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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1일 금요일 오전 07시 19분 38초
제 목(Title): 배선영/어 뉴 패러다임, 해제







 해 제 (解 題)
 
     
  
 
▶ 초록(抄錄 ; ABSTRACT)
 
▶ 서문(序文)
 
▶ 요약본 다운받기
 
▶ 한국의 외환위기의 원인에 관한 소고
 




 
 

   먼저, 저자가 한 사람의 경제학도로서 거쳐 온 행로(行路)에 언급하고자 한다. 
삼십대에 불과한 나이로 "행로"를 운운(云云)하는 외람됨을 범하려고 하는 
저자로서는, 저자가 경제학에 개안(開眼)하게 된 것이 단순히 천부(天賦)에 의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과, 저자가 케인즈를 좋아하는 것이 단순히 우상(偶像)을 
추종하는 차원의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 독자제위께서 일말(一抹)의 주의(注意)라도 
기울여 주시기를 앙망(仰望)할 따름이다.

   저자는 케인즈를 좋아한다. 1883년에 영국에서 태어나서, 1936년에 불후의 명저 
{고용과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The General Theory of Em- ployment, 
Interest and Money)을 통하여 현대경제학의 양대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유효수요이론(有效需要理論)과 유동성선호설(流動性選好說)을 세상에 내놓고, 
1946년에 다채로운 일생을 마친, 위대한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저자는 그를, 무엇보다도 정신적인 스승으로서, 그리고 
선망(羨望)과 추종의 대상으로서, 그러면서도 도전과 경쟁의 대상으로서 좋아한다.

   저자는 고등학교 때, 대학생이던 가형(家兄)〔故 裵敦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몇 권의 경제학교과서들을 한 장 두 장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경제학에 
입문하게 되었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케인즈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내 그의 
인력(引力)에 이끌리게 되었다.

   저자가 대학에 입학한 해는 1978년이었는데, 저자는 그때부터--- 어린 
마음에--- 설사 케인즈에 필적(匹敵)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에 버금갈 수는 
있는 경제학자가 한번 되어 보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같은 꿈이 
비상(非常)한 노력(努力) 없이 이루어질 리는 만무(萬無)할 것이라고 생각한 
저자는, 또한 그때부터 나름대로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여 경제학을 
천착(穿鑿)하기 시작하였다.

   저자는 학부과정 4년 동안의 면학(勉學)을 통하여 특히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즉, 케인즈의 유효수요이론은 자본주의경제가 존속하는 한 그 타당성을 잃을 수 
없는 불멸의 이론임이 분명하지만, 그의 유동성선호설은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하여 전면적으로 수정되어야 할 허구적인 이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자의 재능이 원래 부족하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경제학을 
공부하는 도중에--- 다른 한편으로---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멋진 
여학생과의 데이트를 즐기고, 게다가 고시공부(考試工夫)를 병행하기도 한, 저자의 
그 약간의 불성실(不誠實)과 과욕(過慾)을 하늘이 조금 못마땅하게 여기셨기 
때문인지, 어쨌든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저자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계를 
학부과정을 졸업하기 전까지 완료하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1982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다 집중적으로 구상(構想)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석사과정에 진학하였고, 저자의 정진(精進)은 계속되었다.

   당시에 저자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상하면서 걸었던 논리적 소로(小路)는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히 전인미답(前人未踏)의 험로(險路)였고 또한 
다기망양(多岐亡羊)의 미로(迷路)였다. 저자의 그 노정(路程)은 한마디로 고독한 
투쟁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그 고독한 투쟁이 그 자체로서 하늘에 치성(致誠)을 드린 것이 
된 셈이었는지, 어쨌든 저자는 그 고투(孤鬪)의 과정에서 숱한 논리적 난관들을 
하나하나 극복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1983년 2월경, 마침내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계를 완료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여담(餘談)이지만, 1983년은 
경제학계에서 사회주의경제학의 태두인 마르크스(K. H. Marx)의 사거(死去) 백 
주년과 자본주의경제학의 두 거장들인 슘페터(J. A. Schumpe- ter)와 케인즈의 
탄생 백 주년을 동시에 기념하는 해였는 바, 그 뜻 깊은 해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胎動)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고독한 투쟁은 그 지점에서 끝나지 않았다. 
역설적(逆說的)이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의 설계를 완료하는 저자의 그 성공은 
저자를 오히려 더 큰 시련(試鍊)의 장(場)으로 들어서게 하였다.

   그 시련이란, 설계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공(施工)하는 어려움, 즉, 그 구상된 
바를 글로 옮기는 어려움이었다. 사실상, 공자(孔子)께서도 {역경}(易經)의 
[계사상전](繫辭上傳)에서

   "글은 말을 다 표현하지 못하며, 또한, 말은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書不盡言하고, 言不盡意니라.)

