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5일 목요일 오후 07시 24분 58초 제 목(Title): 김두식/아우슈비츠와 엘리 비젤 아우슈비츠와 엘리 비젤 ------------------------------------------------------------------------------- - (엘리 비젤과 이츠하크 라빈 총리) 광주이야기부터 임철우가 지은 "봄날"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두 가지 상반된 욕구에 시달려야 했다. 하나는 각종 매체가 극찬하고 있는 이 책을 읽고 싶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더 이상 광주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대학가에서 80년대를 보낸 30대들은 대개 나와 비슷한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이제는 두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재판도 끝나고, 사면까지 이루어진 마당에 굳이 그 날의 역사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가? 20대를 충분히 어두운 시절 속에서 보낸 우리가 또다시 그 처절한 기억으로 돌아가 얻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일까? 그래서, 읽을 만한 책을 다 읽고 난 후, 더 이상 읽을 책이 없게 되어서야 마지못해 이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임철우의 작품은 나를 그날의 현장으로 이끌어갔다. 무엇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광주시민이 그 화창한 봄날에 느꼈을 비참한 고립감이었다. 1980년 5월,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공수부대 앞에 광주시민들은 '혹시 국군 복장을 한 무장공비들이 아닐까? 설마 국군이 저럴 리가 있나?'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만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진압작전이었다. 그보다 그들을 더 괴롭힌 것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권투중계나 쇼 프로그램을 내보내고 있는 언론이었다. 아무도 우리가 이렇게 죽어가고 있음을 모른다는 고립감은 이후 오랫동안 광주를 지배하는 정서가 되었다. '서울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외부로 이 끔찍한 소식을 알리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결국 대한민국은 침묵했다. 이 책은 광주의 실상을 처음 알려주었던 1985년 황석영 작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가 나왔을 때, 나는 대학가 서점에서 책을 산 뒤 마치 보물을 대하듯 책가방에 숨겨 집으로 가져와야 했다. 이 책을 가지고 있다가 불심검문에 걸리면 최소한 2-3일은 유치장에 있다 나올 각오를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봄날"을 읽을 때는 그런 공포를 가질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세상은 바뀌어 있었다. 광주항쟁 전야, 신군부에 의해 체포되었던 사형수가 지금은 대통령이 되어있다. 그러나, "봄날"의 내용은 1985년보다 더 심하게 나를 괴롭혔다. 어쩌면, 임철우의 "봄날"이 소설이었기 때문에 그처럼 생생하게 현장의 분위기를 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문학의 힘이다. 광주는 이제 과거가 되었는가? 광주를 아는 우리가 아우슈비츠(Auschwitz)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 공포분위기와 죽음의 냄새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스라엘 현대사 이야기를 하면서, 광주를 언급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스라엘은 광주민중항쟁과 같은 피바람 속에서 시작된 나라다. 광주의 고립감을 이해한다면, 아우슈비츠에 있던 유태인들의 고립감과, 그들을 구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국제사회의 침묵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유태인 사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 절망감과 분노, 그리고 가족을 잃은 비통함이 이스라엘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 아우슈비츠를 이해하고 나면,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이 나라 사람들이 보여준 믿어지지 않는 용기와 불굴의 투쟁을 이해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와 강제수용소 1940년 6월 14일 문을 연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태인 대학살(Holocaust)의 상징이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심지어는 노르웨이와 그리스로부터 끌려온 유태인들이 이곳에서 죽어갔다. 희생자 중 90퍼센트는 유태인이었지만, 폴란드인과, 집시, 소련군 전쟁포로들, 유고인, 동성연애자들도 함께 희생되었다. 매일 수백 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심할 때는 하루 1,000명 이상이 죽은 때도 많았다. 대부분은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첫 관문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다. 강제노역과 기아, 그리고 시도 때도 없는 처형으로 마치 파리목숨과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던 것이다. 1945년 소련군의 진주에 따라 해방되었을 때 이곳에서 살아남은 채 발견된 사람은 겨우 7,000명에 불과했다. 아우슈비츠가 나치 독일에 의해 건설된 첫 강제수용소는 아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부터 독일 도처에 강제수용소가 건설되었다. 