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8일 화요일 오전 01시 49분 25초 제 목(Title): 김유신/전체론(Holism)의 네가지 개념 전체론(Holism)의 네 가지 개념:과학철학적 관점에서 김 유 신 (과학철학, 부산대 교수) * {{ }}는 각주 1 들어가는 말 근대과학의 영향으로 우리 사회는 자연에 대한 많은 지식과 미증유의 기술적 성취를 이루었다. 이러한 과학과 기술 덕택에 인류는 식량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게 되었고,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의학의 발전으로 많은 질병에서 해방되어 평균 수명도 많이 늘어났다. 그러나 겉으로는 과학과 기술이 이로움을 주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산업국가들에 의한 점증하는 환경파괴, 핵무기에 의한 인류의 위협, 자원의 고갈. 특히 환경오염은 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하여 우리와 우리 후손들의 생존, 나아가 인류자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위기의 원인들은 단순히 과학의 남용에 있다기 보다 더 깊은 차원에 놓여 있다. 학자들은 이 위기가 근대적인 과학관과 세계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진단하고 그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대안들을 제시한다. 이를테면 생명사상을 통해 유기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 부분보다 전체에 대한 우선적 고려, 프리고진의 비평형적 열역학, 양자역학 등을 이용한 결정론 비판, 온생명과 같은 생명 개념의 확장, 자기 조직원리를 가진 자연개념, 기(氣) 사상에 대한 현대적 조명 등을 통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여러 서구 학자들은 동양사상이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결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여 동양사상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카프라1) {{ Cafra, Fr., Tao of Physics, 1975. }} 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이들 주장들의 핵심은 근대적 세계관이 지니는 결정론, 기계론, 개체론, 주관과 객관의 대립적 인식 등을 현대 문명 위기의 근본 원인으로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비결정론, 유기체론, 생명사상, 전체론 등을 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 전체론은 위에서 제시한 대안들을 모두 포괄하는 것으로 보고, 근대적 세계관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론이란 개념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분석하지 않고, 애매하고, 다의적으로, 또는 신비적으로 사용된다. 신비하고 비분석적인 방식으로 사용되는 전체라는 개념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 인간은 전능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다. 그렇다면 현대 문명 위기에 대한 그럴듯한 대안으로 주장되는 전체론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전체론이란 사상 자체는 근대적 사고에 깊이 젖은 우리에게는 낯설다. 따라서 정확하게 개념을 정립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글에서는 하나의 서설적 시도로써 만병통치약처럼 사용되는 전체론의 개념을 과학철학적으로 분석하여 이해 가능하고, 실현 가능한 전체론 사상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하고자 한다. 2 근대적 세계관과 생태계의 위기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을 그 이전의 문화들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중요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위르겐 몰트만2) {{ 위르겐 몰트만(김균진 번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 Chr. Kaiser Verlag, M nchen 1985, 한국신학 연구소, 1986. }} 에 의하면 그것은 성장 지향의 사회와 평형의 사회 차이이다. 성장 지향사회는 과거 평형의 사회가 가졌던 자연을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게 해주는 어떤 경외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이용과 통제의 대상으로 본다. 일단 이러한 관점에 서면 인간은 자연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찬다. 특히 현대의 과학이 거대화되고 고가화(高價化) 되었기 때문에 '과학정책'은 학자의 의지보다 사회적 특수한 관심들과 목적들, 지배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루어진다. 즉 지구 전체의 문제나 인류 복지 전체를 고려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우선하여 과학의 진보를 촉진시켜왔던 것이다. 이러한 과학의 진보는 생태계의 위기로 요약되는 지구환경의 위기, 사회적 위기, 인간사회의 가치의 위기, 의미의 위기를 포함하는 광범한 인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성장지향 사회로 돌진하도록 이끈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에서 뉴우턴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세계관이다. 근대 과학을 탄생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한 데카르트의 철학 및 뉴우턴의 역학은 300년 간이나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오고 있었고, 이들 사상이 '근대적'이라는 세계관을 만들어내었으며, 그 세계관은 서양의 세력이 지구적 규모로 팽창함에 따라 인류 전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근대적 세계관이 이루어 놓은 현대 문명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여러 업적을 이루어 놓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근대적 세계관의 핵심은, 세계에 대한 기계론적이고, 결정론적이며, 개체론적인 관점이다. 데카르트의 기계론은 정신 이외의, 세계의 모든 것은 기계이고 인식론적으로 철저히 주관에 대립되는 대상에 불과하다. 자연과 정신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면서 자연은 우리를 보존해 주는 경외와 보존의 대상이기 보다는 철저히 이용과 착취와 통제의 대상이 된다. 또한 기계론이 말하는 세계는 입자와 입자의 운동이란 설명은 자연을 전체로 보지 않고 개별적으로 나누어 보려는 개체론을 탐구의 주요 방법론으로 채택하게 된다. 또한 세계를 개별적 기본적인 입자들의 결합과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물리주의적 환원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결국 우리의 생명체나, 정신적인 요소들도 결국은 원자나 분자와 같은 물리적 존재자들의 결합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문제를 야기시킨 근본 원인이라고 본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 과학기술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 사회의 비극의 시정은 이러한 특징을 지니는 근대적 세계관의 극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극복을 위한 대안이 전체론이라고 현대 문명 비평가들, 시스템론자들, 생명사상가들은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전체는 더 이상 부분의 합이 아니기 때문에 개체론은 더 이상 옳지 않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전체를 분해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전체론을 근대적 세계관의 대안으로 모색한다. 