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22일 화요일 오후 02시 26분 46초
제 목(Title): 불교미술사/이태호 신라의 원대한 불국토경


신라의 원대한 불국토 경영

이태호 <미술사·전남대 교수> 

-------------------------------------------------------------------------------
-

 
《월간미술》은 작년 12월호에 옛 금강산 그림의 현장을 답사한 미술사가 이태호 
씨의 글과 강요배 화백의 스케치를 소개한 바 있다. 이번 호부터는 금강산의 
불교유적을 재차 답사하고 돌아온 이태호 씨의 글을 연재한다. 1천5백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는 금강산의 불교유적을 살펴보면서 종교와 예술이 하나 되었던 선인들의 
삶과 정신에 다가선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절터를 명당이 되는 승경(勝景)에 잡아왔다. 사찰이 
들어선 장소는 곧바로 화가들의 눈에 들 만한, 좋은 풍경화의 소재거리로 
안성맞춤인 곳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조선시대 화가들은 유교 사회에서 
성리학적 이념의 그림이랄 수 있는 산수화의 대상으로 사암(寺菴) 풍경과 
불교유적을 화폭에 담아 왔던 것이다.

한편 금강산 불교유적의 확인 작업은 우리 현대사의 뼈아픈 역사 현실을 실감케 
하였다. 잘 알다시피 금강산의 남단은 현재 남북이 대치되는 곳이고, 1950년 
전쟁때 치열했던 전투지역이었다. 폐사지를 찾는 발길마다에 그 상처가 깊게 배어 
있었다. 외금강의 신계사, 내금강의 장안사 백화암 표훈사 정양사 보덕암 마하연 
등에서는 옛 그림이나 1950년 이전의 사진에서 보았던 사찰들의 원래 모습을 찾을 
길이 없었다. 조선시대 목조건물로는 보덕암과 마하연의 칠성각을 제외하고는, 한 
군데도 제대로 남아 있는 곳이 없다시피 하였다. 불전이나 승방과 부속건물들이 
대부분 전화에 소실된 탓이다. 

명승지에 자리잡은 사찰과 암자

그나마 다행히도 북한 당국에서는 금강산의 자연보존 정책과 더불어 문화재와 
폐사지를 비교적 깔끔하게 정비한 편이었다. 내금강의 중심이 되는 표훈사가 
예전처럼 복원돼 가람의 형태를 유일하게 갖추고 있었다. 정양사에는 6모형 
목조건물 약사전과 팔작지붕의 반야전을 다시 지어 놓았다. 

다른 절터들은 초석과 석축 등 건물의 배치구조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석탑이나 석등, 부도나 비 등도 제자리에 최선으로 수리 
복원해 놓았기에 그 원형을 살필 수 있었다. 특히 표훈사에는 건물들을 복원하면서 
없어진 불상이나 불화를 새로이 제작해 모셨는데, 북한의 현대 건축가와 
불교미술가의 솜씨를 동시에 엿볼 수 있어 눈길을 끌었다.

금강산은 산 이름이 그러하듯이 1천5백여 년간의 오랜 불교사 속에서 
불국토(佛國土)로 자리잡은 명소이다. 불교유입 이전 금강산은 본래 산을 끼고 
살던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다. 그곳에는 금강산 설화에 주로 등장하는 나무꾼이 
많았을 게다. 그들은 산 형태의 특징에 따라 ‘모두 뼈를 드러낸 바위산’ 혹은 
‘서릿발같은 바위산’, ‘가을 단풍을 뽐내는 산’ 등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개골산(皆骨山)· 상악(霜岳)· 풍악산(楓岳山)은 그런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또한 금강산 사람들은 금강산을 신령스럽게 여겼을 터다. 우리 민족의 뿌리깊은 
산악숭배 신앙에서, 도가적 신선이 사는 영산(靈山)이라는 믿음으로 확산되었을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에서는 화랑의 심신단련을 위한 주요 탐승지였고, 
불교사회가 형성된 이후에는 불자들의 도량인 성지로 변모하였다. 그렇게 된 
연유는 인간이 끊임없이 추구해온, 이상향과 닮은 금강산의 빼어난 자연경관에 
있다. 

