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1일 금요일 오전 07시 17분 36초 제 목(Title): 배선영/어 뉴 패러다임 , 서문 서 문 (序 文) ▶ 초록(抄錄 ; ABSTRACT) ▶ 해제(解題) ▶ 요약본 다운받기 ▶ 한국의 외환위기의 원인에 관한 소고 기성의 경제학이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일컬으며, 그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위세로 당대를 풍미하고 있을 때, 그것에 필마단창(匹馬單槍)으로 도전하여, 마침내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경제학의 역사에 일대변혁을 불러일으키는 획기적인 이론서--- 그런 저서들이 금세기 들어 두 권 있을 수 있다면, 그 첫번째 책으로는 일단 케인즈(J. M. Keynes)의 {일반이론}(一般理論 ; The General Theory)이, 즉, 1936년에 영국에서 출간된 그 역저(力著)가 선정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두번째 책으로 선정될 역작(力作)은 과연 어느것인가 ? 저자는 감히 단언한다. 그것은 목하 한국에서 출간되는 저자의 {새로운 패러다임}(A New Paradigm) --- 즉, 바로 이 책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께서는, [답성호원](答成浩原) 제2서에서, 그 이전까지 성리학의 대가들이 치열하게 벌여 왔던 이기논쟁(理氣論爭)에 결연(決然)히 종지부를 찍으시면서, 이(理)와 기(氣)의 속성들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셨다 : "대저, 발(發)하는 것은 기(氣)요, 발하게 하는 소이(所以)는 이(理)다. 기가 아니면 능히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하게 하는 것이 없다." (大抵發之者는 氣也요, 所以發者는 理也니라. 非氣則不能發하며, 非理則無所發이니라.) 그런데, 선생께서는 이 말씀 바로 아래에 다음과 같은 자신만만(自信滿滿)하신 말씀을 첨기하셨다 : "〔위에서 말한 바의〕 '發之' 이하 스물세 글자는, 후세에 성인(聖人)이 다시 탄생하더라도 이 말을 개역(改易)하지는 못할 것이다." (發之以下二十三字는, 聖人復起하여도 不易斯言이니라.) 선생께서는, 이미 스물세 살의 연세로 [천도책](天道策)을 논술하시어 중국의 천하에까지 문명(文名)을 떨치셨고, 마침내 서른일곱 살의 연세로 이기철학(理氣哲學)의 결정판을 정립하셨다. 사마천(司馬遷)은 자신이 어떠한 결의(決意)로 {사기}(史記)--- 원명(原名)은 {태사공서}(太史公書)--- 의 편찬에 임하였는지를 이렇게 술회하였다 : "선친(先親)께서는 소자(小子)에게 말씀하시기를, '주공(周公)께서 졸(卒)하시고 나서 500년이 지난 연후에 공자(孔子)께서 나오셨다. 그런데, 공자께서 졸하시고 나서 지금까지 다시 500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이제, 옛적의 밝은 세상을 이어서 알리고, {역경}(易經)의 전(傳)〔孔子의 十翼〕을 바르게 해석하고, {춘추}(春秋)의 뒤를 잇고, 또한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및 {악경}(樂經)의 근본을 밝힐 수 있는 사람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는가 ? ' 라고 하셨다. 선친의 뜻이 여기에 있었구나 ! 그 뜻이 여기에 있었구나 ! 소자가 어찌 감히 그 뜻을 좇지 아니할 수 있으리오 ? " (先人有言하시기를, [自周公卒五百歲에 而有孔子러라. 孔子卒後에 至於今五百歲니, 有能紹明世하고, 正易傳하고, 繼春秋하고, 本詩書禮樂之際아 ? ]라 하시니라. 意在斯乎라 ! 意在斯乎라 ! 小子何敢讓焉이리오 ? ) 그에게는 예기치 않은 화액(禍厄)--- 이른바 "이릉(李陵)의 화(禍)"--- 이 밀어닥쳤다. 그러나, 그는 그 모진 시련과 고초를 견디어 내고서 기어코 {사기}를 완성하였다. 그는 그 위대한 사서(史書)의 찬술(撰述)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하였다 :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절이어서, 죽간(竹簡)에 새기기도 하고 목간(木簡)에 칠하기도 하여 일일이 엮은 것이〕 모두 130편(篇)에 52만 6500자(字)다. 이 책을 {태사공서}라고 이름하기로 하겠다. 