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11일 일요일 오후 11시 47분 52초 제 목(Title): 김태겸/ 김일성,가치판단 이전의 사실판단 만주 항일무장투쟁과 한국전쟁에서의 김일성 -가치 판단 이전의 사실 판단을 위하여 / 김태겸 경남 김해시 내동 처음 이러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1997년이었다. 한총련 소속 대학생 몇몇이 서울과 광주에서 프락치로 의심되는 청년을 취조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했을 때. 또한 굶어 죽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넌 탈북자들의 대부분이 '자신만 살려고 조국을 배반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였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얼마 전에 하이텔의 '한국사 동호회'에 들어갔다가 '한사동' 회원 중에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두 번째 계기는 단행본 시리즈『인물과 사상』제8권에 실린 진중권의 <김일성과 박정희, 황장엽과 조갑제>를 읽은 것이다. 학생운동 내의 '자주대오 계열'이 지금은 세력이 약해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한총련 내에서 중요한 세력을 이루고 있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이기적인 세태 속에서 민족을 위한 그들의 순수한 열정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의 민주화와 우리 민족의 행로에 미치는 그들의 부정적인 영향에 계속 답답하고 마음아파 해 왔다. 아마도 그들의 다수는 우리 민족의 현대사를 새로 보고 나서 '시각 교정'이 됐을 것이다. 나도 1980년대 중·후반에 현대사를 좀 알고 나서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지금껏 속아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한은 친일파가 계속 지배 세력이 되었고 북한은 항일운동 세력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 미 군정이 건준, 임정 등을 배제하고 총독부 출신 친일파를 등용한 것, 단정 수립을 막고 통일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 등의 과정에서 분단 세력(이승만, 한민당 등)에 의해 여운형, 김구 등이 암살당한 사실, 제주도 4·3, 이승만과 친일파에 의한 반민특위의 와해, 그리하여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물려받은 유산도 없고 배우지도 못해서 힘들게 살아가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잘 살고 있다는 사실, 보도연맹원 학살 등등.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객관적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쌍방의 주장과 제삼자의 주장 등을 다 들어 보고 자신이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 왜곡된 자본주의 체제(박정희, 전두환 정권 때는 '병영국가') 남한과 왜곡된 사회주의 체제('유격대국가') 북한에서는 객관적인 사실 판단조차도 가치 판단에 종속돼 왔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이 어느 독립운동가 못지않은 항일운동을 했다'고 하면 '그 나쁜 놈이 그랬을 리가 없다'는 식이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45년 8월 소련의 대일전에는 참전하지 못했고 한국전쟁은 군사적 모험주의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판에 의해서 잘못 결정한 것이다'라고 하면 '무오류의 수령님께서 결코 그랬을 리가 없다'는 식이다. 남한의 지배 세력은 김일성이 가짜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주입하려고 노력해 왔고, 북한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김일성의 경력을 과장·신화화해 왔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연구 동향 1980년대 중·후반부터 남한, 연변, 일본 등지에서 이종석, 신주백, 일본의 와다 하루키, 조선족 역사학자들 등에 의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들은 북한 자료, 남한 자료, 일본군·관헌 자료, 당시 신문 등 1차 자료, 중국공산당 자료, 구소련 자료, 관계자들의 회상 등을 비교 분석해서 실증적인 연구 성과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연변에서의 연구는, '김일성부대'가 활동했던 지역이기 때문에 많은 관련자들의 증언을 모을 수가 있고 많은 자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로 아주 높은 수준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일반 공개 문헌에서는 김일성의 이름이 ×××로 처리되었다. 그 이유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경력을 과장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을 배려하는 차원에서였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서서는 김일성의 이름을 그의 당시 직책과 함께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북한에서의 연구사(史)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살펴보고자 한다.