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5일 목요일 오후 11시 54분 32초 제 목(Title): 김두식/마사다와 이가엘 야딘 마사다와 이가엘 야딘 ------------------------------------------------------------------------------- - 마사다 연혁 마사다는 B.C. 40년부터 B.C. 4년에 걸쳐 헤롯 대왕에 의해 사해 서쪽에 건축된 천혜의 요새이다. 헤롯 대왕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을 쑥밭으로 만든 그 사람이다. 주후 66년 로마에 대항한 젤롯당(열심당)의 반란이 일어나고, 일단의 유대인들이 마사다를 점령하여 이를 근거지로 투쟁을 시작한다. 주후 73년 세계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로마 10군단에 의해 마사다가 함락당한다. 이후 로마군 수비대가 마사다를 관장하는데, 언제까지 이곳에 로마군이 주둔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로마군이 떠난 후에는 기독교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서구의 여행가들에 의해 마사다의 존재가 알려지고, 1920년대부터 마사다는 이스라엘 투쟁정신의 상징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1927년 이츠하크 람단(Yitzhak Lamdan)의 시집 "마사다"가 출판되고, 1933년 두 명의 동료들과 함께 마사다 에 오른 쉬마리아 구트만(Shmaria Guttman)은 "이 곳이 신생 이스라엘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구트만은 마사다의 정신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로, 마사다를 거론함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다. 1934년 유태인 국가기금은 마사다 땅을 사들이려고 시도한다. 1940년 "야이르(Yair)"라는 지도자에 의한 유태인 무장조직 레히가 발족한다(야이르의 본명이 아브라함 슈테른이라는 것과 레히조직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야이르"는 바로 주후 73년까지 마사다에서 투쟁했던 열심당 지도자의 이름이다. 1942년부터 이스라엘 지하운동 그룹의 청년들이 마사다를 찾아오기 시작하고,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이후, 마사다는 이스라엘군 기갑부대 신병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장소가 된다. 1953년 마사다로 가는 작은 길이 뚫리고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첫 번째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진다. 1958년 이스라엘 청년운동 조직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길이 확장되고, 1962년에는 새로운 길이 뚫린다. 1963년부터 1965년에 걸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이 이끄는 발굴팀이 본격적인 마사다 발굴작업을 벌인다. 1962년부터는 마사다까지 케이블카를 건설하는 문제가 이스라엘의 중요한 논쟁거리로 부각되고, 1970년에 이르러서야 케이블카 건설작업이 시작된다. 1979년 TV영화 "마사다"가 제작되기 시작하여 1981년 미국의 ABC방송을 통해 전세계로 방송된다(우리 나라에서도 미니시리즈로 방영되었다). 1988년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마사다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을 공연하였고, 1993년에는 히브리 대학 고고학과 주관으로 마사다 발굴 3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것이 마사다라는 요새의 역사다. 주후 73년. 마사다 우선 1,900년 전 역사의 현장을 좀 자세히 살펴보자. 사실 주후 66년의 이스라엘 상황을 몇 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주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타인으로 진주하던 시절부터 시작해서, 로마제국의 팔레스타인 통치와 유다 마카비의 반란, 헤롯 대왕과 예수 그리스도, 헤롯의 후계자들, 로마제국의 형편 등이 설명되어야 한다. 그만큼 예수와 사도 시대의 팔레스타인은 당시의 국제관계 전체를 이해하지 않고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형편에 처해 있었다. 국제관계 뿐이 아니다. 바리새, 사두개, 에세네, 젤롯 등의 각종 당파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예수 시대를 에워싸고 있던 당시의 공기는 그대로 주후 66년의 상황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여기서 그걸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저 한마디로 쉽게 요약한다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로마의 통치에 반대한 저항의 불길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주의 형제 야고보를 처형하는 등 유대지도층이 기독교 박해에 앞장서게 된 데에는 이러한 애국주의적 분위기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항이 시작된 원인은 로마 황제의 문화정책과 총독의 재정정책에 있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충돌하는 와중에 61년 로마의 네로 황제는 헬레니즘 쪽의 손을 들어주었고, 66년 봄 로마총독 플로루스는 성전금고로부터 17달란트에 달하는 막대한 세금을 요구한다. 이에 반발한 전투적 젤롯당원들과 예루살렘의 애국주의적 귀족들이 요세푸스(Josephus)의 지휘하에 투쟁을 시작한 것이 유대전쟁의 시작이었다. 이 반란의 진압을 위하여 네로가 임명한 것이 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아들 티투스를 대동하여 대략 6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갈릴리로 진군한다. 갈릴리를 우선적으로 평정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뒤이어 베뢰아와 서부 유대도 점령하였다. 결과적으로 유대 반란군의 손에 남아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동부의 요새들뿐이었다. 이 반란의 와중에서 주후 66년 젤롯당의 지도자 므나헴(Menachem)은 헤롯 대왕이 지어놓은 마사다 요새를 장악했다. 므나헴은 젤롯당 창설자 중의 하나인 갈릴리 유다(성경 사도행전 5장 37절에 언급되는 바로 그 사람이다)의 후손으로, 그의 두 형은 주후 46년경 젤롯당을 지도하여 로마군에 대항하다 이미 십자가형을 받아 사망한 바 있다. 마사다 점령 후 예루살렘으로 진군하여 자신을 메시아로 칭하던 므나헴은 유대 지도층의 내분으로 인해 암살당한다. 그 뒤를 이어 마사다를 장악한 것이 므나헴의 가까운 친척이던 엘라자르 벤-야이르(Elazar Ben-Yair)이다. 이 기간 중 로마는 네로의 뒤를 이어 갈바, 오토 등의 심약한 황제들이 거쳐간 후, 유다 총독인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어 반란진압에 나선 티투스에 의해 주후 70년 무자비하게 함락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이후에도 마사다의 투쟁은 계속되었고, 주후 73년 마사다의 반란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로마 10군단 병력이 마사다를 포위한다. 이 병력은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플라비우스 실바(Flavius Silva)가 지휘하고 있었다. 