무려 400퍼센트에 
달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보다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더 
경제적이라는 농담이 나돌았다.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돈의 가치가 엄청나게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왕 그럴 바에야 비싼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이었다. 23대 1을 유지하던 달러와의 환율은 1,500대 1까지 치솟았다. 나중에는 
가격을 달러로 붙이는 가게가 생겼을 정도였다. 돈이 휴지처럼 인식되는 
상황이었다. 국제수지도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이었고, 1983년 11월 붕괴한 
주식시장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외환보유고는 24억불에 불과했다. 이런 
경제상황을 초래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사회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집권한 우파의 베긴 정권이 무리하게 자본주의 시장경제이론을 도입하려 했다는 
것과 레바논 전쟁에 쏟아 부은 돈이 주된  원인이었다. 잦은 전쟁으로 인한 
상습적인 경제구조 불안정과 오일쇼크도 이러한 사태를 불러오는데 일조했다. 
인플레이션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근로의욕을 앗아갔고, 불로소득계층의 배를 
부르게 했다. 지금 우리 나라가 IMF 위기를 맞고 있지만, 14년 전 이스라엘의 
상황은 우리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4년 7월 23일 총선이 치러졌다. 은퇴한 베긴의 뒤를 이어 
리쿠드를 이끌고 있던 이츠하크 샤미르와 노동당의 페레스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고, 노동당 연합이 44석을, 리쿠드가 41석을 차지했다.  극우정당이 6석, 
국가종교당이 4석, 기타 종교당이 3석, 기타 좌파정당이 3석, 중립적인 자유주의자 
그룹이 7석을 얻었다. 중립적인 자유주의자 그룹은 1969년부터 1996년 사이에 이합 
집산을 거듭하며 이름이 무려 10차례나 바뀌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의 정당이름을 
굳이 거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선거 결과는 노동당 연합의 승리로 나타났으나, 연정구성이 불가능했다. 연립이 
가능한 기타 정당들이 모두 4석 미만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끌어안고 연정을 구성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워낙 다른 정당들이라 두세 개의 정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할 방법은 없었다. 이스라엘 선거제도가 지닌 모순이 극대화된 
시점이었다. 

시몬 페레스의 집권 

결국 노동당 연합과 리쿠드가 연정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좌우를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총리는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샤미르가 2년씩 돌아가면서 맡기로 했다. 사실 당시 시몬 페레스의 측근들은 그가 
총리가 되는 것을 만류했다. 누가 총리가 되어도 바닥에 떨어진 경제를 살릴 
방법은 없었다. 경제를 살리려고 하면, 어차피 무리한 처방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페레스의 정치생명에 치명적 상처가 될 수 있었다. 그런 시기에 총리를 
맡아 정치적 상처만 입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페레스는 스스로도 
고백하고 있다시피 전혀 경제문제 전문가가 아니었다. 마약과 같이 경제를 좀먹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정확한 이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페레스는 이 
위기를 기회로 생각했다. 

시몬 페레스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도자들과는 다소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이다. 
1923년 8월 1일 폴란드의 비쉬네바에서 태어나 1931년 아버지를 따라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그는 소년시절부터 시오니즘 청년조직에 가담하여 뛰어난 
연설능력과 조직력을 인정받았다. 그의 능력은 바로 벤-구리온의 눈에 들었고, 
벤-구리온은 그와 같은 젊은이들을 국가건설의 동량으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또래의 대부분이 하가나에서 군 지도자로 성장했음에 비해 그는 1946년 하가나 
가입과 동시에 인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덕분에 그는 실전에 참여한 경험이 
없다. 1951년부터 국방부 관료생활을 시작하는데, 당시 그의 주된 임무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기를 사오는 것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스라엘과 프랑스 
군사협력관계의 실제적인 협상자로서 그의 공헌은 지대했지만, 인지도는 낮았다. 
모세 다얀이나 이츠하크 라빈이 한두 판의 전쟁으로 바로 국민적 영웅이 된 것과는 
전혀 다른 정치입문 과정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벤-구리온이 키운 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는 훗날 그가 노동당 당수로 선거에 나설 때마다 
패배하는 주된 원인이 된다. 

