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6일 금요일 오전 12시 38분 50초 제 목(Title): 김두식/엔테베구출작전과 네탄야후 엔테베 구출작전과 네탄야후 ------------------------------------------------------------------------------- - 베냐민 네탄야후 이스라엘 총리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탄야후(Benjamin Netanyahu)는 영어를 무척 잘한다. CNN에 나와서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자기 주장을 펼치는 네탄야후 총리를 바라보다 보면 이스라엘 총리라기 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대학교수나 상원의원을 보는 것 같다. 그는 젊다. 정력이 넘친다. 그런 한편 매우 극단적이고, 공격적이어서 위험하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60세 미만의 사람이 아직까지 총리에 당선된 적이 없는 나라에서 그는 46세의 나이로 총리에 당선되었다. 정치가로서의 경력도 짧았다. 이처럼 정치경력도 짧은데다가 혼외정사 스캔들로 얼룩진 젊은 네탄야후가 이스라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세계적인 역사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교육받은 그의 뛰어난 국제감각과 잘 생긴 외모가 집권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1996년 5월 총선에서 베냐민 네탄야후가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를 제치고 이스라엘 총리가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중동평화를 이끌어낸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총리가 극단주의자의 총탄에 암살당한 후 전세계는 라빈 추모 열기에 휩싸였고, 라빈을 승계한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가 총리로 당선되리라는 관측이 유력했다. 그러나 리쿠드(Likud) 당의 베냐민 네탄야후는 이 모든 예상을 뒤엎고 총선에서 승리했다. 서방 여러 나라들은 이 극단적이고 정력적인 사나이의 집권에 대해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이스라엘 총리가 되었다. 베냐민 네탄야후의 집권 드라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즉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그를 계승한 페레스 외무장관, 그리고 총선을 통해 총리가 된 베냐민 네탄야후의 형 요나단이 모두 관련된 20년 전의 중요한 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1976년 전세계를 놀라게 했던 엔테베구출작전이다. 1976년 6월 27일, 여객기 납치되다 1976년 6월 27일 일요일 이스라엘 텔 아비브의 벤-구리온 공항을 출발하여 프랑스의 오를리 공항으로 향하던 에어프랑스 소속의 여객기가 경유지인 아테네에서 탑승한 네 명의 테러범(두 명은 팔레스타인인이었고 두 명은 서독인이었다)들에게 납치되었다. 당시 아테네는 테러범들에게 매우 이상적인 활동지였다. 그리스 내전으로 인한 니코시아 공항의 폐쇄는 아테네 공항을 늘 붐비게 했고, 기강이 해이해진 공무원들은 검문검색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를 노린 테러범들은 수류탄과 권총으로 무장한 채 순식간에 여객기를 장악했다. 테러범들은 자신들이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일명 PFLP) 소속의 전사들이라고 밝혔다. 이들의 배후에는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지도자 조지 하다쉬의 오른팔인 와디 하다드(Wadi Haddad)가 있었다. 1970년대를 시끄럽게 했던 거의 모든 여객기 납치사건은 하다드가 조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이 납치의 대상으로 에어프랑스 여객기를 선택한 것은, 이 항공사가 지스카르 데스텡(Giscard d'Estaing) 프랑스 대통령의 아랍우선정책으로 인해 테러로부터 가장 안전하다는 평을 듣고 있음을 역이용한 것이었다. 리비아에서 재급유를 받은 이들의 목적지는 우간다의 수도 캄팔라에 위치한 엔테베 공항이었다. 당시 우간다의 지도자는 인권탄압과 독선적인 행태로 유명한 이디 아민(Idi Amin)이었다. 납치된 비행기 안에는 모두 254명의 승객이 탑승하고 있었고 다수가 이스라엘인들이었다. 대개의 이스라엘인들이 그렇듯이 그들도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었다. 예컨대 이 여객기에 탑승하고 있던 이츠하크 다비드(Yitzhak David)는 이스라엘의 키부츠(집단농장)에 살면서 광산 책임자로 일하고 있었지만, 22년 전에는 악명 높은 나치 부켄발트 수용소에서 탈출한 후 드골의 자유프랑스군에 참여하여 나치전범신문을 담당한 바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왼손에는 아우슈비츠에서 새겨진 12346이라는 수인번호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물론 그의 가족 대부분은 나치 수용소에서 희생되었다. 73세의 승객 도라 블로흐(Dora Bloch) 여사의 경우, 그녀의 부친 요세프 파인버그(Yosef Feinberg)는 로스차일드 남작(Baron de Rothschild)이 조직한 시오니즘 운동의 선구적 조직 "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Hovevei Zion, Lovers of Zion)"의 멤버로서 이스라엘의 초기 개척자 중의 한 명이었다. 6월 28일 오전 3시 15분. 납치된 비행기는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창 밖으로 엔테베 공항의 구청사가 보였고, 완전 무장한 우간다군인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우간다 테러범들이 하필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을 택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우간다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미 19세기말에 우간다의 군부지도자들은 유다주의에 매료되어 이를 국가발전의 모델로 삼았고, 1903년부터는 시오니즘 운동의 유력한 거점을 제공하기도 했다. 심지어 영국은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 땅의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을 포기할 경우 우간다 땅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을 정도였고(이것이 이른바 "우간다 계획"이다), 영국의 이러한 제안은 제6차 시오니스트 총회의 주요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우호적인 관계는 이스라엘 건국 이후까지 이어졌다. 1962년 우간다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이스라엘의 국방차관이었던 시몬 페레스는 우간다를 방문하여 우간다 공군의 조직을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1963년에 양국간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군의 지브 샤함(Zeev Shaham)대령이 우간다에 파견되어 우간다 공군과 경찰조직을 훈련시켰고, 이 과정에서 샤함 대령은 우간다 장교들과 친밀한 우정을 나누게 되는데 이 장교들 중의 한 명이 바로 이디 아민 대위였다. 1968년 샤함 대령의 후임으로 임명된 바룩 바르 레브(Baruch Bar Lev) 대령 역시 당시 참모총장이던 이디 아민과의 우정을 이어갔고, 1971년 이디 아민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초대대통령 밀튼 오보테(Milton Obote) 정권을 전복했을 때 이를 가장 먼저 통보받은 것도 바르 레브 대령이었다. 