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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5일 목요일 오후 07시 35분 05초
제 목(Title): 김두식/시오니즘운동과 벤 구리온 


시오니즘 운동과 벤-구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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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출발 

1906년 9월 7일 팔레스타인의 야파(Jaffa) 항에는 22세의 유태계 러시아인 다비드 
그루엔(David Gruen)이 배에서 내리고 있었다. 러시아 프론스크에 있는 고향집을 
떠난 그루엔의 옆에는 13명의 유태인들이 동행했다. 모두들 황폐해진 조상들의 
땅을 다시 비옥하게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내 땅과 내 백성을 
고치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이었다. 그들은 그 약속을 자신들의 노동에 
의해 성취하고 싶었다. 도착 다음 날부터 그들은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오렌지 농장이 위치한 페타 티크바(Petah Tikvah)와 리숀 
르-지온(Rishon le-Zion)에서 그들은 일용직 노동자에 불과했지만 열심히 일했다. 
함께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아랍사람들이었다. 그루엔이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루엔의 마음 속에 "이 땅은 우리 조상들의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기도 하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이 땅을 개간해야 
한다. 아랍인의 손으로 개간된다면 그것은 우리 땅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자라나고 있었다. 다른 많은 개척자들처럼 그루엔도 곧 말라리아로 쓰러졌다. 
의사는 이 나라를 떠나는 것만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을 버릴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는 대신 그 
청년은 자신의 이름을 히브리식으로 바꿨다. 그의 새 이름은 다비드 
벤-구리온(David Ben-Gurion)이었다. 벤-구리온처럼 1904년부터 1914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사람들을 보통 제2차 이민자(the Second Aliya)라고 부른다. 

벤 구리온 이전의 시오니즘 운동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유태인들이 디아스포라된 이후, 
팔레스타인으로의 유태인 집단 이민이 처음 이루어진 것은 1882년부터 1903년 
사이의 일이었다. 이를 보통 제1차 이민(the First Aliya)이라고 부른다. 19세기 
중반까지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태인의 수는 총 10,000명 정도였고, 그중 
8,000명 이상은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예루살렘을 벗어나 팔레스타인의 시골에 
유태인 마을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처음 시도된 것은 1878년의 일이었다. 그 전까지 
자신들의 출신지인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가족들로부터 원조를 받아 거지나 
다름없이 살던 예루살렘의 유태인들이, 먹고 살 것을 자급자족해 보자고 결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불충분한 경험과 자금의 부족, 질병, 그리고 
아랍인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곧 실패로 끝났다. 뒤이어 프랑스의 유태인 부호인 
로스차일드(Edmond de Rothschild) 남작의 자금지원을 받은 루마니아 출신의 
유태인들이 담배와 뽕나무를 재배하는 정착촌을 건설한 것이 1882년의 일이었다. 
1884년부터 러시아에서 유태인에 대한 박해가 극심해지자, 러시아로부터의 집단 
이주가 시작된다. 러시아에서의 유태인 집단이주를 주도한 운동이 "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Lovers of Zion)"과 "비루(Bilu, Beth Jacob Lechu Venelcha, '오 
야곱의 집이여, 와서 함께 가자'는 문장의 히브리어 약자)"였다. 그러나, 
러시아로부터의 집단이주는 여전히 소규모의 것이었다. 러시아를 떠난 유태인 중 
팔레스타인으로 향한 사람들은 2퍼센트에 불과했고, 나머지 98퍼센트는 안전한 
미국이나 영국으로 떠났다. 

