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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21일 월요일 오전 12시 13분 06초
제 목(Title): 퍼온글/모험 일천년사-뉴욕타임즈선정



■NYT가 본 모험 1천년史 
美대륙 발견서 화성탐사까지
아폴로11호 달착륙 인류모험사 큰 걸음…인간 내면세계 탐험 '카운트 다운' 
 
     
 지난 1000년 간의 이야기는 일련의 위대한 모험들로 짜일 수 있다. 이를테면 
마르코 폴로의 중국 여행, 콜럼버스의 신대륙을 향한 항해, 루이스와 클라크의 
태평양을 향한 북미 대륙 횡단 모험, 다윈의 갈라파고스섬 탐험 같은 것들이다. 
호머의 서사시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모험의 역사는 길다. 그러나 지식을 얻기 
위해 미지의 세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지난 밀레니엄이 남긴 특별한 유산이다. 
지난 1000년의 모험은 북미대륙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으로 알려진 위대한 바이킹 
레이프 에릭슨에서 시작해 화성 표면을 탐사했던 로봇 '소저너'로 끝을 맺었다. 
현대의 탐험가는 '미지의 세계'(Terra Incognita)를 찾기 위해 또 어디로 가야 
할까?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밀레니엄 특집의 세 번째 주제로 지난 1000년 간의 
모험사를 잡았다. 그러나 모험사를 연대기적으로 나열하거나 소개하는 대신 과거의 
위대한 모험이나 탐험의 의미를 오늘에 되살려 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를 
위해 현대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와 과학자, 예술가, 소설가, 사진가 등이 위대한 
모험가들―그중에는 성 프란시스도 있고, 마크 트웨인의 소설 속 주인공 허클베리 
핀도 있다―의 족적을 따라가거나 당시 상황을 재연한다.

지난 1000년의 모험사에서 가장 먼저 짚어야 할 것은 '모험가'(Adventurer)라는 
말의 변천사다. 본래 이 단어는 '도박꾼'을 뜻했다. 16세기에는 급료를 받지 않고 
군대에 복무하면서 전쟁에 진 사람들을 약탈해 생계를 꾸려가는 군인들도 모험가에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정작 영웅임을 자처했으므로 모험가라고 불리는 것을 
모욕으로 여겼다.

맨몸서 휴대용 GPS로 장비 현대화 

모험가의 지위를 격상시켜 준 것은 17세기 존 밀턴이다. 그는 '실낙원'에서 
천국으로부터 추방된 타락천사들의 지도자인 루시퍼를 '위대한 모험가'라고 
불렀다. 루시퍼는 악마였지만 어쨌든 모험가라는 '위대한' 존재로 뛰어오른 것이다.

그러나 모험가라는 말은 20세기에 들어서도 그리 좋은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 
1920년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모험주의'라는 말을 가장 위험한 형태의 정책을 
가리킬 때 썼다. 영국의 해럴드 니컬슨은 1932년에 발표한 '공인들'(Public 
Faces)이라는 글에서 대중이 "처칠 정부를 모험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며 쫓아내 
버린" 것을 개탄했다.

그러나 오늘날 '모험가'는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기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낭만적'이고 '용기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뀌었다.

바뀐 것은 뜻만이 아니다. 모험가들이 썼던 도구며 장비, 음식, 문화도 극적인 
변천을 겪었다. 가령 서기 1000년경에 바다를 누볐던 레이프 에릭슨의 경우를 
보자. 그의 탐험대가 썼던 배는 전적으로 근육의 힘에 의존해야 하는 노젓는 
배였다. 운이 좋을 때는 바람이 동력원 구실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나침반이 
없었으므로 천문관측에 의해 항해의 방향을 '추정'해야 했고, 이끼(Moss)가 주된 
음식이었다. 환자에게는 약초와 찬송가, 혹은 마법이 전부였다. 그들의 빛나는 
탐험 역정은 전설이나 불완전한 기록으로 남았다.

1969년 닐 암스트롱과 버즈 올드린이 아폴로11호를 타고 달에 착륙한 사건은 
인류의 모험사에서도 거보(巨步)였다. 모험의 차원을 한 단계 끌어올린 
대사건이었다. 당시의 운송수단은 새턴 Ⅴ형 로켓, 배의 나침반 구실을 한 것은 
휴스턴의 첨단 관제소였다. 22겹으로 이루어진 우주복, 액체냉각제가 든 내의 등은 
모험가의 '패션'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고, 일기나 책, 사진 등으로 짜였던 
'기록'의 형식도 TV 생중계라는 사상 초유의 이벤트로 바뀌었다.