정본(正本)은 이름난 산에 간직하고, 부본(副本)은 서울에 두어, 후세에 탄생할 성인(聖人)들과 군자(君子)들의 평가를 기다리기로 하겠다." (凡百三十篇이요, 五十二萬六千五百字니라. 爲太史公書하노라. 藏之名山하고, 副在京師하여, 俟後世聖人君子하노라.) 제갈량(諸葛亮)은 열아홉 살이 되면서부터 매양 자신을 비기기를, 문(文)〔內政 및 外交〕으로는 관중(管仲)에, 그리고 무(武)〔軍事〕로는 악의(樂毅)에 비기곤 하였다. 관중은 누구던가 ? 춘추시대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에게 등용되어 그를 당대의 패자(覇者)가 될 수 있게 한 재상(宰相)이 아니던가 ? 악의는 누구던가 ? 전국시대에 연(燕)나라 소왕(昭王)에게 초빙되어 그를 당대의 맹주(盟主)가 될 수 있게 한 무장(武將)이 아니던가 ? 제갈량은, 양양성(襄陽城) 밖 융중(隆中) 땅에서 포의(布衣)를 입고 몸소 밭을 갈던 일개서생(一介書生)에 불과하였었으나, 그 시절에 이미 자신을 관중과, 그리고 또 악의에 견주었던 것이다. 그는 스물일곱 살에 유비(劉備)를 위하여--- 현신(賢臣)을 얻으려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불사(不辭)한 그 유비를 위하여--- 출사(出仕)하였다. 그 뒤, 그는, 과연 한 조각의 근거지도 가지고 있지 못하던 유비를 촉한(蜀漢)의 창업주가 될 수 있게 하였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단 그 유명한 "천하삼분(天下三分)의 계책"을 실현시켰다. 촉한의 승상 제갈량--- 그의 명성은 관중과 악의의 그것들을 오히려 능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천시(天時)를 만나지 못한 그는, 선주(先主) 유비의 대를 이은 불민(不敏)한 후주(後主) 유선(劉禪)을 또한 단심(丹心)으로 섬기며 계속 국궁진췌(鞠躬盡 )하다가, 오장원(五丈原) 싸움터에서 그만 기력을 잃어, 결국 사직의 융성을 도모하려던 뜻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쉰네 살로 절명(絶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불세출의 탁월한 군략가로서, 그리고 만고에 길이 기려질 충절의 화신으로서, 청사(靑史)에 빛나는 이름을 남겼다. 그러기에, 시성(詩聖) 두보(杜甫)도, [영회고적](詠懷古跡) 제5수에서는 "제갈량의 큰 이름은 우주에 드리워지고, 왕조(王朝)의 공신(功臣)으로 남긴 초상(肖像)은 엄숙하고, 청아하고, 또 고결하구나." (諸葛大名은 垂宇宙요, 宗臣遺像은 肅淸高라.) 라고 읊어 그를 한껏 칭송하고, [촉상](蜀相)에서는 "군사(軍師)를 내었으나, 싸움에 이기기 전에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로 옷깃을 적시게 하는구나." (出師未捷에 身先死하니, 長使英雄으로 漏滿襟이라.) 라고 읊어 그를 또한 한껏 애도하지 않았던가 ?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에게 있어서, 1919년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一般相對性理論 ; allgemeine Relativit tstheorie)이 실험적으로 검증되었던 최초의 해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빛이 전파되는 경로는, 진공 속에서는 단순한 직선이 되지만, 중력장(重力場) 속에서는 중력이 작용하는 방향으로 편향(偏向)하는 곡선이 된다. 그리하여, 그의 이론에 의할 때, 어떤 항성(恒星)에서 출발하여 지구에 도달하는 빛이 도중에 태양의 주 변〔에 형성되어 있는 중력장〕을 통과하게 된다면, 그 빛은 그 곳에서 태양의 중심부 방향으로 편향한 연후에 지구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바로 1919년에, 에딩턴(Arthur Eddington)과 코팅햄(E. T. Cottingham) 등 영국의 천문학자들이, 그 해 5월 29일의 개기일식을 이용하여, 태양의 뒤편에 있게 된 항성에서 나온 빛이 태양의 가장자리에서 태양의 안쪽으로 편향함에 따라 그 항성의 겉보기 위치가 평소의 경우에 비하여 태양의 바깥쪽으로 옮겨 있게 되는 현상, 즉, 이른바 "항성의 변위(變位)"(star displacement)를 관측하는 데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 무렵에 자신의 제자 로젠탈 슈나이더(Ilse Rosenthal Schneider)로부터 일반상대성이론이 실험적으로 검증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때,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 "그렇다면, 나는 아마 거룩한 신(神)께 유감(遺憾)을 표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나의 이론은 옳다." (Da konnt' mir halt der liebe Gott leid tun, die Theorie stimmt doch.) 