금강산은 불교가 유입되고 사회이념으로 자리잡자 다른 명산들과 더불어 
민간신앙이나 도교적 터전에서 불교적 신산(神山)으로 전환되었다. 그에 따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캐내”듯 갈등이 없지 않았던 듯하다. 유점사의 
창건설화에 얽힌 아홉 용과 53불의 쟁투가 그 갈등을 반증한다. 

담무갈보살이 계신 동해의 명산

현재 유점사는 전체가 소실되었지만, 본래는 금강산의 4대 사찰 가운데 가장 중심 
역할을 한 대찰이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 유정(惟政)이 활약한 곳으로 
유명하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가 1911년 사찰령을 반포할 때 전국 31본사의 
하나로 지정되었고, 고성은 물론 회양· 통천· 금화· 춘천에 이르기까지 산 
내외의 말사가 총 57개에 달할 정도였다. 유점사 자리에는 원래 산을 지키는 
구룡(九龍)이 살고 있었는데, 인도에서 흘러온 53불(佛)이 들어와 구룡과 싸움을 
벌여 이겼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싸움에 진 구룡은 금강산의 요처를 내주고 지금의 
외금강 ‘구룡폭’에 숨어들었다는 내용이다.(이상수, 《東行山水記》) 

여기서 53불의 유입은 경주 황룡사 창건 연기설화를 빌려온 것이다. 그런데 이 
설화는 금강산 사람 나무꾼과 하늘나라의 선녀가 자연스럽게 화합을 이룬 점과는 
사뭇 다르다. 도(道)와 불(佛) 사이에 서로 이념의 대립이 표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차후 금강산은 불교국가였던 신라·고려는 물론이고, 유교사회인 
조선시대 이후에도 불자들이 선호하는 수행장소로 불국토로서의 이미지를 튼실하게 
굳힌다. 산 계곡 곳곳에 들어선 절터와 산봉우리마다에 붙여진 불교적 이름처럼.

불가에서 가장 기본이 되고 제일 중요시 여겨지는 경전이 《금강반야바라밀다경》, 
줄여서 《금강경》이다. 금강은 ‘단단함’ 혹은 ‘강인함’ 이라는 뜻이다. 
‘금강’이라는 접두어는 곧 ‘금강석의 단단함이 모든 것을 잘라내는 성질과 같이 
일체의 세속적인 일을 끊고 온전한 반야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래서 다이아몬드를 ‘금강석’이라 번역했고, 역으로 금강산을 
‘다이아몬드 마운틴’이라 영역하고 있다. 

단단한 산이라는 의미의 ‘금강산’은 담무갈보살(法起菩薩)이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을 설법하며 1만2천 명의 권속을 데리고 머무는 이상향 
중의 한 곳이다. ‘금강산 만이천봉’은 거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담무갈보살이 
주처(住處)한 곳을 또한 바다에 떠있는 섬이라는 뜻의 ‘지달’이나 ‘지달나’라 
하였기에, ‘지달’은 금강산의 별칭으로도 불리었다. 지달 대신에 금강산이라는 
산이름이 등장하는 불경은 당나라 때 번역된 80권본(卷本) 《화엄경(華嚴經)》 
(695~704)이다. 이 불경의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 32권에 보살들이 머문 
23곳의 산이름이 밝혀져 있는데, 그중 여섯 번째로 동해의 금강산이 등장한다. 
화엄경의 금강산을 우리나라의 금강산과 동일하게 여긴 사실은 80권본 
《화엄경》이 발간된 지 1백여 년 뒤 중국 화엄종파의 4대조인 징관(澄觀, 
737~839)의 <화엄경소(華嚴經疏)>에 밝혀져 있다. 