요즘의 모험은 그 형식에서 더욱 '첨단'으로 치닫고 있다. 과거에는 자연의 
위협이나 예기치 않은 위험을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도리어 그러한 위험과 긴장을 찾아간다. 대부분의 모험 행로가 이미 닦여 있기 
때문에 그와는 어떻게든 다르게, 좀 더 위험스럽고 긴장되게 그 내용과 형식을 
꾸민다. 현대의 모험가들은 험로 주행에 알맞은 오프로드용 랜드로버로 탐험을 
즐긴다. 휴대용 GPS(인공위성을 이용한 위치 측정장치)가 있으므로 아무리 깊숙한 
오지에 가더라도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휴대하기 간편하면서도 영양 배합이 잘 
된 음식과, 나일론과 울로 잘 짜여진 옷이 모험 환경을 더욱 쾌적하게 만든다. 
응급 상황이 오더라도 무선통신으로 헬리콥터를 부를 수 있다. 

그의 탐험 행로는 개인 웹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고, 지구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온라인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것이 평균적인 현대 
모험가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그 환경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도 훨씬 나아졌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바닷속…우주…모험영역 넓어져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험이 주는 특유의 긴장과 흥분, 그리고 교훈이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모험이 고산준령을 등정하거나 아무도 가지 않은 오지를 탐험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가까운 공원에서도, 
심지어 앞마당 텐트 안에서도 모험의 의미를 반추해 볼 수 있다. 모험의 의미는, 
설령 이미 닦인 길이라고 해도 늘 새롭게 찾아질 수 있다. 스키를 타거나 카약을 
즐기는 것, 롤러블레이드를 타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누군가 지나간 길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소설 속 주인공의 
길을 따라가는 것도 모험의 의미를 새겨보기에 좋은 시도다. 백인 소설가인 리처드 
포드와 흑인 소설가인 스탠리 크라우치는 마크 트웨인의 소설 속에서 허클베리 
핀과 흑인 노예 짐이 보트를 타고 미시시피강을 따라 여행했던 그 길을 되짚었다. 
이들의 목적은 모험 자체가 아니라 1884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출간된 이후 
미국의 인종 문제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13세기에 활동한 성 프란시스의 고행을 따라가는 그레텔 얼리히의 모험도 매우 
신선했다. 그녀는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체스코 디 베르나르도네가 
왜 고통스러운 성자의 길로 들어섰는지 궁금해한다. 궁금증을 푸는 길은 성 
프란시스의 고향인 아시시로부터 구비오 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 행로를 통해 생각의 습관적인 양식을 깨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수양이 
필요한지 깨닫게 됐다고 고백한다. 그녀에 따르면 "(성 프란시스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여행"이었으며, 지치고 병든 자신의 고행을 
통해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남에게 베풀며 사는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226년 10월3일 그가 포르지운콜라의 예배당 바닥에 알몸으로 누워 
최후를 맞던 날 그의 몸에서 빛이 나고 교회 종들이 저절로 울렸다고 옛 기록은 
전한다.

한편 지난 1000년의 모험사는 그 영역의 확장사이기도 했다. 바닷속 탐험, 우주 
탐험, 그리고 우리 마음에 대한 탐험 등이 그 사례들이다. 이 곳은 여전히 간 
길보다 가지 않은(혹은 가지 못한) 길이 훨씬 많은 미지의 세계다. 그 중에서도 
기억과 생각, 열망, 공포, 버릇, 기술 등등의 왕국인 우리 두뇌는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신비로운 세계다. 이는 아마도 21세기의 가장 큰 개척지가 될 
것이다.

인간두뇌 등 내면탐험 새 조류 

작가인 스티븐 홀은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관련 글을 싣기 위해 직접 
자기공명영상장치(MRI) 안에 자신의 머리를 넣었다. 현재의 '두뇌 모험'이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 미래는 어떤지 알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 수준으로도 기억과 언어의 중추가 어디인지는 파악할 수 있다. 가령 
피실험자가 10개 안팎의 그림들을 보면서 이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이야기를 
창작해 말할 경우, 눈에 띄게 변화를 보여주는 곳은 우반구(우뇌), 특히 두뇌의 
후위(後位)다. 언어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논리적인 사고는 어디에서 
구축되는지, 감정은 그 종류에 따라 어느 부위에서 형성되는지에 대해서도 
개략적이나마 밝혀졌다. 

작가는 MRI 기계가 병원 침상을 대신할 먼 미래를 상상한다. 그래서 환자가 거기에 
누우면 치료사는 말(言)이나 냄새, 그림 등을 보여주면서 그의 심리상태를 
점검하고, 신경해부학자는 MRI를 통해 나온 이미지를 분석해 그의 행태와 마음을 
설명한다. MRI로 환자의 '양심'까지 분석할 수 있는 시대다. 그것이 멋진 
시대인지, 혹은 무서운 시대인지는 이 글의 논점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내면에는 언제나 미지의 세계, 혹은 아무도 가보지 못한 
처녀지에 대한 꿈이 살아 있어서 끊임없이 길을 떠나고 모험을 감행한다는 
사실이다. 
 
