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11일 일요일 오후 02시 28분 06초 제 목(Title): 플러스/ 김영민-유시민 지상논쟁 동아일보 뉴스플러스에서 퍼왔습니다. 'DJ 新지식인론' 비판 '인문정신의 빛' 외면하고 재주꾼만 키울참인가 일차원적 실용주의가 온통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다. 물론 그 진원지는 우리 근대화의 역학과 생리다. 진부한 지적이지만 농축, 표피, 과도, 편파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의 근대화 과정은 성장지상주의의 동력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성장지상주의라는 것은 당연히 조악한 실용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회라면 성장지상주의의 동력이 기승을 부릴 때도 성숙한 문화를 위한 나름의 준비에 부지런했을 것이다. 선진국 진입 운운할 때 조차도 우리는 잡탕의 문화, 사대(事大)의 정신, 피상의 실용으로만 흘렀다. 성장주의와 근대화 논리, 냉전과 반공주의, 독재와 민주화 투쟁 등등 억압과 반항, 돌진과 충돌의 경직된 변증법 속에서 성숙의 문화를, 내면성의 지평을 일구어내기는 어려웠다. 내면이 성숙된 신지식인 양성 절실 90년대초는 이런 점에서 호기였다. 농축 근대화의 속도주의에 대한 폐해와 부작용이 가시화되면서 근대성의 위험이 널리 체감되는 분위기였고, 또 마침 반체제와 민주화를 향한 열정도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면서 차분히 내면성과 성숙의 문화를 가꾸어 갈 수 있는 정황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장의 신화도, 혁명의 신화도 그간의 분요(紛擾·분란)를 거두었고, 이 틈에 새로운 문화의 지평을 열어 이른바 '심층 근대화'의 과제에 나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후의 화두는 심층 근대화와 성숙의 문화가 아니라 세계화와 새로운 성장의 신화로 변질한다. 소위 '신지식인' 기획이란 성장의 신화가 제시하는 가장 세련된 형태의 실용주의다. 그것은 지식을 정보로 환원하고, 그 정보의 환전성(換錢性)에 착안해서 이른바 정보사회 혹은 '지식기반사회'에 자본주의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인간상을 재구성하려는 발상이다. 이 실용주의는 이른바 신독(愼獨·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감)이라는 인문적 공간에 미치지도 못하면서 구조와 제도의 변혁을 추구하는 사회과학적 감각을 갖춘 것도 아닌, 탄성있는 재주꾼이나 아이디어 맨의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근대화와 섣부른 세계화의 홍역을 치른 뒤에 기획하는 '신지식인'의 기대치를 정보사회적 실용성만으로 채울 수는 없다. 최소한 그것은 내면의 성숙과 기량을 바탕으로 제도와 구조의 틈을 노리고 드는 맛 쯤은 있어야 한다. 구태의연한 관리에게 탈자본주의의 기획을 채근하는 것은 지나친 기대다. 냉전과 개발독재가 만든 집체주의 사회에서 다가치(多價値)를 현양하는 인문적 사고가 뿌리를 내릴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졸부 자본주의의 여러 부작용을 적발, 견제하고 삶의 질을 고양하려는 심층 근대성의 과제가 정책적으로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지극히 유감스럽다. '신지식인' 기획도 인문정신의 빛을 외면한 채 이루어지는 21세기식 처세술을 닮고 있어 염려스럽다. 우선 일제 이후 개발독재 기간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던, '산업전사형 인간'과 '민주투사형 인간'을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이 전통을 지양하는 제3의 인간형을 모색하는 데 섬세해야 할 것이다. 그간 근대성 비판의 맥락에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서구의 지적 풍향도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으나, 막상 필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여러 과제를 떠맡고 나갈 새로운 '인간의 탄생'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새로운 지식인상의 구성도 이러한 문화적 바탕 위에서야 그 내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영민 / 전주 한일대 철학과 교수 ■ 유시민의 세상만사 '인문정신'이 국가의 몫인가? 3월25일자 'NEWS+' 커버스토리에서 김영민교수(전주 한일대·철학)는 김대중정부의 '신(新)지식인' 기획을 가리켜 "인문정신의 빛을 외면한 채 이루어지는 21세기식 처세술과 닮"은 "가장 세련된 형태의 실용주의"로 규정했다. '신지식인'이 "신독(愼獨·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삼감)이라는 인문적 공간에 미치지도 못하면서 구조와 제도의 변혁을 추구하는 사회과학적 감각을 갖춘 것도 아닌, 탄성있는 재주꾼이나 아이디어맨의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신지식인'에 대한 비판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신지식인 운동의 "그 문법, 가치체계, 멘탈리티는 놀라울 정도의 협소성, 단견성, 위험성을 안고 있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결국 돈이구나'의 가치체계, 호모 이코노미쿠스의 인간관, 시장논리와 부가가치론으로 사회를 운영하려 드는 초급 경영론적 멘탈리티다." 이상은 도정일교수(경희대 영문학)가 최근 교수신문 칼럼에서 한 말이다. 도교수는 신지식인 운동을 현정권의 경제위기 탈출이라는 단기 목표 달성 노력의 일환이자 창조적 지식기반국가 건설이라는 장기적 목표와 연결된 운동으로 파악하고, 정부가 이를 위해 쏟아붓는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 "노력의 방법과 논리와 목표는 기이하게도 군사정권 시절의 성장논리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고 경고했다. 신지식인운동 비판보다 지식인 내부 개혁부터 날카롭고 독창적인 글쓰기로 명성이 높은 두 인문학자의 신지식인 운동 비판은 '졸부 자본주의'보다는 '인문적 성숙의 사회'를 선호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청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두 분의 말씀대로 "학력-학벌과 관계없이 일상적인 경제활동의 현장에서 부가가치를 능동적으로 창출하는 사람" "기존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발상으로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개선-혁신한 사람"만을 '신지식인'으로 떠받들고 '신독'에 힘쓰면서 돈벌이가 아닌 방식으로 사회발전에 힘쓰는 창조적 지성인은 푸대접받는 사회를 성숙한 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두 분의 매서운 비판은 몇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인문정신의 빛'을 밝히는 것이 과연 국가의 임무인가? 그건 오히려 시민사회와 지식인들의 몫이 아닌가? 만약 이것이 지식인들의 몫이라면, 우리 사회의 '학력-학벌과 관계있는 구(舊)지식인 또는 인문적 지식인'을 길러내야 할 대학은 지금까지 거기 몸담은 교수들과 젊은이들의 '인문적 교양과 성숙'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는가. 만약 정부가 신지식인이 아니라 '성숙한 인문적 사고'를 가진 지식인을 키우려고 한다면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신지식인 운동이 내포한 위험성에 대한 비판에 나는 크게 공감한다. 그러나 지식과 정보의 생산과 유통과 활용이 사회의 운명을 결정하게 될 미래에 대비하여 새로운 지식인상을 형성하는 것이 반드시 '인문정신의 빛'을 훼손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문제는 국가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지식인 사회 내부에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인문정신의 빛'의 밝기는 인문학 분야 교수와 학생수나 교육-문화부문 정부 지출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그 어떤 말씀이나 정부의 그 어떤 기획으로도 이 빛을 밝힐 수 없다. 인문정신은 오히려 지배권력과 싸우면서 자란다. 그것은 정치권력뿐 아니라 기존의 문화권력과도 싸우면서 성숙한다. 그 빛을 밝히려면 신지식인 운동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유로운 사고의 형성과 표현을 가로막는 법률과 제도, 그리고 남 비판은 잘 하면서도 자기혁신에는 지극히 냉담한 대학과 지식인 사회 내부의 권위주의부터 쳐부숴야 할 것이다. 유시민 / 시사평론가 신지식인이 인문정신 해칠 수 있다 김영민교수 ‘유시민의 반론’에 대한 재반론 …지식인 내부개혁론엔 공감 ‘NEWS+’는 제176호 신지식인론 논쟁 커버스토리에서 김영민교수의 글을, 제178호에서 ‘인문정신이 국가으 몫인가?’라는 제목으로 유시민씨의 반론을 각각 소개했다. 이번에 이에 대한 김교수의 재반론을 싣는다 유시민선생의 반론에는 지적 포괄주의나 관념주의에 빠지기 쉬운 인문학자들을 경계하는 미덕이 있다. 