그러나, 이디 아민은 집권 당시 이미 "신이 천사를 보내 자신과 대화하고 있다"고 할 정도로 알콜중독과 과대망상증, 그리고 매독후유증으로 시달리고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였다. 결국 우간다와 케냐의 국경분쟁지역에 팬텀기로 폭격을 해 달라는 아민의 요청을 모세 다얀(Moshe Dayan) 이스라엘 국방장관이 거절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이 때 아민에게 손을 내민 것이 리비아의 카다피 대령이었다. 아민은 1972년 3월말 캄팔라에 있는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고 그 때까지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쓰이던 건물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에 내어주게 되었다. 이 때부터 우간다는 PLO의 동아프리카 거점이 되었다. 한때 이스라엘의 유력한 우방이었던 우간다가 한순간에 등을 돌리게 되는 과정은 국제관계에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이스라엘 정부의 대응 에어프랑스 여객기의 피랍 소식은 즉각 이스라엘 내각에 알려졌다.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이츠하크 라빈이었고, 국방장관은 시몬 페레스였다. 두 사람 모두 노동당 소속으로 같은 내각에서 동거하고 있기는 해도 정치적 입장과 성격은 판이하게 달랐다. 두 사람의 적대적인 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공식적인 장소를 제외하고는 얼굴 마주 대기를 꺼려할 정도였다. 모세 다얀(Moshe Dayan) 전 국방장관과 가까운 페레스는 국방문제에 관해 자주 다얀의 조언을 구했고, 이에 격분한 라빈은 한때 국방장관인 페레스에게는 중요 정보를 보고하지 말도록 군부에 지시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은 이미 1974년의 총선에서 총리자리를 놓고 격돌한 바 있었고, 다음 총선의 잠재적 경쟁자이기도 했다. 6월 28일 정오. 시몬 페레스 국방장관은 자신의 참모들과 회의를 주재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테러리스트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이스라엘 국민들에게 있을 수 있는 일 중 최악의 것이다. 우리가 그동안 전세계를 향해서 테러리스트들에게 굴복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 온 것은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굴복할 수 있는가?" 지난 2년 반 동안 라빈 내각을 지배해온 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테러리스트들과의 타협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특별했다. 이스라엘의 힘이 미칠 수 없는 국외에서 일어난 것이었을 뿐 아니라, 항공기는 이미 적지라 할 수 있는 우간다에 착륙한 상태였다. 엔테베 공항은 이스라엘에서 3,300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이었다. 서방 언론은 이미 이스라엘이 테러리스트들과의 타협을 시도하는 것 이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6월 29일. 라빈 총리는 의회(Knesset) 외교안보위원회에 참석했다. 의회 외교안보위원회는 각 정당의 주요인물이 모인 이스라엘 정치의 핵심이었다. 이 자리에서 라빈은 야당인 가할(Gahal, 헤루트 당과 자유당이 합당하여 만든 정당) 지도자인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긴의 답변은 명료했다. "총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이스라엘 야당의 전적인 지원을 받게 될 겁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국가 전체의 대동단결 이상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투쟁방법의 차이로 라빈과 노선을 달리했던 베긴이었지만, 테러 앞에서는 적과 동지가 따로 없었다. 같은 날 오후 5시. 페레스 국방, 이갈 알론(Yigal Allon) 외무, 하임 자독(Haim Zadok) 법무 등이 참석한 내각회의에서 라빈 총리는 참모총장인 모데카이 구르(Mordechai Gur) 중장에게 구출작전을 구상할 것을 지시한다. 그와 동시에 모사드는 우간다의 상황과 테러리스트들의 신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를 비롯한 관련국들과의 긴밀한 협조는 물론이었다. 한편에서는 테러리스트들의 요구에 따라 석방할 테러범들과 그들을 태우고 갈 비행기들이 준비되고 있었다. 테러범들이 요구한 동료들의 수는 53명이었고, 석방시한은 7월 1일 오후 1시였다. 53명 중 40명은 이스라엘에서, 5명은 서독에서, 6명은 케냐에서, 한 명은 스위스에서, 한 명은 프랑스에서 석방되어야 했다. 테러범들은 요구사항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에어프랑스의 여객기 뿐 아니라 인질들 모두가 희생될 것임을 분명히 한 상태였다. 전현직 군 간부 중 우간다 군사고문단에 참여했던 장교들도 모두 호출되었다. 레브 대령도 불려 들어왔다. 아민에게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민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당신이 인질들을 석방할 경우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아민은 "인질을 구출할 유일한 방법은 이스라엘이 테러범들을 석방하는 길 뿐"이라고 대답했지만, 레브가 원할 경우 언제든지 통화할 길을 열었다는 점에 이 통화의 의미가 있었다. 레브 대령은 아민과의 직접 통화를 통해 인질들이 비행기가 아닌 엔테베 공항 구청사에 억류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 자체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정보였다. 우간다 공군 건설에 관여했던 이스라엘공군 장교들은 엔테베 공항의 구조에 관한 자문을 제공했다. 엔테베공항 구청사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다른 인질들로부터 분류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다른 인질들은 석방될 것이었다. 마치 나치수용소에서의 분류작업을 연상시키는 시간이었다. 이스라엘인을 제외한 인질들은 석방되어 프랑스로 돌려보내졌다. 