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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25일 일요일 오전 08시 07분 15초
제 목(Title): 안상수/조선일보는 무엇으로 사는가?


조선일보는 무엇으로 사는가! 
지식인들의 비판 담은 <조선일보를 ‘몹쓸’ 신문으로 ‘왕따’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도정일 경희대 교수(영문학)와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는 최근 <조선일보>에 
글을 싣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지식인이 <조선일보>에 민주적·진보적 색채를 
덧씌워주는 들러리 노릇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언론학)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인 때문이다. 

<조선일보>가 다시 도마에 올라 있다. 강준만 교수가 중심이 돼 펴내는 계간 
<인물과 사상>이 10권에 이른 걸 기념해 특별기획 별권 부록으로 <조선일보를 
아십니까?>를 펴냈다. 한국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판매부수 1위의 신문을 누가 
모르겠는가. 제목이 진정으로 묻는 건 “<조선일보>가 어떤 신문인지 아느냐”는 
얘기다. 


독단과 전횡 그리고 왜곡과 뒤틀림 


<조선일보>와 관련한 논점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조선일보>가 
정말 지식인 사회로부터 집중 성토받아야 할 ‘몹쓸’ 신문이냐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설령 그렇다 치더라도 지식인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조선일보>를 
‘왕따’시키는 일이 정당하냐는 문제다. “<조선일보> 비판의 결정판”으로 
기획했다는 < …아십니까?>에 실린 10명의 글은 대체로 이 두가지 논점에 대한 
발언으로 읽을 수 있다. 

먼저 <조선일보>가 정말 ‘몹쓸 신문’인지 지은이들의 논리를 따라 살펴보자. 
재미 언론인 김민웅(미국 길벗교회 목사)씨는 ‘조선일보, 그 허위의식과 
이데올로기적 오만’이란 글에서 최장집 전 대통령자문 정책위원장에 대한 
‘사상검증’ 문제를 되짚고 있다. 김 목사는 우선 <조선일보>가 최 교수에게 
문제를 제기할 권리는 있다고 인정한다. 언론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므로. 
그러나 <조선일보>가 ‘언론자유’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에게 
반대하거나 대립하고 있는 세력의 언론자유 또한 적극 지켜주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조선일보>의 언론자유론은 “자신만의 언론자유”로 
끝나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조선일보>는 “자신과 다른 견해에 서 있는 
사람들의 자유를 진지하게 존중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견해의 
세력과 사상에 대해서는 아예 발언의 자유 자체를 누릴 자격조차 없다고 
선언해왔다.” 진보적 발상과 견해를 가진 세력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일부 
친북적 세력”이라 팔아넘겼고, “권력을 향해 이를 어떻게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는가라고 촉구했고, 그 자유의 봉쇄를 외쳐온 신문이 다름아닌 
<조선일보>”였다. 따라서 <조선일보>의 독단과 전횡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규탄은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 매우 절실하다는 것이다. “상대의 발언권을 일체 봉쇄한 채 
진행하는 언론의 자유는 문화적으로 치장된 폭력”이며, 이런 이들은 “펜을 
흉기로 사용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손석춘 <한겨레> 여론매체부장은 ‘조선일보 기자들을 위한 변명’에서, 
<조선일보>에도 다른 신문과 똑같이 “빛나는 눈동자의 젊은 기자들”이 있건만, 
왜 유독 <조선일보>의 지면만을 문제삼아야 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한다. 그것은 
“<조선일보> 기자들과 <조선일보> 지면 사이에 존재하는 ‘편집’이란 과정” 
때문이다. “차장→부장→국장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편집구조 속에서 평기자가 쓴 
기사나 표제는 신문사의 방침에 따라 수정되는 과정을 밟”으며, 그가 보기에 
“<조선일보>의 편집은 왜곡과 뒤틀림의 대표적 사례”이다. 글쓴이는 특히 북한 
관련 보도에서 뒤틀림이 두드러짐을 실례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이제 두번째 논점을 정리해보자. <조선일보>가 극우적 ‘몹쓸’ 신문이라 치자. 
그렇대서 거기에 작가나 지식인이 글을 쓰거나 인터뷰에 응하거나 얼굴을 내밀면 
하늘이 두쪽이라도 나는가. 


극우 색체 감추기에 놀아나는 사람들 


김정란 상지대 교수(불문학)는 ‘조선일보를 위한 문학’에서, “우리 사회의 
특수한 여건하에서 <조선일보>가 가지고 있는 정치 색채를 모르는 체하고 문학의 
매개를 맡긴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행위는 그 신문에 
“진보적인 문화의 색채를 더해주고 정치적 물타기 작전을 열심히 거드”는 
“무책임한 짓”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문학의 위의보다는 언론플레이를 
통한 상업성 확보에 급급했던 문단의 행태”에 책임이 돌아간다. 그는 계간 
<창작과 비평>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 “<조선일보>에 매개를 부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선일보>의 장사를 도와주고 있다면, 창비의 행태는 비정치적인 
행위로 합리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문화면과 스포츠면을 분석한 문화비평가 노염화씨는 “‘광수 생각’ 
그리고 ‘조선일보 생각’”에서, “<조선일보>의 문화면과 스포츠면이 
<조선일보>의 극우적 색채를 흐리게 하는” 보호색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최근 진보·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과 문화계 인사들이 
<조선일보>의 눈꼽만한 지면에 즐거이 오르내리는 것은, <조선일보>가 그들의 
유명세를 빌려 ‘진보 상업주의’에 구색을 맞추려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다. 이는 마치 “한나라당에 개혁적 이미지를 팔아먹고 돌격부대가 된 
김문수·이우재 같은 옛 민중당 출신의 국회의원들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가 “가장 울화 터지는 일”은, “그들을 극악하게 빨갱이로 몰아갔던 
<조선일보>에 넙죽넙죽 나와서 히죽히죽대며 인터뷰를 해대는 전 운동권들”이다. 
그는 이들에 대해 이렇게 충고한다. “당신들의 과거가 얼마나 치열하고 
아름다웠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 적으로 삼았고 지금까지 하나도 
바뀌지 않은 <조선일보>에 그토록 순응해야 할 이유는 하등 없다.” 

<조선일보>라는 일개 신문을 두고 책 한권이 엮어져 나왔다는 것은 확실히 한국 
사회만의 진풍경이다. 그러나 이는 한국 사회를 전진시키기 위한 전선이 
가두에서가 아니라 사상과 논리의 영역으로 이동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이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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