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5일 목요일 오후 07시 55분 01초 제 목(Title): 김두식/반영 무장투쟁과 메나헴 베긴 반영 무장투쟁과 메나헴 베긴 ------------------------------------------------------------------------------- - 1977년의 총선과 정치적 격변 1977년의 이스라엘 총선은 정치적 격변을 가져왔다. 1948년 건국 이후 한 번도 정권을 내어준 적이 없는 노동당이 패배하고,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이 이끄는 리쿠드(Likud) 당이 집권한 것이다. 29년만의 정권교체였고, 노동당에게는 악몽과 같은 사건이었다. 중동평화를 기원하던 전세계도 베긴의 집권에 충격을 받았다. 그의 집권이 왜 그처럼 충격적이었는지는 앞으로 그의 인생을 살펴보면 명확해질 것이다. 베긴의 내각에는 예상외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은 외무장관으로 임명된 모세 다얀(Moshe Dayan) 장군이었다. 이스라엘의 상징적인 군사지도자 중의 한 명이었던 다얀의 리쿠드 내각 참여는 노동당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방장관으로 임명된 에제르 바이츠만(Ezer Weizman) 전 공군참모총장은 초대 대통령인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의 조카로서 다얀 장군의 동서이기도 했다.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된 다비드 레비(David Levy)는 모로코 출신 유태인들을 대표하는 건축가로서 요르단강 계곡의 정착민이었다. 부수상으로 임명된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은 전직 이스라엘 참모총장으로 마사다 요새를 발굴한 세계적인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농업장관에는 아리엘 샤론(Ariel Sharon) 장군이 임명되었다. 이스라엘 특수부대 창시자로서 늘 논란의 중심에 서있던 샤론 장군은 획기적인 농법을 주저 없이 시도하던 훌륭한 농부이기도 했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명성을 쌓은 개성 강한 인물들로 구성된 내각이었다. 아마도 이 내각을 구성한 인물들만큼 많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새로 구성된 내각이 아무리 개성 있는 인물들이라 해도, 이야깃거리 면에서 메나헴 베긴 수상 자신을 따라갈 사람은 없었다. 메나헴 베긴은 여러 가지 면에서 살아있는 신화였다. 나치 독일 치하 폴란드에서의 탈출, 소련강제수용소, 자유 폴란드군 일원으로서의 팔레스타인 입국, 극단적인 운동노선을 지향한 테러리스트 시절, 독립 이후의 야당지도자로서의 삶 등 파란만장한 여정은 바로 시오니스트 우파세력의 살아있는 역사이기도 했다. 베긴의 아버지 메나헴 베긴은 1913년 리투아니아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저명한 은행가인 도브 지브 베긴(Dov Zeev Begin)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도브의 시대는 시오니즘 운동이 불붙은 첫 세대였다. 보수적인 유태인들은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시오니즘 운동을 매우 위험하게 생각했다. 헛된 꿈으로 유럽에 있는 유태인 사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젊은 세대들은 시오니즘 운동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04년 현대 시오니즘 운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데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이 사망하자, 브레스트 리토프스키에 있는 유태인 회당(Synagogue)의 랍비는 회당의 문을 걸어 잠갔다. 헤르츨을 추모하는 일체의 행사를 금지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격분한 두 명의 청년이 회당 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추모행사를 주도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메나헴 베긴의 아버지 도브였다. 다른 한 청년의 이름은 샤이너만(Sheinerman)이었다. 샤이너만은 베긴 내각의 농업장관이 된 아리엘 샤론의 할아버지였다. 첫째 아들의 이름까지 데오도르 헤르츨을 따라 헤르츨(Herzl)이라고 지을 정도로 도브의 시오니즘을 향한 열정은 강했다. 제1차 세계대전시 도브는 러시아 치하의 브레스트 리토프스크에서 공공연히 독일군의 승리를 기대하는 발언을 한 덕에 러시아 당국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어 모스크바와 페테스부르크까지 끌려갔다 돌아온다(당시까지만 해도 시오니즘 운동 그룹에는 독일이 유태인 국가 건설에 도움을 주리라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남 앞에서 의견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의 성격 탓이었다. 이러한 아버지로부터 메나헴 베긴은 유월절을 비롯한 각종 유태 절기를 철저히 지키도록 교육받았다. 심지어 메나헴 베긴의 유년시절, 안식일에 라틴어 시험이 치러지게 되자 시험을 칠 수 없다고 선생님께 이야기했다가 친구들 모두에게 망신을 당한 경험이 있을 정도였다. 회중을 모아놓고 "우리 모두가 이스라엘 땅에서 살게 되는 그 날은 반드시 옵니다"라고 강하게 선포하던 아버지 도브 지브의 목소리는 메나헴 베긴의 평생을 지배했다. 야보틴스키 1926년 메나헴 베긴은 지브 야보틴스키(Zeev Jabotinsky)에 의해 조직된 베타르(Betar) 청년운동에 참여했다. 베타르는 노일 전쟁 당시 러시아 군의 장교로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뒤, 일단의 동료들을 이끌고 팔레스타인에 이주하여 유태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싸우다 아랍 강도의 총탄에 희생된 요셉 트럼펠더(Joseph Trumpeldor)의 정신을 계승한 조직이었다. 한 뼘의 개척촌 땅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그의 활동은 유태인 국가 건설 운동에 있어서 선구적인 것이었다. 베타르를 통해 맺어진 야보틴스키와의 인연은 베긴 평생의 정치적 노선을 결정지었다. 야보틴스키는 베긴의 스승이자 영웅이었고, 큰바위얼굴이었다. 대부분의 베긴 전기들은 최소한 한 장(Chapter) 이상을 야보틴스키에게 할애하고 있다. 야보틴스키 없는 베긴은 상상할 수가 없는 까닭이다. 야보틴스키가 이스라엘 초대수상인 벤-구리온과 다른 길을 걸었기에 베긴도 그랬고, 야보틴스키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강경투쟁론자이었기에 베긴도 그랬다. 야보틴스키는 1880년 러시아의 오데사(Odessa)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자유주의적인 러시아 교육을 아들에게 제공했는데, 이는 당시로서 매우 예외적인 일이었고, 보수적인 유태랍비들은 그의 아버지를 비난했다. 타고난 두뇌를 바탕으로 17세 되던 해 이탈리아에 유학한 야보틴스키는 그곳에서 시오니즘에 눈을 뜬 후, 오데사로 돌아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한편, 시오니스트 조직에서도 점차 두각 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모스크바 신문의 특파원으로 이집트지역에 파견된 야보틴스키는 오토만 터키제국의 몰락만이 유태 독립국가 건설의 길임을 깨닫는다. 이곳에서 그는, 터키군과 싸우고 있던 요셉 트럼펠더를 만나게 된다. 트럼펠더와 의기투합한 야보틴스키는 이집트에 있는 영국군 사령부에 찾아가 터키가 장악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으로 당장 진격할 것을 제안하지만 영국군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다만, 영국군은 팔레스타인 대신 갈릴폴리 전선에 유태인들이 참전해 줄 것을 요청하는데, 트럼펠더는 터키와 싸울 수만 있다면 어느 곳이든 상관없다며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야보틴스키는 이를 정중히 거절한다. 대신 야보틴스키는 영국으로 가 팔레스타인에서 싸울 유태인 독립부대 조직의 필요를 역설하고 그 결과로 1918년 9월 21에는 유태인으로만 조직된 38대대가 팔레스타인으로 향하게 된다. 중위로 영국군에 참여한 야보틴스키는 종전과 함께 예루살렘에 정착한다. 예루살렘에 정착한 후 야보틴스키가 한 일은 무기를 사모아 자신의 아파트에 숨긴 뒤 비밀리에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 4월 영국군의 방임아래 아랍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180여명의 유태인들이 살해당한 뒤, 영국군이 행한 수색에서 불법무기소지 혐의로 체포된 야보틴스키는 19년형을 언도받는다. 