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목록][이 전][다 음]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4월  7일 수요일 오전 01시 48분 44초
제 목(Title): 퍼옴/이상수 인문학의 쟁점 (기사모음)


*** Forwarded file follows ***

Posted By: artistry   (호연지기) on 'History'
Title:     이상수/ 인문학쟁점 
Date:      Sat Apr 03 05:48:35 1999 GMT

 [인문학] 한국인문학의 쟁점 1
(96.10.15, 한겨레)


 1. 한국 인문학의 위기

 냉전의 붕괴와 이른바 문민정부의 등장 이후, 한국의 인문·사회과학은 
자기 모습을 재정립하기 위한 진통에 들어갔다. 한국의 토양에서 건강한 인
문정신이 재탄생하는 현장의 산고를 들여다 보는 특집 기획 `한국 인문학의 
쟁점'을 마련했다. 편집자

 “한국 가전 3사의 전자제품은 세계 일류 수준이지만, 그 사용 설명서의 
문장은 초등학교 수준이다. 간단한 조작방법조차 도무지 조리있게 설명돼 
있지 않아, 읽고 또 읽어야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이 간다. 이런 기현상은 
실용적 기술만을 중시하고 인문학을 내팽개치다시피한 지금까지의 대학 교
육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 졸업 이후 16년 동안 공을 쌓아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호구지책조차 
마련하기 힘든 어느 인문학 연구자의 지적이다. 그는 “사회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실용지식만을 요구하고 있어, 우리의 삶에 대한 근본적 통찰을 할 
수 있는 학문은 점점 설 땅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인문학이란 `사람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된다. 성장·경쟁력
·효율성이 지고의 가치로 군림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사람답게 산다는 것
에 대한 고민은 저만치 떠밀려나 있다. 인문학계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를 
사회분위기 탓으로만 돌리기보다는 학문 내부에서 문제를 찾으려는 움직임
이 활발하다. 지난 9일 `인문·사회과학의 위기론 진단'이란 주제로 열
린 중앙대 개교 78돌 기념 학술심포지엄은 이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
다.
 이날 `인문학의 특성과 위기'에 대해 발표한 김영민 교수(38·전주한일대 
철학)는 “자기 민족의 역사와 전통은 도외시한 채 바깥에서 근거를 찾는 
학문 경향이 오늘날 인문학의 위기를 초래했다”고 진단한다. 그에 따르면 
이런 외향성의 전통은 뿌리깊다. 모든 논의를 중국의 경전에서 시작해 중국
의 경전으로 결론을 맺었던 조선시기 5백년이나, 서유럽의 논의에만 귀를 
기울여온 해방 뒤 50년은 본질상 다를 바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들의 삶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지적 활동을 `소외된 앎'이라
고 규정한다.
 이어 강내희 교수(45·중앙대 영문학)는 `인문학의 위기와 비판정신'이란 
주제 발표를 통해 “인문학이 분과학문 체계 속에서 개별 학문으로 안주하
는 동안 인문학이 무기력해졌다”고 진단하고, “인문학이 사회에 대한 비
판적 개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분과학문 체제에서 벗어나 통합학문으로 재
구성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동일 교수(서울대·국문학)의 시각은 색다르다. 그는 위기에 처한 것은 
인문학이 아니라 학문 전체라고 본다. “인문학은 환자가 아니라 의사”라
는 것이다. 그는 학문 전체가 위기에 처한 까닭을 `자연과학의 부당한 득세
'에서 찾는다. 그 결과 총체적·전체적 인식 대신 부분적·분석적 인식만이 
과학으로 군림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분석에 기초한 과학' 대신 `통찰
에 기초한 학문'을 주장한다. `통찰'이란 말은 조선 후기 실학자 최한기가 
사용한 개념인데, 조 교수는 “모든 대상을 한꺼번에 인식하며, 대상과의 
합일에 이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는 “최근 인문학이 무용지물 취급
을 당하고 있지만, 이는 인문학이 가지고 있는 더 큰 유용성을 모르기 때문
”이라며, “학문 전체에 대한 통찰이 가능하다는 것이 바로 인문학의 가장 
큰 유용성”이라고 지적했다.
 인문학의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대체로 우리 고유의 가치에 눈을 돌려야 
한다는 데는 의견 접근을 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되살려야 할 전통적 가
치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한 답이 나오지 않고 
있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 시리즈2] 
                               현대사조의 수용
(96.10.21, 한겨레)

