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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6일 금요일 오전 01시 04분 15초
제 목(Title): 김두식/평화의 노래,이츠하크 라빈 


평화의 노래, 이츠하크 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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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노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이 처음부터 대규모 군중집회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5년 10월 5일 이스라엘 국회가 제2차 오슬로 협정을 아슬아슬하게 
비준함에 따라 이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우파정당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는 
시점이었다. 리쿠드의 젊은 당수 베냐민 네탄야후는 그를 배신자로 공격하며 
총리직 사퇴를 촉구하고 있었다. 제2차 오슬로 협정으로 인해 가장 먼저 포기될 
요르단 서안 정착민들의 반발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에 대한 고육책으로 구상된 
것이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의 대규모 군중집회였다. 군중집회가 예정된 1995년 
11월 5일 라빈의 하루는 바쁜 일정으로 꽉 차 있어서 그가 집회에 참석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10월 10일 히브리 대학에 재학중인 랍비로서 요르단 서안 
정착민인 나탄 오피르(Natan Ophir)가 라빈에게 상처를 입히려고 달려든 사건이 
일어나면서 라빈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라빈에게도 지지세력을 과시할 기회가 
필요했다. 평화를 위한 노력이 자신의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했다. 
총리를 노리는 음모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고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라빈은 
적어도 한가지 사실만은 확신하고 있었다. "유태인이 유태인을 죽일 리 없다"는 
것이었다. 

11월 5일 저녁 8시. 라빈은 행사장에 도착했다. 무려 25만 명의 참가자들이 
이스라엘 왕들의 광장(Kings of Israel Square)을 메우고 있었다. 원래 5만 명을 
채우기도 힘들리라고 예상되어 있던 집회였다. 라빈은 이 엄청난 숫자에 크게 
고무되었다. 라빈의 날카롭고 열정적인 연설이 시작되었다. 라빈은 먼저 
참가자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저 자신도 감동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저는 폭력에 반대하고, 평화를 지원하고자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는 27년간 군인이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싸움을 하던 시절에는 평화를 향한 기대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믿습니다. 엄청난 기회입니다.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는 기회입니다. 폭력이 이스라엘 민주주의의 기초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폭력은 거부되고, 비난받아야 마땅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방법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방법입니다. 우리의 협상 파트너도 이제는 
테러리즘을 포기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앞에 고통 없는 길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평화의 길은 전쟁의 길보다는 낫습니다. 저는 이스라엘군 가족들의 고통을 보아온 
군인으로서, 또 국방장관으로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가  포괄적인 
평화를 얻어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스라엘군 
가족들과 우리 아이들, 그리고 손자들의 안전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집회는 
이스라엘 국민들, 전세계의 유태인들, 아랍대중, 그리고 세계만방에 이스라엘이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며, 평화를 지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모인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그들 
모두의 도움을 필요로 했다. 연설을 마친 후 그는 오른쪽에 서 있던 페레스 
외무장관을 포옹했다. 지겹도록 오랜 경쟁과 협력관계의 페레스였다. 군중들은 
환호했다. 가수 미리 알로니(Miri Aloni)가 노래를 시작했다. 라빈도 군중들과 
함께 평화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1960년대 말에 만들어져 한때는 
패배적이라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했던 곡이었다. "태양이 떠올라 아침의 빛을 
비추게 하라"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언젠가 평화의 날이 올 것이라고 입으로만 
말하지 말고, 그 날이 오게 하라"는 외침으로 끝나고 있다. 노래가 끝나고 라빈은 
이 가사가 적힌 종이를 조심스럽게 접어 그의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집회가 끝나면서 라빈은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인사를 나누면서 자신의 
승용차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텔 아비브에 있는 바-일란(Bar-Ilan) 대학 법대 
학생인 25세의 우파 극단주의자 이갈 아미르(Yigal Amir)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라빈의 뒤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세 발의 총성이 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라빈이 쓰러졌다.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를 다치셨습니까?" 
라빈이 대답했다. "등을...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요." 그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피묻은 평화의 노래 쪽지가 나왔다. 이츠하크 라빈. 향년 
74세였다. 자신의 확신과는 달리, 유태인의 손에 살해된 최초의 이스라엘 
총리였다. 

라빈의 소년시절 

이츠하크 라빈은 1922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나 아버지는 모두 
팔레스타인 노동운동 그룹의 핵심에 있었다. 훗날 라빈이 "저의 어머니도 
히스타드루트(Histadrut, 유태 노동 인민연합, 벤-구리온이 이끌던 노동조합) 
소유의 건설회사에서 경리로 일했습니다."라고 회상하자, 당시 총리이던 골다 
메이어는 "아니야. 내가 경리였고, 자네 어머니는 사무원이었네"라고 정정했을 
정도였다. 벤-구리온은 라빈을 볼 때마다 "자네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내 덕이야. 미국에서 자네 아버지를 유태인 부대에 지원하게 한 
것이 바로 나였거든"이라고 말하곤 했다. 어린 시절, 그의 집은 이스라엘 좌파 
지도자들의 회합장소였다. 

그의 아버지 느헤미야는 신념이 강하고 검소한 사람이었다. 러시아 출신으로 
미국으로 이주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벤-구리온, 벤-즈비의 설득을 받고, 
그들과 함께 팔레스타인으로 와 영국군 소속의 유태인 제38대대에 참여했다. 
유태계 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대대로도 불렸던 부대였다. 
이곳에서 그에게 처음으로 히브리어를 가르쳐 준 사람은 유명한 우파지도자 지브 
야보틴스키(Zeev Jabotinsky)였다. 아직 시오니즘 운동의 좌우대립이 심각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일찍이 지역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자였고, 아들이 이스라엘군 
최고지도자였음에도 그는 평생을 노동자로 자처했다. 심지어 1960년대 말 텔 
아비브의 아파트에서 혼자 살 때는 전화를 놓지 않았을 정도였다. 제발 전화를 좀 
놓으라고 사정하는 딸 라헬에게는 그는 "내가 일하는데 전화가 무슨 필요가 
있어"라고 대답했다. 라빈의 어머니는 매우 권위적이었고, 유머감각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열심히 일했고, 일체의 오락을 
거부했다. 그녀는 1937년 심장질환과 암으로 사망했다. 늘 차갑다는 평을 들었던 
라빈의 성품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다. 

