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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7월 14일 수요일 오전 02시 30분 34초
제 목(Title): 퍼온글/박준성 메이데이의 유래와 의의


 특 집 
메이데이의 유래와 의의
박 준 성
  
1. 메이데이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메이데이는 매년 5월 1일 전세계 노동자들이 파업과 집회 시위를 통하여 노동자들의 
힘을 과시하고 노동자들 앞에 놓여 있는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노동자 단결의 
날, 노동자 투쟁의 날, 노동자 국제 연대의 날이다. 지나온 투쟁을 기념하고 
단결을 확인하는 노동자 축제의 날이기도 하다.
1889년 7월 세계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파리에 모여 결성한 제2인터내셔날  
창립대회에서 메이데이가 결정되어 1890년 제1회 대회를 치른 후 지금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이날을 기념해 오고 있다.
메이데이는 19세기 후반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서 싼 임금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하던 유럽과  미국의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쟁취한 노동자의 날이다.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하면서 처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노동자는  노동을  통하여 사회의 모든 물질적 재화를 생산한다. 노동자는 노동을 
중지하여 세계를 정지시킬 수 있는 존재다. 노동자는 고대사회의 노예처럼 '말하는 
도구'로서 물건취급을 받거나, 중세사회의 농노처럼  태어 날  때부터 신분 차별을 
받지는 않는다.
이러한 노동자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후 자본주의 발전과 더불어 어떠한 처지에 
있었을까? 엥겔스
는 자본주의가 가장 앞서 발달되었던 영국의 1844년 노동자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 노동자의 가족은 판자집이나 지하실의 구질구질한 방에서 살고 있었다. 조그마한 
집에서 두 가족 이상이 살기도 하였다. 그나마 자기 집을 가지고 산다면 행복한 
편이었다. 많은 노동자가 움막 속에서 함께 합숙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없어서 
공원의 벤치나 길거리에서 밤을 세우기도 했다. 먹는 것은 형편 없었고, 입는 것 
역시 누더기 였다. 아버 지가 받는 쥐 꼬리만한 임금으로 한 가족을 부양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때문에 젖먹이를 가진 어머니조차도 일터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고, 집에 남은 어린아이는 배가 고파서 아무리 울어도 젖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온종일 울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니들 
사이에서는 우선 어린아이가 우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아편을 넣은 약(팅크)을  
먹이는  것이  유행했을  정도이다. 이것을  먹이면  위가 마비되므로  어린아이가 
배고픈 것을  느끼지 못해 울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을 먹이면  체질이 
약화되어 어린아이의  사망률이 매우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도 
가까스로 살아  남게  된  아이들은  6-7세가  되면 공장이나 탄광으로 일터를 
찾아 나가야만 했다. 특히 탄광의 갱도에서는 말을 이용하여 수레를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혁대로  자기 몸과 석탄 상자  4-5개를 묶어 수레를 
끌어내는 일을 했다.  더우기 하루 종일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굴 속에서 
중노동으로 시달리게 되니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아  기형적인 신체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구루병에 걸리는 것은  보통이었다.  국민학교도 못  가고  
바로  공장에 들어가  어른들 틈에 끼어 밤늦게까지 기계 앞에서 기계와 씨름하게 
되니 몸을  망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정상적인  발달이 
불가능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엥겔스,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 
1845)
12시간 -  16시간 노동으로 인하여 노동자는 등뼈와  다리가  휘거나, 각종 
관절염과 동맥경화  등의 병세가 번지고,  병약하고 허약한  체질이 널리  번졌다. 
여성들은 장시간  노동으로  골반이  기형화되어 유산이 잦았다.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수명이 25세이고 40세  정도는  노인으로 취급할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오랜시간 일하면서 주의력이 떨어지고 졸면서 일하게 되어 산업재해가 엄청나게  
발생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러한 모든  것을 노동자의 부주의로 돌려 버렸다. 피곤에  
지쳐 깜박 조는 사이에 여성노동자의 긴머리가 기계에 말려 들어가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자본가들은 공장에 취업하려면  머리를 자르고 오라고  
강요하였다. 싼 임금이라도 벌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취직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싹둑 잘라 버려야만 했다. 싹둑 자른 짧은 머리가 보기 싫어, 볶아 올린 
여성노동자의 '파마'머리에는 이러한  자본주의  성립과  발전의  역사가 깃들어 
있다.
 장시간 노동은  여가 생활을 전혀 허용하지 않아 정신까지도 갉아먹어, 성적인 
문란, 어린의  도덕적 타락, 지나친 음주 등 절망적이고 패배적인 생활을 강요 
하였다. 봉건사회가 무너지고 자본주의 사회가 성립되면서 '자본은 머리에서 발 
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났다'. 노동자는 토지와 
인신적 예속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이는 진정한 의미의 '해방'은 아니었다.
노동자는 노동을  통하여 모든 부를 생산해 냈으나, 자신이 생산한 노동의 과실을 
결코 향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 아래서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안되는 또 다른 '노예생활'-'임금노예'의 
시작이었다.
처음에 노동자들은  자신을 이러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 기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은 기계를 적으로 생각하고 기계파괴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기계를 때려 
부수어도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파괴된 기계는 곧 복구되고 자본가들은  계속 
새로운 기계를  들여왔다. 노동자들은 곧 노동자의 적은 기계가  아니라 기계 
뒤에  숨어있는 자본가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결하여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올리 도록 
싸웠다. 이에 대해 자본가들은 정부로 하여금 '단결금지법'을 만들도록하여 
노동자를  탄압하였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위한 법률과 정치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1838년부터 1848년까지 10여년 동안 
인민헌장운동(차아티스트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1847년 
'10시간노동법'을 싸워  얻었다. 그런데 1850년 영국의 최고 재판소는 
'10시간노동법'을 사실상 무시하는 판결을 내렸다.  노동자들은 다시싸워 1853년 
새로운 법을 선포케하고, 교대제도를 근본적으로 금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비로서 10시간 노동은  성인남자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은  자본주의 사회가 제국주의  단계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자본주의가 
앞서 발전했던  영국에서는 그 당시 노동시간이 10시간으로 법제화되었으나 
미국.독일.프랑스  등지에서는  아직  14-15시간 노동이 보통이었다. 거기다가  
기계가  발달함에  따라  생산은  단조로와지고 노동강도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한편 산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노동자가 한 공장에 집결하게 되어 
노동자의 단결력도 높아졌다.
노동자들은 8시간 노동하고 8시간 잠자고 8시간 휴식할 수 있는 8시간노동제를  
확보하기  위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1856년 호주 멜버른의 숙련 노동자들은  
단결된 힘으로 8시간 노동제를 먼저 쟁취하기도 하였다.