 “철학 선생은 많지만, 철학자는 없다. 칸트, 헤겔, 니체, 데리다 전공자
는 수두룩하지만, 그들의 사상을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을 뿐, 자신이 처한 
현실의 맥락에서 철학적 발언을 남기고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
의 철학이 탄생한 문제상황이 우리와 다른데, 언제까지 그들의 문제의식이 
마치 우리의 것인양 그걸 전공으로 삼아 가르치고 글쓰는 일을 계속할 것인
가.”
 박동환 교수(60·연세대 철학)는 오늘날 한국 철학계를 향해 `한국 철학
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뭐가 있느냐'고 질문을 던진다. 서양의 사상이란 
그들이 처한 현실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철학 선생
'들은 그들의 결론만을 수입해서 무반성적으로 유포시킨다. 그 결과 물에 
뜬 기름처럼 우리 현실과 겉도는 철학이 지식상품으로서 떠돌고 있다. 도정
일 교수(55·경희대 영문학)는 이렇게 말한다.
 “20세기, 특히 2차대전 종전 뒤 40년의 서양 지성사는 그들이 이룩한 `
근대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의 근대 문명이란 이성
·합리주의·개인의 주체성에 바탕한 것이었다. `인간중심주의, 곧 인간이
라는 이데올로기의 지나친 팽창이 낳은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반성이 현대
철학의 주된 물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이 말하는
합리적 이성에 바탕한 근대를 이룩해본 적이 없다. 이성적 사회를 이룩해 
본 역사도 없으면서 `이성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탈근대'를 논한다는 것은 
무언가 어색하다.”
 서양 사조의 무반성적인 수입이 낳은 가장 희극적인 풍경은 최근의 이른
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과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의 논의틀에서 근대적 의미의 개인은 해체돼 버렸다. 개인이란 합리적 이성
의 지배를 받는 주체가 아니므로 그에게 일관성이나 도덕적 연속성을 요구
할 수 없다. 이런 논의를 무작정 우리 현실에 끌어들이게 되면, 일제하에서
는 친일파였다가 미군정기에는 친미파로 변신하는 `꺼삐딴 리'같은 인물에 
대한 비판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이런 사상적 경박성과 불균형을 그
대로 받아들여야 `포스트모던'한 삶을 사는 것일까. 도 교수는 이렇게 지적
한다.
  “우리 사회는 탈근대적 요소도 물론 있지만 전근대적 요소가 여전히 강
하다. 전통적 가부장 이데올로기나 권위주의 따위가 여전히 한국인의 의식
을 지배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유행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이다보니, 그 가운데 가장 고약한 부분만 받아들이고 있다. 그 결과 
우리 사회의 경박화가 가속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상당 부분 `근대 이후'의 환경으로 바
뀌고 있는 상황에서 서양 현대사조를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논의도 설득력
이 있다. 김형효 교수(한국정신문화연구원·철학)는 이렇게 말한다. “사상
과 문화란 서로 이질적인 부분이 뒤섞이는 데서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 
외래사조는 인위적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외래사조에 대한 맹종도 자신
감의 결여에서 나온 것이지만, 지나친 국수주의도 자신감의 결여를 드러내
는 것이다. 어떤 사상이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면, 그런 사상적 내용은 동서
양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이성에 대한 비판적 논
의는 이미 노장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원효의 메시지도 `이 세상의 가치를 너무 한가지로 환원시키지 말라'는 것
이었다. 이런 맥락을 이해할 때 외래사조의 주체적 수용이 가능하다.”
 박동환 교수는 “서양의 현대사조가 전통에 대한 반성이라는 점에서 우리 
전통과 현실을 돌아보는 자료가 될 수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다. 그는 “
논의의 구체적 내용은 다르지만, 전통의 파괴와 그에 따른 전통적 가치의 
재평가라는 큰 틀은 동서양이 공유하고 있는 현상”이라며, “그들의 논의
를 그대로 우리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전통을 평가하는 
태도는 참고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문제는 현대 사조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
는 현실의 맥락과 어떻게 접점을 찾을 것인가에 있다. 그 접점을 어떻게 마
련할 것인가가 새로운 고민이다. 
도 교수는 “지난 몇 년간 살아온 우리의 모습을 맹렬히 반성할 때, 우리 
나름의 원칙을 몇가지 얻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의 쟁점] <3> 80년대가 남긴 것

(96.10.28. 한겨레)

