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8일 화요일 오전 01시 19분 20초 제 목(Title): 대담/이진우 녹색사유와 에코토피아 ▶ 대담:[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에 대한 대화적 논의 대담: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에 대한 대화적 논의 대상: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 저자:이진우(계명대 철학과 교수) 대담:남송우(본지 편집인) 편집자 주 본지는 창작과 학술 전 분야에 걸쳐 놀라운 의식과 정신, 방법의 창조적인 새로움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저자와의 열린 대화를 통해 그 성과를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이 대화가 보다 생산적인 것으로 전개되도록 본지는 사려 깊은 판단력과 균형 잡힌 안목을 지닌 대담 자를 선정할 것이다. 이들의 대화는 편들기가 아니라 논쟁적인 성격을 지닐 것이다. 논쟁적 인 대화의 통로를 따라가면서 독자가 우리 시대의 풍요롭고 넉넉한 정신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글읽기의 즐거움이요, 생산의 대화성일 것이다. 앞으로 본지의 중요한 사업의 하나가 될 대담에 독자의 지속적인 관심과 애정 어린 충고를 기대한다. 남송우:생태 환경 문제가 인류의 현안이 되어 있는 이 시점에서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라는 의미 있는 책을 펴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서문을 읽으면서 문학적 상징에 가까운 서술을 대할 수 있어 문학을 전공하 는 저에게는 더욱 인상적이었습니다. 프란시스코 고야가 남긴 메조틴트 판화 거인의 이미지 제시가 상당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런데, 이선생님께 서 서두에 제시한 21세기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환경 오염에 대처할 새로 운 학문은 유한한 인간과 지구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나, 아직 국내에서의 생태학적 사고나 학문의 체계화는 미진한 것 같습니다. 이 분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최근의 연구 경향은 어떠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진우:고야의 거인은 사실 괴물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르겠습니 다. 자신이 살고 있는 거주 공간에 안주하지도 못하고 또 벗어나지도 못하는 현대의 기술인간은 단순한 거인이 아니라, 그 본질을 제대로 포착할 수 없다 는 점에서 저는 괴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야의 거인은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욕망의 절대화"가 현대사회의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 는 현상을 잘 서술하고 있는 셈이지요. 저는 여기서 괴물이라는 말에 조금 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괴물은 우선 무시무시한 존재입니다. 여기서 무시무시하다는 것은, 우리가 지구의 파국과 인간의 종말이라는 말 에서 느낄 수 있듯이, 단순히 공포감에 떨게 하는 무서운 기운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어원학적으로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무시무시하다 라 는 낱말 중의 무시 를 두 가지 시각에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편으로 무시(無視)는 보이지 않는 것 을 의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가 오늘날 겪고 있는 생태학적 문제들은 실제로 우리의 기술적 행위에 의해 야기된 보이지 않는, 또는 비의도적인 결과들일 뿐이지요. 인간의 기술적 행 위가 미칠 수 있는 생태학적 결과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엄청난 계몽의 작업 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무시(無視)는 현실에 있는 것을 없는 것같이 여기는 태도 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경시 하거나 상관하지 않는 무관심의 태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맥락에서 보면 생태학적 관점에서 무시무시하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의 비의도적 결과가 대 체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종종 현실적으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없는 것처 럼 생각하는 생태학적 무관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현대인은, 조금 형이상학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자신의 본성마저 바꿀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괴물이라고 생각 합니다. 예전에는 아무리 상황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 성 같은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영원한 인간 본성에 관한 믿음은 이제 생태학적 위기에 의해 점차 잠식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면 언젠가는 현재의 환경오염과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황된 믿음 아래 자연과 환경을 계속 파괴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면 인간의 영원한 본성이 믿기지 않을 뿐더러 괴물이 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제가 {녹색 사유와 에코토피아}에 서 고야의 거인을 앞세운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국내에서 생태학적 의식이 확산되고 환경문제에 대한 학문적 접근 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이제 걸음마 단계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생태학적 의식과 사고에 있어서도 경 제성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압축적 성숙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환경문제에 대한 공동책임을 제도화하기 위해서는 시민운동으로 서의 환경운동이 활성화 되어야겠지만 아직도 시민 없는 시민운동 의 차 원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개인적 차원에서는 환경의식 이 많은 시민들에게로 확산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의식을 행위로 옮기고 또 이념을 실천적으로 실현하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합리적 태 도입니다. 