라고 말씀하셨는 바, 그러할진대, 구상된 새로운 패러다임을 글로 옮기는 작업은 
"뜻"을 곧바로 "글"로 다 표현하려는 작업이었으므로, 그 작업이 결코 쉬울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저자는, 이미 1983년 3월부터 
행정공무원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어, 집필에만 전념할 수도 없는 처지에 줄곧 놓여 
있었던 것이다.

   저자는, 학창시절에, 졸업 후 그 기간이 길든 짧든〔한국의〕행정공무원으로 
한번 일해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었고, 그리하여, 1983년 3월에 행정사무관으로 
임용된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에서 실무자로 바쁘게 일해 
왔다. 그런데, 이렇듯 저자가 일찌감치 행정공무원을 지망하고 또 그에 따라 지난 
십수 년 간 고생스럽지 않다고 할 수만은 없는 그 생활을 해 오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동기(動機)들이 작용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그 동기들 가운데 두 가지를 
밝히기로 하겠다.

   첫째, 저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저자 스스로 직접 현실의 경제에 적용해 보고 
싶었다. 저자로서는--- 케인즈도 자신의 이론을 자기 스스로 직접 현실의 경제에 
적용해 보려 하였다는 사실을 염두(念頭)에 두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현실적 
타당성을 저자 스스로 직접 검증해 보고 싶었다 :

   저자는--- 특히--- 1989년 5월부터 1993년 4월까지 재무부 증권국에서 근무하는 
중에 크게 보아 두 차례에 걸쳐 그 적용 내지 검증의 기회들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해제(解題)의 구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가 발생하기는 하지만〕 
설명을 첨기한다면,

그 첫번째는--- 말하자면--- "주가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 내지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1986년 이래 활황을 구가(謳歌)해 오던 한국의 주식시장에서는 1988년과 
1989년의 2개년 동안 대규모의 주식발행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주식발행은 
성격상--- 기본적으로--- "방만(放漫)한 주식발행"이었다. 그리하여, 한국의 
주식시장은, 그 과정에서, 활황의 가도(街道)를 질주(疾走)하다가 주식발행의 
과다라는 장애물에 걸려 침체의 계곡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저자는 1989년 6월경부터 재무부의 안팎에서--- 저자의 상사(上司)들과 동료들, 
그리고 증권회사의 임 직원들과 상장기업의 임 직원들 및 언론기관의 기자들 등 
저자가 만나 뵐 수 있었던 거의 모든 관계자들께--- 그 침체의 임박을 예고하는 
한편, 그 침체에 대비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주식발행의 급증추세에 
제동을 걸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역설(力說)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시는 한국의 주식시장에서 사상최대의 활황국면이 외견상으로는 기세(氣勢)를 
올리며 진행되고 있던 무렵이었기 때문에, 저자의 말씀을 들어 보신 분들께서는, 
처음에는 거의 모두가 그 고언(苦言)을 엉뚱한 이야기라고 판단하시고서 
묵살(默殺) 또는 무시(無視)하셨다.

   결국, 한국의 주식시장은 1989년 종반에 즈음하여 기어코 사상최대의 
침체국면으로 걷잡을 수 없이 침몰하기 시작하였고, 1989년 4월 1일에 1,007.77의 
수준까지 상승하였던 종합주가지수는 1992년 8월 21일에는 459.07의 수준까지 
하락하였다.

   저자는 1989년 종반 이후--- 만시지탄(晩時之歎)의 심정으로--- 그 침체의 
극복을 위한 몇 가지 방안들을 입안하였고, 그것들은 곧바로 재무부의 
공식대책들로 시행되었다.

   저자는 당시에 많은 분들 앞에서, 그 대책들이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된다면 그 침체로부터의 회복(恢復)이 1993년 초 중반 이후부터, 그리고 일단 
시작되고 나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 같다고 전망하였었는데, 우연의 
일치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주식시장은 1993년 중반에 즈음하여 
회복국면에 진입하였고, 종합주가지수는 1994년 8월 11일에 사상최고인 1,138.75의 
수준까지 상승하였다.