1959년 12월 17일 그는 벤-구리온에 의해 국방차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그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벤-구리온은 그를 구해주는 든든한 후원자가 된다. 이갈 
알론이나 이츠하크 라빈 등 대부분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벤-구리온의 강아지" 
페레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1965년 벤-구리온이 노동당을 깨고 나와 라피를 
조직했을 때, 당연히 페레스는 모세 다얀과 함께 벤-구리온을 따라갔다. 그러나, 
이때도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모세 다얀이었지 페레스가 아니었다. 6일 
전쟁에 뒤이어 페레스도 몇 개의 장관직을 거친다. 교통장관이나 통신장관 등의 별 
볼 일 없는 자리들이었다. 욤 키푸르 전쟁의 책임추궁으로 인한 노동당의 공백은 
라빈이나 페레스에게 중요한 기회가 되었고, 이때부터 두 사람의 경쟁과 
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 라빈 정권 하에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엔테베 
작전이었고, 이것은 페레스 평생의 자랑거리가 된다. 그리고, 1977년 라빈이 
외국환관리법위반으로 실각하면서, 페레스의 노동당 시대가 시작되지만, 그는 
번번이 리쿠드에 패해 총리가 될 기회를 놓쳤다. 1984년 드디어 그의 앞에 
총리자리가 돌아왔고, 그는 도저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다. 

페레스의 경제개혁 

1984년 페레스의 총리 취임과 함께 경제보좌관들은 즉각적이고 과감한 조치를 
건의했다. 실업률의 증가를 감수해야 하는 30퍼센트의 평가절하조치와 군사적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50퍼센트의 국방예산삭감, 물가동결, 정부와 민간부문을 
포함한 전면적인 임금 감소 등이 그것이었다. 하나같이 그의 정치생명을 걸어야 
할만큼 극단적인 조치들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설득력이 있을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국민지지의 상실을 각오해야 했다. 그는 이스라엘내 모든 경제적 
이해집단들의 이해를 구하기로 작정한다. 그는 우선 히스타드루트(Histadrut) 
노동조합 사무총장과 경영자연합의 지도자들, 재무장관 등으로 구성된 
경제위원회를 조직했다. 우리로 치자면 노사정 위원회인 셈이었다. 그러나, 
노동조합 측은 실질임금수준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부의 
예산삭감의지를 믿지 않았다. 경영자들이 이윤이 포기하리라고 믿지도 않았다. 
페레스의 조치가 월급쟁이들의 봉급만 깎아먹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입장이었다. 위원회에 참여한 세 명의 경영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인플레를 
잡기 위해 수출이 줄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만약 개혁조치를 강행하면 
기업들이 도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 관계자들은 그들대로 자기 부서의 
감축에는 저항하면서도 인플레에 대한 걱정만 늘어놓고 있었다. 