1864년 9월  28일 노동자계급 최초의  국제조직인 국제노동자협회  (제 
1인터내셔날)가  런던에서 창립되
었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창립선언에서 세계노동자들의 경제.정치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 그리고 규약에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이 쟁취해야 하며,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은  
일체의 계급지배를 폐지하기 위한  투쟁이고, 노동해방은 국지적인 문제나 한 
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나라  노동자계급의 연대와 실천적.  이론적 협력을 
퉁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강령 제1항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법으로 
제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8시간 노동제야말로 국민의 근간을 이루는 다수  
노동자가 체력과 건강을  회복하여  활기찬  노동을 지속  할 수 있고, 인간으로서 
사회적 교제와 지적.도덕적.정치적 활동이 가능한  시간을  확보하여  노동해방을 
향해 나갈수 있는 발판이라는 것이다.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라는 요구가 
국제노동운동에서도 중요한 목표의 하나로 된 것이다.
19세기 후반  미국 노동자들의 생활도  다른 나라 노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해 넣고, 구미를  
돋구겠다고 원숭이탕을 해먹으며,  100달러짜리  지폐로  담배를 말아피우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7-8달러 임금을  받아  매달 10-15달러하는  허름한  
판자집이나 다락방의 방세 내기도 벅찼다. 자본가들이 흑갈색 강아지에게 1만  
5천달러짜리 다이아몬드  박힌 목걸이를 걸어주고  사륜마차에 태워 공원을 
산책하거나 7만 5천달러짜리 쌍안경으로 연극을 관람할  때, 노동자들은 새벽  
5시가  되면  천근같이 고단한  몸을 애써 일으켜  어둠이 기시지 않은  십리길을  
걸어  공장엘 가야했고  밤이 깊어서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웃간에 
찾아다니며 서로 사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노동자들은 조직과  투쟁으로 1868년 하루 8시간 노동법을 쟁취 하였다. 그러나 그 
법률은  법의 형태를 취한  정치적 사탕발림에 지나지 않았다. 8시간노동제가 
법으로 정해졌다  하여 곧바로 실행되는  것을 의미
하지는 않았다.  8시간 노동제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역량과 
계속적인 투쟁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적은 똘똘 뭉쳤는데 
노동운동세력은 그렇지 못하였다. 정치권력과 자본가들은 깊이 유착되었으나 북부 
노동자들은  남부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결과가 자신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였다. 노동운동의 발전은 더디었다.
1884년 미국노동총동맹은  연차총회를 열고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하고 
노동일을 줄이기  위해 1886년 5월  1일 총파업을 단행하기로  결의 하였다.  5월 
1일이 가까와지면서 노동쟁의가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집회. 시위가 줄을 이었다.   
노동자들은 횃불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났노라
그들의 행군을 보라  모든 압제자들이 떨고 있구나
저들의 권력도 사라졌구나  그대 노동기사들이여 요새를 향하여
돌진하여라 승리를 위해  압제자의 법같은건 쓸어버리고
만인의 평등한 권리를 위해 
자본가들의 사병(私兵)과 다름없는 경찰은 노동자들을 탄압하기에 눈이 벌개 
있었으나  5월 1일 파업할 것을 결의하는 노동자의  숫자는 날마다 수천명씩 
늘어났다.
마침내 약속한 날 1886년 5월 1일(토요일), 전국에서 34만명의 노동자가 
시가행진에 참가하였으며 19만명이 파업투쟁에 참가하였다. 시카고에서만도 
8만여명이 8시간노동, 8시간 휴식, 8시간 교육을 요구하면서 시가행진에  
참가하였다. 이날 시카고에서는 공장의 기계소리, 망치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장 굴뚝에서 솟아오르던 연기도 보이지 않았다. 노동자가 쉬자 상가는  문을 
닫았다.  운전수들도 따라 쉬었다. 노동자들이 노동을  멈추면 세계가 멈춘다는  
위력을  생생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노동자들은 감격에 겨워  어깨걸고  눈물을  
흘렸다. 단결된 자신들의 힘에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우리도 이제 노동일은 않을 테야  일해 봐도 보람도 없는 그런 일은 않을 테야
겨우 연명할 만큼 주면서 생각할 틈조차 안 주다니,  진절머리가 난다네.
우리도 햇빛을 보고 싶다네.  꽃냄새도 맡아 보고 싶다네.
하느님이 내려주신  축복인데 우린들 아니  볼  수  없다네. 
우리는 여덟시간만 일하려네.  조선소에서, 공장에서, 그리고 점포에서  우리는 
힘을 길러 왔다네.  이제 우리 여덟시간만 일하세.  여덟 시간은 휴식하고,  남은 
여덟 시간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해 보세. 
그동안 신문에서는 계속 5월 1일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협박하였으나 행사는 
평화스럽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노동자들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폭력사태를  빌미로 노동운동을 탄압하려고  벼르고 있다 허탕을 친 경찰쪽에서 
먼저 일으켰다.  5월 3일  파업 농성중인 '맥코믹농기계공장'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총을 쏘아 어린 소년까지 포함하여 여섯명을 죽인 것이다.  독점자본의 앞잡이 
경찰이 학살만행을 저질렀다.  5월 4일  저녁 '헤이마키트광장'에서는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항의 집회가 열렸다. 밤이 깊어지고  집회가 끝나가자 군중들은 
자리를 많이 떴다.  날씨는 음산했다. 호수쪽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에 섞여 빗
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노동운동  지도자 가운데 마지막 연사가  열변을 
토하였다. 그때  광장 옆으
로부터 180여명의  기동대원들이  군대식으로 대오를 짓고 방망이를 들고 다가 
왔다.  몇몇 청중은 달아나기 시작했다. 경찰서장이 해산을  명령하자 노동자들은 
평화적  집회라고  항의하였다. 잠시 긴장이  감도는 순간 밝은  섬광과 함께  
폭음이  울렸다.   누군가 폭탄을 던졌다.  경찰은 미친듯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이날밤 몇 명의 경찰과 상당수의 노동자가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자본가들과 
그  앞잡이 언론들은 즉각적인 보복을 해야한다고 흥분하고 있었고 목사들도 
덩달아 춤을 추었다.  경찰은 노동조합과 노동자 단체의 본부와  사무실을  
습격하였다.   미친듯이  전국적으로  수배망을  펴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검거에  눈이 벌갰다.  이  사건을 기소한 쥴리어스 S.그리넬 검사는 "법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일제  검거부터 실시하라"고 지시하였다.  헤이마키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잡혀  들어간 노동운동  지도자들에 대해  6월 21일부터 
공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은 몇주일씩 질질 끌었다. 그들의 심리에 충분한  법적  
절차를  밟고  있다고  선전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마지막  재판에서  
노동운동  지도자  파슨즈는  헤이마키트 사건이 독점자본가들의 음모라고 
폭로하였다. 