      3. 80년대가 남긴 것

 “중국에서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에 대한 비판과 재평가가 내려지던 83
년에, 나는 마오의 <모순론>을 읽고 그 논리에 빠져들고 있었다.”80년대 
초반에 대학시절을 보낸 한 연구자가 돌아본 학창시절의 자화상이다. 이는 
이른바 `운동권'이 맹위를 떨치던 80년대에 우리 사회가 치른 `열병'의 속
내를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이야기로도 읽힌다.
 그 신봉자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80년대의 한국 사회를 뒤흔든 사상은 `
정통 마르크스주의'였다. 이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어떤 의미에서건 
일종의 `기현상'이었다. 80년대는 서양에서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한 계몽주
의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일단락되던 시기였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마르크
스주의 진영 내부에서조차 `마르크스주의 위기론'이 만연하던 시기
였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이들을 당혹하게 만든 것은, 90년대에 들어
서면서 이 `열병'이 봄눈 녹듯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다. 김동춘 참여연대
연구소 연구실장은 “마르크스주의가 이렇게 순식간에 번창했다가 급속히 
시들어간 예는 세계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흔히 “80년대는 무거웠고 90년대는 가볍다”고 말한다. 그러나 80년대의 
무거움이 왜 그토록 쉽사리 90년대의 가벼움으로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석연
한 설명이 없다. 객관적으로는 80년대와 90년대 사이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
와 독일 통일, 옛소련의 해체와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사건이 있었
다. 그럼에도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사태만 가지고 우리 사회 내부의 변화를 
모두 설명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백낙청 서울대 교수(58·영문학)는 사회주의권의 몰락 이전에 이미 우리 
사회 내부에 변화가 있었음을 중시한다. 백 교수는 87년 6월항쟁을 고비로 
“우리 내부의 성취를 통해 사회운동의 과제와 성격이 달라지고 국면이 달
라졌다”고 말한다. 사회주의권의 몰락은 이미 진행중이던 변화를 가속화시
켰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김동춘씨는 80년대에 급격히 등장한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어차피 급거에 
사라질 운명이었다고 본다. 그는 정통마르크스주의가 위력을 떨칠 수 있었
던 근거를 자유주의적 시민운동조차 허용하지 않던 군부독재정권의 강압성
에서 찾았다.
  그러면 80년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한때의 지나가는 열병이었을 
뿐인가. 문화평론가 조형준(32·환경운동연합 간사)씨는 “80년대에서 건질 
글이 없다”는 말로 80년대를 비판한다. 이른바 사회구성체의 성격, 변혁주
체의 문제 등을 둘러싸고 당시 그토록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오늘날까지
도 읽어볼 가치를 지니는 글다운 글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55·영문학)의 비판은 보다 준엄하다. 도 교수는 “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빌려 진행된 소련의 전체주의에 실망한 서유럽의 지식
인들이 이미 50년대부터 다양한 이론틀을 통해 교조적 마르크스주의를 벗어
나고자 노력해왔는데, 한국에서는 80년대에 뒤늦게 극단적 스탈린주의자들
이 등장했다”고 지적하고, “이들의 주장이 위력을 떨침에 따라, 마르크스
주의에 대한 다양한 반성은 배제되고 운동권이 관료주의적 조직으로 변해갔
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동자·농민을 변혁 주체로 상정하는 교조적 마
르크스주의는 지식인들에게 `획일적 평균주의'를 강요함으로써 사상적 불모
성을 낳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 80년대는 남긴 게 아무것도 없는가. 그렇지는 않다. 백낙청 교수
는 80년대에 성장한 사회세력이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했고 
△학문적으로는 그간 너무 한쪽으로만 편향돼있던 사상계 에서 어떤 형태로
든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논의가 가능하도록 만들었으며 △학문세계와 사회
적 실천을 일치시키기 위해 고민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을 유산으로 남겼다고 
평가했다.
  도정일 교수의 평가는 보다 적극적이다. “80년대는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산 사람들의 의식 속에, 나 혼자 잘살면 된다는 사고방식 대신, 사회 전체
가 함께 좋아져야 한다는 공동체 의식을 뚜렷한 흔적으로 남겼다. 지금 국
회의원들 가운데 그래도 제 구실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운동권 출
신) 아닌가. 이건 우리 시대의 중대한 자산이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쟁점](4)

          식민지 근대화론/일제하 `개발' 논쟁 후끈
(96.11.11, 한겨레)