전체론은 이제 단순히 개체론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결정론, 기계론, 개체론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 쓰인다. 이렇게 제시된 전체론은 마치 현대의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전체론이 논리적으로 실천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 또 전체론의 형태는 어떤 것이 있는지, 그 개념 자체는 문제가 없는지에 대한 논의는 별로 없다. 근대 과학적 사유에 대한 전통이 일천한 우리 사회에서, 근대 과학이 지니는 치열하게 논리적이고도 엄격한 사고에 대한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아직까지 그 개념조차도 명확하지 않은 전체론을 손쉬운 대안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는 근대적 사유를 바탕으로 발전한 현대과학을 경시해 버리고 단순히 과거를 향수처럼 그리워한다든가, 민족주의적으로 우리의 과거 문화가 옳았다든가, 자연의 한계를 깨닫지 못했던 시기에 자연의 조화를 강조했던 동양적 사상이 옳다는 식으로 단순화시키는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위기의 올바른 대안으로서의 전체론은 무엇인가? 3 전체론의 기본개념 전체론은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이스와 로마 그리고 중세의 과학을 지배한 사상이었다. 동양에서도 자연과 인간사회를 탐구하는 학문과 철학, 의학 등은 거의 이러한 전체론적 사상에 기초해 있었다. 이 전체론은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 파악하여 각 부분을 전체와 연관성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접근 방식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은 전체이지 부분이 아니다. 전체는 부분을 초월하는 총체이며, 부분은 전체를 위해 전체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이 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 할 때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지 개별적으로 나누어 보아서는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체론은 분자주의, 원자주의 등으로 알려진 개체론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러가지가 있다. 의미론적 전체론, 존재론적 전체론, 방법론적 전체론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의미론적 전체론은 믿음의 내용 또는 그 믿음을 표현하는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이나 믿음을 포함하는 전체 이론 또는 이론 그룹들의 그물망 속에서의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의미나 내용이 그물망의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때 그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공유하는 서로 다른 많은 이론을 허용하는 분자주의와 대립된다. 의미론적 전체론의 주장에 대한 동기 중 하나는 경험적 자료에 의한 이론을 확증하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콰인은 세계에 대한 주장은 개별적으로 확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들을 포함하는 이론들의 결합에서 확증된다는 것을 옹호한다. 사실 과학적 개념들은 그 개념을 포함하는 이론에 대해 상당한 부분을 알지 않고서는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예를 들면, 뉴우턴 역학의 이론적 개념 중 '힘', '질량', '운동에너지', '운동량' 등을 학습할 때, 뉴우턴 이론에 대한 상당한 지식이 있어야 이것들의 정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볼 때는 의미론적 전체론이 그럴 듯 하지만, 이 또한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어린 아이가 학습할 때는 언어 전체를 알아야 한 단어나 한 문장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문장의 의미를 그 문장을 포함하는 이론 전체를 알아야 알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문장의 의미를 배울 수 있겠는가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어떤 상태의 내용이 다른 모든 상태에 의존한다면, 어떤 두 사람이 동일한 내용을 가진 믿음을 공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치열한 논쟁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근대적 세계관의 비판적 대안으로 들고 나오는 전체론은 이러한 의미론적 전체론보다는 오히려 방법론적 전체론과 존재론적 전체론이다. 따라서 필자는 의미론적인 것보다는 존재론적 또는 방법론적인 전체론에 초점을 둔다. 이 세계는 전체로서 유일한 실재이고 나누어 볼 때는 그 중요한 속성이 상실되기 때문에 전체는 부분의 합을 초월하는 어떤 것, 즉 존재론적 전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때 왜 전체가 유일한 실재이고 부분의 합을 초월하는지, 그리고 전체가 유일한 실재란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따라 전체론의 여러 버전(version)이 생긴다. 방법론적 전체론은 존재론적으로 세계는 나눌 수 없는 전체로 되어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는 관여하지 않고, 세계를 개체로 나누어 분석하고 다시 결합하는 방법론을 사용하여서는 세계를 파악할 수 없고, 개념적으로 전체를 우선으로 하고 개별자는 전체에 종속되거나 전체가 부여하는 의미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전체론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가지 전체론 각각에 대해 다음과 같은 4가지 개념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4 전체론의 네 가지 유형 4-1 연결주의 전체론 연결주의 전체론에 의하면, 세계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어서 세계를 분석하고 이해하려 할 때,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아야지 개별적으로 나누어 보아서는 안된다. 세계를 개별적으로 나누어 보아서는 안되는 이유는, 세계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어, 만약 나누면, 그 연결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때 개별화가 연결성을 파괴하는 이유는 개체가 일정한 수준의 연결이나 조직에 도달하면 개체의 속성의 합으로 설명할 수 없는 창발적(emergent) 특성3) {{ M. Stoeckler, "A short history of Emergence and Reductionism", The Problem of Reductionism in Science ed. by Evandro Aggazzi (Colloquium ofthe Swiss Society of Logic and Philosophy of Science, Z rich, May 18-19, 1990), Kluwer Academic Publishers를 참조하라. }} 이 나오기 때문이다. 세계를 개별화시키면 이러한 창발적 특성이 나오기 이전의 조직의 수준으로 가버려 창발적 특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개별화된 각 부분의 특성을 모아도 전체가 지니는 특성을 다 갖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를 먼저 파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부분을 이해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연결이 어느 수준의 복잡성에 이르면 창발적 특성이 나타난다고 할 때, 창발적 특성은 한 번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복잡성의 정도의 각 단계가 있어 단계 하나하나를 넘을 때마다, 창발적 특성이 나타날 수도 있다. 