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8일 금요일 오전 03시 58분 38초 제 목(Title): 퍼온글/김갑수 김정란,지식사회에 돌을 던� 김정란, 지식사회에 돌을 던져라! 유명작가 등 겨냥한 '거침없는 비판'에 찬사-비난 한몸에 요즘 도처에서 시끌시끌 김정란이다. 손쉽게는 컴퓨터 통신에 들어가서 신문검색을 해보면 확인된다. 지난해 지지난해 '김정란'이라는 검색어를 통해 등장하는 기사라야 세번째 시집에 관한 비교적 의례적인 서평이거나 썩 괜찮은 사회평론집 '거품 아래로 깊이'에 대한 우호적인 평문 정도였다. 하지만 올해 6개월 동안 검색어 '김정란'의 색인은 아연 대폭발을 일으킨다. 그게 어디 신문기사뿐인가. 문학의 언저리와 그걸 에두르고 있는 지식사회의 입놀림은 더더욱 분주해서 적극적인 옹호와 찬사에서부터 그 정반대켠의 극언에 이르기까지 술좌석의 난분분한 안주감인즉 '오, 김정란' 혹은 '우우, 김정란'이다. 그녀는 과연 무슨 '짓'인가를 저질렀다. 그 짓의 화제성은 그녀의 본업인 시 때문이라기 보다 그녀의 사회적 발언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무슨 어정쩡한 심리상태란 말인가. 그녀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파장에 대해 한마디 해야 하는 책상 앞에서 나는 명쾌한 찬반 혹은 가부의 주사위를 성큼 던지지 못한 채 쩔쩔맨다. 무언가 착종이 있고 혼미가 있고 그럼에도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심중함을 그녀의 '짓'은 안겨준다. 이럴 땐 먼저 그녀가 '좋은 나라'인지 '나쁜 나라'인지, 유치찬란한 동화적 이분법으로 성분분석을 해보는 게 순서상 유익하겠다. 예컨대 김정란은 김진명의 베스트셀러 '하늘이여 땅이여'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감상적 애국주의로 포장된 과대망상증을 대중에게 부추기는 저급한 문화상품"이라고. 베스트셀러 시인 류시화에 대해서는 "권력 또는 돈에 대한 욕망을 숨기기 위한 그럴 듯한 코스튬으로 사이비 영성주의의 모호한 안개를 피우는 인물"로 질타한다. 또한 이문열의 '선택', 이인화의 우국문학에 대해서는 한국사회 특유의 무비판적인 보수주의와 지역감정을 교묘히 이용한 논리의 곡예로 설명하고 있다. 자, 이쯤만 해도 짐작이 갈만 하지 않겠는가. 좌우의 방향키를 들어본다면 틀림없이 왼쪽에 서있는 지식인으로, 문예에 대한 태도를 본다면 엄격하고 진지한 순문학의 옹호자로서 김정란의 자리매김은 확고하다. 그래, 그럼 됐지 무엇이 시끌시끌이고 착종의 망설임 운운이란 말인가. '좋은 게 좋은 것' 풍토에 딴죽걸기 그렇다면 다음 순서로 그녀의 그물망에 걸린 이름들을 뒤섞어서 거론해 본다. 조선일보, 창작과비평, 인물과 사상, 강준만, 진중권, 신경숙, 은희경, 최영미, 신현림 등등. 길게 언급하지 않아도 눈 밝은 이들이라면 이 이름들이 함의하는 지형도를 금방 읽는다. 구태여 말해보자면, 김정란은 어느 때부터인가 강준만 대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우리 사회의 극우 파시스트 논쟁에서 좌파로 부각된 진영의 문학담당을 자임하게 됐고, 더불어 문언 유착이라는 개념을 동원해 주류문학과 제도언론의 상업주의적 결탁상을 맹공하는 스텔스 폭격기가 되었다. 김정란은 말한다. 조선일보는 그 거대한 언론권력을 배경으로 자신의 상업주의적 입맛에 맞는 '부드럽고 멍청한 애첩'같은 여성문인들만을 집중 부각시켜 왔다. 거기에 '실체보다 턱없이 뻥튀기된' 신경숙이 있고 '문제의식은 없이 오직 유명해지기만 하면 만족하는 ' 은희경이 있다고. 창작과비평사 같은 한때 진보적이었던 거대 출판사는 조선일보와 피차 상업적 배짱이 들어맞아 밀월을 즐긴다. 거기에 '시의 기본도 안돼 있는' 최영미와 신현림이 받는 각광의 비밀이 있다고. 이제 그녀는 참여연대의 인기 강연자이며 인물과사상의 주요 필진이며, 청와대 김대중대통령과의 만찬에 초대되는 유력 문인이 됐으며,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올해의 소월시문학상 수상자로서 주류의 문학적 평가도 획득하게 됐다.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 뭐 우리 사회의 한 풍토랄까, 대의명분을 확보한 총론에는 쉽사리 동의하면서도 각론에 이르러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가 걸리면 명분이고 대의고 한몫에 걷어차버리는 걸 흔히 보게 된다.