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23일 수요일 오전 02시 08분 38초 제 목(Title): 이태호/고려개국에 빛을 준 금강보살 고려 개국에 빛을 준 금강보살 이태호 <미술사·전남대 교수> ------------------------------------------------------------------------------- - 지난 호에 이어 이태호 교수의 금강산 불교유적 답사기를 싣는다. 금강산의 불교유적은 외금강보다도 내금강에 집중되어 있다. 금강산의 최고 전망대라고 할 수 있는 정양사 헐성루터를 비롯, 내금강의 심장부에 자리잡은 묘길상 마애여래좌상을 찾아본다. 고려 금강불국의 터전인 내금강의 문화유적을 통해 자연과 종교, 예술과 삶이 하나였던 우리의 옛 역사를 반추해본다. 현존하는 유물유적으로 볼 때, 금강산의 본격적인 불국토 건설은 9세기경 외금강 신계사와 내금강 장연사에 3층 석탑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말 금강산 동서의 끝자락에서 출발한 불국(佛國)의 경영은 외금강보다 내금강에 집중되었다. 금강산 4대 사찰 가운데 신계사만이 외금강에, 나머지 유점루· 장안사· 표훈사 세 곳은 내금강에 들어섰다. 이외에도 정양사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이후 많은 사찰과 암자들이 내금강의 산곡마다에 자리를 잡았다. 특히 내금강의 고려시대 석불과 마애불의 조성은 명실공히 금강불국의 위세를 보여준다. ‘금강산’이라는 불교이름도 고려시대에 와서 정착된 것이다. 이와 같이 내금강이 불교의 터전으로 확고히 자리잡힌 것에 반해 외금강은 도교의 선계로 유지돼 왔다. 내금강에 남아 있는 설화들은 정양사 중건에 얽힌 소년 목수의 신기(神技), 보덕암의 보덕각시와 청년 승려 희정의 애절한 사랑, 묘길상의 마애불을 황금으로 착각해 부처의 무릎을 떼낸 승려, 고려 말의 나옹선사에 대한 일화 등 대부분이 불교적 색채를 띤 것이다. 그와 달리 외금강의 설화들은 보운과 신계천의 물고기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나무꾼과 선녀, 망장천에서 회춘한 노인부부 등 민간의 삶 속에서 우러난 무선(巫仙)과 관련된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한편 내금강에 많은 사찰과 암자가 들어선 연유는 지세의 차이에서도 발견된다. 외금강은 산세가 웅장하고 험준하여, 조선 후기까지도 등산로가 충분히 개발되지 않았다. 그랬던 것에 비해 내금강은 열린 전망과 너른 계곡을 이루고 있고, 내왕하는 옛 길도 가마를 이용할 만큼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내금강에 집중된 불교유적 내금강에서 절터 자리로는 단연 방광대의 정양사가 으뜸이다. 장안사와 표훈사가 산기슭의 안옥한 계곡에 터를 잡은 것과는 달리, 산 중턱에 건립된 정양사는 개골의 봉우리들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 정형화된 정선식 금강전도(金剛全圖)의 형식적 특징으로는 금강산의 종주 비로봉이 감싸안은 내금강 전체를 포괄하는 원형구도법을 들 수 있는데, 그처럼 내금강을 부감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정양사다. 이와 더불어 하늘 아래 제일이라는 천일대(天一臺, 혹은 天逸臺)와 방광대 역시 정양사의 앞과 뒤에 자리한 최고의 전망대로 꼽힌다. 