그렇다...  나는  지금은 비록 임금을  받아 먹고 사는 노예에 지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  노예 같은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스스로가 노예의 주인이 
되어 남을 부리는 것은, 나 자신은 물론 나의 이웃과 나의 동료들을 역되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의  하나다...   만약에 인생의 길을  달리 잡았다면, 
나도 지금쯤 시카고 시내의  어느  거리에 호화로운 저택을  장만하고 가족과 
더불어  사치스럽고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노예들을 시켜서 내 대신 
일하도록 부려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길을 걷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여기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죄인 것이다. 
파업하는 노동자에게  폭탄을 던지라고 제일 먼저 말한 것이 누구인가? 
독점자본가들이 아니었던가.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놈들에게  총알   세례나   퍼부어라"고   말한   것은   누구였던가? 
펜실베니아 주지사인 톰 스콧트가 아니었던가.  "놈들에게 흥분제나 먹여 주라"고 
말한 것은  누구냐?  [시카고 트리뷴]지가 아니었던가.  그렇다. 그들이 
주모자들이다.  ...  5월 4일 헤이마키트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바로 그 
자들이다.   8시간 노동 추진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뉴욕으로부타 특파된 
음모자들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   재판장, 우리는 단지 그 더럽고 
악랄무도한 음모의 희생자들이요. 또 한  사람의 노동운동 지도자  스파이즈는 
다음과 같이  감명깊은 최후 진술을 남겼다. 만약 그대가  우리를 처형함으로써 
노동운동을  쓸어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목을 가져가라! 
가난과 불행과  힘겨운 노동으로 짓밟히고있는  수백만  노동자의  운동을  
없애겠다면  말이다! 그렇다, 당신은  하나의 불꽃을 짓밟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의 앞에서 ,  뒤에서 ,  사면  팔방에서  끊일줄  모르고  불꽃은  
들불처럼 타오르고 있다,  그렇다, 그것은 들불이다.  당신이라도 이 들불은 끌 수 
없으리라 ........ 이제 나의  사상에 대해 말해 두겠다.  그것은 나의 일부이다.  
나는 그것을 버릴 수  없다.  아니, 버릴 수 있더라도 버리지 않겠다.  그리고 
그대가 만약 이같은  우리의 사상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만약  
우리를  교수형에  처함으로써  우리의  사상을  부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  만약 그대가,  진리를 말했다고 해서 그 국민을 사형에 처하기를 원한다면 
...  나는 기꺼이 나의 목을 그대에게 주겠노라!  자, 어서 사형집행인을  
불러라!   ... 진리를  말하다  죽은  선인들이여, 소크라테스여, 예수  
그리스도여, 죠르다노 부루노여,  그  밖에  진리를 위해  싸우다 죽은 수  많은 
선조들이여, 그들은 죽었으되 진리는 영원히 살아 있다.  나도 그들의 뒤를 
따르겠다.  모든 준비는 끝나 있다.  어서 사형집행인을 불러라! 
1887년 11월  11일 파슨즈, 스파이즈,  피셔 및 엔젤은  교수형,  니브, 슈와브 
및  필덴은 장기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링은 그  전날 감옥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국은  그를  자살로  처리하였다.   교수대에서 스파이즈는 " 
언젠가  우리의 침묵이  오늘  우리를  목매다는  당신들의 사형명령보다  훨씬 
강력해지는 날이 오고야말것이다"라는 짤막한  말은 남기고  올가미에 걸려 
허공에  매달렸다.  그들을 처형한  것은  당시의 독점자본가들이었다.  
독점자본가들은  전국적인 노동자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이들을  제물로   
이용한   것이다.    그들은   헤이마키트사건을 노동자들이 이룩하고자하는 
'악'을 방어하기 위한 폭약으로 이용하였다.  뒷날  1893년   일리노이주  지사는  
스스로  당시의  재판기록을  전부 읽어보고  분석한 결과  여덟명의  피고는  
무죄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사형을  면한  6명을  무죄로  석방하였다.   
여덟명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유죄 판결은 조작된 허위였다.  그 사실은 
오늘날 미국 노동부의 노동운동사 교과서조차  인정하고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법은 여기서만  그치지  않았다.   그후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자본가들은 이러한 수법을 되풀이 사용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    1889년 
파리에서는  세계 20개 나라에서  391명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여  
제2인터내셔날을 결성하였다. 제2인터내셔날은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날)가 
1876년 미국  필라델피아  회의에서 해체된 이후, 나라  마다 노동자의 주체적  
역량과 자본주의 발전 정도에 따라 독자적으로  노동운동을 전개해 오다가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지향하는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1889년 7월 14일 창립된 것이다.  
이  날은  바스티유  감옥  함락,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였다.   
창립 대회가 열린  '페드렐 홀' 연단위에는 황금색으로 쓰여진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문귀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고, 전면에는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경제적  수용 - 생산수단의  사회화'라는  구호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대회에서는 8시간  노동제를 확인 .요구하고,  상비군 대신 국민군을 제안하고, 
국제노동입법의 제안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조합 지도자 레이몽  
라빈느의 제의에 따라 1890년 5월 1일을 기해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동시적으로,  1일  8시간 노동의 확립을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대규모  국제적  
시위를  조직한다' 결의하였다.  이  결의는 미국노동총동맹이 1890년  5월 1일에  
계획하고 있던  8시간노동제를 위한 전면적  투쟁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결의에  따라  5월  1일을  세계  노동자계급의 국제적인 
시위, 투쟁의 날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 8시간  노동이 노동력을 보다 새롭게 하는 활기를 주고, 인류의 퇴 화를 
방지하고, 대다수  노동자로 하여금 인간다운  지적.도덕적  생활로 이끄는 
수단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  더욱 명백해졌다.  우리는 노동자가 이 절박한 시위  
운동에 참가하여 이 희망을 실현시키려는 우리의 의사를 더욱 강고하게 할 것을 
주장한다.  5월 1일은 파업을 하자!  5월 1일은 시위 운동을 하자!  메이데이를 
축복하자! 

  
2.    메에데이 행사는 어떻게 치뤄졌는가  ? 