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내가 아는 범위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해 간략하게 요약해 보겠다. 다음은 이종석(세종연구소 연구위원), 와다 하루키(동경대 교수), 기광서(한일신대 강사) 등의 글을 중심으로 요약한 것이다. 김일성은 1912년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의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주(金成柱)이다. 1919년에 그의 가족은 만주로 이주하였다. 그는 1926년 3월 화성의숙에 입학했다가 6월에 아버지 김형직이 세상을 떠나자 학교를 그만두었다. 김일성은 1927년에 길림의 육문중학에 입학하였다. 여기서 그는 상월 등 진보적인 교사들로부터 본격적으로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공산청년회라는 조직의 멤버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그 때문에 1929년 일제 첩보자료에 첫선을 보이게 된다. 1929년 가을에 반일 활동 혐의로 중국 군벌 당국에 체포되어 수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 그 일을 계기로 학교에서 퇴학당하였다. 1930년 봄에 감옥에서 나와 카륜·고유수 지방에서 이종락이 이끄는 국민부 계통의 조선혁명군 길강지휘부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즈음 해서 그는 반일 운동가들이 으레 그렇듯이 변명(變名)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김일성(金日成)이다. 그러나 1931년 초 조선혁명군이 붕괴되자 곧 동만(간도 지방)으로 이동하여 공산청년동맹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때 일국일당주의 원칙에 따라서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부터였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만주성위에 항일유격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근거하여 만주 전역에서는 항일유격대 건설이 시작되었다. 중국공산당에 편입되어 있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이 항일유격대 건설 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안도현의 공산청년 조직에 관계하고 있던 김일성은 그 지역에서 1932년 4월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중국구국군 우사령부대 산하에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김일성의 이 별동대는 곧 왕청유격대와 합류하였으며 그는 유격대 정치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김일성은 동만 각지의 유격대가 단일 편제를 갖추어 결성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서 1934년 가을부터 3단 정치위원을 맡았다. 그 뒤 그는 1936년 3월에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3사 사장이 되었다. 193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은 조·중연합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지도부는 중국공산당이었다. 통일전선이 강조된 1935년의 코민테른 7차 대회를 계기로 중공이 조선인 유격대의 주력 부대인 동만의 유격부대를 조선 혁명의 추진 주체로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부대는 1936년 3월 산하에 3개 사를 둔 동북항일연군 제2군으로 개편되었다. 이 개편에서 김일성이 바로 제3사 사장에 취임하게 되었으며, 그의 부대는 조선 해방과 연관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 조·중 국경 지대인 장백현 일대로 진출하도록 결정되었다. 그의 부대는 동남만 유격대의 통합 편제로 인해서 곧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로 개편되었다. 이때 그가 지휘한 유격대 병력은 약 6백 명 정도였으며 과반수가 조선인이었다. 김일성은 곧 6사를 이끌고 장백현 일대로 나와서 장백현과 조선의 함경남도 북부 지방 일대에 조국광복회를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이 지휘하는 6사는 1937년 6월 국내 진공 전투의 일환으로 보천보 전투를 감행하였다. 당시 국내 언론들이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국내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북만주에서 최용건은 주보중의 제2로군에서, 허형식과 김책은 제3로군에서 활동하였다. 최용건은 1900년 평북 용천 출신으로 오산학교 다닐 때 조만식이 아끼던 제자였다고 한다. 그는 3·1운동 직후 몇 차례 학생 시위를 주도한 뒤 학교를 그만두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5년 황포군관학교 교관이 되었고 1926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7년에는 꽝쩌우 봉기(꽝뚱 코뮨)에 참가한다. 