고색창연한 꼬리를 단 인문정신이 이 만화경 같은 사회에서 만병통치일 리 없다. 그러나 성장주의의 영욕과 허실을 힘겹게 헤쳐나오고 있는 우리에게 절실한 화두를 우선 '심층근대성'에 근거한 '성숙의 문화'라고 판단하고, 이를 앞당기고 정착시키는 데 인문정신의 숙성과 연대가 극히 중요한 몫을 맡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유선생은 인문정신을 보양하고 이를 정착시키는 것은 국가의 몫이 아니라 시민사회와 지식인들이 담당해야 하며, 인문정신이란 오히려 정치권력을 포함한 기존의 지배권력과 싸우며 커간다고 했다. 지당한 지적이다. 나도 인문정신의 심화와 확산이 국가의 몫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유럽에서는 국가를 인문정신의 정화라고 믿었던 광혜(狂慧)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유선생의 지적처럼 인문정신이란 자고로 제도나 권력의 틈을 노리는 데에 그 활성이 기민한 법. 반복하지만, 내 주장은 국가 권력이 인문정신을 책임지라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심층근대화와 성숙의 문화가 아쉬운 때에 여전히 '표층 세계화'와 성장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책으로 일관하는 태도를 근본에서 맹성(猛省)하고, 일차적 실용주의만으로 전담할 수 없는 삶의 질을 총체적으로 제고(提高)하는 노력을 기울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가 정녕 "인문정신이란 지배권력과 싸우면서 자란다"고 믿는다면, 신지식인 프로젝트에 대한 내 비판 속에서도 '싸우면서 자라는 인문정신'의 징조를 읽어낼 수는 없는가. 유선생은 정보사회를 대비하여 "새로운 지식상을 형성하는 것이 반드시 '인문정신의 빛'을 훼손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했다. 이 대목은 쟁점의 핵을 치는 것이지만, 아쉽게도 자세한 논급이 없다. 그러나 나로서는 이 '신지식인 프로젝트'가 단순히 일회성 사안이 아니라 농축-표피-편파-과잉 근대화의 속도주의와 성장주의 속에서 인문정신을 체계적으로 무시하거나 왜곡해온 전과(前過)의 연장이라고 보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었으며, 특히 산업화와 민주화의 지난한 역정을 알리바이 삼아 미루어 왔던 성숙과 조화의 문화를 이제 또 다시 정보사회화와 세계화를 빌미 삼아 방기하려는 태도로 보아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인문정신 지킬 안전장치 없으면 대비가 최선 이것은 가령 '문화관광부'라는 명칭에 담긴 단견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나는 정부의 '신지식인 기획'에서 70, 80년대의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에 나타나야 할 풍경을 심층근대성에 뿌리박은 성숙의 문화가 아니라 '수입' 정보화나 '끌려가는' 세계화로 보는 역사의식을 읽어내고 이를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물론 정보화나 세계화는 현실이며 생활의 터전이지만, 심층근대성이나 성숙은 우리 삶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부분이 아닌가. 주체없는 터란 그저 빈 집일 뿐. 그리고 신지식인 기획의 터가 되는 정보사회가 비록 우리의 현실이긴 하지만 수용의 태도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인문정신, 그리고 나아가 성숙의 문화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흔히 정보와 인문적 지혜의 차이를 첨예하게 대비시키듯, 정보화나 이에 기반한 신지식인 기획, 그리고 근대화와 세계화의 표피를 연결짓는 세련된 실용주의는 결코 중성적 사태가 아니라 향후 우리 사회의 인문정신과 삶의 질을 좌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변수이며, 따라서 "신지식인상이 반드시 '인문정신의 빛'을 훼손한다고 보지 않는다"고 낙관할 수 없다. 낙관할 수 없다면 비관을 대비하는 것이 현명할 터. 그리고 "신지식인 운동을 비판하기보다 지식인 사회의 내부 개혁부터 하라"는 주문은 당연한 원칙론이지만, 밥먹듯이 지식인 비판에 힘써온 내게 할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 그리 큰 괴리는 없으며, 전략과 절차, 그리고 시의와 악센트를 싸고 도는 미묘한 차이는 얼마간의 대화만 있어도 곧 서로의 유익을 위해 보완될 수 있을 듯하다. 유선생의 고견을 기다린다. 김영민/한일대 교수·철학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