그의 감옥 생활은 길지 않았다. 3개월 후 팔레스타인 총독으로 부임한 허버트 사무엘 경(Sir Herbert Samuel)으로부터 사면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야보틴스키를 시오니즘 운동의 손꼽히는 지도자로 부상시킨다. 영국과의 외교적 노력을 통한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하임 바이츠만(훗날의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등의 주장에 반대하여 힘에 의한 즉각적인 유태인 국가 건설을 주장하는 야보틴스키가 1923년 조직한 것이 베타르 청년조직이었고, 이를 전 유럽으로 확대한 것이 1925년의 개혁주의자당(Revisionist Party)이었다. 하임 바이츠만, 다비드 벤-구리온 등 시오니즘 주류그룹과의 결별과 함께, 야보틴스키는 시오니즘 운동의 또다른 축을 형성하게 된다. 시오니즘 운동의 재야세력이라 할 수 있는 우파 야보틴스키 그룹의 전통을 이은 것이 메나헴 베긴에 의해 주도된 이르군(Irgun), 헤루트(Herut) 당, 리쿠드(Likud) 등의 조직이며, 벤-구리온에 의해 주도되는 좌파 시오니즘 운동 그룹의 맥을 이은 것이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등으로 대표되는 노동자당(Mapai, 훗날 벤-구리온에 의해 라피당으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합치면서 명칭이 노동당으로 바뀐다)이다. 1930년대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좌파 시오니즘 그룹의 세력이 우세했고,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에서는 야보틴스키의 우파 개혁주의 세력이 우세했다. 1931년 메나헴 베긴은 바르샤바 대학 법대로 진학하고, 베타르 내에서도 탁월한 조직능력을 인정받게 된다. 베긴이 바르샤바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33년, 노동자당을 대표한 벤-구리온이 폴란드를 방문하여 캠페인을 벌이는데, 이 때 그를 맞이한 것은 환영객이 아니라 토마토 세례였다. 이 사건은 벤-구리온이 평생동안 야보틴스키를 정치적 괴물로 묘사하게 되는 출발점이 된다. 특히 그해 6월 16일 텔 아비브에서 일어난 노동자당 지도자 하임 아르로소로프(Haim Arlosorov)의 암살사건에 야보틴스키 그룹이 연관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서, 야보틴스키의 세력은 급속히 약화되기 시작한다. 한때 야보틴스키의 정열적인 연설에 매료되었던 사람들도 대부분 등을 돌렸다. 결국 1934년 7월의 시오니스트 회의 대표자 선출 이후, 야보틴스키는 시오니스트 주류그룹에서 완전히 축출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야보틴스키를 단순한 극단론자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그는 나치당의 집권과 함께 전 유럽에 피바람이 불 것을 일찍이 예언했고, 동유럽 유태인들이 그 엄청난 피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빠른 시일 내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길뿐이라고 설득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고, 불행히도 그의 외침에 마지막까지 귀를 기울이지 않던 600만 명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폴란드의 여러 수용소에서 생명을 잃었다. 전쟁의 바람 1939년 4월 베긴은 베타르의 폴란드 지역 책임자로 임명되고, 다음 달에는 알리자 아놀드(Aliza Arnold)와 결혼한다. 당시 유럽에는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베긴은 폴란드에서 되도록 많은 유태인들을 구출하여 루마니아 국경을 거쳐 팔레스타인으로 밀입국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영국 당국이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금지시킨 조치로 인해, 그들 중 대부분은 강제 송환된다. 마침내 1939년 9월 1일 독일군이 폴란드로 침공한다. 독일군은 빠른 속도로 진격했고, 메나헴 베긴은 아내와 함께 피난을 떠난다. 어렵게 소련군이 점령하고 있는 빌나 지역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한 베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소련군에 의한 체포였다. 오랜 신문 끝에 그에게 적용된 혐의는 국가 위험분자라는 지극히 모호한 것이었다. 그 결과로 베긴은 8년간의 강제수용소 노동을 명령받는다. 졸지에 가족과 이별하여 코트라스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그에게 수용소 동료들은 "살아서 이곳을 나갈 생각을 하지 마라"고 충고한다. 매일 16시간의 강제노역에 종사해야했고, 밤이 없는 이른바 백야의 시베리아 땅은 시간조차 알 수 없게 했다. 2년 동안의 강제노역 후, "히틀러와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모든 폴란드 출신 죄수들을 방면한다"는 스탈린의 선언에 의해 강제노역에서 풀려난 그는 빈털터리로 시베리아를 횡단한 끝에 우즈벡의 작은 도시인 티자크에서 누나인 라헬과 감격적인 해후를 한다. 그곳에서 그는 폴란드에 남아있던 가족들의 비극적인 사망소식에 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 헤르츨이 모두 독일군의 진주 직후 총살당했다고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형은 나치 수용소에서 사망했고, 그의 아버지는 독일 게슈타포에게 고문당한 후 총살당했다고 전했다. 처가 쪽의 형편도 나을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이 그 러하듯이 누구도 그들의 정확한 최후를 알 수는 없었다. 소련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소련의 지원 하에 재편성된 자유 폴란드군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즉각 수용소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았다. 자유 폴란드군의 지휘관인 앤더스 장군 역시 소련군에 체포되어 강제노역을 경험한 사람이었고, 가급적 소련의 힘이 덜 미치는 곳에서 참전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가 택한 지역이 바로 요르단강에서부터 이란, 이라크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1942년 5월 메나헴 베긴은 자유폴란드 군의 일원으로 팔레스타인 땅을 밟았고, 앞서 팔레스타인에 도착해 있던 아내와 다시 만나게 된다. 팔레스타인 땅에 도착한 메나헴 베긴이 발견한 것은 베타르 조직의 붕괴였다. 동유럽에 기반을 둔 베타르는 이미 대부분의 조직원들이 나치강제수용소나 게토에서 학살당한 후였고, 조직의 창건자인 야보틴스키는 1940년 뉴욕에서 사망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베타르 구성원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단체 이르군(Irgun Zvai Leumi)이 영국세력의 완전한 축출과 유태인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지만, 벤-구리온이 주도하는 시오니즘 운동 주류세력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베긴은 곧 베타르 조직의 팔레스타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르군도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개혁주의자 모임의 지도자인 카한(Kahan)의 설득에 의해 자유 폴란드의 앤더스 장군도 베긴의 조기 전역에 동의했다. 마침내 1943년 12월 메나헴 베긴은 자유 폴란드군을 떠나 이르군의 책임자로 임명된다. 이르군 여기서 잠시 베긴이 장악한 이르군에 대해 설명한다. 사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태인 무장조직의 핵심은 하가나(Haganah)였다. 1920년 야보틴스키 주도의 무장조직으로 출발한 하가나는 히스타드루트나 유태 행정청을 비롯한 시오니스트 조직(그 상층부는 벤-구리온을 중심한 노동자당이 장악하고 있었다)의 통제하에 유태인들을 보호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1930년대로 들어와 시오니즘 운동 내부의 좌우 투쟁이 격화되면서 하가나 내부에서도 주도권을 다투는 투쟁이 벌어지게 되고, 야보틴스키 계열의 지도자들은 결국 하가나를 떠나 독립된 두 개의 조직을 결성한다. 