철통같은 포위망 속에서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다 내부의 젤롯당원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고,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위치한 마사다 요새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공성전략으로는 마사다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고 판단한 로마군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전략은 마사다 꼭대기에 이르는 인공도로를 뚫는 것이었다. 이 도로를 통해 성벽을 부술 해머가 운반되었다. 이에 대항하여 마사다의 반란군은 나무와 흙을 성벽 내부에 채워넣어 해머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이에 대한 로마군의 대응은 화공이었다. 불길이 곧 반란군이 세운 나무 벽을 불태우기 시작했고, 마사다의 함락은 눈앞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뚫고 진입한 로마군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마사다 반란군의 결사 항전이 아니라 침묵뿐이었다. 마사다를 지키고 있던 젤롯 반란군과 그의 가족들이 전원 자결한 것이다. 사망자는 총 960명이었고, 2명의 여자와 5명의 어린이들만이 생존했다. 승리의 기쁨을 기대하던 로마군은 이 엄청난 결과 앞에 망연자실한다. 이 성의 포위에서 함락까지 걸린 시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최근의 사가들은 대체로 수개월이 걸렸다고 보고 있다. 마사다의 최후에 대해서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Flavius Josephus)가 비교적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애국주의적 귀족그룹을 이끌고 반란에 참여했던 요세푸스는 로마군에 투항한 이후 유대전쟁사를 비롯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로마군에 투항하여 황제의 보호를 받게된 독특한 신분 때문에 로마 황제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느라 역사적 사실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는 부분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의 책들은 이스라엘 역사 뿐 아니라 초기 크리스트교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더할 수 없이 소중한 자료이다. 요세푸스는 반란군 지도자 엘라자르의 마지막 연설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용감하고 충성스러운 동지들이어! 오래 전 우리는 로마인들을 비롯해서, 하나님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기로 결심한 바 있습니다. 이제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그 결심을 입증해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반란에 처음부터 참여했을 뿐 아니라, 투쟁을 마무리할 마지막 사람들이기도 한 까닭입니다. 우리가 자유인으로 존엄하게 죽어갈 권리를 허락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일 새벽 동이 틀 때면 우리의 저항도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아내들이 욕을 보지 않고 죽어갈 수 있도록 합시다. 우리 아이들이 노예 됨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한 채 죽어가게 합시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의 소유물들과 이 요새부터 태워버리도록 합시다. 우리 적들의 손에 아무 것도 남겨두지 맙시다. 오직 한가지 남겨둘 것은 비축된 식량뿐입니다. 그 식량은 우리가 결코 음식이 없어 굶어 죽은 것이 아니라, 노예 아닌 죽음을 택했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오시오. 아직 우리의 손이 자유롭고 칼을 잡을 수 있을 때, 우리의 명예로운 의무를 다하도록 합시다. 적의 손에 노예 됨이 없이 함께 죽도록 합시다. 우리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자유인으로 이 세상을 떠납시다." 왜 하필 마사다인가 이 연설과 함께, 남자들이 먼저 자기 가족들을 죽였고, 나중에는 서로를 죽였다. 이 끔찍한 장면을 묘사한 요세푸스는 이들의 행동을 영웅적인 것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그저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이냐!" 정도로 적었을 뿐이다. 거기다 마사다 요새의 투사들은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매우 극단적인 방법을 취했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근처의 아인 게디(Ein Gedi) 마을에서 무려 700명 이상을 살해하고 식량을 빼앗은 적도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말 제정신이 아닌 폭력집단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그 건국운동시부터 마사다를 정신적 고향으로 삼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 유럽에서는 히틀러에 의해 600만 명의 유태인들이 희생당했다. 문제는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대다수의 유태인들이 이런 박해를 그냥 감수했다는 것이다. 나치강제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도 그랬다. 바르샤바 게토에서처럼 조직적인 저항운동이 행해진 곳도 있었지만, 600만 명의 유태인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죽어갔다. 왜? 도대체 왜 그들은 한 번 제대로 저항해보지도 않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죽어갔는가? 바로 이 의문에서 이스라엘 건국운동의 주인공들은 새로운 유태인상을 정립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순한 양처럼 죽어 가는 것이 유태인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또다른 모습이 있다고 외치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 새로운 정신을 세우는데 마사다 이상의 좋은 모델이 없었다. 유태인도 총을 들고 싸울 수 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칠 수 있다. 모두가 죽겠다는 정신으로 싸움에 나선다면 우리들도 우리들의 국가를 가질 수 있다. 바로 여기에서 마사다의 신화가 들어지게 된 것이다. 또 한 가지, 2,000년 전 마사다가 처한 환경은 현대 이스라엘이 처한 여건을 상징한다. 마사다는 로마군에 의해 물샐틈없이 포위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은 현재 아랍 여러 나라들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있다.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국가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의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을 각오한 투쟁밖에 없다. 스스로 강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마사다는 이스라엘의 정신적 고향이 되었다. 단순한 고고학적 성과물을 넘어선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마사다가 반드시 국가적 상징으로 되어야 한다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쉬마리아 구트만이다. 구트만은 1909년 영국 글래스고우의 유태인가정에서 태어났다. 