여섯 번째로 금강산인데, 동해의 동쪽에 금강이라는 산이 있다. 전체가 금은 
아니지만 상하사주(上下四周)로부터 산간에 이르기까지 유수사중(流水砂中)에 모두 
금이 있다. 멀리 바라보면 곧 전체가 금이라 할 만하다. 또 해동인(海東人)은 
예로부터 서로 전하기를 이 산에 왕왕 성인이 출현한다고 한다.(《大正藏》권 35; 
한국불교연구원, 《북한의 사찰》, 일지사, 1978)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금강산이 화엄경의 금강산으로 인식되거나 그렇게 불리기 시작한 것은 8세기 
이후로 짐작된다. 8세기는 신라의 경주 귀족세력들이 전국의 불교문화를 만개시킨 
시기이고, 불국사와 석굴암이 완성되는 한국 불교미술사의 최고 정점기이다. 
자연히 동해의 영산 금강산이 불보살의 세계로 지목되었을 것이다. 

또한 경덕왕(재위 742~765) 시절에 활동한 표훈대사와 그 이름을 따른 내금강의 
표훈사(表訓寺)와의 관계를 연상하면, 8세기 중엽에는 불국토로서 금강산의 위상이 
정립되면서 ‘금강산’이라 불리었지 않았을까도 추정된다. 표훈은 신라 화엄종의 
시조격인 의상의 큰 제자였다. 경덕왕 때 완성된 석굴암의 첫 주지이기도 했고, 
경덕왕이 그에게 부탁하여 아들을 얻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물론 
금강산을 금강산이라 부른 고려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금강산에는 많은 절과 암자가 들어서 있다. 온 산과 계곡이 불적(佛蹟)이라 할 
만큼 8만9사암이 있었다고 과장될 정도이다. 조선 초에 발간된 지리서에는 내산과 
외산에 모두 1백8개의 암자가 전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1942년에는 28곳의 
사암이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된 적이 있다.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히는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신계사를 비롯해서 정양사 백화암 보덕암 마하연 영원암 묘길상 
등이 널리 알려진 사암이다.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원

불교사회가 지속되면서 금강산은 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원으로 정착되었다. 
또 그에 걸맞게 봉우리나 계곡마다에 불명(佛名)이 붙게 되었을 것이다. 도교적 
명산에서 불교 성지로의 본격적인 전환은 대체로 고려말 경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최남선(崔南善) 선생이 <풍악유기(楓岳遊記>에서 
영원동(靈源洞) 계곡을 중심으로 불명을 밝혀 놓은 적이 있다. 도교적 
신령스러움의 근원처가 되는 영원동이 불교의 명부신앙처로 변화된 명칭 등을 통해 
그같이 고증해 놓은 것이다.(《六堂崔南善全集》, 현암사, 1973)

내금강 입구 장안사에서 오른쪽 계곡으로 들어선 지역이 도가적 이름인 
영원동이다. 그런데도 이 계곡의 막다른 곳에 위치한 주산은 지장봉(地藏峰)이고, 
영원암(靈源菴)이란 암자가 들어서 있다. 그 오른쪽 옆 봉우리가 
시왕봉(十王峯)이다. 영원동 계곡에 우뚝 선 바위가 명경대(明鏡臺)이고, 아래로는 
황천강(黃泉江)이 흐른다. 지장봉에 들어서는 입구가 곧 지옥문이다. 이들 
주변에는 또 판관봉· 사자봉(使者峯)· 죄인봉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모두 명부(冥府)신앙과 관련된 명칭이다. 명부는 지하세계이고 인간이 죽으면 
누구나 거쳐가는 곳으로, 생전의 죄과를 따지고 그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보살계이다. 명부의 주인 부처는 지장보살이고, 지장을 보좌해서 죄업을 재판하는 
판관이 시왕(十王)이다. 그리고 시왕 중 5위(五位)의 염라청에 비치되어 인간의 
삶을 비쳐보는 거울인 업경(業鏡)이 명경대이다. 이처럼 영원동은 사찰의 명부전을 
이루었다. 이곳을 거쳐 사악한 마음을 씻고 금강산을 참배하도록 명부세계가 
내금강 입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금강산을 다녀오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 것도 바로 이 영원동의 명부세계 때문이 아닐까.