254명의 승객 중 이스라엘인 83명과 승무원 22명 도합 105명이 엔테베에 남겨졌다. 국적이 이스라엘이 아니었던 덕에 풀려날 수 있었던 사람 중에는 유태계 프랑스인으로 국제적인 은행가인 마이클 골드버그(Michel Goldberg)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나치의 손에 잃은 그는, 평생 동안 아버지의 원수인 나치학살자 인간백정 바르비(Barbie)를 찾아 헤맨 사람이었다. 유태인이지만 프랑스인이기도 했고, 독일어, 스페인어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던 까닭에 테러범들과 인질들 사이의 통역 역할을 했던 그의 아이러니컬한 인생항로는 많은 유태인들이 보낸 고된 20세기를 상징한다. 그는 바르비를 찾아 헤맨 자신의 인생여정과 엔테베의 경험을 묶어 "동일한 이름(Namesak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먼저 풀려난 인질들은 억류된 인질들의 정확한 위치와 테러범들의 규모를 파악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7월 1일 오전 9시. 내각은 어떤 형태로든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인질들의 생명을 위해 원칙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인질들의 생명을 포기하느냐. 오랫동안 계속된 회의 끝에 결국 라빈 총리가 결단을 내렸다. 테러범들과의 협상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극단적 투쟁론자인 베긴조차도 라빈에게 동의했다. 프랑스를 중개자로 하여 우간다 및 팔레스타인해방전선과의 접촉이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이스라엘에 구속되어 있는 죄수들을 석방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다"는 급전이 전세계로 타전되었고, 당시 뉴욕 포스트의 머릿기사는 "이스라엘 항복하다"로 뽑혔다. 테러범들은 동료테러범들의 석방시한을 7월 4일 일요일 11시로 연장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3일이라는 시간은 이스라엘 군에 있어 단비와도 같았다. 구출작전의 구상 이스라엘 정부가 테러범들을 석방할 용의를 표명한 바로 그 시간에 이스라엘 군부는 시몬 페레스 국방장관의 주재로 지휘관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특수부대를 엔테베 공항에 착륙시켜 인질을 구출하자는 계획을 처음 구상한 것은 베니 펠레드(Benny Peled) 공군 소장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특수부대원들을 태운 수송기가 재급유 없이 엔테베에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성공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더 이상 결정을 미룰 수는 없었다. 페레스 국방장관은 종이를 한 장씩 돌리기 시작했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지휘관들에게 페레스는 "여러분 각자가 이 계획에 대해서 생각하는 성공가능성을 적어보도록 하시오"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70퍼센트에서 90퍼센트의 성공가능성을 적어냈다. 오직 한 명의 지휘관만이 100퍼센트의 성공가능성을 적어냈다. 단 숌론 (Dan Shomron) 준장이었다. 이스라엘 군부 신세대 지휘관 중의 선두주자인 숌론 준장은 이미 초급장교시절 시나이 전쟁에서 공수부대를 이끌고 적후방에 침투하여 혁혁한 전공을 올린 바 있을 뿐 아니라 1967년의 6일 전쟁과 1973년의 욤 키푸르 전쟁에서도 공수부대와 기갑부대 여단장으로 명성을 떨친 사람이었다. 페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출작전의 사령탑은 결정되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역사 여기서 잠시 이스라엘 특수부대에 대해 설명한다.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다른 나라와는 많이 다르다. 창설 과정에서 우여곡절도 많았다. 최초의 특수부대는 히브리대 역사학과에 재학 중이던 25세의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소령에 의해 1953년 창설된 101부대였다. 샤론은 그의 부대원들을 직접 선택했고 부대원의 수가 45명을 넘지 않도록 했다. 이들은 아랍 국경을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여러 임무들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임무는 주로 아랍인들의 테러에 대한 보복작전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건국 이전부터 유태인에 대한 테러에는 철저한 보복으로 응징해 왔다. 이스라엘 방어의 기본원칙은 우리처럼 휴전선에 늘어선 병사들이 물샐틈없는 방어벽을 치는 것이 아니다. 인구가 600만도 안되는 나라에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사막을 넘어 침투하는 적을 완전히 봉쇄할 방법도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군의 방어전략은 다시는 테러가 없을 정도로 철저히 응징한다는 보복원리에 기초해 있다. 이스라엘의 보복이 무서워서 다시는 테러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101부대가 주로 수행한 임무들도 그런 것이었다. 이스라엘군이 납치되면, 샤론의 부대가 국경을 넘어 똑같은 수의 시리아나 요르단 병사를 납치해 왔고, 적이 이스라엘 건물 하나를 부수면 샤론의 부대가 국경을 넘어 열 채, 스무 채의 건물을 박살내고 돌아왔다. 샤론이 정한 101부대의 원칙들, 즉, 첫째,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여 빈틈없는 작전을 수립한다는 것, 둘째,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임무를 완수한다는 것, 셋째, 생사 또는 부상여부를 불문하고 적지에 남겨진 대원은 반드시 구출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군 전체의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101부대의 성공은 타부대의 질시를 불러왔다. 이에 따라 101부대가 기존의 공수부대에 편입되는 수모를 겪었음은 모세 다얀 편에서 이미 설명했다. 아리엘 샤론이 지휘를 맡은 공수부대는 이후 이스라엘군 역사를 빛내는 수많은 지도자들을 배출했다. 라파엘 에이탄(참모총장), 이츠하크 호피(군정보부장), 모르데카이 구르(참모총장) 등이 모두 아리엘 샤론과 한솥밥을 먹던 전우들이었다. 그 후 다른 부대의 모델이 될 고도의 기준을 유지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의해 재창설된 것이 이스라엘군 특수부대 사예레트 마트칼(Sayeret Matkal) 이다. 이 부대의 특징은 늘 지원자가 넘쳐난다는 점이다. 통상 필요로 하는 인원의 10배 이상이 지원하며, 이 부대에 들어가기 위해 온갖 빽이 동원되기도 한다. 이스라엘군의 중요한 과제는 이들 중에 가장 적합한 자를 선발하는 것이다. 육체적 시험 뿐 아니라 각종 심리적 테스트가 행해진다. 이런 엄격한 과정을 걸쳐 선발된 대원들의 임무에는 제한이 없다. 