그는, 1905년에는 스물여섯 살의 나이로 특수상대성이론(特殊相對性理論 ; spezielle Relativit tstheorie)을 정립하여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電氣力學)에 관하여](Zur Elektrodynamik bewegter K rper)를 발표하고, 1916년에는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일반상대성이론을 정립하여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Die Grundlage der allgemeinen Relativit tstheorie)를 발표하는 등, 자신의 천재성(天才性)을 모두 바쳐 현대물리학의 지평(地平)을 열었다. 이제, 독자제위(讀者諸位)께서는, 우리가 흔히 자부심(自負心)이라고 일컫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되새겨 보셔야 하실 것이다. 이이 선생께 자부심이 없었다면, 선생께서는 우리들 후손들에게 율곡의 철학을 남겨 주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사마천에게 자부심이 없었다면, 그는 "역사학의 비조(鼻祖)"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제갈량에게 자부심이 없었다면, 그는 후대(後代)의 영웅들로 하여금 눈물로 옷깃을 적시게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에게 자부심이 없었다면, 그는 "20세기의 코페르니쿠스"(a Co- pernicus in the 20th century)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저자에게 그 자부심이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면, 저자는 이 책을 저술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의 선친〔故 智山 裵宗鎬〕께서는 동서고금의 철학들을 섭렵하신 기반 위에서 유(儒) 불(佛) 도(道) 삼교(三敎)의 철학들에 통달(通達)하신 분이셨다. 선친께서는 또한 한국철학의 중흥을 위하여 사실상 칠십평생을 모두 바치신 분이시기도 하셨다. 저자가 대학신입생이 되었을 때, 선친께서는 저자를 훈계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옛 동이족(東夷族)의 본류(本流)를 이어 온 민족이다. 동이족은, 원래 아홉 갈래〔九夷〕였고, 상고시대(上古時代)에는 아시아대륙의 동북부를 석권(席卷)하고 있었다. 동이족은, 세력만 강성(强盛)하였던 것이 아니라, 문화도 우수하였다. 한자(漢字)의 원형(原形)〔甲骨文字〕도, 그리고 한글의 본형(本形)〔篆字 내지 加臨多文字〕도, 기실(其實) 동이족에게서 나왔다. 동이족은 사상(思想) 또한 심오(深奧)하였다. 이것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께서 '우리 나라에는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었으니, 참으로 유 불 도 삼교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國有玄妙之道하니, 實乃包含三敎니라.〕 라고 말씀하신 바대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본시(本是)에는 강역(疆域)이 광활(廣闊)하고 기상(氣像)이 늠름(凜凜)하였었다. 그러하였던 것이, 고구려(高句麗)가 무너지고 대진(大震)〔渤海〕마저 스러지면서, 강역은 위축되고 기상은 잔약(孱弱)해졌다. 우리 민족은, 그 뒤로는 강역이 축소된 것을 기정사실(旣定事實)로 받아들여 왔을 뿐만 아니라, 중국을 흠모하거나 서양을 동경(憧憬)하는 것을 오히려 능사(能事)로 여겨 왔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약소민족의 처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자기비하의식(自己卑下意識)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애통(哀痛)하다 ! 