금강산은 《화엄경》의 주존인 비로사나불의 이름을 따라 비로봉(毘盧峯)을 
주산으로 삼게 되었을 것이다. 금강산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동해에서 불법을 
일으킨다는 법기(法起)라는 의미의 담무갈보살은 중향성(衆香城)에 머무는데, 
중향성은 비로봉을 내금강 쪽에서 병풍산성처럼 감싸는 봉우리들의 이름이다. 그 
보호 아래 있는 형국의 만폭동 계곡에는 담무갈보살의 이름을 딴 법기봉(法起峯)이 
위치하고, 중향성과 비로봉에 향을 올리는 듯한 대·소향로봉이 자리잡고 있다. 

장안사를 지나 솟은 봉우리는 석가봉이니 대웅전(大雄殿)이 된다. 석가모니를 
보필하는 사자 대좌의 문수보살은 만폭동 계곡의 사자봉과 화개동의 
묘길상(妙吉祥)이 그 역할을 하는 셈이다. 금강산에서 가장 큰 가람이었고 금강산 
사암을 관할하는 총 지휘소 격이던 유점사는 멀리 미륵봉을 배경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다음 외금강 지역으로 불교에 밀린 신선처인 집선봉, 옥류동과 구룡폭 계곡의 
중심에도 석가모니를 지칭하는 ‘세존봉(世尊峯)’이 버티고 있다. 그리고 만물상 
계곡 만상계의 좌우에는 관음연봉과 세지봉이 있다. 관음과 세지는 아미타불을 
보좌하는 보살들이다. 그렇게 보면 만물상은 아미타가 거처하는 극락정토이다. 
이곳에 들어서는 계곡의 사잇길도 극락고개라고 불린다. 이 고개는 온정령으로 
이어지는데, 심하게 꾸불꾸불하고 가파른 경사지는 극락세계에 오르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온정리에서 내금강을 다녀오며 아침저녁으로 전망되는 풍광은 그대로 극락을 
연상케 하였다. 새벽이 열리는 계곡의 자태는 웅장하였고, 구름 사이를 뚫고 
저녁놀에 비친 만물상 바위의 형형색색은 극락의 장엄한 세계를 연출하였다. 9곡 
66진의 그 험준한 고갯길은 극락왕생하기가 그리 쉽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느꼈다. 

이외에도 외금강 지역에는 세지봉 아래 문수봉이, 온정리 수정봉 밖으로는 
천불산(千佛山)이 자리잡고 있다. 해금강에도 바위의 형상에 따라 
칠성암(七星岩)이나 천불암(千佛岩)· 칠보대(七寶臺)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신라 말부터 발전한 금강산의 불교유적

금강산에는 많은 절과 암자가 들어서 있다. 온 산과 계곡이 불적(佛蹟)이라 할 
만큼 8만9사암이 있었다고 과장될 정도이다. 조선 초에 발간된 지리서에는 내산과 
외산에 모두 1백8개의 암자가 전하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新增東國輿地勝覽》). 1942년에는 28곳의 사암이 남아 있는 것으로 조사된 
적이 있다. 금강산의 4대 사찰로 꼽히는 유점사·장안사·표훈사·신계사를 
비롯해서 정양사 백화암 보덕암 마하연 영원암 묘길상 등이 널리 알려진 사암이다.

