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21일 금요일 오후 03시 44분 09초 제 목(Title): 김윤성/종교사는 싸움의 역사 정통과 이단의 끝없는 투쟁, 종교史는 ‘싸움의 역사’ 학살 등 폭력 동반…사회가 인정하는 최소한의 판단 기준 만들어야 종교사는 정통과 이단의 싸움터다. 아니 이 말은 옳지 않다. 애초에 정통과 이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진리와 권력을 둘러싸고 다투는 세력들이 있고, 좀더 강한 쪽이 나머지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이단이란 지배세력이 나머지 세력을 규정하고 배제하는 '그들 만들기'의 범주이며, 정통이란 지배세력이 이 배제화를 통해 자신을 구성하는 '우리 되기'의 범주다. 그런 점에서 종교사는 이단 만들기와 정통되기의 싸움터다. 정통은 이단을 통해 존재한다. 이단 만들기 없이는 정통되기도 불가능하다. 예수의 인간성을 부인했던 영지주의나 신성을 부인했던 아리우스주의가 없었다면, 예수가 신이자 동시에 인간이라는 삼위일체 교리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정통은 이단을 만들어 자신과 차별화함으로써 비로소 스스로 정통이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늘 폭력이 따른다. 중세 가톨릭의 이단 사냥과 이단들의 반란, 근대 가톨릭과 개신교의 상호 이단 정죄와 살육, 조선시대 벽이단론(闢異端論)에 따른 당파 싸움과 동학교도 및 천주교도 학살 등 종교사는 이런 폭력을 생생히 증언한다. 그 폭력은 이단을 만들어서라도 느슨해진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통 쪽에서 시작돼 이단쪽의 대응 폭력을 유발하며, 결국 상호 폭력으로 귀결된다. 이런 종교사를 살펴보면 우리 주위에서 간혹 불거지는 정통과 이단문제를 재고하게 된다. 이단 시비를 거는 건 왜 늘 기성 개신교계 쪽일까. 이단문제는 한 종교 내부문제인데, 왜 자꾸 밖으로 새어나와 사회의 이목을 끄는 것일까. 이단으로 몰린 쪽에만 문제가 있고, 이단으로 모는 기성 개신교계나 사회 일반에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 이런 이단논쟁에 서린 폭력의 그림자는 무엇일까. 이 물음들을 풀려면 이단이라는 범주의 형성과 변천사를 이해해야 한다. 특정종교 교리에 근거한 이단론 곤란 이단이란 말은 조선의 양반들이 정통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를 혹세무민하는 삿된 가르침으로 비난하던 말이다. 거기에는 같은 유교내의 다른 분파인 양명학과 도교 불교 동학 천주교 등의 다른 종교들이 포함됐으며, 이때 이단은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뜻했다. 이런 이단 범주는 개항기 개신교의 도입으로 달라지게 된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를 지칭하는 '파가누스'(paganus)와 기독교에서 이탈한 분파를 지칭하는 '헤레시'(herecy)를 구분한다. 이교는 교화 대상이지만 이단은 척결 대상이다. 이단은 같은 종교 안의 경쟁세력으로, 더 큰 위협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이런 의미를 갖는 '헤레시'를 이단으로 번역했으며, 개신교가 성장하면서 이런 '기독교적 이단'의 범주가 점차 확산됐다. 한편 일제하부터 현재까지 사이비종교로 비난받는 종교들이 많이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대부분이 개신교계로부터 이단 판정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단, 사이비종교, 신흥종교가 마치 동의어처럼 여겨지는 통념이 형성됐다. 위와 같은 여러 사정들이 뒤섞이는 가운데 결국 이단문제는 가장 열심히 '이단 및 사이비 척결'을 추진해 온 개신교계의 헤게모니 안에 놓이게 된 것이다. 종교문제 관련 연구소나 상담소의 거의 전부는 개신교계 기관이다. 어떤 종교에 명백히 비윤리적 범죄가 있다면 이는 당연히 문제삼아야 한다. 그러나 그 판단 기준이 특정 종교의 교리에 근거한 이단-사이비론이어서는 곤란하다. 이단이 모두 비윤리적인 것도 아니고, 정통이 모두 윤리적인 것도 아니다. 따라서 특정 종교의 이단-사이비론에 따라온 사회가 덩달아 들썩거리는 해프닝을 벌일 필요도 없다. 그보다는 사회적 동의가 가능한 최소한의 판단 기준을 마련하고, 특정 종교가 아닌 사회 전체가 문제해결의 주체가 돼야 한다. 또한 이런 종교적 일탈이 기성 종교계와 사회 전반의 병리 때문은 아닌지도 짚어야 한다. 최근 방송사의 방송중단 사태는 방송국에 난입한 만민교회 신도들의 폭력은 물론, 어쩌면 그들을 그렇게 하도록 몰아붙인 더 근원적이고 은밀한 폭력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아닌가. 김윤성/종교학 박사·서울대 강사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