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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6일 금요일 오전 12시 20분 01초
제 목(Title): 김두식/PLO와 아라파트


PLO와 아라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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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의 눈으로 본 이스라엘 

중동평화의 길은 멀고도 험난하다. 중동평화협상을 이해하는 길도 멀고 험하다. 
신문기사만 읽어 가지고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매일 시나이가 어떻고, 
골란 고원 철수가 어떻고, 가자 지구의 아랍인들이 어떻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만큼 많은 변수와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중동문제를 아랍인의 입장에서 한 번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무슨 아랍인 입장이냐고 화를 내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전쟁과 평화에는 분명히 상대방이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상대방의 입장에서 조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스라엘 입장에서 그들의 영웅들만을 
거론하기보다는 그들의 적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19세기말까지 팔레스타인 땅에는 아랍인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여기에 유태인들이 나타나서는 "여기는 원래 우리 땅이니 너희들은 좀 
나가줘야겠다"고 이야기한다. 증거를 대라는 아랍인들의 요구에, 유태인들은 
손때묻은 성경책을 펼쳐 보이며 "여기를 봐라. 여호수아 할아버지가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래 우리는 여기서 살아왔다. 겨우(?) 2,00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는 우리 
땅이었다"고 설명한다. 이것이 벤-구리온 등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사용한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아랍인들은 기가 찬다. "야 이 놈들, 순 억지 아니야? 그게 
말이 되니? 너네 조상들이 쫓겨나고 난 후 우리가 2,000년 동안 여기서 살았다. 
그건 역사 아니니? 너희들한테 이 땅을 빼앗은 것은 로마인이지, 우리들 아랍인이 
아니야. 그리고 인구수를 봐라. 우리 아랍인들 수가 너네보다 두 배는 많다. 
그런데 이게 어디 너네 땅이니?" 결국 말이 통할 수가 없어서 전쟁이 
벌어진다(1948년). 

비록 수는 적지만, 대학살을 경험한 유태인들은 제 정신이 아니다. 여기서 
물러나면 갈 곳도 없다. 대신에 수억 아랍인구를 배경으로 삼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통상 팔레스타인인이라고 부른다)들은 느긋했다. "우리가 뭉쳐서 싸우는데 
너희 유태인들이 며칠이나 버티나 보자." 그러나, 유태인들은 정말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아랍 5개국과 맞서 싸우더니, 팔레스타인 땅을 자기네 나라로 만들어 
버렸다. 이스라엘 독립전쟁은 곧 팔레스타인 망국전쟁이었다. 이 땅의 주인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갈 곳을 잃었다. 피난행렬이 줄을 이었다. 디르 야신 학살 사건 
이후 "유태놈들이 팔레스타인인들 씨를 말린다더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피난민들이 갈 수 있는 곳은 트렌스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등 이스라엘 
인접국들과 가자 지구였다. 

팔레스타인에서 피난 온 아랍 형제들을 바라보는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스라엘 놈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처음 확보한 
땅만으로는 만족할 수가 없었는지 슬금슬금 정착촌을 확대하고 있었다. 또 한 판 
전쟁이 벌어진다(시나이 전쟁, 1956년). '이번에는 무기가 충분해서 이기고도 남을 
거야'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집트의 눈앞에 갑자기 이스라엘 공수부대가 떨어져 
내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해 버렸다. 다행히 이 첫 
싸움에서는 국제적 압력에 밀려 이스라엘 애들이 금방 철수했다. 국경지역에서는 
늘 작은 싸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당분간 평화가 지속되었다. 