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계의 대응이 그러했고 교육개혁에 대한 교직사회의 반응이 그 전형이었다. 반면 자기 이해와 한발짝 떨어진 총론적 '옳은 말씀'에 대해서는 거의 극렬에 가까운 과격성과 편향성을 쉽사리 보인다. 사실이지 김정란의 주장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다분히 그런 기색을 느끼게 된다. 특히 문학 혹은 언론에 한다리쯤 걸치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반응은 복잡미묘하면서 한층 격렬한 듯 하다. 김정란의 다기한 주장 가운데 범위를 문학으로 좁혀 놓고 그에 대한 비판적 반응을 들어본다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매명론이다. 김정란 스스로가 자신을 삼류 시인으로 표현했다거나 주류와 먼 거리에 있었던 20년 세월의 쓸쓸함을 토로한 흔적들을 들어 그래, 당신은 유명해지고 싶었던 거야, 이름을 얻고 싶은 몸부림으로 동료 문인들 그것도 성취한 인물들만 골라서 씹어대는 거야 라고. 이런 비아냥거림은 결과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 실제로 김정란은 거대 언론 조선일보에 저항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다른 유력지에 빈번히 등장하는 신분이 된다. 하지만 아마도 매명론에 대해 김정란은 다른 말을 하고 싶을 것이다. 난 잘 팔리는 작가들을 질시한 게 아니예요. 본격평론이 죽고 문학이 대중의 취향에 지배받는 기자들에 의해 좌우되는 풍토 속에서 진지하거나 난해한 작품들이 설 자리를 잃어버리는 현실을 안타까워한 거예요 라고. 하긴 요즘 황지우는 새로운 귀족주의를 주창하고 김정환은 한 5000명쯤의 독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을 하겠다고 결의를 다지는 중인데 크게 보아 맥락이 통하는 말들이 아닌가. '매명론' '철지난 비판의식' 등 반론 넘어서야 매명론이 아무래도 김정란에게 총 맞은 동네에 가까운 쪽의 반응이라면 한발 비켜서 있으면서 흘겨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어디 갔다 이제 왔니?" 쯤이 될 것 같다. 5월 광주의 80년대에 실제로 프랑스 유학씩이나 다녀온 불문학 박사로서 보들레르, 랭보, 이브 본느프와에 심취한 소위 '선병질적 악마주의'를 폴폴 풍기던 그대가 어느날 뜬금없이 거창양민학살에 인혁당에 5월의 분노라니 그건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아, 당신은 혹시 교양과 미학으로 황톳길의 죽음을 떠드는 건 아닌가? 하는 좀 가혹한 혐의가 그것이다. 실제로 용모가 뛰어난 김정란은 프랑스 사람보다 더 프랑스적인 분위기를 풍긴다고들 말한다. 엄밀히 말해 김정란의 시는 한국문학이 아니라 한국어로 쓰여진 프랑스 문학이라고 평가 하는 평론가도 있었다. 사회적 실천가로서는 좀 느닷없이 부상한 듯한 김정란. 그렇다면 흘겨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담담히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래요. 저는 멀리 있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눈을 뜨고 지금 여기 서 있잖아요?" 헌데 그녀는 소월시문학상 수상작품집의 말미에 쓴 자신의 자전에서 진보적 신념을 갖게 되는 내력으로서 자신의 과거를 관통시킨다. 그것은 혹시 현재적 시각에 충실하게 쓰여진 선택적 과거진술은 아니었을까. 김정란은 어딘가 낯설면서 신선하고 지금 커다랗고 소중하다. 그녀가 현재하고 있는 일은 "좋은 게 좋은 것"인 풍토에 대한 딴죽걸기다. 그 점에서는 그녀의 과도한 현학의 시니피앙도 모두 용서(?)가 된다. 다만 애정을 실어 한자락을 깔자면 김정란이여, 부디 진영에 함몰되지 마시라. 그것이 제 아무리 정당성을 갖고 있고 당장의 힘이 될지라도. 개별자의 우주가 탈근대의 한 지향점 아니겠는가. 김갑수/ 시인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