그것이 바로 이르군(Irgun Zvai Leumi, 국가 군사기구라는 뜻)과 레히(Lehi, Lohamei Herut Yisrael, 이스라엘 자유의 투사라는 뜻)이다. 벤 아나트(Ben Anat)라는 암호명으로 불려지던 히브리대 학생 다비드 라지엘(David Raziel)이 조직한 것이 이르군이었고, 야이르(Yair)라는 암호명으로 불려지던 또다른 히브리대 학생 아브라함 슈테른(Avraham Stern)이 조직한 것이 레히였는데, 후자 쪽이 보다 극단적인 투쟁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레히가 보통 슈테른 갱(Stern Gang)이라고 불리는 이유도 그 지도자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슈테른이 조직한 갱단이라는 뜻으로 영국군은 레히를 늘 그렇게 불렀고, 그에 따라 아직도 레히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우선 나치독일을 무찔러야 한다는 목표 아래 영국군과 연합한 이르군 지도자 라지엘은 1941년 영국군 사령부의 협조요청에 의해 첩보부대를 조직하여 이라크로 침투하던 중 독일군의 폭격에 의해 사망한다. 이르군과는 달리 영국과의 협력을 거부한 채 직접적인 투쟁과 테러를 멈추지 않던 레히조직은 유태인들 내부에서조차 완전히 외면당하게 되고, 지도자 슈테른은 1942년 영국군과 경찰에 의해 추적을 받던 중 총격을 받아 사망한다. 바르샤바시절부터의 베긴의 친구였던 샤이브(Yisrael Sheib)와 나탄 프리드만-옐린(Nathan Friedman-Yellin, 훗날의 나탄 옐린-모르)은 베긴보다 먼저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이미 레히에 가담한 상태였는데, 이들은 베긴을 레히로 끌어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베긴은 베타르 조직과 등을 돌릴 수가 없었고, 결국 베타르와 보다 밀접한 관련을 지닌 이르군을 선택하게 된다(독립 이후 레히의 조직원 중 상당수는 베긴이 이끄는 우파정당 헤루트에 참여한다). 무장봉기의 시작 베긴이 이르군을 지도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직을 재편하는 일이었다. 영국군과 연합하면서 이르군 지도자 중의 상당수는 영국군에 노출되었다. 나치독일의 멸망이 시간문제라고 생각한 베긴은 전쟁이 끝난 후 영국과 다시 벌여야 할 투쟁을 계획하기 시작했고, 지도부를 물갈이한다. 활동영역도 공격팀과 홍보팀, 모병팀으로 분화했다. 1944년 2월 1일. 마침내 베긴은 영국을 향한 전면전을 선언한다. 모든 히브리인들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총궐기할 것과 외국 통치자들에 대해 불복종할 것을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처음에는 영국 당국 뿐 아니라 유태인 사회와 하가나도 그의 선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2월 12일, 베긴의 선언은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예루살렘과 텔 아비브, 하이파에 위치한 영국 이민국 사무소가 동시에 폭파된 것이다. 이 폭탄테러사건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영국 이민국 사무소는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입국을 제한하고 불법이민자를 색출하는 곳으로 모든 유태인들의 분노의 표적이었다. 이러한 이민국 사무소의 폭파는 불법이민 유태인 관련 기록을 모두 없애버리는 효과도 있었다. 영국 당국은 베긴의 선언이 말장난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베긴을 붙잡기 위한 총체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다. 베긴의 투쟁이 테러를 서슴지 않는 것이기는 했어도 그의 전술은 레히의 친구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레히를 이끌고 있는 그의 친구 프리드만-엘린의 투쟁방법은 단순했다. 레히 조직원들은 언제나 무기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기회가 주어지면 주저없이 영국군이나 영국경찰을 살해했다. 그러나, 베긴은 신중했다. 비무장의 유태인이 아랍인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베긴의 이르군 조직은 신중하게 보복전략과 목표를 설정했다. 그는 늘 공격에 따른 정치적 효과를 고려했고, 최소한의 타격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고자 했다. 무기는 작전이 있을 경우에만 휴대가 허용되었다. 이르군과 레히는 사안에 따라 협조하고,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지만,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 쉽게 통합을 이룰 수는 없었다. 1944년 3월 23일. 텔 아비브와 하이파와 예루살렘에 위치한 영국군 정보부(CID) 지부가 폭파되었다. 폭파직전에 전화를 통해 잠시 후 건물이 폭파될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졌으나, 이 사건으로 두 명의 이르군 요원과 여섯 명의 영국군이 사망했다. 영국군은 발칵 뒤집어졌다. 다른 곳도 아니라 가장 철통같은 경비를 자랑하는 영국군 정보부 건물이 동시에 세 곳이나 폭파당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메나헴 베긴의 머리에는 15,000달러의 현상금이 붙었다. 몇 번이나 체포당할 위기가 있었지만, 그는 붙잡히지 않았다. 랍비로 변장하고 회당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아버지로부터 교육받은 정통 유태식 생활방식이 그의 도피생활에 도움이 되었던 셈이다. 벤-구리온과의 대립 베긴이 각종 테러들을 지도하고 있는 다른 한편에서는 이스라엘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이 진행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노동자당이 중심이 된 주류 시오니스트 그룹은 영국군과 연대하여 히틀러와 싸우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실로 1944년 9월에는 마침내 영국군내에 유태인 여단이 창설되기에 이른다. 이 부대는 이스라엘군의 모체가 될 것이었으며, 노동자당의 벤-구리온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종전과 함께 외교적 노력으로도 충분히 독립을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 판에 이르군과 레히의 게릴라식 투쟁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젊은이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이갈 알론(Yigal Allon)과 이츠하크 사데(Yitzhak Sadeh) 등에 의해 훈련받는 팔마하(하가나 내의 실질적인 공격부대) 병사들 가운데는 "이르군과 레히는 이미 투쟁을 시작했는데, 우리는 영국군 밑에서 훈련만 받고 있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젊은이들이 생기고 있었고, 일부는 하가나를 이탈하여 이르군이나 레히에 합류했다. 팔레스타인의 유태 지도부는 이르군과 레히의 활동을 더 이상 방임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44년 11월 20일 벤-구리온은 "유태인들은 모든 수단을 다해 테러리스트들을 거부해야 하며 그들을 영국의 손에 넘겨버려야 한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스라엘 사회 전체의 통일성을 해치고 지도부에 대적하는 한 마리 미꾸라지 베긴은 제거되어야 했다. 하가나는 이르군과 레히 멤버들을 추적하여 그들의 위치를 영국군 정보부에 알려주기 시작했다. 1945년 2월 27일에는 이르군의 정보장교인 엘리 타빈 박사가 하가나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키부츠에 감금된 채 고문과 살해위협에 시달리다 9월에 가서야 풀려나는 일까지 있었다. 이른바 "계절 작전(Operation Season)"이라 불린 하가나의 이르군 사냥기간(1944년 11월-1945년 11월) 동안 20명의 이르군 요원이 감옥에 갔고, 91명이 하가나의 심문을 받고 풀려났으며 700여명의 명단이 영국군측에 넘겨졌다. 1945년 5월에는 영국군의 기름 파이프라인을 폭파하려던 4명의 이르군 남녀가 하가나에 체포되어 영국군의 손에 넘겨졌고 이들은 아프리카에 위치한 수용소로 유배되었다. 계절 작전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모두 다른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하가나와 팔마하의 지도부를 형성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이 사건을 그저 "비극적인 일이었다"고만 간단히 언급한다. 아리엘 샤론의 경우 계절작전이 한참 진행될 당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소년에 불과했다. 