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7일 수요일 오전 01시 58분 38초 제 목(Title): 김중배/서평 강만길,역사를 위하여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호연지기) on 'History' Title: 김중배/서평 강만길, 역사를 위하여 Date: Sat Apr 03 13:31:26 1999 GMT 문청의 과외공부용 소설 --강만길 지음 『역사를 위하여』, 한길사 1996 김중배(金重培)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공동대표 강만길(姜萬吉) 선생의 말과 글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거의 버릇처럼 ‘골동품 가게’에서 풀려나 현실의 거리를 활보하는 역사를 생각하고, ‘역사의 정직성’에 쏠리는 가없는 믿음을 되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라는 책으로 이땅에서도 널리 알려진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끄 블로끄(Marc Bloch)를 연상하게 된다. 물론 제멋대로의 연상일 터이다. 마르끄 블로끄는 『역사를 위한 변명』의 허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의 역사책은 “아빠, 역사란 도대체 무엇에 쓰는 것일까요?”를 묻는 어린이에게 대답하고자 씌어졌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아는 이들은 두루 알고 있는 대로 총살형의 현장에서 아픔을 두려워하는 소년 앞에 나서 먼저 총알을 맞았던 사람이다. 그 소박하면서도 치열한 에피쏘드가 두 사람이 갖는 학풍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의 연상을 이어내는 고리가 되는 것인지 모른다. 강만길 선생은 물론 ‘아빠’를 부르는 어린이에게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상아탑 속에 갇혀 있는 독불장군’의 역사를 거부하며, “지배받는 사람들의 생활을 밝힌다는 글이 딱딱하고 어려워서야 되겠는가”를 묻는다. 그 거부와 물음의 소산이 바로 그가 스스로 이름붙인 ‘잡문’이다. 참으로 ‘잡문’이란 무엇이며 그와 대조되는 ‘진문(眞文)’이란 무엇인지를 짚어보아야 할 일이지만, 아무튼 그의 ‘잡문’이란 이른바 주(註)에서 해방된 글의 이름이다. 그의 ‘잡문’은, 그러나 서술의 소박함이나 대중성을 일컫는다는 점에서만 그 이름에 어울릴 뿐이다. ‘잡문’을 자처하는 그의 사론(史論)들은 결코 잡되지 않다. 오히려 ‘역사의 정직성’을 끝내 신앙하는 사론들은 명쾌하고 진솔한 만큼 준엄하다. 역사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글줄기에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역사론을 능가하는 치열함마저 엿보인다. 그의 글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살아있는 역사를 소스라치리만큼 실감하게 된다.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한국민족운동사론』 등에 이어 나온 역사에쎄이 『역사를 위하여』는 그 실감을 요지부동케 하는 새로운 확정판으로 읽힌다. 역사와 인간에 대한 그의 신뢰는 거의 유토피아론을 연상케 하는 경지라고 할 만하다. 역사는 모든 인간들이 정치적 속박과 경제적 불균등에서 해방되는 길로, 사회적 불평등과 사상적 부자유를 극복하는 길로 나아간다는 그의 확신은 단호하다. 그 역사의 진행방향에 반하는 모든 노선과 행동은 혁명적인 방법이나 개량적인 방법으로 반드시 극복되어왔다는 믿음에도 흔들림이 없다. 물론 역사에 대한 신뢰는 필연적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그는 국적을 넘어 정론을 펴온 어떤 일본 사학자를 말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토로한다. 사람이란 사심 없이 진리 앞에 서게 되면 모두 하나의 인간일 뿐이며, 국적이나 민족 같은 것은 초월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가진 동물임을 서슴없이 선언하는 것이다. 아마도 박종철이 죽어갔던 그 서슬 푸른 대공분실 안에서, 어떤 수사관의 진급시험을 위한 ‘과외선생’이 되었던 내력도 그 가없는 신뢰와 무관하지는 않을 터이다. 나는 그 취조실에서의 강의와, 강의받았던 수사관이 선생에게 수갑을 채우면서 오열하는 정경을 떠올릴 때마다 다시 마르끄 블로끄 교수를 떠올리고, 한평생을 하나의 작업에 종사한 사람의 성스러운 직업의식에 가슴 떨렸음을 고백한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성(聖)’의 감탄사를 토해낼 수밖에 없는 경지가 아니던가. ‘잡문’의 타락성과 현실에 접근하는 위험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현재의 역사를 끊임없이 말해오는 까닭에도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한마디로 강만길 선생, 그의 눈은 한없이 해맑아 보인다. 한치의 티끌도 끼여들지 않은 투명성으로 길고도 가닥 많은 역사를 관통하는 안목을 획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절정의 보기가 근현대사의 명쾌한 인식이다. 그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지향으로 가닥 잡는다. 그것이 역사의 지도원리이며, 그에 맞는 서술만이 올바른 역사론임을 단언한다. 당연히 그러한 역사의 지도원리는 현실을 평가하는 작업에도 적용되고, 민족의 재통일이라는 과제에도 연결된다. 그 표현의 압권이 서대문형무소에 부치는 감회에서 드러난다. 8·15가 민족의 해방이며 혁명이 되기 위해서는 서대문형무소의 수감자가 완전히 바뀌어야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반민주·반민족 사범의 수감은 없어지고, 민주와 평화통일 운동가들의 ‘제집’이 되어왔던 서대문형무소의 역사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그것은 민주와 민족의 정통성이 여전히 바로 서지 못했다는 반증에 다름아니다. 때문에 그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민주주의 발전과 함께 민족 재통일을 역사의 거역할 수 없는 흐름으로 제시한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통일론은 탁견이다. 가히 ‘역사적 통일론’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그는 분단시대의 특성을 분단국가주의의 발호와 통일민족주의의 열세로 진단한다. 그의 진단이 지시하는 처방은 명료하다. 이제 민족의 평화적·주체적·대등적·호혜적 통일이 추구되어야 한다는 요약이 그것이다. 거침없이 해맑은 그의 눈은 ‘대등적’이라는 어쩌면 생소한 표현마저 서슴지 않는다. 그는 이미 요즘 회자되는 흡수통일론 따위는 ‘대등적’ 통일론일 수 없고, 따라서 평화통일일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역사학자인 그의 확신은 모두가 역사의 문맥에 근거하는 것이다. 그 보기의 하나가 식민지시대의 좌우익 민족연합전선의 추구이다. 안타깝게도 그 연합전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전에 8·15가 다가오고 말았으나, 그 역사의 문맥은 오늘의 현실 속에도 살아있다는 인식이다. 그의 서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민족과 국토의 분단만이 아닌 역사의 분단시대를 살고 있다. ‘반쪽’ 역사의 현재는 언제까지나 이어질 것인가. 『역사를 위하여』는 그야말로 ‘역사를 위하여’ 살아가는 한 사학자의 역사를 위한 증언이다. 그 속에 담긴 강렬한 메씨지들은 마침내 역사에 대한 신뢰와 낙관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신문이라는 ‘하루살이’에 평생을 종사해온 나 같은 무리에게는 일말의 초조와 불안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얼마만한 시간을 기다려서야 그의 정직성을 확인해주는 것인가. 정직성이 확인되기 이전의 시대를 살아야 하는 역사의 당대인들에게는 인내와 고난만이 미덕일 뿐인가.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