후자의 의미를 지닌 전체론에서는 전체를 전연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에 개별화는 각 단계를 경계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개별화를 해야 하는데, 개별화의 범위는 창발적 특성이 나타나는 것을 경계로 하여 개별화를 수행하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손실이 없을 것이다. 전체를 한꺼번에 이해하려 하지 않고 창발적 특성이 나타나는 단계를 이해의 개별화를 위한 기본 영역으로 보고, 그 영역에서는 대상을 나누어서 분석하고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위의 단계를 하위의 단계로 결코 환원할 수 없기 때문에 환원주의, 물리주의 등을 피할 수 있다. 따라서, 세계를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이해하자,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 등이 서로 양립할 수 있다. 이 연결주의적 전체론의 과제는 창발적 특성이 나타나는 단계를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 것과 또한 각 단계에 나타나는 창발적 특성이란 무엇인가, 하위 단계로 환원되지 않는 창발적 특성의 표지(mark)를 어떻게 정하는가 등이다. 이러한 과제의 해결은 철학적 개념적 분석보다는 개별과학에 의존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 4-2 양상적 전체론(modal holism)4) {{ 이것을 차원적 전체론(dimensional holism)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 양상적 전체론은 연결주의적 전체론이 갖는 연결수준의 확대와 더불어 단계적으로 창발적 특성이 나타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수준 이상의 연결이나 조직이 이루어졌거나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 이루어졌거나 간에 우리의 실재인 세계는 그 자체로서 여러 차원 또는 양상을 지닌다. 따라서 연결주의 전체론과는 달리 연결의 복잡성 정도의 단계에 관한 고려는 여기서는 하지 않기로 하자. 예를 들면 우리의 실재 세계를 여러 양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수적, 물리적, 생물적, 경제적, 심리적, 사회적, 역사적, 윤리적 종교적 양상 등등이 있다. 이때 각 양상은 그 양상 내부에서는 개별화를 통해 그 양상에 속하는 내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양상을 넘어서는(trans-mode) 개별화는 양상의 내용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이때 개별화는 한 가지 방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경험과학의 발전에 따라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세계를 탐구할 때, 물리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학, 심리학, 경제학, 역사학, 사회학, 윤리학 등등의 영역을 탐구하고 이들을 합쳐야 전체적 탐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전체론으로 부르는 이유는 어떤 특정한 양상이 근본적인 성격을 지녀 그 영역으로 환원되는 방식의 개별화를 하고 난 후 분석 과정을 거치고 다시 종합할 때는 각 영역이 지니는 성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전체는 부분의 합으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체의 성격에 따라 각 양상을 단위로 영역으로 나누어 그 자체를 전체로 보고, 그 안에서 각 양상영역의 성질에 따라 분석하여 파악하고, 이러한 영역에 대한 이해의 결과를 합친다면 결코 전체의 속성을 잃지 않는다는 "양상적 전체론"은 우리의 경험에 부합된다. 이때 각 영역은 서로 환원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현재까지 학자들의 연구로는 경제학을 심리학으로 환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의미없는 일로서 간주하고 있다. 이 각각의 영역들은 단순히 세계에 대한 분류 방식의 차이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각 영역을 서열(hierachy)로 나누어 본다면,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곧 경제학이 심리학을 이용은 하지만 심리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은 경제학은 심리학과는 다른 실재의 측면을 다루기 때문이다.5) {{ 이때 경제학은 심리학에 어떤 창발적 특성을 덧붙여 갖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는데, 필자가 이것의 사용을 꺼리는 이유는 연결주의적 전체론과 혼동할 수 있다는 생각과, 이것은 조직의 복잡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속성이라기보다 실재가 갖고 있는 다양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 측면은 단순히 우리의 인식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실재에서도 존재론적으로 그러한 영역를 갖고 있다고 필자는 본다. }} 경제학은 심리 현상과 심리학의 결과들을 이용할 가능성이 심리학이 경제학을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크지만 이것은 엄밀한 서열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서열이란 것도 연결주의 전체론이 말하는 것처럼 생물학적 조직의 연결주의적 복잡성의 단계에 의한 서열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가 세계를 그러한 영역으로 잘라서 인식하는 것인데, 이때 이 인식의 성공은 곧 세계가 그러한 영역에 존재론적으로 대응하는 양상영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곧 세계는 여러 측면을 갖고 있으며, 이 측면들의 합으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각 측면을 분석해내고 이해하기 위한 개별과학이 존재하게 되고, 그 개별과학은 다른 측면에 대응하는 개별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각 측면들은 서로의 활용과 영역의 넓이에 의해서 서열을 구성할 수 있고 상위 양상은 하위 양상에서 볼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6) {{ 서로 환원되지 않는 창발적 특성이 나타나는 영역은 몇 가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화란의 철학자 도이엘베르트는 13가지의 영역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양상(mode)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숫적, 물리적, 생물적, 경제적, 심리적 양상 등등을 제시하고, 그 최상위에 윤리적, 종교적 양상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 양상의 서열에서 상위의 양상은 결코 하위의 양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러한 양상, 곧 영역의 분류 방식은 경험과학에 의존하지 결코 선험적으로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한다. Herman Dooyeweerd, A New Critique of Theoretical Thought, tr. by D. H. Freeman and W. S. Young, 1953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참조 }} 4-3 존재자 전체론(entity holism) 존재자 전체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방법론적인 면에서 보면 설명을 위한 존재자로, 존재의 환원할 수 없는 최소기본단위 외에도 유기적 연결을 가진 기본단위들의 집합 역시 더 이상 환원되지 않는 설명을 위한 존재자로 인정하고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곧 개체의 유기적인 결집체들을 부분 개체로 환원되지 않는 초개체로 보고, 부분이 되는 개체는 초개체를 통해서 그 의미와 존재의 위상을 부여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맑시스트들의 사회이론에 따르면, 계급도 개인의 속성과 관계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계급은 존재자이다.7) {{ 개체론자는 계급은 개인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하고 맑시스트들은 방법론적 전체론을 취하기 때문에 계급은 개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 그리고 이 계급의 속성과 작용에 의해 개인의 속성과 행위들이 설명된다. 