언제부터 이들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다. 
사적기(寺蹟記)나 비문들에 밝혀진 창건시기는 대부분 연대를 올려 잡는 게 
통례여서 신빙성이 적다. 내금강 만폭동의 보덕암과 고구려 승려 보덕(普德), 
외금강 신계사와 김유신, 내금강 정양사 혹은 마하연과 의상, 앞서 언급한 
표훈사와 표훈 등이 금강산의 초기 불교 형태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고 이들과 
관련된 시대적 증거로서 문화유산이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외금강 
발연사(鉢淵寺)와 8세기 후반의 진표(眞表)나 9세기 선종유입 이후 수련하러 
다녀갔다는 철감선사를 비롯한 선승 등의 행적과 흔적들을 수긍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한 862년에 각현(覺賢)이 제작했다는 2미터 남짓의 철조비로사나불이 
장안사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현존하는 금강산 불교유적 가운데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사례로는 내금강 입구 
장연사와 옥류동 입구 신계사 터에 남겨진 9세기 경의 3층 석탑을 들 수 있다. 두 
탑은 정양사의 3층 석탑과 함께 금강산 3대 고탑(古搭)으로 꼽힌다. 이들 석탑으로 
미루어 볼 때, 금강산이 그야말로 불자들의 수행처로, 불교의 성지로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말 9세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중앙집권을 꾀했던 경주 귀족의 힘이 약화되면서 지방의 호족세력이 
성장할 때이다. 그 변화에 따라 8세기에 이룩된 석굴암과 불국사의 이상화된 
비례미와 전형이 깨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선종(禪宗)이 새로이 
유입되고 호족의 성장과 발맞추어 신흥 불사(佛事)가 일어나던 때이다. 금강산의 
초기 불교유적은 이러한 시대변화로 볼 때, 중앙권력의 후원보다 금강산 일대의 
토호세력과 함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금강산에 있는 석탑이나 석조유물들이 
소규모인 점과 경주 중심의 신라식 쌍탑을 배치한 가람이 없는 점은 그러한 실상을 
유추케 한다. 

비록 금강산이 신라말, 이른바 9산선문(九山禪門)의 한곳으로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시대적 조류를 타고 금강불국의 기반을 잡았을 것이다. 신라 말 이후 
정착된 금강산 불교의 위상은 현존하는 석불과 석탑· 석등· 마애불· 부도· 비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신계사에는 6·25전쟁 이전만 해도 팔작지붕의 다포식 3간 건물인 대웅전을 
비롯해서 20여 개 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금강산 4대 사찰로서 
외금강에서 가장 큰 대찰의 사세를 과시했었을 것이다. 3층 석탑 위아래 좌우로 
정비된 건물 터를 훑어보면 뾰족이 솟은 문필봉 남쪽으로 넓게 자리잡은 대가람의 
위용을 가늠할 수 있다.

신계사와 장연사 터의 3층 석탑

금강산의 3대 고탑 가운데 맨 처음 세워진 작품으로는 신계사지(神溪寺址)의 3층 
석탑을 꼽을 수 있다. 너른 터 깊숙한 곳에 덩그라니 서 있는 3층 석탑은 상륜부 
장식이 망실되고 여기저기 깨지고 그을린 전쟁의 상흔을 잔뜩 안고 있다. 4.13미터 
높이에 기단 바닥돌의 한변 길이가 2.7미터로, 신라탑의 단아한 모양새였을 
것이다. 

이 탑에서는 기단부의 상층기단에 부조된 팔부중(八部衆; 천상과 지옥의 8방을 
수호하는 불교의 神將像)과 하층기단에 새긴 비천상이 눈에 띈다. 천의 자락을 
날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천인상 부분은 손괴가 심하나, 팔부중은 비교적 
잘 보존된 편이다. 금강저를 든 천(天), 용관을 쓰고 여의주를 든 용(龍), 염주를 
입에 문 야차, 사자탈을 쓴 향기와 음악의 신 건달파,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덟인 
마수라, 두 날개를 단 금시조 가루다, 말과 소머리를 가진 긴나라, 그리고 뱀을 든 
마후라까가 한면에 두 분씩 부조되어 있다. 갑옷과 투구 차림의 이들 팔부중은 
각각의 무구나 악기 등을 들고 반가좌한 좌상으로, 도톰하면서 풍만한 신라식 
석조미의 전형을 보여준다. 

석탑의 전체 외관은 불국사의 석가탑 형식이다. 그러면서도 2층과 3층 탑신에 비해 
돌문이 새겨진 1층 탑신이 길어진 비례를 보인다. 그리고 옥개석 아래의 
처마받침이 각각 역계단식으로 네 단이 꺾여 들어가 탑신에 연결되어 있는데, 
석가탑과 8세기 석탑의 경우 5층 급의 처마받침이 통례이다. 팔부중과 비천의 
부조와 함께, 이러한 특징은 8세기 중엽의 석가탑보다 시대가 떨어지는 양식이다. 
기단에 팔부중이 새겨진 경주 창림사(昌林寺)의 3층 석탑이나 지리산 화엄사의 5층 
석탑과 유사한 형식으로 빨라야 9세기 경의 신라 탑으로 편년된다. 