원래 러시아 출신인 그의 가족은 1912년 영국을 떠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구트만의 아버지는 벤-구리온과 함께 일찍부터 시오니즘 운동에 참여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벤-구리온 등의 시오니즘 주류 그룹 지도자들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이상으로 지닌 좌익 성향의 인물들이었음은 이미 전장에서 설명한 바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은 당연히 구트만으로 하여금 사회주의적인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에의 열정을 가지게 했고, 구트만은 어려서부터 중앙 사회주의 소년단(Noar Oved)에 참여한다. 이런 구트만을 가르친 선생님 중에 마사다에 대한 책을 저술한 브레스라비(Breslavi)와 야엘 고든(Yael Gordon)이 있었다. 1933년 구트만은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사해를 거쳐 마사다를 처음 찾아간다. 이 여행에서 크게 감명을 받은 구트만은 유태인 국가위원회의 위원장인 이츠하크 벤-즈비(Yitzhak Ben-Zvi)를 찾아가 개인면담을 요청한다. 이 때 벤-즈비는 구트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래, 자네가 도대체 그렇게 흥분할 이유가 무엇인가? 960명의 유대인 강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마사다로 가서 자결했네.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그게 그렇게 흥분할 일인가?" 그러나, 구트만은 여기에 실망하지 않는다. 구트만이 깨달은 것은 마사다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직접 그곳을 방문케 해야 한다! 그곳을 직접 방문한 사람은 사해 서쪽 사막에 절벽처럼 솟아있는 마사다의 모습을 보고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어있다!' 그때부터 구트만은 청년들을 이끌고 마사다를 직접 찾아가 그들에게 마사다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의 이런 노력은 마사다를 유태 청년조직들의 정규적인 순례지로 만든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건국운동에 투신한 젊은이들에게 정말로 뭔가를 느끼게 했던 것이다. 마사다 요새는 스스로 말을 하고 있었다. 1942년 구트만은 벤-구리온과 벤-즈비를 설득하여 이 새로운 정신운동의 동참자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마침내 이스라엘 건국운동의 최고지도자들로 하여금 마사다에서 죽어간 960명이 단순한 강도들이 아니라 자유의 투사들이었음을 깨닫게 한 것이다. 아인 게디의 학살 사건도 구트만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 문제를 "우선 첫째로 이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를 지나치게 신뢰할 필요가 없다. 둘째, 설사 이 기록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마사다의 반란군에게 식량제공을 거부한 아인 게디의 거주민들은 죽어 마땅했다"는 식으로 쉽게 정리했다. 마사다를 이스라엘 정신의 핵으로 만든 구트만의 다음 목표는 마사다 요새의 발굴이었다. 그러나, 구트만에게는 요새를 발굴할 고고학적 지식도, 영향력도 없었다. 그 때 구트만이 만난 사람이 바로 이가엘 야딘이었다. 구트만의 설득에 의해 1963년 이 세계적 고고학자는 발굴팀을 이끌고 마사다를 향해 출발한다. 이가엘 야딘과 나 이제 드디어 이가엘 야딘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이가엘 야딘은 마사다를 발굴한 사람이다. 1979년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종로서적에서 나온 "마사다"라는 책을 처음 손에 잡았다. 내용이 쉽지는 않았지만, 사진이 있어 지루하지 않았다. 저자는 "이가엘 야딘." 이스라엘의 고고학자로서 히브리 대학 교수라는 설명만이 덧붙여져 있었다. 그나마 이 번역서는 이제 절판되어 찾아볼 수도 없다. 미국에 오기 전 종로서적에 전화를 걸어 이 책을 구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출판사에서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당시 아직 어린 나이었지만, 그 책에 적혀있는 마사다 발굴의 기록은 나를 전율케 했다. 이 한 권의 책이 나로 하여금 꼭 한 번은 고고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했다. 어쩌다 인생길이 꼬여 법률가가 되었지만,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동안에도 나는 늘 탈출을 꿈꾸었다. '만약 이번 시험에도 떨어지면, 고시는 인연이 없는 모양이니 군대부터 빨리 다녀와서 고고학을 공부하자'고 결심하기도 했다. 아버지께 "영국이나 이스라엘로 가서 고고학을 공부해 보고싶다"고 말씀드렸던 것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마지막 사법시험에 덜컥 붙어버리면서 고고학에의 꿈은 멀어져 갔다. 고고학과는 그렇게 헤어졌어도, 이가엘 야딘과의 만남이 아주 끝난 것은 아니었다. 1997년 가을 미국에서 공부하는 아내를 따라 캔자스로 왔다. 미국에 오니 어느 도서관을 가든지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책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한국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던 책들이었다. 이스라엘 현대사를 장식한 사람들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가엘 야딘"이라는 이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내용은 그의 고고학적 성과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부분의 자료는 이스라엘군의 모체인 하가나의 지도자, 이스라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참모총장, 그리고 정치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활동범위가 넓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이가엘 야딘은 1917년 예루살렘에서 고고학자인 엘리아자르 수케닉(Eleazar Sukenik)과 유치원 교사 카샤(Chassiya)의 아들로 태어났다. 엘리아자르 수케닉은 시오니즘 운동 개척자 중의 한 명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교회 다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의 의미를 알 것이다). 그래서 2개월이나 조산으로 태어난 연약한 아이의 이름을 이가엘로 지었다. 이가엘은 "그가 구원받을 것이요"라는 뜻이다. 이가엘 야딘의 어머니 카샤는 리투아니아 비아리스토크(Bialystok)의 한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러시아의 유력인사들과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동부유럽에 만연하고 있던 유태인 박해로부터 자유로웠음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시오니즘 운동에 눈 뜬 카샤는 부잣집 딸이나 부유한 상인의 아내로 살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꿈은 약속의 땅으로 가서 유태 개척민의 자녀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다. 엘리아자르 수케닉은 카샤와는 반대로 비아리스토크의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은 엘리아자르 수케닉은 랍비가 되기 위해 코브노(Kovno)의 학교로 보내져 4년간 교육받는다. 1906년 비아리스토크에 유태인 학살의 바람이 불어 많은 유태인들이 죽고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17세의 엘리아자르는 토라(유태경전)와 탈무드를 포기하고 사회주의로 방향을 돌리게 된다. "시온의 노동자들(the Workers of Zion)"에 참여한 엘리아자르는 그곳에서 카샤를 만나게 된다. 5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 두 사람은 가족들을 뒤로 한 채 약속의 땅으로 떠나 예루살렘에 정착한다. 