존재론적인 면에서 볼 때, 계급을 우선적으로 보고, 계급을 구성하는 개인의 행위와 역할 등은 계급에서 부여받는 것으로 본다. 정치경제학 영역에서 신고전파 경제학은 철저히 방법론적 개체론을 따르고, 개인의 집합은 개인의 속성과 관계로 환원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초개인(supra-entity)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법론적 전체론에서 존재자 전체론에 따르면, 계급(class)과 같은 초개인을 존재자로 인정한다. 맑시스트들은 이러한 계급과 같은 초개인을 실재로 보고, 개인은 이 초개인에게 종속되고 이 초개인에 의해 그 역할을 부여 받는다고 본다. 왓킨스8) {{ John, Watkins. "Methodological Individualism and Social tendencies", in Philosophy of science(1991) Boyd et al, eds pp. 732-742, Originally appeared in The British Journal for Philosophy of Science, 8, 1957. }} 는 사회적 현상에 대한 근본적 이해(rock-bottom understanding)는 개인의 속성과 믿음과 관계로 설명될 때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맑시스트는 생산력과 생산관계로서 이를 설명하기 위해 계급을 기본 단위로 설정한다. 인간사회를 설명할 때 우리는 개인의 믿음, 속성, 개인들의 관계로 환원시킬 수 있어야 완전한 설명이 된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이 점은 다음의 토큰(token)과 타입(type)에 관한 논의에서 해결할 수 있다. '토큰'들은 특정한 경우나 사례들이다. 예를 들면, 어떤 특정한 공장의 노동자들의 그룹에 의한 어떤 특정한 파업, 어떤 특정한 개인의 두뇌에 있는 아이디어들이다. '타입'들은 토큰들이 공통적으로 가질 수 있는 특성들이다. 이리하여 어떤 파업-토큰 사건-은 여러 형태의 가능한 타입들-파업들, 계급투쟁, 사회적 갈등 등등-아래 포섭된다. 마찬가지로 부자란 것은 록펠러가 하나의 토큰이 되는 타입이다. 사회적 설명에 있어 타입은 토큰에 환원되는가는 중요한 문제이다. 개체론자는 토큰사회적 사건과 타입사회적 사건 모두 개인들의 믿음, 욕망, 재능, 상호관계들로 환원된다고 생각한다. 거시적-사회적 타입도 미시적-개체적 타입으로 환원된다고 방법론적 개체론자들은 주장한다.9) {{ Lewine, Andrew, Sober, Elliott, Wright, Erick Olin, Marxism and Methodological Individualism, New Left Review 162(Mar/April 1987) pp. 57-84. 여기서는 방법론적 원자론, 방법론적 개체론, 반환원주의, 원초적 전체론 등의 4가지로 방법론적 전체론과 방법론적 개체론의 이분법을 보다 세밀하게 나누고 있다. }}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한 타입이며, 1997년의 한국은 그 타입의 한 사례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는 개인들의 관계의 한 타입이며, 반면에 어떤 특정한 기업의 소유자와 그 기업의 피고용자들간의 관계는 위의 타입 관계의 한 예를 구성한다. 집합적 사회적 현상들은 분명히 개인들의 속성들의-그들의 믿음, 욕망, 재능, 상호관계-분포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동일한 사회적 현상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속성의 분포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있다. 곧 사회적 타입은 개인들의 타입에 수반하지만 환원되지 않는다. 이것은 심리철학에서 정신은 물리적 존재에 수반하지 환원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이다. 존재자 전체론은 개체들의 결집체를 초개인으로 보고 그 부분이 되는 개체들의 현상을 설명낼 수 있으며, 거시적 타입은 미시적 타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이때 집합체를 초개체로 간주할 수 있으려면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한다. 하레10) {{ Rom, Harre. Philosophical aspects of the macro-micro problem, Advances in Social Theory and Methodology ed. by Knorr-Cetina and Cicourel, Routledge & Kegan Paul, 1981, pp. 139-159. }} 는 어떤 존재자가 개체로서 간주되기 위해 세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첫째 그것은 시간에 따라서 연속적이어야 한다. 둘째 구별되면서 연속적인 공간의 영역을 차지해야만 하거나, 또는 공간을 통하여 구별되고 연속적인 통로를 차지해야 한다. 셋째 그것은 인과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세 번째 요구는 개체를 단순한 시공간적인 영역과 구별해 주는 것이다. 부분들의 집합체가 개체들로 간주되려면, 하레의 기준을 만족해야 한다. 따라서 이 집합체의 인과적 힘은 부분들의 인과적 힘의 합에 의해 소진되지 않는다. 이 경우 계급을 초개체로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맑시스트들은 그렇다고 인정한다. 따라서 계급의 속성은 계급을 구성하는 개인의 속성들의 합으로 분해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필자 역시 초개체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그 초개체를 부분이 되는 개체의 분석으로 초개체의 속성의 일부 조차도 유도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초개체와 개체는 상호변증법적 인식 위에서 서로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초개체의 모든 성질이 부분이 되는 개체의 속성의 결합에 의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초개체가 지니는 인과적 힘은 부분이 지니는 인과적 힘의 결합에 의해 소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러브록의 가이아 가설과 연결시켜 보자. 존재자 전체론 문제는 생명체로 구성된 집합체도 초개체인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하레의 기준으로는 부족하다. 필자는 하레의 기준에다가 집합체가 전체로서 적절하게 정의되는 생명체의 특징을 반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더 추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추가되는 기준은 선험적인 것이 아닌 경험적인 요소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개체 생명이 갖는 모든 것을 반드시 다 가질 만큼 엄격한 필요는 없다. 러브록은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 가이아라는 가이아 가설을 제창한 적이 있다. 우리가 지구 속에 있을 때는 지구란 하나의 무생물체로서 그 위에 여러가지 생물을 싣고 있고 지구의 자원들과 암석과 물 대기들이 이들 생물이 살아가는 데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지구 바깥에서 행성을 여행하는 우주선을 가정하면 이 우주선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여러 가지 지구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변화하여 대기의 산소 성분이라든지 지구의 온도라든지 중요한 속성에 대한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을 보면서 지구를 살아있는 생명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틀렸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환경의 변화에 대한 자기 조직 원리로서 어떤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지구는 하레의 세 가지 기준과 적절히 정의되는 생명체의 기준을 만족한다. 따라서 지구는 생명체라는 가설은 타당하다. 이때 생명체의 기준으로서 제시하는 러브록의 기준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문제가 된다. 