수줍음이 많았던 라빈의 꿈이 처음부터 군인은 아니었다. 카두리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미국의 캘리포니아-버클리 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 at 
Berkeley)에서 장학금을 받아 미국유학을 떠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팔레스타인 여건은 그를 미국으로 떠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4년 선배인 이갈 알론(Yigal Allon)으로부터 군사교육을 받았던 그는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팔마하의 부름을 받았다. 그의 첫 임무는 영국군과 함께 레바논 국경을 
넘어 비시프랑스군 후방을 정찰하는 것이었다. 작전에 앞서 영국군 장교는 
"너희들은 정규군이 아니며 따라서 포로가 될 경우 제네바 협약에 의한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경고한다. 야음을 틈타 진행된 작전은 성공적이었고, 라빈은 
무사히 복귀한다. 그러나, 그 날은 팔마하 역사에서 잊혀질 수 없는 날이었다. 
같은 밤 다른 곳에서 작전에 임한 모세 다얀이 그날 왼쪽 눈을 잃은 것이다. 

팔마하 참여와 독립전쟁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그는 영국군에 체포된 불법 이민자들을 구출하는 
특별조직을 이끈다. 나치대학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나 영국군에 의해 불법 
이민자로 붙잡혀 수용소생활을 하는 200여명의 유태인들을 구출한 그의 경험은 
1947년의 엑소더스호 사건과 적당히 합쳐져서 레온 유리스의 유명한 소설 
"엑소더스"의 소재를 제공한다.  그러고보면 영화 "엑소더스"의 주인공 폴 뉴먼의 
인상이 라빈과 많이 닮았다. 1948년 4월 15일 예루살렘 전선을 담당하는 하렐 
여단(Harel Brigade) 여단장으로 임명된 라빈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라트룬 요새 공격임무를 맡는다. 여기서 그의 부대는 200명이 전사하고 
600명이 부상한다. 그의 부대는 큰 손실을 입어가며 예루살렘 신시가를 확보하는데 
성공하지만, 동예루살렘의 구시가를 공격할 병력과 무기는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이갈 알론과 미군대령출신 미키 마커스(David Markus의 별명이 Mickey였다), 
그리고 라빈은 벤-구리온에게 라트룬 요새 공격을 포기할 것을 몇 번이나 
요구하지만, 예루살렘에 집착하고 있던 늙은 시오니스트는 결코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엄청난 병력손실을 보게 된 라빈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 
벤-구리온을 비난하고, 이 책은 심각한 논란의 대상이 된다. 라빈은 이때 포기한 
동예루살렘 땅을 정확히 19년 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으로 다시 밟게 된다. 

1948년의 짧은 휴전기간 동안 라빈은 레아(Leah)와 결혼한다. 그녀는 텔 아비브의 
부유한 독일계 유태인가정에서 자라났다. 1945년 레아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진 
라빈은 말없이 그녀의 주변을 오랫동안 맴돌았다. 한 동네에 살고 있기는 했지만 
둘을 연결해 줄 끈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비로소 레아는 아무 
말없이 자기를 좇아 다니고 있는 남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이것이 
고집불통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라빈의 개성이 드러난 
라빈식 구애법이었다. 같은 시기 레아가 팔마하에 참여했고, 우연히 그녀는 라빈이 
부지휘관으로 있는 부대에 배속된다. 훗날 라빈은 "이때가 그녀가 내 지휘하에 
있은 흔치않은 시기중의 하나였다"고 회상했다. 평생동안 레아는 늘 라빈을 
지휘(?)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그는 "평생에 가장 어려웠던 사건 중의 
하나"였던 알타레나 호 사건을 만난다. 이갈 알론에게도, 모세 다얀에게도, 
라빈에게도 동족에게 총을 겨눠야 했던 이 사건은 비극적인 것이었다. 

독립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라빈은 이갈 알론 밑에서 남부전선의 작전참모로 
일한다. 이갈 알론과 이츠하크 라빈의 지휘스타일은 많이 달랐다. 우지 
나르키스(Uzi Narkis) 장군은 두 사람을 이렇게 비교했다. "이갈 알론은 
지휘관이었지만, 당신이 마지막까지 친구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모두 솔직히 
표현했습니다. 우선 그는 우리를 껴안았습니다. 이츠하크 라빈은 결코 우리를 
껴안지 않았습니다. 만약 라빈이 당신 얼굴에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면 그는 당신을 
붙잡지 않고 그냥 때리거나 아니면 '실례합니다'라고 한 후 펀치를 날렸을 
것입니다.  알론의 부하들은 알론을 사랑했지만, 라빈의 부하들은 라빈을 
존경했습니다. 캠프 화이어를 할 때면 라빈은 최선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노래를 부를 줄 몰랐습니다. 알론은 '내 평생의 자산이 있다면 그것은 
친구들'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나는 라빈이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이갈 알론은 어려서 갈릴리의 아랍인들과 어울리면서 적절히 
우회적으로 자신의 의사표시를 하는 걸 배웠지만, 라빈은 언제나 직선적이었다. 
그처럼 직선적인 태도는 라빈의 자산이었다. 

