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5월 5일 수요일 오전 02시 42분 01초 제 목(Title): 정재숙인터뷰/ 말, 말, 말 “말, 말, 말 좀 사세요” 세계 최고의 영업사원 꿈꾸는 ‘간첩단 두목’ 출신, 뚝심 하나로 승부한다 (사진/‘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 7층에 있는 편집국에서 창간 14돌을 맞는 <말> 식구들과 함께 한 박충렬씨.) 그는 자신을 사장이 아니라 ‘책장사’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가 살아남는 생존력은 결국 판매와 영업에 달렸기에 장사를 잘해야겠다는 맘 하나로 사장 취임 1년을 넘겼다고 했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시사잡지사가 살아남기 위해선 ‘열심히 팔아야 한다, 못 팔면 죽는다’는 절박함으로 밀고 나왔다. 기자를 해본 적도 없고 필명을 날린 건 더더욱 아니었던 그가 사장만큼은 할 수 있다고 덤벼들었던 건 이 오기 하나였다. 산전수전 모진 풍파 다 겪고난 그는 지금도 우는 소리 하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 사형선고 받아봤어?” “너 사형선고 받아봤어?” “95년 전국연합 사무차장을 하고 있을 때 뜬금없이 부여간첩 김동식 사건에 말려들어 하루아침에 ‘간첩단 두목’이 됐어요. 안기부에 연행된 뒤 50여일이 지나서야 전국연합 식구들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는데 그 편지가 <말> 96년 2월호에 실렸고 ‘사람이 무섭고 세상이 무섭다’는 사연이 <말> 사람들에게 인상이 깊었나봐요. 무죄로 풀려난 뒤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에 있던 저에게 ‘편안하게 같이 일합시다’고 손을 내밀었어요. 그래서 뭐든지 하겠다는 맘으로 들어왔죠.” (사진/<말> 사장 박충렬) 박충렬(39·월간 <말> 사장)씨는 요즈음 구두 밑창이 닳도록 사람들을 만난다. 아침에 한웅큼 들고나간 명함이 해질녘이면 모자랄 지경이다. “사장이 왜 이러고 돌아다녀…”하는 소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창간 14돌을 맞는 <말>에 처음으로 ‘의견축하광고’를 받아보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도 그였다. 그렇다고 오라는 곳이 있는 것도, 딱히 찾아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딘가 사람이 몰려있을 법한 건물을 찾아가 맨 윗층부터 죽 훑고 내려오는 게 그 나름의 방법이다. 하루 10시간 넘게 사람들을 만나길 며칠째, 그는 기운이 솟는다고 했다. 어려운 시절을 헤쳐나온 <말>에 대한 사람들 시선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뭔가 노력하는 게 보인다, 끈질기게 파헤치는 모습이 보기좋다, 이런 소리 들으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부르죠. 지난해 신문이며 잡지 시장이 얼마나 안 좋았습니까. 그런데 우리 잡지는 연말부터 하락 추세가 멈추고 분위기가 반전되더란 말입니다. 정기독자 신청도 늘고, 가판 상황도 좋아지고. 물론 아직도 비판하는 소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하면 뭔가 되겠다는 확신이 선 건 큰 소득입니다.” 처음에 기획실장으로 입사했던 그는 차라리 독자사업팀장을 시켜달라고 했다. 가만히 살펴보니 광고, 판매, 정기독자 가운데 빠른 시간 안에 결실을 볼 수 있는 분야는 정기독자뿐이었다. 별동부대를 조직해 1년 만에 6천명 정기구독자를 늘렸다. 사무실과 편집국을 번듯한 불교방송국 빌딩으로 옮긴 것도 그였다. <말> 사람들은 “엘리베이터 있는 건물에서 일하긴 처음”이라며 웃었다. 그래도 그는 아직 멀었다고 구두끈을 조인다. 흑자경영을 내걸었던 1년 전 약속을 아직 못 지켰기 때문이다. “망하지는 않겠다는 확신을 얻은 건 큰 소득이지만 거기엔 월급을 반밖에 못 가져가고도 열심히 뛴 우리 기자들과 사원들 피땀이 서려 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려울 때 오히려 기자수를 늘리고 종이질을 높이고 컬러 쪽수도 늘렸어요. 판단은 독자가 내려주시겠지요.” 