1890년 5월  제1회 메이데이부터 많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노동자들은 각국의  
형편에 맞는 형식과 방법으로 대규모의 메이데이 행사를 벌였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는 1일  총파업의 형태로 5월  1일을 기념하기로 결의하였고, 
독일과 영국은  5월 첫째 일요일을,  그리고 다른  대부분의 나라는 5월 1일 
저녁에 대중집회를 열었다.  메이데이 행사에  결집한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고 외치며 파업.  집회.시위를 벌였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위력에 눌려 벌벌 떨면서도 자본가들은  메이데이 기념시위를 
중지시키려고 갖은 애를 다썼다.  자본가들의 언론은  터져나올것만 같은 혁명의  
분위기에  대한 공포를 음울하게 그려댔다.  자본가들과 결탁한 국가권력은 경찰과 
군대, 대포까지 출동시켜  파업시위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감옥에 잡아 
넣었다.  곳곳에서 메이데이 행사는 피로 물들어졌다.  그렇다고 행사가 
멈춰지지는 않았다.  이날 여러  나라의 수도와  산업도시에서  기계가  
멈추었다.   
탄압이 극심한  곳에서도 노동자들은 산림  또는  도시  근교에  모여  비밀리에 
메이데이  행사를  치루면서  기아와  빈궁과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투쟁하였다.  첫 메이데이  투쟁이 노동자의 국제적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모든 나라에서  특정적인  날   동시에'  집회를  열기로  한  결의에  완전히 
부합되지는  않았으나, 인터내셔날  총회의  결의가  수백만의  노동자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1890년 5월  1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는  5만명의  
노동자가 시위에  참가하였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80만명의  노동자가 
동맹파업을    결행하였다.    벨기에에서는    34만명이    참가하였다. 
독일에서도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행사에서  자본가들과  싸움을  벌여 나갔다.  
이탤리에서는  메이랜드,  튜린  등지에서  수십만  노동자들이 밀집된 대오를 
짜고  거리를 행진하였다.  러시아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정치투쟁을  
벌였다.  프랑스에서는 노동자들이  전국 1벡 38개 도시와 곳곳의 광산지역에서  
일손을  놓고  1871년  파리콤뮨의  전통과 경험을 이어 받은 파업,집회,시위를 
감행하였다.  영국에서는 5월  첫째 일요일에 메이데이  행사를  치루었다.   
런던의 심장부인  하이드 파크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관람한 엥겔스는 "중앙 
위원회의 7개 연단  주위로 수십만 이상의  노동자가 음악과 깃발에 맞춰 끝이  
보이지  않게   빽빽하게  밀어  닥치고,  비슷한  숫자의  군중이 개벽적으로   
몰려들어  가세하였다."라고   그날의  모습을   묘사하고 메이데이는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는  사건'으로서  "영국의  노동자가 바야흐로 거대한 국제적인 
대열에 합세하고, 드디어 오랜 겨울 잠에서 깬 차티스트 후손들의 전투대열에 
들어섰다."라고 환호하였다.  1891년 제2인터내셔날 제2회 부뤼셀 대회에서 노동자 
대표들은 메이데이 날짜에  대하여  격렬한  토론을  벌였으나  결국  5월  1일로  
확정하고 메이데이 기념의 의의와 성격을 다시 확인하였다.  그리고 8시간노동제와 
함께 노동자를 전면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힘을  쏟자고 결의하였다.또한 1893년 
제3회 츄리히  대회에서도 메이데이시위가 8시간  노동제  쟁취와 함께 노동자가  
사회변혁을 통하여  제국주의적  대립을  분쇄하여  모든 국민과  국
제 평화를 이끄는  데 힘쓰는 투쟁이어야  한다고 결의하였다.  그 후  1896년 
런던,  1900년  파리,   1904년  암스테르담,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를 
거치면서 메이데이의 이념적 토대를 더욱 강화시켜 나갔다.  1902년 아르헨티나  
총동맹은 메이데이  시위를  거행하여  5월  1일을 공휴일로   지정할  것을  
요구하는   투쟁을  벌었다.   1913년  멕시코 노동자들은 메이데이 기념식에서  
일요일을 휴일로 할 것과 8시간 노동을 요구하며  싸우다가  권력의  탄압으로  
감옥에  잡혀갔다.   러시아에서 1904년과 1905년에 레닌은  노동자들에게  
메이데이의  의의를  설명하고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짜르 전제 정부와 자본가적 
착취계급을 타도하고 사회주의사회로 전진해 가자는  글을 보내 투쟁을 
고무시켰다.(*자료) 그 후 1912년, 1914년  메이데이에  러시아에서는  각각  
40만명,  50만명이 시위에 참여하여 짜르 전제 타도 싸움을 벌였다.  메이데이는 
각  나라  노동자들의  역량이나  노동운동의  수준과 그에 상대되는  자본가들과 
국가권력의 탄압에  따라  치루는  행사의  내용과 목표에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1890년대 이래  메이데이는  여러  나라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와 단합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굳어졌으며 노동운동을 고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메이데이 성립이  8시간노동제 확립 투쟁에서  비롯되었듯이 여러 나라 
메이데이  투쟁에서  중요한   목표는  8시간노동제  쟁취였다.   그러나 그것만에 
그치지 않고  언론.  집회.  파업.  결사의 자유등 노동자 계급 해방의 발판이  
될  수  있는  민주적  권리  쟁취도  주요한  목표였다. 세계대전 중에는 
제국주의  세계 전쟁에 반대하여 세계평화를 옹호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행사를  
거행하였다.   독일에서는  1915년,  1916년에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룩셈부르크  
등이  지도한  독립  스파르타쿠스단이 메이데이에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정치적  시위운동을  벌였다. 러시아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노동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여 싸웠다.  다른  한편   메이데이는  
나라에  따라   노동운동  지도자와  조직이 기회주의적으로  바뀌면서 굴절되기도 
하였다.   메이데이가 성립하게 된 계기를 만든 미국노동총동맹은  1886년 투쟁 
이후에도  노동시간  단축을 당면한  문제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였다.    그리하여  1890년 메이데이 총파업에는  전국에서 수십만의  
노동자가  참여하여  도처에서 자본가들로부터 양보를 얻어냈다.  그러나 
미국노동총동맹은 점차 보수화 되어 1893년  들어 5월 1일  대신 9월의 첫째  
월요일을  노동자의  날로 바꾸었다.   다음해 1894년 미의회는  이 날을 공휴일  
(레이버 데이 )로 정해주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노동자의 날이 노동자 투쟁의 
날이 아니라 노동자가 하루쉬며 노는 날로 변질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제2인터내셔날의  기회주의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국제적  연대를  가로  