페레스는 첫 시도로 3개월간의 제한된 기간 내에서만 임금과 물가를 동결하기로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한다. 그 후 이 조치는 합의를 거쳐 3개월이 더 연장되어 
시행된다. 그러나, 초기에 효과를 보이던 이 조치도 1985년 5월 중순에 이르러 
효과는 사라져 갔다. 인플레이션 율은 4월 한 달 동안에만 15퍼센트에 이르렀다. 
경제는 다시 침몰해 가고 있었다. 1985년 6월 1일 다급해진 페레스는 그의 
경제보좌관들과, 경제장관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들을 모아놓고 
대책마련을 위한 회의를 갖는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회의에서 모다이 재무장관은 
"나는 이제 더 할말이 없다"며 손을 들어버린다. 페레스는 이렇게 포기할 수 
없었다. 몇몇 참석자들이 물가안정대책의 필요성을 언급하였고, 몇 가지 
프로그램들이 논의되었다. 일단 실무팀을 만들어 물가안정대책의 세부지침을 
수립하기로 하고 헤어진다. 이 실무팀에는 보다 광범위한 경제전문가 그룹이 
참여하였고, 3주 동안 매일 만나 계획을 세우면서도 이 계획이 누설되지 않도록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이틀에 한번씩 이 실무팀 책임자가 진척상황을 
페레스에게 보고했고, 1주일에 한번씩 페레스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6월 28일 마침내 실무팀에 의한 경제 안정화 대책이 수립되었다. 매일매일 
반복되어오던 평가절하를 중단하는 대신 1회의 과감한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현존하는 물가통제 메커니즘은 더 강화하기로 했다. 정부기관의 재정적자 감소를 
위해 강력한 예산삭감을 시행하기로 했고,  임금상승에 따른 가격상승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월간 생활비용 증가액 산출절차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했다. 
금융긴축정책을 도입함과 동시에, 외자도입을 위해 시장을 대폭 개방하기로 했다. 
이 새로운 프로그램은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리쿠드 지도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페레스는 한 명 한 명 설득을 시작했다. 노동당 내에서는 이츠하크 라빈 
국방장관이 이 방안에 반대했다. 라빈은 자기 손으로 5000억불의 국방예산을 
삭감할 수는 없다고 버텼다. 그러나, 모두들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어렵게 내각의 동의를 얻은 페레스의 다음 장벽은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과의 
협상을 통해 평가절하는 33퍼센트의 범위 내에서, 물가 상승은 28퍼센트의 범위 
내에서, 그리고 임금상승은 15퍼센트 범위 내에서 동결하기로 합의한다. 실제로 
이는 평균적인 이스라엘인들에게 상당한 수준의 구매능력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허리를 졸라매지 않는 이상에는 새로운 경제안정화 
대책이 정착할 시간을 얻을 수 없었다. 

경제안정화 대책이 시행되고 한 달 뒤인 8월부터 서서히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플레는 월 2.5퍼센트 수준으로 떨어졌고, 연말에는 월 1.5퍼센트 
수준으로 낮출 수가 있었다. 경제안정화 대책수립에 참여했던 학자들로부터 "뭔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희망적인 관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페레스가 
수립한 이 대책은 성공했고, 현재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학과에서 경제개혁의 
모델로 언급되고 있다. 이 대책이 성공하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는 국민의 
신뢰였다. 정부가 문제해결방안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함으로써 경제안정화대책은 자동적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시몬 페레스에 대한 
국민 지지율이 80퍼센트를 상회하는 이변도 일어났다. 페레스가 국민의 신뢰를 
받는 대중정치인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2년간 경제회생에 주력한 페레스는 
1986년 약속에 따라 총리직을 이츠하크 샤미르에게 돌려준다. 

인티파다의 시작 

페레스로부터 총리직을 넘겨받은 이츠하크 샤미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다른 
위기였다. 한때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며 반영투쟁전선에 나섰던 이츠하크 
샤미르였으나, 이제는 똑같은 구호를 내걸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과의 싸움에 
나서야 했다. 1987년 12월 9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 4명이 이스라엘 트럭에 
치어 죽는 사고가 일어나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보다 적극적인 투쟁에 나선다. 
처음에는 돌을, 그 다음에는 화염병을 던졌고, 나중에는 총을 잡았다. 난민촌에는 
심심하면 팔레스타인 국가 깃발이 올라갔다. 이스라엘군이 깃발을 내리면, 또 
깃발을 올렸다. 심지어 깃발을 올리다 이스라엘군 총에 맞아 죽어도 이 일은 
계속되었다. 이들의 상징은 새총이었다. 무기가 없으면 Y자 모양의 새총에 돌을 
걸어 쏘아댔기 때문이었다. 인티파타가 일어난 첫 두 달 동안만 해도 최소한 
51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스라엘군에게 살해당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27개의 팔레스타인 난민 수용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 
투쟁은 이스라엘만 놀라게 한 것이 아니었다. 튀니스에 가 있던 PLO도 놀랐다. 
자연발생적인 봉기였기 때문에 PLO조차도 미처 예상을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산시키고 조직화하는 것은 PLO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의 몫이었다. 