여기에 참가했던 조선인으로는 최용건 외에도 님 웨일즈의 {아리랑(의 노래)}에 나오는 김산(장지락), 오성륜(전광), 김성숙(김충창, 김규광;나중에 중경 임정의 국무위원, 1950∼60년대 혁신정당 운동 참여) 등 2백 명 정도가 있다. 최용건은 중국공산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1928년에 만주로 옮겨오게 된다. 당시 상황은 영하 40℃를 오르내리는 추위와, 굶주림, 일제의 심리전 등 혹독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1940년 180명으로 구성된 마에다 토벌대를 전멸시킨 것을 비롯하여 일제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39년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토벌로 만주의 유격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격대 지도자들은 1940년 3월에 회합을 갖고, 유격대의 소련 이동을 결정하였다. 김일성도 이을설, 김정숙 등을 인솔하고 1940년 10월 23일에 소·만 국경을 넘어서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의 보로시로프에 설치된 남야영(B야영)으로 이동하였다. 소련으로 이동해 간 항일유격대는 망명 부대로서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소련군 88독립보병여단, 일명 88여단)를 결성하였다. 여기서 김일성은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최용건과 김책 등 조선인 유격대 지도자들과 상봉하게 되었다. 이 88여단의 여단장은 중국인 주보중이 맡았으며, 김일성은 제1영장(대대장)이 되었다. 그 밖에 이 부대의 영장급 이상의 조선인 간부로는 최용건(부참모장), 김책(제3영 정치위원), 안길, 강건 등이 있었다. 이들은 소련군의 지도하에 군사 훈련, 정치적 훈련을 받았으며, 일부 대원들은 국경을 넘어가서 소규모 정찰 활동 등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은 여기에서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1942년 2월 16일에는 김정일이 태어났다. 1945년 7월 말에는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분리해 나와 해방 후 조선에서 당 건설과 해방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조선공작단(단장 김일성, 당위원회 서기 최용건)을 결성하였다. 조선공작단을 결성한 항일유격대의 조국 귀환 계획은 원래 소련군과 함께 대일전에 참전하여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당시 소련은 중국국민당과 중소우호동맹조약을 맺으면서, 소련군이 만주를 점령할 시 국민당에게 이 지역의 주권을 넘기기로 약속하였다. 따라서 소련은 공산당 부대인 항일유격대가 만주 지역을 점령할 경우 국민당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서 항일유격대 본대의 전투 참여를 막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소련군 정찰대에 파견나가 있던 오백룡 등 일부를 제외하면 그들이 고대하던 대일전에 참전하지 못한 채 귀국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한 전면 공격을 개시하였다. 전투는 8월 20일 끝이 났다. 김일성부대는 1945년 9월 5일 하바로프스크의 야영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를 타고 9월 19일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이상이 간략하게 살펴본 김일성의 만주 항일무장투쟁사이다. 북한에서의 과장 북한에서는 대략 1950년대부터 점점 김일성의 경력을 과장하기 시작하였다. 1949년 10월에 간행된 {조선민족해방투쟁사}를 보면, 제5장에서는 1920년대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제6장은 1930년대에 김일성 등이 이끈 만주 항일무장투쟁을, 제7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 군대가 영웅적으로 싸운 결과 한국이 해방되었다고 기술했다. 1961년에는 {조선민족해방투쟁사}를 대체하는 {조선근대혁명운동사}가 새로이 발간되었다. 1959년과 1960년에 걸쳐 {항일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3권이 나왔고, 1960년대에 들어와 더 많은 증언을 추가하여, 1972년 김일성의 회갑에 맞추어 모두 12권으로 증보 발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초 자료를 토대로 하여 1982년 {항일무장투쟁사} 10권이 나왔다. {조선전사} 33권은 1979년부터 1982년까지 3년간에 걸쳐 발간되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은 그의 권력 강화와 궤를 같이 하면서 과장이 심해져 갔다. 1930년대 조·중 공산주의자들의 항일무장투쟁을 김일성이 혼자서 지도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북한 역사서들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혼성으로 편제된 이 부대를 '조선인민혁명군'이라고 바꿔서 부르고 있다. 1984년부터는 소련에서 태어난 김정일의 '백두산 출생'설이 공식화되었다. 김정일 백두산 출생설은 북한에서 다시 한 번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를 왜곡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즉, 김정일이 백두산에서 태어나기 위해서는 김일성이 거처하던 이른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백두산에 있어야 했다. 