대테러 작전에 투입될 뿐 아니라 정규전에 참전하여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특수부대는 이미 지난 1972년 5월 아랍 테러범들이 벨기에 항공 소속 여객기를 납치하여 로드 공항에 착륙시켰을 당시, 비행기 수리기술자로 변장한 후 여객기 안으로 침투하여 납치범들을 죽이고 97명의 인질을 구출한 전력이 있었다. 모든 작전이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어서 1974년에는 북부 이스라엘의 한 학교에서 테러범들에 의해 억류되어 있는 학생들을 구출하던 중 22명의 학생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요나단 네탄야후 구출작전의 사령탑이 숌론 준장으로 결정된 후, 이스라엘 남부의 훈련장에서 부대원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던 한 특수부대 지휘관이 텔 아비브로 호출된다. 밤을 새워 차를 몰고 텔 아비브로 향하는 이 장교의 이름은 요나단 네탄야후(Jonathan Netanyahu) 중령이었다. 그를 선택한 것은 페레스 국방장관이었다. 요나단은 1946년 미국의 뉴욕에서 역사학자인 벤-지온 네탄야후(Ben-Zion Netanyahu)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벤-지온 네탄야후는 메나헴 베긴과 함께 시오니즘 개혁주의자당(Revisionist Zionism)의 창시자인 지브 야보틴스키(Ze'ev Javotinsky)의 제자로 꼽히는 사람이다. 시오니즘 개혁주의자당은 훗날 헤루트 당과 리쿠드 당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우익세력의 모체가 된다. 1940년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기금마련을 위해 미국에 온 벤-지온은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이스라엘 독립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한편, 중세유태인의 역사 연구분야에서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아버지를 따라 1948년 이스라엘로 귀국한 요나단은 16세 되던 해, 연구활동을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아버지를 따라 다시 미국으로 간다. 도미 당시 아직 병역을 필하지 않은 그의 출국허가 여부가 문제되었을 때, "이 소년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며 보증을 선 것은 전직 교육부장관으로 아버지의 친구였던 디누르(Dinur) 교수였고, 그의 출국을 최종적으로 허가한 것은 당시 국방차관이던 시몬 페레스였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요나단은 1964년 약속한 대로 병역의 의무를 마치기 위해 귀국한다. 요나단이 혹독하기로 이름난 최정예 공수부대 교육을 마쳤을 때 그에게 공수부대의 기장을 달아준 것은 당시 참모총장이던 이츠하크 라빈이었다. 마치 실타래처럼 얽힌 이스라엘 지도층의 인연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공수부대에서 요나단은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탁월한 능력으로 모든 훈련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두는 그였지만 다른 한편 그에게는 진지하고 철학적인 고민이 있었다. 20세기의 참혹하고 비정상적인 역사는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플라톤의 책을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 읽어냈고, 전쟁터에서도 레마르크의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를 끼고 다닐 정도였다. 군에서 제대한 후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출국준비를 하던 그는 1967년 6일전쟁이 발발하자 미국행을 취소하고 공수부대로 돌아간다. 그리고, 골란 고원 전투에서 시리아군과 싸우던 중 전쟁이 끝나기 불과 4시간 전 왼쪽 손목에 총탄을 맞아 영구히 왼손을 쓰지 못하는 불구가 된다. 전상으로 제대한 그는 아내 테레사와 함께 하버드 대학으로 향한다. 하버드에서 1년을 보낸 뒤 히브리 대학으로 돌아와 학업을 계속하는 한편 정원사와 이삿짐센터 종업원으로 일하며 돈을 벌기도 한다. 히브리 대학 시절 모두에게 인정받는 뛰어난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단은 곧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군대임을 깨닫는다. 주변 아랍국의 위협에 따라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아내에게 "유태민족의 생존이 우리 세대의 어깨에 걸려있는 상황에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대학이 아니라 군대"라고 선언한 후, 군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지만, 문제는 그의 왼손이었다. 과연 이스라엘군은 그를 다시 받아줄 것인가?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당시 이스라엘군 특수부대(Sayeret Matkal)에 근무하고 있던 그의 동생 베냐민 네탄야후는 자신의 형 요나단을 강력히 추천하고, 요나단의 군사경력을 검토한 이스라엘군은 두말없이 그를 특수부대 지휘관으로 받아들인다. 1972년 중단된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하버드로 간 그는 1973년 욤 키푸르 전쟁의 발발과 함께 귀국하여 부대로 복귀한다. 욤 키푸르 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용맹성은 이스라엘군의 전설이 되었다. 적의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부대원들이 공포에 질려 참호 속에 머리를 처박고 있자, 마치 평시 사격훈련장에 있는 것과 같이 조용히 몸을 일으켜 "자 이제 나가보지"라고 손짓했다든지, 시리아군 진영 한복판에서 부상을 입어 고립된 이스라엘군 장교의 구출작전을 성공시켰다든지 하는 신화가 그의 뒤에 따라붙게 된 것이다(제5장 참고). 욤 키푸르 전쟁의 종료와 함께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변신한 그는 1975년 사예레트 마트칼로 돌아가 지휘관으로 선임된다. 이런 그가 엔테베 작전의 지휘관으로 선임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부 이스라엘의 사막에서 게릴라전 훈련을 하던 중에 호출되어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지만, 주어진 임무를 거부할 요나단이 아니었다. 작전명 "번개" 구출 작전명은 번개. 작전시간은 7월 3일 밤 11시였고, 작전의 요체는 기습이었다. 특수부대가 엔테베 공항에 착륙한 최초의 몇 분간이 작전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었다. 계획은 간결했다. 작전에는 모두 4대의 수송기와 두 대의 보잉 707 여객기가 투입된다. 첫 번째 수송기가 엔테베에 착륙하여 특수부대원들을 내려놓으면 1개 조가 탈출로를 확보하고, 다른 두 개 조는 구청사와 신청사에 신속히 진입하여 테러범들을 제거하고 인질을 구출한다.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이 이끄는 구청사 진입조는 수송기에 실린 메르세데스 벤츠 승용차를 이용하여 구청사로 진입할 예정이었다. 