1967년 6일 전쟁이 일어났다. 모세 다얀과 이츠하크 라빈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은 
순식간에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 요르단강 서안, 그리고 가자 지구를 점령해 
버렸다. 골란 고원은 전략적 요충지였고,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주된 거주지였다. 성경에 "가사"로 번역된 가자지구는 여호수아 
시절부터 이미 블레셋 사람들의 거점이었고, 들릴라의 꾀임에 빠진 삼손이 붙잡혀 
최후를 맞은 곳이기도 하다. 6일 전쟁이 끝나면서 이제나저제나 점령한 땅을 
돌려줄지 기다려 보았지만 이스라엘은 땅을 돌려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마침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유태인 이민 때문에 더 이상 개간할 땅이 
부족한 형편이었다. 예멘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고, 러시아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심지어는 이디오피아에서 온 피부색이 검은 유태인들도 있었다. 
이디오피아에서 감동의 구출작전 끝에 이스라엘에 온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이스라엘에 오기 전에 전기와 수도를 구경도 못해본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살 
땅을 주어야 했다. 점령지구 내의 정착촌 건설이 시작되었다. 좀 위험하기는 해도 
점령지구에 들어가서 살면 세금혜택도 주어졌고, 땅도 거의 공짜였다. 새로 오는 
이민자들은 돈이 없었고, 그들에게 점령지구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점령지구내의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바라보는 아랍 여러 나라들은 화가 났다. 
이스라엘이 거기에 정착촌을 건설하는 것은 곧 그 땅을 돌려줄 의사가 전혀 없음을 
의미했다. 국제사회에 호소했다. "쟤네들 좀 나가게 해줘요!." 이스라엘은 꼼짝도 
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명절 욤 키푸르를 이용하여 아랍 여러 
나라가 선제공격을 해 보았다(욤 키푸르 전쟁, 1973년). 빼앗긴 땅을 되찾자는 
전쟁이니 부담도 적었다. 처음 하루 이틀 신나게 진행되던 전쟁은 이스라엘 
예비군들이 나타나면서 완전히 역전되었고, 본전도 못 뽑고 후퇴해야 했다. 어제의 
용사들 이스라엘 예비군은 정말 무서웠다. 그리고,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평화협상을 요구하는 전세계의 압력은 계속되었지만, 이스라엘 정부의 입장도 쉽지 
않았다. 평화협상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니었다. 결국, 빼앗은 땅에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었다. 그러나, 점령지를 돌려줄 경우, 거기에 
이미 정착한 이민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있어 새로운 
정착촌 사람들의 표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내부적으로도 두 가지 욕구가 
있었다. 하나는 평화를 향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착민들의 안전에 대한 
것이었다.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빼앗은 땅에서 매일 
아랍인들의 테러위협에 시달려서 뭣하겠냐? 그게 어디 행복이냐? 점령지의 
정착촌에는 마음 편히 놀러갈 수도 없다. 그러느니 차라리 땅은 좀 잃더라도, 
평화롭게 살자." 이런 이야기를 듣는 정착촌 사람들은 발끈했다. "그렇다고, 
너네들 같으면, 자기 피땀으로 일군 마을을 내주고 싶겠냐? 여기는 이제 우리 
집이다. 자기 집을 어떻게 포기하냐?" 이러니, 아무리 국제사회의 요구가 심해도, 
정부지도자들이 쉽게 땅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 입장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보는 세계의 시각은 
결코 공정하지 않았다. 늘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만 사건들이 이해되고 있었다. 
아마도 이렇게 되는 배경에는 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는 유태인의 경제력도 한 
몫하고 있으리라. 더 이상 말로는 안되겠다는 확신이 섰다. 세계의 주의를 
환기시킬 수 있는 방법은 극단적인 테러밖에 없다. 그래서, 비행기를 납치하고, 
사람을 죽였다. 사람을 죽일 때도 주로 백주 대낮에 다른 사람들이 훤히 보고 있는 
곳에서 죽였다. "그렇게 하면, 그나마 세계 신문의 머릿기사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고, 아무리 무딘 사람들도 한 번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운명을 생각해 
주리라." 자살폭탄테러도 그런 것이다. 우리가 볼 때는, 모슬렘 광신자들이 정신이 
돌아버린 상태에서 그런 짓을 벌이는 것 같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들 입장에서 볼 때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형편은 유태인이 1948년 이전에 
겪었던 것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그런데, 세계는 침묵한다. 그러니, 그런 
미친 몸짓으로라도 자신을 표현하게 된 것이다. 

야세르 아라파트의 등장배경 

지난 30년간 이런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입장을 대변해 온 사람이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이다. 아라파트만큼 다양한 평가를 받는 인물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이나 서방세계에서 볼 때 1980년대 말까지의 아라파트는 
완전히 괴물이었다. 도대체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해방자였다. 요르단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후세인 왕에게 도전하는 모반자였다. 시리아의 입장에서 볼 때 아라파트는 
하페즈 알-아사드(Hafez al-Assad) 대통령의 권위를 넘보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아랍 극단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 아라파트는 시류에 영합하는 더러운 
사기꾼이었다. 

이틀 이상은 같은 침대에 자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로 매일 매일 위험 속에서 
살아야 했던 그는 우선 출생부터 다소 불투명하다. 출생증명서에 의하면 1929년 
8월 24일 이집트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일생 동안 
자신은 이집트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해 왔다. 팔레스타인 
지도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으나, 
가정불화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가 헤어져 있던 중 어머니의 친정인 예루살렘에서 
출생했다는 아라파트 측근들의 설명도 설득력이 있다. 출생 증명에 이집트에서 
태어났다고 되어 있는 것은 카이로대학에서의 학비를 면제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4년 후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예루살렘의 
외삼촌 집에서 양육된다. 어머니의 사망 후 아버지가 두 명의 부인을 더 들인 
까닭이었다. 그의 본명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안 이름을 모두 함께 적는 아랍 
전통에 따라 모하메드 압데르 라우프 아라파트 알-쿠드와 알-후세이니(Mohamed 
Abder Rauf Arafat al-Kudwa al-Husseini)이다. 이 이름만 보면 야세르 아라파트의 
아버지는 라우프 아라파트이며, 그의 가문은 후세이니 가문의 한 지파임을 알 수 
있다. 16세기 이래로 후세이니 가문은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유력한 집안이었고, 
아라파트의 아버지 압데르 라우프 아라파트는 부유한 상인이었다. 