김상현 기자 


아프리카 첫 발견자는 중국인? 
명나라 정허, 함대 이끌고 원정…콜럼버스 미대륙 발견보다 앞서

케냐 근처의 작은 섬 파테이(Pate)에는 케냐 본토인들보다 밝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전,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한 때보다 수십년 
앞서 중국인 원정대가 아프리카까지 항해했음을 보여주는 한 증거로 보인다(아직 
정설은 아니다). 실제로 이 섬에는 아주 오래 전에 중국에서 온 배가 난파했으며, 
그때 살아남은 선원들이 이곳 원주민과 결혼, 그 후손을 남겼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콜럼버스보다 앞선 위대한 항해자, 그의 이름은 정허(Zheng He)다. 
이슬람교도이자 역적의 자식으로 어렸을 때 거세당한 그는 명나라 
성조(成祖)~선종(宣宗) 시대인 1405~33년에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7차례의 원정에 
나섰다. 300척의 배, 2만8000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는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였다. 더욱이 큰 배는 길이 가 120m나 
됐다(1492년 항해를 떠났던 콜럼버스의 선단은 배 3척, 선원 90명 규모였으며 배 
길이도 25m에 불과했다). 정허는 콜럼버스보다 50여년 앞서 동아프리카에 도착했고 
아랍상인들을 통해 유럽의 존재도 알았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유럽은 낙후된 
곳이었고, 그들의 상품인 양모와 와인도 아프리카의 상아 약초 향료 같은 
상품보다는 덜 매력적이었다. 당시만 해도 유럽을 압도했던 중국의 항해술과 
탐험문화는 1424년 정허를 총애하던 성조의 죽음과 함께 말살되고 말았다. 중국 
조정을 장악한 유학자 관리들이 일체의 항해와 배의 건조를 막은 것은 물론 당시 
3500척에 이르던 배들까지 모조리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위대한 탐험가들의 비극 


①헨리 허드슨(1611년)
영국의 탐험가- 항해가. 영국과 아시아를 잇는 북극 항로를 찾기 위해 북아메리카 
동해안에서 북방에 걸쳐 네차례 탐험에 참가. 추위와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부하들의 반란으로 내쫓겨 배 위에서 동사(凍死). 

②비투스 요나센 베링(1741년)
덴마크 태생의 러시아 탐험가-항해가. 1728년 베링 해협을 발견, 아시아와 
북아메리카가 육지로 이어지지 않았음을 증명. 시베리아와 알래스카가 같은 대륙에 
있는지를 확인하려 탐 험을 떠났다가 한 고립된 섬에 갇혀 30여 대원과 함께 
괴혈병으로 사망. 

③토발드 에릭슨(1000년경)
아우인 레이프 에릭슨과 함께 북아메리카 해안까지 항해한 첫 유럽인으로 알려짐. 
아메리카 대륙의 최동단인 뉴펀들랜드 해안에 내렸으나 원주민들의 화살 공격을 
받고 사망. 

④로저 채피, 버질 그리솜, 에드워드 화이트(1967년)
아폴로의 달 착륙 계획 중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된 사고. 1967년 아폴로Ⅰ호의 
발사 시뮬레이션 중 전기 단락에 따른 화재로 세 조종사가 독가스에 질식사. 

⑤퍼시 해리슨 포싯(1925?년)
'잃어버린 도시'를 찾기 위해 동료 두명과 함께 브라질의 정글 속으로 탐험을 떠난 
뒤 소식 두절. 1928년 구조대 파견됐으나 생사확인 불명. 

⑥데이비드 리빙스턴(1873년)
영국 선교사-탐험가. 1841년 아프리카로 건너가 49년부터 오지 탐험에 착수, 
응가미호(湖), 잠베지강 등을 발견. 66년 나일강 수원(水源) 탐험에 나섰다 실종, 
5년 뒤 수색대인 H. 스탠리와 극적 상봉. 73년 이질에 걸려 사망. 

⑦티모페예비치 예르막(1584년)
1579년 러시아 제국이 시베리아를 정복할 때 원정대를 이끌었던 코사크족의 리더. 
수년 뒤 타타르족 지도자인 쿠춤과의 전투에서 매복을 피해 물에 뛰어들었으나 
왕이 하사한 사슬갑옷의 무게를 못이겨 익사. 

⑧살로몬 아우구스트 앙드레(1897년)
스웨덴의 과학자인 앙드레는 동료 세명과 함께 열기구를 타고 북극에 도달하고자 
1896년 출발했으나 출발지인 스피츠베르겐으로부터 520km 떨어진 곳에 추락, 전원 
동사. 

⑨페르디난드 마젤란(1521년)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 최고의 항해가-모험가. 필리핀 제도의 세부섬에 도착해 
원주민과의 싸움에서 전사. 

⑩로버트 오하라 버크(1861년)
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탐험가. 유럽인으로는 최초로 오스트레일리아를 종단. 
그러나 귀환 여행에서 길을 잃고 아사(餓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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