정양사(正陽寺)는 표훈사에서 서북쪽으로 가파른 숲길을 넉넉잡아 한 시간 가량 오르는 길목에 위치한다. 등반로는 쭉쭉 뻗어 오른 노송과 빼곡이 들어선 전나무 숲으로 인해 한낮인데도 어둡고 검게 기름져 있다. 그 숲길에서 숨이 턱까지 찰 즈음 산 언덕 위의 정양사 건물이 보이고, 법당 마당에 오르는 계단을 만나게 된다. 잡목 숲으로 둘러싸인 정양사 마당에 들어서면 예상치 못한 공간이 열린다. 동쪽으로 비로봉부터 석가봉까지 중향성· 백운대· 혈망봉· 일출봉· 월출봉· 망군대· 법기봉· 향로봉 등 내금강의 봉우리들이 바위병풍을 펼친 듯하다. 지난해 8월 말 필자가 만폭동 계곡을 둘러보고 정양사에 오른 때는 오후 해거름 무렵이었다. 짙푸른 녹음 위로 햇빛을 받은 암봉들과 구름이 연출하는 진풍경에 숨 고를 새도 없었다. 가슴 벅찬 감격, 그야말로 ‘살떨림’으로 다가왔다. 형언할 수 없는 전율로 금강산 최고의 전망을 실감한 것이다. “정양사가 금강산에 있는 것은 마치 궁실에 대청이 있는 것과 같다”(이상수, 《동해산수기》)고 했다. 그 대청인 누대가 바로 정양사 마당의 헐성루이다. 헐성루(歇惺樓)는 깨달음을 다하는 곳, 혹은 조용히 쉬는 장소라는 의미이다. “누(樓)위에 올라앉으면 온 산의 진면목과 정기를 맞을 수 있다. 맑은 기운 상쾌하여 사람의 위장 속 티끌 먼지마저 어느 틈에 씻어졌는지 깨닫지 못한다”(이중환, 《택리지》)고 할 정도로 극진한 사랑을 받던 곳이다. 정양사 헐성루는 송강의 《관동별곡》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 창작의 산실로, 이곳에서 읊은 시가 금강산에서 가장 많이 쏟아져 나왔을 정도다. 금강산 최고의 전망대, 정양사 헐성루 정철의 《관동별곡》 외에도 “봉래산 참모습을 알려거든 맑게 개인 가을날 저녁놀에 헐성루를 올라야” (송애 이수대)라고 했고, “헐성루 꼭대기에 저녁 그늘 내리는데, 내려가기 아쉬워 돌아가잔 말 못 하네” (미산 한장석)라거나, “어찌하면 일생을 정양사에서 살아볼까, 아홉 번 죽어도 헐성루 잊지 못하리” (종산 조존영)라고 정양사 헐성루의 감동을 극대화한 시인도 있었다. 그래서 “금강산의 좋은 경치 등급을 매긴다면, 헐성루가 당연히 집대성한 곳이네”(죽천 김진규) 라며, 헐성루를 금강산의 최승처(最勝處)로 선정한 것이다. 또한 정양사에서 읊은 시에서는 가을 소쇄한 달밤과 달빛에 물든 암봉들, 한밤중의 은은한 만폭동 물소리, 겨울의 눈 내린 봉우리 등을 매력의 포인트로 꼽았다. 그중에서도 정양사 쪽에서 바라보는 내금강의 해질녘 풍광을 금강미의 제일로 여겼다. 옛 문인들이 읊었던 그 아름다운 정경을, 지난 답사에서 늦여름 오후에 만났다는 것이 필자로서는 너무도 큰 행운이었다. 안타깝게도 헐성루는 전쟁 때 불타서 지금은 없다. 현재 정양사에는 9~10세기로 추정되는 신라식 3층 석탑과 6모형 석등, 그리고 석불좌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석불이 모셔진 6모형의 독특한 목조건물인 약사전과 반야전이 복원되어 고즈넉하게 폐사지를 지키고 있다. 중앙의 6모각 약사전을 중심으로 구성된 가람은 절 이름대로 남향의 볕을 잘 받는 산 중턱 금강산의 정맥(正脈)에 위치해 있다. 석탑과 석등, 약사전과 반야전은 남향으로 종축을 이루고 있다. 3층 석탑은 1층 탑신 남쪽 면에 자물쇠와 문고리가 양각된 문을 새겨넣은 것을 빼고는 장식 없이 간결하다. 3.97미터의 높이에 기단의 한 변이 2.32미터인 탑이다. 전체 외형은 신계사지와 장연사지의 3층 석탑과 유사한 전형적인 신라식 석탑 계열에 속한다. 두 탑과 함께 정양사의 3층 석탑은 금강산 3대 고탑(古塔)으로 불린다. 