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6월 1일 화요일 오전 01시 09분 17초 제 목(Title): 정연태/식민지근대화론,논쟁의 비판과 신근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비판과 신근대사론의 모색 정연태 1. 장기근대와 ‘식민지근대화론’ 논쟁 19세기 후반에서 통일의 그날에 이르는 한국의 장기근대(長期近代)註1는 세계사에서도 보기 드문 극적인 세기로 기록될 것이다. 그동안 외세의 침략과 국망, 분단과 동족상잔, 독재와 종속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줄기차게 근대변혁운동ㆍ민족해방운동ㆍ민족민주운동을 전개하여 해방의 근대성을 도모하였으며,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의 상흔에 굴하지 않고 절대적 빈곤을 벗어나 기술의 근대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리하여 남북한 모두 세계사에 유례가 드물 정도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거나 민주화를 이룩하였다. 지난 세기초만 하더라도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서 세계사의 후진 변방지대였던 한국의 이같은 역사적 전환은 세계적 이목과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세기가 바뀌기도 전에 우리 역사는 또 한차례 역전되었다. 북한경제는 주민 대다수가 아사 위기에 처하는 등 목불인견의 상태로 떨어졌으며, 남한경제 또한 IMF 지원으로 겨우 국가부도사태를 면하는 등 구조적 불안정의 심각성을 드러내었다. 20세기 전반의 국망과 20세기 중반의 전쟁 상처를 안고 출발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달성하였던 우리 역사가 20세기말에 이르러 다시 금세기 초의 총체적 위기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같은 역전과 재역전은 세계사적으로도 주목된다. 한국의 장기근대는 근대의 전시장이라고 할 만큼 근대의 각종 기획이 시도된 시기이기 때문이다. 금세기의 우리 역사는 대다수 후진제국이 근대의 시간대에 겪을 수 있는 온갖 종류의 역사경험을 생생하게 보였고, 이 경험은 직간접적으로 선진제국의 근대와 연관되어 있고 그 역투영인 것이다. 금세기 한국사에서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였는가에 대한 탐색은 고난의 장기근대를 마무리하고 희망의 신세기를 맞이하기 위한 민족사적 요청에서나, 서구가 주도한 근대 기획을 비판하고 그 방향을 수정하기 위해서나 대단히 필요한 작업이다. 이 작업은 특히 식민지기의 역사 연구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식민지기는 20세기 한국사의 운명을 좌우한 결정적 시기였으며, 그 유산은 다음 세기에도 여전히 영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시기는 서구 근대의 이중성에다가 일본 근대의 부정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기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이런 측면에서 최근 본격화한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논쟁은 경제사학계의 일각에서 역사학계의 근대사론을 이른바 ‘식민지수탈론’이라고 비판하면서 수정을 요구하고, 역사학계는 이들의 수정사론을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반비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하였다. 이 논쟁은 식민지기를 대상으로 하였지만, 내용상으로는 20세기의 역사경험을 총괄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생산적 전개와 올바른 이해는 이론적으로는 새로운 세기의 근대사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실천적으로는 문명사적ㆍ세기적 전환기를 맞이하여 민족사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시사하는 바 클 것이다. 2. 역사학계의 근대사론---’식민지수탈론’ 역사학계의 식민지기 연구 경향은 대체로 원시적 수탈론, 근대주의론, 내재적 발전론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그외 근대극복론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 가운데 일제 식민지지배의 죄악상과 수탈상만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원시적 수탈론은 해방 직후 60년대 이전에 풍미했던 근대사론으로 지금은 학계 일부에서 나타날 뿐 별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근대극복론은 다양한 견해를 제기하지만, 각각 근대성 비판,註2 근대극복(宮嶋博史), 근대초극(趙景達)註3을 통하여 서구 근대성의 극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공통된 인식을 보인다. 이같은 인식은 서구 근대성을 준거로 한 근대사 인식의 기존 패러다임을 전면 비판한 것으로 역사연구와 현실인식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 연구는 아직 시론적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근대주의론 및 내재적 발전론에 입각한 연구 경향이 지배적이다.註4 이 두 경향 사이에는 근대변혁 과제와 민족해방운동 주체의 설정을 둘러싸고 현격한 인식의 차가 존재한다. 근대주의론은 국민국가 수립, 자본주의 공업화, 시민사회 성립이라는 서구의 역사경험으로부터 자본주의적 근대화라는 근대변혁의 과제를 도출한다. 그리고 부르즈와민족주의 세력을 이 과제의 담당 주체로 파악하고 부르즈와민족주의 운동 중심으로 근대변혁운동을 체계화한다.註5 이런 점에서 이 사론은 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점으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이는 북한 사회주의체제에 대항하여 남한 자본주의체제의 정통성을 옹호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될 소지가 다분하다. 실제로 이 사론은 연구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조국근대화’의 내발적 원동력을 역사적으로 확인하거나 국민과 체제를 통합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반면 내재적 발전론註6 은 토착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느냐 자립경제를 지향하느냐, 식민지 사회의 성격을 식민지반봉건 사회로 보느냐 식민지자본주의 사회로 보느냐 등에 따라 인식의 편차가 있지만, 일국사적 발전의 기본동력을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계기에서 발견하고, 그 전개양태를 민족해방운동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공통된 역사인식을 보인다. 