 “서울대 안병직 교수(60·한국경제사)를 중심으로 일제하 한국의 공업화 
등 `개발'의 실태를 실증적으로 연구하려는 경향이 일고 있으며, 이런 `재
평가파'가 경제사 연구 분야에서 3분의1을 점하고 있다.”지난 7월3일 일본 
<산케이신문>이 서울발 기사로 보도한 내용의 일부다. 한국에 대해 잘 모르
는 일본 독자들은 이 기사를 보고 한국에서 상당수의 연구자들이 일제의 식
민지배가 남긴 유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을 것이
다.
 이 기사에 거론된 안병직 교수를 중심으로 몇몇 경제사 전공자들이 식민
지시기에 대해 이런 시각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들이 3분의1
이나 된다는 보도는 과장이다.
 안 교수는 지난 87년부터 △한국은 현재 중진자본주의 국가이고 △선진자
본주의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이므로 △식민지시기 연구도 선진자본주의 진
입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식민지시기 연구가 `침략―저항'이라는 시각에만 머물렀다며, 이제는 `침략
―개발'이라는 측면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의 과제가 `
선진국 진입'인 이상, 독립운동사 연구는 오늘날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
도 줄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침략―저항'에만 국
한해 있는 역사교과서도 `침략―개발'의 측면을 보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 교수가 말하는 `일제가 남긴 개발'이란 △철도 등 사회간접자본 △조
선인 자본가의 경영 노하우 △노동자의 숙련 등으로 요약된다. “일제하 조
선인 자본가들이 친일행위도 했지만, 이들이 근대화 과정에 일정한 기여를 
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그는 말한다.
 학계는 그의 주장이 일본의 경제학자 나카무라 데쓰의 `중진자본주의론'
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최근 두 사람은 공동작업
을 진행해 왔으며, <근대조선 공업화의 연구>(일조각, 1993) 등의 연구서를 
함께 펴낸 바 있다. 안 교수의 이런 변신은, 그가 80년대 초반까지 진보진
영의 대표적 논객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
다.
 안 교수의 주장에 대해 주종환 동국대 명예교수(67·경제학)는 “식민지
배가 `개발'의 측면을 동반한다는 것은 이미 마르크스가 1백여년 전에 했던 
얘기로,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며, “우리 학계가 식민지시기에 이뤄
진 `개발'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안 교수의 주장은 허상을 좇고 있는 것”이
라고 논평했다. 주 교수는 일제가 조선을 `개발'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수탈을 위한 개발이었으며, 국권을 상실하지 않았더라면 막대한 양의 국부
를 일제에 수탈당하지 않고도 개발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점을 도외시하고 일제의 개발이 근대화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주 교수는 말했다. 그는 “식민지배에서 개발만
을 강조하는 이들의 논리를 따르면, 독립운동가들 은 일제의 `개발'에 저항
한 정신나간 사람들이 돼 버린다”고 꼬집었다.
 안 교수의 주장에 대한 정태헌(38·한양대 강사·한국사)씨의 비판은 좀
더 실증적이다. 그는 최근 책으로 펴낸 자신의 박사학위논문 <일제의 경제
정책과 조선사회―조세정책을 중심으로>(역사비평사)에서, 식민지 전기간 
동안 국내총생산(GDP) 5백50여억엔의 80%가 고스란히 유출됐음을 밝혀냈다.
 정씨의 연구에 대해 안 교수는 시사주간지 <시사저널>(지난 6월26일)에 
기고한 글 `식민지 시대 연구, 단견 버려라'를 통해 “정씨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인은 벌써 굶주려 멸종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정씨는 “
바로 그럴 지경이었기 때문에 1930년대를 지나면서 화전민이 1백20만명에 
이르고, 당시 `토막민'이라 불린 도시빈민이 1백50만명에 이르렀다”고 반
박했다.
 정씨는 친일파 조선인 자본가들도 근대화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안씨의 
주장에 대해, “친일을 하더라도 제 잇속만 챙기면 된다는 모리배 수준의 
경영 경험에서는 나라와 민족을 이끌 수 있는 경륜이 나올 수 없다”고 못
박았다. 정씨는 또 “일제가 `개발'을 통해 사회간접자본을 남겼다손 치더
라도 한국전쟁 때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고 덧붙였다.
 지난 5월 역사문제연구소의 심포지엄과 지난 6월 한국사회사학회·한국역
사연구회 공동 심포지엄에서 안 교수의 주장이 비판적으로 검토됐고, 안 교
수는 앞에서 든 <시사저널> 기고문에서 이를 반박했다. 학계에서는 이 문제
에 대해 학문의 장에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주종
환 교수는 “안 교수의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학자적양심을 의심
하지는 않는다”며, “단편적이거나 감정적인 발언이 아닌, 학술적 토론을 
통한 검증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의 쟁점5]

    5. 실학의 성격
(96.11.18, 한겨레)

