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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쓴 이(By): Convex (4ever 0~)
날 짜 (Date): 1995년07월25일(화) 01시06분24초 KDT
제 목(Title): [러'新刊:한반도문제-새로운 시각]②金日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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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제공시각 : 07/24 09:19
 제목 : [러'新刊:한반도문제-새로운 시각]②金日成, 南侵위해 中-蘇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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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聯合) 李炳魯특파원=북한의 金日成은 南侵을 통한 무력통일을 성사시
키기 위해 中-蘇 양대 공산대국의 알력관계를 절묘하게 활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토르쿠노프 MGIMO총장 등이 저서 `한반도문제-새로운 시각'에 기술한 내용에 따
르면 金日成은 스탈린의 開戰불가라는 방침을 거역하고 毛澤東카드를 이용해 끝까지
전쟁의사를 굽히지 않았으며 마침내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냈다. 새로운 공산대국
중국을 의식한 소련수뇌부의 심리를 이용한 줄타기 외교전략의 결과였다.
    다음은 스탈린이 당초 金日成의 집요한 개전요구를 줄곳 거부했으며 김일성은
미묘한 中-蘇관계를 이용했다는 내용의 새로운 자료를 정리한 부분의 요약이다.
    『▲한국戰:새 사료, 새로운 시각
    북한은 소련의 완전한 동의와 지지하에 한국戰을 개시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들은 스탈린의 당시 입장을 자세하게 밝혀주고 있다.
    金日成은 4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 처음으로 南侵문제를 거론
했으며 스탈린은 "南侵 불필요"라고 응답했다. 스탈린은 북한軍이 절대적 우위를 보
이지 않고 있으며 남한에 미군이 남아있고 38선에 대한 美-蘇합의를 지켜야 하기 때
문에 南侵은 불가하다고 말하고 단지 한국군의 공격시에 반격하는 것은  허용한다고
말했다. 스탈린의 응답은 한국군의 북침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슈티코프북한주재  대
사의 정보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소련 지도부로부터 승인을 받지 못한 김일성은 이후 중공의 모택동에게 손을 뻗
쳤다. 그렇지만 毛澤東도 김일성의 특사 김일에게 국제정세가 여의치 않고 국민당과
내전을 치르고 있는 중국공산당이 북한을 지원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남
침을 개시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毛澤東의 유별난 자립심때문에 국제공산당 운동이 좌초할 지
로 모른다고 우려하는 소련수뇌부의 심리적 약점을 이용해 49년 5월과 9월, 50년  1
월 등 여러차례에 걸쳐 스탈린에게 꾸준하게 압력을 가했다. 그것은 중국내전이 마
무리됐기 때문에 모택동이 당초 약속대로 남침을 지원하리라는 내용의 보고였다.
    소련은 남한 주둔미군이 완전철수한뒤부터는 한국군이 북침할 가능성이  있다는
종전의 가정을 완전히 폐기했으나 김일성은 남침을 위해 여러 증거를 조작해  북침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했으며 이는 슈티코프대사를 통해 모스크바에 속속 보고됐
다.
    그 결과 소련수뇌부는 북한군을 적극적으로 강화키로 방침을 선회했다.  이에따
라 모스크바는 49년 6월 4일 정제米 3만t 을 받는 대가로 북한에 무기를 공급한다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이어 49년 8월 중순 김일성은 옹진반도 점령계획과 삼척에 `
해방구'를 만드는 문제를 슈티코프에게 제안하고 이를 스탈린에게 전달할 것을 요구
했다.
    모스크바를 잠시 방문한 슈티코프는 49년 8월 27일 스탈린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서 ▲남침은 미군은 물론 일본군의 참전을 불러 올 수 있고 ▲미국은 남침을 對蘇공
세에 활용할 수 있으며 ▲북한군은 아직 절대적 우세를 보이지 못하고 ▲한국이  이
미 상당한 군사력을 갖춰 전면전은 불가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이와함께  옹
진반도점령안과 해방구 설정안을 지지했다.

    소련은 슈티코프의 보고에 불만을 갖고 당시 북한주재 툰킨공사에게 이를  확인
토록 지시하는 전문을 보냈다. 툰킨공사는 이 지시대로 김일성 등을 면담한뒤  전면
전은 물론이고 옹진반도, 해방구설치 계획도 전면전을 뜻하므로 모두 불가하다는 상
반된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49년 9월 24일 남침불가 지시
를 평양에 보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일성은 포기하지 않고 슈티코프와 소련군 수뇌부를 졸라  스
탈린의 마음을 돌리려했다. 마침내 슈티코프는 50년 1월30일字 전문을 통해  김일성
의 면담요청을 전했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이어 같은해 4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중국과 공동으로 남침을 합의한다면 이를  승인한다는  허가를
내렸다. 김일성은 곧바로 박헌영을 대동하고 5월13일 북경으로 달려가 스탈린이  남
침을 승인했다고 알렸으며 모택동은 이를 수용했다.
    이렇게 한국전은 시작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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