우간다의 위관급 이상 지휘관들이 모두 메르세데스 벤츠를 이용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는 치밀한 계획이었다. 7분 뒤 두 번째 수송기가 착륙하여 추가병력과 장갑차를 투입하여 공항청사 주변을 엄호한다. 지상 작전을 총괄하는 단 숌론 준장은 두 번째 수송기를 이용할 것이었다. 두 번째 수송기가 착륙한 직후 세 번째 수송기가 착륙하여 이스라엘군 최정예 골라니 여단 병력과 장갑차를 풀어 놓아 구출한 인질들을 후송하도록 하고, 의료진을 태운 네 번째 수송기는 부상자들을 보호한다. 두 대의 보잉 707여객기는 예쿠티엘 아담(Yekutiel Adam)소장과 이 작전을 처음 입안한 펠레드 소장이 각각 탑승하여 작전상황을 수시로 점검하고 이를 이스라엘로 보고할 것이었다. 보잉 여객기를 이용하기로 한 것은 재급유가 필요 없다는 점과 주목받을 염려가 없다는 점이 고려된 결과였다. 인질들의 보호를 위해 총격전의 개시는 늦으면 늦을수록 좋았다. 최악의 상황은 비행기가 착륙하기 전에 총격전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총격시작 예상시간에 따른 모든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자원자 중에서 선발된 200여명의 병력을 대상으로 맹훈련이 진행되었다. 7월 2일 저녁 11시 15분. 작전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구르 참모총장의 지휘하에 최종 모의훈련이 이루어졌다. 주어질 수 있는 최대의 작전시간은 120분. 연료부족 문제는 이스라엘의 우방으로 우간다에 적대적인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해결하기로 했다. 다만, 케냐에서 사전에 구출작전을 알게 될 경우 협력을 거절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케냐에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케냐에는 수송기에 부상자가 있으므로 착륙을 허가해 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모험이기는 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적어도 계획이 누설되는 것보다는 그 편이 안전했다. 퇴역 여부를 불문하고 이스라엘군 최고의 조종사 4명이 선발되었다. 작전 계획이 진행되는 한편에서는 프랑스를 중개자로 하여 테러범들을 석방할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105명의 인질들이 생명이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는 테러범들뿐만 아니라 우방국도 속일 필요가 있었다. 심지어 이스라엘군의 핵심간부로서 파리에서 인질석방 협상을 벌이고 있던 르하밤 지비(Rehavam Zeevi) 소장에게도 작전계획을 비밀에 부쳤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와 같은 작전이 진행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되면 가만히 있을 지비 소장이 아니었지만, 보안유지만이 작전 성공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파리의 지비 소장은 협상에 따른 라빈 총리의 세부적 지침을 요청했고, 총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협상 지시를 계속했다. 프랑스 정부는 이스라엘 정부의 협상시도를 환영했다. "이스라엘이 매우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우간다에서는 더욱 걱정스러운 소식들이 들려왔다. 더 많은 수의 테러범들이 엔테베 공항에 합류했다는 것이었고, 그들은 다량의 다이너마이트를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작전 개시 7월 3일 토요일. 이스라엘 내각은 네 대의 수송기가 출발하는 오후 2시 30분이 되도록 작전의 실행여부를 토론 중이었다. 희생이 클 경우 이스라엘 군부의 타격이 큼은 물론이고, 내각의 정치적 생명도 위태로웠다. 이스라엘군이 중동지역을 벗어나 벌이는 첫 번째 작전이었고, 성공여부는 지극히 불투명했다. 이츠하크 라빈은 마지막 순간까지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자독 법무장관을 비롯한 내각의 비둘기파들을 설득하는데 지난 며칠을 소비한 시몬 페레스는 총리의 결단을 재촉했다. 작전을 연기할 경우 더 이상의 보안유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총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작전은 시작되었다. 총리는 곧 베긴을 비롯한 야당 지도자들에게 작전을 브리핑하기 위해 회의실을 떠났다. 어려운 결단의 순간이었다. 마침내 7월 3일 오후 11시. 무려 7시간에 가까운 장시간의 비행 끝에 네 대의 수송기는 엔테베 공항 상공에 도착했고, 어둠을 틈타 첫 번째 수송기가 소리 없이 엔테베 공항에 착륙했다. 착륙과 동시에 수송기에서는 메르세데스 벤츠가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벤츠 승용차의 앞좌석에는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이 탑승해 있었다. 벤츠에 탑승한 9명의 대원이 이날 작전의 핵심인 테러범 제거와 인질구출 임무를 담당할 것이었다. 구청사는 수송기로부터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벤츠가 전진하기 시작했다. 전방에 두 명의 우간다 군인의 모습이 보였다. 원래 계획에 따른다면 누구도 벤츠를 제지해서는 안되었다. 저 두 명의 우간다 군인이 벤츠를 자기 편으로 알고 그냥 통과시킨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최초의 사격이 시작될 것이었다. 운명의 순간. 한 명의 우간다 병사가 겨우 4미터 전방에서 손을 들어 벤츠를 제지했다. 이 한 명의 우간다 병사가 작전 전체를 수포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었다. 벤츠는 우간다 병사의 코앞에까지 전진했다. 이스라엘 병사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우간다 병사는 쓰러졌다. 요나단은 무조건 직진하여 구청사에 진입할 것을 명령했다. 만약 구청사 안의 우간다 병사들이나 테러범들이 이스라엘군이 나타난 사실을 안다면 인질들이 위험했다. 관제탑의 우간다 통제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몇 분 전 공항에 잠시 기착하겠다는 통과항공기가 있어 착륙을 허락했는데, 뒤를 이어 몇 대의 수송기가 연달아 레이더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 후 세 대의 수송기가 차례로 착륙을 시작했다. 착륙한 수송기에서 쏟아져내린 이스라엘군 병사들이 각자의 임무에 따라 공항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한 우간다 병사가 사격을 시작했으나 벤츠 뒤를 따르던 랜드 로버의 부대원들이 그를 단발에 제거했다. 요나단이 소리쳤다. "서둘러라!" 벤츠에서 내린 요나단의 부대원들이 구청사를 향해 돌진했다. 구청사 안의 테러범 지도자 자버(Jaaber)도 총소리를 들었으나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워낙 정치상황이 불안한 나라라 누군가가 아민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거니 생각했다. 