또한 일제의 지배와 민중의 대항이라는 인식구도는 해방후 외세의존적 군사독재의 지배와 민족민주운동세력의 저항이라는 대립구도로 이어져, 근대 100년사를 ‘지배와 저항’의 틀 속에서 통일적으로 이해하게끔 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의 역사관은 민족해방운동과 민족민주운동의 이데올로기적 토대로 기능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체제변혁적인 지향을 담고 있다. 이처럼 양자의 연구 경향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함에도 민족주의적 지향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이 발견된다. 이들은 자본주의 맹아론을 토대로 식민사관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민족운동을 자주적 근대화의 기본 동력으로 주목하였으며, 일제의 침략 만행과 야만적 수탈에 대해서는 강력히 비판하였다. 이 두 경향은 일반적으로 ‘식민지수탈론’으로 불린다. 식민지수탈론에서는 먼저 개항 이전의 조선사회가 정체된 사회가 아니라 자본주의 맹아가 발생하는 등 역동적 사회였음을 주목한다. 그리하여 외래 자본주의의 영향이 없었다 해도 자주적 근대화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은 일제의 지배로 인하여 압살되었다고 한다. 일제의 민족 차별과 수탈로 인하여 생산력 발전은 제약되고, 성장의 과실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그 결과 일본의 이식자본주의경제는 발전한 반면 민족경제권은 왜곡ㆍ축소되었다. 이같은 조건에서 대다수 한인은 정치적 굴종과 경제적 몰락을 강요당하였다. 따라서 식민지 지배체제를 타도하지 않고서는 근대화는커녕 민족의 생존조차 보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민족운동은 역사발전의 동력으로 평가ㆍ부각되었다. 한편 식민지지배의 유산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심대한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었다. 민족분단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의 파행과 경제의 종속, 그리고 사대주의적 문화의 이면에는 식민지지배의 부정적 유산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근대사상(近代史像)은 한국사회의 민족자존의식과 반일주의적 정서에 기초해 근 30년간 역사학계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해왔으며, 제국주의론ㆍ종속이론에 의해 이론적으로 정치화(精緻化)되었다.註7 그리고 교과서나 일반 역사서에 반영되어 국민에게 교육되고, 그 민족주의적 특성 때문에 정권과 변혁운동 양대 세력에 의해 동원의 논리로 활용되곤 했다. 3. ‘식민지근대화론’의 대두 최근 식민지수탈론의 전제는 국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도전받고 있다. 도전의 바람은 80년대부터 해외에서 불기 시작하여 국내로 확산되었다. 식민지수탈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들도 다양한 편차가 있지만, 공통된 주장은 다음과 같다. 먼저 조선사회의 자생적 자본주의화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한국 근대는 서구 근대의 수용ㆍ이식을 통하여 비로소 발전 계기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즉, 식민지수탈론이 전제하는 자본주의 맹아론을 근저에서 부정한다. 반면 이들은 식민지 개발자로서의 일제를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일제는 사회간접시설을 건설하고 근대적 제도를 도입ㆍ보급함으로써 식민지를 개발하였고, 한인도 일제의 개발에 자극받아 자기 성장을 도모했다고 주장한다. 일제의 식민지개발과 한인의 자기개발로 식민지 한국사회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고도성장을 경험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식민지상태에서도 주체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민족해방 없이는 민족경제의 예속과 파괴가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식민지수탈론의 입장과 배치된다. 한편 식민지기의 개발 경험과 성과는 6,70년대 경제발전의 역사적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해방후 경제성장 모델은 식민지기 일제의 산업화 모델과 유사하며, 이때 경험을 축적한 한국인이 해방후 경제성장의 인적 자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 개발과 해방후 발전 사이에는 단절적 측면보다는 연속적 측면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식민지지배가 해방후 경제적 종속과 저개발의 역사적 원인이 되었다는 식민지수탈론의 역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같은 근대사상(近代史像)은 식민지근대화론으로 통칭된다.註8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발전의 지표를 한결같이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서 찾는다. 그리고 근대로의 이행 발전의 기본 동력을 한국사회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고, 그 외부를 일제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경제원조에서 발견한다.註9식민지근대화론은 한 걸음 더 나아가 1980년대 동아시아의 새로운 변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로 출현하였다. 동아시아의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이 동아시아 역사상의 전환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 응답의 하나는 중진자본주의론으로 제기되었다. 그것은 제국주의론과 종속이론의 수정이나 폐기로 나타났다. 신흥공업국들의 출현으로, 제3세계가 세계 자본주의경제와의 관계를 깊게 할수록 종속과 저개발의 심화현상이 나타난다는 기존의 제국주의론이나 종속이론은 일방적으로 통용될 수 없게 되었다. 반면 제3세계도 세계자본주의와의 관계에서 ‘대결과 단절’이 아니라 ‘협력과 참여’에 의하여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하였다. 이런 점에서 중진자본주의론은 동아시아의 특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자본주의 발전의 일반이론, 즉 제3세계 경제발전론으로 정립된 것이다.註10다른 하나의 응답은 동아시아사회 내부에서 발전의 동력을 찾으려는 시각이다. 여기서는 동아시아 전통의 고유한 특수성이 후발성의 이익을 흡수하여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수용능력론). 그 특수성은 동아시아가 소농(小農)사회라는 공통의 생산력적ㆍ문화적 기반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 점이 바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사회가 비록 자생적으로 자본주의를 발전시킬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자본주의를 수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註11 한편 구미 학계는 동아시아 경제발전이 국가 주도의 성장전략에 의하여 성취된 점에서 공통성을 찾고 있다. 