이러한 사고 실험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해보자. 만약 박테리아 만큼 작은 고도의 지성을 가진 생물체를 가정해보자. 그가 인간의 몸 속으로 들어가서 여러 가지 세포와 효소, 몸 속의 미생물 적혈구, 뼈 등을 비롯한 여러 기관들을 관찰할 것이다. 그의 눈은 미시세계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여러 요소들을 담고 있는 인간은 생명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무엇인지 모르는 어떤 거대한 물체 속에 여러 세포나 미생물체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한 것들이 생명의 기본 단위처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무를 보고 숲은 못보는 것처럼 이 고등생명체는 인간을 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다가 그 고등생명체가 몸을 벗어나서 멀리 여행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그는 인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그는 인간을 생명체들이 활동하는 그릇으로 또는 생명체들의 단순 집합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인간 자체를 하나의 독자적 생명체로 볼 것인가? 멀리서 인간이란 외부 환경의 변화에도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고 자기 조직 원리에 의해 여러 속성에서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관찰할 것이다. 문제를 단순화시키기 위해서 이때 관찰된 인간은 특수한 형을 받은 죄수로서 자유로운 생활을 못하고 일정한 패턴의 생활만 할 뿐 아니라 재생산도 못한다고 가정하자. 그때 그에게 관찰된 인간을 생명체로 간주할 것인가? 인간을 생명체로 볼 때의 기준과 인간 내부의 개체들을 생명체로 볼 때의 기준이 같다면 이것은 가이아 문제와는 다르다. 그러나 인간 내부의 생명체와 인간이라는 생명체를 다른 기준으로 본다면 이것은 가이아 가설과 결국 같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생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가이아도 생명이 된다. 그러나 생명의 기준의 문제라고 하여, 이것을 경험과학에 독립적인 규약적으로 정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인간 내부의 생명체와 동일 기준에서 생명인가 아닌가 여부는 과학적인 탐구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가이아의 경우와는 다르다. 따라서 지구를 생명체라고 보는 것은 생명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의가 타당하다는 증거와 이론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 방식을 밀고 나가면 나무와 숲의 관계에서 나무는 분명히 생명체이지만 숲도 마찬가지로 생명체가 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질문도 할 수 있다. 이것은 개체 생명은 생명이지만 개체 생명의 집합도 또한 생명체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숲은 하레의 세 가지 기준을 만족한다. 그러나 숲이 생명체가 되려면 숲의 부분인 나무가 생명이라는 기준과 숲이 적절히 정의되는 생명의 기준이 같아야 할 것이다. 러브록은 물론 지구와 같은 것이 생명체라고 했을 때 그 내부에 있는 개체 생명과 동일한 기준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다. 또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안다. 그러나 지구가 지니고 있는 항상성(homeostasis), 자기 조직 원리, 비평형성 등은 개체 생명과 상당히 유사하다. 따라서 무생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 생명체와 비슷하다는 점이 지구를 무생물로 간주하기 보다는 생명체로 간주하고 싶게 했을 것이다. 생명체에 부여하는 고귀성을 생각한다면 지구를 무생물로 여길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가 개체라면 숲은 일종의 초개체에 해당된다. 초개체와 개체에 반드시 동일한 생명의 기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생명체의 기준을 너무 느슨하게 둘 수도 없다. 왜냐하면 존재자나 생명체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오캄의 면도날이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초개체의 생명 문제에 대한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초개체가 지니는 특징들이 개체 생명체의 주요 특징과 유사하다든지, 개체 생명과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든지, 개체 생명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한다든지 또는 상호관계를 통해서 맺는 밀접성의 정도 등과 같은 것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론적 근거를 갖춘, 경험적으로 수정 가능한 이론을 가질 때, 우리는 초개체 생명에 대한 개체 생명의 기준과 다른 기준을 정당하게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러브록(J. Lovelock)11) {{ J. Levelock, Gaia, a New Look at Life on Earth, 1979,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 은 이러한 정도의 치밀한 기준은 갖고 있지 못하지만 외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지구가 지니는 어떤 항상성, 자기조직 원리, 비평형성 등에 관한 관찰을 했기 때문에 그의 가이아 가설이 부당하다기보다 사용할만한 가설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즉 이 가설은 여러 초개체에 적용을 가능케 해 준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숲이나 숲을 개체로 가지는 삼림, 그리고 이러한 삼림과 강 등을 개체로 가지는 산맥 등도 생명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고대의 물활론으로 돌아갈 수 있고 너무 많은 생명체로 인해 고생할지도 모른다. 즉 적절히 정의되는 생명 기준이 너무 느슨하다. 따라서 생명 기준의 느슨함의 경계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는 초개체가 내부간의 상호 연결로 인해 단순한 무생명체와는 다른 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은 적어도 그것을 단순히 무생물체로 간주하기보다는 존재론적으로 새로운 지위를 부여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여러 고대인의 은유들은 이러한 존재론적 지위에 대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이분법화된 우리의 과학적 사고, 즉 생물, 무생물만이 존재하는 세계로 바꾸어 버린 것이 우리로 하여금 제 삼의 존재론적 지위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개체 생명을 정의하는 기준을 그대로 초개체에도 적용할 경우에는 초개체는 생명체로 존재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초개체는 개체와는 존재 양식이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정의를 느슨하게 하여 확장된 생명을 규정함으로써 개체 생명체를 다루는 태도로 확장된 생명체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것이다. 초개체에 대한 생명 기준에 대한 다른 견해가 있다. 개체 생명은 그 자체로는 자족성이 없다. 여러 보조물들이 있어야 한다. 초개체로서의 생명체의 개념에, 자족성에 강조를 둔다면, 개체 생명체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공급자를 추적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을 계속 추적해가면 생명체의 존재를 위해 필요한 자유에너지를 공급하고 보조로 도움을 주는 주위 환경을 모두 포함할 것이다. 곧 지구전체와 태양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초개체 생명으로 부를 수 있다. 