이스라엘군이 무려 3,300킬로미터나 떨어진 타국의 공항에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이 날이 그의 생애 마지막 날이 되리라는 것도 알 수 없었다. 구청사 진입 구청사 출구에 가장 먼저 도착한 요시(Yossi)대원이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오는 한 명의 테러범을 발견하고 사격을 가했다. 첫 총탄을 피한 테러범 빌프리드 뵈제(Wilfried Boese)가 총구를 인질들 쪽으로 돌리는 순간, 요시가 쏜 총탄이 그를 날려버렸다. 뒤이어 또다른 테러범이 수류탄을 인질 쪽으로 던졌다. 인질들은 신속히 몸을 피했다. 요시는 눈앞에 나타난 테러범이 자신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천운이었다. 테러범의 총에는 실탄이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테러범을 향해 총을 갈기면서 요시는 요나단의 목소리를 들었다. "앞으로, 전진"하는 외침이었다. 여러 방으로 흩어져 수용되어 있던 인질들은 날카롭게 울려 퍼지는 히브리어를 듣고, 모두들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우리는 자할(Zahal, 이스라엘군의 히브리어 명칭)입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집으로 모시기 위해 여기 왔습니다. 모두 엎드리십시오. 우리는 자할입니다." 인질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였다. 이 외침을 들은 인질들은 모두 땅바닥에 엎드렸고, 일어선 채로 서성이던 테러범들은 이스라엘군의 총탄에 한 명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테러범들이 마지막으로 난사하는 총탄에 인질들 몇 명이 죽고 부상당했다. 두 명의 테러범은 구석에 몰리자 수류탄을 터뜨려 자결했다. 첫 번째 수송기에서 내린 제1진에 의해 네 명의 테러범이 제거되었고, 잠시 후 장갑차로 중무장한 제2진의 도착에 따라 추가로 두 명의 테러범이 사살되었다. 네 명은 처음 여객기를 납치했던 테러범들이었고, 두 명은 엔테베에서 합류한 테러범들이었다. 복도에서 방으로 뛰어들어가던 인질 바룩 그로스(Baruch Gross)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이스라엘군이라니...' 그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눈앞에서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고 당황한 그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스라엘!" 그 순간 사나이는 총구를 내리며 말했다. "엎드리십시오. 잠시 후 상황이 종료될 겁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원이었다. 잠시 후 총성이 잦아들었고, 요시 대원은 인질들에게 죽은 테러범들을 식별해 달라고 부탁했다. 구청사 수색을 시작한 이스라엘군은 도망치는 우간다 병사들을 방임했다. 우간다 병사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고 테러범들을 제거하는 것이 이스라엘군의 목표였다. 두 번째 수송기에서 내려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단 숌론 준장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요나단으로부터 아무런 보고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이 요나단이었다. 그가 실패한다면 이 작전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이스라엘 국방장관실에서 스피커로 들려오는 현지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라빈 총리와 페레스 국방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초조함이 번져나갔다. 작전 성공 ! 가장 위험했던 1단계 작전이 완료되고, 인질들을 후송할 준비를 하면서, 요시는 요나단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외침을 듣고 수분이 경과했음에도 요나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청사 안을 뒤져보아도 요나단의 흔적은 없었다. 요시는 잠시 후 구청사 옆의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요나단을 발견했다.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요나단은 벤츠 승용차를 떠나 구청사 진입이 시작되는 순간, 관제탑에서 날아온 우간다 병사의 총탄에 등을 맞아 쓰러진 상태였다. 요시는 순간 자신이 구청사 작전팀을 지휘해야 함을 깨달았다. 먼저 사망자와 부상자를 확인했다. 인질들 중 두 명이 사망했고, 1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신속한 후송이 진행되었다. 요시의 상황보고는 엔테베현장을 지휘하는 단 숌론 준장과 예쿠티엘 아담 소장을 거쳐 장관실로 전달되었다. 11시 10분. 숌론 준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장관실에 울려 퍼졌다. "모든 상황 OK!" 이스라엘군은 인질들을 수송기에 탑승시킴과 동시에 엔테베 공항에 있는 우간다 공군의 미그 전투기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7대의 미그 21기와 4대의 미그 17기가 불길에 휩싸였다. 우간다 공군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전투기들이었다. 첫 번째 수송기가 착륙한지 57분만에 구출한 인질들을 태운 첫 번째 수송기가 이륙했고, 그 후 42분만에 마지막 수송기가 엔테베를 떠났다. 도합 100분이 걸리지 않은 신속한 작전이었다. 중간 기착지인 케냐 나이로비에서의 재급유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모두들 기쁨에 휩싸였지만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의 상처는 이미 손댈 수가 없는 상태였다. 다음날 새벽 1시. 레브 대령은 아민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페레스 국방장관의 지시에 따라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아민이 인질구출을 도운 것은 전혀 없었다. "무조건 고맙다"고 말하는 레브 대령에게 아민은 거만한 목소리로 "나도 지금까지 인질문제 해결을 위한 회의에 참석해 있던 참이라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잘 모르오"라고 말한 뒤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되물었다. 그 때까지도 아민은 인질들이 이미 구출되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레브 대령은 "저도 무슨 일이 생겼는지 잘 모릅니다. 나는 그저 당신의 협력에 감사하다고 전해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받았을 뿐입니다. 우리 정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 친구가 그 말만을 당신에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한 후 전화를 끊었다. 