카샤의 부모는 끝내 이 유별난 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루살렘 정착 후 카샤는 베를린에서 2년간 교사로 교육을 받았고, 엘리아자르는 히브리 교육대학에서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각 유치원과 고등학교 교사로 일한다. 그러나, 엘리아자르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고고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의 꿈은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이었다. 1920년대 고고학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인식되었다. 유럽의 부유한 귀족들이나, 대부호 록펠러 등으로부터 금전지원을 받은 미국의 학자들만이 중동 지역을 헤매며 유물을 답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오직 소수의 선택받은 팔레스타인 학생들만이 이 특권의 일부를 맛볼 수 있었다. 환경은 열악했으나 엘리아자르는 자신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엘리아자르가 찾아낸 일은 소규모 탐사단을 자체적으로 조직하여 연구활동을 하고, 예루살렘의 유물들에 대한 히브리어 안내서를 쓰는 것이 전부였다. 1921년부터 엘리아자르는 팔레스타인 유태노동자 모임(Jewish Laborers in Palestine)의 지원을 받아 유태인 정착촌을 돌아다니며 고고학을 강의함과 동시에 유적지들을 답사하기 시작한다. 이 여행을 통해 그가 사귄 친구가 젊은 미국인 고고학자 알브라이트(William Foxwell Albright)였다. 알브라이트 역시 성경 역사 연구에 있어 거대한 족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이는 독자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1922년 엘리아자르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유태 팔레스타인 탐사 학회(Jewish Palestine Exploration Society)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 대학에 유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족들을 예루살렘에 남겨놓은 채 홀로 독일로 향한 엘리아자르는 베를린 대학에서 노아크, 파브너, 로덴발트, 울리히 빌켄(나중에 나치 독일의 주구가 된 자다) 등의 세계적 학자들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한편, 알브라이트와 함께 팔레스타인의 유적지 답사를 계속한다. 그러나, 유태인인 엘리아자르는 감리교도인 알브라이트의 뒤만 좇아 다닐 수 없었다. 그도 자신만의 연구영역을 갖고 싶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1925년 신설된 히브리 대학의 총장인 유다 마그네스(Judah Magnes)가 그를 주목한 것이다. 마그네스의 추천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의 드랍시 대학 연구원에 임명된 그는 그곳에서 강의를 하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히브리대학 교수 부임과 함께 본격적인 유적발굴활동을 시작한다. 엘리아자르 수케닉의 이름은 곧 이스라엘 고고학의 출발을 의미했다. 1929년 4월 29일 뉴욕타임즈지는 "수케닉 박사의 베스 알파(Beth Alpha) 회당 발굴은 유대주의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고고학에 꿈을 가진지 10년만에 그는 이미 세계적인 학자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가엘 야딘의 어린 시절, 아버지 엘리아자르 수케닉은 오랜 유학생활과 발굴활동으로 인해 집에 머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의 양육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카샤는 칭찬과 격려로 자녀들을 양육했고, 이런 교육 덕에 이가엘은 어려서부터 늘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그러나,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카샤는 아들 이가엘에게 오렌지를 하나 가져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이가엘은 아무 주저함이 없이 부엌으로 가서는 토마토를 들고 왔다. 이가엘 야딘은 그의 아버지 가문의 유전에 따라 색맹이었던 것이다. 이가엘은 이 사실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 아버지가 히브리 대학 교수가 됨에 따라 이가엘에게도 새로운 시절이 찾아왔다. 고고학은 그에게 있어 공기와도 같았다. 아버지의 연구실은 그의 놀이터였고, 각종 유물들은 그의 친구가 되었다. 이미 5살 때 알브라이트의 발굴현장을 참관했던 이가엘 소년이었다. 그 이후 이가엘은 아버지가 유적을 찾아 떠날 때마다 동행했다. 호기심에 가득차 발굴과정을 지켜보는 소년의 모습은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다. 엘리아자르 수케닉의 자녀 중 고고학에 관심을 보인 것은 이가엘뿐이었다. 하가나 16세가 되던 해 이가엘 야딘은 무장지하조직인 하가나(Haganah)에 참여한다. 1920년대 내내 팔레스타인 전역을 휩쓴 여러 차례의 아랍폭동으로 많은 유태인들이 사망하게 되자, 하가나는 본격적인 무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 조직의 기틀을 다진 사람이 폴란드 출신의 전직 러시아 적군(Red Army) 장교 이츠하크 사데(Yitzhak Sadeh)였다. 1936년부터 조직을 이끌기 시작한 사데는 대학시절 철학을 전공했고 한때는 레슬링과 역도 선수로 뛰기도 했던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사데는 하가나 조직원들로 순찰대를 만들어 유태인 보호에 나서는 한편,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시작한다. 바로 이 시기에 하가나는 외부에서 온 조력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영국군 정보장교이던 윈게이트(Orde Wingate) 대위였다. 윈게이트와 사데는 유태인 키부츠 방어전략의 기본을 수립하고, 이를 젊은이들에게 가르친다. 윈게이트로부터 기동성과 기습에 기초한 중요 목표물에의 집중타격 원리를 배운 사람들이 바로 이갈 알론이나 모세 다얀과 같은 훗날의 이스라엘군 지도자들이었다. 1934년 이가엘은 히브리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그의 학업성적은 썩 우수한 편이 아니었고, 아버지와는 달리 학문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1년간 이민국 사무원으로 일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유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민이 급증하고 있었다. 하루종일 새로운 여권을 만들고 도장을 찍으면서 이가엘 야딘은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1935년 아버지에게 히브리대학 고고학과에 입학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을 때 엘리아자르는 "너는 고고학이란 게 얼마나 힘든지를 모른다"며 다른 길을 찾아보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아들의 고집도 아버지 못지 않았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히브리대학 고고학과에 진학한 이가엘 야딘은, 뒤이어 아버지의 라이벌인 마이어(Dr. Meyer) 교수의 학생으로 대학원에 등록한다. 