최근 학계의 경향을 보면, 다양한 생태학적 이론과 환경윤리의 소 개 덕택에 이 문제도 조금씩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루어지고 있는 실정입니 다. 그 동안은 생태학적 사고가 사실 의식혁명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동 양의 자연주의와 신비주의, 즉 인간도 역시 생명체로서 자연의 유기체적 질 서에 속해 있다는 생명중심주의가 강하게 개진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렇지만 우리의 전통적 풍류사상과 천렵문화 같은 것이 합리성을 결여하면 오히려 자연에 더 커다란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자연이 인간을 포괄하는 생명의 질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언 뜻 보면 바람직한 것같이 보이지만 자칫 잘못하면 인간의 힘을 넘어서기 때 문에 자연에 대한 무관심을 유발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앞으 로의 연구는 생명사상과 합리적 책임을 결합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이 저의 예측입니다. 남송우:생명사상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부분에 대해 한 가지 여쭈어 보 겠습니다. 문학 쪽에서는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을 많이 논하고 있는데, 철 학에서는 김지하 시인의 생명 사상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진우: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은 생태학적 의식을 계몽시켰다는 점에 서는 학계에도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의 생명사상은 시적인 영감과 상상력에 많이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의 체계적 이론으로 보 기는 힘들겠지요. 그의 입장은 우리 전통 사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는 하지 만 서양의 심층생태학과 마찬가지로 전일주의의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따 라서 그의 생명사상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은 생명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동일한 맥락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현대 기술문명의 본 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기술적 행위에 관한 철저한 분석과 성찰이 부 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송우:선생님께서 서론 부분에서 아우슈비츠 사건, 히로시마 원폭 사 건, 체르노빌 원전 사고 등을 통해 기술 시대의 문제를 짚어내고 있는 부분 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기술 시대의 기술 발전의 속도를 어떻 게 제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서는 의식의 혁명적 전환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 의식 혁명이 이루어져야 하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나 동감하지 만, 어떻게 라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여러 가지 논의들이 분분한 것 같습 니다. 기술 시대의 기술 발전의 속도를 제어할 수 있는 의식 혁명의 구체적 방안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진우:의식혁명의 구체적 방안은 생태학적 철학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것은 물론 철학이 현실과의 거리를 요구하기 때문만은 아닙 니다. 생태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과 생태학적으로 살고 실천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태 문제를 큰 목소리로 떠드는 사람도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별로 환경 친화적이지 않은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물 론 이와 같은 이론과 실천의 괴리가 생태학적 사유의 필요성에 대한 냉소적 태도를 정당화하지는 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태학적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적어도 자신의 삶을 환경과 생명의 관점에서 되돌아 볼 수 있 는 반성적 거리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환경에 대한 개개인의 환경 의식과 실천도 중요하지만, 정작 시급하 고 긴박한 문제는 인류의 집단적 기술행위에 의한 우리 모두의 공동 책임 을 어떻게 실행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있는 것은 개인적 행위라기보다는 집단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무를 꺽지 말자거나 또는 강과 바다에 오물을 버리지 말자고 하는 것은 공중 도덕과 연관된 전통적 윤리의 틀 안에서도 해결될 수 있습 니다. 그러나 공장과 주거지 및 골프장의 건설, 지구촌의 허파와 같은 브라 질 열대림과 시베리아 삼림의 개발, 원자력 발전소의 건립, 오존층의 파괴와 같은 생태학적 문제들은 모두 인간의 집단적 기술행위의 필연적 결과들입니 다. 이러한 문제들은 우리 모두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구체적 문제들 입 니다. 20세기의 상징적 기호들이라고 할 수 있는 아우슈비츠, 히로시마, 체 르노빌 사건들 역시 구체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체적 사건들을 통해 비로소 인류의 공동책임에 관한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개인을 넘어선 집단의 문제이 기 때문에 개인의 구체적 실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 향이 있습니다. 