 다산 정약용(1762~1836) 서거 1백돌을 한 해 앞둔 1935년에는 일제 치하
임에도 그의 학문적 업적을 되새기는 학술활동이 왕성했다. 무엇보다도 기
념비적인 작업은 그 해에 정약용의 <여유당전서>가 정인보·안재홍의 교정
을 거쳐 신조선사에서 20권의 활자본으로 간행된 일이다. 오늘날 학계나 출
판계도 출간할 엄두를 내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다산의 저작을 식민지의 열
악한 상황 속에서 펴낸 사실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정도다.
 정인보·안재홍·문일평 등 학자들은 당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조선학'
을 제창했다. 이들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새로운 학풍에 주목해 이를 `실학
'이라고 불렀다. 이들의 조선학 연구는 일제 관학자들이 식민지배를 합리화
하기 위해 들고 나온 이른바 `정체성론' `타율성론' 따위의 이론에 대항하
기 위한 작업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실학은 그로부터 60년이 넘는 오랜 연구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근대성' 논의와 관련해 여전히 중요한 논란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실학과 
관련한 쟁점은 △실학의 개념 정의 문제와 △실학의 성격규정 문제가 서로 
맞물려 있다.
 `실학'이라는 개념의 타당성에 대한 물음은 이미 60년대에 제기됐다. 전
근대사회를 지배한 이념이 주자학이라면, 실학은 그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통칭한 것이다. 주자학의 창시자인 주희(1130~1200)도 이미 자신
의 학문을 불교나 노장사상의 `공'과 `허'에 대비해 `실학'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보면 주자학도 실학이고 반주자학도 실학이라는 개념상의 혼란
이 생긴다. 이런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 최근에는 `조선후기 실학' `청대 실
학' 등과 같이 시대를 한정해 지칭하고 있다.
 이후 실학 개념에 대한 문제 제기는 90년대 들어 김용옥 전 고려대 교수
에 의해 다시 제기됐다. 그는 <독기학설>(통나무 펴냄, 1990)에서, 실학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실이 아니라 후대의 학자들이 만들어낸 `픽션'일 뿐
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실학이라는 개념 설정이 필요했던 이유를 근대성의 
논리와 연관짓는다. 한국학 연구자들이 전근대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의 발전이라는 서유럽 역사의 도식을 받아들여, 근대성의 맹아를 증명하기 
위해 조선 후기의 일부 학문 경향을 `실학'이라고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실학'에서 근대성을 찾으려는 연구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에도 후기 
`고학(古學)운동'에서 근대성의 기원을 찾으려는 일본 사상사의 문제의식을 
빌린 것이라고 지적한다.
 실학 연구에 대한 그의 비판은 서유럽 중심의 근대성 개념의 강박관념에
서 벗어나자는 입장에서 나왔지만, 문제 제기에 그쳤지 새로운 대안을 제시
하지는 못했다. 지두환 국민대 교수(43·한국사)는 오늘날 `실학파'라고 분
류되는 학자들 가운데 초기 인물들은 성리학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실학의 선구자로 여겨지는 성호 이익(1681~1763)의 경우 호포법과 노
비종모법에 반대하는 등 보수적 성향의 성리학자였다는 것이다. 그는 홍대
용·박지원·박제가 등 오늘날 `북학파'라 불리는 학자들에 와서야 성리학
으로부터의 탈피가 시작된다고 본다.
 기존 연구에 대한 이런 비판에 대해 조성을 아주대 교수(40·한국사)는, 
실학이 2백여년에 걸친 움직임이었으므로 초기에는 중세의 틀을 크게 벗어
나지 못한 면이 있지만,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의 혁파 주장 등 근대 사상의 
면모를 얻어가고 있으며, 정약용에 이르면 근대사상의 성격이 뚜렷이 드러
난다고 본다. 그는 실학자들이 유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유학 자체가 근대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는 논리로 반박한
다.
 실학 연구의 원로인 이우성 전 성균관대 교수(71·한국사)는 실학자들 가
운데 이익·유형원 등이 성리학자라는 지적에 대해서, “이들이 성리학의 
전통 속에서 성장했으므로 그런 면모가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며, “그럼
에도 이들을 실학자라고 보는 것은 성리학 이외에 정치·경제·사회 등 다
방면에서 남긴 업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조선후
기의 새로운 학문 경향을 지칭하는 개념으로서 `실학'이란 용어는 이미 동
아시아 세 나라의 학자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 역사적 개념”이
라고 말한다.
 30년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출발한 실학 연구는 오늘날 조선후기를 이해
하는 유력한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실학의 성격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새로운 과제로 남아 
있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의 쟁점] (6)
               정조의 개혁
(96, 11.25, 한겨레)