그중에서 발전국가론이 대표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는 비교사 연구를 통하여 동아시아 발전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동아시아사회에서 유독 자본주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아시아 신흥공업국가들이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거쳤고 일제 식민정책의 특수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비록 정치ㆍ문화적으로 식민지사회를 억압했지만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전통국가’를 해체하고 식민지 발전국가를 수립하여 국가 주도의 발전지향적 식민정책을 추진한 유일한 제국주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제 식민지사회는 신속하게 시장을 통합하고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특히 식민지로서는 유일하게 공업화를 경험하였다고 한다.註12 신흥공업국들의 출현과 동아시아론ㆍ중진자본주의론ㆍ발전국가론의 대두는 식민지근대화론의 현실적ㆍ이론적 발언권을 강화했다. 이들 이론은 동아시아에서 신흥공업국의 출현을 토대로 이론화된 것이며, 일제의 식민지를 거친 한국과 타이완이 바로 이 신흥공업국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4.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반성과 비판 (1)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의 전개 1987년 한일 경제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근대경제사연구회’가 결성되고 식민지근대화론에 입각한 공동연구의 성과가 산출되자 국내 역사학계는 이를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한국민족주의는 반일민족주의라고 할 만큼 일본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국민정서와 학계 풍토를 고려할 때, 일제의 식민지지배를 미화하는 듯한 주장은 일대 파란을 일으키기에 족한 것이었다. 당초 역사학계에서는 식민지근대화론자의 문제제기를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 정도로 여겼다. 구미 학계에서는 80년대 전반경부터, 일본 학계에서는 80년대 중반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식민지근대화론이 연구 성과를 축적하여 8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소개될 때까지만 하더라도 국내 역사학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이 실증적인 연구 성과를 연이어 산출하고 이를 토대로 목소리를 높여오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반격에 나섰다.註13 반격은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일부 문제제기를 수용하여 역사학계의 방법론적 반성을 촉구하면서도 기본적으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경향이다.註14 다른 하나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하여 ‘신식민사관’이나 ‘식민지지배 미화론’ ‘제국주의 옹호론’이라는 식의 전면적 비판을 가하고 식민지수탈론의 기존틀을 고수하는 경향이다.註15한편 식민지근대화론자의 반비판은 신랄하고 도전적이다. 어느 논자는 역사학계의 “근현대사 연구는 ‘민족정기’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과학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고 역사학계 전체를 자극하고 나섰다.註16 그리고 다른 논자는 식민지수탈론자들이 실증적 근거도 없이 마치 ‘식민지근대화론자=친일파=매국노’라는 국민의 감정적 정서나 이용하여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려고 한 것처럼 식민지수탈론자들의 논쟁 태도를 비난하고 나섰다.註17 심지어 해당 주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연구 성과를 제출한 적이 없는 식민지근대화론자까지 나서서 ‘혜택받은 연구조건의 시대에 살면서 무책임한 공상 일변도의 추론을 거듭’하고 있다는 식으로 특정인을 지목하여 인신공격성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註18 이쯤 되면 논쟁은 도가 지나쳐 차라리 비난전이 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식민지근대화론 또한 논쟁과정에서 역사관의 분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론(중진자본주의론)이 여전히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면, 다른 한 축의 형성이 경제사학계 일각에서 조심스럽게 모색되는 듯하다. 전자는 한국자본주의의 선진화를 시대적 과제로 하여 그 기원으로서 식민지기를 고찰하고, 그런 점에서 철저히 현실추수적이고 체제옹호적인 입장에 서 있다. 반면 후자는 식민지자본주의 근대화의 전개를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근대자본주의 또한 착취와 억압을 내포하는 생산체계라는 점에서 비판을 가하는 근대극복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註19 (2) 논쟁의 비판과 반성 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은 역사학계의 척박한 토론문화에 비추어볼 때 근래에 드물 정도로 활발한 것이다. 그러나 최근 논쟁이 새로운 역사관을 모색하는 생산적 토론보다는 상대 주장 비판과 자기 주장 정당화로 소모전을 벌이는 비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고, 그 결과 새로운 역사상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의 배경에는 통일문제와 함께 한국민족주의의 양대 축을 구성하는 한일문제, 근 30년간 한국사 학계를 지탱해온 인식틀이 논쟁 대상으로 된 사정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러나 논쟁 자세 또한 문제가 있었다. 불신의 상대끼리 생산적 논쟁을 전개하려면 주장의 요점과 비판의 대상이 명료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논쟁 전선은 식민지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수용능력론) 사이에 구축되었으나, 수탈이냐 개발이냐 식의 민족주의적 기준이 아니라 다른 기준, 예컨대 근대지향이냐 근대극복이냐 또는 체제옹호냐 체제변혁이냐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 전선이 달리 구성될 수도 있을 만큼 각각의 내부에는 역사관의 차이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많은 논자들이 상대진영의 주장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일부의 주장을 상대진영 전체의 역사관인 것처럼 침소봉대하여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나선 문제가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식민지근대화론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대다수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역사학계 내에도 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하는 근대주의론과 비자본주의적 근대를 지향하는 내재적 발전론이 있고 이들간의 연구방법론과 역사관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조차 제대로 분간하지 못하며, 심지어 애써 무시한다. 