공동책임의 이념과 개인적 실천의 가능성, 이 두 가지를 결 합할 수 있는 대안이 모색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송우:공동책임의 이념과 개인적 실천이란 명제가 요즈음 많이 논의되 고 있는 "사고는 전지구적으로 실천은 지역적"으로 라는 화두와 많이 닮은 것 같은데요, 선생님의 생각은 어떤지요? 이진우: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많이 입에 오르내렸던 "생각은 전지 구적으로, 행위는 지역적으로"라는 표어가 떠오르는군요. 이제는 냉전체제 가 종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공공연한 진리처럼 유통되 고 있지만, 20세기는 정치적 이념을 전세계적 차원에서 실현하고자 하였던 실험의 시대 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나치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도 시도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이 데올로기들은 모두 특정한 이념이 전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확신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실험의 결과로부터 "전체적 이 념은 오직 전체주의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두 말 할 나위도 없이 이미 깨져 버렸습니다. 이제 보편적 타당성과 전세계적 영향력을 가진 것은 오직 기술문명과 자본주의의 논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술문명과 자본주의에 의해 야 기된 환경파괴와 생태학적 위기는 모든 인류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할 보 편적 문제입니다. 따라서 환경윤리와 생태학적 철학은 이러한 공동책임을 어떻게 제도화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인류 의 기술행위가 인간 존재의 파국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동책임의 문 제이지만, 우리가 생태학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지역적 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유한한 생명체로서 구체적인 생명의 질서 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주지 않습니까? 우리 집 앞의 쓰레기, 우리 마을의 강과 산, 우리 나라의 환경과 자연이 생태학적 실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남송우: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한스 요나스의 생태학적 사유에서 주요 한 개념은 생명의 원리와 책임의 원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원리인 자유와 기술 시대에 존재론적 의무로서 요청되는 책임의 원칙을 한스 요나 스는 결합시키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두 개념의 결합을 통해 궁극적으로 한스 요나스가 내세우고자 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이진우:{생명의 원리}와 {책임의 원칙}은 한스 요나스가 생태학적 문제 에 관해 집필한 두 책의 제목들입니다. 책임 이 21세기로 넘어가는 세기 전환기에 철학적 핵심 개념으로 부상된 것은 한스 요나스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몽주의 이래로 20세기까지 인류를 움직여 온 것이 자유의 이 념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철학과 사상의 영역에서 이미 패러다임의 변 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지요. 자유에서 책임으로. 자유가 근본적으로 평 등한 존재들 사이의 대칭적 관계를 규정하는 이념이라고 한다면, 책임은 인 간과 자연의 관계와 같은 비대칭적 관계를 해명하는 도덕적 이념입니다. 우 리는 흔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잠재적으 로는 완전한 인격으로 발전할 수 있지만 아직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책임은 비대칭적 관계 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권력과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대통 령이나 국회의원, 관료와 기업가 그리고 그밖의 사회적 지도층에 속한 사람 들을 들 수 있겠지요―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권력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 면 인간 이외의 자연 생명체는 인간의 기술권력에 완전히 내맡겨져 있기 때 문에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비대칭적 관계의 전형적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착안하여 한스 요나스는 칸트의 정언명법을 책임의 문제와 결 합시킴으로써 새로운 생태학적 윤리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책임이 구체적 타당성과 구속력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선 자 연을 도덕적 고려의 대상으로 고려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적 극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스 요나스는 '생명의 원리' 를 도입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생명의 원리는 인간을 포괄한 자연에 내재하 고 있는 목적론적 질서를 의미합니다. 자연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 의 궁극적 목적을 향해 발전해 가고 있는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유 의 방식은 우리에게 아마 그렇게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스 요나스 는 이러한 발전의 목적과 과정을 자유의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우리는 자유 를 흔히 인간의 고유한 속성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지만, 한스 요나스는 자유 를 생명의 원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지요. 