막았다.   메이데이  행사를  중지하도록 권고하면서  조국호위 사회배외주의로 
달려가게  한 것이다.  이는  결국 자본가의 전쟁 수행을  원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유럽  여러 나라는 제1차 대전중에 대개 메이데이를 
중지시켰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그동안  중지  또는  억압당해  
왔던 메이데이는 부활되고 유럽뿐만  아니라  동양  여러나라에서도  성황리에 
행사가 치뤄졌다.  프랑스에서는  1919년 메에데이가 다시 시작되어 파리 전 
시내의 교통기관을 비롯하여 신문,가스,수도,전기 부문 등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파업에  참여하였다.    이날  파리에서의  메이데이   시위는 노동자의  위력을  
다시   보여준  쾌거였다.   독일   노동자도  부활한 메이데이에 용감하게 
싸웠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메이데이 행사가  시작된  것은  1905년  평민사가 
'메이데이 다과회'라는 옥내집회를 연 이후이다 .  이때는 소수 사람들이 모여  
축하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정도의  행사였다.   다수 노동자들이 
옥외에서  집회를 하고 시위를  벌인 때는 1920년  5월 2일이 처음이었다.  이날 
토오쿄오 우에노 공언에서 5천여명이 모여 일본 제1회 메이데이를 열었다.  이때  
내세운  요구는  '치안유지법  제17조  철폐' '실업의 방지  ' '최저임금보장' 
등이었다.   5월 2일 행사를  한 까닭은 그날이  일요일이어서  모이기   쉬웠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부터는 국제적인  메이데이에  발맞추어   5월  1일에  
행사를  하였다.   이후 메이데이의 주요  슬로건은 치안경찰법 17조  폐지,  
8시간노동제  실시, 최저임금제  실시 ,  실업방지  등이었다.   메이데이의  
슬로건은  당시 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도 메이데이시위에는 경찰관의 검속이 반드시 뒤따랐으므로 행사에 
참가하는 일이 노동자에게는 바로 싸움이었다.  메이데이는 1930년대에  들어 
파쇼체제가 강화되면서  또 다시  굴절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는 
메이데이가 나찌-히틀러에 의해 전쟁과 억압을 위한  '애국5월제'로  분칠되었다  
.   일본에서도  만주사변  후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노동운동에도  우익화를  
강요하고  메이데이를 분열시켜 '애국노동절'로 대치시켰다.  그래서 1935년 
제16회 메이데이를 마지막으로 전전의 메이데이는 막을 내렸다.  메이데이가 
금지되어  행사를 거행하지 못하는 것은 노동운동이 탄압을 받아 쇠퇴함으로서 
질식 상태에 빠져버렸음을 의미한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1917년 5월 1일  
메이데이 행사를 벌여  짜르체제에 강타를 가했다.  1918년 5월 1일 부터는 
노동자국가의 축제로서 메이데이 축하행사를  벌였다.   1920년에는   메이데이를  
경제부흥의   노동일로 정하였다.  1921년 이후는 러시아의  경제  및  문화  
발달의  기치아래 전러시아 근로대중의  축제의 날로서 메이데이 행사가 
치뤄졌다.  1941년 이후는 파시즘을 지구상에서  축출하기 위해 튼튼히  단결하고  
투쟁하는 날로 기념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뒤 악몽같은 전쟁에서 벗어난 
노동자.  농민들은 해방의 감격을 1946년 5월 1일  종전후 제1회 메이데이 
행사에서 그대로 드러내었다. 독일의 베를린에서는  나찌-히틀러에서  해방된  
35만명의  노동자들이 파괴된 시가지에서 10년만에  시위 행진을 하였다.   그 
가운데는 여성이 60%나 되어 패전 독일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일본에서는 
1935년  이후 11년 만에 메이데이가 부활되었다.  전국에서 2천만명이 메이데이 
행상에 참석하고, 토오쿄오에서만도 50만명의 대중이 천황궁 앞 광장에  결집하여 
시위를 벌였다.  이날 메이데이에서는 '일한 만큼  먹여라'  '민주민중정부의   
즉시  수립,  식량의   민중   관리를 결의하였다.  1947년 세계노련은 메이데이 
구호로 착위와 각종 형식의 사회적 경제적 차별 폐지  , 남녀 동등  임금제 확립,  
노동자들에  대한  실제적  직업 보장과  노동자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적당한 
임금제 실시, 유급휴가제 ,언론 출판 집회  및 결사의 자유,  독일 파시즘과 
나찌즘의  숙청  등을 내놓았다.  이해 프랑스에서는  140개  지역에서  수백만  
조합원이  시위  행렬에 참여하였다.   소련에서는 모스크바시에
서만도 수백만의  노동자와  붉은 군대가 시위행진하였다.  이태리에서는 
파시스트-뭇솔리니 에게서 해방된 
300만명이 전국각지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치뤘다.   미국에서도  뉴욕의 경우 
귀환병까지 포함하여 10만명이상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그뒤 메이데이  행사 
가운데 특기할 만한 사건은 1952년 5월 1일 일본 메이데이  사건이다.   이   
사건은,시위군중들이   1950년까지   해마다 메이데이  대회장으로 사용하던 
천황궁 앞 광장이 부당하게 사용금지된데 항의하자 무장 경관이  경고도 없이 
습격하여  발생하게 되었다. 
  천황궁 앞 광장 사용을  저지당한 시위대는 천황궁 바깥 뜰에서 메이데이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3일  전에 발표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일본이 ' 반독립 
반점령'  상태로 이행된데 대해  어느  정도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연장선에서  시위대는 '미국인 돌아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본래 메이데이  
대회장인 천황궁 앞  광장으로 행진하였다.   그에  대해 경찰대는 최루탄과 
곤봉을  사용하여 노동자와  학생  등  2명을  죽이고 다수를  다치게 하였다.   
더우기  그후  경찰은  100-200명의  노동자를 구속하고 261명을  소요죄로  
기소하였다.   이  메이데이  재판은  20년 7개월을 소모한  끝에 간신히 소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따내고 1973년 11월에 종료되었다.   이  사건은  
65년전  헤이마키트  사건처럼 자본과 정치권력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주는 또 
하나의 예이다.  이후 메이데이 행사는  각국 노동운동의 수준과  국가권력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정도로  노동자 계급의 해방투쟁과  깊은 관련 속에서  
치뤄지고 있다.       
  
3.   메이데이의 의의
는 무엇인가  ?    메이데이는 매년  5월 1일에 전세게  노동자가  파업과  집회,  
시위를 통하여 극제적 단결과  혁명적 역량을 과시하는  노동자  투쟁의  날이며 
축제의  날이다.  이 날은  세계의 노동자가 단결하여  노동자의  공동의 적에 
대하여  공동의 싸움을 수행하는 노동자 국제연대의 날이기도 하다. 전세계  
노동자는  메이데이  투쟁에서  개별  공장  사장들과  일상적인 경제투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총자본과 국가권력에  대응하여 노동자 공통의 
요구를 관철하여 나간다.  물론 노동자들  앞에 높여  있는  절실한  요구와  
노동자들의  투쟁이 메이데이 하루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메이데이  행사도 같지 않다.  