그같은 인식 수준에서 70년대에 지배적이던 근대주의론적 연구경향이 90년대에도 역사학계를 지배하는 것으로 오인하거나 심지어 왜곡하고, 학계 전체를 매도하고 나선 것이다.註20 또한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 논자는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한국사회의 선진화ㆍ현대화라는 현대사의 역사적 과제를 제시하는 데 반하여 식민지수탈론에서는 그러한 과제의 제시가 없다는 식으로 비판을 했는데, 이는 무지의 소치로 근거 없는 것이다. 식민지수탈론에서는 대체로 민주주의의 실현과 민족통일, 자립적 경제체제의 구축 등을 주내용으로 하는 역사적 과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을 식민지 미화론 등으로 몰아붙이는 다수 식민지수탈론자의 비판 또한 적실하지 않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도 일제하에서 국민경제 및 국민국가의 형성과 민주주의 등 서구 근대성의 핵심이 원천적으로 부정되었다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이들 주장의 요점은 식민지자본주의가 발전하였고, 그 유산이 해방후 경제성장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이 식민지지배 미화론에 근접해 있다고 할지언정 식민지지배 미화론과 동일시하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註21그러나 이러한 논쟁상의 문제점을 접어둔다면, 논쟁을 통하여 각각의 이론적ㆍ실증적 문제점들이 드러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먼저 식민지근대화론의 단선적 기원론적 접근법은 비역사적인 것으로 문제가 있다. 개항기-식민지기-분단시기의 역사적 조건과 발전계기의 단계적 차이를 무시한 채 고도성장의 주된 역사적 기원을 식민지기에서 찾는 것은 ‘설득력 없는 단선론’으로 전락할 위험성이 있으며, 그조차 실증되지 않는 막연한 추론에 의존하는 바가 크다. 식민지공업화와 해방후 고도성장 사이에서 연속성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경성방직(京城紡織)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註22 해방후 과학기술 분야의 식민지적 유산은 학위소지자가 12명에 불과할 정도로 보잘것 없었다.註23 설령 그 기원의 일단을 식민지기로까지 소급하여 찾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기원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독립국가의 수립과 국제경제 환경이 해방후 고도성장의 주된 계기라는 비판은 설득력이 있다.註24두번째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수동적ㆍ파편적ㆍ역부조적(逆浮彫的) 역사인식이다. 국내 식민지근대화론은 언뜻 내재적 발전을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구 근대의 일방적 이식이 아니라 전통 소농사회의 적극적 대응에 의하여 서구 이식근대가 비로소 토착화될 수 있다고 한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때 전통사회의 대응은 단지 서구 이식근대의 토착화를 가능케 하는 수동적 요인, 종속변수로만 취급될 뿐이다. 이는 전형적으로 전통과 근대, 충격과 적응이라는 서구중심적 이분법적 사고에 의한 것으로, 여기서는 자본주의적 근대로의 변화 이외의 다른 변화나 자본주의적 근대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 성장을 도모해나가고 역으로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비자본주의적 근대 지향이나 해방의 근대 지향은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이는 곧 식민지근대화론이 동아시아의 특질에 주목한다고 공언하면서도 고도의 서구중심적 사고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역사발전을 수동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식민지근대화론의 파편적 역사인식은 경제성장 지상주의적 사고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어떤 식민지근대화론자는 60년대 이래 경제발전이야말로 한국근대사의 총결산이며 한국현대사의 유일한 전망이라고 하면서 경제성장론자임을 자처했다.註25 여기서는 경제와 정치를 기계적으로 분리하고, 경제성장 곧 기술의 근대성을 역사발전의 유일한 지표로 여기는 편향된 사고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민족해방ㆍ민주화운동이라는 해방의 근대성이 생산력의 진보를 촉진하고 시장의 투명성을 제고하며, 그 결과 경제발전의 기초를 튼튼히 다진 측면은 철저히 무시된다.註26 이같은 인식으로는 동아시아 각국이 민주주의를 희생하고 경제성장 일변도 정책을 추진한 결과가 오늘날 경제위기의 내재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즉 이들 사회에서의 민주주의 미성숙이 정경유착과 부정부패를 확대재생산하는 요인이 되고, 그것이 기업들로 하여금 생산기술 개발과 경영혁신보다는 저임금 노동력, 시장 독점, 특혜대출, 부동산 및 금융 투기 등에 의존한 손쉬운 성장전략에 의존하게 하여 동아시아 경제의 대외경쟁력을 취약하게 만들었는데, 이같은 측면이 식민지근대화론에서 주목될 여지란 별로 없다. 한편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식민지 지역경제의 발전상을 일면적으로 강조하는 반면 일본자본주의의 외연적 확장에 의하여 한국경제의 대일 예속화가 한층 심화된 측면을 무시한다. 일제 주도의 식민지 개발은 한국과 한국민의 일본화, 즉 민족동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는데,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식민지 수탈과 민족동화라는 본류 역사는 경시하고 그 과정에서 초래된 개발의 부산물만을 역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이같은 역부조적 인식에 속박되다보니 어떤 식민지근대화론자는 식민지기말 한국민들이 침략전쟁과 전쟁경제에 동원된 것조차 민족말살의 경험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고통에 대한 최초의 경험이고 근대적 변신의 ‘좋은’ 기회였던 것처럼 거리낌없이 주장하고,註27 다른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공동연구 「총설」에서는 일제의 공문 수준의 자료를 근거로 일제 총독부가 “대민 업무에서 얼마나 엄정한 공공성을 강조하고 있었는지 일일이 사료를 열거할 여유가 없다”는 식으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상찬해 마지않는 것이다.