1933년 2월 28일 히틀러의 요청에 따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국민 기본권을 유보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에 따라 나치당의 적들에 대한 광범위한 검거가 시작되었다. 이 조치는 기본권 유보의 기간이 특정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범위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하고, 서신, 전화, 전보의 검열을 허용하는 무제한의 것이었다. 영장 없는 가택수색과 검문검색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나치당이 도입한 것이 이른바 "방어적 구금(Schutzhaft, protective imprisonment)"의 개념이다. "방어적 구금"이란 나치즘의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공공의 적대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나머지 독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호라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표현인가? "방어적 구금"이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판 없이 투옥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이 제도의 첫 목표는 공산주의자들었고 뒤이어 사회당원들과 노동조합원들이 붙잡혀 갔다. 1933년에 이미 독일에는 다하우(Dachau), 존넨부르크를 비롯한 50개의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뒤이어 부켄발트, 플로센뷔르크, 라벤부뤼크, 작센하우젠 등의 수용소가 추가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수용소를 나치 친위대(SS)가 관장했으나 1934년 7월부터는 인종청소와 수용소 관리를 위한 특별부대가 조직되었다. 이 특별부대의 대원은 모두 친위대 중에서 선발되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오스트리아 내에 마우타우젠 수용소가 만들어졌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아우슈비츠, 나츠바일러, 리가 등의 수용소들이 만들어졌다. 모든 수용소들에는 수백 개의 공장과 탄광, 채석장, 주물공장들이 딸려있어 수용된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폴란드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는 친위대 대장인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Himmler)의 지시에 의해 건설되어, 히믈러의 심복인 루돌프 헤스(Rudolf Hoess)가 수용소장으로 일했다. 최초에는 폴란드 정치범들을 점진적으로 살해하기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으나, 1942년 유태 인종을 유럽에서 완전히 말살하려는 이른바 "유태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Final Solution of the Jewish Question)"이 수립되면서부터 유럽 전역의 유태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기 시작하고, 이때부터 아우슈비츠는 유태인 학살의 중심지가 된다. 학살자들의 논리 학살자들도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유태인은 전세계의 암적 존재였다. 처음 유럽에 나타났을 때 유태인들은 모두 빈손이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부를 축적하고 유럽 전체의 상권을 장악해 버렸다. 고리대금업을 통해 이웃의 피를 빨아먹는 "베니스의 상인" 샤일록이 전형적인 유태인이었다. 그들이 누리는 부는 마땅히 유럽인들의 몫이어야 했다. 우리 것을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날강도와 같은 존재들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배후에 있는 것도 분명했다. 우선 공산주의를 만든 칼 막스가 유태인이었고, 러시아 혁명에 뛰어든 사기꾼 중 다수가 트로츠키와 같은 유태인들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저주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성경에 나타나는 유태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예수가 유태인이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 않았다. 2천년이 다 되어 가도록 유럽 기독교 사회와의 통합을 거부하는 이들은 더 이상 구원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들은 인간이 아니라, 병원균이다! 생존력이 억세게 강한 병원균들로부터 유럽 사회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은 병원균을 제거하는 길밖에 없었다. 또한 학살자들에게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순수 아리아 인종으로 구성된 유토피아의 건설이 그것이었다. 이 새로운 유토피아에 유태인 같은 인간 말종들이 자리잡을 공간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쓰레기 하치장으로 보내야 했다. 그것만이 깨끗하고 청결한 유토피아 건설의 지름길이었다. "저 수전노들을 죽이자!" 이런 논리로 무장한 학살자들에게 있어서, 유태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적대감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저, 도시미화를 위한 방역작업의 일환으로 생각하면 되었다. 따라서, 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이 논리는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부터 시작해서, 평범한 독일인들의 마음에 새겨졌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 유럽 전역에서 붙잡힌 유태인들은 숨을 쉬기조차 어렵게 꽉 채워진 가축수송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길고 긴 여행을 한 끝에 아우슈비츠에 도착했다. 