원생동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 는 생명의 고리들이 자유의 이념으로 매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한스 요나 스는 물론 인간이 이러한 진화 과정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도 다른 자연 생명체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합니 다. 제가 한스 요나스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이처럼 자연의 목적론적 생명사상과 인간의 합리적 책임을 결합하려고 시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연 의 생명만을 강조하면 자칫 신비주의로 흐르고 또 인간의 권한과 의무만을 절대화하면 결국 인간중심주의의 덫에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생태 학적 철학은 일종의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송우:균형감각이란 점에서 심층생태학과 표층생태학의 절충과 같은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이진우:물론 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절충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심 층생태학이 내세우는 생명의 이념과 소위 말하는 인간중심적 개량주의가 내 세우는 복지의 이념은 그렇게 간단하게 상호 환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렇지만 저는 인간중심주의를 어느 정도 약화시키고 또 생명중심주의를 어느 정도 약화시키면 두 사상들이 만날 수 있는 접점에서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자연에 대한 책임은 오직 의식을 가진 존재인 인 간에게만 부여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적이지만, 약화된 인간중심주의 는 도덕적으로 고려될 수 있는 대상을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와 생태계 전체로 확장한다는 점에서 이미 생명중심주의적인 요소를 수용하고 있는 것 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생명중심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인간 역시 인간을 넘어서는 거대한 생명의 유기적 질서 속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생명중심적이지만, 약한 생명중심주의는 인간을 진화 과정의 정점에 자리매 김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책임을 부과한다는 점에서 보면 다분히 인간중심적 입니다. 전자의 입장을 취하든 아니면 후자의 입장에 서있든, 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자유를 조화롭게 통합해야 한다는 것은 생태학적 사유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남송우:이 선생님께서는 하버마스가 사유하는 생태학적 문제에 대해서 는 인간 중심적 윤리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비판적인 입 장에서 논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버마스의 광범위한 지적 관심과 활동 을 비추어 볼 때, 그의 생태학적 문제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인데도 하버마스의 담론을 생태학적 사유의 대 상으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며, 궁극적으로 그의 담론에서 우리가 생태학적 사유를 하는 데 있어 참고할 수 있는 핵심적인 사항은 무 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진우:최근 하버마스와 오랫동안 공동 작업을 하였던 칼-오토 아펠 교 수가 방한하여 우리에게는 낯선 담론윤리에 관해 여러 차례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담론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경향과 이해관계에도 불구 하고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논증적 절차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도덕적으 로 의미 있는 여러 현실 문제들에 관해 논증을 하려면 우리는 동시에 합의 에 이를 수 있는 논증의 합리적 조건들을 준수해야만 한다는 것이 담론이론 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펠과 하버마스의 철학에서 는 말을 할 줄 아는 존재 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입 장을 일단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생태학적 문 제들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담론이 필요하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합리적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도 담론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 에 하버마스는 이성적으로 말하는 공중 이라는 칸트의 이념을 적극적으 로 수용합니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는 신비주의와 같은 비합리적 태도보다는 논증을 통한 합리적 해결이 훨씬 더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은 문제 확인과 해결의 절차를 해명한다는 점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은 사실 생태학적 의식이 보편화 되었을 때 비로소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만약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공동책임 이 분명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면, 담론은 공론에 그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하나의 독자적인 가치로 인정할 수 있는 생태학적 의 식을 함양할 수 있는 철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의식과 실천, 직관과 담론의 결합이 그 어느 때보다 요청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하버마스 철학의 강점과 한계는 자연스럽게 인식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송우:좀 다른 이야기이지만, 요즈음 우리 학계에서는 담론이란 말이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담론이란 말이 이렇게 함부로 사용되어도 괜 찮을런지요? 