팔마하 해체와 변두리 인생 

1949년 10월 14일 팔마하 출신들은 팔마하 해체식을 거행하기로 계획한다. 
자신들을 완전히 해체해 버린 벤-구리온에 대한 항의성격을 띤 집회였다. 
이스라엘군에 참여한 팔마하 지도자들에게는 이 집회 참가가 금지되었다. 독립전쟁 
때부터 라빈의 능력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벤-구리온은 라빈이 새로운 군부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를 원했다. 라빈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같은 날 
벤-구리온은 남부전선의 상황을 설명해 달라며 라빈을 식사에 초대했다. 총리의 
초대를 받았기 때문에 집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는 변명거리를 라빈에게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이 식사에서 라빈은 벤-구리온에게 집회참가를 금한 이유를 물었다. 
벤-구리온은 단지 군대의 통일성을 위해 그런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마팜당과 가까운 이갈 알론을 제거하기 위한 것임이 명백했다. 라빈은 옛 
전우들과의 신뢰와 우정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그는 곧 정중히 사과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입고있던 이스라엘군복을 벗고 팔마하 복장으로 
갈아입은 후 집회에 참석했다.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한 사람들은 모두 군사재판에 
회부되었고, 대부분은 군에서 떠나 마팜 당에 참여했다. 라빈은 군에 남았지만, 
벤-구리온은 더 이상 그를 중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갈 알론의 후임으로 부임한 
모세 다얀은 라빈을 부사령관으로 계속 근무하게 하지 않았고, 그는 다른 보직을 
찾아야 했다. 덕분에 비교적 진급에서 처진 그는 1963년 벤-구리온이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 196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참모총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늦은 진급이 그에게 손해가 된 것은 아니다. 벤-구리온에게 단 
한번 도전한 대가는 컸지만, 남들보다 늦은 진급을 한 덕에 그는 1967년 6일 전쟁 
당시의 참모총장으로 위대한 승리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승리가 이후 
30년간 그의 정치적 성공을 보장해 주었다. 

1952년 영국 왕립참모대학에 유학하고 돌아온 후, 라빈은 1956년 모세 다얀 
참모총장에 의해 북부전선 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북부전선은 시나이 
전쟁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계속 물을 먹으면서 그는 몇 번이나 군대를 
떠날 결심을 한다. 1959년에는 확실히 마음을 정하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의 
유학을 준비하지만, 그 무렵 아랍 여러 나라들과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고 동원령이 
떨어지면서 그의 미국 행은 또다시 좌절된다. 벤-구리온은 1961년 주르(Tzur)를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면서, 다음 번에는 꼭 라빈에게 총장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이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벤-구리온에 따르면 참모총장을 하기에 
라빈은 너무 신중하다는 것이었다. 벤-구리온은 자신에게 도전했던 사람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그래도 라빈은 열심히 일했다. 그의 치밀함은 언제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훗날 이스라엘 대통령을 지낸 하임 헤르조그(Chaim Herzog)는 당시 
라빈과 함께 일하고 있었다. 헤르조그는 라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에 
참모본부에는 이스라엘군에서 컴퓨터가 고장난다고 해도 걱정할 것이 없다는 
농담이 유행하고 있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군에는 이츠하크 라빈이 있기 
때문이었죠." 

6일 전쟁 

1967년 6일 전쟁의 승리는 라빈의 이런 치밀함 속에서 준비되었다. 6월 7일 
모르데카이 구르가 지휘하는 공수부대가 사자문을 뚫고 예루살렘 구시가로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라빈은 모세 다얀 국방장관과 함께 당장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여러분도 모세 다얀, 라빈, 우지 나르키스가 나란히 사자문으로 들어서는 
사진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 날의 필름을 보면, 
이스라엘 군 병사들이 성전 서쪽 벽(이른바 통곡의 벽)에서 철모를 벗은 채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한쪽 옆에는 모르데카이 구르가 피로에 
지친 모습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기관총을 붙잡은 채로 무전기 통신을 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 여단장 급들도 잠은 땅바닥에서 잤다. 지휘관들이 사병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것은 이스라엘군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이스라엘군에 
의한 예루살렘 점령사건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쓴 회고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치인이든 소설가든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그의 회고록에는 예외 없이 1967년 동부 예루살렘 점령후 서쪽 벽 앞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씩 들어있다. 6일전쟁이 끝나면서 너도나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 
사진부터 한 장 찍은 것이다. 성전 서쪽 벽 앞에서 찍은 그들의 포즈는 마치 
제주도에서 신혼여행한 부부들의 신혼여행 사진을 연상케 한다. 

6일 전쟁 직후 에쉬콜 총리와 만난 이츠하크 라빈은 자신을 주미 대사로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전쟁 종료와 함께 미국을 비롯한 세계열강과의 외교관계강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던 시점이었다. 라빈은 이제 정치의 중심에 서고 싶었고, 
그가 선택한 것이 워싱턴의 외교무대였다. 다른 경쟁자들도 많았지만, 누구도 6일 
전쟁의 영웅을 이길 수는 없었다. 1968년 2월 17일 워싱턴에 부임한 그의 일성은 
"나의 목표는 중동지역에 평화를 가져가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이 목표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나는 최소한 이스라엘이 더 강해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제가 
직전 직업(참모총장을 말함)에서 일하는 동안, 저의 우선적인 과업은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첫 번째 과업에 실패했을 때 나는 전쟁에서 
이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과업에서 실패하면 두 번째에는 반드시 
성공해 왔습니다"라는 것이었다. 그의 새로운 임무는 평화였다. 비행기에서 
내려오는 그에게 한 기자가 "이스라엘이 최고의 군인을 미국으로 보낸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스라엘에서는 모두가 군인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이 장군이 될 뿐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과 같은 
형편에서 군인이 정치를 하거나, 외교를 담당하는 것이 별스러울 것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 표현은 정치에 참여한 우리 나라 장군들이 즐겨 인용하는 말이 
되었다. 

그 때부터 5년간 라빈은 미국대사로 일한다. 아랍 게릴라들의 테러가 본격화되던 
이 시기에 그는 미국에서 국제정치감각을 배웠고, 오랜 기간 미국에 머문 까닭에 
1973년 10월의 욤 키푸르 전쟁에서 한발 떨어져 있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일생일대의 정치적 기회를 만나게 된다. 이미 1973년 봄 라빈은 미국에서 돌아와 
국회의원 후보명단에 올라 있었지만,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 
똑같이 6일 전쟁의 영웅인 모세 다얀이 욤 키푸르 전쟁의 책임문제로 곤욕을 
치르고 결국 내각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미국대사직은 그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다. 라빈의 후보순위(우리 나라 전국구를 생각하면 된다)는 
20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회의원이 된지 6개월도 안 되어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다. 그의 앞 순위자 중에서는 욤 키푸르 전쟁의 책임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첫번째 총리임기 