대학시절과 대학원 시절 내내 그는 아버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주로 아버지의 라이벌들과 친하게 지내며 그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1938년 여름 그리스와 터키로의 연구여행에서 돌아온 이가엘 야딘은 예루살렘 하가나 본부의 호출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윈게이트에 의해 조직된 유태인 거주지 경찰(Jewish Settlement Police)의 요원으로 선발되었음을 통고받는다. 뒤이어 하가나 장교요원 훈련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이스라엘군의 최고지도부를 형성하는 50명의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였다. 그의 주업이 학생에서 군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하가나 안에서 이가엘은 매우 독특한 존재였다. 뛰어난 체력이나 용기 때문이 아니라 넘치는 위트로 유명했다. 군인이라기보다는 학자로 보였고, 실전에서보다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리델 하트나 역사 속의 클라우제비츠 같은 전략가들을 넘어 적군인 롬멜 장군까지도 포함되었다. 이들의 이론을 완전히 소화한 이가엘 야딘은 곧 작전분야에서 두드러진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싸우는 그의 스타일에 관심을 가진 하가나 참모장 야코프 도리(Yaacov Dori, 본명은 Dostrovsky이다)는 그를 곧 자신의 보좌관으로 불러들인다. 이때 이가엘 야딘이 선택한 암호명이 바로 야딘이었다. 그 이전까지 그는 아버지를 따라 이가엘 수케닉으로 불려졌었다(편의상 본서에서는 처음부터 그의 이름을 야딘으로 표기했다). 1940년부터 하가나의 문서기록에는 '야딘'이라는 암호명이 빈번하게 나타나기 시작하고, 지도부는 그의 뛰어난 자질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팔마하, 그리고 결혼 1941년 하가나 내의 정예부대라 할 수 있는 팔마하(Palmach)가 창설된다. 모세 다얀, 이갈 알론, 이츠하크 라빈 등의 팔팔한 젊은이들이 팔마하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할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이가엘 야딘은 팔마하 요원들을 교육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1945년까지 야딘은 대부분의 시간을 팔마하 훈련소장으로 보내는 한편, 여유시간에는 대학에서 연구활동을 계속한다. 그리고 1941년 이가엘은 카멜라 루핀(Carmalla Ruppin)과 결혼한다. 카멜라와 이가엘의 첫 만남은 이가엘 야딘이 13살 때 처음 이루어졌다. 새로 이사한 집의 길 건너편에 9살의 카멜라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한 동네에 살고 있어도 두 집의 생활환경은 천지차이였다. 시오니즘 운동 개척자 중의 하나인 그녀의 아버지 아르투어 루핀(Arthur Ruppin, 제2장 참고) 박사 덕분에 카멜라는 드물게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외국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런 그녀가 이가엘 야딘과 결혼하기로 처음 마음먹은 것은 17세 되던 해의 일이었다. 집안의 반대는 극심했다. 그녀의 부모는 곱게 키운 딸을 자수성가한 리투아니아 출신 학자의 아들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 젊은이는 생명을 거는 업무에 종사하는 하가나의 지도자였다. 1941년 11월 10일 아르투어 루핀 박사는 한심하다는 투로 다음과 같은 일기를 남기고 있다. "오늘 캐리(카멜라의 별명)가 그녀의 남자친구 이가엘과 결혼하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이가엘은 고고학자인 수케닉 교수의 아들로 한 달에 8파운드를 받으며 하가나를 위해 일하고 있는 25살 난 젊은이다." 반대를 무릅쓴 그들의 결혼은 1941년 12월 21일에 이루어졌다. 그 뒤부터 카멜라의 내조는 야딘에게 있어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1945년 이가엘 야딘은 팔마하 지휘관직에서 전격적으로 은퇴한다. 이스라엘 군 창설후의 방향에 대해 이츠하크 사데와 의견을 달리했던 결과였다. 사데의 의견은 경기관총으로 무장한 소규모의 정예부대가 이스라엘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야딘의 의견은 중화기에 의해 무장한 대규모 군 조직이 팀워크에 기초해서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은퇴로 그의 군 경력은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보여졌다. 팔마하는 이제 모세 다얀, 이갈 알론, 이츠하크 라빈 등의 사데 지지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가엘 야딘은 아내와 함께 대학연구실로 돌아간다. 그가 대학 연구실에서 보낸 약 1년 반 동안 하가나는 영국에 대항한 투쟁을 시작하고, 많은 지도자들이 지하로 들어간다. 이 기간 중 야딘은 모든 군사행동으로부터 떨어져있었기 때문에 체포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의 생활은 매우 평범했다. 쇼핑, 청소, 연구활동 등 그의 시간표는 모두 아내가 관리했다. 이 기간 중 그는 아버지의 오랜 라이벌인 베냐민 마이슬러(Benjamin Maisler) 교수의 행정조교로 일하는 한편, 훗날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임 바이츠만 등과 교류한다. 이스라엘군 복귀와 독립전쟁 1947년 봄. 이가엘 야딘은 유태인 기구로부터 거절하기 어려운 요청을 받는다. 벤-구리온의 면담요청이었다. 그 이전에 야딘은 단 한번도 벤-구리온을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없었다. 첫 만남에서 벤-구리온은 하가나에 관한 많은 질문을 던졌고, 야딘이 하가나를 떠나게 된 이유를 물었다. 마지막으로 야딘의 박사학위 논문에 대해 이런 저런 질문을 한 후 벤-구리온은 별다른 설명 없이 한번 더 만나자는 말만 건네고 야딘을 돌려보낸다. 당시, 야딘은 모르고 있었지만, 벤-구리온은 하가나를 개혁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위임통치의 종식과 이스라엘의 독립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측한 벤-구리온은 하가나를 이스라엘군으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전환 과정에서 팔마하 세력을 축출하기를 원했다. 건군 과정에서 이르군이든, 팔마하든 어떤 조직도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벤-구리온의 확신이었고, 그런 벤-구리온에게 있어서 야딘은 소중한 존재였다. 1947년 가을. 히브리대학의 어느 누구도 박사학위를 눈앞에 둔 야딘이 대학을 떠나리라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야딘은 벤-구리온의 지시에 따라 대학을 떠나 새로 구성된 참모본부의 일원으로 군에 복귀한다. 1947년 11월 23일. 엘리아자르 수케닉은 아르메니아인 고물상 오한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매우 흥분한 목소리였다. 수케닉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몇 개의 물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때까지 발견된 어떤 히브리어 사본보다도 더 오래된 성경사본이었다. 바로 사해 사본의 발견이었다. 1953년 2월 28일 사망할 때까지 수케닉 박사는 사해사본의 연구에 여생을 바쳤다. 사해사본의 가치를 처음 알아낸 그의 학문적 성과는 아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역사상 길이 남을 발견에 흥분하고 있을 때, 야딘은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했다. 11월 29일 유엔은 이스라엘 건국을 결정했고, 야딘은 새로 조직될 이스라엘군의 틀을 짜기에 여념이 없었다. 야딘의 구상대로 이스라엘군은 북부, 남부, 중앙, 그리고 예루살렘을 담당하는 4개의 사령부와 공군, 해군으로 편성될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야딘은 종종 벤-구리온과도 충돌했다. 