   한편, 그 두번째는--- 말하자면--- "이자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적용 내지 
검증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한국의 금융시장에서는 1989년 하반기가 시작될 무렵부터 1992년 상반기가 
종료될 무렵까지 근 3년 동안 고금리(高金利) 및 자금고갈(資金枯渴)의 시기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있으면서 고금리 및 자금고갈의 
현상이 가장 심화되었던 연도는 1991년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한다면, 
회사채유통수익률만 하더라도 연 20%의 수준에 접근하고 사채금리(私債金利)는 
이른바 A급어음에 적용되는 할인율 기준으로도 연 25%의 수준에 접근하는 등 
제반의 실세금리들이 천정부지(天井不知)로 치솟아 있었고, 기업들은 그에 따른 
과중한 금융비용부담과 함께 극심한 자금고갈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상황이 그와 같이 심각하게 전개되자, 재무부와 그 주변에서는 --- 
허다(許多)한 경제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금리의 
하향안정화와 자금사정의 완화를 성공적으로 도모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하여 
하루가 멀게 난상토론(爛商討論)이 벌어졌지만 ; 그러나, 일방에서 금리의 
하향안정화와 자금사정의 완화를 도모하기 위하여는 통화의 공급을 확대하는 것이 
불가피(不可避)하다고 주장하면, 타방에서는 통화의 공급을 확대하는 것은 물가를 
자극하는 것이므로 채택이 불가(不可)하다고 반대하는, 그러다가 어느 누구도 
현실적인 대책은 제시하지 못하는 소모적인 논쟁만 되풀이되었다.

   저자가 채권순증발행(債券純增發行)의 축소조절이라는 저자의 비책(秘策) ?〕을 
꺼내 보이기 시작한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저자는 1991년 6월경부터, 
채권순증발행의 축소조절이 금리의 하향안정화와 자금사정의 완화를 물가를 
자극함이 없이 성공적으로 기약(期約)할 수 있는 묘책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견해를 피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저자의 견해가 재무부의 공식견해로 채택되고, 그리고 그에 따라 저자의 비책이 
재무부의 공식대책으로 시행된 때는 1992년 1월경이었다.

   저자는 당시에 많은 분들 앞에서--- 특히, 그 대책의 발표 및 설명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그 대책이 일관성 있게 지속적으로 추진된다면 그 효과는 
조기(早期)에 나타나게 되어 이를테면 1992년 4/4분기에는 회사채유통수익률이 연 
14% 내외의 수준을 유지하게 될 것 같다고 전망하였었는데, 이 또한 우연의 
일치였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금융시장에서는, 자금사정은 1992년 
2/4분기가 채 종료되기도 전에 현저히 완화되었으며, 회사채유통수익률은 1992년 
4/4분기에는 연 14% 내외의 수준을 유지하다가 1993년 3월 29일에는 사상최저인 연 
10.95%의 수준까지 하락하였다.

   둘째, 〔저자가 행정공무원을 지망하고 그 생활을 해 오게 된 데에 작용한 또 
하나의 동기를 밝힌다면〕 저자는 이 책을 저자의 일신(一身)이 편안한 상태에서 
저술하고 싶지 않았다. 저자로서는, 오히려, 그 역경(逆境)이 불가피하게 닥쳐온 
것이든 아니면 자기희생의 각오로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선 것이든, 역경 속에서 
분발하여 역사적인 명작들을 탄생시킨 위인(偉人)들을 본받고 싶었다 :

   주(周)나라 문왕(文王)께서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에 의하여 유리( 里)의 
감옥에 구금되신 상황에서 역(易)〔周易〕의 원리를 연역(演繹)하셨고, 공자께서는 
"상가지구"(喪家之狗)의 신세로 진(陳)나라와 채(蔡)나라 사이를 떠도시다가 
당신의 도(道)가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절망하신 상황에서 {춘추}를 
찬술(纂述)하셨다. 그리고, 손빈(孫 )은 방연(龐涓)의 모함으로 두 다리가 잘린 
뒤에 "손가(孫家)의 병법(兵法)"을 집대성하였고, 굴원(屈原)은 간신들의 참소로 
방축(放逐)을 당한 뒤에 [이소](離騷)를 창작하였으며, 사마천은 직언을 하다가 
"이릉의 화"를 입은 뒤에 {사기}를 편찬하였다. 또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각각 불우하고 궁핍한 가운데 불멸의 명시(名詩)들을 남겼으며, 모차르트(W. A. 
Mozart)와 베토픈(L. v. Beethoven)은 각각 가난과 청각장애에 시달리면서 영원한 
명곡(名曲)들을 남겼다.

   한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선생께서는 장장 27년 동안 객사(客死)의 
위험을 무릅쓰시고 국토 전역을 답사하신 끝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셨고, 마르크스는 가족들이 영양실조로 죽어 가는 비참한 환경에서 
{자본론}(資本論 ; Das Kapital)을 집필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도 특허업무를 담당하는 하위직 행정공무원의 초라하고 
빈궁한 생활을 감수하고서 특수상대성이론 등 현대물리학의 서막을 올리는 
주요이론들을 정립하였으며, 케인즈도 건강을 상실하는 희생을 감수하고서 
{일반이론}을 집필하였다.