그러나 옥개석의 형태나 세부의 짜임새에서는 다소 변화된 조형미를 보여준다. 고려 초의 석탑과 석등, 그리고 석불 정양사 3층 석탑은 9세기의 두 탑보다 옥개석이 두툼하면서 들쳐진 처마의 곡선이 치켜올라간 편이다. 1층 탑신 받침이 탑신 밖으로 두드러지게 조출(彫出)되어 있다. 전체적으로는 안정된 설치이나 둔중한 느낌도 준다. 이런 점은 신계사와 장연사 터의 석탑보다 후대의 형식으로, 나말여초인 9~10세기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그런데 석탑과 한 무리를 이루는 석등과 석불을 보면, 제작시기가 신라 말보다는 고려 초인 10세기에 더 가깝지 않나 여겨진다. 석탑 앞에 놓인 석등은 약사전 건물과 그 내부에 모신 석불의 대좌와 같은 6각형의 특이한 구조다. 석등의 기단·기둥 그리고 불을 켜는 화사석과 옥개석이 모두 6각형으로, 약사전의 평면구조에 맞춘 것이다. 전체 2.95미터의 높이에 기둥이 훤칠하고, 기둥돌 상대석과 하대석에 양각된 연꽃무늬가 큼직큼직하고 시원스럽다. 기둥돌은 아래·위·중간에 도톰하게 띠를 두른 죽절문 형태를 띠고 있다. 그 위에 얹은 6면체의 화사석은 볼록한 형태로, 불빛이 나오는 화창을 그 형태와 어울리게 둥그스레 뚫었다. 옥개석은 추녀를 길게 빼지 않고 화사석의 폭에 딱 맞춘 크기를 하고 있다. 일반적인 신라의 8각형 석등과는 짜임새가 다른데,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석등과 석탑을 앞에 두고 석불을 모신 약사전은 6각형의 평면구조이다. 석불의 대좌가 6각형인 점과 건물의 외곽 이중기단 석축이 6각형인 점으로 미루어, 처음 시공 때부터 6모전이었던 것 같다. 6모전의 현판이 약사전(藥師殿)이니 실내의 결가부좌를 한 석불은 약사여래좌상이겠다. 하지만 항마촉지인의 수인으로 보아서는, 석가모니불의 일반적인 도상과 유사해서 부처의 원래 이름은 약사불이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후대에 현판을 달면서 석불의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석불의 앉은 자세, 양 어깨에 걸친 법의와 번잡한 주름 표현, 그리고 상호(相好)의 투박한 안면 표정은 고려 초기의 형식미다. 신라식 석불이 퇴락하면서 양식화된 면모를 보여준다. 1미터 남짓한 앉은키에 눈·코·입의 마모가 심한 편이지만, 오히려 그 점이 소박한 친근감을 준다. 석불의 어깨부분은 크게 파손되어 다시 이어붙인 상태이지만, 석불을 받든 대좌는 비교적 온전한 편이다. 석불이 앉아 있는 1미터 높이의 대좌 또한 석불 못지않게 일품이다. 상ㆍ하대석에는 12잎의 연꽃이 장식되어 있고, 간결한 형태의 연꽃무늬의 도드라진 선 맛이 시원시원하다. 중대석은 사천왕과 동자상으로 꾸며져 있다. 중대석의 6면 부조는 꽃무늬 형의 안상(眼相)장식을 액자모습으로 새기고, 그 안에 신장상(神將像)들을 배치한 것이다. 신라식에 비해 섬세함은 떨어지나, 왼편을 향한 자세가 힘차고 매력적이다. 특히 앞면의 두 손에 천도복숭아를 받쳐든 앳된 동자상의 표정은 조선시대 후기의 민화나 목조각에서 보이는 형상들의 전거를 보여준다. 정양사는 백제의 관륵과 융운대사가 창건하고, 원효대사가 중창한 사찰로 전해온다. ‘정양사’라는 이름의 유래와 사찰이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내방과 관련되어 주목된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국을 기리기 위해 금강산에 들렀을 때, 정양사에 금강산 불국토의 주인인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나타나 빛을 발하니 예를 올렸다는 것이다. 