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0일 토요일 오전 03시 47분 21초 제 목(Title): 강봉룡/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의 전개 역사교육연구회 발표논문 요지(1998년 12월 11일) 3∼5세기 榮山江流域 '甕棺古墳社會'의 전개 강 봉 룡(목포대) 1. 머리말 2. 옹관고분의 대두와 '옹관고분사회' 3.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와 주변부 1) 중심부 2) 주변부 4. '옹관고분사회'의 농업적 기반과 대외관계 5. 맺음말 1. 머리말 한국 고대사회를 설명할 때, 흔히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을 위주로 하고 있으며, 여기에 부여나 가야 정도가 더 보태어질 뿐이다. 영산강유역은 이제까지 고대사학계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으며, 막연히 백제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것이 고작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대사 인식은, 영산강유역의 고고학적 상황을 조금만 들여다 보면 전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인식이 지배해 왔던 것은 중앙 중심사관에 지나치게 제약되어온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제 보다 균형 잡힌 한국 고대사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지방사적 관점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다. 본 발표는 지방사적 관점에 서서, 몇몇 지표가 될 고고학적 자료와 문헌자료를 대비시켜 가면서,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구성과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2. 옹관고분의 대두와 '옹관고분사회' 본고에서 '옹관고분'이라 함은 선사시대의 보편 묘제로서의 '옹관묘'와 구분되는 영산강 특유의 고대 묘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선사시대의 옹관묘는 빠르게는 신석기시대부터 쓰이기도 했지만, 이것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청동기시대부터 옹관묘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더욱 일반화된 것은 철기시대부터였다. 영산강유역 역시 처음에는 우리나라 옹관묘의 일반적 추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광주 신창동 및 운남동 등지에서 확인된 초기 철기시대의 옹관묘 유적과 나주시 마산리 및 화순 용강리 등지에서 확인된 3세기 단계의 옹관묘 유적은, 이러한 옹관묘 사용의 추세를 잘 대변해 준다. 영산강유역에서 이러한 옹관묘와 구분되는 특유의 옹관고분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은 3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된다. 옹관고분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겠다. 첫째, U자형의 대형 전용 옹관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2개의 옹관을 合口하여 橫置 매장하고 있으며, 합구 옹관의 크기는 보통 길이가 2m를 넘고 간혹 3m를 넘는 것도 있다. 형태를 U자로 만든 것으로 보아, 옹관은 오직 관의 용도로만 쓰기 위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옹관을 매장하는 분구의 규모가 대단히 크고 형태가 다양하다는 점이다. 직경이 20∼30m 되는 것은 보통이고 40m에 달하는 것도 간혹 눈에 띠고 있으며, 여기에 높이가 최대 9m에 달하는 것도 있어서, 그 규모만으로 볼 때 옹관고분은 삼국의 왕릉급 고분에 비해 손색이 없다. 그리고 그 분구의 형태를 보면, 圓形과 方臺形을 위시로 하여 截頭圓形, 截頭方臺形, 사다리형, 긴 사다리형, 長方形, 긴 ?圓形 등에 이르기 끼지 다양한 異形墳丘가 있다. 셋째, 옹관의 매장 방식은, 성토한 분구 속에 여러 개의 옹관을 埋納하는 독특한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적게는 2∼3기, 많게는 9기에 이르는 옹관을 지상에 성토한 단일 분구 속에 매납했던 것이다. 이러한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은, 50cm 전후의 일상용 항아리를 관으로 代用하여 매장한 선사시대의 옹관묘와는 확연히 다르다. 이를 옹관묘와 구분하여 '옹관고분'이라 칭한 것은 이 때문이다. 흔히 고분이란 高塚의 고대 묘제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는데, '옹관고분'이라는 명칭을 쓴 것은 이 역시 이러한 고분의 범주에 속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전역에서 일정한 지역권 별로 고총의 고대 묘제(고분)가 대두하게 되는 것은 대체로 3세기 후반부터이다. 예를 들어 서북한 지역에는 적석총이, 한강유역 및 금강유역에는 토광묘와 수혈식석곽분이, 낙동강유역에는 수혈식석곽분이 대두했던 것이다. 이후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적석목곽분이, 한강하류 및 금강유역에서 횡혈식석실분이 대두하여 고분의 대열에 새로이 합류하였다.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 역시 3세기 후반 경에 대두하며, 고총고분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전국적인 고분의 대두 추세와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3세기 후반 이후에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정한 地域圈 별로 각기 독특한 고분이 대두하여 급속히 확산·공유되어 갔다고 한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곧 각 지역권 내의 제세력집단이 문화적 공감대를 이루면서 정치적으로 하나의 단위로 결집되어 간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이 3세기 후반에 대두하고 영산강유역권에 급속하게 확산되어 갔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 당시에 영산강유역에서 세력집단의 정치적 결집현상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보기에는 좀 주저되는 바도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은 영산강유역에서 결집되었을 고대 정치세력집단에 상응하는 역사 기록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는 뚜렷한 역사 기록을 가지고 있는 여타 고분 분포권의 경우와는 매우 대조적인 것이라 하겠는데, 이 점이야말로 영산강유역에 독자적인 정치세력집단이 성립되었다고 보는 것을 주저하게 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옹관고분의 대두와 확산이라는 고고학적 양상만은 확실히 다른 지역권의 고분의 양상과 일치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우선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것이 순리라 보며, 기록 부재의 이유는 이와 별도로 살펴져야 할 사안이라 생각한다. 