이진우:담론이란 말은 정말 글자 그대로 고담준론(高談峻論), 다시 말해 서 고상하고 준엄한 언론이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언어로 짜여진 모든 활동에 담론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지요. 예컨대 여성주 의 담론, 아시아적 가치에 관한 담론, 생태학 담론, 환경주의 담론, 생명사상 의 담론, 동아시아 담론 등이 그 예들입니다. 저는 담론이라는 말이 우리에 게 낯설기는 하지만, 그 사용은 별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에서 담론은 본래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진리를 찾아 가는 과정과 절차를 의미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담론이 논증과 동일한 의미 로 사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지성계를 범람하고 있는 담론 개념의 연원은 푸코입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관 계에 주목한 철학자입니다. 그는 진리와 권력을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하는 대신에 진리 역시 권력관계에 내재하고 있는 사회적 기제에 의해 만들어진 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권력관계의 맥락에서 자신들의 주장 에 진리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언어 행위의 체계가 담론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담론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유행어의 차원을 넘어 서 우리가 새로운 문제와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담론 개 념의 사용이 아니라 다른 개념들과의 불분명한 구별로 인한 오해와 혼란이 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송우:이 선생님께서는 하이데거의 근원적 윤리 개념을 생태학적 금욕 주의로 명명하고, 이것은 니체적 의미에서 지성이라는 작은 이성에 몸과 신 체라는 커다란 이성을 대립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의 지구적 실존을 자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탈현대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전통적 금욕 주의는 몸과 감성을 부정함으로써 순수한 지성에 도달하고자 하였다면, 생 태학적 금욕주의는 우리의 미학적 감수성을 예리하게 만듦으로써 우리의 존 재가 이 지구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이러한 금욕주의가 인도하는 방향이, 장자가 [天地]편에서 논하는 세계라고 유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동서양의 세계에 대한 사유와 만나는 부분을 확인하게 되는데, 그 만남의 접합점이 명쾌하게 논의되고 있기 보다 는 예견 혹은 환기 정도의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생태학적 금욕주의라는 측면에서 동양적 사유는 많은 시사점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이 부 분에 대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한지요. 이진우:자본주의가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지금 금욕주의를 말 하는 것은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왜냐 하면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다양한 욕구들의 체계와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욕구가 우리 생명의 재생산과 연결되어 있는 자연적 욕구로 환원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면, 금욕주의는 그만큼 실천가능성이 높을 것입니 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인간의 욕구는 이미 자연적인 한계를 넘어서 인위적 으로 만들어지고 조작된 다양한 욕구들로 분화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음 식에 관해서는 금욕적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음악에 관한 한 원음을 그대 로 재생할 수 있는 고급 오디오를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입니다. 물론 금욕주의가 인간의 모든 욕구를 포기하 거나 부정하는 태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가지지 않으려는 삶의 태도를 금욕주 의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우리는 어떤 수준에서 필 요를 결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금욕주의가 단순한 욕구의 부정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 다. 고전적 금욕주의는 사실 육체와 정신, 신체와 영혼의 이원론에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을 어지럽게 만드는 육체를 극복하고 정신을 함 양하는 것이 고전적 금욕주의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생태학적 금욕주의는 바로 인간의 신체에 내재하고 있는 이성과 합리성을 함양함으로써 정신적 삶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제합니다.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니체적 의미의 커다란 이성을 인식하고 실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서 개인에게 있어서도 욕구가 무한하 게 분화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체계와 위계질서를 이루고 있다고 전 제하고자 합니다. 욕구들은 자신의 삶과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가치 와 목적을 설정할 때에만 하나의 위계질서로 조직되고 구성될 수 있지 않겠 습니까. 