우리 민족은 〔민족분발의 원동력인〕 자존심(自尊心)을 잃었다 ! " 선친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우리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 나는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대역사(大役事)의 진척(進陟)에 한 조각의 벽돌이라도 보태어 보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진력(盡力)하여 왔다. 그 동안 내가 걸어 온 길은 물론 형극(荊棘)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로서 자식인 너에게 차마 같은 길을 밟으라고 강요하지는 못하겠다. 그렇지만, 나는 네가 이 말만큼은 명심(銘心)해 주기를 바란다 : {효경}(孝經) 같은 데에서는, 사회적으로 입신(立身)하여 부모의 이름을 드러나게 하는 것〔顯父母〕이 효도의 끝〔孝之終〕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효도는 오히려 작은 효도〔小孝〕다. 정말로 큰 효도〔大孝〕는, 세계적인 업적을 이루어 민족의 이름을 빛나게 하는 것이다." 그때, 저자는, 한편으로는 저자가 한국에서 태어난 사실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학계에서는 세계의 학계를 주도할 수 있는 이론들이 전혀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그만큼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게 되었다 : 한국의 학자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외국의 학자들을 추종(追從)하기만 하고 있을 것인가 ? 한국의 학자들은 도대체 언제까지 외국의 학자들이 제조(製造)한 이론들을 수입(輸入)하기만 하고 있을 것인가 ? 그리하여, 저자는 바로 그때, 기필코 선친의 뜻을 받들어 대효(大孝)를 행하여 보겠노라고 굳게 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저자가 냉정(冷靜)하게 판단해 보니, 저자의 재능은 한두 가지 면들에서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저자는, 정무(政務)의 요체(要諦)에서부터 우주(宇宙)의 섭리(攝理)까지를 투시(透視)할 수 있는 혜안(慧眼)은 율곡 선생께 미칠 수 없고, 속인(俗人)의 구문(舊聞)에서부터 성인(聖人)의 경문(經文)까지를 관철(觀徹)할 수 있는 예지(叡智)는 사마천을 따를 수 없으며, 군진(軍陣)의 기미(機微)에서부터 천하(天下)의 대세(大勢)까지를 간파(看破)할 수 있는 형안(炯眼)은 제갈량에 닿을 수 없고, 입자(粒子)의 운동(運動)에서부터 천체(天體)의 운행(運行)까지를 직관(直觀)할 수 있는 지견(知見)은 아인슈타인을 좇을 수 없으며, 게다가, 경제주체의 심리에서부터 경제체계의 속성까지를 통찰(洞察)할 수 있는 식견(識見)마저 케인즈를 쉽게 넘어서지는 못한다. 그러나, 저자는, 적어도 기존경제학이 어디까지 옳고 어디에서부터 그른지를 판별(判別)할 수 있는 안목(眼目) 정도는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추구하여야 할 목표는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저자는 케인즈 이후 최고의 경제학자로 평가받아 보겠다는 야심과, 한국을 경제학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浮上)시켜 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제 저자가 대학신입생 시절 이래 근 18년 동안 품어 온 그 야심과 그 포부를 더 이상 감추지 않겠다. 저자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귤보다 오렌지를, 그리고 가요보다 팝송을 더 좋아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서양에서 태어나신 분들께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정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장차 칸트(Immanuel Kant)의 철학보다 율곡의 철학을, 그리고 새뮤엘슨(P. A. Samuelson)의 경제학보다 저자의 경제학을 더 좋아하시게 되시더라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실 필요는 전혀 없으시다고. 