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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5일 수요일 오전 02시 52분 17초
제 목(Title): 정운영에세이/ 유토피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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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에세이] 유토피아를 위하여 
오늘 5월5일은 어린이날이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의 181회 생일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은 성경 말씀과 거리가 멀었지만 자녀들한테는 `부자들이 죽인 가난한 목수의 
아들' 얘기를 들려줄 만큼 각별한 사랑을 쏟았다. 오는 5월8일은 어버이날이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100회 생일이기도 하다. 부모 생전의 효심은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았으니 사후 효도는 충분한 셈이다. 
그들의 어린이 사랑이나 어버이 효도가 주제는 아니다. 마르크스냐 하이에크냐 
따위로 표출되는 시대의 빗나간 선동을 한번 정리하고 싶은 것이다. 

*시대의 선동을 경계하며* 

마르크스와 하이에크는 사회 통념상 각기 극좌와 극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한때 지구를 반분할 만큼 막강한 권세를 발휘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 질서가 지구를 제패하면서, 그의 이론과 사상은 
도처에서 추방되고 있다. 근자에 내가 들은 바로도 어느 사학의 명문에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강의가 슬며시 사라졌다. 하이에크는 케인스의 위세에 눌려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레이거노믹스와 대처리즘 등 신자유주의 
풍조가 휩쓸면서, 하이에크의 경제학은 무대 위의 정면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전경련 산하의 자유기업센터는 하이에크의 주요 저작을 하드커버로 펴내고 있다. 
아무튼 지금은 하이에크가 마르크스를 이기고 있다. 

마르크스와 하이에크의 이런 비교에 솔직히 나는 별 흥미가 없다.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만큼 하이에크 지지자들도 자못 
분개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치든 분개든 양자의 생각이 급진적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을 터이다. 마르크스의 급진은 무엇보다 계급과 착취의 폐기로 나타난다.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마저 의심하는 하이에크의 급진성도 그에 지지 않는다. 급진적 
변화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대안은 `유토피아'로 흐르기 쉽다.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는 말할 것도 없이 공산주의 사회이다. 억압과 소외가 
사라지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사회가 공산주의이다. 하이에크의 유토피아도 
희한하다.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다수의 횡포로 변질된 민주주의 대신 그는 
일생에 단 한번의 투표와 단 한번의 입후보로 독재를 방지하는 인민주권의 
데마르키(demarchi)를 제창한다. 사실은 시장조차 무사하지 못하니, 그는 수급을 
조절하고 균형을 달성한다는 시장 기제의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오히려 분산된 
정보와 지식을 통합하는 시장의 고유 기능에 유의한다. 이런 기능의 경제학을 그는 
고대 희랍어로 교환을 뜻하는 카탈락시(catallaxy)로 부르자고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는 시장 교환이 필요하지 않지만, 하이에크의 자유 청원이 이 사회에 
수락될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마르크스와 하이에크의 제안을 나는 유토피아라고 불렀지만, 정작 이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다. 유토피아는 이들한테 기껏해야 과학적 사회주의의 대칭 
개념이거나, 실증이 불가능한 정신적 허구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하이에크의 눈에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유토피아가 분명하며, 
마르크스주의자한테도 하이에크의 시장 물신주의가 유토피아로 비칠 것이 
틀림없다. 압제와 결핍이 소멸되지 않은 세상에서 공산주의 건설이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자유와 풍요의 실현을 시장 우상에 기대하는 일도 크게 무책임하다. 결국 
서로 유토피아를 상정하면서 상대의 유토피아만 비난하는 셈이다. 

크리스 시아바라의 <마르크스, 하이에크 그리고 유토피아>는 이런 혼동의 원인을 
이성에 대한 신뢰 여부에서 찾는다. 먼저 마르크스는 “인간이 환경에 따라 
형성된다면, 그 환경을 인간적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건을 변화시킬 
만큼 이성의 힘과 지혜가 확실하다면, 공산주의 실현이 유토피아일 수만은 없다. 
반면 하이에크는 “사람은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며 결코 주인이 될 수도 
없다”고 물러선다. 그래서 억압의 혈통을 이어받은 이성 대신 맹목의 장기를 가진 
시장한테 운명의 주인 자리를 넘기려는 것이다. 이성에 앞서 광기가 판을 치는 
포스트모던 유행이 한창이지만, 나는 무지가 이성보다 낫다는 하이에크의 `이성 
퇴출의 경제학'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이성 복원의 경제학을* 

계몽주의 사조가 자리잡으면서 천상의 질서와 지상 질서의 중세적 관계가 
끊어졌다. 그러나 이성이 이토록 처참하게 모멸당하자 사람들은 당장 지상에서 
가망 없는 것들을 유토피아에 보관하는 시작했다. 마르크스 신봉자들은 화를 
내겠지만 `과학적 사회주의'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절망은 금물이다. 시대의 
선동에 밀려 이성이 쫓기고 있으나, 그 자리를 세계화나 신자유주의 혼란이 
차지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유토피아에 보관된 인류의 각종 
미련과 원망은 대단한 힘이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이성 퇴출의 경제학 아닌 
`이성 복원의 경제학'을 소망한다. 

<추신> 지면 개편으로 이 난이 작별 인사를 고하게 되었다. 1988년 창간부터 
오늘까지 틈틈이 눈길을 보내주신 독자들께 가슴 깊이 감사드린다. 
회자정리(會者定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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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토피아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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