알-후세이니 가문이 배출한 또다른 걸출한 인물은 20세기 초 요르단의 
파이잘(Feisal) 왕자와 함께 터키에 대항한 게릴라투쟁에 참여했던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Haj Amin al-Husseini)이다. 파이잘 왕자와 하지 아민을 반란으로 이끌어 
낸 사람이 영국군 정보장교 로렌스(T.E. Lawrence)였음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로렌스는 일단 제1차 세계대전만 끝나면 영국이 아랍제국의 성립을 도울 것이라는 
약속 하에 이들을 전쟁으로 끌어들였었다. 로렌스의 지도를 받아 터키와 싸웠던 
파이잘 왕자와 아민 알 후세이니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영국의 약속대로 
대아랍제국이 건설될 것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는 비밀협약이 맺어져 있었다. 그 내용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시리아와 레바논 지역은 프랑스의 통제하에, 이라크와 트란스요르단 및 걸프 
지역은 영국의 통제하에, 팔레스타인 지역은 영국과 국제연맹 통제하에 둔다는 
것이었다. 로렌스의 친아랍 성향을 익히 알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이 비밀협약의 
내용을 로렌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미 1918년 자신의 부대원들과 함께 
다마스커스에 입성한 파이잘 왕자는 아랍행정부를 조직한 후, 1920년에는 스스로를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대시리아제국의 수장으로 칭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는 예루살렘 거리에서 파이잘 왕국의 
성립을 자축했다. 그러나 파이잘의 왕국은 10주를 넘기지 못했다. 국제연맹과 
연합국은 영불 비밀 협약에 따라 다마스커스의 파이잘 왕으로부터 왕관을 빼앗아 
왕국을 분할했다. 트랜스 요르단 지역은 파이잘 왕의 형인 압둘라(Abdullah) 
왕자에게 넘어갔고, 시리아는 프랑스가 직접 관할했다. 파이잘 왕을 무마하기 위해 
그에게는 이라크를 넘겨주었다. 팔레스타인은 영국이 위임통치하기로 했다. 터키와 
잘 싸우기만 하면 영광의 날이 올 것으로 기대했던 파이잘 왕자에게 있어서 이보다 
심한 배신이 있을 수 없었다. 

1920년 하지 아민은 유태인에 대항한 유혈봉기(유태인의 입장에서 쓸 때는 
폭동으로 표기했었다)를 일으키고, 영국군의 추적을 받아 잠적한다. 영국군은 곧 
궐석재판을 열어 그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하지만, 곧 아랍사회에 미치는 그의 
영향력이 보통이 아님을 깨닫고 이를 철회한 후 그를 예루살렘의 수장(mufti. 
머프티는 원래 이슬람의 율법사를 일컫는 말이다)으로 임명한다. 이때부터 그와 
영국간의 협력관계가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은 유태인들이나 기독교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아랍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지였다. 모슬렘 교도들의 
신앙에 따르면 모하메드는 승천하기 직전, 날개 달린 그의 말 알-부라크를 타고 
메카를 떠나 예루살렘에 들려 그의 말을 벽에 매어 두었다고 한다. 그러니, 
아랍인들도 예루살렘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1929년의 아랍인 봉기 때도, 
1936년의 아랍인 봉기 때도 그 배후에는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가 있었다. 아랍인 
봉기 때마다 명분은 뚜렷했다. 유태인들의 정착촌 확대를 더 이상 묵과했다가는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을 통째로 빼앗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39년 영국 측의 
백서(White Paper)가 발표되고,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민이 제한된 이후에도 하지 
아민 알-후세이니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1941년 독일로 간 하지 아민은 나치에 
협력할 아랍인 부대를 결성하는 한편, 모든 유태인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하지 아민 알-후세이니는 독일에 머물며 
히틀러의 선전가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것은 그의 정치적 실책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패배로 끝나자 유럽의 유태인들은 하지 아민을 붙잡아 
누렘베르크 군사재판에 보내려 한다. 그러나, 알-후세이니는 유태인들의 추적을 
피해 이집트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그는 이집트와 요르단에 머물며 
팔레스타인 망명정부를 이끈다. 

아라파트의 청년시절 

야세르 아라파트는 1942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이집트의 카이로로 갈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며 아랍과 유태인 사이의 이런 분쟁을 직접 목도했다. 그리고, 
그가 카이로에서 학생시절을 보낼 당시 하지 아민 알-후세이니와 그의 
군사지도자인  카데르 알-후세이니(역시 후세이니 가문의 일원이다)는 카이로에서 
망명정부를 이끌며 팔레스타인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하지 
아민은 독일에서 탈출하면서, 독일군 장교들과 동행했고, 이들에 의해 팔레스타인 
출신 아랍인들의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다. 아라파트는 곧 하지 아민의 눈에 띄었고, 
무기밀매상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1947년부터 
팔레스타인에서 아랍인과 유태인 사이의 투쟁이 격렬해졌다. 1948년 4월에는 
예루살렘을 수비하던 카데르 알-후세이니가 전사했다. 동일한 기간, 이르군과 레히 
연합부대에 의해 디르 야신이 파괴되었다. 이곳에서 254명의 아랍인들이 사망한 
사건은 아랍인들의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디르 야신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카이로 대학의 모슬렘 형제회(Muslim Brothers) 
학생들은 책을 불태우며 소리친다. "조국을 잃게된 마당에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냐? 지금은 공부할 때가 아니다. 우리 조국은 우리를 원한다!" 기차를 타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학생들 중에는 아라파트도 끼어 있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아라파트는 다리에 총상을 입는다. 전투 중의 상처가 아니라 오발 사고로 인한 
것이었다. 5월 14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하고, 다음 날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5개국의 이스라엘 공격이 시작된다. 아랍 정규군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면서 
아라파트를 비롯한 열혈 팔레스타인인들은 싸울 기회를 잃는다. 아랍군 장교들이 
"이번 싸움은 너희들의 것이 아니다. 언젠가 너희들의 때도 올 것이다"라며 싸움을 
만류하고, 총기를 압수한 것이다. 훗날 아라파트는 자신들이 배신을 당했다고 
회상한다. "그들(아랍연합군)은 제대로 된 싸움을 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로만 
떠들어댔다. 그들은 입으로는 이스라엘에게 No라고 말했지만, 행동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이제 시리아와 레바논, 
트렌스 요르단과 가자로 도망쳐야 했다. 실망과 배신감에 몸을 떨며 아라파트는 
카이로로 돌아온다. 