라빈과 페레스를 비롯한 이스라엘 정부지도자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엔테베 작전 중 두 명의 인질이 사망했다. 더 큰 불행은 질병으로 인해 구청사를 떠나 엔테베 공항 근처 무라고병원에 입원해 있던 도라 블로흐 여사의 비극적인 사망이었다. 질병은 이미 치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안전을 위해 구청사보다는 병원에 있는 것이 나으리라 판단한 의사의 호의가 결국 작전당시 그녀를 구청사에 머물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105명의 인질 중 유일하게 우간다에 남겨진 그녀는 이디 아민의 지시를 받은 우간다 비밀경찰에 의해 총살당했다. 아민의 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공항관제탑을 지키던 네 명의 관제사들을 이스라엘의 첩자라는 이유로 처형했다. 도라 블로흐 여사의 시신은 1979년 아민이 실권한 후 예루살렘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군은 유능한 지휘관이자, 국가적 지도자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던 명석한 장교를 잃었다.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은 사망 당시 30세였다. 최초 "번개"작전으로 이름 붙여졌던 엔테베 구출작전은 "요나단"작전으로 변경되었다. 엔테베 작전의 성공소식은 곧 전세계를 기쁨과 충격 속에 빠뜨렸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스라엘 총리관저로는 전세계 지도자로부터의 축하인사가 쇄도했다. 엔테베 작전이 세상을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는 이 작전 직후 똑같은 내용을 소재로 두 편의 TV영화가 제작된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한 편의 제목은 "엔테베 기습(Raid on Entebbe)"이고 다른 한 편은 "엔테베의 승리(Victory at Entebbe)"였다. 엔테베의 승리에서는 버트 랭카스터가 시몬 페레스 역을 맡았다. 엔테베가 남긴 뒷 이야기들 엔테베 작전은 그 밖에도 수많은 뒷이야기를 남겼다. 이 글이 처음 시작될 때 밝힌 바와 같이 현재의 이스라엘 총리는 베냐민 네탄야후이다. 이 글 중간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이스라엘 최고의 영웅 요나단 네탄야후의 동생이다. 요나단의 삶과 죽음은 이스라엘 국민 뿐 아니라 전세계를 감동시켰다. 손꼽히는 명문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언제든지 자신의 안일을 뒤로 한 채 전쟁터로 뛰어든 용기와 헌신의 결과였다. 가족들의 요나단에 대한 사랑도 보통은 아니어서 요나단의 사망 후, 요나단의 생애에 관한 책을 세 권이나 출판했고, 테러리즘 연구를 위한 요나단 연구소(Jonathan Institute)를 설립했다. 형의 덕을 가장 많이 본 것은 베냐민 네탄야후이다. 그에게 처음부터 정치가로서의 길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군복무 시절이던 1968년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일원으로 베이루트 공항 공격작전(여객기 납치에 대한 보복으로 베이루트 공항 활주로의 아랍 항공기 13대를 폭파한 작전)에 참여한 바 있었고, 1972년에도 로드공항 인질구출사건에 참여했던 베냐민 네탄야후였지만, 아버지의 권고로 처음에는 회사원 생활을 오래 한다. 그의 아버지, 벤-지온은 정치가들을 혐오하고 있었고, 둘째 아들이 그런 난장판에 끼어들기를 원치 않았다.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 MIT로 유학을 떠난 베냐민은, 욤 키푸르 전쟁이 일어나자 이스라엘로 돌아와 전쟁에 참전했고, 종전 후 다시 미국으로 가서 MIT에서 건축학사와 경영학 석사를 마쳤다. 이후 보스톤에 있는 컨설팅 회사와 이스라엘 최대의 가구회사인 림(Rim)에서 근무했고, 형의 사망 후 설립된 요나단 연구소의 운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82년 집권 리쿠드 당 소속의 모세 아렌스(Moshe Arens)가 주미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베냐민은 그를 따라 주미 이스라엘 부대사가 되어 워싱턴으로 부임한다. 모세 아렌스는 벤-지온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사실 벤-지온은 이스라엘 독립 이전부터 시오니즘 개혁주의자당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으므로, 이 모임의 전통을 이은 리쿠드 당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네탄야후 가문의 친구들이었던 것이다. 주미 부대사 시절 베냐민 네탄야후는 탁월한 영어실력과 미국식 매너로 인해 인기 프로그램인 "나이트라인"과 CNN의 고정출연자였다. 일찍이 매스컴의 위력을 터득한 베냐민은 이를 철저히 이용했다. 파티나 리셉션에는 일체 참석하지 않았다. 그럴 시간이 있으면 텔레비전에 출연하겠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생활 내내 그는 이스라엘 특수부대의 경험과 형의 명성을 적절히 팔아가면서 유태인 백만장자들과의 교분을 강화했다. 1983년 모세 아렌스가 국방장관이 되어 귀국하자, 5개월간 주미대사를 대리하기도 했었고, 모세 아렌스가 외무장관이 되었을 때는 외무차관으로 모세 아렌스를 도왔다. 1990년 모세 아렌스가 국방장관으로 복귀하고, 다비드 레비(David Levy)가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다비드 레비는 방송에 얼굴 내밀기를 좋아하는 이 젊은이를 신뢰하지 않았다. 외무장관과의 불화로 인해 총리실로 자리를 옮긴 그는 1993년 리쿠드 당수 경선에 참가하여 3월 24일 44세의 나이로 당권을 거머쥔다. 다비드 레비(1937년생), 지브 베냐민 베긴(1943년생. 메나헴 베긴의 아들), 모세 가자브(1945년생) 등 이스라엘의 제2세대 지도자들이 경쟁한 이 싸움은 리쿠드 당의 세대교체를 가져온다. 리쿠드 당 지도자로 활동하면서도 텔레비전을 이용한 그의 전략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혼외정사가 스캔들로 떠오르자 텔레비전 인터뷰에 나가 자신이 아내를 속이고 혼외정사를 가진 적이 있음을 당당히 시인하면서, 오히려 정적인 다비드 레비 전 외무장관이 이를 이용하여 자신을 협박했다고 역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전략들은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를 총리자리로 이끌었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베냐민 네탄야후를 총리로 선출함으로써, 형 요나단에게 보답한 셈이다. 엔테베 인질사건 발생 당시 바닥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라빈은 구출작전의 성공으로 인기를 회복하였으나, 결국 아내의 외환관련 비리로 인해 총리직에서 퇴진한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이 리쿠드 당의 메나헴 베긴이었다. 시몬 페레스는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총리를 지냄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뤘다. 라빈 총리 암살 당시에는 라빈 내각의 외무장관이었다. 