왕건이 담무갈보살을 만난 곳 6·25 때 훼손된 것을 복원한 조선 후기의 약사전 건물은 특이한 귀물이다. 우리나라 불교 건축이나 석조물에서 6각형의 평면구조를 가진 것은 드문 사례이다. 6각형은 아마도 담무갈보살과 관련이 있을 듯하다. 《80권 화엄경》의 보살세계 가운데 담무갈보살이 머무는 금강산이 여섯 번째이기 때문이다. 약사전은 6각형 평면에 삿갓모양의 6모 지붕을 얹은 구조이다. 대들보를 사용하지 않고 기둥머리의 공포를 연결하여 화려하게 채운 천정의 짜임새가 별격이다. 정양사 건축에 참여했다는 신동(神童) 목수에 관한 설화가 전해지는데, 그 목수의 신기를 보는 듯하다.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고려 말 정양사 불사가 있었을 때, 어느 소년이 약사전 건물을 짓는 데 참여하겠다고 찾아들었다. 승려들이 기가 차서 시험을 해보았다. 소년이 건물에 소요되는 수많은 부재들을 모두 깎아놓자 승려가 그중 한 목재를 감추었는데, 소년은 곧바로 없어진 것을 알고 슬피 울더라는 것이다. 16세였다는 소년의 이름은 용화이고, 남해 용왕의 아들로 전해진다. 현재 복원된 약사전을 일제시기 사진(조선 초 건축으로 추정)과 비교해 보았더니 추녀 끝을 받친 6개의 활주가 생략되어 있다. 흰코끼리 벽화도 다시 그리지 않았다. 전후에 수리한 반야전(般若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조선 후기식 팔작지붕에 다포식 건물이다. ‘반야’라는 이름은 표훈사의 법당과 마찬가지로 담무갈보살이 중향성에서 《금강반야경》을 설법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 반야전의 뒤켠 언덕에는 나옹선사의 것으로 전하는 부도 한 기가 오롯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나옹이 활동한 고려 말의 부도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신계사나 장안사 등의 부도전에 보이는 19세기의 범종형 돌부도이다. 정양사는 백제의 관륵과 융운대사가 창건하고, 원효대사가 중창한 사찰로 전해온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절터의 석탑과 석등, 약사전의 석불을 보면 고려 초에 창건되었거나 그때쯤 사세가 정착된 듯하다. ‘정양사’라는 이름의 유래와 사찰이 유명해진 것은 고려 태조 왕건의 내방과 관련되어 주목된다.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개국을 기리기 위해 금강산에 들렀을 때, 정양사에 금강산 불국토의 주인인 담무갈보살(曇無竭菩薩)이 나타나 빛을 발하니 예를 올렸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정양사의 주산을 방광대(放光臺)라 이르게 되었다. 앞산마루 왕건이 예를 올린 고개를 배점(拜岾, 배재령 또는 절고개)이라 했으며, 진헐대(眞歇臺)가 위치하게 되었다고 전해온다(《동국여지승람》 권47, 회양 불우조). 이를 수긍하자면 담무갈보살이 고려 개국에 빛을 준 것이다. 금강산의 주인이 우리 민족의 최초 통합에 의미를 부여하여 왕건의 통일 위업을 그같이 환영한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또다시 민족 재통일의 물꼬가 금강산에서 트이게 되었음은 역사적 필연일 수도 있겠다. 