1889년에 이르러 러시아에서 이주한 엘리제르 벤-예후다(Eliezer Ben-Yehuda)라는 
사람이 잊혀졌던 히브리어를 다시 찾아 사용하자는 매우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이에 동조한 일단의 동료들은 현대어에 맞는 히브리 단어를 만들기 위해 위원회를 
조직하지만, 이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00년 동안 쓰지 않던 언어를 
완벽하게 되살려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물론, 히브리어가 유태인 
가정에서 꾸준히 교육되어 오기는 했었다), 원래 히브리어에 없는 현대어를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이다. 특히 2,000년 전에 전혀 없던 각종 과학 
용어를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벤-예후다는 이 작업의 목적을 "삶의 
모든 영역, 즉 가정, 학교, 공공생활, 사업, 공장, 세련된 예술, 그리고 
과학분야에서 구어로 사용될 수 있는 히브리어를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규정했다. 
벤-예후다 뿐만 아니라 예멘에서 이주한 유태인 종교집단들도 이 작업에 동참했다. 
결국 이들의 노력으로 고대 히브리어는 현대 사회에 맞는 새로운 언어로 
재창조된다. 현대 히브리어를 재창조해낸 후 새로운 언어에 적응하려는 유태인들의 
노력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나이가 40세, 50세를 넘어 사실상 새 언어를 배우기가 
불가능한 사람들도, 일상생활에서 오직 히브리어만 쓰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어느 날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아버지가 갑자기 "우리 집은 오늘부터 
히브리어만을 사용한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면 사정없이 매를 치겠다. 내가 만약 
원래 쓰던 러시아어를 사용하면 너희들도 나를 때려라"고 선언하는 장면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실제로 많은 이스라엘의 개척자들은 이렇게 했다. 그런 식으로 죽은 
언어를 살린 것이다. 벤-구리온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름도 대부분 
히브리식으로 바꾸었다. 앞으로 나오는 유태인 이름 중에 유난히 벤-누구누구 하는 
이름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벤"은 아들을 의미한다. 즉, 
벤-구리온은 구리온의 아들 또는 구리온 가문 출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명한 
영화 벤-허의 주인공 유다 벤-허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겠다. 

현대 시오니즘의 아버지 데오도르 헤르츨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놀라운 움직임에 대한 사전지식이 별로 
없었던 헝가리 출신 유태인 저널리스트가 한 명 있었다. 파리의 한 신문사에 
고용된 그는 1891년부터 프랑스에서 벌어지고 있던 반유태주의(혹은 반셈주의, 
Anti-Semitism) 움직임에 큰 충격을 받는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프랑스군 
정보장교 드레퓌스를 반역혐의로 기소한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유태인 사회 뿐 아니라 유럽의 지식인 사회 전체를 들끓게 했다. 에밀 졸라를 
비롯한 프랑스 지식인들은 단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궁지에 몰린 드레퓌스를 
돕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 러시아에서 벌어지고 있던 
무차별적인 유태인 대학살과 함께 젊은 저널리스트의 심장을 끓게 한다. 그는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다. 이런 반유태주의 분위기에서 유태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우선 세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었다. 첫째, 자기가 속한 
나라에 완전히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 둘째, 반유태주의를 비롯한 모든 사회악을 
일소할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 셋째, 유태인들이 유태인 자신의 
삶을 누리고 살 수 있는 유태인들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  그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이 황당한 결론을 내린 저널리스트가 바로 현대 시오니즘 운동의 아버지 
데오도르 헤르츨(Theodor Herzl)이었다. 186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한 그는, 당시 나이 31세의 팔팔한 젊은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헤르츨의 이 황당한 아이디어를 듣고, 미쳤다고 말했다. 그의 
편지를 받은 로스차일드 남작은 이 말도 안되는 편지를 무시했다.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정착운동을 후원하고 있던 로스차일드였지만, 유태인 독립국가 건설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헤르츨이 만난 사람이 파리에 살고 있던 
또다른 신문특파원 막스 노르다우(Max Nordau)였다. 헤르츨의 이야기를 들은 
노르다우는 "당신이 미쳤다면, 우리 한번 같이 미쳐봅시다. 나도 끼워주시오!"라며 
적극적인 공감을 표시한다. 동지를 만난 헤르츨의 움직임은 더욱 바빠졌다. 그의 
목표는 유태인들이 지금 당장 유럽의 모든 나라들로부터 떠나 대규모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고 있던 오토만 
제국과 협상하여 팔레스타인 땅을 보장받은 후 이상적인 현대국가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1896년 그는 세계 시오니스트 기구(World Zionist Organization)를 
조직하고, 자신의 꿈을 담은 저서 "유태인 국가(Jewish State)"를 출간한다. 같은 
해 그는 이 꿈을 현실화하기 위해 오토만 터키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향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에게 
로스차일드 남작은 "제발 더 이상 터키를 화나게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이번에는 러시아 황제의 삼촌인 블라디미르 공작에게 편지를 
띄워 유태계 러시아인들의 팔레스타인 복귀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역시 
반응은 없었다. 심지어 보수적 유태인들조차 "이스라엘의 회복은 메시아의 강림 
때만 가능하다"면서 이 위험한 이상주의자를 경계한다. 팔레스타인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는 유태인들도 헤르츨의 방법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의 회복은 한 개 한 개씩 단계적으로 건설되는 정착촌에서 자신들의 땀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대규모 이주는 그들의 방법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타고난 낙관주의자 헤르츨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1897년 제1차 시오니스트 회의가 열린다.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이 
회의에는 아랍과 미국, 영국을 비롯한 24개 국가 출신의 유태인 대표들이 
참석했다. 여기서 헤르츨은 "우리는 언젠가 유태인들을 위한 피난처가 될 집의 
모퉁이 돌을 놓기 위해 여기 모였습니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이때부터 유태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그의 꿈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의 
노력은 1903년의 제6차 시오니스트 회의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이 젊은 
꿈쟁이는 과로와 질병의 제물이 되어 1904년 7월 3일 44세를 일기로 요절한다. 
그렇다고 시오니즘 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미 6차에 이르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을 비롯한 새로운 시오니즘 
지도자들이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이민자들의 정착 