피끓는 소년은 이스라엘 건국을 위해 뭔가를 해보기 원했고, 당장 팔마하에 지원하고자 했다. 그의 아버지는 소년과 의견이 달랐지만, 심하게 반대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리엘 샤론과 함께 오렌지 농장에서 일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샤론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아릭(Arik, 샤론의 애칭이다), 네가 네 삶에 대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든지 나는 괜찮다. 그러나, 꼭 한가지만 내게 약속해 다오. 절대로, 유태인을 비유태인들의 손에 넘겨주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다오." 두 사람 사이에 계절작전이나, 팔마하나, 메나헴 베긴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지만, 그로서 충분했다. 다른 모샤브 사람들처럼 노동자당에 속해 있기는 했어도, 아버지는 베긴의 무장운동에 대해 동정적이었고, 유태인사회의 분열에 대해 참지 못할 고통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아릭은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들였고, 팔마하에 참여했다. 계절작전이 유태인 사회 내부를 얼마나 분열시키고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일화이다. 계절 작전이 계속됨에 따라 이르군의 젊은 요원들도 하가나에 대한 전면전에 나서야 한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베긴은 이 모든 것을 그냥 감수하고 보복하지 말 것을 명령했다. 지금은 이르군을 적대시하고 있지만, 하가나도 곧 영국 제국주의의 실체를 파악할 것이고, 반영 투쟁전선에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내전은 모두를 공멸케 하리라는 확신도 있었다. 하가나의 조치에 대한 베긴의 대응은 1945년 2월 "너 미친 카인아"로 시작되는 비난 성명문을 발표한 것이 전부였다. 이 비난 성명은 형제를 팔아먹는 하가나의 배신행위를 규탄한 것이었다. 하가나와의 연합 베긴의 이러한 판단은 곧 현실로 나타난다. 종전 직후 치러진 영국 총선에서 위스턴 처칠의 보수당이 패배하고 노동당이 집권하는 이변이 일어나면서 발포어 선언의 이행이 불투명해졌고, 하가나의 지도부도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45년 11월 13일 모세 스네(Moshe Sneh)와 이스라엘 갈릴리(Yisrael Galili)를 비롯한 하가나 지도부는 이르군 및 레히와 접촉을 시도한다. 당시 레히는 프리드만-옐린, 이츠하크 샤미르(Yitzhak Shamir, 훗날의 이스라엘 수상) 등에 의해 지도되고 있었다. "계절 작전"의 앙금에도 불구하고, 베긴과 프리드만-옐린은 두 말 없이 하가나의 깃발 아래 뭉칠 것에 동의한다. 이 날은 베긴의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이스라엘 다수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외로운 폭력투쟁을 계속하고 있던 지하조직 지도자 베긴이 처음으로 대중의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다만, 베긴은 "벤-구리온이 반영투쟁에서 언제 발을 빼려할지 보장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르군의 해체는 거부한 채, 이르군 작전에 대한 통제권만을 하가나에 넘겨준다. 하가나와의 연합작전은 쉽지 않았다. 작전에 임함에 있어 하가나 지도부가 이르군을 배제하는 일이 잦아졌다. 예를 들어 영국군 무기고를 습격하는 작전에서는 특별한 설명없이 이르군을 제외했다. 하가나는 이르군의 손에 다량의 무기가 넘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이르군의 작전은 계속되어 영국군의 공항을 습격하여 24대의 비행기를 파괴하고 철도와 다리를 폭파하는 등, 하가나와의 협조하에 이르군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작전수행중 1946년 1월 이르군의 행동대장인 에이탄 리브니(Eitan Livni)가 영국군에 체포되자, 이르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군 사병 6명을 납치한다. 리브니를 사형에 처할 경우 이르군 역시 영국군 인질들을 처형할 것이었다. 베긴은 자신의 동료들을 가족이라고 불렀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자신의 형제인 이르군 대원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요원칙으로 삼았다. 이미 나치에게 자신의 진짜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베긴이었다. 더 이상의 포기는 있을 수 없었다. 1946년 6월 30일 금요일에는 민간부문과 군사부문을 불문하고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영국의 체포령이 내려졌다(이른바 "검은 금요일"사건). 하루 사이에 2,700명의 유태인들이 체포되었고, 갈릴리와 스네를 비롯한 하가나 지도자들도 지하로 잠적해야 했다. 늘 지하에서 생활하던 베긴에게 이 조치는 새로울 것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영국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베긴은 영국군 인질들을 계속 억류했고, 마침내 7월 3일 영국은 베긴이 영국군 인질들을 석방할 경우 베긴의 동료들을 처형하지 않을 것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베긴의 승리였다. (폭파된 킹 다비드 호텔, 1946년) 킹 다비드 호텔 폭파 이 시점에 베긴이 주목한 것이 예루살렘의 킹 다비드 호텔이었다. 킹 다비드 호텔은 영국군의 사령부가 위치한 곳이었고, 모든 정보가 모여져 있는 영국군의 두뇌와도 같았다. 베긴은 하가나에 킹 다비드 호텔의 폭파를 요청했고, 며칠 후 하가나의 승인이 떨어졌다. 아랍인들로 변장한 이르군 요원들이 폭탄이 설치된 우유 캔을 킹 다비드 호텔로 반입한 후, 폭발 30분 전에 경고전화를 걸기로 했다. 작전은 1946년 7월 19일에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막판에 하가나 쪽에서 제동이 걸렸다. 두 번이나 작전의 연기를 요청한 것이다. 처음에는 폭파후의 검문검색에 대비하여 하가나의 무기를 예루살렘 밖으로 반출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고, 나중에는 벤-구리온이 영국과의 비협조 정책을 선언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요청에 응한 베긴도 두 번째 요청에는 응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연기는 작전을 불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마침내 7월 22일, 베긴은 텔 아비브의 안전가옥에 숨어 작전성공 소식을 기다렸다. 그가 기다린 뉴스는 영국군이 폭탄설치 소식을 듣고 킹 다비드 호텔의 모든 군인과 민간인을 대피시켰고, 그 이후 폭탄이 터져 킹 다비드 호텔이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식은 이와 달랐다. 킹 다비드 호텔에서 폭탄이 터져 28명의 영국인, 두 명의 미국인, 한 명의 러시아인, 한 명의 그리스인, 42명의 아랍인, 17명의 유태인 등 총 92명이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잠시 후 행동대장인 아미카이 파글린(Amichai Paglin)이 복귀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는 베긴의 질문에 파글린은 "모든 작전은 예정대로 수행되었고, 폭파 전에 사전경고가 주어졌다"고 보고했다. 예상을 뒤집은 것은 영국군측의 반응이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영국군은 호텔 내의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베긴은 즉각 "오늘 오후 12시 5분. 이르군은 영국 정부의 심장부이며 점령군의 심장부인 킹 다비드 호텔을 공격했다....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한 비극의 책임은 전적으로 영국에 있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영국군의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었고, 배신자의 밀고로 이르군의 모든 거점이 목표가 되었다. 사태가 확대되자 하가나 측도 발을 빼려고 했다. 호텔이 완전히 빈 상태에서 폭탄을 터뜨리기로 한 약속을 이르군이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만약 작전이 성공했다면 함께 성공의 열매를 누렸을 하가나였다. 