그는 현실이 아무리 어려워도 언론매체가 시대소명과 독자 뜻에 부응하지 못한다면 그날로 망해버리든지 없어져버리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말>이 월간지 하나로 14년을 버텨왔다는 건 이 둘에 다 충실했던 증거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우리 회사는 뭐 거창한 이론이나 노선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집단은 아래위 할 것없이 정신과 기상이 살아 있어요. 누구한테든 눌리지 않고 옳으면 무차별 그 길로 밀고 나가는 뚝심 같은 것, 기(氣)라고나 할까요. 남들이 보면 뻐세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린 이 지조 하나로 색깔을 분명하게 하고 밀고 나갑니다.” 그는 평범한 시골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면사무소 공무원이어서 70년대엔 새마을운동도 열심히 하고 박정희 대통령도 존경했다. 그러다가 80년에 서울대 법학과에 진학하면서 세상 보는 눈이 바뀌었다. 대학 선배에게서 받은 한권의 책, 리영희 선생이 쓴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를 뒤집어놓았다. 신입생 시절, 미팅을 수십번 한 이유 “<전환시대의 논리>가 맞다면 난 여태껏 박정희에게 속아 살아온 거더란 말입니다. 내가 뭘 해야 할지 알고 나니까 더이상 지식은 필요없다는 생각이 듭디다. 이제 행동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습게도 신입생 시절 두어달 만에 미팅만 마흔번이 넘게 했다니까요. 하루에도 서너탕을 뛰었는데 빨리 <전환시대…> 얘기를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는 <전·논> 전도사를 자임하며 5·18을 맞았고 자연스레 서클에 들어갔으며 데모를 했고 2학년 말 무기정학, 3학년 1학기 지도휴학으로 학교를 떠났다. 공장활동과 야학을 거쳐 노동운동판에서 뛰었는데 그무렵 삶을 뒤바꾸어놓은 사건이 일어났다. “83년 어느 날 보안사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5일 동안 고문을 받았어요. 죽은 박종철과 비슷한 경우였는데 녹화사업으로 99% 물증을 확보해놓고 마지막 말 한마디를 듣자는 거였어요. 물고문, 전기고문 등 별 고문을 다 받았는데 풀려나고 보니 내가 정신이상자가 돼가는구나 하는 자각이 오더군요. 마음을 비우고 거기에 저항했습니다. 그뒤에도 ‘깃발 사건’이며 반제동맹사건으로 몇 차례 곤욕을 치렀지만 겁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담대해질 수 있었어요.” 그는 “80년대라는 시대가 힘을 길러줬다”고 믿는다. 다른 세대보다 사회와 인간에 대한 문제의식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파고들며 살았던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말> 5월호 별책부록 <21세기 한국의 희망 386리더>는 그런 박 사장 마음이 편집국 기자들과 맞아떨어져 나온 작품이다. “시대를 맘대로 만들 수는 없다, 태어나서 머리 굵도록 살아야지. 80년대 경험을 오로지 정치적으로만 채색하는 것, 패배주의적 시각으로만 접근하는 것을 다 거부한다”는 것이 그이 생각이다. 그는 ‘과정에 충실하자’ 주의자다. 지금, 오늘,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친다. “왕년에 내가…” 같은 과거업적주의자를 굉장히 싫어하고 “내 40대엔…”처럼 미래허풍주의자도 믿지 않는다. 그날 그날을 똑바로 산다. 사농공상, 연공서열, 관존민비, 남존여비를 이 사회에서 없애고 싶은 네 가지 악습으로 든 그는 미래에 능력있는 ‘영업맨’이 되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가는 영업사원이 되는 것, 살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물건을 팔 수 있는 외판원이 되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리곤 온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지역 시민단체를 꾸리는 게 또하나 소원이죠. 물건 많이 팔고 돌아와 저녁에 지역 사람들과 모임 열고 이런저런 얘기하며 오손도손 사는 게 제 꿈입니다.”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mail.hani.co.kr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