카이로에 돌아온 아라파트는 카이로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이스라엘과 
맞서 싸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당시의 이집트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싸움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아라파트는 카이로 대학의 ROTC 과정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당시 이집트 대학생들이 ROTC 훈련을 받는 목적은 
실제 장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장교 증명서를 받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생들은 훈련에 대충대충 참여했지만, 아라파트만은 누구보다도 성실히 
훈련에 임했다. 그의 목적은 진짜 전사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영국군이 점차적으로 철수하고 있었으나, 이집트 민족주의 세력은 영국의 
완전철수를 원했다. 아라파트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학교공부를 
접어둔 채 모슬렘 형제단(Muslim Brotherhood)과 함께 수에즈로 가 영국군에 대한 
게릴라전에 참여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이집트군 지하조직인 자유장교단의 
주요멤버들 만나게 된다. 그 중에는 나세르와 사다트 같은 훗날의 이집트 
지도자들도 있었다. 아라파트는 곧 이집트 예비군 대위로서 대학생들에 대한 
군사훈련을 책임지게 되고, 1952년에는 하지 아민 알-후세이니의 지원을 받아 
팔레스타인 학생회의 회장에 당선된다. 

같은 해 이집트 자유장교단의 쿠데타가 일어나고, 1956년 7월 26일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한다. 뒤이은 시나이전쟁에 아라파트는 폭탄처리 분대장으로 
참전하지만, 전쟁은 너무나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이 전쟁의 승리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점령함에 따라 이집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많은 팔레스타인 
학생들은 일시적으로 자금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들의 부모들이 모두 
가자지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라파트도 그들 중의 하나였다. 학생들은 이런 
상황에서 아랍연맹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데모대를 
결성하여 아랍연맹 건물로 행진해 간다. 그러나, 건물 입구에서 이들은 경비대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이때, 아라파트는 건물로 혼자 뛰어올라가 건물을 지키는 
장교와 이야기를 잠시 나누더니 곧 대표단의 입장을 허가받는다. 그가 어떻게 건물 
입장을 허락받았는지에 대한 동료의 회고. "우리 학생 대표단이 아랍연맹건물 
진입을 허락받은 후 내가 아라파트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입장허가를 
받아냈느냐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아라파트는 그의 장교신분증을 나에게 
보여주면서, '이걸로 내가 이집트군 장교라고 말했어'라고 설명하더군요. 그는 
자기의 장교신분증에 '예비군'이라고 쓰인 부분을 손으로 가린 후 그걸 보여준 
것이었지요(이집트군에 있어서 예비군과 현역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대학시절부터 커닝의 명수였던 아라파트다운 기지였다. 그리고, 그는 아랍연맹의 
자금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한다. 

PLO와 파타의 결성 

정치활동으로 인해 동료들보다 2년 늦게 대학을 졸업한 야세르 아라파트는 
쿠웨이트로 가서 엔지니어로 일하기 시작한다. 당시 석유산업이 일어나고 있던 
쿠웨이트는 황금의 땅이었다. 그곳에서 아라파트는 연봉 30,000불을 받으며 부를 
축적한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목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 기간 그는 팔레스타인 
출신 동료들과 힘을 모았고, 1959년 10월 10일에는 최초의 군사조직인 파타(Fatah, 
팔레스타인민족해방운동의 약자로 "승리"를 의미)를 결성한다. 자금은 주로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던 하지 아민 알-후세이니에게서 나왔다. 조직을 서서히 확산한 
파타가 최초의 중앙위원회를 결성한 것이 1963년이었고, 파타와는 별도로 1964년 
나세르의 제안에 의해 팔레스타인을 대표할 기구가 탄생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alestine Liberation Organization)이다. 최초로 PLO를 이끈 
것은 구세대를 대표하는 법률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아메드 슈케리(Ahmed 
Shukairy)였다. PLO와 파타의 관계는 일면  이스라엘 건국 이전의 유태 지도부와 
하가나의 관계를 연상시키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달랐다. 파타는 PLO에서의 
주도권을 잡고 싶어했다. 말만 하는 PLO 지도부와 당장 행동을 원하는 파타 
지도부는 근본적으로 성향이 달랐다. 

1965년부터 파타는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고, 3-4명으로 조직된 파타 
행동대원들은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폭탄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군의 
보복공격을 염려한 시리아와 레바논정부는 이들의 국경침입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파타 행동대원들은 이에 신경 쓰지 않았다. 2월 28일 요르단국경 근처의 이스라엘 
곡물저장 창고를 폭파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농장트럭에 총을 난사하거나, 
화학탱크에 수류탄을 던지거나, 개인주택을 공격하는 등의 파상공세가 벌어졌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군 특수부대는 즉각 국경을 넘어 요르단 연료공급소를 
폭파했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이스라엘군 사이의 본격적인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1967년의 6일 전쟁에서 아랍 여러 나라들은 완전히 패배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전쟁에 참전할 기회도 없었다. 뭔가 시작해보기도 전에 전쟁은 끝이 났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골란 고원, 시나이 반도를 석권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동부 예루살렘의 구시가가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간 것이었다. 전세계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경이롭고 기적적인 일로 
받아들였지만,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있어서 이 전쟁보다 큰 재난은 없었다.  전쟁 
종료와 함께, 아라파트는 요르단강 서안 이스라엘군 점령지구 내에 파타 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한다. 아라파트다운 공격적인 전략이었다. 때로는 의사로, 때로는 
목동으로 변장한 아라파트는 4개월 이상을 요르단강 서안에 머물며 파타를 
지휘한다. 같은 해 9월 야드 한나 키부츠의 관개수로를 폭파하는 등 연이은 파타의 
테러는 이스라엘 사회를 놀라게 하고, 대규모 검거열풍이 불어닥친다. 1967년 
말까지 이스라엘은 1,000명의 팔레스타인 학생들을 체포한다. 더 이상 요르단강 
서안에 머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 해 12월 아라파트를 비롯한 300명의 파타 
행동대원들은 요르단 서안지역을 철수한다. 