이미 게쉬타포(독일 비밀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이라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도 많았다. 열차 안에는 화장실도 없었고, 여행기간 중에는 물 한 방울 주어지지 않았다. 열차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열차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비르케나우)로 바로 연결되었고, 유태인들의 대부분은 이곳에서 바로 가스실로 갔다. 이렇게 도착과 동시에 가스실로 간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에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에서 정확히 몇 명이 죽었는지를 계산하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불가능한 일이다. "최종해결책"을 입안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과 루돌프 헤스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유태인들의 신속한 처리방법이었다. 처음에 총살형이 검토되었지만, 그 많은 사람을 총살형으로 처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태인들을 숲 속으로 끌고 가 땅을 파게 한 후 총살하여 묻어버리는 방법을 수개월간 실시해본 후의 결론이었다. 증거가 남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총살형을 집행하는 SS대원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선택된 방법이 가스에 의한 대량 학살이었다. 훗날 전범재판의 루돌프 헤스는 지클론 B가스에 의한 처리방법을 생각해낸 이후 비로소 "마음이 편해졌다"고 진술하고 있다. 1,500명을 죽이는데 필요한 가스는 고작 5 내지 7킬로그램에 불과했다. SS대원들도 마치 기생충을 박멸하는 기분으로 가스를 털어 넣으면 되었다.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이 훨씬 줄어들었다. 1944년 여름의 2개월 동안 헝가리에서 무려 40만 명의 유태인들이 몰려들어오면서 학살은 최고조에 달했다. 학살에 따른 문제는 시체의 처리였다. 시체 처리를 위한 화장시설이 마련되었고, 젊고 건장한 유태인 특별처리반원들이 밥을 굶어야 했다. 여기서 살아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매일 저녁 일하다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매고 돌아오는 것 이상의 고역은 없었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점호가 있었다. 이 시간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점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영하의 날씨에서도 어김없이 시행되었다. 통상 한 시간 이상 진행되는 점호이지만, 19시간까지 지속된 일도 적지 않았다. 때로는 손을 든 채로 점호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점호 도중 휘청거리거나, 쓰러지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 점호가 끝나면 저녁식사가 주어졌다. 300그램도 안되는 빵과 100그램의 돼지고기가 통상적인 식단이었다. 이나마 마지막에는 전혀 배급되지 않았다. 그리고, 밤이 오면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처벌은 가혹했다. 수용소를 관리하는 친위대원들은 유태인들을 가학취미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금이빨을 뽑아 빵과 바꾸려다 적발되거나, 정원에서 일하다 사과를 따먹거나, 침상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25대의 채찍질이 가해졌다. 이것이 수용소의 가장 기본적인 처벌이었다. 두 손을 뒤로 묶은 채 줄에 묶어 매달아 놓기도 했다. 1평방미터 규모의 개집 같은 방에 네 명을 몰아넣고 밤을 지새게 하기도 했다. 이런 곳에서 밤을 지샌 사람들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로 일터에 다시 투입되었다. 숨을 쉬기도 힘든 좁은 공간에 집어넣어진 39명의 사람들 중 20명이 죽어 나온 일도 있었다. 나머지 19명 중 4명도 이곳에서 나온 후 곧 사망했다. 게쉬타포가 때때로 방문해서, 유태인들을 조사했고, 가혹한 고문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레지스탕스 가담자들(또는 그럴 가능성이 있는 자들)에 대한 처형이 뒤따랐다. 탈출 시도자들도 즉각 처형되었다. 11블록에서 처형이 이뤄졌는데 주로는 공개처형이었다. 처형방법은 총살이나, 교수형이 보통이었지만, 굶겨 죽이는 일도 많았다. 아우슈비츠 안에도 레지스탕스는 있었다. 대개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저항운동세력이었다. 이 극악한 범죄를 세계에 알리려는 여러 시도도 있었다. 저항운동 지도자 중의 하나인 폴란드인 비톨드 필레키(Witold Pilecki)는 아우슈비츠로 들어가기 위해 바르샤바에서 자발적으로 체포되어 저항조직을 이끌었다. 1943년 탈출에 성공하여 폴란드 지하조직에서 싸우던 그는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연합군에게 알리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이후 앤더스 장군이 이끈 자유 폴란드군에 참여한 그는 종전 후 소련군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어 1948년 처형당했다). 일부 조직은 아우슈비츠 내 나치 전범들의 명단을 정리하여 외부로 내보내기도 했고, 다른 조직은 사진기를 밀반입하여 아우슈비츠의 실상을 찍어 내보내기도 했다. 이 때 찍힌 세 장의 사진을 보다보면, 생명을 걸고 이 사진을 찍었을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이 사진에는 흔들리는 앵글 속에서 발가벗은 채 뛰고 있는 여자들과, 발디딜 틈도 없이 쌓인 시체들 사이에서 화장작업을 하고 있는 특별처리반원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외부에 아우슈비츠의 참혹성을 알리려는 한 그리스 출신 유태인의 메모가 1980년에 이르러 땅속에서 뒤늦게 발견되기도 했다. 