 이날 노동자들이 성대한  축제를 벌이면서  건설을  힘차게 다짐하는 나라도 
있다.  어느 나라는 메이데이가 숫제 없는 경우도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의지를 
사상시키면서 하루 쉬는 날 노는 날로 메이데이를 넘기기도  한다.   많은  
나라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쇠사슬을 끊기  위해 모든 종류의  
억압과 착취에 대하여  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메이데이의 또 하나의  의의는 메이데이 행사를 통하여 각 나라 
노동운동의  수준과 역량 나아가 세계 노동자 계급의 해방운동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나라  노동운동  지도부의 기회주의  개량주의 
모습과 총자본 국가권력의 폭력성을 명백하게 폭로해 내는 기준이 된다.   
메이데이를 없앴던 독일  나찌즘과 일본 군국주의의 폭력적  탄압,  그리고   
그들에  붙어  노돌자들을  배반했던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기회주의적 모습에서 
생생한 예를 볼 수 있다.  나라마다 시대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메이데이 이날은 
세계 노동자들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며 모두 하나로 뭉쳐  노동자 계급의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고투쟁과 해방의 
결의를 다져나간다.  그리고 이날은  아직 조직되지 않은  노동자들을 조직의 
대열로  굳게 끌어 안아 노동자  계급의 역량을 고양시키며, 노동자 뿐만 아니라 
농민, 빈민형제들과도 굳건히 연대하고  그들을 올바로 지도하여 당면하고 있는 
가장 절실한 과제를 함께 해결해 나간다.  노동자 계급의 위력은 무엇인가?  
노동자는 사회의 모순 속에서 억압과 소외를 가장  크게 받고있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노동력  밖
에 없는 노동자가 사회변혁에서  잃을 것은 억압과  착취의 사슬뿐이고 잃을 것은 
희망찬 노동해방의  새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자신의 문제뿐 
아니라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역사적  괴재를  해결하는데 가장 전투적으로 
참여한다.   또한 노동자들은 사회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노동을 통하여  
사회를 지탱해 나간다.   노동자는  일상생활이 집단화 되어 있으므로 조직화가 
쉽고 규율과 협동을 바탕으로한 조직력이 어느 계급보다 뛰어나다.  즉 공장에서의 
노동은 조직적이고 계획적 이며 모든 동작이  기계의 제약을 받고 서로 제약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일상생활에서 조직에  필요한  인내,  규율,  협동,  
단결  등  자질들이 단련된다.   또 노동자는 한  공장  한  지역에서  몇천  
몇만명이  함께 노동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계급의식을  공유하기 쉬우며 투쟁의  
지혜와 역량을 집중하기가 쉽다.   노동자들이  집단역량을  기지고  조직적으로 
파업 시위할 때  그 힘은 엄청나다.   모든  공장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의 발을 묶을  수 있다.  노동자가 노동을 멈추면 모든 것이 정지한다.  
메이데이는  노동자계급의 이러한 위력을  확인함으로서 노동자  자신이  사회와   
역사  발전의  주체임을  인식하고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새세상을  향하여 
힘차게  진군할  것을  다짐하고  결의하여 투쟁하는 날이다.  노동해방을 향한 
투쟁이 메이데이 하루에 끝나는 것은 아니다.   메이데이는 투쟁의 날임과  동시에 
끝내는 승리할 축제의 날을 위하여 튼튼한 발판을 굳히는 날이다.    
  
**      자료 1   ** 
  메이 데이   
노동자 동지들!   메이데이가 다가왔다.   만국의  노동자가  자신들이 자각한 
생활에  눈뜬 것을 경축하고,  인간에 대한 인간의  모든  폭력과 억압에 
반대하는  투쟁, 기아과 빈곤과  굴욕으로부터 수백만의 근로자를 해방하기 위한 
투쟁에서 자신들의 단결을 축하하는 메이데이가 왔다.  이 위대한 투쟁 속에서  
자본의 세계와 노동의  세계, 착취와 예속의 세계와 우애와 자유의 계-2개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  한편에는 한줌의  부유한 기생인간들이  있다.   그들은  
공장,  도구, 기계를  그들의 손 안에  탈취했다.  그들은 수백만  데샤티나의  
광대한 토지와 산더미  같은 금을  자신들의  사유재산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정부와 군대를 제멋대로 자신들의 종으로 삼고, 자신들이 쌓아 놓은 부의 충실한 
파수군으로 만들고 말았다.  다른 쪽에는  상속받을 재산이 없는  수백만의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부자들의  집에서  부자들을  위해서  일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들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모든  부를 
창조하지만, 자기  자신은 일평생 한  조각의 빵을 위해  고되게  일해야 하며,  
일자리를  얻으려고  자비를  구걸하고,  허리가  휘어지는  힘든 노동으로  
자신의 체력과  건강을  해치며,  시골의  허름한  오두막이나 도시의 지하실과 
헛간 안에서 굶어 죽어 가고 있다.  지금 이  불행한 사람들과 근로자가 부자와 
착취자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만국의 노동자는  임금노예제로부터, 빈곤과 궁핍으로부터 노동을 해방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그들은 공동의  노동으로  창조한  부가 한줌의  부자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사회제도를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은  토지와 공장과 기계를 노동하는 사람 모두의 공동재산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가 없어지기를 
원하며,  노동의 성과가  노동하는 사람들의  손에 돌아가고, 인간  지혜의 모든 
성과와 작업 방식의 개선이 노동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수단이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수단이 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자본에 
대한  노동의 위대한 투쟁은  만국의 노동자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한다.  그들은 
보다 나은 생활과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쟁취해 나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피를 흘렸다.  노동자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들에 대해 만국의  
정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은  박해를 가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전세계 노동자의 단결은 더욱  성장하고 강화되어 가고 있다.  
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을 중심으로 굳게  단결하고,  사회주의   정당의  
지지자는  수백만   명에  이르며, 자본주의적 착취계급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착실히 진군하고 있다.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도  새로운 
생활에 눈을 떴다.  그들은 또한 이 위대한 투쟁에 참가했다.   우리나라의 
노동자가 굴레에 묶인 일상생활의 속박 상태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신들의  고역 같은 생활 속에서 광명을 보지 못해서  온순하게 굽실대던 시대는  
끝났다.  사회주의는 이 활로를 가리켜 주었으며,  수천 수만의 투사들이  나아갈 
길잡이로  삼아 붉은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파업을 통하여 노동자들은 단결의 
위력을 알게 되었으며 저항을  배우게 되었다.  파업은 또 조직된 노동자의 힘이 
자본가들에게 얼마나 가공할 위협에 되는가를 보여주었다.  노동자는 자본가들과  
정부가 살찌는 것이  바로 그들의 노동 덕택이라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노동자는 단결된 투쟁의 정신, 자유와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불탔다.    