백락(伯樂)은 말의 상(相)을 잘 보는 명인(名人)으로서, 숱한 말들 속에서도 한눈에 천리마(千里馬)를 가려낸다. 그러나, 천리마의 입장에서는 백락을 만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하여, 백락을 만나지 못한 천리마는, 결국 천리마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한 채 불우하게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다. 한유(韓愈)는 인간사(人間事)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슬퍼하였다. 그는 그래서 [잡설](雜說)을 지었고, 그 글은 만인(萬人)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 "세상에 백락이 있고, 그런 다음 천리마가 있다. 천리마는 항상 있는 것이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한 말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찮은 말들에 섞여 하인(下人)의 손에 모욕(侮辱)을 당하고, 그러다가 구유와 마판(馬板) 사이에서 그대로 죽게 될 뿐, 끝내 천리마로 일컬어지지 못하고 만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은, 한끼를 먹음에 늘 벼 한 섬을 다 먹는다. 그런데, 말을 먹이는 하인은, 그것이 천리마임을 알지 못하고서, 여느 말을 먹이듯 그것을 먹인다. 이 말은, 진정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하여 힘을 내지 못하니, 그 재능의 빼어남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며, 차라리 보통의 말들과 똑같이 되어 보려고 하나, 그 뜻마저 이루지 못한다. 이 말이 어찌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 천리마를 다루는 법이 따로 있고, 그것이 먹는 양이 따로 있건만, 하인은, 채찍질만 마구 하고, 먹이는 조금밖에 주지 않는다. 이에 말이 자신을 천리마답게 대우해 달라고 섧게 울어도, 그 뜻이 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울음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는 암매(暗昧)한 하인이 채찍을 들고 다가와서 꾸짖기만 한다. 그것도, '세상에는 좋은 말이 참으로 없구나.' 하고 한탄(恨歎)하면서 말이다. 슬프다 ! 세상에는 정말로 말이 없는 것이냐 ? 아니면, 말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이냐 ? " (世有伯樂하고, 然後有千里馬라. 千里馬常有나, 而伯樂不常有라. 故로, 雖有名馬라도, 祇辱於奴隸人之手하고, 騈死於槽 之閒하여, 不以千里稱也라. 馬之千里者는 一食에 或盡粟一石이나, 食馬者는 不知其能千里而食也라. 是馬也는, 雖有千里之能이라도, 食不飽에 力不足으로 才美不外見하며, 且欲與常馬等이나 不可得이니, 安求其能千里也리오 ? 策之不以其道하고, 食之不能盡其材라. 鳴之不能通其意라. 執策而臨之하여 曰하기를, [天下無良馬로다.]라 하도다. 嗚呼라 ! 其眞無馬耶오 ? 其眞不知馬耶오 ? ) 그러나, 저자 자신의 처지를 두고서라면, 저자는 슬퍼하지 않는다. 아니, 슬퍼할 이유가 없다. 저자에게는 독자제위 한 분 한 분께서 모두 백락이 되어 주실 터인데, 저자가 무엇 때문에 슬퍼할 것인가 ? 돌이켜보건대, 저자가 주경야독(晝耕夜讀)하듯 이 책을 집필하며 지금까지 보내 온 약 13년의 기간은, 어쨌든 저자에게 있어서는 인고(忍苦)의 광음(光陰)이자 대장정(大長征)의 세월(歲月)이었다. 저자는 이제 그 인고의 대장정을 마치면서 또 한 번 감히 단언하고자 한다 : 현대경제학은, 그것이 진정한 경제학으로 다시 태어나려 한다면, 기존경제학의 낡은 패러다임을 포기하고, 저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택하여야만 한다. 1995년 12월 13일 북방의 드넓은 평원을 종횡무진으로 누비셨을 자랑스러운 선조(先祖)들을 그리며, 저 자 배 선 영(裵 善 永) 지(識) ------------------------------------------------------------------------------- - [ 돌아가기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