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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25일 일요일 오전 07시 40분 07초
제 목(Title): 플러스/사해두루마리 



■성서의 역사를 바꾼 ‘死海 문서’재해석 
“쿰란은 수도원 아닌 오아시스” 
 
    

 
1947년 팔레스타인 사해의 서쪽 연안 쿰란 지역의 동굴에서 베두인족 목동이 우연히 
두루말이 문서들을 발견했을 때, 전세계가 경악했다. 그 문서들은 대부분 예수 
탄생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됐고, 일부는 그때까지 확인된 최고의 구약성서 
판본보다 무려 1000년 이상 연대가 올라가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쿰란에서는 그 
뒤에도 9년 동안 11개의 동굴에서 가죽, 동판, 파피루스로 된 문서가 더 발견됐다. 

이른바 사해(死海)문서 또는 쿰란문서로 불리는 유태민족의 고문서들에 대한 
얘기다. 이는 20세기 최대의 발견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쿰란의 동굴들에서 확보된 
두루말이 등의 문서는 모두 870개로서 그에 대한 연구는 제한된 수의 학자들에 
의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 쿰란문서의 발견과 함께 즉시 떠오른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 많은 문서들을 
작성한 주체가 누구냐는 것. 지금까지 지배적인 학설은 '에세네인'들이 작성했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의 역사적 근거는 이렇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우스(AD 
23~79년)와 유대의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AD 37~95년)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 시대를 전후해 존재했던 '에세네파'라고 불리는 집단은 유대율법을 가장 
순수하게 따르는 독신 남성들로서 여성에 대한 관심을 경멸하고, 다른 어떤 
종단보다도 '경건한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이 두 사료의 몇 줄 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는 이들 에세네인들의 존재는 
쿰란문서의 발견과 함께 많은 학자들의 상상력에 불을 댕겼다. 쿰란문서와 
에세네인들을 연결시킬 경우 이 문서의 출처와 에세네인들의 존재를 동시에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릴 뿐 아니라 기원 전후의 역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조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쿰란문서 에세네인이 만들었다는 증거 없다” 

그래서 쿰란문서의 작성자가 에세네인이라는 주장은 강한 폭발력을 갖고 
고대사학자들을 사로잡았다. 그 많은 문서를 작성한 사람들이 세상과 떨어져 
경건한 삶을 살았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어 보였던 것이다. 이들은 동굴 
근처의, 지금은 폐허가 된 주거지에 수도원을 짓고 살면서 팔레스티나 전 지역에 
보급하기 위한 일종의 문서생산지를 형성했다는 믿음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다. 

그리고 세례요한 역시 이 에세네파의 일원이었으며, 그 구성원들 상당수가 마사다 
전투에서 로마군에 최후항전을 벌이다 전멸했다는 등의 '반(半)신화화'된 
이야기들이 쿰란문서의 발견 이후 50년간 여러 갈래로 재생산되어 왔다. 

최근 이 '쿰란-수도원'설이 뮌헨의 인류학자 뢰러-에르틀과 아이히슈태트 
카톨릭대학의 철학자 로르히르쉬에 의해 전면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이 두 학자에 
따르면, 지금까지의 각종 자료와 조사를 통해 사실로 확정할 수 있는 것은 쿰란의 
주거지가 BC 150년부터 AD 68년까지 존재했고, 그것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사실뿐이라는 것. 그밖에, 예컨대 세례 요한이 거기서 살았다든지, 그것이 
군사기지였다든지, 유대인의 주거지였다든지, 발굴된 쿰란문서가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든지, 이들이 에세네인들이라는 등의 모든 주장은 뒷받침할 만한 
증거자료가 아주 희박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포쿠스가 최근호에서 '쿰란 신화의 종말'이란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들의 주장은, 쿰란 주거지에서 발굴된 인골과 이 지역의 
지질조사에 의하면 쿰란은 수도원 지역이 아니라 남녀가 함께 살며 활발한 
경제생활과 집중적 경작이 이뤄진 오아시스였다는 것이다. 특히 지리학 분야의 
고문서를 통해 쿰란 지역에는 일년 내내 물이 흐르고 있었음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모두 고갈되어 버렸지만, 마지막 빙하기에 형성됐던 저수원에서 충분한 
양의 물이 흘러나왔으며, 물에는 다소 소금기가 섞여 있었으나 사람과 짐승이 마실 
수 있는 정도였고, 이것은 소금기를 좋아하는 대추야자의 재배를 위해 아주 적당한 
것이었다. 대추야자가 쿰란에서 중요한 농산물이었음은 지금도 탄화된 채 발견되곤 
하는 대추야자 열매가 증명한다. 이 대추야자 숲은 포도나무와 유향수나무, 딸기와 
발삼나무로 이뤄진 좁다란 숲을 끼고 있었다. 고원에서는 떡갈나무와 보리수 
버드나무 등이 자랐고, 그 나무들의 잎은 겨울에 산양과 염소, 소들의 먹이로 
쓰였으며, 그 옆으로는 침엽수 숲도 있었다. 이런 자연 조건에서 쿰란에는 최소한 
200~300명의 주민이 살았을 것이라고 뢰러-에르텔 교수는 추정한다. 이들 주민이 
수도원 속에서 종교서적을 복사하며 살았다고 믿기에는 지질조사를 통해 나오는 
발굴품들이 아주 다양한 경제적 활동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도서관에서 옮겨 숨겨놓은 것” 