훗날 그 자신이 회상하고 있다시피, 31세의 이 젊은 작전참모부장는 62세의 노정치가에게 "NO"라고 말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1948년에 들어서면서 유태인 키부츠에 대한 아랍인들의 공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스라엘군의 조직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스라엘군 내에서 야딘은 벤-구리온의 대리인이었다. 군 참모총장 도리는 건강이 심히 좋지 못한 상태로서 사실상 업무에서 손을 뗀 상태였다. 이스라엘군의 실질적인 최고지도자로서 야딘은 전쟁에 대비해야했다. 1948년 5월 14일. 벤-구리온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집트,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트랜스요르단 등 이스라엘과 접경한 모든 나라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한다. 갑자기 구성된 이스라엘군은 거의 전지역에서 붕괴의 위기에 놓여있었다. 병력과 장비에 있어서 이스라엘군은 절대적인 열세였다. 곳곳에서 지원요청이 들어왔으나, 이스라엘군 사령부는 더 이상 지원해줄 물자나 병력이 없었다. 19세기 말에나 쓰이던 대포들까지 동원되었다. 곳곳에서 신생 이스라엘군의 영웅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한치의 땅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이스라엘군의 투쟁은 절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6월 4일 이집트 병사들을 태운 군함 3척이 팔레스타인 서안에 접근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낡아빠진 3대의 이스라엘군 경비행기가 출격한다. 이들은 이집트 군함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지만 작전 도중 한 대의 공군기가 추락했고, 거기에 탑승하고 있던 두 명의 조종사가 사망했다. 한 명은 히스타드루트 사무총장의 아들인 다비드 스프린작(David Sprinzak)이었고, 다른 한 명은 고고학자 수케닉 교수의 차남 마타티야후 수케닉(Mattatyahu Sukenik)이었다. 막내 동생의 사망소식을 처음 접한 사람은 바로 이가엘 야딘 자신이었다. 야딘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울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마십시오. 어제 텔 아비브 해안으로부터 적 함선들을 격퇴하기 위해 출격할 때, 마티(마타티야후의 애칭)는 무엇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티는 위험을 겁내지 않았습니다. 무서워하지도,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동생은 용기를 가지고 그의 국민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했습니다. 그러므로 울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위험이 그를 흔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마티가 우리 가족 중의 하나였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사랑과 존경으로 그에 대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합시다. 이가엘." 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격전장은 예루살렘이었다. 개전과 동시에 예루살렘은 적에게 완전포위되었다. 예루살렘은 신생 이스라엘의 상징이었다. 예루살렘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다. 아랍군단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통로인 라트룬(Latrun)요새를 점령했다. 벤-구리온은 신설된 하렐여단(여단장 이츠하크 라빈)으로 하여금 라트룬 요새를 공격하도록 지시한다. 야딘은 급조된 여단이 아직 전투에 투입될 준비가 안되었다는 이유로 이에 반대하지만, 작전은 국방장관을 겸임하고 있는 벤-구리온 총리의 요구대로 실행되었다. 라트룬 요새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수없이 많은 소년병사들이 이곳에서 죽어나갔다. 라트룬에서 중상을 입은 사람 중에는 훗날의 이스라엘 특수부대 창설자이자, 레바논 침공의 주역을 담당한 아리엘 샤론 같은 소년도 있었다. 이츠하크 라빈도, 아리엘 샤론도 다시는 이와 같이 준비 없는 무모한 싸움으로 무고한 인명피해가 없도록 해야한다고 다짐한다. 이러한 다짐이 훗날 6일 전쟁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루살렘 구시가를 지키던 이스라엘군은 모든 물자의 공급이 완전히 끊긴 상태에서 5월 28일까지 아랍군단에 맞서 처절한 투쟁을 벌이지만, 결국 구시가는 아랍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라트룬 요새공격을 총지휘한 것은 미군 대령 데이비드 마커스(David Marcus, 별명은 Mickey)였다.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2차대전의 영웅으로 1948년 초 라비노비츠의 설득에 의해 이스라엘군 건설에 참여한 그는 시오니스트가 아니었다. 6월 11일 제1차 휴전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상태에서 마커스는 침상에서 일어나 부대 부근을 둘러보던 중, 암호를 묻는 이스라엘군의 질문에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못한 결과, 자신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의 총탄에 사망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그 때까지도 히브리어를 한마디로 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에 참여한 수천 명의 외국인 자원봉사자 중의 한 명이었다. 그의 시신을 미국으로 운구한 것은 모세 다얀과 요시 하렐(Yossi Harel, 그는 불법이민선인 엑소더스 호를 지휘한 인물이다)이었다. 1966년에는 마커스의 생애를 그린 "Cast a Giant Shadow"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는 커크 더글라스가 마커스 대령 역을 맡았다. 약 한 달간 지속된 전쟁 결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구시가를 잃었지만, 갈릴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승리를 거둔다. 독립전쟁의 종결과 함께 신생국 이스라엘은 비로소 자신의 땅을 가지게 된 것이다. 구시가는 1967년 이스라엘이 6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다시 이스라엘의 품으로 돌아온다. 제1차 휴전과 함께 알타레나호 사건이 터진다. 벤-구리온이 알타레나호에 대한 사격을 명령할 당시 이 사건이 언젠가 반드시 정치적 문제가 될 것임을 예상한 이가엘 야딘은 벤-구리온에게 명령을 문서로 명시해 줄 것을 요구한다. 벤-구리온은 이에 응하여 "지금 즉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알타레나호의 무장을 해제하고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낼 것을 귀관에게 명령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한다. 참모총장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실권자로서 알타레나호 무장해제를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야딘이 이 사건논쟁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 그의 치밀함 때문이었다. 제1차 휴전은 길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국경선은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스라엘은 한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해야했다. 7월 9일. 