그도 역시 시체를 화장하는 특별처리반의 일원이었다. 특별처리반원들은 시체처리에 투입되는 동안 비교적 좋은 처우를 받았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레지스탕스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으므로 오래 이용되지는 않았다. 1944년 10월에는 자신들의 운명을 알게 된 특별처리반원들에 의해 주도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그들은 네 명의 유태인 여자들로부터 폭탄을 밀반입하여 가스실 하나를 폭파하고 몇 명의 SS대원을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가담자 모두는 곧 처형되었다. 그리고, 세계는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침묵했다. 때로는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이 정보들을 무시했고, 때로는 작전상의 이유를 들어 구출을 미뤘다. 나중에 밝혀졌다시피 연합군에게 있어서 나치강제수용소의 유태인들은 우선적인 고려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단순한 침묵만이 아니었다. 중립국이었던 스위스는 천신만고 끝에 국경선을 넘어 피신한 유태인들을 나치 독일로 추방했다. 그리고, 그 유태인들의 은행계좌에 대해 1997년까지 침묵을 지켰다. 미국도 유태인 난민들의 구호를 거절했다. 영국은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금지했다. 그들이 외면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나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나중에 유태인 난민 구호를 거부했던 것이 문제되자, 위 나라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그런 엄청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몰랐다"고 변명한다. 1945년 전세가 역전되고 소련군이 진격해 옴에 따라 아우슈비츠에 있던 6만 명의 유태인들은 주변의 다른 수용소로 분산된다. 이들의 이동수단은 자신들의 발이었다. 걷는 도중 쓰러지거나 뒤쳐지는 사람은 바로 총살되었다. 그리고, 소련군의 진주로 아우슈비츠는 해방을 맞았다.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1989년 프론트라인(Frontline)이라는 미국 프로에 소개된 한 기록영화 테이프(Memory of Camps)를 보고, 책 100권을 읽은 것 이상의 충격을 받았다. 1945년 나치 수용소에 진입한 영국군에 의해 제작되어 대영제국 전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이 테이프는 해방되던 당시 수용소(주로는 독일의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상황을 담은 것이다. 프론트라인 제작팀은 이 테이프를 전혀 가감하지 않은 채 그대로 방영했다. 영국군이 베르겐-벨젠 수용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 발견한 말라비틀어진 시체들만 해도 30,000구에 달했다. 영국군의 감시 아래 나치 친위대 포로들의 손으로 매장되고 있는 발가벗겨진 시체들은 마치 마네킹처럼 보였고, 인근 독일 마을에서 이 현장을 참관하기 위해 불려온 잘 차려입은 독일인들은 이 모든 일이 자기 책임은 아니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이 작업을 바라보고 있었다. 생존자들의 모습은 해골과 같았다. 그들의 초점 잃은 눈빛은 내 머리에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다. 더운물이 공급되자 사진기 앞이라는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훌훌 옷을 벗어 던지는 여자들의 모습도 충격이었다. 그들에게는 더운물로 목욕한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기쁨이었으므로 사진기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노벨평화상, 1986년 1986년. 이 수용소 출신의 한 소설가에게 노벨 평화상이 주어졌다. 소설가에게 노벨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이 주어진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엘리 비젤. 15세 때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가족을 그곳에서 잃고, 평생 동안 아우슈비츠의 기억을 전세계에 일깨우고자 싸워온 사람이었다. 엘리 비젤은 1928년 헝가리(현재는 루마니아)의 시게트 마을에서 태어났다. 시게트는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유태인 박해를 피해 헝가리로 도망쳐 온 유태인들이 1640년 이래로 거주해 온 마을이었다. 안식일이면 가게문을 닫고 회당으로 향하곤 했던 경건한 유태인들이 살던 곳이었다. 1944년 4월 이 마을에도 폭풍이 밀려왔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최종해결책"에 따라 시게트 마을이 포위되었고, 거주자는 모두 가축수송열차에 실려져 알 수 없는 곳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시게트에서 아우슈비츠로 시게트 마을의 유태인들이 모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 엘리 비젤 가족에게 도움을 주겠다고 말한 유일한 사람은 집안의 가정부였던 마리아뿐이었다. 교육받은 것도 전혀 없는 이 헝가리 여자만이 산 속에 은신처를 마련해 놓고, 비젤 가족에게 피신을 권유했다. 그러나, 비젤의 아버지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유태인은 결코 자신이 속한 유태 공동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유태인들에게 닥친 일이라면 우리에게도 닥치게 되겠지요"라는 것이 아버지의 대답이었다. 아이들이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마리아의 제안도 가족들이 떨어지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가족간의 뜨거운 유대감이야말로 지난 수세기 동안 박해자들의 손으로부터 유태인들을 지켜온 토대였다. 그러나, 이번 경우는 완전히 달랐다. 