전 수상 골다 메이어는 선거를 이겨놓고 나서도 내각을 구성하지 못했고, 결국 
아그라나트 위원회의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골다 메이어는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노동당의 진짜 실세들이 모두 국민들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이츠하크 라빈과 
시몬 페레스가 노동당수직을 놓고 대결을 벌인다. 298대 254로 승리는 라빈의 
것이었지만, 총리에 당선된 이츠하크 라빈 앞에 놓여진 상황은 첩첩산중이었다. 욤 
키푸르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은 이스라엘의 1년치 국민총생산과 맞먹었다. 
해야 할 일은 태산같은데 같이 일할 사람들이 마땅치 않았다. 그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신화 속의 인물들이 이끌어왔다. 예컨대 국방에는 모세 다얀, 외교에는 
아바 에반(Abba Eban), 경제에는 사피르(Sapir) 하는 식으로 이스라엘 정치에는 각 
분야를 상징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욤 키푸르 전쟁 이후에는 그 사람들을 
다시 쓸 수가 없었다. 국민들이 새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다. 결국 라빈은 자신의 
영원한 스승인 이갈 알론을 외무장관으로, 시몬 페레스를 국방장관으로 임명한다. 

페레스를 국방장관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고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몬 페레스를 국방장관의 적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페레스가 늘 
국방업무의 중심에 있기는 했지만, 실전경험이 없었다. 벤-구리온의 눈에 들어 
젊은 날부터 무기 구입 등 대외업무에 주로 종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페레스는 노동당의 2인자였고, 그에 걸맞은 자리가 주어져야 했다. 결국 자신이 
국방의 진정한 전문가라고 생각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시몬 페레스 국방장관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다. 3년간의 총리임기 동안 
그럴 듯하게 해 낸 일이라고는 엔테베 작전밖에 없었던 그의 첫 총리생활이었다. 
그나마 페레스는 엔테베 작전도 자신의 공이며, 라빈 총리는 끝까지 
우유부단했다고 비난했다. 

그의 총리 재임 중에는 평화를 위한 각종 시도가 이루어졌다. 시나이 반도를 
이집트에게 돌려주는 대신, 완전한 평화협정을 맺는 방안이 사다트와 라빈 사이에 
추진되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라빈의 아들은 시나이 전선에서 탱크 
소대장으로 싸우고 있었고, 그의 사위는 같은 곳에서 탱크 대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평화를 향한 그의 열망은 절실한 것이었으나, 그 열매는 다음 정권의 
몫이었다. 1978년과 79년에 이루어진 중동평화회담의 주인공은 메나헴 
베긴이었지만, 실제로 그 때 이루어진 협상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라빈 정권 
하에서 구상되었던 것이었다. 라빈은 자신의 임기 중에 이집트와의 잠정협정을 
맺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었어도 이 기간 중 요르단이나 
모로코와는 상당한 신뢰가 구축되었다. 

그러나, 라빈의 첫 총리임기는 아내인 레아 라빈의 미국내 은행구좌가 문제되면서, 
불명예 퇴진으로 마감되었다. 이 사건의 진상은 간단하다. 1977년의 총선을 앞둔 
노동당내 경선에서 페레스를 누르고 다시 당수가 된 라빈은 제대로 선거전에 
돌입하기도 전인, 그 해 3월 아내와 함께 미국을 방문한다. 그 때 레아는 바쁜 
일정을 쪼개 미국대사 시절부터 가지고 있던 은행 구좌 두 개를 닫기 위해 내셔널 
뱅크를 찾는다. 두 구좌를 합친 예금액수가 총 2,000불(우리 돈으로 약 
200-300만원)이었다. 라빈 부부가 이스라엘로 돌아온 뒤 이 은행구좌가 폭로된다. 
당시 이스라엘 법은 해외거주자를 제외하고는 450불 이상의 해외은행구좌를 갖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우리 나라 같으면 그냥 웃고 넘어갔을 일이겠지만, 
법무장관 아론 바락(Aharon Barak)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법정으로 
가져간 것이다. 라빈은 벌금을 물어야 했고, 레아는 법정에 서게 될 것으로 
보였다. 라빈은 가정의 "재무장관"인 레아와 공동책임을 지기로 작정했다.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총리직을 사임한 것이다. 이츠하크 라빈의 생각은 명확했다. 
전쟁터에서 부하가 부상을 입었을 때 지휘관은 부하를 버리는 대신 부하와 한 편에 
선다. 아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그와 같다. 선거 때까지는 페레스가 내각을 
책임졌고, 노동당은 선거에서 패배했다. 이때의 뼈아픈 실패는 1992년 다시 
집권했을 때의 좋은 거울이 된다. 

이 때부터 1992년까지는 권좌를 되찾기 위한 길고 긴 싸움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총리직을 내놓은 직후 그는 텔 아비브의 야구장에 나타나 
야구경기를 관람한다. 관중들은 그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약 2,000통의 
격려편지가 쇄도했다. 레아 라빈은 그 한 통 한 통에 모두 답장을 보냈다. 그를 
향한 국민의 신뢰는 큰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언론은 결코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이후 라빈이 노동당수직에 도전하려 할 때마다 언론은 이 문제를 
거론했다. 나중에는 레아가 낸 벌금 27,000불의 출처가 문제되었다.  이스라엘 
범죄조직이 돈을 댔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실제로 라빈은 이 돈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되었고, 친척들과 외국의 친구들로부터 돈을 꾸어 겨우 벌금을 냈다. 아무리 
변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먼저 프랑스 신문이 이를 대서특필했고, 라빈은 이 
신문에 소송을 걸어 승소하지만, 우리 나라도 그렇듯이 먼저 형성된 여론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라빈은 결국 이스라엘 신문편집인 위원회에 출석하여 벌금의 
출처를 증명할 서류 하나 하나를 제시하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1979년 8월 라빈 회고록이 출판되면서, 이스라엘은 다시 시끄러워졌다. 신문은 
그의 회고록을 비난하는 투고로 가득 찼다. 대부분의 투고는 노동당 쪽에서 나온 
것으로 밝혀졌다. 라빈을 험담하는 전직 외무장관 모세 샤레트의 일기내용도 
공개되었는데, 이는 나중에 라빈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리엘 샤론에 대한 
것임이 판명되었다. 이 추악한 싸움을 배후에서 조종한 것은 다름 아닌 시몬 
페레스였다. 하기야 이런 싸움을 촉발한 것은 라빈 자신이었다. 라빈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페레스를 상습적인 음모가로 묘사했다. 라빈의 표현에 따르면 그의 
밑에서 국방장관으로 일할 때, 페레스는 "라빈뿐만 아니라 정부 전체를 손상하려고 
한 사람"이었고, "상황이 나쁘면, 나쁠수록 자신에게만 유리하도록 만드는" 야비한 
거짓말쟁이였다. 라빈의 회고록에서 벤-구리온은 독립전쟁 중의 잘못된 판단과 
작전운영으로 비난받았다. 아바 에반은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의 정치철학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남에 의해 만들어진 정책만을 설명한" 
사람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훗날에도 자신의 회고록 내용을 결코 번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모두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회고록 자체는 라빈 자신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 책을 가장 재미있게 읽은 사람들은 리쿠드 사람들이었다. 노동당은 
1981년의 선거에서도 리쿠드에 패배했고, 1984년에는 선거에서 44대 41로 리쿠드를 
눌렀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는데 실패하여 결국 리쿠드와의 
연립정부를 수립할 수밖에 없었다. 총리직은 시몬 페레스와 이츠하크 샤미르가 
번갈아 가면서 맡기로 했다. 연정의 첫 총리직은 페레스가 맡았다. 