註28세번째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출현하게 된 현실진단이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맞이하면서 파산하였다는 점이다. 한국경제가 고속성장을 거듭하던 1980년대 중반임에도 해외의 내재적 발전론자는 금융불안과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예고한 데 반해,註29 국내 식민지근대화론의 대표 논자는 1997년말 국가부도사태가 나기 직전에조차 1986년 이래 무역수지가 흑자기조로 돌아섰고 투자재원의 해외의존도 기본적으로 해소되었다는 식으로 평가할 만큼 성장신화에 푹 빠져 있었다.註30 고도성장과 경제위기를 모두 경험하고 한국경제의 불안정성을 재확인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근거없는 성장신화에 입각한 식민지근대화론은 더이상 통용되기 어렵다. 네번째 문제는 식민지근대화론의 현실적 역기능이다. ‘제국주의와의 협력을 통한 경제발전’을 강조하고 경제의 ‘선진화’를 시대적 과제로 내세우는 식민지근대화론은 현실의 사회변화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 속에서 진행되는 모순의 실체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에서 체제옹호적ㆍ수구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위험성이 크다. 이러한 논리는 전세계를 하나의 자유시장으로 묶어 지구상의 마지막 이윤까지 쟁탈하려는 초국적자본의 신자유주의와 맥이 닿으며, ‘국가경쟁력 강화’란 미명하에 국정방향을 반(反) 노동자ㆍ복지ㆍ환경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국내 자본의 이해를 미화하는 한편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불안정성과 위기를 은폐하기 때문이다. 또한 식민지근대화론은 일본 내 보수주의자ㆍ군국주의자들에 의하여 이용당할 위험성이 있고, 실제 이용되고 있다. 이들의 검증되지 않은 가정과 주장은 일본판 역사 수정주의의 근거로 동원되고 있으며, 반성과 사죄에 기초한 과거사 청산을 더욱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일본사회의 보수화를 더욱 촉진하는 구실까지 하고 있어 동아시아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만드는 데 의도하지 않게 기여하고 있다. 한때 물의를 일으켰던 『추한 한국인(醜い韓國人)』註31이 식민지근대화론을 적절히 활용하여 식민지지배를 미화한 것이 그 예이다. 한편 식민지근대화론 내부의 근대극복론자도 이같은 문제점을 공유하고 있다. 앞으로 근대극복론의 추이는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의 논쟁을 미루어볼 때 이들의 역사인식 방식에 중대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이들은 그야말로 부르즈와주권의 모순을 단순히 지적하거나 근대는 극복대상이라고 그저 선언할 뿐이다.註32 그리하여 이들은 근대 모순이 우리 역사에서, 특히 식민지적 근대의 현실에서 어떻게 특수하게 발현ㆍ발전해왔는지에 대해서는 실증 차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이론 차원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더욱이 이들의 근대극복론에서는 식민지적 수탈이 정치적 영역의 억압수준으로 형해화되고 경제적 영역에서는 근대사회 일반의 계급적 수탈로 등치되어 이해된다는 점에서 한국근대의 고유한 역사성인 식민지성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註33 이런 점에 비추어볼 때 이들은 당초 근대극복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한편에서는 탈근대론이 학문 전영역에 주요 화두로 등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들의 당초 주장이 역사학계의 거센 비판에 직면하자, 탈근대론에 편승하여 위기 탈출과 이론적 진전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註34 식민지수탈론 반성 식민지수탈론자가 식민지근대화론의 합리적 문제제기조차 수용하는 데 인색하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예컨대 일제의 지배는 한국사회의 내재적 발전 수준에 의하여 일면 규정되지 않을 수 없으며, 한인도 수탈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대응하여(정치적 저항뿐만 아니라 경제적 대응까지 포함하여) 자기 발전을 도모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지적은 음미할 만한 것이다. 식민지기 역사도 한국사의 일부이고 그 속에서도 한국사회가 발전하였다면 한인의 대응과 고민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식민지 같은 수준도 아니었고 일본과의 격차도 그다지 크지 않았던 상황에서, 일제가 제 마음대로 지배하고 수탈할 수는 없었으며, 대다수 한국인은 저항하면서도 적응하고 수탈당하면서도 자기 성장을 도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식민지수탈론자들은 제국주의 및 민족해방운동 만능론을 연상케 하는 역사인식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제 식민지수탈론자들은 식민지근대화론이 국제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고, 국내에서도 그 세를 더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자기 진단과 반성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 내재적 발전론자도 대체로 서구중심적인 ‘세계사의 기본법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전형이 봉건제→자본제(→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단계적ㆍ직선적 역사발전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 맹아론을 고집하는 것이다. 이런 풍토에서는 맹아론의 부정이 곧 식민사관으로의 회귀로 간주된다. 그러나 역사학계에서 30년간 자본주의 맹아론을 밝히려 했지만 아직도 설득력있는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 것 같다. 더욱이 봉건제 자체가 전근대 한국사에 적절한 개념인지조차 의문인 상황에서 그 태내에서 자본주의 맹아가 발생ㆍ발전해야만 역사가 발전한다는 식의 논법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셋째, 식민지기와 해방후의 긍정적 연속성을 주장하는 식민지근대화론도 실증적 기초를 결여하고 있지만, 부정적 연속성만을 내세우는 식민지수탈론도 문제가 있다. 해방 50년이 넘도록 제반 사회문제를 개혁하지 못하고 그 원인을 죄다 식민지 지배 탓으로 돌리려는 듯한 자세가 한국사회를 풍미한 실정이다. 