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21일 금요일 오후 03시 48분 12초 제 목(Title): 임지현/한국의 민족주의는 건강한가? 한국의 민족주의는 건강한가 혈연 등 감정적 호소 많아 체제 이데올로기 전락 소지 …혈통서 시민공동체로 중심 옮겨야 폴란드의 유수 대학에는 어디나 슬라브 문학부 아래 '세르브스코-호르바츠키' 어문학과가 있다(폴란드어로 크로아티아를 '호르바치아'라 하므로, 이것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어문학과인 셈이다). 폴란드인들에 의하면, 80년대 말까지는 크로아티아에서 오는 학자들마다 이 명칭에 대해서 불평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호르바츠코-세르브스키' 어문학과로 순서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크로아티아뿐만 아니라 세르비아에서 오는 학자들도 이구동성으로 불만이란다. 내용인즉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인데, 어떻게 한데 묶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폴란드 대학의 학과 명칭에 관한 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는 서로에 대한 민족적 적대감을 초월해 비판의 통일전선을 구축한 듯 보인다. 그러나 19세기 동유럽 민족운동의 역사를 잠시만 들춰보아도, 이 이상한 통일전선은 곧 근거를 잃고 와해된다. 근대적인 문어로서의 세르보-크로아티아어는 크로아티아인 가이가 세르비아인과의 통합을 위해 두 민족이 공유했던 방언인 '쉬토'(sto)를 문어체로 바꾸고 세르비아 출신의 카라지치가 이것을 다듬음으로써 탄생한 것이다. 두 민족어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크로아티아인이 로만 알파벳을 세르비아인이 키릴 알파벳을 사용한다는 것 뿐이다. 한국내 외국인 부당처우엔 침묵 두 민족이 연합하여 남슬라브주의의 이름아래 팽창주의를 추구할 때는 자연스럽기만 했던 이런 언어적 동질성을 부정하고, 서로 다른 언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 저간의 사정은 최근의 유고사태를 보아온 독자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민족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농민층이 사용하는 구어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동시에 문어체로 만드는 과정에서 인위적인 수정이 가해진다는 점에서 인공적인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당시 프랑스어를 정확하게 사용할 줄 아는 '프랑스인'은 전체 인구의 12~13%에 머물렀다. 자코뱅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일 드 프랑스'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국어로 지정하고, 그에 저항하여 지방어를 고수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힘으로 국어를 관철하는 폭력적인 언어정책을 실시했다.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됐을 때, 이탈리아어를 사용하는 '이탈리아인'은 전체 인구의 2.5%에 불과했다. 리소르지멘토 운동의 일익을 담당했던 마시모 다젤리오는 통일 이탈리아의 개원의회에서 비장하게 연설했다. "우리는 '이탈리아'를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이탈리아인'을 만들 차례입니다." 이는 우리가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이는 언어적 동질성이라는 것이 실은 얼마나 유동적인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들이다. 또한 언어와 더불어 민족을 '초역사적 자연적 실재'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데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혈통의 영속성도, 역사의 엄연한 진실 앞에서는 불 앞의 얼음일 뿐이다. 우리 국어 교과서에도 실린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은 그 강렬한 민족주의적 메시지로 청소년기의 많은 한국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무대인 알사스-로렌의 주민들이 혈통적으로는 독일인이며, 또 18세기말까지는 독일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아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역사적 실상은 이러하다. 알사스-로렌의 주민들은 중세이래 독일어를 사용하고 독일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혈통적으로도 라틴보다는 게르만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주민투표를 통해 기꺼이 프랑스 민족에 통합되는 길을 택했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 아래 혁명 프랑스 정부가 약속한 인간 및 시민의 권리에 표를 던진 것이다. 이들에게 혈통과 언어를 좇는다는 것은 곧 독일의 봉건적 지배 아래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알퐁스 도데가 감동적으로 그린 알사스-로렌 주민들의 감동적 프랑스 민족주의는, 그러므로 혈통이나 언어 등 원초적 유대감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 공화정이라는 시민적 공동체에 대한 시민적 헌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민족을 혈통과 언어의 영속성에 기초한 초역사적 실재라고 생각하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알사스-로렌 주민들의 프랑스 애국주의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겠다. 이해할 수 없기는 19세기 독일의 대역사가들인 테오도르 몸젠이나 하인리히 폰 트라이츄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역사와 혈통을 근거로 알사스-로렌의 독일 귀속을 요구했던 것이다. 알자스-로렌 주민들의 민족주의를 배우자 민족 혹은 민족주의에 대한 담론에서 공통의 조상과 혈통, 언어의 동질성, 공통의 관습과 종교 등 원초적인 유대를 강조하는 경향은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에서 시작됐으나, 동유럽 및 제3세계에서 확대 재생산됐다. 자주적인 근대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못하고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에서, 또 근대 시민혁명의 세례를 받지 못하고 여전히 봉건구조가 온존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공동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담론은 사실상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식민주의에 저항하는 전선에 민중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신화로 채색된 민족의 원초적 정서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 민족사의 영광을 기리는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은 식민지 시기 저항민족주의의 이념적 기둥이 된다. 19세기 후반 동유럽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이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예수가 크로아티아 사람이었다거나, 마쟈르인의 조상은 에덴동산의 아담이었다는 강변, 혹은 세르비아인들은 12사도의 후예라는 주장들이 그럴 듯한 실증의 옷을 입고 활개를 쳤다. 이것은 한국인 누구에게나 실소를 자아낼 신화적 역사서술이지만, 공자가 우리 조상이었다는 식의 비슷한 주장에는 누구나 진지해진다는 우리 사회의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역설은 세계사적 전망이 배제된 채, 민족사적 특수성만을 강조한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민족사에 대한 신화적 이해와 민족의 원초적 유대에 대한 감정적 호소가 민족에 대한 우리의 담론을 닫힌 구조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안으로는 유신체제의 '한국적 민주주의'나 북한의 '조선민족 제일주의'에서 보듯이 결국 정치권력을 옹호하는 체제 이데올로기로 민족주의를 전락시켰다. 또 밖으로는 재일교포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는 분개하면서도 한국에서 화교나 외국인 노동자가 받는 부당한 처우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중 잣대의 배타적 민족이기주의를 낳기도 했다. '열린 민족주의'는, 알사스-로렌의 주민들이 프랑스 민족에 통합된 예처럼, 한국의 민족주의가 민족을 자연전제하는 혈통공동체로부터 바람직한 가치를 공유하는 시민공동체로 자신의 존재기반을 옮길 때 가능하다고 믿는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 때 비로소 안으로는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밖으로는 보편적 휴머니즘의 빛을 발할 것이다. 남과 북을 통틀어 모두 우리 사회가 얼마나 많은 '새끼 밀로셰비치'들을 키우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발칸반도의 피비린내 나는 인종청소가 결코 남의 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교수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