노동자는  짜르   전제가  얼마나   흉악한 암흑세력인가를  분명히   
깨달았다.    노동자에게는  투쟁할   자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짜르정부는  
그들의 손발을  꽁꽁  묶어  두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신문과 책을  발행할  자유가 필요하다.  그러나  짜르 정부는 감옥과  
채찍과 총검을 동원하여 자유를 향한 모든  시도를  억압하고  있다.   '전제를  
타도하자!'라는  함성이 러시아 방방곡곡에  울려퍼져 가고 있다.   가두에서,  
수천의  노동자의 집회에서  이 한성은 더욱  더 자주 들려  오고 있다.  작년  
여름, 남부 러시아 전지역에서 수만명의 노동자가 떨쳐 일어섰다.  보다 나은 
생활과 경찰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 일어선 것이다. 
부르조아지와  정부는  대도시의   전  산업을  일격에   멈추게  만드는 
가공할만한 노동자의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떨었다.  노동자의  대의를 위해  
나선 수십 명의  투사들이 국내의 적에 대항하여 보낸 짜르 군대의 총탄에 쓰러져 
갔다.  그러나 지배계급과  정부는 오직 이들의 노동에 의해서 살아갈 뿐이기 
때문에 이러한 국내의  적은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격퇴되지  않는다. 더욱 더 
자각을 깊게하고 더욱 더 조직을 다지고 있는 수백만의 노동자를 분쇄할  수 있는 
힘은  이 지구상에는 없다.   노동자의 패배 하나하나는 새로운 투사들을 만들어 
대열에 불러들이고 보다 광범한 대중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활에 눈뜨게 하고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도록 만든다.  지금 러시아는 노동자 대중들의 각성이 훨씬 
빠르고 훨씬 널리 퍼지지 않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열을 결집하고  그들로 하여금 한층 강고한 투쟁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해 모든 힘을 쏟지 않으면 안되는 여러 사건을 맞이하고 있다.  
전쟁(러일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후진적인  층들 까지도 정치적  사건과  
정치사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전쟁은  전제 제도의 모든  부패,  그리고 
러시아를 지배하는  경찰과 법원 도당의  모든 범죄를 더욱  더 명확하고 생생하게 
폭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은 가난으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외국인이 살고  있는 수천  베르스타나  떨어진 다른 나라의 새로운  
토지를 빼앗기 위해  파멸적이고  무의미한  전쟁에 이러한 
  민중을 억지로 끌어들이고  있다.  우리나라의  민중은  국내의 정치제도를 개선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세계의 다른 쪽 끝에서 울리는 
대로소리로  우리의 관심을 분산시키려고  기도하고 있다. 짜르 정부는 민중의  
재산을 탕진하고 젊은이들을  태평양 연안의 죽음의 장소로 보내 총알받이로  
세우는 도박을 하고 있다.  모든 전쟁은 민중을 긴장하게 만든다.  문화적으로  
자유로운 일본과의 전쟁은  러시아에게는 더욱 공포스러운 힘의  긴장을 필요로 
하고 있다.  경찰 전제 권력이라는 건물은, 자각하고 있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타격을  받아  이미  흔들리고 있다.  전쟁은  이 정부의 모든  약점을 발가벗겨 
놓았다.   전쟁은 모든 거짓의 간판을 내리게  하고 있으며, 전쟁은  내부의 
부패를 드러내었다. 전쟁은 짜르전제의 부조리를  모든 사람의 눈에  폭로했다.  
전쟁은 낡은 러시아, 무권리의 러시아,  암흑의 재기불능의 러시아,  아직 
경찰정부의 노예적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의  단말마적  고민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 주고 있다.  낡은 러시아는 죽어가고 있다.  자유로운 
러시아가 이것을 대신하려고 다가오고 있다.   짜르전제를 지켜온 온갖 암흑세력은 
멸망해 가고 있다. 그러나 오직  자각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이들  
암흑세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오직    자각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민중을  위한 진정한 자유를  쟁취할 수 있다.  오직 자각한,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민중을  속이고  민중의  권리를 갉아먹고 민중을 
부르조아지  손안에 있는 단순한  도구로 만들려는 모든 기도를 좌절 시킬 수 
있다.  노동자 동지들!   10배의 노력을 기울여 눈앞에 다가온 결정적 전투를 
준비하자!  사회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열울 더욱 확고하게  가다 듬자!  
이들의 선전을  더욱 광범하게 전파하자!   노동자의 요구를 위한 전투를 훨씬 더 
과감하게 전개하자!  메이데이 축제에서는 수천의 새로운 투사를  우리  쪽으로   
인도하여,  전  민중의   자유를  위한,  자본의 억압으로부터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하기 위한 위대한 투쟁에서의 우리의 힘을 고양시키자!  8시간 
노동제 만세  혁명적국제 사회민주주의 만세!  범죄적, 강도적 짜르 전제를 
타도하자!  1904년 4월 

  
    **          자료 2   ** 
노동자 동지들!   전세계 노동자의 위대한  경축일이 다가 오고 있다. 메이데이는 
노동자가 자기들이 광명과 지식을 깨우친 것을 축복하며 모든 억압, 모든 전횡,  
모든 착취에 반대하고 사회주의 사회의 조직을 목표로 하는 투쟁을 위해서  
자기들이  하나의  형제와  같은  동맹에  단결하고 있다는 것을 축복하는 
날이다.  힘들여 노동하는  사람들, 자기의 노동으로  부자와 귀족을 먹여살리는 
사람들, 약간의 임금을  받기 위해서 견디기 힘든 일을 하면서 삶을 이어 나가는 
사람들, 자기 자신의 노동의 과실을 결코 향유할 수 없는 사람들, 호화스럽고 
눈부시게 빛나는  현대문명 속에서 소나  말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노동자의 행복과 해방을 향한 투쟁을 위해서 손을  치켜들고 
있다.  다양한  민족, 혹은 다양한 종교의 노동자 사이의 반목을  없애자!  이러한 
반목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지와 분열에 의해 간신히  살아 나가는 약탈자와  
압제자에게 유리할  뿐이다. 유태인과 그리스도 교도, 아르메니아 인과 타타르인, 
폴란드 인과 러시아 인,  핀란드 인과 스웨덴  인, 레트인과 독일  인 - 모두가 
사회주의라는 하나의 공통 깃발  아래 손에 손을  잡고 진군하고 있다.  노동자는 
모두 형제다.  따라서 그들의 강고한 동맹만이 착취당하는 인류 전체의 복지와 
행복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메이데이는 만국  노동자의 동맹,  즉 
국제사민당이  자신의 군세를 열병하고 자유, 평등, 우애를 향한 새로운, 지칠 줄 
모르는 불요불굴의 투쟁을 위해서 결속을 다지는 날이다.  동지 여러분!  지금 
러시아에서 우리는 위대한 사건의 전 
야에 서 있다. 우리는 짜르  전제정부와의 최후의 결사적인  싸움을 시작했다.   