물론 과거에도 쿰란문서와 에세네인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쿰란문서가 해독되기 시작한 50년대부터, 문서의 내용들 
중에선 종교적인 것 외에도 당시 유대인의 다양한 일상생활들도 확인됐다. 뿐만 
아니라 서정시, 천둥의 영향력에 관한 학문적 저술, 연대기 등도 있었으며 일부 
동판 문서는 90톤이나 되는 금과 은, 문서들의 은닉처를 기술하고 있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은 이 문서들이 로마군과의 전쟁에서 파괴될 것을 염려해 예루살렘의 
도서관에서 옮겨놓았다가 방치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 이런 주장은 쿰란 수도원설에 눌려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이 두학자에 의한 수도원설의 부정은 텍스트 해석에만 의존하지 않고 
자연과학적 방법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무게가 다르다. 두 사람은 
고고학에 관한 한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존하려는 학자들로, 이들은 자연과학적 
탐색과 텍스트 연구를 임의적으로 혼합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학자군에 속한다. 
이들의 비판은 이 주거지에 대한 종교적 시각이 사실(Facts)에 대한 지각을 흐리게 
했다는 것이다. 

쿰란을 둘러싸고 예상되는 새로운 논쟁의 배경에서 우리는 종교적 시각과 
자연과학적 시각의 대결이란 서양 역사의 한 전통을 확인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뢰러-에르텔 교수가 조사한 인골들의 출처다. 이것의 발굴자는 도미니카 
교단의 승려인 롤랑드 드 보(Roland de Vaux)로, 그는 '쿰란 수도원'설의 
주장자이기도 했다. 그는 쿰란 문서를 배경으로 50개의 무덤을 파헤쳐 유골을 
수집했다. 그 유골의 일부는 프랑스로 이송됐고, 다시 그 일부는 에르텔 교수의 
스승 쿠르트 교수에게 넘겨졌다. 56년 쿰란을 방문한 쿠르트 교수는 그 뼈들을 
감정해주는 대가로 독일로 가져올 수 있었다. 에르텔 교수는 스승의 임종 후 그 
인골을 넘겨받아 뼈들을 분석했고, 쿰란의 지형과 지질조사 등을 기반으로 
수도원과 에세네인설을 반박하기에 이른 것이다. 

보다 상세한 논거는 '쿰란 리뷰'에 이 두 교수의 글이 정식 발표되면 알 수 
있겠지만, 로르히르쉬 교수는 쿰란에 에세네인이 살았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그 많은 문서 속에서 에세네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로르히르쉬 교수는 이 쿰란의 주민들이 상당히 종교적인 집단이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종교적 정화의식에 사용된 인공저수지와 곳곳에 남은 동물의 
뼈들에서 그런 징후를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쿰란 주거지의 발굴이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는 60년대 이후 종교적 이유로 쿰란의 발굴을 금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쿰란의 비밀은 대중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강여규/하이델베르크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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