그러나, 하가나는 즉각 반이르군 선전활동을 시작했다. 모든 책임은 이르군에게 돌려졌다. 전세계적으로 반유태주의 감정에 불이 붙었다. 베긴의 안전도 위험해졌다. 영국군이 더 이상 랍비로 위장한 베긴의 모습에 속아줄지도 의심스러웠다. 텔아비브에는 탱크가 진주했고, 통금이 실시되었다. 영국군 정보부는 이르군 뿐 아니라 하가나를 포함한 모든 유태 운동단체 구성원의 체포를 시작했다. 베긴이 숨어있는 집에도 수색이 실시되었고, 랍비 사소버(Sassover. 은신 중인 베긴의 가짜 이름)의 아내와 아이들도 영국군에 불려갔다. 남편의 행방을 묻는 영국군의 심문에 베긴의 아내 알리자는 "남편은 이미 예루살렘에 갔다"고 대답하여 위기를 모면한다. 영국군은 아직도 사소버와 베긴이 동일인물인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알리자가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시도 때도 없이 영국군 병사들이 방문을 두드리면서 "물 한 잔만 달라"고 요구했다. 화장실 천장에 숨어있는 베긴은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틀 후 영국군이 철수했다. 그동안 물 한 방울, 빵 한 조각 먹지 못하며 극심한 더위에 시달려야 했던 베긴은 거의 탈진상태였다. 천장에서 내려온 베긴에게 어린 아들이 "아빠는 그동안 어디 있었어요?"라고 물었다. 베긴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대답했다. "응. 예루살렘에 잠시 가 있었지." 영국군이 철수한 후, 조직원들에 대한 점검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이르군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레히의 지도자인 프리드만-옐린이 붙잡혀 갔으나, 영국군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덕분에 곧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유일한 피해는 역시 레히 지도자인 이츠하크 샤미르의 체포였다. 그는 영국군 정보부에 붙잡혀 있는 상태였다. 도브 그루너와 이르군의 투사들 이런 와중에도 이르군의 활동은 계속된다. 1947년 5월 16일. 이르군 대원 도브 그루너(Dov Gruner)에 대한 사형이 집행된다. 다른 세 명의 동료와 함께였다. 그는 1년 전인 1946년 4월 23일 영국군 경찰서를 공격하던 중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2차 대전중 무려 5년 동안이나 영국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두 차례의 부상을 입은 바 있는 도브 그루너는 체포된 후 영국군에 의한 재판 자체를 거부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가 옥중에서 메나헴 베긴에게 보낸 편지는 이스라엘 역사의 한 장을 장식했다. "물론 저도 살고 싶습니다.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죽음을 앞두고 유감스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제가 저의 임무를 충분히 다하지 못했다는 것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나라에 남을 수도 있었고 미국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그의 가족들은 미국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유태인과 시오니스트인 저에게 어떤 만족도 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저는 정치적 방법을 거부하지 않되 우리 땅의 단 한 뼘도 포기하지 않는 이르군의 길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우리들의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 나라는 우리들의 피에 의해서만 세워질 수 있습니다. 저는 지금 그들이 저를 죽이기 꼭 48시간 전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맹세컨대 만약 저에게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어떤 다른 가능성도 고려함이 없이 지금 제가 택한 것과 동일한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당신의 신실한 병사 도브." 영국군에 의해 이루어진 처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이미 1938년 폴란드 출신의 베타르 조직원이었던 쉬로모 벤-요세프(Shlomo Ben-Yosef)가 유태인 택시기사 살인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아랍인들이 탑승한 버스를 공격하던 중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당시 벤-요세프가 처형을 앞두고 자신을 위로하는 동료들에게 남긴 말은 "나를 위로하려고 하지 말게. 내게는 위로가 필요없네. 나는 내가 팔레스타인에서 사형장으로 향하는 첫 유태인이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네"라는 것이었다. 1944년에는 영국 총독 모인 경(Lord Moyne)을 암살한 레히 조직원들에 대한 처형이 이루어졌다. 모인 경은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대한 강력한 반대자였다. 그는 나치의 마수 아래 놓인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 100만 명에 대한 구출탄원을 받고, "내가 그 100만 명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이를 일축한 사람이었다. 모인 경의 암살은 유럽에서 죽어가고 있는 유태인들을 방치하는 연합군에 대한 주의 환기였다. 도브 그루너가 사형선고를 받으면서부터 이르군도 무제한 투쟁에 돌입한다. 폭파작전 수행에 있어서 사전경고가 없어졌고, 영국군은 마구잡이로 납치되었다. 이르군 조직원이 체포되어 채찍질을 당하면, 이르군은 즉각 영국군 장교들을 납치하여 동일한 방법으로 채찍질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이 예외없이 적용되었다. 1947년 5월에는 도브 그루너를 비롯한 많은 죄수들이 거쳐간 에이커 요새 감옥에 대한 이르군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120명의 유태인 투사들이 감옥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했으나 15명의 이르군 대원이 사망했고 15명이 붙잡혔다. 7월 29일에는 15명의 체포자 중 세 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세 명 중의 한 명이었던 야코브 바이스(Yaacov Weiss)는 나치 강제수용소의 생존자였다. 세 명의 처형이 시행된 후 1시간이 채 흐르기 전에 이르군은 인질로 잡고 있던 두 명의 영국군 하사관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 사건이 엘리 비젤의 작품 "새벽"의 모티브가 되었음은 이미 이야기했다. 1947년 메나헴 베긴은 랍비 이스라엘 사소버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이름을 쾨니히쇼퍼 박사로 바꾼다. 당시 영국군이 메나헴 베긴에 대해 가진 정보는 텔 아비브의 아파트에 살고 있으며 턱수염을 기르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에 따라 텔 아비브에 살고 있는 턱수염을 기른 남자들이 모두 범죄용의자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턱수염을 기른 랍비로서의 생활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자녀들은 쑥쑥 자라나고 있었고, 도대체 아버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궁금해했다. 어느날 베긴은 아이들이 영국군과 싸우는 놀이를 하는 걸 보면서 깜짝 놀라게 된다. 놀이 중에 그의 아들 베니(현재 이스라엘 국회의원)는 이르군이 아닌 하가나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의 아들조차도 그의 동조자는 아니었다. 독립전쟁의 시작 1947년 3월에는 예루살렘의 영국군 장교클럽이 폭파되어 17명의 영국군 장교가 살해되었고, 이르군의 테러활동은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테러에 따른 희생이 점차 커짐에 따라 영국 내에서도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을 용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압제를 하려면 제대로 압제를 하든지, 아니면 차라리 팔레스타인을 유태인들에게 넘겨주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1947년 여름부터는 유엔이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나섰다. 1947년 11월 29일 유엔총회가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하면서, 이 결정에 반대하는 아랍인들의 테러가 시작된다. 