요르단 정착과 아라파트의 PLO장악 

1967년 11월 22일 유엔 결의 242호는 최근의 분쟁(6일전쟁을 지칭)으로 인한 
점령지로부터 이스라엘이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어차피, 별 강제력이 없는 
유엔결의였고, 이스라엘은 점령지역내에서 본격적인 정착촌 건설을 시작한다. 
요르단 서안에서 철수한 아라파트가 갈 곳은 요르단뿐이었다. 6일 전쟁으로 인해 
심한 타격을 입은 시리아와 이집트는 자국 내에서 파타의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고, 
약체 레바논은 이스라엘의 공격으로부터 파타를 보호해 줄 능력이 없었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파타의 요르단 정착을 허용하는 대신, 
파타 행동대원들에 의한 이스라엘 공격만은 묵인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후세인 
왕은 영국으로부터 요르단을 얻은 압둘라 왕자의 손자였다. 그러나, 파타는 후세인 
왕의 경고를 무시하고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키부츠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한다. 
1968년 3월 18일 이스라엘 스쿨버스에 대한 폭탄테러 사건이 터지고, 3월 21일 
요르단의 파타기지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보복공격이 벌어진다. 보복공격의 결과 
팔레스타인인 97명과 요르단인 128명이 사망했다. 이스라엘군도 29명이 전사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이 전투를 즉각 파타의 승리로 규정한다. 이 시기에 모세 
다얀이 고고학발굴현장에서 부상을 입었음은 이미 이야기했다. 

1968년 봄 예루살렘에서는 파타에 의한 연쇄폭발 사건이 터졌다. 예루살렘 
곳곳에서 터지는 수류탄소리에 이스라엘 국민들은 경악해야했다. 텔 아비브에서는 
중앙 버스정거장에서 폭탄이 터졌다. 같은 해 조지 하바쉬(George Habash)가 
창건한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Palestine, 
약칭 PFLP)도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다. 안과의사 출신인 조지 하바쉬는 
팔레스타인인으로는 특이하게도 기독교(그리스 정교)인이었다. 베이루트에 있는 
아메리칸 대학 의대를 졸업한 그는 치과의사 출신의 하다드(Wadi Haddad)와 손을 
잡고 일찍이 "아랍 민족주의자 운동(Arab Nationalist Movement)"을 결성했고, 이 
조직이 개편된 것이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이다. 하바쉬는 극좌 모험주의자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과 가까운 편이었으나, 6일 전쟁에서 나세르가 대패하는 
것을 지켜본 후 입장을 바꾸어 아라파트와 접촉을 시작한다. 승리를 위해서는 
연대가 필요하다는데 공감을 이룬 두 사람은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한다. 두 사람 사이의 오랜 경쟁과 협력관계가 시작된 것이다. 

6일 전쟁의 패배와 함께 팔레스타인인들의 공식적인 대표기구라 할 수 있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메드 슈케리(Ahmed Shukairy) 
PLO 의장은 계속되는 사임압력을 무시하고 있었고, 점차 신망을 잃어갔다. 
아라파트의 존재는 갈수록 위협적이 되었다. 나세르도 아라파트가 반이스라엘 
투쟁에 매우 유용한 사람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1968년 7월 아라파트는 나세르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이곳에서 그는 크렘린 지도자들로부터 지원을 
약속받는다. 이 사건은 그가 국제정치무대에 데뷔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1969년 1월 자동차 스피드광이었던 아라파트는 암만 바그다드로 향하는 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는다. 그리고, 한 달 후 병상에서 일어난 그는 마침내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의장으로 선출된다. 조지 하바쉬의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은 아라파트의 헤게모니 장악을 경계했으나 대세를 어쩔 
수는 없었다. 아라파트의 PLO는 이때부터 팔레스타인운동의 상징이 된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과 파타 사이에 경쟁적으로 벌이는 테러사건은 
1970년대까지 꾸준히 계속된다. 파타는 주로 이스라엘 접경지역 침투를 통한 
폭탄테러사건을 일으켰고,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은 여객기 납치 등 보다 과격한 
투쟁방법을 선호했다. 1968년 7월 23일에는 로마를 떠나 텔 아비브로 향하던 
이스라엘 항공(El Al) 소속의 보잉 707 여객기가 세 명의 테러범들에게 
납치되었다가 같은 해  8월 31일 15명의 아랍 테러범들과의 교환을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2월 26일에는 아테네 공항에서 두 명의 테러범이 이스라엘 
항공 소속 여객기에서 한 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한 후 체포되었고, 1969년 
2월에는 쮜리히의 클로텐 공항에서 네 명의 테러범이 이스라엘 항공 여객기의 
납치를 시도했다. 같은 해 8월에는 로마에서 로드로 향하던 미국의 TWA여객기가 
다마스커스로 납치되었고, 1970년 2월에는 세 명의 테러범이 뮌헨 공항의 
공항버스에 총기를 난사하여 1명의 이스라엘인을 살해했다. 같은 달에는 
쮜리히에서 텔 아비브로 향하던 스위스 항공 여객기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38명의 
승객과 9명의 승무원이 사망했다. 심지어 1970년 9월 6일에는 하루동안 무려 세 
대의 여객기가 납치되어 400여명의 승객이 테러범들에게 억류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9월 9일에는 또 한 대의 여객기가 납치되었다. 납치된 네 
대의 여객기 중 세 대는 요르단에 착륙했다. 