왕건의 정양사 관련 일화는 1307년 노영(魯英)이 작은 칠판(漆板)에 금분으로 그린 <지장보살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윗 부분에 나타나 있다. 뾰족뾰족한 산봉우리와 담무갈보살이 그려지고, 그 아래 배점이 되는 위치에 ‘태조(太祖)’ 라는 글씨와 왕건의 엎드린 자세가 보인다. 한국회화사에서 금강산 그림으로는 첫 작품인 셈이다. 탄력있는 필치로 죽죽 내려그은 선묘는 4백여 년 후 정선의 금강산 필법과도 흡사한 고려의 그림이다. 특히 태조 왕건의 내방 일화는 석조 유물들과 같은 시기여서 솔깃하게 한다. 정양사가 금강산에서 ‘寺’자가 붙은 사찰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임을 감안하면, 고려 왕실의 후원으로 조성되었을 법도 하다. 또한 금강산 사찰 가운데 석불 앞에 석탑과 석등을 나란히 조성하여 유일하게 가람의 격식을 갖춘 곳이기도 하다. 비록 석불과 석탑이 신라풍을 따르고 있지만, 석탑 옥개석의 곡선이 날카롭게 솟은 모양새, 석불대좌의 연꽃무늬와 신장상의 힘찬 선 맛, 석등의 새로운 형식미와 특이한 6각형의 평면구조 등은 당대의 새로 개발된 미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또 그처럼 낡은 형식과 새 형식이 복합된 표현에서, 신라를 흡수하여 개국한 고려 초의 사회적 성격도 읽혀진다. 신라의 잔영을 떨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양사의 석조유물보다 더욱 고려적인, 특히 고려 초 개국의 당당한 자신감을 실은 작품이 묘길상 마애여래좌상이다. 정양사나 천일대, 혹은 방광대에서 내려다볼 때 내금강의 중심은 비로봉 아래 펼쳐진 중향성이다. 또 만폭동 계곡을 따라 수석을 밟으며 비로봉 쪽으로 오르다보면, 중향성 아래가 내금강의 심장부임을 실감하게 된다. 표훈사에서 금강문과 금강대를 지나 오른쪽 만폭동의 내팔담(內八潭)을 벗어나면 화개동이라는 평탄한 공간이 열린다. 화개동의 동쪽으로 백운동 골짜기의 마하연을 거슬러 지나면 다시 협곡을 만나게 되고 비로소 본격적인 중향성과 비로봉의 등반길로 접어든다. 이 협곡이 바로 내금강의 심장부이다. 등산로의 비좁은 길목에 들어서자마자 수직으로 깎아지른 40여 미터 높이의 벼랑이 앞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이곳 암벽에 거대한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비로봉에 오르기 전에 꼭 대면하는 부처이다. 바위의 때깔이 누래서 마애불은 마치 황금부처 같다. 그 때문에 생긴 한 스님의 일화가 전해온다. 어느날 한 스님이 돈에 궁했던지 한밤중 달빛 아래 마애불을 대하니 전체가 황금으로 보였다. 무릎 한쪽을 떼내어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다음날 장에 갔는데, 팔려고 보자기를 열어보니 돌덩어리였다는 것이다. 내금강의 심장부에 자리잡은 묘길상 큰부처 마애불은 앉은키가 15미터에 이른다. 얼굴과 손발 길이만 해도 자그만치 각각 3미터가 넘는 크기로, 그 거대함이 사람을 압도한다. 암벽을 돔 형식으로 살짝 쪼아서 그 안에 부조해 넣은 좌상으로, 양 무릎의 폭이 9.4미터이다. 고려시대 마애불로는 가장 큰 규모의 걸작으로 꼽힌다. 떡 벌어진 어깨에 웅장한 크기지만, 첫인상은 권위적인 부처상이라기보다 후덕한 금강산의 산아저씨 같다. 