아랍인들의 테러개시와 함께 한동안 잠잠하던 이르군의 테러활동도 재개된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이르군의 적은 더 이상 영국군이 아니었다. 영국군이 빠른 시일 안에 팔레스타인에 서 철수하리라는 것이 확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르군의 주된 테러대상은 이제 아랍인들이었다. 1948년 4월 9일 이르군과 레히의 연합부대는 예루살렘 서쪽의 디르 야신(Dir Yassin)이라는 아랍인 마을을 공략한다. 격렬히 저항하는 아랍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이르군은 자신들의 전통적인 폭탄테러 수법을 사용한다. 한 집 두 집 폭탄을 던져 폭파해 나가는 것이었다. 열 한 번째 집이 폭파된 후 마침내 디르 야신의 아랍인들은 항복한다. 이미 열한 채의 집이 부서져 나가는 동안 무수히 많은 노약자들과 어린이(약 254명)들이 사망한 후였다. 이 사건으로 베긴은 다시 한 번 비난의 표적이 된다. 인질로 잡은 영국군 하사관들을 처형한 사건과 함께 디르 야신 사건은 베긴의 평생을 쫓아다니는 악재가 된다. 아랍과 이스라 엘 사이의 정당성 문제가 논의될 때마다 디르 야신 사건은 아랍쪽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유력한 논거가 되었다. 베긴이 수상이 된 이후 서방 기자들로부터 가장 많은 질문을 받은 것도 이 두 가지 사건에 대한 것이었다. 디르 야신 사건이 발생하고 4일 후, 예루살렘에서는 77명의 의사와 환자가 탄 버스가 아랍인들에 의해 공격받아 모두 사망한다. 아랍과 이스라엘 사이의 적대감은 날로 상승기류를 타게 된다. 마침내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스라엘 독립국가의 건국을 선포한다. 이 날은 또한 주변 아랍국들이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한 날이기도 하다. 같은 날 텔 아비브 로젠바움 거리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늘 인사하고 지내던 이웃의 쾨니히쇼퍼 박사가 다름아닌 메나헴 베긴이라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고 깜짝 놀라게 된다. 그 날짜로 문패도 "쾨니히쇼퍼"에서 "알리자와 메나헴 베긴"으로 바뀌게 된다. 다음날, 베긴의 오랜 적수였던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에서 완전 철수했고, 동시에 주변 아랍국의 정규군들이 신생독립국 이스라엘을 향해 물밀 듯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르군은 이미 독립된 조직으로 하가나에 참여하여 전선에 투입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르군의 첫 번째 임무는 텔아비브 북쪽의 야파(Jaffa)를 공략하는 것이었고, 작전은 성공리에 마무리된다. 5월 17일 베긴은 지하조직활동과 이스라엘 건국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시간이었다고 밝힌다. 그러나, 이 날은 그의 또다른 고난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정부에 그를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이스라엘 초대총리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에 정부의 문호를 개방했지만, 오직 메나헴 베긴과 그의 이르군 조직만은 배격했다. 그만큼 두 사람 사이의 골이 깊었던 것이다. 알타레나 호 사건 1948년 봄 이르군은 한 척의 배를 구입하여 "알타레나(Altalena)"라 명명한다. 알타레나는 야보틴스키의 필명이었다. 이 배에는 프랑스에서 지원받은 약 500만불 분량의 프랑스제 무기가 실려있었다. 이스라엘에는 무기가 필요했고, 이스라엘의 유능한 외교관들은 무기구입을 위해 세계각국으로 보내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1948년 6월 11일 이르군의 지휘관 엘리아후 란킨(Eliahu Lankin)은 약 5,000정의 소총, 300만발의 총알,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화기와 함께 약 865명의 베타르 조직원을 알타레나호에 싣고 팔레스타인으로 향한다. 베타르 조직원들은 이스라엘을 방어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자원한 유태인들이었다. 당시 메나헴 베긴은 벤-구리온으로부터 이르군을 해체하고 그 구성원들은 개인자격으로 이스라엘군에 참여할 것을 요구받고 이를 승낙한 상태였다. 다만 예루살렘의 이르군 병력만이 아직 독립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6월 15일 알타레나 호를 맞이하는 베긴의 입장은 미묘했다. 그의 이르군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으나, 새로 도착한 자원들과 무기는 이르군을 위한 것이었다. 베긴은 즉각 이스라엘군 지도부에 이 배의 존재를 알렸다. 이 배에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엄청난 양의 무기가 실려있으며 많은 자원병력도 승선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통보했다. 무기 중 20퍼센트는 예루살렘의 이르군이 보유했으면 한다는 희망도 피력했다. 승선해 있는 베타르 조직원들을 베긴이 먼저 만나보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군 지도부는 그의 요청이 합리적인 것이라 생각했지만, 벤-구리온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벤-구리온은 군내에 베긴의 사병세력이 생기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이르군 대원들이 알타레나호에서 무기를 내리려고 시도했다. 이스라엘군은 이에 대해 "알타레나호는 즉각 이스라엘군의 지시에 따라야 하며, 이를 거부할 경우 발생하는 모든 사고에 대한 책임은 이르군이 져야 할 것"이라는 경고를 발했다. 베긴은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벤-구리온은 이 문제에 관해 어떤 타협도 있을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해안에는 내전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이츠하크 사데 장군은 최정예 부대 지휘관인 모세 다얀에게 즉각 해안으로 진군할 것을 명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베긴은 이스라엘군이 동족에게 총부리를 돌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6월 21일 이스라엘군은 알타레나호를 향한 사격을 시작했고, 벤-구리온은 이르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싸움은 곧 이르군측의 패배로 끝났다. 이 배에 올라있던 베긴은 끝까지 하선을 거부하고 배와 운명을 같이 할 것을 고집했지만, 그의 부하들에 의해 억지로 해안으로 옮겨졌다. 이 사건으로 14명의 이르군 대원이 사망했고, 배는 무기와 함께 불태워졌다. 이르군은 무장해제되었고, 베긴은 무너졌다. 얼마후 이르군에 의해 운영되는 라디오방송을 통해 베긴은 벤-구리온을 맹비난했지만, 그의 이러한 노력은 반대파로부터 히스테리칼한 선동가라는 평판을 얻게되는데 기여했을 뿐이었다. 알타레나호에서 내린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이와 같은 충돌에도 불구하고, 곧 이스라엘군에 입대하여 전쟁터에 투입되었다. 알타레나호 사건에 대한 진상은 아직까지도 명확하지 않다. 노동당 쪽에서 주장하는 내용과 헤루트 당이 주장하는 내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군측의 지휘라인에 섰던 사람들, 즉 이츠하크 사데, 이가엘 야딘, 모세 다얀, 이갈 알론, 이츠하크 라빈 등은 이 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키거나 모든 책임을 벤-구리온에게 돌렸다. 당시 이 사건을 심층적으로 취재한 기자가 엘리 비젤이었는데, 그는 이 기사의 출판허가를 받기 위해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으로 이르군이 완전해체되었다는 것이다. 베긴은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했다. 정치가로서의 베긴 1948년 8월. 베긴은 예루살렘의 시온광장에서 열린 대중집회에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에는 베긴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꽉 채워졌다. 