벤-구리온이 팔레스타인에 도착하던 1906년은 팔레스타인의 유태인 사회가 
급성장하던 시기였다. 같은 해 러시아 출신의 예후다 메트만-코엔(Yehudah 
Metman-Cohen)에 의해 팔레스타인 최초의 히브리 고등학교가 야파에 세워졌다. 
교사 네 명에 학생 16명인 소규모 학교였다. 1908년에는 32세의 독일출신 법학자 
아르투어 루핀(Arthur Ruppin) 박사가 시오니스트 집행위원회 팔레스타인 
사무소(the Palestine Office of the Zionist Executive) 소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팔레스타인 토지개발회사를 건립한 루핀 박사는 팔레스타인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유태인들이 정착할 땅을 구하기 시작하고, 키네레트(Kinneret)에 최초의 농업교육 
농장을 건설한다. 키네레트 땅을 구입하는 자금은 유태국가기금(Jewish National 
Fund)에서 나왔다. 먼저 사들인 크파 히팀이나 벤 쉐멘의 농장 구입 자금도 모두 
여기에서 지원한 것이었다. 유태인들에 의해 세워지는 새로운 농장에는 사회주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소유자도 관리자도 없었고, 농장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농장 
구성원들이 동등하게 나누었다. 1909년 루핀 박사가 다섯 번째로 구입한 땅이 
데가니아(Degania)였다. 이곳에서 7명의 개척자들에 의해 협동농장 형태의 
키부츠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5년 안에 14개의 키부츠가 건설된다. 키부츠의 
확장에 따라 아랍인들과의 긴장도 고조된다. 1909년에는 아랍인들이 
세예라(Sejera) 농장을 습격하여 수명의 유태인들을 살해한다. 당시 벤-구리온도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때부터 유태인사회의 방어문제가 중요한 과제가 
된다. 그래서 조직된 것이 하-쇼머(Ha-Shomer, 파수꾼이라는 뜻)였다. 말을 잘 
타고 총기에 능한 젊은이들이 선발되었고, 아랍인과 코카서스인 복장이 혼합된 
옷을 입은 파수꾼들이 순찰과 방어를 맡았다. 하-쇼머의 모토는 "피와 불에 의해 
유대는 망했다. 피와 불에 의해 유대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라는 것이었다. 
1914년까지 팔레스타인에는 90,000명의 유태인이 정착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과 함께 아르투어 루핀 박사가 주력한 것은 학교의 
건설이었다. 이미 1902년 헤르츨이 예루살렘에 유태인 대학을 건립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불건전한 사상의 전파를 우려한 오토만 제국의 방해로 좌절된 바 
있었다. 1914년 루빈 박사는 "시온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금에 의해 예루살렘 
스코푸스 산 주변의 광대한 토지를 사들이는데 성공한다. 이 땅이 장차 히브리 
대학(1925년 개교)이 들어설 자리였다. 