네게브와 갈릴리, 그리고 예루살렘 전선에서 전투가 재개된다. 10일에 걸친 전투가 끝났을 때 이스라엘은 이제 단순히 이름뿐인 나라가 아니었다. 요르단강 근원에서부터 갈릴리 호수까지 약속의 땅에 독립국가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음을 당당히 선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쟁기간 중 유엔은 휴전을 위한 중재자로 스웨덴 적십자총재 베르나도트(Bernadotte) 백작을 내세우지만, 그는 1948년 9월 17일 레히 조직원에 의해 살해당하고, 이를 계기로 레히가 완전해체된다. 10월 15일 제2차 휴전기간이 종료되면서, 이스라엘군은 "10대 재앙"작전(모세의 출애굽을 생각해 보라)을 통해 이집트 군이 주둔하고 있는 네게브 사막을 공격하여 이를 점령한다. 이 작전계획을 세운 것은 야딘이었고, 이를 실행한 것은 이츠하크 라빈이었다. 10월 31일의 제3차 휴전도 길게 지속되지 않았다. 12월 22일에는 야딘이 입안하고 이갈 알론과 이츠하크 라빈이 세부지침을 작성한 "호렙"작전에 따라 골라니여단이 가자 지구를 점령하고, 이갈 알론이 지휘하는 이스라엘군은 시나이를 점령한다. 이스라엘 영토의 확장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던 영국이 이 시점에 개입하여 "이집트 영내에 이스라엘군이 진입할 경우 영국은 1936년의 영국-이집트 상호방위조약에 따라 전쟁에 개입할 수 밖에 없다"고 천명했다. 1949년 베르나도트의 후임으로 임명된 중재자 랄프 번치(Ralph Bunch)가 협상에 나선 결과, 이집트가 2월 14일 이스라엘의 네게브 점령을 인정하는 대신, 가자 지구를 돌려 받기로 하고 휴전협정에 서명한다. 이어 레바논이 3월 23일에, 트랜스요르단이 4월 3일에, 시리아가 7월 20일에 각각 휴전에 동의하였으나, 이라크는 끝내 휴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써 길고 긴 이스라엘 독립전쟁은 막을 내린다. 각종 평화협상에 군 대표로 참석해야 했던 야딘은 1949년 8월 26일 벤-구리온으로부터 참모총장 임명을 통보받는다. 이스라엘군 참모총장은 육해공군을 총괄하는 막강한 자리로서 우리의 육군참모총장과는 다르다. 야코브 도리로부터 이가엘 야딘으로의 지휘권 이양은 이스라엘군의 세대교체를 의미했다. 군 참모총장으로서 야딘은 이스라엘군의 구조를 개선하고, 끊임없는 아랍 여러 나라의 전쟁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세계제일을 자랑하는 이스라엘 예비군제도는 그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잠시 1949년 병역법에 의해 확립된 이스라엘의 예비군제도를 설명한다. 이스라엘의 모든 남녀는 18세가 되면 빠짐없이 군에 입대하여 남자는 26개월간, 여자는 20개월간 군에 복무한다. 남자들은 주로 실전에 배치되고, 여자들은 간호병이나 사무원, 사회복지사, 교사, 운전사 등으로 유태인 정착촌에서 일한다. 복무기간이 끝나면 그들은 바로 예비군에 편입된다. 남자는 45세, 여자는 미혼인 경우에만 35세까지 예비군으로 복무하는데, 40세 이전의 남자는 매년 한 달간, 40세 이상은 매년 2주간의 동원훈련에 참가한다. 한 달에 하루씩은 두 그룹 공히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밖에 45세부터 49세까지의 모든 남자는 민방위대에 편성된다.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매달 하루, 매년 한 달은 군복을 입은 채 지내는 아버지를 보아야했고, 형이나 누나는 정규군에 편성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위에 적힌 기간도 적지 않지만, 전쟁이 임박한 시점에서 훈련기간은 무제한으로 연장되었다. 스위스 예비군제도에 기초하여 야딘이 입안한 예비군 제도는 이스라엘 국가생존의 근간이 되었다. 다시 고고학으로 1952년 이가엘 야딘은 다시 한번 어려운 결단을 내린다. 이스라엘의 가장 촉망받는 젊은 지도자로서의 자리를 모두 포기한 채, 때묻은 고문서와 흙더미 속에서 과거를 탐구하는 즐거움을 찾아 떠나기로 한 것이다. 하가나의 최연소 지도자, 이스라엘 독립전쟁시의 군사전략가, 평화시의 첫 참모총장, 로드와 로잔느 평화회의에서의 군 대표 등 그의 다양한 경력은 누구라도 부러워할 만한 것이었다. 당시 35세. 정해진 길대로만 가면 총리자리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다. 그가 이런 결심을 하게 된 데는 그의 아내 카멜라(Carmella)의 도움도 컸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야딘은 벤-구리온 총리를 비롯한 정치가들로부터 정계입문을 권유받았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느 때든지 국방장관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벤-구리온의 신뢰는 확고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최고의 명문가문 출신인 카멜라는 남편이 담배연기 자욱한 회의실에서 논쟁과 싸움으로 날을 지새기를 원치 않았다. 그녀는 남편이 있어야 할 곳은 유적지와 연구실이라고 확신했다(결국, 카멜라가 사망한 뒤 야딘은 정계로 복귀하여 메나헴 베긴 내각의 부총리를 지낸다). 히브리대학으로부터 2년간의 장학금을 받은 야딘은 그 기간을 자신의 박사학위논문을 마치는데 투자한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는 아버지 수케닉 박사가 추적하던 사해사본 중의 하나인 "어둠의 자식들에 대항한 빛의 자식들의 전쟁"문서로 잡았다. 사해사본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날로 높아지던 시점이었고, 기독교인들은 사해 사본에서 초기 크리스트교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넘쳐있었다. 연구비와 시간을 관리하는 것은 여전히 아내 카멜라의 몫이었다. 연구의 기초자료들을 정리하는 것도 카멜라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1955년 박사학위를 취득한 야딘은 히브리대학의 강사로 임명된다. 학위논문을 위해 영국의 대영 박물관을 오가는 과정에서 영국의 부호인 제임스 로스차일드(그의 아버지는 유태계 프랑스인의 대표자 격이었던 에드몬드 로스차일드 남작이다)와 교분을 쌓은 야딘은, 그의 지원 아래 1955년부터 하조르(Hazor) 발굴을 시작한다. 하조르는 성경 여호수아 11장에 나오는 것처럼 여호수아에게 정복된 가나안 도시일 뿐 아니라, 훗날 솔로몬 통치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했던 곳이었다(우리 성경은 이곳을 "하솔"로 표기하고 있다). 그는 여호수아의 실존과 함께 그가 이 도시를 정복했음을 입증하고 싶었다. 땅을 파기 시작하자 파괴의 흔적이 여기 저기에서 나타났다. 알브라이트 박사에 의해 주전 140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던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설을 뒤엎는 증거들도 많이 발견되었다. 주전 1250년경의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로부터의 수입품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1963년 마사다 1963년 10월 13일 이가엘 야딘에 의한 본격적인 마사다 발굴이 시작된다. 이미 구트만에 의한 발굴시도가 있었지만, 마사다를 발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야딘이었다.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시피 마사다는 접근이 용이한 곳이 아니다. 마사다를 제대로 발굴하려면 우선 발굴장비를 실은 트럭이 올라갈 도로가 필요했고, 엄청난 수의 인력이 필요했다. 전직 군 참모총장으로서, 이스라엘 정관계에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진 야딘이 아니고는 누구도 마사다의 완전한 발굴에 도전할 수 없었다. 발굴과정에는 매일 2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참여했고, 이 자원봉사자들은 매 2주 단위로 교체되었다. 이스라엘군도 발굴작업에 참여했다. 