라빈을 이어 다시 총리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었던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국민적 영웅 요나단의 동생 베냐민 네탄야후에게 패배하여 총리자리를 내어주었다. 엔테베 작전 이후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의 예를 따랐다. 1977년 10월 18일에는 서독의 특수부대가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에 투입되어,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 테러범들에게 납치된 루프트한자 항공 여객기와 90명의 승객을 구출했다. 1978년 2월 19일 이집트군 특수부대는 팔레스타인 테러범들에 의해 납치되어 사이프러스에 억류된 인질들을 구출하던 중, 사이프러스군에 의해 전원이 사망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1979년 5월 15일에는 프랑스 특수경찰이 이스라엘 항공 여객기를 상대로 무자비한 학살극을 시도하던 세 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소탕했다. 일부는 실패하고 일부는 성공했지만, 중요한 것은 엔테베 작전을 계기로 대다수의 국가들이 국제테러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최근에 프랑스 정보당국은 악명 높은 테러범 카를로스를 검거했다. "자칼"이라고 불려졌던 그의 활동은 이미 하나의 신화였다. 1970년대에 전세계를 대상으로 벌어졌던 테러치고 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사건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소재로 한 영화도 여러 편 만들어졌다. 드골암살음모를 그린 "자칼의 날"에서부터 최근 상영된 "어사인먼트"에 이르기까지 그는 영화로 만들어지기에 매우 적합한 소재였다. 엔테베 인질사건에도 깊숙이 관여하였으나, 엔테베 구출 작전당시 공항에 머물고 있지 않아 위기를 모면한 그의 재판은 세계의 관심을 모았다. 마지막 테러리스트의 비참한 말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나라 이야기를 조금만 해 보겠다. 우리 나라 지도층의 상당수는 군대를 구경도 못한 사람들이다. 보도에 따르면 15명의 남성 장관 중 6명이 병역면제를 받았고, 차관급 38명 중 11명이 군대를 안 갔다고 한다. "하필 미국유학을 가 있는데 6.25사변이 나더라. 그래서 미국에 좀 더 있다보니 병역 연령이 지나가 버리더라", "아무리 기다려도 입영통지서가 안 오더라. 그래서 고시도 붙고 공무원생활도 좀 하다보니 병역이 끝나버렸더라", "군대를 안 갈 정도로 건강은 좋지 않았지만, 공부하거나 유학생활을 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더라"는 식의 말도 안되는 변명이 먹히는 나라가 우리 나라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경우, 18명의 장관 중 한 명만이 병역 미필이다. 그나마 병역미필인 나탄 샤란스키(Natan Sharansky, 1948년생) 통상산업장관은 소련에서 유태인들을 대표하여 이민운동을 벌이다 투옥되어 10년 이상을 감옥과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후, 1986년 비로소 이스라엘로 이주한 사람이니, 병역미필이라고 볼 수도 없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장관이든, 차관이든, 국회의원이든지 공식적인 소개란에 반드시 병역관계를 명시하고 있다. 예컨대, "베냐민 네탄야후, 총리, 행정가, 대위", "자키 하네그비(Tzachi Hanegbi), 법무장관, 변호사, 공수부대원"하는 식이다. 참고로 현재 이스라엘 내각 구성원 명단은 별표와 같다. 80년대 중반 미국에서 공부한 어느 서울대학 교수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 장학금을 받아 미국에 가니 사람들이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병역을 해결했냐는 것이더군요. 그래서, 공부를 마친 후 군에 갈 생각이라고 했더니 모두들 한심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공부하다 중간에 2-3년의 시간을 병역으로 허비하고 나면, 다른 친구들은 벌써 교수가 되어있을텐데 어쩌려고 하냐는 것이었지요. 주위를 둘러보니 현역 판정을 받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알만한 집안 출신들인 저의 유학 동료들은 하나같이 군대면제를 받고 유학을 왔더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습니다. 왜 면제를 받았냐고 하면 모두들 웃기만 했습니다. 그런 것을 묻는 것은 일종의 금기였습니다. 공부하는 기간 내내 솔직히 우리 부모님은 날 위해 도대체 뭘했나 하는 생각 때문에 스트레스를 보통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버드대학과 특수부대 사이를 줄기차게 오간 요나단의 여정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미래가 보장된 청년이었다. 아버지는 코넬대학을 비롯한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가르친 세계적인 역사학자였고, 자신은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한 명석한 학생이었다. 이미 6일 전쟁에 참전하여 한쪽 팔을 잃은 것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욤 키푸르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없이 보따리를 싸 이스라엘로 돌아갔다. 그리고, 엔테베구출작전에서 작전의 선두에 섰다가 생명을 잃었다. 우리는 과연 이런 지도층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친 이들의 유족들에게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하고 있는가? 참고서적 Yeshayahu Ben-Porat, Eitan Haber, and Zeev Schiff, Entebbe Rescue, Delacorte Press/New York, 1977 Lisa Beyer, The Making of BiBi, Time 1996/6/10 Lisa Beyer, The PM, American Style, Time 1996/7/1 Michel Goldberg, Namesake, Yale University Press/New Haven, 1982 Ian Kfir, Netanyahu : The Road to Power, 1998 Yonathan Netanyahu, Self-Portrait of a Hero : From the Letters of Jonathan Netanyahu, 1963-1976, Random House/NY, 1980 Shimon Peres, Battling for Peace, Random House/NY, 1995 Ariel Sharon, Warrior, Somon and Schuster/NY, 1989 Tony Williamson, Counterstrike Entebbe, Collins/London, 1976 ------------------------------------------------------------------------------- - 홈페이지로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