장회익 교수의 용어를 빌리면 이것을 '온생명'이라 부른다. 이 주장의 요점은 개체 생명은 다른 중요한 생명으로서의 특징 외에 자족이라는 중요한 특징을 지니는데 사실상 다른 보조물 에너지 공급원이 없으면 엄밀하게 자족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 자족성을 완전히 가지는 생명체를 생명의 기본단위로 보아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온생명을 이렇게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는 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온생명의 생명됨은 개체 생명의 생명됨과 그 기준은 같지 않다. 새로운 생명 기준의 도입에 의해 온생명이 인정되는데 이때의 기준은 온생명을 양산시키는 것이 아니다.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도 필요가 없다. 다만 지구상의 존재자들은 지극히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태양은 단순히 에너지 공급원에 불과하다. 따라서 비록 태양과 지구는 자족적 전체로 간주할 수 있다고 해도 태양-지구를 묶어 온생명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생명개념의 지나친 확장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조금 있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은하계의 모든 별들이 오직 태양과 지구만 남고 다른 것을 다 없애버린다면 과연 지구는 지금처럼 존재하고 태양 역시 지금처럼 존재할 것인지, 그리고 인간은 지금과 같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모른다. 만약 존재할 수 없다면, 전 우주가 온생명이 되어야 한다. 이들 은하계는 지구와 어떤 생물학적인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 단지 에너지 공급원과 인력으로 영향을 주는 것 뿐이다. 다음과 같은 가능 세계를 생각해보자. 태양이 지금 보다 작고 지구는 태양에 조금 더 가깝고 다른 별들도 아주 태양계 근처에 있어서 서로 영향을 주는 우주를 생각해보자. 이 우주에 놓여있는 태양, 지구, 다른 별들의 위치, 질량 기타의 속성들이 서로 가까운 위치에서 영향을 주지만 절묘하게 평형을 이루어 지구의 생태계가 현재 지구와 유사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고 하면 바로 전 우주가 온생명이다. 이때 온생명을 최대로 큰 생명의 단위로 본다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생명의 기본 단위를 온생명이라 보고 개체 생명은 이 온생명에서부터 의미와 역할이 부여된다는 의미에서 전체론을 주장한다면, 어떤 점에서 가치가 있을 수도 있으나 더 위험한 문제가 따르지 아니할까 생각된다. 생명이 고귀하다는 인식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생명을 국소적이고 개별자에게만 국한 시킬 때보다는 그 생명을 유지 보존하는 존재자들을 포함시켜, 높은 차원의 생명의 정의를 하므로써 환경보호에 기여도 하고 개체의 이기심을 제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상은 전체주의(totalitarianism)라고 하는 더 무서운 사상을 유발할 수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사회 없이 살기 힘들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는 국가 없이는 살기 힘들다. 이런 점에서 국가를 또한 생명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12) {{ 태양이 없으면 지구 상의 생명체는 절대적으로 살 수 없다. 그러나 국가는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를 생명체라고 부를 수는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고도로 발달한 지적 존재자에게 태양이 없이도 인공적인 에너지 원을 만들어 태양을 대신할 수 있고,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려면 사회적 동물이다. 특히 현대처럼 복잡한 문명사회에서는 국가와 유사한 사회 없이는 인간이 살기 거의 불가능할 수 있다. 따라서 느슨하지만 국가를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다. }} 나치 독일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패배하여 막대한 군사들의 생명을 잃은 후에 히틀러는 그의 연설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국가라고 한 적이 있다. 온생명이 더 중요하지 개체 생명은 온생명에 비해서 매우 약한 존재가 되어버릴 수 있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적 개념으로서의 온생명은 또 다른 위험을 부를 수 있다. 태양은 우리에게 자유에너지를 보내주지만 지구가 태양에 기여하는 것은 전연 없다. 다시 말하면 태양과 지구는 유기적 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데 태양을 포함해야 생명체로 본다는 것은, 그리고 나아가 전 우주를 온생명으로 본다는 것은 지나친 확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체 생명과 온생명이라는 이분 구조는 존재자 전체론에서 다루는 초개체의 단계들의 가능성은 전연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온생명과 다른 초개체 생명, 초개체 생명의 서열(hierachy)의 가능성은 배제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개체 생명체가 들어있는 전체 생명체라는 사상은 중요한 시각을 열어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생명체는 스스로 성장하고, 항상적인(homeostatic) 속성을 지니고 자기 조직하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보조물이 필요하고, 다른 개체 생명체의 도움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런데 개체 생명체만을 마치 자족하는 기본단위처럼 생각하여 귀한 존재로 여기고 다른 것들은 보조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개체 생명체는 보조물 또는 다른 개체 생명체와 같이 있어야 온전한 생명체로서 자신을 유지할 수 있고 성장해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개체 생명체의 존재를 완전하게 해줄 수 있는 범위인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불완전한 것을 과연 생명체라고 부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또한 할 수 있다. 이때 그 범위를 추적하면, 태양과 지구의 묶음이나 나아가 전 우주를 완전한 의미에서 자족하는 생명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온생명이라 부른다면 그것은 매우 중요한 발상이다. 이 관점에 서면 개체 생명은 이 온생명에 서식하는 불완전한 또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존재자 전체론은 오늘날처럼 환경 위기에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만물 간의 연결에 대한 윤리적 고찰이 필요한 시기에 많은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4-4 관계적 전체론(relational holism) 지금까지 세 가지 전체론에서는 관계는 관계자(relata)의 속성에 수반하는 창발론이다. 관계적 전체론은 이것과는 달리 관계성 자체가 관계하는, 개체의 비관계적 속성에 수반하지 않고 관계하는 대상들의 묶음이 지니는 객관적인 속성이라고 본다. 즉 관계가 진성적 속성(intrinsic property)을 지닌다고 보는 전체론이다. 따라서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관계성이 지니는 성질을 놓쳐버리기 때문에 전체는 결코 부분의 합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을 조금 더 분석해 보자. 세계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세계 내의 존재자들의 속성과 행태들을 파악해야 한다. 세계 내의 존재자들은 다른 존재자들과 상호작용을 한다. 이 상호작용을 고려하지 않고 세계를 이해했다고 말 할 수 없다. 문제는 존재자들의 상호 관계는 어디서 오는가이다. 