신계사지 석탑과 같은 시기, 같은 형식의 3층 석탑이 내금강 초입에도 보인다. 
금강군 내강리 내강동 소재의 장연사(長淵寺) 터에 남은 석탑이다. 장연사지 3층 
석탑은 높이가 4.33미터로, 신계사지의 그것보다 약간 높은 편이다. 그러나 기단의 
길이가 2.24미터로 약간 좁아져서 신계사지 석탑보다는 훨씬 날렵해 보인다. 추녀 
끝의 치켜오른 상승감도 가벼운 편이다. 신계사 석탑의 팔부중 장식과 달리 장연사 
석탑에는 상층기단의 동서쪽 면석에 4천왕이, 남쪽 면에 인왕이, 북쪽 면에 
제석천·범천으로 보이는 수호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입상으로 표현되었는데, 
신계사 탑의 팔부중 장식보다 얕은 부조로 경쾌한 느낌을 준다. 여기에 1층 탑신의 
석문 장식을 깊이 파냈다.

장연사는 오래 전부터 폐사된 곳에 이 탑만이 홀로 남겨져 있었던 탓으로 옛 
지명이 거탑리(巨塔里)이다. 현재 탑의 앞뒤 폐사지 공터에는 연립주택형 마을이 
들어서 있다. 

왕실 사찰로 자리잡힌 신계사 

외금강의 동쪽과 내금강의 서쪽 끝으로 각각 같은 위도 상에 석탑을 나란히 배치한 
점이 흥미롭다. 유사 형식의 두 석탑을 비슷한 시기에 세웠음은 불국으로서 금강산 
전체를 염두에 둔 마스터 플랜 아래 가람을 조성한 느낌마저 준다. 여기에서 
대자연 위에 인공적인 사찰을 배치하는 신라인들의 원대한 안목과 경영수법을 읽을 
수 있다.

신계사에는 6·25전쟁 이전만 해도 팔작지붕의 다포식 3간 건물인 대웅전을 
비롯해서 20여 개 동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그야말로 금강산 4대 사찰로서 
외금강에서 가장 큰 대찰의 사세를 과시했었을 것이다. 3층 석탑 위아래 좌우로 
정비된 건물 터를 훑어보면 뾰족이 솟은 문필봉 남쪽으로 넓게 자리잡은 대가람의 
위용을 가늠할 수 있다.

지금은 대웅전 앞 3층 석탑과 2층 누각을 세웠던 사각형의 돌기둥들만이 스산하게 
서 있다. 2미터가 약간 넘는 돌기둥들은 1928년에 중건한 만세루 누각의 아래층 
부분이다. 3간 건물이었던 모양으로 4개의 돌기둥만 일으켜 놓았고 나머지는 옆에 
쓰러져 있다. 각각의 돌기둥에는 해서체로 음각한 ‘元山 金心月華’ ‘平壤 
金二龍’ ‘京城 裵奭煥’ ‘鐵鐵源 金翼之’ 등 만세루를 중건할 때 기성회를 
조직하고 기금을 낸 대시주자의 이름들이 보인다. 

신계사에 대하여 1824년에 지환(知幻) 스님이 정리한 
《금강산신계사적기(金剛山神溪寺蹟記)》가 남아 있어 그 유래와 역사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다(사찰문화재연구원, 《북한사찰연구》, 한국불교종단협의회, 
1994). 법흥왕 6년(519)에 보운(普雲) 조사가 창건하였고, 신계사의 원래 이름이 
신라의 ‘新’자를 따라 ‘新溪寺’였다. ‘神溪寺’로 바뀐 것은 절터 계곡에 
연어와 물고기 떼를 못 오르게 한 창건조사 보운의 신통력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보운 이후 김유신과 그 부인, 동생 흠순(欽純),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등이 후원한 왕실사찰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를 인정한다면 신계사의 왕실 
후원 전통은 고려와 조선시대로 까지 이어진다. 고려 광종 때 왕사였던 법인국사 
탄문(坦文)에 의해 크게 보수되었다. 또 조선시대에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천도와 명복을 비는 사찰로 지목하여 원불전(願佛殿)과 어향각(御香閣)을 
신축하였다고 전한다. 그에 반하여 사적기에는 고려 때 개성 정권에 항거한 
묘청(妙淸)이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사적기의 내용을 
확인할 주요 유물유적이 모두 소실되어 아쉬움을 준다.