국방장관 

1982년에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공격하면서 터진 레바논 전쟁에서 라빈은 노동당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리쿠드의 아리엘 샤론과 함께 여러 차례 베이루트를 
방문하여 전쟁을 독려한다. 평소 비둘기파로 평가를 받는 라빈이었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사실 이스라엘 정치지도자들을 너무 쉽게 비둘기파, 매파로 구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사안에 따라 의견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라빈은 곧 이 전쟁이 실수임을 깨달았다. 전쟁의 상처는 심각했고, 
인플레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런 시점에서 1984년 시몬 페레스는 약속에 따라 
이츠하크 샤미르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았고, 이츠하크 라빈은 국방장관에 임명된다. 
이번에는 페레스가 총리, 라빈이 국방장관으로 자리가 바뀐 셈이다. 라빈은 
국방장관에 임명되면서부터 레바논 철군문제를 놓고 군부의 고위장성들을 하나씩 
만나 설득한다. 이런 라빈의 노력 덕분에 1985년 1월 이스라엘군의 단계적 철수가 
시작된다. 레바논 남부지역에만 국경선의 안전유지를 위한 약간의 이스라엘병력이 
남고, 나머지는 남부레바논군(결국 이스라엘의 조종을 받는 군대이기는 
하지만)에게 넘겨졌다. 철군이 완료되면서, 라빈에게는 군의 인원을 감축하는 
고통스러운 책무가 맡겨졌다. 어려운 경제사정으로 인해, 라빈은 5천억 달러의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수천 명의 군인들을 잘라내야 했다. 

1987년 12월 9일부터 인티파다가 시작된다. 1988년 초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국방장관은 군 장교들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석전에 
대항하여 총기 사용을 자제하되, 곤봉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 총으로 그들을 
진압하여 죽거나 다치게 하는 것보다는, 곤봉으로 때리는 것이 낫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라빈의 이 발언은 "곤봉으로 아예 허리를 부러뜨려라"는 제목으로 세계 
신문을 장식했다. 라빈의 영국방문 중 대처 총리는 특유의 무뚝뚝한 태도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잘못 다루고 있다"고 우려를 표명했다. 이에 대해 
라빈은 "영국이 가자 지구에 제공하기를 원하는 어떤 종류의 지원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학교를 지어주고 싶다면 지어달라. 우리는 그걸 환영할 것이다"라고 
응대한다. 말로 인권옹호를 이야기하지 말고, 팔레스타인인들을 도와주고 싶으면 
실질적으로 도와달라는 이야기였다. 그 날의 조찬모임은 썰렁한 가운데 끝난다. 
세계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편이 아니었다. 

노동당-리쿠드 연합정권의 재무장관이던 시몬 페레스는 1990년 초반부터 
거국내각을 깨기로 마음먹는다. 시몬 페레스가 생각하기에, 1986년부터 총리를 
맡고 있는 리쿠드의 이츠하크 샤미르는 아랍과의 평화협상에 별 의욕이 없어 
보였다. 1987년 샤미르 총리는 페레스 재무장관이 만들어낸 후세인 왕과의 
런던협정을 무력화시켰고, 1990년에도 팔레스타인인들과의 평화협상을 촉구하는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방안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다. 1988년부터는 
정착민촌 확대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다. 페레스는 평화를 원했고, 더 이상 
거국내각은 무의미했다. 이 상황에서 라빈은 다시 갈등에 휩싸인다. 노동당을 
돕자니 원수 같은 페레스를 돕는 셈이 되고, 리쿠드를 돕자니 노동당에 대한 
배신이 된다. 1977년부터 세 번이나 노동당을 대표해 총선에 나서고도 아직껏 
노동당 주도의 정부를 만들어보지 못한 시몬 페레스였다. 라빈에게는 그를 돕고 
싶은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노동당의 50퍼센트는 시몬 페레스를 원하고 
있었고, 나머지 50퍼센트는 이츠하크 라빈을 원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를 
원하는 사람은 0퍼센트였다. 그만큼 두 사람의 지지자들은 확연히 갈렸다. 1991년 
7월 22일의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경선에서는 페레스가 근소한 표 차이로 승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국민들은 정치제도의 개혁을 원하고 있었다. 무려 50만 명의 
국민들이 총리 직선을 청원했다. 노동당 내부에서도 민의를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선거제도를 원했다.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민초들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했다. 라빈도 노동당수 경선을 직선으로 하는데 동의했다. 만약 직선제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라빈은 페레스가 오랫동안 장악해 왔던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벽을 넘어 총리직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었다. 결국 중앙위원회도 미국식의 당내 
경선제도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전국적으로 노동당원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싸움이었다. 라빈은 노동당 내에서 리쿠드를 
물리치고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임을 강조했다. 본선 경쟁력을 
내세운 것이다. 페레스는 자신의 탁월한 정치역량과 당에의 공헌을 강조했다. 
문제는 다른 두 명의 노동당 지도자 이스라엘 케사르와 오라 나미르였다. 이 두 
사람이 총리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지만, 이 두 사람이 라빈과 페레스 두 
사람 중 누구의 표를 더 깎아먹느냐에 따라 승패가 좌우될 것이었다. 노동당내 
여론은 서서히 라빈 쪽으로 돌아섰다. 라빈이 더 나은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지만, 라빈 쪽이 페레스보다 본선에서의 승리 가능성이 높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1992년 2월 19일 전국적으로 실시된 노동당 당수 경선결과는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이 경선에서 라빈은 40.6 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34.8퍼센트를 얻은 
페레스를 눌렀다. 실로 15년만의 노동당수 복귀였다. 