대부분은 베긴의 지지자가 아니라, 그저 오랜 기간 지하운동 지도자였던 사람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이 자리에서 베긴은 이르군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반드시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연설을 들었지만, 여전히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벤-구리온의 힘은 너무나 강했고, 벤-구리온도, 베긴도 서로를 지독히 싫어했다. 누군가 "왜 그렇게 벤-구리온을 싫어하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베긴은 "한 마디로 그가 나쁜 놈이기 때문(He is simply a bad man)"이라고 답변했을 정도였다. 벤-구리온이 1948년부터 196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수상을 역임하는 동안 베긴이 조직한 헤루트(Herut, "자유"라는 뜻. 1948년 베긴이 창당한 이후 이스라엘 우파 세력의 기둥이 되었다) 당은 늘 소수파에 불과했다. 헤루트 당은 대이스라엘주의를 지향했다. 요르단 강 서안과 골란 고원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옛 영토는 모두 수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벤-구리온의 집권 노동당이 추진하는 독일과의 협상에도 반대했다. 1957년 시나이 전쟁을 통해 얻어진 땅을 벤-구리온이 이집트에 돌려주자 베긴은 최후심판의 그 날까지 벤-구리온에게 반대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한다. 이러니 국제사회에서 베긴은 늘 극단적인 강경론자로 비춰질 수밖에 없었다. 1965년 베긴은 자유당(Liberal Party, 뜻은 같지만 베긴의 헤루트와는 다른 당)과 연합하여 가할(Gahal, 헤루트-자유당 연합)을 결성하고 26석의 의석을 쟁취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1967년 5월 마침내 베긴에게도 기회가 왔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시나이반도에 군사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긴장의 끈이 조금만 더 당겨진다면 그것은 곧 전쟁을 의미했다. 이스라엘의 국민여론은 거국내각의 구성을 촉구했다. 노동자당의 에쉬콜(Levi Eshcol) 수상은 베긴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베긴은 에쉬콜을 좋아했다. 벤-구리온과는 달리 에쉬콜에게는 편견이 없었다. 야보틴스키의 시신을 이스라엘로 옮기자는 헤루트 당의 오랜 숙원을 풀어준 것도 에쉬콜이었다. 고민 끝에 베긴은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한다. 베긴에게 주어진 최초의 정부직이었다. 라피 당(Rafi, 벤-구리온이 노동자당에 탈당하면서 조직한 정당) 출신인 모세 다얀과 시몬 페레스도 각각 국방 장관과 차관으로 입각했다. 6월 5일 이스라엘군은 이집트를 비롯한 이웃 아랍국들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한다. 다음날 새벽에는 이미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나 있었다. 이스라엘의 완승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6일 전쟁이었다. 전쟁이 끝난 6월 10일에 이스라엘은 요르단으로부터 요르단 강 서안과 동예루살렘을, 이집트로부터 가자와 시나이를, 시리아로부터 골란고원을 빼앗은 상태였다. 베긴의 오랜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6일 전쟁 이후에도 에쉬콜은 베긴의 역량을 인정하고 그를 대등한 파트너로 대우한다. 1969년 에쉬콜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새 수상 골다 메이어(Golda Meir)는 무려 6개의 각료자리를 제의하며 베긴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때 베긴에게 동참하여 헤루트 몫의 교통장관 자리를 차지한 것이 당시 참모차장이자 전직 공군사령관인 에제르 바이츠만(Ezer Weizman)이었다. 내각 내에서 베긴은 논쟁을 즐기는 편이었고 노동당 출신 각료들과 늘 입장을 달리했지만 골다 메이어 수상을 존경했다. 이스라엘 독립운동시부터 늘 서로를 경원시해 왔고, 알타레나호 사건 이후에는 원수나 마찬가지였던 노동당과 헤루트 당의 오랜 동거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러나, 이런 동거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1970년 수에즈 운하에서의 정전을 종용하는 미국의 요구를 이스라엘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베긴은 노동당 내각(1968년 노동자당은 라피당과 재결합하여 노동당이 되었다)과 1,000일간의 동거를 정리하고 야당생활로 돌아간다. 베긴의 내각생활이 1,000일만에 끝났다고는 해도, 이 경험은 그에게 소중한 것이었다. 그는 더 이상 극단적인 소수파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의 이상에 현실이 가미되어졌다. 이스라엘 국민들도 그를 더 이상 위험한 강경론자만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1973년에는 아리엘 샤론(이미 언급한 것처럼 그의 할아버지와 베긴의 아버지는 오랜 친구사이였다)을 영입하여 새로운 연합세력을 결성하는데 이것이 바로 리쿠드(Likud)였다. 같은 해 12월 31일 치러진 총선에서 리쿠드 당은 무려 39석을 확보하는 대약진을 하게 되고, 베긴은 총리직이 자신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음을 최초로 자각하게 된다. 1977년 이츠하크 라빈 총리가 외환관련 비리 혐의로 실각하면서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와 총선에서 격돌한 베긴은 총 43석을 얻어 33석의 노동당을 물리친다. 그리고 마침내 잘만 샤자르(Zalman Shazar) 대통령으로부터 내각 구성을 지시받는다. 총리취임과 중동평화의 길 그의 총리취임이 왜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는지는 그의 인생여정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설명되었으리라 본다. 그러나, 세계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총리취임 이후 베긴의 행보였다. 그의 당선이 중동 평화에 크나큰 걸림돌이 되리라는 예상을 뒤엎고 그는 전임자들을 계승하여 중동평화협상에 나선다. 이 때의 파트너가 이집트의 사다트와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었다. 1977년 11월 19일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탑승한 이집트 공군 1호기가 텔 아비브 공항에 착륙했다. 그를 맞이한 것은 사다트의 오랜 적수들인 메나헴 베긴, 골다 메이어, 이츠하크 라빈 등의 이스라엘 전 현직 총리들과 모세 다얀, 이가엘 야딘, 시몬 페레스 등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이었다.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베긴이 이집트를 방문했고, 마침내 1978년 9월 17일 역사적인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된다. 같은 해 12월 28일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비준하기 위한 이스라엘 의회가 열렸을 때 야당석에 앉아있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아랍 여러나라들과의 평화를 모색해 온 노동당 지도자들이었고, 노동당의 오랜 노력을 마무리한 사람은 총리인 메나헴 베긴이었다. 실제로 캠프 데이비드 협정의 비준시에 야당인 노동당 다수는 베긴을 지지했고, 여당인 리쿠드의 이갈 알론(Yigal Allon), 모세 아렌스(Moshe Arens) 등의 지도자들은 반대표를 던지거나 기권했다. 사실 시나이를 포기하고 평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은 베긴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강경하게 점령지역의 반환에 반대해온 사람이 바로 베긴이었기 때문이다. 베긴은 자기 앞에 주어진 이 운명을 받아들였다. 베긴은 중동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1978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1982년 4월 25일 밤, 마지막 유태인 그룹이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함으로써 시나이는 이집트의 손으로 돌아간다. 