다시 말해 욕구도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는 내재적 목적과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목적 은―아리스토텔레스적 의 미에서 보면―동시에 다른 욕구들에게는 한계 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따 라서 그 자체 무한히 확장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예컨대 물질적 욕구와 같은 것이 목적이 될 수도 없고 또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가질 때 비로소 "그것으로 충분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적 사유가 지향하고 있는 자족과 자제 또는 무위자연의 삶은 사실 이러한 금욕적 삶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송우:박이문 교수의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을 상식의 자명 성을 반성과 성찰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동시에 상식의 회복이 생태학적 위 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임을 밝히고 있는 걸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 점은 철학도가 아닌 저로서도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 선생님이 지적하 였듯이 박이문 교수는 도구적 이성을 넘어 설 수 있는 동양적 사유로 미학 적 이성을 내세우고 있는데, 이 미학적 이성이 어떻게 기술 문명을 극복할 수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서술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요. 이진우:박이문 선생님께서 제시하고 있는 '미학적 이성'은 우리가 필요 로 하고 있는 생태학적 세계관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저 는 생각합니다. 그런데 미학적 이성이라는 말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매력만 큼이나 커다란 위험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상 합리적 이성과 미학 적 이성은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세 철학 사를 돌아보면, 미학적 이성과 합리적 이성은 같은 배에서 태어난 형제라고 할 정도로 나란히 등장합니다. 그것은 미학을 '감성적 인식의 학문'으로 규 정한 바움가르텐에게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다시 말해 이성과 합리성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미학적 이성도 발전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합리적 인 식의 보조수단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박이문 선생님은 동양적 사유의 본질이 바로 미학적 이성이라고 주장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미학적 이성이 서양의 그것과 어떤 점에서 구별 될 수 있는가가 분명히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이성 자체가 담론 보다는 직관에 많이 의존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 미학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 지요. 그러나 직관으로부터 출발하는 그래서 담론적 합리성을 배제할 경향 이 있는 미학적 이성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신비주의로 흐를 수 있습니 다. 저는 물론 박이문 선생님이 건강한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가 제시한 미학적 이성이 아직 정교하게 체계화되지 않아 많은 오해를 불 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남송우:박이문 선생님은 문학과 철학적 사유를 함께 하고 계신 보기드 문 분이신데, 개인적으로 박선생님의 이러한 작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진우:단지 부러울 뿐입니다. 20세기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일컬어지는 하이데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고 그래요. "나는 모든 것을 사유하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런 사상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결여되어 있다." 이 말 은 사상과 시작(詩作)의 긴장관계를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 마디의 논리적 서술보다는 한 마디의 압축적인 시어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경우가 사실 많지 않습니까. 모든 사상가가 시인이 될 수는 없겠지만 아마 시인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박이문 선생님의 문학에 관해서는 뭐 라고 말할 자격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글들에는 문학적 감 수성과 상상력이 배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송우:선생님께서 기술 문명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이 기술적 사유에서 생태학적 사유로 전환하는 길은 자신의 존재마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 게 굴러가는 속도의 엑스터시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이를 위해 제안하고 있는 느림의 미학은 그래서 설득력 있게 받아 들여집니다. 특히,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을 예시하고 있는 점 역시 문 학 공부를 하고 있는 저에게는 관심거리가 됩니다. 생태학적 사유의 구체적 실천의 한 영역으로써 문학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어떤 내용이라 고 생각하십니까? 이진우:문학의 영역에서도 최근에 생태 문학 또는 생태학적 상상력이라 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학이 갖고 있는 영향력을 생각할 때 상당히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태 학적'이라는 낱말이 입에 오르내리는 빈도수에 비례하여 오해의 정도도 증 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문학이 생태학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생태학적이라는 낱말에는 이미 인간중심적 기술주의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연의 생명체로서 자신을 초월하는 커다란 질서 속에서 살 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하도록 하는 기술문명의 여러 요소들을 비판하는 문학 만이 생태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생명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유한한 것입니다. 