마애불은 선이 또렷하고 두툼한 상호에, 입가의 배시시한 미소로 비로봉을 오르내리는 참배객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금강산을 지키는 부처로는 제격이다. 중지를 굽혀 엄지에 대고 가슴에서 위아래로 향한 양손은 아미타구품인의 수인처럼 보인다. 얼굴과 손은 입체감을 살린 환조식 고부조 묘사인 데 비하여, 양 어깨에 걸친 법의의 옷주름과 발은 얕은 저부조로 표현되어 있다. 의습은 깊은 음각 선묘이고, 눈· 코· 입, 손과 손톱, 발가락 등은 살맛이 돌게 조각하였다. 그러면서도 전면에는 위에서 아래로 쪼은, 가는 선의 정 자국을 까실하게 남기고 있다. 이러한 조각수법에다 상체가 긴 비례와 도식화된 의습 처리는 신라 석불형식에서 탈피한 고려 초의 경향을 뚜렷이 보여준다. 10세기의 전형적인 돌부처, 거불(巨佛)양식을 따른 마애불이다. 둔중하면서도 당찬 표현에 고려 건국의 새 희망과 기대감이 실려 있다. 바위의 때깔이 누래서 마애불은 마치 황금부처 같다. 그 때문에 생긴 한 스님의 일화가 전해온다. 어느날 한 스님이 돈에 궁했던지 한밤중 달빛 아래 마애불을 대하니 전체가 황금으로 보였다. 무릎 한쪽을 떼내어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다음날 장에 갔는데, 팔려고 보자기를 열어보니 돌덩어리였다는 것이다. 성직자를 속화시킨 설화이다. 실제로 마애불을 찬찬히 살피면 오른발을 얹은 왼쪽 무릎의 자국이 눈에 띈다. 그 승려가 떼어낸 듯한 흔적처럼 보여 흥미롭다. 이 마애불의 오른쪽 아래에는 ‘묘길상(妙吉祥)’이라는 행서체의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정조 때의 문인 관료인 직암(直菴) 윤사국(尹師國, 1728~1809)이 쓴 글씨이다. 묘길상 외에도 윤사국은 삼불암(三佛岩)을 비롯해서 내금강 바위 곳곳에 각자(刻字)를 남겼다. 그가 강원도 관찰사(1790~93)로 재직할 때 새겼던 것으로 보인다. 윤사국은 내금강에 있는 다른 사찰의 복원에도 힘을 기울였다. 묘길상은 문수보살의 별칭이다. 중향성 아래에 불상이 위치해 있어서 그렇게 불렸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중향(衆香)은 유마대사가 문수보살과 불자들을 공양하기 위해 그들에게 향반을 먹였다는 《유마경(維摩經)》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마애불의 도상으로 보아서는 보살상이라기보다 여래상이다. 그래서 이 마애불을 《화엄경》에 나오는 금강산의 주존 ‘비로사나불’로 해석하기도 한다(최남선, <금강예찬>). 금강산의 심장부를 지키며 비로봉과 중향성을 향해 밤낮으로 정좌해 있고, 비로봉에 오르는 길목을 지키고 있으니, 비로사나불로 보는 것도 무리가 없을 법하다. 물론 수인은 비로사나불의 전유물인 지권인을 하고 있지는 않다. 마애불의 앞에는 3.6미터 가량의 불을 밝히는 석등이 놓여 있다. 기단, 기둥, 화사석 받침, 옥개석 등이 모두 사각형인 특이한 형식인데, 마애불과 동시에 제작된 고려시대의 석등으로 추정된다. 불을 켜는 화사석 공간은 둥근 대나무통 모양의 기둥으로 네 곳을 받쳐 만들어졌는데, 석등 앞에는 3층의 돌계단까지 마련돼 있다. 이 거대한 황금부처는 그 석등의 불빛 아래에서라면, 그야말로 살아 생동하는 영험을 내리지 않았을까. 김윤겸· 김홍도· 엄치욱 등 조선시대 내로라 하는 화가들이 묘길상을 즐겨 그렸는데, 그만큼 이 마애불에 많은 애착을 가졌던 때문일 것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