이런 견지에서 영산강유역의 단일 정치단위권을 일단 상정해 보려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역사 기록에서 정치세력집단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되, 그 정치세력집단의 공통 지표로서의 옹관고분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영산강유역의 고대 정치세력집단을 일단 '옹관고분사회'라 칭해 두기로 한다. 이상의 논지에 따른다면, '옹관고분사회'의 공간적 범위는 옹관고분의 분포 범위와 일치하고, 그 시간적 범위는 옹관고분의 존속시기와 대체로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조사된 바에 의하면, 옹관고분의 분포는, 영산강유역의 나주·영암·함평·무안·광주·화순·담양 등지와 서남해안의 해남·강진·영광 등지에까지 걸쳐 있고, 또한 그 존속 시기는 3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지속되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옹관고분사회'의 공간적 범위는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 일대로, 시간적 범위는 3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경으로 일단 설정해 둘 수 있겠다. 2.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와 주변부 1) 중심부 '옹관고분사회'를 고대의 단일 정치단위권으로 간주할 경우, 그것은 영산강유역의 제세력집단이 중심 세력집단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일종의 연맹체를 구성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연맹체의 중심체인 맹주세력이 입지한 중심부는 어디였을까? 이 문제는 일차적으로 옹관고분의 분포와 규모 및 밀집도, 더나아가 그 부장품의 성질 등을 바탕으로 판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에 축조된 성곽시설이 잔존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맹주세력의 위치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기준이 될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둘 때,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이 입지하고 있었을 유력한 후보지로는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 일대를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다. 시종면 일대와 반남면은 영산강의 큰 지류인 삼포강의 南岸을 따라 상류에서 하류에 걸쳐 서로 連接해 있는데, 이 일대에는 최대급의 옹관고분이 영산강유역에서 가장 조밀하게 분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옹관고분과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틀봉토성과 자미산성이 있다. 여기에서 시종면 일대와 반남면 일대의 고고학적 지표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삼포강의 하류에 위치한 시종면 일대를 보기로 하자. 시종면 일대의 옹관고분군은 삼포강 하류의 연변을 따라 내동리·와우리·옥야리·신연리·금지리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데, 이중 내동리 고분군이 규모와 밀집도에서 단연 돋보인다. 성틀봉토성은 내동리 고분군에서 지근한 거리에 있는 나즈막한 산의 정상 주위를 돌아가면서 테를 두른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정상부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함인지 둘레를 수직으로 깎아 내려 몇개의 단층를 이루게 한 계단식의 형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한편 시종면 일대에는 내동리를 중심으로 완만한 구릉평야가 발달되어 있는데, 이러한 평야의 존재는 유력한 세력집단을 유지하는 경제적 토대가 되었으리라는 점에서 고분군 및 축성의 존재와 더불어 주목되는 바이다. 이 3가지 요소가 고루 갖추져 있다는 점에서, 시종면 일대에는 3세기 후반 이후에 유력한 세력집단이 있었음에 틀림 없다. 다음에 삼포강 상류의 반남면 일대를 보기로 하자. 반남면 일대에는 반남평야의 중앙에 위치한 자미산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신촌리와 덕산리 고분군이, 그 서쪽에 대안리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은 시종면의 그것에 비해 규모가 월등히 크다. 자미산에는 정상을 중심으로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토성(자미산성)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이 토성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수직으로 깎아 내려 3단의 계단을 이루게 한 계단식의 테뫼식토성으로서, 마치 시종면 내동리에 있는 성틀봉토성의 확대판과 같은 인상을 준다. 자미산은 해발 90여m의 나즈막한 산이지만, 사방으로 탁트여 있어 산성의 입지처로 적격이다. 한편 자미산성의 주위에는 시종면 일대의 평야 보다 훨신 넓은 반남평야가 펼쳐져 있고, 이를 삼포강이 감싸고 있다. 