그리고 1940년 10월 이후에도 계속 백두산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북한 역사서들은 일제의 패망과 해방에 대해서도 김일성이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에 맞추어 '조선인민혁명군'에게 조국으로의 진격을 명령하여, 이 부대들이 '조국 해방'의 선봉이 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북한의 한국전쟁에 대한 왜곡 한국전쟁에 대한 왜곡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북침설'이다.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하면서도 '북침설'을 주장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회피하려는 의도에서일 것이다. 최근에는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겸 민족보위상이었던 최용건이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전쟁 개시를 반대했다는, 놀라운 그러나 신뢰할 만한 학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는 기회주의자로 몰려 인민군이 38선 이북으로 패주하기 전까지 인민군 지도부에서 소외됐다고 한다. 북한의 현대사 왜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1945년 8월의 일본 패망에 이은 우리 민족의 해방이 미국, 소련 등 연합국에 의해서 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김일성에 의해서 북한 지역이 해방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김일성은 해방 전후에 활동했던 여운형, 김구, 김규식, 이승만, 박헌영, 송진우, 조만식, 김두봉 등과 더불어 민족 지도자의 한 사람인 것이 아니라 베트남에서의 호치민처럼 우리 민족의 절대적인 최고지도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이 북침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일 것이다. 대부분의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가난한 식민지 소작농이었던 자신들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켰고 미제와 남한이 침략하였을 때 자신들을 구해 준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식량난 때문에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서도 조국과 김일성·김정일을 배반했다고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이로부터 '일제로부터 북한 지역을 해방시킨' 민족 해방 '혁명 전통'을 이어받아 '미(未)해방지' 남한('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을 미제로부터 해방시켜야 된다는 주장이 나온 것 같다. 한총련 내의 자주대오 계열의 노선 및 정세관도 이러한 역사 인식에서 나온 것 같다. 그들은 남한의 자주화, 민주화, 통일 투쟁도 이 '혁명 전통'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모든 주장을 '종파주의'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러한 역사인식 때문에 프락치를 일제의 밀정처럼 증오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 지배 세력의 역사 왜곡 및 현대사 무시하기 친일파를 그 뿌리로 하는 남한의 수구적 지배 세력은 자신들의 친일 행각을 숨기기 위해서 현대사를 왜곡하거나 정규 교육에서 현대사를 거의 빼 버렸다. 우리 나라처럼 정규 교육에서 현대사를 소흘히 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드물 것이다. 요즘은 대학 신입생들의 대다수가 여운형, 장준하를 모르며 김구, 이승만을 모르는 학생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짜라고 배웠던 김일성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자주대오 계열의 학생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1994년 문민정부 교육부는 시대의 변화에 맞게 국사 교과서를 개편하기 위한 시안을 발표했다. '역사 바로세우기'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들이 아우성을 치며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선일보}는 개편 시안 중 다음과 같은 내용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 광복이 되기까지 임정, 건국동맹, 조선독립동맹, 만주무장대 등이 어떻게 활동했던가를 이해시킨다. △ 일부 민족 지도자들이 일제 말 일제의 황국신민화운동과 침략전쟁에 협력하였음을 간략히 기술한다. △ 광복 후 친일파 청산, 토지 개혁, 통일국가 건설이 민족의 과제였음을 이해하게 한다. △ 이승만 한민당의 단정 수립 운동 전개 과정을 이해시킨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이것이 도대체 어느 나라 교과서냐", "마침내 주사파가 교육 당국까지 침투했다"고 시비를 걸었다. 