 “당시의 정승이 왕실 의사 심인으로 하여금 (정조에게) 독약을 올리게 했
다. 이 역적을 내 손으로 몰아내지 못함이 한스럽다.”다산 정약용의 `고금
도 장씨네 딸에 관한 기록'에 인용된 어느 선비의 말이다. 이 글은 조선후
기 자료 가운데 `정조 독살설'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기록으로 알려
져 있다.
 정조가 독살당했다는 이야기는 남인계열 학자들 사이에 입에서 입으로 전
해왔다. 정약용의 글로 미루어 보면 정조가 죽은 직후부터 이미 독살설이 
항간에 떠돌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만 가지고는 정조가 병사했는지 독살당했는지 확정할 
수는 없다. 노론 벽파가 정국을 주도하던 순조 연간에 편찬된 <정조 실록>
에는 정조가 한 달 정도 병마에 시달리다 혼수상태에 빠진 채 서서히 죽어
갔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당시 주치의 심인은 임금이 병사했으므로 관례
상 유배 당했다가 유배지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남인계열 학자들은 그에
게 사약을 보낸 것도 독살과 관련한 노론 벽파의 입막음 조처였다고 본다.
 정조 독살설은 정조 연간의 개혁이 당시 보수적 노론 벽파의 제동으로 좌
절됐음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논리라고 할 수 있다. 정조 연간에 이뤄진 개
혁작업과 그 좌절은 그 당시까지 쌓여온 근대 지향적 세력의 역량과 그 한
계를 반영하고 있다.
 정조 연간의 개혁은 △`신해통공'(1791)을 통한 중세적 독점상인제도의 
철폐 △서얼에 대한 차별 철폐 △농정개혁에 관한 여론 수집(구언교) △왕
실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설치를 통한 왕권 강화 △왕실 도서관·강학기관인 
규장각의 설치를 통한 학문 진작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개혁 작업은 
상업 발달, 신분제 혁파, 농업 생산력 발달 등 근대 지향적 방향과 일치하
는 것으로 평가된다. 왕권 강화는 대지주·벌열 귀족들의 반대를 뚫고 개혁
을 추진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로 이해할 수 있다.
 정조의 개혁 작업과 더불어 진행된 화성(수원성) 축조는 `독살설'과 함께 
그를 둘러싸고 있는 또하나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표면적인 이유는 정
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이하는 1804년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
려주고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에 홍씨와 함께 내려가 살기 위해서라
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 막대한 왕실 재정을 축내면서 대
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우성 전 성균관대 교수(한국사)와 정석종 영남대 교수(한국사) 등은 당
시 한양이 노론 벽파들의 생활 근거지이므로, 이들을 무력화시키고 더욱 철
저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화성으로 천도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는 △화성 건설 당시 정약용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총동원됐고 △화성을 
신흥 상공업도시로 만들기 위해 화성의 상인들에게 특혜를 주었으며 △본부
가 한양에 있는 장용영의 주력부대를 화성에 주둔시킨 점 등을 든다.
 최근 <꿈의 문화유산, 화성>(신구문화사)이란 책을 펴낸 유봉학 한신대 
교수(48·한국사)에 따르면 `1804년 세자에게 임금자리를 양위하고 화성으
로 내려간다'는 정조의 계획은 당시 조정을 출입한 웬만한 벼슬아치라면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안이었다. 천도 여부와 관계없이 신도시 화성의 축조
가 노론 벽파에게는 일종의 압박으로 다가왔음은 틀림없다. 노론 
벽파의 영수 김종수는 화성 축조를 진시황의 토목사업에 빗대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정조가 죽자 그의 개혁 작업은 많은 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 등은 유배 당하고, 화성 건설을 주도한 정민시
·서유린은 국가재정 고갈과 민생 궁핍화의 원흉으로 지탄받았으며, 왕실 
친위군 장용영은 혁파됐다.
 정조의 죽음 이후 무기력한 보수 정객들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세도
정치' 시기가 도래한다. 연구자들은 정조 연간의 개혁이 조선후기 자생적 
근대화의 중대한 고비였으며, 그의 의문의 죽음은 그대로 자생적 근대화 역
량인 실학파의 좌절로 이어진다고 본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으 쟁점 7]

   7. 예송 논쟁
(96.12.9, 한겨레)

 “한국의 정치는 사사로운 권력쟁탈전일 뿐이다. 상황이 벌어지면 (…) 
음모와 암살이 일어나고, 권력 잡은 자가 바뀌면 정적에게 일망타진의 참화
를 안긴다. 대신을 교체하는 일이 주마등 같고 국정의 개혁은 기약할 수 없
다.”
 한국이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1907년, 학부(교육부) 참정관으로 한국
에 온 일본의 어용학자 시데하라 히로시가 <한국정쟁지>에서 조선 정치사를 
평가한 구절이다. 그의 책은 `당쟁'이라는 파벌싸움이 조선 정치의 고질적 
병폐이며, 그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식민사관의 기초가 됐다.
 이후 1916년에 나온 가와이 히로타미의 논문 `조선의 당쟁, 원인과 당시 
상황'( <사학잡지> 27―3)은 식민지배의 합리화를 위해 노골적으로 조선 민
족의 열등성을 강조한 글이다. 
그는 `당파성'을 조선인의 민족성이라고 규정하고, 조선 민족은 “인류 가
운데 포함시킬 수 없는 우물(愚物)”이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오늘날 보면 지극히 유치한 수준의 이 논문이, 지금까지 우리 민족성이 
당파적이라는 일반적 통념의 원류가 됐다. 이 `당쟁' 문제는 해방 뒤 한국
학 연구자들이 식민사관의 해악을 씻어내는 작업의 하나로 재검토했으나, 
일제가 조작해낸 편견은 비교적 질기게 남아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당쟁의 쟁점이었던 예송(禮訟)의 내용을 검
토함으로써, 당쟁이 정당정치와 유사한 `붕당정치'의 소산이었으며, 그 내
용은 이념논쟁·사상투쟁의 성격을 갖는다고 본다. 예송이란 `예에 관한 논
쟁'이다. 예송은 주로 왕이 죽었을 때, 왕의 생모 또는 계모가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가 주된 쟁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보다 장남이 먼
저 죽었을 때 어머니는 3년 상복을 입고, 차남부터는 1년 상복을 입는다. 
장남은 종통의 계승자이기 때문에 차등을 둔 것이다. 왕의 경우는 복잡하
다. 효종은 차남이었는데 조대비(인조의 부인)보다 먼저 죽었다. 이때 조대
비가 3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1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가 쟁점이 됐다. 
거칠게 나누자면 △왕도 사대부와 같은 예를 적용해 효종이 차남이
므로 조대비가 1년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입장(서인)과 △왕은 장남이 아니
더라도 일단 대권을 잡으면 종통을 이은 셈이므로 조대비도 3년 상복을 입
어야 한다는 입장(남인)으로 갈렸다.
 이처럼 언뜻 보기에 무의미한 논쟁으로 보이는 예송에 대해 가장 비판적
인 입장은 북한 학계에서 나왔다. 이들은 예송이 `인민의 실생활과는 아무
런 관계가 없는 공론'이라고 비판한다. 정진석·정성철·김창원의 <조선철
학사>(1961) 이래 북한에서는 예송이 전개된 17세기를 중세사회의 해체기로 
파악하고, “무너져가는 봉건질서의 재건을 위해 지배집단이 예 
론을 이용했다”고 본다.
 남한에서의 연구 성과는 좀더 다양하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
실장은 조선 성리학이 완숙한 단계에서 예송이 나왔다고 주장한다. 그는 17
세기가 중세의 해체기가 아니라 조선의 독자적 특징이 서예와 예술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시기이며, 왕과 사대부에게 같은 예를 적용해야 한다는 서인
의 입장이 진보적이었다고 본다.
 예송이 사상논쟁이었다는 데는 입장을 같이 하지만, 예송의 본질이 왕권
과 신권의 대립이었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이봉규 서울대 강사는, 신권
론과 왕권론 어느 한쪽이 진보적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왕권 강화를 통해 비대한 신권에 제약을 가하려한 입장이 좀더 개혁
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최근의 연구가 예송을 사상논쟁으로 파악하는 진일보한 관점을 정립함으
로써 일제의 부정적 시각을 씻어내는 데 큰 기여를 했지만, 예송이 내포하
고 있는 사상사적 의미를 명쾌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의 축적
이 필요하다는 게 학계의 시각이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쟁점8] 