총선이 이루어질 당시의 세계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동구권은 붕괴하여 팔레스타인 
해방기구는 오랜 협력자를 잃었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지원한 이라크의 후세인 
대통령이 걸프전에서 패배함으로써 아라파트는 재정적, 정치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미 1991년 10월 30일 미국과 러시아의 후원 아래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열린 회담에서 이츠하크 샤미르는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팔레스타인 대표단과의 개별회담 개최에 동의한 바 있었다. 마드리드 
회담은 평화를 향한 초석을 놓았고, 워싱턴, 모스크바, 오타와, 동경, 비엔나에서 
협상은 계속되었다. 주된 논점은 다섯 가지였다. 물의 공급, 자연생태환경, 경제적 
협력, 난민, 그리고 무기제한이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서로의 진의를 탐색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가졌다. 이스라엘의 총선 결과는 이처럼 어렵게 길러온 
중동평화회담의 씨가 어떻게 성장해 나갈 것인지를 결정지을 가늠자였다. 

1992년의 총선은 격렬한 싸움이었다. 라빈의 노동당은 그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통상 사람보다는 정당에 투표하는데 길들여진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이 
시도는 신선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샤미르의 리쿠드는 샤미르의 이름이 최대한 
표면에 나타나지 않도록 했다. 대신 리쿠드를 이끌어갈 젊은 지도자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이츠하크 라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리쿠드가 집권한 지난 15년 동안 
공장 하나 제대로 지어진 것이 없다. 점령지에다 돈을 쏟아 부었지만 무슨 성과가 
있었느냐"고 외쳤다. 평화협상을 통해 차라리 그 돈을 이스라엘 자신을 위해 
썼다면 좋았을 거라는 그의 논리는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구소련 땅으로부터 몰려든 러시아계 유태인들의 수가 2년 사이 33만 
명이 넘고 있었다. 전국민의 5퍼센트를 넘는 숫자였다. 라빈은 이들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15년 전 이스라엘을 강타했던 "베긴, 베긴"의 함성은 서서히 "라빈, 
라빈"으로 바뀌어갔다. 마침내 6월 23일, 265만 명이 참여한 선거에서 이츠하크 
라빈의 노동당은 총 44석을 얻어 32석의 리쿠드 당을 물리치고 집권에 성공한다. 

집권 이후의 내각 구성에서 라빈은 페레스를 배제하고 싶었다. 라빈 진영은 
페레스가 은퇴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러나, 페레스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노동당 내에는 아직도 막강한 페레스 지지세력이 있었다. 차선책으로 
라빈이 택한 것은 페레스에게 외무장관을 맡기는 것이었다. 죽어도 국방장관만은 
맡길 수 없었다. 라빈은 늘 그의 첫 총리재임 시절, 페레스가 국방장관으로서 
자신을 흔들려고 했다고 믿고 있었다. 페레스를 외무장관에 임명하면서, PLO를 
비롯한 아랍 여러 나라의 평화협상은 총리실이 직접 관장할 것임을 명백히 했다. 
이런 출발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둘 사이의 적대관계가 또 어떤 결과를 낳을지 
우려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두 사람은 중동평화회담을 이끌면서 놀라울 
정도의 조화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 모두 이제는 평화라고 하는 중대한 과제 앞에 
선 70세와 69세의 노인들이었다. 독립전쟁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거나 무기를 사러 
세계를 돌아다니던 청년들은 어느새 죽음을 생각해야 할 노인이 되었다. 아마도 
그러한 자각이 두 사람을 새로운 협력관계로 이끌었으리라. 

두번째 총리임기와 중동평화 

1992년 7월 13일의 취임연설에서 라빈 총리는 이스라엘이 드디어 그 건국의 기초인 
사회주의 전통으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선언했다. 이제 생산물 없는 서류장난은 더 
이상 없을 것임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새 정부의 과제는 
중동평화협상이었다. 라빈이 꿈꾸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습은 더 이상 "고립된 
나라가 아닌, 세계평화를 향한 국제적 노력에 동참하는" 나라였다. 이스라엘이 그 
동안 자랑처럼 이야기해 온 '세계는 모두 우리를 적대시하고 있다'는 명제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이 연설에서 라빈은 팔레스타인을 향한 역사적 제안을 
한다. "우리 영토 안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여러분, 가자와 칸 유니스의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여러분, 헤브론과 나블루스의 피난민 
수용소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여러분,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에서 단 하루도 
자유와 기쁨을 누려오지 못한 팔레스타인인 여러분. 이번 한번만이라도 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우리는 현재의 우리 입장에서 가장 공정하고, 가능성이 
높은 방안을 여러분에게 제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자치정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방식에 따른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설립을 제안하는 강력한 발언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랍정상 모두를 이스라엘 국회로 초청함과 동시에, 자신은 당장 오늘이나 
내일이라도 베이루트나 다마스커스, 암만을 방문할 의사가 있음을 밝힌다. 