결국 {조선일보}의 선동과 극우 단체들의 아우성 속에서 교과서 개편 시안은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가짜 김일성론'도 친일파들이 확대·재생산한 측면이 크다. 박정희, 정일권 등이 관동군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이들뿐만 아니라 백선엽, 김백일 등도 토벌대에서 활약했다. 또한 채병덕, 원용덕, 김석원 등 창군 당시 남한 군대 지도부의 대다수가 일본군, 만주군 출신이었다. 얼마 전에 예비군 훈련 들어가서 황당한 비디오를 봤다. 차인표, 이휘재 등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차인표가 김백일 장군역을 맡았다. 여기서 황당했던 것은 북한군 고위 간부가 김백일에게 같이 일하자고 회유하는 장면이었다. 또 다른 정훈 비디오에서는 우리 나라 군대의 창설이 광복군의 맥을 이어받았다는 내용이 나왔다. 졸고 있다가 열받아서 잠이 깨 버렸다. 남북한 지배 세력(강경 세력)간의 '적대적(대립적) 의존(공생) 관계' 나는 이 말을 처음 듣고 {딴지일보}식으로 얘기하자면 '똥꼬가 션했다'. 막연하게 느껴 왔던 것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말이었다. 물론 이 개념을 도식화해서 무리하게 적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서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러한 측면은 틀림없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남한에는 군부 내의 강경파, 공안 세력, 조선일보, 수구적 기득권 세력이 당사자일 것이다. 북한에서도 군부 등 강경파가 그 당사자일 것이다. 다음은 한겨레 정연주 특파원이 쓴 {한겨레} 기사의 일부이다. 북한 내 강경파들은 남쪽의 강경파들과 마찬가지로 남북간 화해, 긴장 완화, 교류, 경협 등을 원하지 않는다. …… "북한 내에도 분명히 반통일 반화해 강경론자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북한 관리, 친북 인사들로부터 수없이 들어 왔다. …… 그리고 남쪽과 바깥세상의 돌아가는 것을 잘 모르는 북한 강경파들의 무지도 커다란 요인 중 하나다. 그들은 실제로 남한과 바깥세상에 주체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엄청난 세력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 91년 가을의 일이다.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친북 인사로 낙인찍힌 한 재미동포와 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 "이번에 평양에 가서 해외동포위의 한 고위 관리로부터 희한한 이야기를 들었읍니다. 최근 종교인 학자들과 함께 미국을 방문한 지도원(통일전선부 출신)이 뉴욕에는 김일성 주석의 주체사상을 흠모하면서 이를 극비리에 공부하는 재미동포가 2백여 명이 있다는 보고를 했다는 겁니다. 이 관리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내가 그렇지 않다고 했더니 몹시 화를 냈습니다." …… 94년 9월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안내원에게 지난 두 달치 {노동신문}을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날짜 신문을 보니 이런 기사가 실려 있었다. "미국의 주요 신문인 {워싱턴 포스트}가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사진을 받들어모시며 우리 공화국의 위대함을 보도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당시 북한 핵 문제와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언론은 북한 기사를 자주 다뤘다. 그러면서 사진으로 김정일 비서의 사진을 실었다. 물론 기사의 내용은 북한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것이었으며, 결코 "김정일 동지의 사진을 받들어모시고 우리 공화국의 위대함을 보도한 것"은 아니었다. 안내원에게 그 이야기를 해 주었더니 그는 크게 놀라면서 그럴 리 없다고 했다.({한겨레} 1997년 12월 16일) 이런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남한의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 거의 매년 자주대오 계열을 포함한 민족해방 계열이 반수 이상의 대학을 석권하는 것을 보고, 북한 당국으로서는 남한 대학생의 반 이상이 자신들을 지지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클 것 같다. 나는 남북한이 이제는 서로 화해·협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어느 독립 운동가 못지않은 항일 운동가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덜 미워하는 쪽으로 가치 판단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에 의해서 북한 지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김일성이 전쟁을 통해서라도 통일을 이루겠다는 군사적 모험주의(급진군사주의)와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만약 개입하더라도 제대로 개입하기 전에 끝낼 수 있다는) 오판에 의해서 전쟁을 잘못 일으켜서 우리 민족구성원들에게 너무나도 큰 상처를 입히고 분단을 더욱 고착화시킨 사실을 제대로 알고 그를 덜 존경하는 쪽으로 가치 판단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