검은 9월 

아라파트가 PLO를 장악하고, 영향력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불안을 느낀 것은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이었다. 아라파트는 요르단 안에서 독자적인 왕국을 구축하고 
있었다. 요르단 경찰과 파타 행동대원들 사이의 충돌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파타 
행동대원이 요르단 경찰에 의해 체포되면 파타는 경찰서를 기습해 행동대원을 
구출해 냈다. 심지어 요르단군인들이 휴가를 나갔다가 파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PLO의 거점인 암만에서 아라파트가 강제로 걷어들이는 
기부금은 거의 세금과 동등하게 인식되고 있었다. 나중에는 독자적인 경찰과 
법정까지 운영했다. 국민들의 60퍼센트가 팔레스타인 출신인 요르단에서 이러한 
현상은 곧 후세인의 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였다. 파타의 이스라엘 공격에 따른 
국경분쟁도 후세인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조지 하바쉬의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은 
이미 후세인 국왕의 비협조적 태도와 친서방 성향에 격분하여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세력의 이와 같은 월권행위를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후세인 왕은 1970년 2월 마침내 행동에 나선다. 그가 취한 최초의 조치는 요르단 
도시경계선 안으로의 무기 반입을 일체 금지시킨 것이었다. 후세인 왕의 논거는 
"싸우고 싶으면 이스라엘과 싸워라. 요르단은 팔레스타인의 적이 아니다. 무기를 
쓰려면 이스라엘을 상대로 써라. 요르단 내부에 무기가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한가?"라는 것이었다. 하바쉬의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은 이에 즉각 반발하여 
요르단 경찰서를 습격함으로써, 자신들의 힘을 과시했다. 1970년 6월에 이르러 
요르단 전체는 내전의 위기에 휩싸이고, 일단 후세인 왕은 화해를 시도한다. 
그러나, 화해의 기간은 길지 않았다. 미국의 로저스 국무장관에 의해 제안된 
중동평화방안이 이스라엘과 아랍 여러 나라 사이의 일시적인 해빙무드를 
불러오면서,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은 다시 분노에 휩싸인다.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은 138,000명에 이르는 자체 병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후세인을 제거하면, 모든 요르단인들이 봉기에 동참하리라 낙관했다. 
9월에는 후세인 왕이 외국유학에서 돌아오는 딸을 태우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중에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 게릴라들의 공격을 받는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은 전세계에서 무차별 여객기 납치극을 벌인다. 후세인 
왕도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1970년 9월 17일 후세인 왕은 요르단 군의 암만 진입을 명령한다. 도시 전체는 
긴장 속으로 빠져들었고,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과 파타를 포함한 PLO의 
전사들은 참호 속으로 들어가 방어진을 편다. 아라파트는 요르단 국민들에게 
총궐기하여 스트라이크를 벌일 것을 호소하는 동시에 후세인 왕에게 48시간 이내 
짐을 싸서 나라를 떠나라고 요구한다. 다음 날 새벽 드디어 요르단 군과 PLO 
사이에 총격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검은 9월"의 시작이었다. 전화와 
전기가 끊어졌고, 생필품이 바닥났다.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중무장한 요르단군에 맞서 격렬한 싸움을 벌인다. 요르단 군은 
아라파트를 체포하기 위한 특별조를 편성하여 그의 뒤를 추적하지만, 그를 잡는데 
실패했다. 이라크 군과 시리아 군이 아라파트를 지원하기 위해 요르단 국경에 
집결했고, 사우디 아라비아는 사태를 관망했다. 미국은 요르단 왕을 돕기 위해 
제6함대를 요르단 근방으로 보냈다. 리비아와 쿠웨이트는 요르단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집트는 PLO를 조용히 지원하면서 후세인 왕에게 유혈충돌을 
중단하라고 촉구한다. 이스라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국경에 집결한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이 요르단으로 진입할 경우 요르단 사태에 개입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9월 24일 양측의 휴전이 성립했으나, 이 기간 중 최소한 2,0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했다. 9월 28일에는 카이로에서 아랍정상회담이 열렸고, 이 
과정에서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의사들이 휴식을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연맹의 지도자로서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던 
나세르는 과로 끝에 사망한 것이었다. 

카이로에서 돌아온 후세인은 개각을 단행했고,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강경파인 
와스피 탈 (Wasfi Tal)을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임명한다. 와스피 탈 총리는 법과 
질서의 확립을 원했고, 암만에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한 6개월 
계획을 마련했다. 다른 한편 후세인 국왕은 이갈 알론 이스라엘 외무장관과의 
비밀회담을 통해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적대적 행동을 
방지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한다. 1971년 봄 요르단군은 암만을 
완전 포위했고, 7월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은 거점인 암만을 포기해야 
했다. 파타 지휘관이던 아부 알리 이야드(Abu Ali Iyad)는 요르단군에 의해 
고문당한 후 살해당했고, 또다른 지휘관 압바스 제키(Abbas Zeki)는 요르단군의 
추적을 피해 이스라엘로 도망쳐야 했다. 요르단군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스라엘군에 잡히는 것이 낫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스라엘은 기꺼이 그를 
맞아들였다. 이스라엘과 PLO의 투쟁에서 흔치 않은 장면이었다. 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요르단에서 쫓겨나 레바논과 시리아에 정착했다. 