우리는 최후의  승리에 이를 때까지  이 싸움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라, 
인간답지 않은 인간과  압제자의 이 정부, 짜르궁정의 탐관오리와 자본의 졸개들의 
이 정부가 러시아 민중을 어떠한 재난에 빠뜨렸는가를!  짜르정부는 러시아  
민중을 무분별한  대일  전쟁에  밀어넣었다.   이 전쟁에 따른 모든 재난은 
말로써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전쟁을 계속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짜르 강도정부가 중국에서 탈취한 만주를  지키기 
위해서다.  다른  나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다.  러시아 사람의  피가 
뿌려지고, 우리  국토가 황폐해져  가고 있다.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은  더욱 
고통스러워졌으며,  그들의  목에 걸린 고삐를 더욱  바짝 죄기 위해  짜르  
정부는  다른  나라의  토지를 강탈하려고 민중을  떠나보내고 있는 것이다.   
짜르의 무능한  장군들과 부패한  관리들은 러시아의 함대를  전멸시키고  수억  
수십억의  민중의 재산을 낭비하였으며 수많은 군대를 잃어버렸음에도, 전쟁은 
그치지 않고 계속되어 새로운 희생이  뒤따르고  있다.   민중은  점점  영락해  
가며 상공업은  정체되고 기근과 콜레라는  창궐하는데도  짜르  전제  정부는 
기이하게도 눈이 어두워  낡은 길로 나아가고  있다.  정부는 대일  전쟁 이외에 
제2의 싸움 - 러시아 전 민중과의 싸움을 시작하고 있다.  러시아가 오늘날  만큼 
침묵.억압.노예  상태에서의  각성을  경험하고 있었던 적은  일찌기 없었다.  
노동자와  농민에서부터 지주와  자본가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계급이  동요하기    시작하였으며 페테르스부르그와 코카서스,  폴란드와 
시베리아의 이르는 곳마다 격분의 소리가 높아졌다.   민중은  도처에서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고  있다. 민중은 민중정부를  구성하기 위해, 또  짜르의 전제가 
민중을  몰아가고 있는  심연으로부터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자유로운  
민중통치기관을 수립할 것,  모든  시민의  대표를  빠짐없이  제헌의회에  
소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약 20만 명에 이르는 페테르스부르그의 노동자는 
민중의 이러한  요구를 밝히기 위해서  일요일인 1월 9일,신부  게오르기 가퐁과 
함께 짜르의 거처로  나아갔다.  짜르는 노동자를  적으로 간주,  수천의 비무장 
노동자를 페테르스부르그의 거리에서 사살했다.  투쟁은 바야흐로 러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노동자는 자유와 보다 나은 생활을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이고   있다.   
리가와  폴란드,   볼가와   남부 러시아에서는 선혈이  낭자하고, 농민들이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고 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은 전 민중의 투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짜르의 정부는  사리분별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부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서 돈을  빌리려고 하지만 이제  아무도  그들에게  차관을 주지  
않는다.   정부는  민중  대표를  소집할  것을  약속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이 변하지 않은  태로 남아 있다.  박해는 멈추지 않고 관리의 횡포는 여전하며 
민중의 자유로운 집회나 민중의 자유로운 신문도 없다.  감옥은 열리지  않았으며 
그곳에서는 노동자의  대업을 위해 싸운 투사가 신음하고 있다.   짜르정부는 
어떻게 해서든  어러  민족을  서로 이간질하고  있다.  정부는 바쿠에서  
타타르인 사이의 아르메니아인들을 중상모략하여 학살을 야기했다.   정부는 이제 
무지한 민중에게 유태인을 향한 증오를 부추겨 유태인에 대한 새로운 살륙을 
준비하고 있다.  노동자 동지  여러분!  우리는 이제 이 이상 짜르정부가 러시아 
민중을 모욕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떨쳐일서설 것이다.  우리는  민중의 노여움을 민중의 진정한 적으로부터 
분산시키는  모든  것에  반격을  가할  것이다.   우리는  짜르  정부를 
타도하고  전체 민중을 위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하여 무기를 들고 일어설 것이다.  
노동자.농민 여러분,  무기를 드시오!   비밀집회를  조직하고, 민병대를    
편성하고,    어떠한  무기라도    최대한     준비하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과  
협의하기 위한 대표자를  파견하시오!   금년의 메이데이를 민중봉기의  축제일로  
만듭시다.   자,  그  준비를  갖추고 압제자에 대한 단호한 공격의 신호를 
기다리시오.  짜르정부를 타도하자! 우리는  짜르정부를 전복하고 민중의  
제헌의회를 소집할 임시혁명정부를 수립할 것이다.  보통.직접.평등.비밀선거에 
의해  민중대표를  선출할  것이다.   자유를 위해 싸운 모든  투사를  감옥에서  
구출하며  유형지에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민중집회를 공개적으로 열고 
관리의 기분나쁜 감시없이 신문을 발행할 것이다.  한줌의  약탈자가 아닌, 민중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 전  민중을  무장시키고  모든  
노동자에게  총을 지급하라.  농노소유주적인  지주권력을 타도하고, 관리들의  
증오스러운 억압으로부터  민중을  자유스럽게하며,   농민에게서   탈취한   
토지를 농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마을마다 자유로운 농민위원회를 소집하라.  바로 
이것이  사회민주주의자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무기를 손에 들고 
투쟁하는 목표이며, 그들이 호소하고 있는 목표다.  즉 완전한  자유, 민주적 
공화제,  8시간  노동제,  농민위원회  등이  바로 그것이다.  노동자  동지 
여러분, 위대한  싸움에 대해  각오를  다지라. 메이데이에는  공장을  멈추게  
하자.   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여러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무기를 들자.  
봉기의  시간을 알리는 종은  아직 울리지 않고 있지만  그것은 임박해 있다.   
지금  전  세계의  노동자는 자유의  대업에   수많은   희생을   바치고  있는   
영웅적인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를  숨을   죽이고  바라보고  있다.    
페테르스부르그의 노동자는 유명한 1월  9일에 이미 이렇게 선어했다."  
'자유인가, 아니면 죽음인가!  전 러시아의  노동자여러분, 우리는 이 위대한 
싸움의 함성을 계속 외칠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우리는 봉기를  통하여  우리는   자유를  획득할  것이다.자유를  통하여  사회 
주의를!"  메이데이 만세!  혁명적 국제 사회민주주의 만세!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자유 만세, 민주주의  공화국 만세!  짜르전제를 타도하자!  1905년 
다수파 제위원회 뷰로  [프롤레타리]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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