이는 잘난 것은 내 탓, 못난 것은 조상 탓으로 돌리는 사고나 진배없는 것으로, 현실의 문제조차 역사 탓으로 떠넘기는, 또다른 기원론적 접근법의 편향인 셈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부정적 유산의 재생과 작동을 가능케 한 한국사회의 내외적 조건을 개혁하고, 행여 식민지 유산 중 사회의 진보와 발전에 유용한 것이 있다면 적극 변용하여 활용할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인 것이다. 넷째, 식민지수탈론에는 내재적 발전상과 제국주의 수탈성이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되어, 전자의 비판은 곧 후자의 부정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잘못이다. 민족적 차별과 한민족의 의사에 반하여 민족 동화와 말살을 꾀했던 일제의 침략과 지배는 어떠한 명분으로든지 변호될 수 없는 행위인 반면, 일제의 수탈과는 별개로 내재적 발전을 제약한 요인을 구조적으로 해명하고 자주적 근대화의 좌절 요인을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것은 필요하다. 발전뿐만 아니라 제약요인의 내재성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섯째, 식민지수탈론자는 연구방법상의 낙후성이나 실증상의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듯하다. 전근대사와 근대사, 근대사와 동시대사를 거시적ㆍ계량적으로 분석하거나 식민정책과 식민지의 비교 연구로 일제의 지배정책 및 조선사회 변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파악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객관화’ ‘세련화’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연구동향과 비교했을 때 연구방법상의 단조로움과 미숙함이 느껴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식민지수탈론자들이 일제 수탈과 민족 저항이라는 ‘자명한 전제’에 너무 쉽게 안주한 나머지 수탈의 실상을 생생히 밝히는 데 매우 소홀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종전까지 수탈정책의 대명사로 간주되던 토지조사사업조차 논란의 대상이 되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실증적 차원에서도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수준의 수탈상을 실제적으로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5. 21세기 신근대화론의 모색---장기근대사론 식민지수탈론, 그중에서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의식은 정치ㆍ군사대국화를 지향하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당해 민족의 동의 없이 이민족을 지배하는 반인도주의적 범죄행위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더 나아가 민족통일을 달성하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거나, 세계시장 쟁탈전에 돌입한 초국적자본의 논리에 대항하여 ‘해방의 근대’를 모색하는 ‘반체제운동’을 전개하는 데서도 그 문제의식은 계승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식민지근대화론의 비판에도 일리가 있다면 그 문제의식과 연구방법론, 그리고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한편 내재적 발전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은 가치지향으로서는 대립하지만 연구방법론적으로는 상호보완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내재적 발전론이 현실을 설명하면서도 ‘지향으로서의 근대’에 주목하는 변혁론적 특질을 띠는 반면 식민지근대화론은 ‘실재로서의 근대’에 주목하여 지배적 현실의 역사적 형성과정을 분석하려는 현상기술적인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21세기 신근대사론은 내재적 발전론의 문제의식과 연구방법론을 기본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식민지근대화론의 비판을 적극 수용하고, 마침내 양자를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관과 연구방법론으로 재구성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작업은 필자의 능력 밖이지만, ‘장기근대사론(長期近代史論)’의 제기로 고민의 일단을 피력하고자 한다. 먼저 장기근대사론은 내재적 역사인식이어야 한다. 여기서 내재적이라 함은 역사는 여러 계기의 작용과 충돌에 의하여 발전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래와 안으로부터의 계기에 의하여 그 방향이 규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관점을 기계적으로 고집하여 아래와 안으로부터의 계기가 모든 단계와 국면의 역사 전개를 결정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위와 밖으로부터의 계기도 아래와 안으로부터의 계기를 매개로 실현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방법은 기본적으로 내재적 발전론의 접근법을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장기근대사론의 내재적 인식은 내재적 발전론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서구중심적인 직선적ㆍ단계적 진보발전론에 빠져들고 역사의 실천성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역사적 과거를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는 내재적 발전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재적 역사인식은 당위적이고 가치지향적 차원에서 역사적 과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추어 역사상을 구성하는 데는 조심스럽다. 여기서는 현실 속에 작동하는 모순의 실태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 모순의 필연적 발전과정에 주목하여 현실변혁의 과제 및 주체를 설정하고자 한다. 한국적 근대의 고유한 특질을 주목하는 점에서 내재적 역사인식은 식민지근대화론의 문제제기를 수용한다. 그러나 한국근대사를 객관적으로 보자면서도 자본주의적 선진화를 시대적 과제로 내걸고 자본주의 승리사관과 기원론적 접근의 편향에 빠져 단선적 발전론을 취하는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반면 내재적 역사인식은 지배적 현실이 형성ㆍ발전하는 과정을 밝히는 데 주력하는 동시에 이와 대항하기도 하고, 대항하면서도 수용ㆍ적응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에 흡수되어가는 비지배적 계기의 전개양상에도 주목한다는 의미에서 인과론적 접근법을 선호한다. 둘째, 복선적 역사인식이다. 이는 자본주의적 근대 지향과 비자본주의적 근대 지향, 해방의 근대 지향과 기술의 근대 지향이 대립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역사를 전개해온 과정에 주목한다. 