다음날부터 라빈은 자신의 연설을 당장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우선 나블루스 
지역에서 무기 소지자를 체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대학의 수색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군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뒤이어 리쿠드 당의 격렬한 반대 속에서 가자와 
요르단 서안에서의 새로운 정착촌 또는 건물의 건설을 전면 동결한다. 7월 19일 
베이커 미 국무장관이 이스라엘로 왔고, 7월 21일에는 라빈 총리가 이집트의 
카이로로 날아갔다. 8월 10일에는 휴가 중이던 부시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한다. 8월 24일 점령지구내에서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11명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에 대한 추방령이 취소된다. 같은 날 워싱턴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대화가 열렸고, 4일 후에 이스라엘은 구금 중이던 7,429명의 
팔레스타인인 중 800명을 석방한다. 평화를 향한 라빈의 의지는 한 단계 한 단계 
현실화하기 시작한다. 시몬 페레스도 여기에 힘을 보탰다. 같은 해 9월 영국 
런던을 방문한 페레스는 메이저 총리를 평화협상의 유력한 후원자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레바논 전쟁 개전과 함께 대처 수상이 금지한 이스라엘에 대한 
석유수출도 재개된다. 

그러나, 평화무드의 고조와는 반대로, 이스라엘과 일체의 협상을 거부하는 
하마스(Hamas)와 지하드(Jihad)를 비롯한 이슬람 근본주의 그룹의 반대운동도 
극렬해진다. 이미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에서 이들 그룹은 아라파트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란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고 있었고, 젊은이들의 
참여도도 높았다. 
  

이들과 이스라엘군의 충돌이 피해를 증가시키고 있는 가운데, 1993년 1월 20일 
오슬로의 한 외딴 별장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사이에 최초의 
비밀회담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측의 대표는 하이파 대학의 정치학자인 야이르 
히르쉬펠트 박사와 저널리스트인 론 푼닥(텔 아비브 대학 교수) 박사였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측의 대표는 재무장관인 아부 알라였다. 이스라엘 대표들은 
아무런 공식직함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당시 이스라엘 법에 따르면 이들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접촉은 위법(마치 우리가 허가 없이 북한 사람들을 접촉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인 것과 같다)이었다. 이 자리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측은 세 
가지를 요구한다. 첫째 2-3년내 가자 지구의 우선적 포기, 둘째,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에 대한 경제지원(미니 마샬플랜으로 불렀다), 셋째,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치기구 사이의 경제협력이었다. 2월 9일 라빈 총리는 팔레스타인 
측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고, 2월 11일부터 오슬로에서는 세부 협상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외무부의 유리 사비르(Uri Savir) 등 전문 외교관들이 
참가하게 되는데, 팔레스타인인에 의한 자치의 성격과 범위를 결정짓는 작업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협상진행 과정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측의 요구사항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자 지구만을 요구했던 것이 곧 여리고까지 
추가되었다. 이 협상과정을 총지휘하던 시몬 페레스는 부지런히 라빈 총리를 만나 
협상의 방향을 협의한다. 평화협상이 진행되는 시간 가자 지구와 요르단 
서안에서는 피바람이 불고 있었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테러와 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보복이 계속되었다.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다. 

14차례에 걸쳐 계속된 오슬로에서의 비밀접촉은 결국 1993년 9월 13일의 기본원칙 
선언으로 열매맺는다. 백악관에서 벌어진 이 날 서명행사에는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의장이 양측을 대표하여 참석했고, 클린턴 
미국대통령이 배석했다. 청중석에는 지미 카터, 조지 부시 등 중동평화협상을 위해 
노력해 온 미국대통령과 오슬로에서의 협상을 후원한 노르웨이 관계자들, 그리고 
아랍과 이스라엘에서 참석한 어린이들이 자리를 잡았다. 서명에 사용된 책상은 
15년 전 캠프 데이비드 협정 때 사용된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라빈 
총리는 "팔레스타인 여러분들과 싸워온 우리(이스라엘)는 오늘 이 자리에서 크고 
선명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피와 눈물은 지금까지로 충분합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가 쌍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첫 
자리였고, 평화를 향한 기본원칙이 합의되는 순간이었다.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이스라엘을 인정함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테러의 포기를 선언하고, 중동의 오랜 
분쟁을 종식시킬 평화협상에 나설 것을 천명했다. 이스라엘도 처음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팔레스타인인들의 공식적인 대표기구로 인정했다. 특별히 
의미 있었던 것은 야세르 아라파트가 요르단 서안과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폭력행사를 포기하고, 정상적 생활로 복귀할 것을 촉구한 
내용이었다. 이로서 라빈과 페레스의 오랜 노력은 결실을 맺었다. 