   그러므로, 논리가 비약(飛躍)하는 일면이 없지 않지만, 이 대목에서 저자는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필사(必死)의 산고(産苦) 없이 태어나는 작품은 그것이 
아무리 천재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역사적인 명작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이다. 이 점에 대하여 독자제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

   아무튼, 저자는, 저자에게 적지 않은 희생이 요구된 고독하고 또 고통스러운 
투쟁을 통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고, 그 저술에는 약 13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사설(辭說)이 너무 길어진 데에 대하여 독자제위의 용서(容恕)를 구한다. 이제, 
이 책의 체재(體裁)에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이 책의 구성(構成)에 관하여 설명하기로 하겠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이 세 개의 편(篇)들로 구성되어 있다 :

① 저자는 1983년 하반기에 [화폐분석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건설을 위한 
하나의 시도]라는 다소 긴 제목의 논문을 작성한 적이 있다. 저자의 
석사논문이기도 한 그 논문에는 저자가 이 책에서 논의하고자 한 바의 중요한 
일부가 소박(素博)하게--- 그러나, 그런 만큼 오히려 더 생동감(生動感) 있게 --- 
수록되어 있는데, 그 논문의 본체(本體)를 그대로 두고서 거기에 매만져 다듬는 
차원의 가필(加筆)을 행하여 엮은 것이 제1편이다. 저자는, 이 제1편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기존화폐이론의 허구성(虛構性)을 논파(論破)하였고, 그 
후반부에서는 주로 새로운 패러다임의 건설을 위한 기본구상을 소개하였다.

② 제2편은 제1편의 전반부에 대한 보론(補論)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2편에서는, 대체로, 제1편의 전반부에서 이미 논의된 것들이 보다 더 상세하게 
다시 논의되었다.

③ 제3편은 제1편의 후반부에 대한 보론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제3편에서는, 
대체로, 제1편의 후반부에서 미처 논의되지 않은 것들이 체계적으로 새로이 
논의되었다.

   아울러, 이 책의 서술방식에 관하여 설명하기로 하겠다. 저자는, 이 책에 
담겨질 저자의 구상을 서술함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문장의 평이성(平易性)보다는 
그것의 명료성(明瞭性)을, 그리고 논리전개의 간이성(簡易性)보다는 그것의 
엄밀성(嚴密性)을 공히 중시하였고, 그리하여, 그 목적을 위하여 단어의 선정 
어순의 조정 문장부호의 사용 단락의 구분 및 수사법(修辭法)의 구사(驅使) 등 
작문(作文)에 필요한 각각의 과정에서 매번--- 진정 이 책의 어느 한 군데에서도 
빠짐없이--- 심혈(心血)을 기울였다.

   케인즈는 지금으로부터 만(滿) 60년 전인--- 그러고 보니, 
역학적(易學的)으로는 꼭 한 갑자(甲子) 전인--- 1935년 12월 13일에 {일반이론}의 
서문을 통하여 그 책의 독자들에게 의미심장(意味深長)한 메시지 하나를 남겼다. 
그런데, 케인즈의 그 메시지와 저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독자제위께 남기려고 하는 
메시지는 그 내용이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하여, 이 시점에서 저자가 60년의 
세월을 격(隔)하고서도 케인즈에 대하여 어떤 묘한 연대감(連帶感)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것인 바, 아무튼, 저자가 가장 존경하는 경제학자 케인즈의 그 
메시지는--- 따라서 저자의 그 메시지도--- 다음과 같다 : 

   "이 책을 저술하는 일은 저자에게 있어서는 기나긴 탈출(脫出)의 고투(苦鬪)--- 
사고(思考)와 표현(表現)의 습관적 방식들로부터의 탈출의 고투--- 였는 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있어서도, 그 습관적 방식들에 대한 저자의 공격이 성공적인 
것이 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일은 똑같이 탈출의 고투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 책에서 매우 공(功)들여 표현하는 관념들은 
〔기실에 있어서는〕 지극히 단순하고 또 너무나도 자명(自明)한 것들이다. 
어려움은, 새로운 관념들〔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대부분이 
자라 온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 온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마음들 속의 모든 
구석들에까지 그물 모양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러한 낡은 관념들로부터 
탈출하는 데에 있는 것이다."

   (The composition of this book has been for the author a long struggle of 
escape, and so must the reading of it be for most readers if the author's 
assault upon them is to be successful, --- a struggle of escape from habitual 
modes of thought and expression. The ideas which are here expressed so 
laboriously are extremely simple and should be obvious. The difficulty lies, 
not in the new ideas, but in escaping from the old ones, which ramify, for 
those brought up as most of us have been, into every corner of our minds.)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고서 하늘의 
명(命)을 기다린다는 그 마음가짐으로 독자제위의 공정한 평가를 기대한다.

 

1995년 12월 13일

저 자 배 선 영 지(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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