이는 과거의 산물인 현실이 어떻게 이루어져왔는가 뿐만 아니라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으나 현실극복의 계기가 역사 속에서 어떻게 형성ㆍ발전되어왔는가를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註35 전자를 무시하면 비과학적으로 되고, 후자를 놓치면 역사는 퇴보하기 때문에 양자간의 긴장을 통하여 역사학의 과학성과 실천성을 제고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편 복선적 근대인식은 양대 지향의 대각적 갈등으로만 역사를 보지 않는다. 예컨대 장기근대사를 자본주의적 근대 지향 대 비자본주의적 근대 지향의 갈등이나 해방의 근대성 대 기술의 근대성의 갈등으로만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러한 양대 지향이 복선적으로 결합하거나 대립하고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전개해나간다고 보고, 그 속에서 한국적 근대의 고유한 특질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내재적 발전론이나 수용능력론이 기본적으로 취하는 ‘수탈과 저항’이나 ‘충격과 수용’의 인식구도에 대해서는 단조로움을 느낀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장기근대의 전개는 새로운 구도로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즉 장기근대는 자본주의적 근대나 기술의 근대를 지향하는 흐름과, 기술의 근대뿐만 아니라 해방의 근대까지 포함하여 총체적 근대를 지향해온 흐름 사이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는 해방후 남북의 대립이 자본주의 근대 대 비자본주의 근대의 한 계열인 사회주의적 근대의 갈등으로만 간주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기술의 근대성뿐만 아니라 해방의 근대성까지 요구하는 민중과, 기술의 근대성을 빌미로 해방의 근대성을 억제해온 남북한 지배세력이 분단체제를 유지하는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 인식은 구조와 위계의 지속성에 주목하지만 그 영속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구조와 위계를 해체하고 재편해나가는 각 국면의 계기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자본주의의 종속적 구조를 인식하면서도, 종속성이 약화되고 자립성이 제고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즉 세계체제의 위계제는 기본적으로 지속되지만, 개별국가의 위계는 유동적이었던 역사를 기억한다. 멀리 거슬러올라갈 것도 없이 근대만 살펴봐도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최상위는 네덜란드-→영국-→미국으로 옮겨갔으며, 동아시아 NIES의 위계는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이행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위계의 변동에 주목한다. 마지막으로 장기근대사론은 열린 민족주의적 역사인식에 입각한다. 남북한 사회는 민족주의가 과잉된 사회이다. 특히 한국민족주의는 민족해방운동 과정에서 형성ㆍ발전하였기 때문에 강렬한 반일주의를 핵심적 구성요소의 하나로 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임진왜란을 통하여 대일 경쟁의식과 적대의식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계승되었다. 더욱이 소중화로 자부할 정도의 문화적 자존의식이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지배로 무참히 무너졌으며, 일제의 식민지지배나 민족운동을 통하여 민족의식은 재생되고 새로운 주조과정을 거쳐 증폭ㆍ확산되었다. 그 결과 반일ㆍ반외세 민족주의는 국민의 심성 구석구석에 파고들었다. 똑같이 NIES에 속한 한국과 타이완 사람들이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하여 식민지기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조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역사적으로 계승된, 한국사회의 문화적 자존의식과 반일 적대의식에 연유하는 바가 크다.註36그리고 해방후 권력과 민족민주운동세력에 의하여, 그리고 과거 침략과 만행에 대하여 사죄와 반성은커녕 이를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일본의 보수세력에 의하여 반일 민족주의는 간단없이 재생되었다. 특히 지배권력에 의하여 민족주의는 독재체제를 정당화하는 체제유지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과잉되었고, 파시즘적 색깔을 띠는 왜곡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즉 민족주의는 남한에서는 반공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독재체제의 이념적 기초로 이용되었으며, 북한에서는 반제국주의와 결합하여 ‘유일체제’를 초래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는 민족을 통합하기보다는 분단체제를 고착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도되었다. 한편 일본 상품과 문화를 선호하고 모방하면서도 의식상으로는 일본을 적대시하는 분열현상이 만연해 있고, 한일관계가 ‘가깝고도 먼 나라’로 된 것도 이같은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고 반일 민족주의를 주된 구성요소로 하는 한국민족주의의 역사적 효용성이 소진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민족’ ‘민족주의’란 말에 신물이 난다는 것은 민족주의가 구호로서 남용되고, 체제유지의 이데올로기로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민족통일의 과제가 역사의 전진을 가로막고, 미국 주도의 초국적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적 문화와 의식이 전세계를 지배하여 개별 민족ㆍ지역의 자립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파괴해나가는 현실에서 이와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민족주의의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첨단 전자산업과 교통ㆍ통신 수단의 발전에 따라 세계화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적 역사인식 또한 변모하지 않으면 안된다. 편협한 국수적 민족주의로는 자기 사회를 객관화하거나 다른 사회를 이해할 수 없고, 세계화되는 현실에 대응해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민족주의의 변모 방향은 민족자결과 호혜평등[共生], 민주주의에 기초한 열린 민족주의이다.註37 열린 민족주의는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이는 우리 역사의 주된 전통의 하나이기도 하다. 한국민족주의는 침략과 지배, 패권을 추구해온 서구나 일본의 민족주의와는 달리 제국주의ㆍ냉전ㆍ독재체제를 거부해온 저항민족주의였다. 그 가운데서도 민족자결ㆍ호혜평등ㆍ민주주의의 실현 등 해방의 근대성을 추구해온 진보적인 열린 민족주의 흐름이 면면히 이어져왔던 것이다. 