신계사는 옥류동과 구룡폭으로 오르는 입구인 온정리의 창터 송림(松林) 오른쪽 
너머에 위치해 있다. 쭉쭉 뻗어 오른 2백~3백 년 수령의 미인송들이 즐비한 숲에 
가려 길에서는 절터가 눈에 띄지 않는다. 속세와 법계를 가르는 차단막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솔밭길 중간 길가에서 부도전을 만나게 되는데, 신계사 
입구를 알려주는 표시물이기도 하다. 신계사의 위상에 비하면 너무도 조촐하다.

절 입구 창터 솔밭의 조촐한 부도밭

이곳에는 4기의 범종형 부도와 2기의 비석을 나란히 모아 놓았다. 석조부도와 
석비는 모두 19세기에 조성된 것들이다. 1미터 남짓의 석종형 부도 중 비교적 
격식을 갖춘 것은 영월당(暎月堂)의 부도이다. 영월당은 사적기에 1862년 사재를 
털어 논을 사서 절에 헌납한 스님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봉우리 모양의 꼭지에 
배가 불룩한 석종형 몸체를 갖춘 부도는 세 부도와 달리 8각형 기단 부분에 
연꽃무늬를 양각해 넣었다. 시주한 만큼의 정성을 들인 장식일 게다. 

영월당 부도와 유사한 외형으로 기단을 사각형으로 단순화시킨 영호대사(影湖大師) 
부도가 나란히 있다. 나머지 두 기는 음각되어 있는 이름을 판독하지 못했다. 그중 
옥개석 모양을 올린 부도는 낙암당(洛菴堂)의 것으로 여겨진다. 돌부도들은 모두 
조선말기 불교의 쇠함에 따른 퇴락한 형태미를 지녔지만, 옹기 항아리 모양의 
토속적인 맛을 물씬 풍긴다.

1929년에 세운 ‘공덕주유씨지비(功德主劉氏之碑)’와 조선 말기 신계사를 
중흥시킨 대응당(大應堂, 1830~?)을 추모하는 기념비이다. 무명 씨의 부도가 혹시 
대응당과 관련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엄종주대응당대선사지비명(華嚴宗主大應堂大禪師之碑銘)’은 광서15년(1889)에 
신헌구(申獻求)라는 유생이 지었고, 김구현(金九鉉)이 썼다. 비의 제목인 전서는 
이승오가 쓴 것이다. 

대응당은 법명이 탄종(坦鍾)으로 서울 사람이다. 장안사에서 출가하여 옥류동에서 
세상을 떠난 사대부 출신 승려로 알려져 있다. 달변으로 강학에 뛰어났고, 
‘화엄종주’에 걸맞은 당대의 고승으로 추앙을 받았다. 신계사 말사인 보운암에서 
법문을 시작한 대응당은 한때 인기가 높아 3천 명의 신남신녀(信男信女)가 
모여들었다고 한다.

신계사는 대응당이 주석했던 보운암을 비롯해서 상운암 보광암 미륵암 대승암 
문수암 법기암 등 8개의 부속 암자를 두고 명실공히 외금강 일대에서 으뜸 
사찰로서의 역할을 해방 전까지 해왔다. 전화를 입기 이전에는 수준 높은 불전과 
부속 목조건물, 불상과 불화, 역대 조사의 초상화 등 조선시대에 제작된 명품들을 
풍부하게 소장하고 있던 대찰이었다. 그 모든 문화재를 잃어버린 빈터를 뒤로하고 
옥류동 계곡과 구룡폭에 오르게 된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