저 는 이러한 자연적 사실을 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기술문명의 본질이 라고 할 수 있는 속도의 엑스터시라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고속열차를 타고 가면서 경치를 구경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걷거나 또는 걸음 속도 밖에 안 되는 마차를 타고 가면서는 주위 환경과의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정신 없이 돌아가는 세상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정신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지요. 세상에 대한 비판적 거리와 반성적 여유를 갖 도록 만드는 것이 문학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남송우:우리 문학 작품 중에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생태문학의 개념을 논하는 데 적절한 작품이 있다면 소개를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진우:문학생태학이니 또는 생태학적 문학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미개 척 분야이기 때문에 이를 판단할 수 있는 개념이 아직 정립되어 있지 않다 고 봅니다. 아주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자연을 자연으로서 바라보는 문학, 다시 말해서 자연의 내재적 가치를 노래하는 서정시나 전원시 같은 것들은 모두 생태문학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태문학을 이렇게 규정할 경우에는 '생태'라는 낱말과 결합되어 있는 특정한 문제의식이 사라 져버리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 를 고발하는 문학만을 생태문학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김지하 시인의 작 품들이 대표적인 것이겠지요.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는 한편으로 인간에 의해 야기된 것이 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과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 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마저 변화시킬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과 자연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인간의 영성과 사멸 성과 같은 본성적 측면을 부각시키는 문학을 생태문학이라고 볼 수도 있 습니다. 최근에 저는 이성복 시인의 [호랑가시나무의 기억]을 통해 생태문 학의 성격을 논한 적이 있는데, 그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졌지요. 남송우:하이데거의 방념(放念)의 개념이나 무의욕의 의욕 개념을 설명 하면서 결론 부분에서는 장자의 외편 [천지] 부분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는 기술 시대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유의 한 방향을 동양적 사유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하이데거의 사상 중 동양적 사 유와 닮은 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진우:하이데거는 독일의 저명한 주간지 스피겔 지와의 인터뷰에 서 기술의 문제는 기술이 발원한 서양적 사유의 맥락 안에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사유와 철학이 아무리 동양적으 로 보일지라도 철저하게 서양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의 후기 사상은 동양적 사유와 많은 친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이데거 는 사실 노자의 도덕경을 번역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습니다. 예컨대 하이데 거가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해명할 수 있는 용어로서 도입한 사방(Das Geviert)은 하늘과 땅,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네 가지를 의미하는데, 이 러한 사상은 이미 天, 地, 人, 道를 말하는 도덕경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또 제가 방념으로 번역한 독일어 낱말은 사실 겔라센하이트 (Gelassenheit)로 서 "자인 라센"(Sein lassen)에서 유래합니다. "자인"(Sein)은 존재를 의미하고, 라센 (lassen)은 그대로 두다 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겔라센하이트는 존재하고 있는 것을 존재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문 제는 존재 가 무엇을 의미하고 또 존재하는 대로 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해명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존재에 대한 해석 에 있어서 결국은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가 갈라진다고 저는 생각합니 다. 남송우:독자들을 위해 존재해석에 있어 동서양의 사유가 갈라지는 부분 에 대해 조금 더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진우: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가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입니다. 