검은 9월단의 테러활동 

이제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은 더욱 극단을 향해 달려갔다. 1971년 9월, 아라파트 
자신을 포함한 파타 지도자들은 후세인 왕을 전복하고, 1970년 9월의 비극을 
보복하기 위한 특별조직을 만든다. 그들의 목표는 자신들이 아직 죽지 않았으며, 
더 이상 세계와 타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PLO 조직 
자체에 위협이 되어서는 안되므로, 새로운 조직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관계는 
비밀에 부쳐졌다. 아라파트의 파타와, 하다드의 팔레스타인 인민해방전선으로부터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일본의 적군파까지 테러에 가담했다. 당연히 첫 번째 
목표는 와스피 탈 요르단 총리였고, 1971년 11월 28일 카이로의 쉐라톤호텔 
로비에서 와스피 탈을 살해하는데 성공한다. 암살자들은 스스로를 "검은 
9월단"이라고 밝힌다. 1970년대의 테러를 주도한 "검은 9월단"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전세계는 이 사건을 저지른 "검은 9월단"에 별로 주목하지 않는다. 이름도 
못 들어본 조직이었으므로 그저 일시적인 사건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1972년 9월 5일 뮌헨올림픽에 참여한 이스라엘선수촌이 검은 9월단에 
점거당해 9명의 선수가 살해당하면서, 세계는 경악한다. 후세인 왕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것이 
주목적이었으므로, 검은 9월단의 테러는 이스라엘인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인 뿐만 아니라 요르단인, 사우디 아라비아인, 미국인, 
이탈리아인, 네덜란드인, 서독인들이 무차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는 
뒤늦게나마 이들의 테러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미국의 CIA와 이스라엘의 모사드, 
영국의 MI6, 서독 정보부를 비롯한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이 테러범들을 붙잡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이스라엘의 모사드와 PLO 사이에서는 보이지 않는 전쟁이 진행되었다. 모사드는 
보복을 원했다. 최정예 요원들을 테러범 살해에 투입했다. 모사드의 목적은 체포가 
아니었다. 목표가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했다. 1972년 9월에서 1973년 7월 사이 
아라파트 진영에서도 최소한 60명의 핵심간부들이 모사드의 손에 살해되었다. 
파리와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심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모사드는 이 
살해사건들이 자신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결코 시인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모사드는 미국의 CIA나 우리 안기부와는 달리 부장 재임 시에는 부장의 이름을 
공개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대중 앞에 나서는 일도 전혀 없다. 기자회견도 없다. 
그러니, 아라파트로서는 자기 측근들이 하나씩 죽어 가는데도 호소할 데가 없었다. 
1973년 7월 모사드 요원들에 의한 결정적인 실수가 노르웨이에서 벌어진다. PLO 쪽 
정보조직을 이끌고 있던 알리 하산 살라메(Ali Hassan Salameh, 뮌헨 올림픽 
사건의 지휘자)를 살해한다는 것이, 실수로 팔레스타인 출신 웨이터를 죽이게 
되었던 것이다. 피해자는 임신한 노르웨이인 아내와 함께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6명의 모사드 요원이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알리 하산 
살라메는 1979년에 가서야 베이루트에서 자동차에 설치된 폭탄으로 살해된다. 

1973년 3월 1일 저녁 7시 사우디에 있는 미국대사관이 검은 9월단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클레오 노엘 (Cleo Noel) 대사와 조지 커티스 무어(George Curtis Moore) 
부대사, 그리고 벨기에 외교관 가이 에이드(Guy Eid)가 인질로 붙잡혔다. 
테러범들은 검은 9월 사건 때 요르단에 의해 체포된 아부 다오우드(Abu Daoud)와 
이스라엘, 서독, 미국에 붙잡혀 있는 테러범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심지어는 
로버트 케네디 의원을 살해한 팔레스타인인 서한(Sirhan)의 석방도 요구했다. 
요구가 거절되자, 테러범들은 세 명의 인질들을 벽에 세운 뒤 총살형을 집행했다.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이 사건에 대해 아라파트는 오랫동안 자신의 개입을 
부인해 왔다. PLO가 검은 9월단과 관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검은 9월단의 
구체적인 작전계획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1990년 영국의 
BBC 방송은 당시 테러범들이 PLO본부와 계속적인 교신하고 있었다는 자료를 
보도했다. 

사실 1970년대에 벌어진 테러사건들을 모두 기록할 필요는 없다. 하여튼 무지하게 
많은 사건들이 벌어졌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테러의 중심에는 
아라파트가 있었다. 팔레스타인 테러의 정점에서 벌어진 사건이 바로 뒤에 
설명하는 1976년의 엔테베 사건이다. 