열린 민족주의는 실타래처럼 얽힌 한일문제를 풀어가는 데서도 유효한 실마리를 줄 것이다. 아직도 왜놈ㆍ아직기(阿直岐)ㆍ왕인(王仁) 운운하며 대일 우월의식을 갖는 사고구조로는 오욕의 지난 역사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반성할 수 없으며, 우리 사회와 역사를 객관화할 수 없다. 열린 민족주의야말로 대일 경쟁의식과 컴플렉스로부터 한국민을 해방시키고, 새 한일관계의 형성에 능동적으로 대처해나갈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해줄 것이다. 둘째, 열린 민족주의는 장기근대 이해의 관건인 식민지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는 데도 유용하다. 열린 민족주의에서는 식민지 문제를 한국민족 대 일본민족의 문제로 보는 국수적 민족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의 수탈성 여부는 민족문제로서뿐만 아니라 계급문제로서 접근하거나, 한일간의 즉자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권 전체 차원에서의 한일문제로 접근할 때 올바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열린 민족주의는 장기근대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이바지할 것이지만, 과거사 청산에 미온적인 일본정부의 자세와 과거사를 변호ㆍ미화하는 보수세력의 작태는 한국사회가 열린 민족주의 세계로 진입하는 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열린 민족주의로의 전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은 한국사회가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안목을 갖지 않으면 21세기 세계사의 대변동에 적극 대응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적 요청에서이다. 한국사회의 장기근대는 지금 해체 국면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기술의 근대성 추구가 환경ㆍ생태계의 위기를 초래하였고, 분단체제에 의존한 국가 주도의 성장모델이 한계에 직면한 것은 그 단적인 표징이다. 이런 측면에서 지금은 장기근대를 슬기롭게 마무리하고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하는 시점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이 작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장기근대의 불행과 고난을 되풀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장기근대사론은 오늘날 한국사회의 위기를 직시하면서 그 극복방안을 역사적 현실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자본주의의 세계화 추세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위기 징후를 읽어내고, 그 대안체제를 우리의 지평에 서서 모색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기근대사론은 장기적 전망을 담는 것이라기보다는 당면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장기근대사론은 일제의 한국지배, 미국 헤게모니하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와 분단체제가 민족사의 전개를 규정해온 지배적 조건이었음을 직시한다. 동시에 그 조건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역사발전의 기본적 동력으로 역할을 해온 민중의 존재와 성장에 주목한다. 또한 민중을 배제하고 억압하기도 하면서 발전계기를 현실적으로 지배하고 주도해온 국가의 기획력과 조직력도 무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양자 사이의 대립과 결합으로 이루어진 역사를 기억한다. 이런 점에서 장기근대사론은 오늘날 남북한의 위기를 탈출할 수 있는 역량이 역사 속에서 발현된 국가의 주도성과 민중의 역동성이 결합될 때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장기근대사론은 시장경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하여 국가를 약화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초국적 금융자본의 투기와 재벌의 독점체제로부터 시장을 보호하여 자유경쟁이 가능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생산력의 발전이 이루어지고, 노력한 만큼 잉여가치가 분배될 수 있는 투명한 시장경제체제를 만들기 위해서도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더욱이 오늘날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환경문제의 해결과 사회구성원의 공생공존에서 불가결한 사회복지의 실현, 그리고 민족통일의 과정에서 초래되는 제반 문제의 원활한 처리를 위해서도 국가의 역할을 한층 기대한다. 문제는 국가의 성격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남북한의 권위주의적 국가체제를 개조하여 정치ㆍ경제ㆍ사회의 민주화를 도모할 수 있는 실질 민주주의적 국가체제로 여하히 탈바꿈시켜나가느냐 하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장기근대에 걸쳐 해방의 근대를 모색해온 민중의 역동성을 기대한다. 그러나 이들만의 힘으로는 실질 민주주의적 국가체제의 건설과 유지라는 과제는 실현 불가능하다. 이 과제는 이들과 함께 자본주의적 근대의 부정성을 자각하고 해방의 근대를 모색하거나 근대의 부정성을 지양해나가려는 시민운동세력이 연대할 때 실천 가능하다. 민족통일 또한 양자의 결합을 매개로 할 때 비로소 전진적인 방향에서 달성될 수 있다. 결국 장기근대사론에서 볼 때 오늘날 한국사회의 위기 극복과 민족통일의 진보적 실현은 민중과 시민운동세력을 결합시키고, 이에 기초해 강력하면서도 실질 민주주의를 수행할 수 있는 국가체제를 여하히 건설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註38지금 우리는 근대세계가 걸을 수 있는 가장 참담한 과정인 식민지ㆍ분단ㆍ전쟁ㆍ독재ㆍ종속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세기와 민족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 이러한 과제의 실현은 자본주의적 근대의 부정성을 극복하고 근대성을 총체적으로 성취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세계사적 차원에서도 근대기획의 실천에 새로운 장을 열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근대 백년의 역사경험을 반성하고 민족사의 새로운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근대의 역사 평가와 새로운 근대의 역사 진로를 둘러싼 식민지근대화 논쟁이야말로 단순한 학술논쟁을 넘어선 지성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것이다. 논쟁 당사자는 물론 학계 모두의 진지한 성찰과 토론을 기대한다.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