이왕 하이데거의 개념들이 거 론되었으니 그의 입장에서 간단히 정리해보면, 동양적 사유는 존재 를 지향하는데 반해 서양적 사유는 존재자 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동양은 나무보다는 숲을 보지만 서양은 전체의 숲보다는 개별적인 나무들을 본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가 나무로부 터 출발하면 나무의 모습, 특성, 성장 조건 등을 일단 분리시켜 개별적으로 탐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서양적 사유는 숲이 이러한 나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파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들 상호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서술 하는 서양적 사유는 논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반해서 동양적 사유는 개개의 나무보다는 전체의 숲을 직관적으로 파악합니다. 개개의 나무가 서술될 때에도 항상 전체의 맥락에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가끔 동양인들이 직관에는 강하지만 논리에는 약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비유는 단순화된 것이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많습니다. 남송우:사회생태학적 사유에서 기초하고 있는 북친이 동양 사상이 현실 도피적인 신비주의로 연결될 수 있으며 비변증법적이어서 기회주의적인 유 행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북친의 사상에 관해 이 선생님은 동의하 시는지요? 이진우:대체로 동의합니다. 서양의 기술문제가 이원론적 세계관에서 기 인하였기 때문에 일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는 동양적 사유는 바로 대 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 어불성설입니다. 현대의 기술문명과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것이 서양적 합리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합리성을 철저하게 사유하지 못하는 사유는 실제로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생태학적 관점에서 요구되는 사유와 합리성은 이원론적 성격과 도구적 성격으로부터 출발하여 동시에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현실은 이미 도구 적 성격이 강한 유형의 합리성과 이원론적 세계관에 기초한 이성에 의해 지 배받고 있는데 만약 이러한 사실을 부정한다면, 그것은 도피적일 수밖에 없 는 것이지요. 남송우:북친은 동양적 사유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 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러한지 조금 더 구체적인 해명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이진우: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동양적 사유는 논리적이기보다는 직관 적이기 때문에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 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머레이 북친의 주장에 민감하게 대응할 필 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북친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합리주의가 지배적인 서양적 풍토에 유입된, 따라서 어느 정도는 왜곡된 동양적 사유이기 때문입 니다. 그의 눈에는 동양적 사유가 기술문명의 본질을 올바로 포착하는 대신 에 단지 자연의 가치만을 절대화하는 신비주의로 비치는 것이지요. 남송우: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대상들은 한스 요나스, 하버마스, 하이데 거, 박이문, 머레이 북친 등입니다. 이들의 생태학적 세계관의 점검을 통해 선생님이 궁극적으로 파악하고자 한 세계가 있다면 요약해서 말씀해 주시 고, 이 선생님이 생각하는 앞으로의 생태학적 사유나 성찰의 방향을 나름대 로 제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진우:글쎄요, 제가 지향하고 있는 생태학적 세계관의 모습은 아직 완 전히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의 철학적 입장은 어느 정도 분명하 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학적 문제와 철저 하게 대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보편화되어 있는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의 본질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기술문명 이 단순한 악(惡)으로 배척될 수 없는 것처람 생태학적 사유 역시 단순한 선 (善)으로 판단될 수 없는 것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자본주의와 생태학적 사 유를 대립적인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생태학적 문제에 관한 이성적 해결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철학적 사유 역시 이 문제에 관한 다른 과학적 지식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다양한 담론 공동체 내에서 생태학적 문제를 다룬다고 하더 라도 방향은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 곳에서 이러한 방향을 공생주의 라 는 이념으로 서술한 바 있습니다. 공생주의는 간단히 말해서 삶의 가능성을 억압하거나 박탈하는 사회적 기제들을 비판하고 생명과 의미 있는 삶이라는 공동의 이익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생활형식의 공유를 지향하는 세계관입 니다. 그러나 공생주의가 ―개념에 있어서 생물학적 공생의 의미를 많이 풍 기기는 하지만― 소위 말하는 생명중심주의와 혼동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 는 약화된 인간 중심주의와 약화된 생명중심주의가 만나는 장소에서 비로소 공생주의가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생명체로서 자연의 질서에 예속 되어 있기는 하지만 자유의 존재로서 인간 이외의 다른 생명체에 대한 책임 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생주의는 사실 책임의 윤리에 바탕을 둔 약한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생태학적 문제에 관해 철저하게 사유한 위대한 사상가들과 전통에 기생하면서 공생주 의의 구체적 모습을 조금 더 분명하게 그려 가려고 합니다. 남송우:바쁘실 텐데 오랜시간 동안 유익한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 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문예비평. 1998겨울. 통권31호)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