                        8. 기(氣)의 실체
(96.12.16, 한겨레)

 지난해 여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 기적의 생존자 최명석씨가 묻혀있던 
위치를 국선도 법사이기도 한 임경택 목포대 교수(정치학)가 정확히 짚어내 
화제가 됐다. 그곳에서 “강한 기의 덩어리가 느껴졌다”는 그의 말은 이후 
기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현재 우리나라에 개설돼 있는 기수
련장은 1천 곳을 넘어섰다. 기수련을 경험해본 인구가 2백만이 넘는다는 통
계도 나와 있다.
 한국에서 기에 대한 관심은 중국이나 일본보다 10~20년 뒤졌다. 중국에서
는 이미 지난 70년대에 침술마취가 성공을 거두고 80년대에 기공마취가 등
장하면서 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 침 한방으로 기의 통로인 경혈을 찌
름으로써 환자의 마취가 가능하고 외과수술까지 할 수 있으며 출혈도 적고 
회복도 빠르다는 중국 의사들의 설명은 세계의 눈과 귀를 `기'에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기는 이렇게 동아시아 전통적 세계관이 발견한 독
특한 범주로 화려하게 부활했지만, 그럼에도 그 실체에 대한 학문적 해명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중국의 경우 사회주의 성립 이후 유물사관에 입각한 철학사를 쓰면서 기
를 서양의 `물질'과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마오쩌둥 사후 많은 학
자들은 기와 물질을 동일시하는 해석에서 벗어나고 있다. 중국인민대학의 
장리원 교수(55·철학)는 서양의 물질 개념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상
호 삼투·포용할 수 없으며 △운동상태를 유지하려는 관성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기는 △어디든지 들어갈 수 있고 △일체의 천지만물에 관통
해 있으며 △다른 사물 속으로 삼투해 들어가거나 다른 사물의 성분을 흡수
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국내 학자들의 기에 대한 정의도 다양하다. 몇 가지 간추려보자면 △생명 
에너지(김용운 전 한양대 교수·수학) △생명의 정보이자 파장(원광대 생명
공학연구소 기의학 분과) △자기파 합성체장(이상명 동의대 교수·화학) △
에너지의 흐름(이충웅 서울대 교수·전자공학) 등의 의견이 있지만, 어떤 
정의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기에 대해 만족할 만한 정의를 내릴수 있으려면 
먼저 기의 실체에 좀더 다가가야 한다.
 지난 10월19일 연세대에서 열린 한국정신과학학회(회장 이충웅 서울대 교
수)에서 류훈 원광대 생명공학연구소 기의학 분과 연구원 등은 `기시술'과 
`기수련'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발표해 주목됐다. 이들에 따르면, 한국 
전통 기수련법의 하나인 `천도선법'을 닦은 기수련 교사가 원광대 학생 7명
을 대상으로 10분~15분 동안 기시술을 행한 결과, 뇌의 송과선에서 분비되
는 멜라토닌이 평균 27.8pg/㎖에서 기시술 직후에는 30.7, 1시간 후에는 2
9.7, 2시간 후에는 30.3으로 증가함을 관찰했다. 생리적·면역적 기능이 뛰
어난 멜라토닌의 분비가 는다는 것은 신체의 암세포에 대한 면역 기능이 증
대됨을 의미한다고 연구팀은 해석했다.
 또 이 연구팀은 `기수련법'이 심리변화와 뇌기능 및 호르몬계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원 물리학과 뇌연구실에서 기수련자 14
명의 뇌파를 측정한 결과, 무드 증대 및 통증 완화와 관련이 있는 호르몬인 
베타 엔돌핀이 수련 전에는 평균 11.21pg/㎖이었다가 수련중에는 25.08로 
약 2.3배 늘어난다는 사실을 관찰했다. 또 스트레스에 민감한 부신피질 자
극 호르몬(ACTH)은 평균 46pg/㎖에서 44로 줄었다. 이런 실험 결과는 호흡
과 명상을 통해 신체의 리듬과 상태가 변한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방증
이다. 그러나 기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면 어떤 상태라고 이
해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좀더 과학적인 규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상수 기자