수천 명에 달하는 모든 인적 자원을 돈으로 동원하려 했다면 최소한 수백만 달러가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야딘의 영향력은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새벽 먼동이 틀 때 식사를 마치자마자 시작되는 매일의 발굴작업은 저녁 6시까지 꼬박 계속되었다.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발굴팀의 작업 중에 야딘은 한번도 자리를 비우지 않은 채 작업전체를 총괄했다. 늘 위트가 넘치는 야딘이었지만, 시간관리는 엄격했다. 발굴팀에 참가했던 레온 샤리트는 "누군가가 지각을 하면 말이지요. 야딘은 자신의 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그 지각한 사람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면 그는 다시는 늦지 않았어요"라고 회고한다. 사람들은 종종 야딘이 지닌 두 개의 얼굴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발굴 중에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너무나 차가운 얼굴로 작업을 지휘하던 사람이 작업시간만 끝나면 스스럼없이 자원봉사자들과 어울리며 농담을 즐겼던 것이다. 발굴이 시작되면서 화살, 항아리, 옷, 머리털, 각종 동전 등 수백만 점에 이르는 젤롯당원들의 유물들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저항을 위해 모아진 돌멩이들도 나왔다. 헤롯이 처음 이 요새(궁전)를 건축했을 당시의 원형도 상당수준 회복되었다. 엘라자르의 연설에 나오는 것처럼 남아있는 식량들도 발굴되었다. 유골도 28구가 나왔다. 960명이 사망했는데도 28구의 시체만 나온 것은 대부분의 시체들이 마사다 함락 직후 불태워졌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2년간에 걸친 발굴작업은 세계 고고학 역사상 투탕카멘왕의 피라미드 발굴 다음가는 업적으로 기록되었다. 야딘의 우수성은 발굴 이후에 더욱 빛났다. 이 거대한 발굴작업을 솜씨 있게 정리하여 한 권의 책을 출판한 것이다. 그의 저서 "마사다"는 1966년 전세계에서 출판되었다. 야딘의 말년 1967년의 6일 전쟁 기간 중 야딘은 에쉬콜 총리이나 다얀 국방장관의 요청에 따른 조언을 제공하는 한편, 이스라엘 각지에 흩어진 고고학적 유물들이 전쟁의 불길에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같은 해 그를 다소 과장된 영웅으로 묘사한 어린이용 전기 "사막의 전사 - 이가엘 야딘 장군과 사해사본"이 미국작가 세인 밀러에 의해 출판된다. 그 뿐만 아니라 야딘의 존재는 서구의 많은 소설들(예컨대 1965년의 베스트셀러인 The Source같은 책)에서 고고학자인 주인공들의 모습을 "군사적, 학문적 영역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영향력도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도록 하는데 일조한다. 그는 이제 고고학자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1973년의 10월 6일 발발한 욤 키푸르 전쟁은 야딘으로 하여금 더 이상 정치를 외면하지 못하게 했다. 그 날 오후의 이스라엘 전역은 동원령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로 가득 찼다. 기습의 명수인 이스라엘이 기습공격을 당한 것이다.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에 집결하는 등 곳곳에서 전쟁의 기운이 감지되었지만, 6일 전쟁의 승리에 취해있던 이스라엘군은 이를 무시했었다. 전쟁 당일 야딘, 다얀, 주르, 라빈, 바르-레브 등의 전직 군 참모총장들은 전쟁상황실에 모여 이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11월 18일에는 대법원장 아그라나트(Agranat)를 위원장으로 한 위원회가 구성되어, 욤 키푸르 전쟁에 이르는 수개월 동안 이스라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의 행태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야딘도 5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야딘의 정치참여에 반대하던 아내 카멜라가 1976년 2월 18일 사망하자 5월 25일 야딘은 이스라엘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정계에 등장한다. 정치개혁의 꿈을 가슴에 품은 야딘이 창당한 "변화를 위한 민주당(Dash)"의 출발은 성공적이었고, 1977년 총선에서 15석을 얻는 돌풍을 일으킨다. 이에 따라 다음 해에는 메나헴 베긴이 이끄는 리쿠드 당 주도의 연정에 참여하여 부총리가 된다. 그러나, 카멜라의 권유는 옳았다. 야딘에게는 역시 정치가보다는 학자로서의 길이 어울렸다. 부총리는 실권을 갖지 못했다. 메나헴 베긴, 모세 다얀, 에제르 바이츠만이 뭉친 내각의 핵심세력은 중요한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야딘을 배제했고, 그의 당은 분열되어갔다. 새로운 당을 창당하던 때의 그의 이상은 무너졌고, 누구도 야딘에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다. 1981년 초라한 모습의 야딘이 돌아간 곳은 히브리대학의 연구실이었다. 1984년 야딘은 다시 하조르의 유적지를 방문한다. 그는 고고학자로서의 이력을 시작한 이곳에 다시 한번 도전하고 싶었다. 미국방문으로 기금을 모으는 등 정열을 불태우던 야딘은 6월 28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가엘 야딘은 자기가 가진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겸허함이 그로 하여금 군사와 학문 양쪽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기게 했다. 마사다와 이가엘 야딘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우리 역사연구를 생각하게 된다. 예컨대 북한이 김일성 우상화와 정치적 정통성 확보를 위해 단군릉 발굴을 뻥튀기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거기에 흥분하기보다 그 학문적 성과를 차분히 객관적으로 검토했어야 옳았다. 고고학적 발굴작업에 있어서만이라도 남북학자들이 교류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2,000년 전의 역사를 발굴하기 위해, 심지어는 3,300년 전의 역사를 복구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 역사도 그만 못할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삼국시대에서 헤매고 있다. 기성 학자들은 기를 쓰고 우리 역사의 기원이 상향 조정되는 것을 막고 있다. 정상적인 역사교육과정과 멀리 떨어져있는 재야사학자들만이 고대사의 복구를 위해 핏대를 올리고 있다.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가? 사실 마사다가 960명의 떼강도였는지 자유의 투사였는지 알게 뭔가? 그러나, 그걸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민족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참고서적 Nachman Ben-Yehuda, The Masada Myth (Collective Memory and Mythmaking in Israel),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95 David Bercuson, The Secret Army, Stein and Day/NY, 1983 Neil Asher Silveman, A Prophet from Amongst You (The Life of Yigael Yadin: Soldier, Scholar, and Mythmaker of Modern Israel), Addison-Wesley Publishing Company/ NY, 1993 Yigael Yadin, Masada, Random House/NY, 1966 Yigael Yadin, Bar-Kochba, Random House/NY, 1971 ------------------------------------------------------------------------------- - 홈페이지로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