중동평화 협상의 한 주역이었던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1981년 10월 암살당한 뒤의 일이었다. 사다트의 죽음은 중동 평화의 또다른 대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베긴의 투쟁이 이로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82년 6월 6일 그는 마지막 정치적 모험으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거점이 있는 레바논침공을 감행한다. 뒤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레바논 전쟁은 처음부터 발을 잘못 들여놓은 전쟁이었다.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어가는 전쟁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베긴은 극심한 피로를 느끼게 된다. 거기다가 1982년 말 평생의 반려자인 알리자가 사망하면서, 이에 충격을 받은 70세의 노지도자는 더 이상 업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83년 9월 15일 베긴은 이츠하크 샤미르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정계에서 은퇴한다. 길고 험난했던 여정의 끝이었다. 정계은퇴 이후 그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신의 집을 떠나지 않고 은둔하다 1992년 3월 사망한다. 그의 뒤를 이은 이츠하크 샤미르 총리의 전력도 메나헴 베긴 못지 않다. 이츠하크 샤미르는 1915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그 나이 또래의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그는 부모와 형제를 모두 나치 대학살에서 잃었다.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기 이전인 1935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덕에 홀로 살아남은 샤미르는 1940년 레히에 참여하여 반영투쟁에 나선다. 그의 투쟁경력은 매우 화려하다. 레히 참여 1년 후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그는 바로 탈출했고, 조직을 재건한다. 다시 체포되고, 또 탈출하고, 결국 세 번째 체포로 그는 아프리카로 유배된다.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 귀국한 그는 벤-구리온에 의해 레히가 해체되자, 이서 하렐의 권유로 모사드에 참여하여 10년간 하렐과 함께 일한다. 그 후 정치에 참여하였고, 국회의장, 외무장관을 거쳐 1983년 이스라엘 총리가 된다. 베긴의 투쟁에 대한 평가 베긴이 벌인 테러가 이스라엘 건국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영국군 자료들은 그를 단지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테러리스트로만 기록하고 있다. 영국군이 철수한 것도 베긴의 주장처럼 순전히 이르군의 투쟁이 무서워서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엔이나 미국 등 여러 국제정치의 역학관계가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투쟁이 이스라엘 독립을 앞당긴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온건한 외교노선을 택한 좌파 그룹과 극단적 폭력투쟁을 택한 우파그룹의 대립과 반목 속에서 이스라엘은 절묘하게 독립을 쟁취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가나와 이르군, 레히의 반목에 있어서는 놓치지 못할 요소가 하나 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츠하크 사데, 이가엘 야딘, 이갈 알론, 모세 다얀 등 하가나 지도부의 대부분은 러시아에서 이주했거나, 팔레스타인에서 출생한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이르군이나 레히의 지도부를 형성하는 메나헴 베긴이나 이츠하크 샤미르 같은 사람들은 주로 폴란드 출신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반목은 단순히 좌익이냐 우익이냐의 차이를 넘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나치의 유태인대학살에 대해 하가나 지도부는 다소 한발 떨어진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데 비해, 이르군이나 레히의 지도부는 대학살을 몸으로 체험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자기 부모와 누이와 형제들이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다 가스실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경험을 간직한 이들의 투쟁방법이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는 없다. 자연히 이르군과 레히가 극단적인 투쟁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인 방법이나 보다 온건한 국가수립 방법을 찾는 하가나의 노선은 이르군과 레히 사람들에게 일종의 배신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막말로 "나는 부모 형제가 모두 나치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그런 판에 외교 같은 소리나 하고 있다니. 배신자들. 너네끼리 잘해 먹어라.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간다"는 분노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메나헴 베긴의 극단적인 노선은 용서받을 여지가 있다. 이스라엘이 끊임없는 외침과 수적 열세, 주변 아랍국들의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버티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나는 메나헴 베긴이나 이츠하크 샤미르 같은 건국영웅을 대접할 줄 아는 것이 그 끈질긴 생명력의 한 원천이 되고 있다고 믿는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일한 사람들에게 국민의 공복으로 일할 기회를 주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건국을 위해 폭탄테러를 주저하지 않던 투사들이 총리가 되는 나라인 까닭에, 이스라엘은 강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 국회에서는 늘 싸움질을 하고 있고, 서로 죽일 것처럼 미워하는 것이 이스라엘 정치인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 독립전쟁시의 동지들이다. 메나헴 베긴이나 베냐민 네탄야후가 극단적인 시오니즘을 강조하는 리구트당 출신인데 반해, 시몬 페레스나 이츠하크 라빈은 보다 온건한 노동당 출신이다.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이 두 그룹은 근본적으로 입장이 달랐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런 건국영웅들이 아직도 정권을 주고받으며 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서적 Menachem Begin, The Revolt (Story of the Irgun) , New York, 1951 Eitan Haber, Menachem Begin (The Legend and the Man), Delacorte Press/New York, 1978 Samuel Katz, A Biography of Vladimir Zeev Jabotinsky, Barricade Books/NY, 1996 Rinna Samuel, A History of Israel , Weidenfeld and Nicolson/London, 1989 Yitzhak Shamir, Summing Up, Little, Brown and Company/Boston, 1994 Ariel Sharon, Warrior, Simon and Schuster/NY, 1989 Ned Temko, To Win or To Die (A Personal Portrait of Menachem Begin), William Morrow and Company/New York, 1987 Ezer Weizman, The Battle for Peace, Bantam Books/NY, 1981 Saul Zadka, Blood in Zion, Brassey's/London, 1995 ------------------------------------------------------------------------------- - 홈페이지로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