엘리 비젤은 1994년 출판된 그의 회고록에서 마리아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만약 다른 기독교인들이 그녀와 같이 행동했다면, 미지의 세계로 끌려가는 기차는 훨씬 덜 붐볐을 것이다. 만약 신부들과 목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면, 만약 바티칸(로마교황청)이 침묵을 깼다면, 적들의 손이 그렇게 자유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동포들(헝가리인들)이 걱정했던 것은 오직 그들 자신뿐이었다... 이 단순하고, 무식한 아주머니만이 이 도시의 지식인들과 권위자들, 그리고 공무원들보다 더 높이 우뚝 섰다. 나의 아버지는 이 도시에 많은 기독교인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시골뜨기 아주머니가 보여준 고결한 힘을 지니지 못했다. 그 도시의 명예를 지킨 것은 이 검소하고 신앙 깊은 기독교 여성뿐이었다." 열차가 도착한 곳은 아우슈비츠였다. 엘리 비젤은 자신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첫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수용소에서 보낸 그 첫날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 밤이 내 인생을 일곱 번 저주받고 일곱 번 봉인된 길고 긴 밤으로 이끌었다. 나는 조용하고 푸른 하늘 저편, 연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갔던 아이들의 얼굴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내 믿음을 영원히 소멸시켜 버린 그 연기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내게서 삶에의 의지를 영원히 빼앗아가 버린 그 밤의 침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나의 하나님과 나의 영혼을 죽이고, 나의 꿈을 먼지로 만들어 버린 그 순간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나는 내가 하나님 그 분 자신만큼이나 오래 살 수 있도록 저주받는다 해도, 결코 이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없다. 결코.("밤"에서 인용)"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11개월 엘리 비젤이 아우슈비츠에서 11개월을 보내는 동안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독일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눈물겹게 붙어 다녔다. 그들은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다른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있어 비젤의 존재는, 또 비젤에게 있어 아버지의 존재는 그들이 취재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알타레나호 사건(이 사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언급한다)이었다. 1956년 엘리 비젤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에 정착하고, 1958년 그의 첫 소설 "밤"이 불어와 영어로 동시에 발표된다. 이때부터 학살자들의 광기와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가 계속되는 것이다. 자신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순간에 대해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1945년 미군이 부켄발트에 도착하고 며칠이 지난 후 나는 처음으로 거울을 볼 수 있었다. 시게트 마을을 떠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춰지는 얼굴이 그 이전과 완전히 바뀌어 있는 것을 깨달은 나는 누군가 이 변화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얼굴과 지금의 얼굴에 대해 누군가는 말해야만 한다. 그 때가 글을 쓰게 되리라고 예감한 첫 순간이었다." 작품활동의 시작 이스라엘 "예디오트 아하로노트"지의 특파원으로 일하던 비젤이 침묵을 깨고 작품을 발표하기로 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동기가 있었다. 1954년 그는 신문사의 지시에 따라 카톨릭 소설가로서 1952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프랑소와 모리악을 인터뷰하게 된다. 이 때 모리악은 유태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리스도의 고통을 찬양하고 또 찬양한다. 이 순간 비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분노에 가득찬 비젤은 이렇게 소리친다. "10년 전 바로 여기서 멀지도 않은 곳에서, 유태인 어린이 한 명 한 명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한 것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더한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걸 이해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고요!"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자신의 수용소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엘리 비젤이었다. 그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외침에 이 노소설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노소설가와 비젤 사이의 우정이 시작되었고, 모리악은 비젤에게 그의 경험을 소설로 써볼 것을 권유한다. 이 권유에 따라 엘리 비젤이 1955년 완성한 것이 "밤"이다. 이 글이 우선 이디쉬어(독일어에 슬라브어, 히브리어가 합쳐진 언어로 유럽의 유태인들이 주로 사용한다)로 출판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1956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그리고 세계는 침묵해 왔다"라는 제목으로 먼저 출판되었고, 1958년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 영어와 불어판이 나왔다. 