이것이 바로 "인티파다"(Intifada, 팔레스타인 봉기)의 시작이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었을 때 가자 지구에는 50만 명의 가자 지역민과 44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난민들의 절반 이상은 아직도 난민 수용소에서 살고 
있었다. 요르단강 서안의 경우, 약 37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있었고, 그 중 
10만 명이 아직도 난민 수용소에 살고 있었다. 인티파다가 시작되면서 많은 
팔레스타인 난민수용소는 이스라엘군의 수용소 진입을 저지했다. 팔레스타인 
교사들은 이스라엘군을 보면 돌을 던지도록 가르쳤다. 이들의 극렬한 투쟁은 많은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과연 점령지를 계속 유지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다윗이고, 아랍이 골리앗이었으나 이제는 
입장이 바뀌어버렸다. 

병역의 의무를 마치기 위해 군에 들어온 이스라엘 젊은이들의 주된 근무지역이 
가자와 요르단 서안으로 변했다. 조국의 국경선을 지킨다는 관념이 약해지는 대신, 
점령군으로서의 역할이 강조되었다. 이스라엘군은 인티파다에 대해서도 공격적으로 
대처했다. 팔레스타인인 정보원을 고용하여 내부정보를 수집하고, 인티파다 
참여자들을 색출, 공격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이에 대한 팔레스타인 투사들의 
대응은 이스라엘의 첩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보복이었다. 1991년 
이스라엘군의 집계에 따르면 처음 인티파다가 시작된 이래 총 1,225명의 아랍인이 
사망했는데, 그 중 697명은 이스라엘군에게 살해당한 것이었고, 나머지 528명은 
아랍인의 손에 사망한 것이었다. 무려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동족의 손에 죽어간 
것이다. 

1988년 2월 11일, 팔레스타인 내부로부터 통일된 의견을 끌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새로운 팔레스타인조직이 출범한다. 공식명칭이 
이슬람 저항운동(Movement of Islamic Resistance)인 이 조직은 통상 그 약자의 
히브리어 발음에 따라 "하마스(Hamas)"로 불리게 된다. 하마스는 스스로를 모슬렘 
형제회(Muslim Brotherhood)의 한 지류로 규정지었다. 모슬렘 형제회는 이집트의 
이슬람 근본주의자 그룹을 대표하는 단체였다. 이들은 또한 자신들은 지하드의 
전통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지하드(Jihad)"는 거룩한 전쟁을 의미하는 
말로, 그 뿌리는 1936년의 아랍인 폭동으로 거슬러간다. 하마스의 목표는 
팔레스타인 전역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태인 
국가란 있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주된 적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목표에 동의하지 않는 모든 아랍인들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공격의 
수단은 무차별 테러였다. 하마스는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유일의 기구로 
인정하는 것도 거부했다. 이스라엘과 협상하는 모든 단체는 그것이 설사 PLO라 
하더라도 하마스의 적이었다. 1992년부터 이스라엘과 PLO의 평화협상이 
진행되면서, 하마스의 극렬한 테러활동은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94년 4월 
6일부터는 새로운 형식의 투쟁방법이 도입된다. 이른바 자살폭탄테러였다. 이슬람 
낙원의 건설을 꿈꾸는 꽃다운 팔레스타인 젊은이들이 폭탄을 가슴에 품은 채 
버스나 공공장소로 뛰어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인티파다는 1992년까지 약 5년간 진행된다. 인티파다가 이스라엘에게 준 교훈은 더 
이상 힘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통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인티파다 초기에 
강경 진압으로 이를 해결하려 했던 이츠하크 라빈은 약 5년간 지속된 
팔레스타인인들과의 투쟁과정에서, 평화 이외의 다른 길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신생 저항세력의 대두로 입지가 좁아진 PLO의 아라파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로서 중동평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이 새로운 국면을 주도할 사람은 
이츠하크 라빈과 아라파트였다. 

참고서적 

Shimon Peres, Battling for Peace, Random House/NY, 1995 
Itzhak Shamir, Summing Up, Little Brown and Company/NY, 1994 
Ariel Sharon, Warrior, Somon and Schuster/NY,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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