 제1차 세계대전과 팔레스타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터키(오토만 제국)는 
독일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의 일원으로 참전한다. 전쟁은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악화시켰다. 영국,국방장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이처럼 
자기 고집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벤-구리온이 택하는 수법은 아프다고 
드러눕는 것이었다. 각료들이 찾아가도 "나는 아픈 것은 아니야.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뿐이야. 나는 사임할 거야"라고 뻗댔다. 전쟁은 아직도 지속중인데 총리가 
드러누워 버리니 곧 국정이 마비되었다. 결국 다른 사람들이 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갈릴리는 문제해결을 위해 자신이 물러나기로 했다. 갈릴리의 사임소식이 
들리자 마자, 벤-구리온의 병은 씻은 듯이 나았고, 곧 업무로 복귀한다. 다시 
찾아온 야딘에게 벤-구리온은 타협안을 제시한다. "남부전선 사령관 자리는 
비워두도록 해. 다만, 그 지역 공격 임무는 이갈 알론이 맡도록 하고..."  
타이틀은 없지만, 임무는 수행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벤-구리온의 고집과 다른 
정파에 대한 적대감이 그대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이쯤해서 나는 벤-구리온 이야기를 그만 하려고 한다. 사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15년간은 벤-구리온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벤-구리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이스라엘 초기 역사는 곧 벤-구리온의 역사인 까닭이다. 
앞으로 다른 사람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신물나게 벤-구리온의 이름을 들어야 할 
것이다. 벤-구리온 이야기를 더하면,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에 나는 벤-구리온에 대해 더 이상 적을 수가 없다. 그냥 간단히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고 벤-구리온 이야기를 마치겠다. 

벤-구리온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이스라엘 총리를 지내고, 후임자인 모세 
샤레트에게 잠시 자리를 내어주고 은퇴했다가, 1955년 총리직에 복귀하여 
1963년까지 이 자리를 지킨다. 1963년 에쉬콜에 총리직을 넘겨준 후에도 
라피(Rafi)당을 창당하여 재기를 노리지만, 실패하고 1973년 9월 29일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참고서적 

Jacob Abadi, Israel's Leadership, from Utopia to Crisis, Greenwood 
Press/Connecticut, 
1993 
Maurice Adelman, The Story of Ben-Gurion, G.P.Putnam's Sons, 1964 
Michael Bar-Zohar, Ben-Gurion: the Armed Prophet, Prentice Hall/ NJ, 1968. 
David Ben-Gurion, Israel, A Personal History, Funk and Wagnalls/NY, 1971. 
Dan Kurzman, Ben-Gurion : Prophet of Fire, Simon and Schuster/NY, 1983. 
Golda Meir, My Life, G.P Putnam's Son's/ NY, 1975 
Ralph Martin, Golda, Golda Meir: The Romantic Years, Charles Scribner's 
Son's/NY, 1988. 
Menachem Meir, My Mother, Golda Meir; A Son's Evocation of Life with Golda 
Meir, Arbor House/NY, 1983. 
Chaim Weizmann, Trial and Error, Harper and Brothers/NY, 1949. 
Ronald W. Zweig, David Ben-Gurion, Politics and Leadership in Israel, Yad 
Izhak Ben-Zvi/Jerusalem,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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