영불판의 제목이 바로 "밤"이었다. 모리악은 이 책의 서문을 썼다. 밤 엘리 비젤은 "밤"에 대해 "맹세컨대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은 진실이다"라고 증언한다. "밤"의 주인공 엘리제르는 바로 엘리 비젤 자신이다. 이 작품 속에서 주인공은 나치 수용소 속의 인간들이 극한상황 속에서 조금도 다른 사람을 생각함이 없이 오직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에 경악한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부모자식도 없었다. 약간의 빵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는 사람도 있었고, 아버지의 시체에서 필요한 물품들만을 꺼낸 뒤 아버지의 시체를 눈 속에 방치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제르는 자신만은 절대 아버지를 버리지 않기로 작정한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신과 인간의 관계가 단절되는 아픔 속에서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만은 결코 포기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경건한 유태교 신자였던 엘리제르는 수용소에서 이미 신이 죽었다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자기 자신도 아버지를 지켜줄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고, 엘리제르는 총체적으로 절망한다. 악이 폭발적으로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어떤 인간관계도 면역을 가질 수는 없다. 이것이 엘리 비젤이 도달한 결론이었다. 이 책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주인공이 마침내 자유를 얻는 것으로 끝이 난다. "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이것이다. 한 소년이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공개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의 보스는 카포 중 유일하게 사람들을 때리지도 않고 욕설도 하지 않던 친절한 네덜란드인이었는데 그가 바로 문제가 된 폭파사건의 주동자였다. 두 사람은 모두 게쉬타포에게 체포되어 수주 동안 심하게 고문을 받지만 결코 입을 열지 않는다. 결국 무기와 함께 발견된 두 명의 다른 죄수들과 소년도 공개처형을 당하게 된다. 두 명의 어른들은 죽어가면서 "자유여 영원하라"고 소리치지만, 소년은 침묵만을 지킨다. 어른들은 교수대에 목이 매달려 곧 죽지만, 소년은 몸무게가 너무 가벼웠기 때문에 목이 매달린 후 30분이 넘도록 쉽게 죽지 못한다. 이때 엘리제르의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고통스럽게 묻는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는 어디 있는가"라고. 엘리제르가 교수대 앞을 행진해 지나갈 때까지도 소년은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엘리제르는 아까와 같은 목소리를 듣는다. "지금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그리고, 엘리제르는 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그에게 대답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가 어디 계시냐고? 여기 그가 계시네. 그는 바로 저기 교수대에 매달려 계시네." 신은 죽은 것이다. 엘리 비젤의 회고록은 이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믿음을 포기한 적이 결코 없다. 나는 그의 정의와 그의 침묵, 그리고 그의 부재에 대해 저항해 왔지만, 그 분노는 모두 나의 믿음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그 바깥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다. 이 장면은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아우슈비츠의 경험은 엘리 비젤에게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했다. 죽음, 자살, 정신착란, 정치적 행동, 증오, 우정을 비롯한 무엇이든 적어낼 수 있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새벽"은 정치적 행동을 주제로 했고, 세 번째 작품 "낮"은 자살을 이야기했다. 네 번째 책 "벽 너머 마을"은 정신착란의 세계를 순례했고, 다섯 번째 작품 "예루살렘의 거지"는 역사와 회귀에 대해 서술한다. 새벽 그의 두 번째 작품 "새벽(1960년)"의 주인공 엘리샤는 이스라엘 지하조직의 일원으로 다음 날 영국군 대위 존 도슨을 처형하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조직원이던 다비드 벤-모세가 영국군에 붙잡혀 교수형을 받게 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지하조직은 존 도슨을 납치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최고 지도부는 지하조직 지도자인 "노인"에게 제발 존 도슨을 처형하지 말아 달라고 여러 경로를 통해 강요한다. 그러나, "노인"은 만약 데이비드 벤-모세가 처형당할 경우 즉각 존 도슨을 죽일 것을 엘리샤에게 명령한다. 다음 날 새벽 엘리샤는 존 도슨을 죽인다. 한때는 나치 수용소의 희생자였던 엘리샤가 이제는 오히려 사형집행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존 도슨도, 자기 자신도 모두 상황이라는 덫에 걸렸음을 깨닫는다. 만약 그가 존 도슨을 향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존 도슨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죽인 것이 존 도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다. 이 책에서 엘리샤의 동료 가드는 엘리샤에게 "이제는 유태인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아져야 하네. 더 이상 유태인도 희생자의 역할만 하고 있어서는 안 돼. 