예를 들어 원자들과 원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적절한 결합을 하고 계속 상호관계를 취하면서 움직이고 있다고 하자. 이때 원자들의 상호 관계들은 원자들의 내적 속성들과 경계조건, 초기 조건들로부터 유도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상호 관계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하여도, 그것은 결국 개별자의 속성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상호관계론적인 의미에서 전체론은 성립하기 힘들고 결국 개체론이 타당하다. 현대물리학적 입장에서는 그 관계들은 곧 원자들의 속성에 수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관계적 전체론자들은 여기에 대해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소립자의 속성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을 분리했을 때에 관찰한 것이다. 분리했을 때에 드러나지 않는 잠재적 속성을 개체가 가지고 있는데, 이 잠재적 속성은 분리된 상황에서는 결코 나타나지 않고, 존재자들이 서로 복잡하게 조직적으로 연결되었을 때, 창발적 특성으로 나타난다. 즉 어떤 연결의 수준에서 상호관계가 이루어질 때, 그 상호관계가 잠재적 속성을 현재적으로 규정지어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이 점은 현존하는 물리학적 방법으로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관계란 것을 개별자의 속성의 결과라고 한다면, 개별자를 분리해서 관찰한 결과에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잠재적인 어떤 것, 즉 복잡한 연결이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졌을 때 창발적 특성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잠재성이 나타나도록 명령하는 것은 결국 관계인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관계를 파생적이 아닌 진성적(intrinsic) 속성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관계적 전체론은 관계란 것에 우선성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라는 문제가 생긴다. 관계란 수없이 많고, 서로의 연결 종류 또한 무한할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관계론을 관계적 개체론과 관계적 전체론으로 나눌 수 있다. 관계적 개체론이란 마치 개체론에서 기본단위로서의 개체를 소위 근본 입자로 파악하고 다른 현상을 그 근본입자의 결합으로 설명하려는 개체론과 마찬가지로 관계를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근본관계와 그 관계의 결합에서 유도되는 파생관계로 나누고 여러 현상을 이 근본관계와 파생관계들의 결합으로 설명하려는, 또는 세계가 그러한 구조로 가지고 존재한다고 보는 것을 관계적 개체론이라고 부를 수 있다. 관계적 전체론은 무한할 정도로 많은 관계들로서 연결되어진 세계를 관계에 우선성을 주어 전체론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이 가능한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관계들 전체를 한꺼번에 파악할 수가 없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지 개별화를 해야한다. 다만 개별화 또는 나누는 방식과 그것의 의미는 개체론과 다를 뿐이다. 관계적 전체론의 관계들의 성격 중에서 어떤 국소적 관계로 그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그러한 관계도 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관계인 경우에 중심적이든 아니든 개별화하기 위하여 나눈다면, 그 관계의 속성은 사라져 버리고 나누어진 부분은 나누기 전에 지녔던 모습과는 달라진다. 따라서 그러한 개별화와 그들의 결합은 원래의 전체 모습을 다 담지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개별화할 것인가. 전체를 관통하는 관계들이 개별화를 통해 훼손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훼손으로 인해 각 부분이 받는 영향을 보상해 주는 관계를 새로이 형성해 주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한다.13) {{ 전자회로의 경우 출력 단자에서 입력단자로 가는 피이드백 회로가 있을 때, 회로 해석을 위해 각 단계로 나눌 때 피이드백 회로는 없애고 그에 상응하는 회로를 각 단계에 공급해 주어 근사화시킨다 }} 이처럼 국소적 관계의 공급을 통해 근사화시키기 위해서는 세계의 관계들의 구조를 핵심적 관계를 통해 파악하고 적절한 근사화를 하는 방법들을 개발해야 한다. 비록 그러한 방식을 사용하여 근사화 작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개별화를 하는 이상 세계의 여러 성격들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잃어버리는 양이나 내용은 결코 선험적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경험과학에 의해서 부단히 실재세계 모습에 가까워지는 방법들을 개발해 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 가까워지는 방식은 이론 형성자가 처해 있는 역사적 사회적 조건과 이론 내용의 성격에 따라서 여러가지 궤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관계적 전체론은 관계들을 살펴보아 중심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중요한 관계들을 포착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전체 관계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생각되는 골격을 파악한다. 그 골격을 중심으로 무엇이 보조적이고 무엇이 무시해도 될만한 관계인지를 파악한다. 이 경우 중심적 관계나 골격에 대한 파악은 선험적 직관과 경험과학적 통찰에 의해 형성될 수 있고, 그 기초 위에서 내부의 무늬새를 경험과학과 철학적 이론들에 의하여 구성시킬 것이다. 이때 아주 보수적인 이론은 중심 관계나 골격은 고치려 하지 않고 계속 내부만 고쳐 실재세계에 가까이 가려 할 것이다. 중심적 관계에 대한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은 어떤 혁명적인, 소위 패러다임의 변화를 일으키는 셈이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관계적 전체론에서는 주관과 객관, 자연과 인간 사이를 관통하는 관계들이 그 중심관계일 수도 있다. 동양사상에서는 이러한 관계들을 많이 주장한다. 특히 동양의 '기'(氣)철학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의존 관계에서 이 관계에 우선성을 두어 양생과 사회체제 유지를 위한 형이상학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경우 이러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개체에 우선성을 두는 방식인 개체론을 사용한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증명을 비록 관계에 우선성을 두는 전체론적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이야기 했듯이 이를 경험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적절한 방법론을 개발하여 검증할 수 있는 기준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기준들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필자는 당장 알지 못하지만 연구를 통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현대과학과 양립되는지에 대한 검토도 해야한다. 물론 이때 양립의 의미는 적절히 정의되어야 할 것이다. '기'철학이 양생과 체제 유지 등의 윤리적인 모습에 초점을 두는 것을 의도한 형이상학이라 할 때, 그것이 과연 참이 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고 실용적인 입장에서 현대에서는 과연 어느 정도 적합하게 응용될 수 있는지도 검토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 지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전체를 볼 수 없고 개별화는 아무리 정밀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과학방법론으로는 전체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주장도 있다. 