1994년 5월 4일에는 카이로 협정이 맺어졌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수립을 
인정하는 이 협정이 맺어지기 직전까지 라빈과 아라파트는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줄다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지도를 펼쳐놓은 채 논쟁을 계속한 끝에 
모두가 서명 테이블로 나왔다. 시몬 페레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워렌 
크리스토퍼 미 국무장관, 이츠하크 라빈이 서명을 마칠 때까지, 아라파트는 고민을 
거듭했다. 아라파트가 서명을 거부하는 한차례의 해프닝이 있은 후 결국 이 
협정서가 완성되었다. 이로서 아라파트를 수반으로 하는 자치정부가 수립되게 
되었다. 그리고, 라빈과 페레스, 아라파트는 이 해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다. 그렇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하마스를 비롯한 근본주의자들의 
자살폭탄테러는 이후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뒤이어 1994년 7월 25일에는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의 평화협상이 워싱턴 
선언으로 열매맺었다. 이 선언에서 라빈과 후세인 요르단 국왕은 평화협상을 
계속해 나가기로 합의하고, 양국간의 교전상태의 종식을 선언한다. 이에 따라 
예루살렘의 회교성전들에 대한 요르단의 영향력 행사를 이스라엘이 인정하기로 
하고, 양국간의 직통전화도 개설하기로 하였으며, 국제 전용항공로나 여행객편의를 
위한 원칙상의 합의도 이루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수자원 분쟁의 종식을 위해 
계속 노력한다는 조항이다. 성경을 읽어본 분들은 알겠지만, 물을 둘러싼 분쟁은 
이스라엘과 아랍 공통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다. 물의 문제는 
오늘날도 이스라엘과 아랍의 중요한 논점이다. 골란 고원은 군사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식수공급원이기도 한 까닭이다. 그저 사막에 불과한 시나이 
반도를 돌려주는 것이나,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가자 지구를 돌려주는 
것과는 차원을 달리한 문제가 골란 고원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땅문제와 물문제의 
이해는 이스라엘 역사이해의 열쇠가 되는 셈이다. 같은 해 10월 26일에는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평화협정이 체결된다. 이 기간 중에도 가자 지구에서는 
하마스의 자살폭탄테러로 매일같이 사람이 죽어나가고 있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 사이의 자치논의는 계속 이어졌다. 
1995년 9월 28일에는 제2차 오슬로 협정이 아라파트와 라빈에 의해 서명되었다. 
이는 가자와 여리고에 국한되었던 자치의 범위를 요르단 서안으로 확대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평화회담의 진전에 따라 이스라엘 우파진영의 저항도 거세졌다. 우익 리쿠드 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베냐민 네탄야후는 관 뚜껑에 이츠하크 라빈의 이름을 
적은 채 아무 말없이 거리를 행진하는 침묵시위를 벌였다. 라빈을 향한 저주가 
퍼부어졌다. 10월 5일과 6일에 열린 국회에서, 군부의 오랜 지도자로서 모세 
다얀의 동반자였던 르하밤 지비는 라빈 정부를 가리켜 "국가적 자살을 범하기로 
결정한 미친 정부"로 비난한다. 아리엘 샤론은 라빈과 그의 정부를 "테러조직과 
공모한 자들"로 규정한다. 10월 6일에는 제2차 오슬로 협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자들에게 있어 이 협정은 "성서의 이스라엘 땅을 살인자들에게 
내어주는 것"이었고, 라빈은 반역자였다. 시위군중은 라빈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승용차 유리창을 박살냈다. 제2차 오슬로 협정은 61대 59라는 근소한 차이로 
국회를 통과했다. 

평화의 나무도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일까? 그리고 한 달 후 라빈은 자신을 평화의 
제물로 바쳐야 했다.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 서명한 사다트가 맞았던 것과 동일한 
운명이었다. 
  
라빈의 장례식에는 세계의 많은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옛동지들도 있었고, 한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집트의 무바라크 대통령, 요르단의 
후세인 왕도 왔고, 그들 못지 않은 적대관계였던 평생의 동반자 시몬 페레스도 
눈물을 흘렸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샬롬(평안하라), 친구여"라는 두 마디로 
추도사를 마감했다. 아라파트는 라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를 원했지만, 오지 
않았다. 가뜩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그의 참석이 별 
도움이 안 될 것이 분명했던 까닭이었다. 

라빈 이후 

라빈 사후에도 폭력투쟁은 계속되었다. 1996년 1월 5일 가자 지구에서 팔레스타인 
폭탄전문가 한 명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살해당했다. 정체를 알 수 
없었지만 누가 한 짓인지는 뻔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하마스는 자살폭탄공격을 
감행, 25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했다. 다음 달에도 그 다음 달에도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1996년의 선거에서 이츠하크 라빈의 계승자인 페레스는 리쿠드의 네탄야후에게 
패배했다. 국회의석 수에서는 노동당이 34대 32로 리쿠드를 눌렀지만, 총리자리는 
네탄야후에게 넘어간 것이다. 이스라엘 최초로 국회의원 선거와 총리선거를 
분리하여 총리직선제를 실시한 결과였다. 이 선거에서 네탄야후는 50.4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49.5퍼센트를 득표한 페레스를 눌렀다. 박빙의 승부였다. 

미국의 지속적인 압력을 받은 네탄야후는 오랜 저항 끝에 1997년 1월 17일 헤브론 
협정에 마지못해 서명한다. 헤브론 지역에서 유태인들은 독자적인 마을을 유지하고 
그 경비는 이스라엘군이 담당하기로 하되, 나머지 80퍼센트의 지역은 아라파트를 
수반으로 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1997년 6월 3일 이스라엘 노동당도 세대교체를 이루었다. 시몬 페레스의 뒤를 이을 
노동당수로 에후드 바락(Ehud Barak)을 선출한 것이다. 당시 55세였던 에후드 
바락의 등장은 마치 라빈이 처음 정치에 등장하던 때를 연상케했다. 참모총장에서 
물러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당권을 잡은 것이나, 치밀한 성격도 비슷했다. 바락은 
젊어서부터 이스라엘 군정보부의 일원으로 아랍테러에 대항한 군사작전을 
주도했고, 1988년의 튀니스 암살공격 당시에는 자로 잰 것 같은 작전기획능력과 
과단성으로 국민들의 주목을 받았다. 라빈 암살 직후 페레스에 의해 외무장관에 
임명된 바 있는 그는 평화를 향한 원칙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안보의 보장 없는 
평화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제2차 오슬로 협정의 비준 시에 
유태인 정착민 보호에 미흡하다는 이유로 기권하기도 했다. 이변이 없는 한, 서기 
2,000년 선거에서 네탄야후와 맞붙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그의 입장은 보수화하고 
있는 이스라엘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평화를 향한 라빈의 노력은 아직도 완성된 것이 아니다. 1999년 팔레스타인이 과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이냐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베냐민 
네탄야후 집권 이후 오락가락 하는 이스라엘의 정책도 문제지만, 팔레스타인 
과격그룹의 존재도 평화의 앞길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네탄야후는 아직도 
요르단 서안에서의 이스라엘군 완전철수를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평화협상에 
대해서도 주로 시간을 끄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소중하게 얻어진 평화의 불꽃이지만 언제 다시 꺼지게 될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중동지역은 여전히 불씨를 안고 있는 화약고이다. 

참고서적 

David Horovitz, Shalom Friend, the Life and Legacy of Yitzhak Rabin, 
Newmarket Press/NY, 1996 
Shimon Peres, Battling for Peace, Random House/NY, 1995 
Robert Slater, Rabin of Israel, St. Martin's Press/NY, 1993 
Leah Rabin, Rabin, Our Life, His Legacy, G.P.Tutnam's Sons/NY, 1997 
Yitzhak Rabin, The Rabin Memoir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Berkeley, 
1996(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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