희생자가 되기보다는 그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키는 편을 택해야 하네"라고 제안한다. 바로 이것이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인 것이다. "이제 우리도 강해져야 한다. 우리도 우리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건국의 중요한 논거였다. 그러나, 엘리 비젤은 이 책에서 가드의 제안에 동의하기를 거부한다. 엘리 비젤의 결론은 이렇다. "유태인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논리는 과거에 대한 거부이며, 대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모독이다. 만약 유태인이 살인을 해야한다면 그것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마지못해 하는 것이어야 하며, 회한과 고민이 함께 하는 것이어야 한다." "새벽"은 매우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그 내용만은 상당부분 사실에 기초한 것이다. 나중에 메나헴 베긴(Menachem Begin)과 이르군(Irgun)의 무장투쟁에 대해 살펴보면 알겠지만, 제2차 세계대전 종전후의 팔레스타인에서는 실제로 이 소설과 같은 상황이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책에서 "노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바로 이스라엘 총리를 지낸 메나헴 베긴이다. 이르군 지도자였던 베긴이 동료들보다 조금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조직 내부에서는 "노인"으로 불려졌던 것이다. 낮 그의 모든 책은 나치 대학살에서 떠나지 못한다. 세 번째 책 "낮(1961년)"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다시 엘리제르가 등장한다. 나치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엘리제르는 10년 후 뉴욕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폴 러셀이라는 외과의사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이 책은 죽음의 편에 선 엘리제르와 삶의 편에 선 폴 러셀의 관계를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사고가 아니었다. 아직도 대학살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엘리제르는 뉴욕에서 캐서린이라는 여자를 만나 사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마치 행복한 것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가장하고 살기로 작정했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학살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캐서린과도 헤어지고 만다. 그에게 있어 삶이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결국 그가 택한 것이 택시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자살시도가 폴 러셀의 도움으로 실패하고 만 후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된다. 그가 다시 한 번 살아보기로 작정하면서 선택한 방법은 또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마치 행복한 것처럼 거짓말을 하며 사는 것이었다(정신과 의사들은 이러한 증상들을 강제수용소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엘리 비젤은 끝내 "하나님이 범한 가장 극악한 범죄-아무 이유 없는 살인"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책은 미국에서 "사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이 소설에서처럼 엘리 비젤은 1956년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바 있다. 아이히만 재판 1963년 엘리 비젤은 미국시민이 되었고, 1964년 집필과 강연을 위해 저널리스트로서의 활동을 중단할 때까지 이스라엘과 유태계 신문들을 위해 일한다. 저널리스트로 일하는 동안 그가 참여한 중요한 사건은 "최종해결책"의 입안자인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이었다. 그는 서너 개 신문에 기사를 써주기 위해 이 재판을 참관했다. 이 재판이 열리게 된 경위도 매우 드라마틱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로 도주했었다.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한 끈질긴 노력 끝에 1957년 모사드(Mossad, 이스라엘 비밀정보부)는 그가 아르헨티나에 거주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1960년 5월 마침내 아르헨티나로 날아간 이서 하렐(Isser Harel) 부장의 지휘 아래 아이히만을 납치, 이스라엘로 끌고 오는데 성공한다. 나치 대학살의 주범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이 작전에 참여한 요원들 거의 대부분은 자기 가족을 나치 수용소에서 잃은 경험을 가진 이들이었다. 모사드 요원들이 받은 지시는 아이히만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말라는 것이었다. 훗날 이서 하렐은 자기 요원들이 모두 아이히만을 그냥 죽여버리기를 원했다고 적었다. 아이히만 재판은 역사적인 것이었다. 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증인들이 세워졌고, 이들의 증언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이 재판을 지켜보는 동안, 엘리 비젤은 다시 한번 뼈아픈 기억을 되새기게 된다. 그 자신 시게트 마을에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는 동안, 역전에서 아이히만과 마주친 것이 생각난 것이다. 