따라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명상적이고 직관적인 방법 또는 전통과학이나 전통 철학적인 여러 방법들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필자는 그러한 생각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명상적이고 직관적인 방법이 상상력과 새로운 패러다임을 위한 자극은 줄 수 있지만 결코 과학방법론을 대치할 수는 없다. 우리의 지성의 한계는 언어의 한계로 나타난다. 실재가 우리의 한계에 들어맞아야 할 이유는 없다. 최근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은 우리의 일상언어로는 표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러한 학문의 창시자들은 우리의 언어의 한계로 고심하였다. 수학적 언어를 이용하거나 은유법을 사용하여 이를 상당히 극복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한계는 언어의 본성 자체에서 기인하는 요소가 있을 수도 있지만, 과거부터 존재해 왔던 과학과 철학의 한계 속에서 언어가 사용되고 형성된 요소에 의한 것도 많다. 따라서 과학과 철학이 발달할수록 우리의 언어 사용에 대한 훈련도 달라지고 언어 사용 영역도 넓어져, 언어의 한계도 더 확대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한계는 선험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 관계적 전체론이 성립된다고 볼 수 있는 몇 가지 예를 생각해보자. EPR 실험14) {{ EPR은 Einstein-Podolsky-Rosen의 앞 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이 실험은 양자역학을 비판하기 위한 유명한 사고 실험이다. Einstein, A., Podolsky, B., Rosen, N.,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Physical Reality Be Considerdered Complete?", Physical Review, 47, pp. 777-780. Bell, J.S., "On the Einstein Podolsky Rosen Paradox", Physics 1, pp. 195-200, 1964 참조 }} 에서 보이는 비국소성 같은 예는 관계적 전체론의 한 예라고 생각된다. 서로 상호작용을 한 두 입자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날아갔을 때, 어느 한쪽 입자에 대한 관찰은 다른 어느 한 쪽의 입자에 영향을 주는데 그것은 그 영향을 관찰된 한 쪽에서 신호를 보낸 것으로 해석하면 광속이상의 속도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에 모순된다. 이 경우 두 입자는 함께 특정한 관계 속에 있기 때문에 입자의 상태는 분리된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으로 해석하면 상대성 이론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두 입자의 상관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 상대성 이론과 양립가능한 초광속적 영향이라는 비국소적 영향을 인정하기 위해 공간적으로 떨어진 두 상태가 사실상 분리불가능한 상태라고 본다면 결국 그 두 입자 시스템은 분리불가능한 전체론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때 그 전체론은 공간적으로 떨어진 두 관계사는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관계적 전체론이라 부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입자의 개체 속성으로는 분리불가능하다는 전체론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적 전체론을 인간사회에 적용하면 인간 간의 관계가 인간 주체의 성격과 속성들을 형성하며, 주체의 속성과 성격 믿음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할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관계적 전체론의 또 하나의 예는 동양 사상의 음양오행설이다. 음과 양이란 관계를 먼저 상정하고 개별자를 그 관계 속에 귀속시키고 관계를 통해서 개별자의 역할과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다. 오행은 속성으로 관계적인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개별자가 항구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 아니다. 오히려 오행이라고 하는 역동적 관계 속에서, 개별자들의 작용과 개별자들의 속성들과 역할들이 이해된다. 문제는 관계적 전체론이라고 하여 다 타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타당성을 검증할 수 있는 절차나 기준들이 있는지 또는 그러한 절차나 기준을 위한 이론을 어떻게 개발해야 하는지는 연구 과제라고 생각한다. 5 결 론 전체론은 근대적 세계관이 지니는 개체론에 대한 중요한 대안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론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전체론이 옳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대상을 전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가? 자칫하면 전체론이라는 이름 아래 이해하기 힘든 비합리적인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의 해석에서 사회변화의 궤적은 인간 행위자의 주관적인 목적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여 객관적으로 움직인다는 전체론적 목적론을 주장한다거나, 알튀세처럼 구조가 구조의 원인이 되고 개인들은 단지 사회적 관계의 조연자에 불과하다는 구조적 인과성과 같은 애매한 관념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 우리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는 어떤 형식으로라도 개별화 해야 한다. 따라서 전체론을 주장하는 그 정신을 유지하면서 개별화 작업을 할 수 있어야 우리가 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실현가능한 전체론을 찾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위에서 생각한 네 가지 전체론에 대한 분류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15) {{ 이들은 모두 방법론적 전체론 또는 존재론적 전체론에서 다 포섭될 수 있으니까, 모두 8가지가 있는 셈이다. }} 이 네 가지 전체론에 대해 더 자세히 그리고 어느 것이 타당하고 어느 것이 잘못인지 아니면 그 성격상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모두 타당하다고 해야할지 연구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선다. 이러한 전체론을 인정하면,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자연의 의미, 이웃의 의미, 나아가서 사회의 의미 등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그러한 시각이 신비한 것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것이다. 관계적 전체론을 받아들이면 관계의 우선성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때는 주체와 대상의 이분법도 다른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주체와 대상간의 관계의 올바른 설정을 통해 주체를 이해하고 대상을 파악하게 된다. 생명의 확장의 개념을 주는 존재자 전체론은 윤리학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고, 자연과 인간 나아가 만물들의 관계 속에서도 도덕성이 있음을 알게 해주리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오늘날 생태계 위기를 극복하는 데에 필요한 생태계 중심적 윤리를 훨씬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문예비평. 1998겨울. 통권31호)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