 [인문학쟁점10]
 
   10. 한국적인 것
(96.12.30. 한겨레)

  김수영 시인에게 `거대한 뿌리'에 대한 `쨍쨍 울리는 추억'을 되살려준 
영국 왕립지리학협회 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1893년 조선을 방문한 뒤 
남긴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한국을 `중국의 패러디'라고 불렀다. 지
난 94년 논란을 불러일으킨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충돌론'에서도 일본은 독
자적인 문명권의 하나로 꼽혔으나 한국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문명권 
안에 두루뭉수리 포섭돼 버렸다.
  이런 평가에 대해 한국인이라면 일단 반발감을 느끼는 게 당연할지 모른
다. 비록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더라도 언어·음식·옷·건축양식·음악 
등 모든 문화·생활영역에서 한국은 중국과도 다르고 일본과도 다르다. 그
렇다면 과연 중국과 구별되는 `한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외국의 학자들의 시각이 그다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도 `중·일과 다르다'는 `느낌'만 있지, 뭐가 다른지 논리적 설명을 구성해
내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자기를 설명 못하는 민족에게 학문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정재서 이화여대 교수(45·중문학)는 <동양적인 것의 슬픔>(살림 펴냄)에
서, “`동양적인 것'이란, 마르크스의 표현대로라면 누군가에 의해 대변돼
야만 하는, 그래서 `동양' 그 자체라기보다 `동양적인 것'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자신이 동양에 있으면서 동양학의 
변방에 있다는 사실, 이것은 안타깝지만 엄연한 현실”이라고 덧붙
인다. `한국적인 것'은 결국 `변방의 변방'인 셈이다.
  오늘날 중국학 연구의 성과는 중국철학을 더 이상 변방의 철학으로 남겨
두려 하지 않는다. 서양철학 연구에서 출발해 최근 5년 사이 동양철학으로 
전공을 아예 바꿔버린 박동환 연세대 교수(61·철학)는, 서양철학이 동일률
·모순율·배중률의 논리학에 기초하고 있다면 중국의 철학은 `서로 모순되
는 사태가 서로를 이뤄준다'는 상반상성(相反相成)의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고 본다. 그는 이 양대 논리학에 필적할 만한 독자적인 논리적 사유를 한국
철학사가 가지고 있는가 하고 묻는다. 이런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해 “한
국인은 철학사가 없는 민족”이라는 무서운 진단을 내린다. 나아가 “철학
사가 없는 주변부의 민족은 오늘날 도대체 어떤 철학을 해야 하는가”를 묻
는다. 이렇게 뿌리를 겨냥한 화두에 대해 `우리에겐 원효가 있고 퇴계·율
곡이 있지 않느냐'고 답변하는 것은 현문우답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철
학의 전개를 위해 사용한 논리가 중국 철학사의 논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
다.
  논의가 여기까지 오면 한국이 `중국의 패러디'라는 비숍의 직관에 항변할 
논리가 궁해진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그렇더라도 `다르다'는 느낌까지 지
울 수는 없다. 정 교수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흡인력을 가진 문화권과 이
웃한 다른 민족들이 모두 동화했음에도 한국이 의식주와 언어·문화에서 독
자성을 유지해 왔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언가 고유한 논리가 있다는 예증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산해경>과 같은 중국의 고전을 번역하면서, 중
국학자들의 입장을 따를 수 없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한국 
한학자들의 주석은 역시 중국과 달랐다”며, 이런 다름 속에서 한국적인 것
의 논리를 구성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이런 `다름'이 논리적으로 명쾌하게 규명돼야 한다는 점이다. `느
낌'만으로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새해에는 다음의 화두에 대한 대답
으로 손색이 없는 한국학의 역작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중국의 패러디가 
아닌 한국의 논리는 어디에 있는가.” 

<끝>
 이상수 기자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알림판목록 I] [알림판목록 II] [글 목록][이 전][다 음]
키 즈 는 열 린 사 람 들 의 모 임 입 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