당시 아이히만은 이미 비워진 마을에서 더 이상 유태인을 수송할 열차가 없는 것을 애석해 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법정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있었던 프랑크푸르트 전범재판이나, 아이히만 재판에서 엘리 비젤이 느낀 것은 가해자들은 아무 죄책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유태인 대학살 문제를 다룬 프랑크푸르트 전범재판에서 피고인들 60여명은 재판기간 내내 웃고 있었다. 아이히만 재판 때의 아돌프 아이히만은 무표정한 얼굴로 뭔가를 긁적이고만 있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피해자인 유태인들이었다. 그들은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자기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해 평생동안 죄책감을 안고 살아갔다. 왜? 이 때부터 엘리 비젤의 관점은 피해자들에게 고정되었다. 가해자들은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1964년 이래로 엘리 비젤은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였다. 1968년에는 희곡 "잘먼, 또는 하나님의 광기"를 발표하였고, 뒤이어 "예루살렘의 거지", "한 세대 이후", "불 위의 영혼", "맹세"등의 작품이 발표된다. 1969년에는 비엔나 출신으로 역시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인 마리온 에르스트너 로제(Marion Erstner Rose)와 결혼하는데, 이후 로제는 비젤의 작품들을 영어로 번역했다. 학문적 활동도 계속하여 1972년 뉴욕시립대학의 유태 연구 교수로 임명되었고, 1978년에는 보스턴 대학 교수가 된다. 1979년에는 카터 대통령에 의해 대학살에 관한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임명되기도 한다. 1986년 12월 10일 엘리 비젤은 노벨 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한다. 이 시상식에서 노벨상 위원회의 에길 아르비크 위원장은 "당신은 당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신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입니다. 당신은 지금 인류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를 받는 이 자리에 당신의 아들과 함께 섰습니다"라고 엘리 비젤을 위한 연설을 한다. 엘리 비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넘쳤다. 아우슈비츠 이래로 얼어붙었던 눈물이었다. 무관심과 북한 수용소 문제 미국 PBS 방송이 제작한 도큐멘터리 "엘리 비젤의 초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는 무관심(indifference)입니다.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 아닙니다. 평화의 반대는 무관심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는 그의 말은 이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가 그토록 아우슈비츠에 집착한 이유는 그저 자신의 경험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일관된 주장은 "기억되지 않는 역사란 반복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역사의 오류를 되새기고 기억하는 것만이 동일한 오류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히틀러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모두 600만 명의 유태인이 희생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기껏해야 400만 명에서 500만 명밖에 안되는 인구를 유지하고 있음을 생각하면(현재 575만 명), 정말 엄청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유태인 대학살은 600만에 이르는 사람을 죽였을 뿐 아니라, 생존자도 남겼다. 살아남은 이들의 죄책감은 깊고도 깊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향했다. 어차피 돌아가 봐야 아무도 없는 고향으로 가느니, 이스라엘 독립국가 건설에 투신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다. 이 희생의 기초 위에서 건국된 나라가 이스라엘이다. 유태인 대학살을 이야기하면서 꼭 한마디하고 싶은 것은 북한의 강제수용소 문제이다. 나는 언젠가 통일이 된 이후 북한 정치범 수용소 생존자들로부터 "당신은 그 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질문 받게 되는 것이 두렵다. 이미 몇 차례나 그 생지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의 증언이 있었건만 우리는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 아우슈비츠의 비극과 다를 것이 없다. 나치 독일의 유태인 대학살은 전세계의 공모와 묵인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던 범죄였다. 우리는 남도 아닌 우리 동족이 그런 처절한 대접을 받고 있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참고서적 Yehuda Bauer, A History of the Holocaust, F.Watts/NY, 1982 Ted Estess, Elie Wiesel, Fredrick Ungar Publishing Co./NY, 1980 Isser Harel, The House on Garibaldi Street, Bantam/NY, 1975 Teresa Swiebocka, Auschwitz, Indiana University Press/Bloomington, 1993 Elie Wiesel, The Accident, Hill and Wang/NY, 1962 Elie Wiesel, Dawn, Hill and Wang/NY, 1961 Elie Wiesel, Memoirs (All Rivers Run to the Sea), Alfred Knopf/NY, 1995 Elie Wiesel, Night, Hill and Wang/NY, 1960 ------------------------------------------------------------------------------- - 홈페이지로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