1973년의 욤 키푸르 전쟁은 아라파트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온다. 하긴 욤 키푸르 
전쟁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입장에서 욤 키푸르 전쟁이지,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제4차 중동전쟁(욤 키푸르 전쟁 이전의 소모전까지 포함하면 제5차 중동전쟁이 
된다), 또는 1973년 10월 전쟁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옳다. PLO는 이 전쟁에 
시리아군과 함께 참전했었다. 그러나, 아랍 측의 선제공격으로 이스라엘의 허를 
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PLO는 크게 
세 개의 세력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하나는 아라파트가 창설한 파타 그룹이고, 
두 번째는 시리아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사이카(Saiqa) 그룹, 세 번째는 
앞서 하다드가 이끄는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 그룹이었다. 사이카는 
친시리아적이었고, 하다드 그룹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1974년 
10월 28일 라바트에서 열린 제7차 아랍정상회의에서 PLO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대표하는 유일의 정당한 대표자"로서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권리자"로 자리매김되었다. 이는 팔레스타인의 대표자는 자신이어야 한다고 믿었던 
요르단의 후세인 왕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나면서 아랍진영과 이스라엘도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양측은 모두 끝없는 전쟁에 지쳐 있었다. 길고 긴 노력 끝에 최초의 
결실이 나타난 것이 1978년 9월 17일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다. 이집트는 이제 더 
이상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후원자가 아니었다. 시리아도, 요르단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적극적이 아니었다. 오직 새로운 피난처를 찾아 레바논에 정착한 PLO만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팔레스타인 난민촌이 존재하는 이상, 새로운 
전사들을 구하는 PLO의 노력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난민촌은 무궁무진한 
인적자원을 제공했다. 싸움은 이제 아라파트의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평화를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의 화해분위기 조성에 노력하지만, 
아라파트만은 협상에서 배제했다. 테러리스트와는 대화하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의 입장도 굳건했다. "아라파트 없는 
팔레스타인은 없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분쟁의 중심지는 레바논이 되었다. 요르단에서 쫓겨난 이래 
남부 요르단은 PLO의 중요 거점이었다. 약체인 레바논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PLO는 레바논의 가장 강력한 무장세력이었다.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터진 전쟁이 1982년의 레바논 전쟁이었다. 레바논 전쟁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에 큰 타격을 입혔다. 1982년 9월 16일 심야에 벌어진 기독교 
민병대(팔랑제)의 팔레스타인인 학살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처한 비극적 여건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남부 레바논에는 여전히 10,000명에 달하는 PLO 
행동대원들이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아라파트의 PLO 사령부는 튀니스로 
옮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전쟁이 이스라엘에 준 타격은 보다 심각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새로운 위기를 맞아야 했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아라파트의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1987년부터 시작된 
인티파다(Intifada)는 아라파트의 입지를 더욱 넓혀주었다. 

1988년부터 팔레스타인 자치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화가 
무르익는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랍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된 
테러조직 하마스(Hamas)의 테러가 본격화되었다. 이들의 테러에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에 반하는 팔레스타인인들도 그 대상이 되었다. 
가자지구에서는 역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조직된 지하드(Jihad,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가 이스라엘에 대한 무력행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1988년 4월 15일 평화중재에 나선 미국의 리차드 머피 
국무차관이 중동을 떠난 지 5주를 겨우 넘긴 시점에서, 이스라엘군이 튀니스를 
강타했다. 참모차장 에후드 바락(Ehud Barak)이 지휘한 이 작전으로 아라파트는 
오랜 동료이자 PLO군의 영도자였던 아부 지하드(Abu Jihad)를 잃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가 아부 지하드의 집 안마당까지 침입하여 그를 살해했던 것이다. (현재 
바락은 이스라엘 노동당수가 되어있고, 아부 지하드의 부인은 아라파트 자치정부의 
복지장관을 맡고 있다) 

1991년의 걸프전은 또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를 지원한 
아라파트는 재정적, 정치적으로 엄청난 어려움에 봉착했다.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사회주의국가의 몰락으로 지원세력을 찾기도 힘들어졌다. 내부적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던 이스라엘도 팔레스타인과의 대화를 원했다. 이스라엘도 아라파트를 
더 이상 기피할 수 없었다. 투사로서의 아라파트는 이제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새롭게 변신한다. 1992년 4월 7일 아라파트는 리비아사막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를 당하게 된다. 이때 그를 찾아낸 것은 미국의 인공위성이었다. 사막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아라파트는 더 이상 미국의 적이 아니었다. 10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러 찾아가서라도 제거해야 했던 대상이, 이제 
없어서는 안되는 대화의 상대방으로, 반드시 구조해야 할 귀중한 존재가 된 
것이다. 

길고 긴 평화회담(이 평화협상 과정은 뒤에 자세히 설명한다) 끝에 1994년 5월 4일 
아라파트와 라빈 이스라엘 총리 사이에 카이로 협정이 체결된다. 카이로 협정은 
아라파트를 수반으로 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구성을 내용으로 한 역사적인 
것이었다. 자치정부는 팔레스타인 자치지구 내에서 입법, 행정, 사법권한을 가질 
것이었다. 5월 13일 이스라엘군은 요르단강 서안의 여리고에서 철수했고, 5월 
17일에는 가자지구에서 철수했다. 가자지구와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역이 되었다. 

야세르 아라파트는 사실 과거가 아닌 현재의 사람이다. 그는 현재진행형의 역사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1999년에는 팔레스타인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해야 하지만, 
1996년 리쿠드 당의 베냐민 네탄야후 총리가 집권한 이후, 그 전망이 매우 
불투명해지고 있다. 평생동안 사선을 넘나든 아라파트가 이 위기를 어떻게 타개해 
갈지가 주목되는 시점이다. 

참고서적 

Andrew Gowers and Tony Walker, Behind the Myth, Yasser Arafat and the 
Palestinian Revolution, Olive Branch Press/NY, 1991 
Janet Wallach and John Wallach, Arafat, in the Eyes of the Beholder, A Lyle 
Syuart Book/NY,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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