옹관고분과 토성, 그리고 평야의 3요소가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반남면 일대 역시 유력한 세력집단의 근거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시종면 일대와 반남면 일대가 모두 유력한 세력집단, 즉 '옹관고분사회' 연맹체의 맹주세력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면, 이 중 어느 지역이 핵심 지역이었을까? 고분의 규모나 토성의 규모로 볼 때, 일단 반남면 일대가 핵심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맹주세력의 근거지를 따져보기 위해서는 시종면 일대와 반남면 일대의 옹관고분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점들에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지역의 옹관고분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점들이 찾아진다. ① 옹관고분 발생 초기의 양상인 옹관고분과 토광묘와의 병존 현상은 시종면 일대에서만 확인되고 있다는 점. ② 옹관고분의 형태를 보면 시종면 일대의 것에는 원형과 방대형은 물론, 긴 타원형과 긴 사다리형 등의 다양한 이형 분구가 있는 반면에, 반남면 일대의 것에는 원형 혹은 방대형으로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 ③ 분구의 규모를 보면, 반남면 일대의 것이 시종면 일대의 것보다 규모가 월등히 크다는 점. ④ 뿐만 아니라 부장품에서도 시종면 일대의 것이 박장의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반남면 일대의 것은 화려한 후장의 경향성을 띤다는 점. 이러한 차이점들은 시종면과 반남면의 옹관고분 사이에 중심 조영시기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옹관고분의 편년에 관한한 매우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어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시종면 일대의 옹관고분의 조영시기는 3세기∼5세기 전반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에 반해, 반남면 일대의 옹관고분의 조영시기는 5세기 중반∼6세기 전반의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곧 '옹관고분사회'의 맹주세력이 5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하여 그 중심지를 시종면 일대에서 반남면 일대로 옮겨 갔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 주변부 삼포강변의 시종면과 반남면 일대가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였다고 한다면, 영광·광주·담양·화순·함평·무안·해남·강진 등지는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에 해당한다. 이 주변부의 세력집단들은 '옹관고분사회' 연맹체의 구성원으로서 중심부 맹주세력의 영도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비교적 유력한 주변부 세력집단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함평군과 해남군 일대, 그리고 나주 다시면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부 세력집단의 모습을 그려보기로 하겠다. 먼저 함평군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함평군은 산세와 수계에 따라 동서부의 두 지역으로 구분된다. 노령산맥의 지맥이 군 북동부에서 불갑산과 모악산으로 모아지고 이것이 다시 남서향으로 흐르는 산줄기를 이룸에 의해 함평군은 동서부로 구분되고 있다. 그리고 동부와 서부에는 각각 북에서 남으로 흘러 영산강에 합류하는 고막원천과 함평천이 흐르고 있어 동서의 두 수계를 이루고 있다. 군의 서쪽은 서해 바다와 연접해 있다. 함평군의 옹관고분은 이러한 산세와 수계에 따라 동서의 두 지역으로 나누어 분포하고 있다. 즉 동부의 옹관고분의 분포를 보면 고막원천의 상류역인 월야면에 집중 분포되어 있고, 남으로 나산면에 이르기까지 산재되어 있으며, 서부의 경우는 함평읍을 중심으로 하여 남으로 학교면, 북으로 대동면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이중 월야면의 만가촌 고분군은 분구가 긴 사다리형이나 긴 타원형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영암 시종면 신연리의 옹관고분군과 같은 이형분구로서, 4세기 전후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로 볼 때, 함평군에는 함평천과 고막원천 연변에 '옹관고분사회' 주변부의 유력 세력집단이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영산강과 서남해의 해로를 통해서 삼포강 연변의 '옹관고분사회' 중심부 맹주세력과 연결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에 해남군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해남 반도의 자연 지형을 보면, 두륜산 줄기와 달마산 줄기가 서로 남북으로 연결되면서 반도를 동부와 서부로 구분하고, 두륜산 자락이 서쪽으로 삐져 나오면서 서부 지역을 다시 남·북으로 구분하고 있어, 크게 북일면을 중심으로 하는 동부 권역, 삼산면을 중심으로 한 서부의 북쪽 권역, 현산면을 중심으로 한 서부의 남쪽 권역의 3개 권역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해남의 이 3개 권역은 해남 반도의 고대 문화권과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옹관고분의 분포를 보면, 동부권역에서는 북일면의 방산리와 신월리 일대에서, 서부 북쪽 권역에서는 삼산면의 해창리와 원진리 일대에서, 그리고 서부 남쪽 권역에서는 송지면 군곡리와 화산면 부길리 일대에서 찾아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옹관고분이 조영된 시기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이 역시 3개 권역에서 확인되고 있어, 해남반도에는 옹관고분을 공통 묘제로 쓰는 '옹관고분사회'의 구성 세력집단이 3개 단위 정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해남반도는 영산강유역권에서 벗어나 있어,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인 삼포강변의 시종면 및 반남면의 맹주세력과의 연결은 영산강 하구에서 서남해의 바다를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왜인조에 나와 있듯이, 서남해의 바닷길은 3세기 이전에 이미 낙랑군과 대방군에서 마한과 진한을 거쳐 왜로 통하는 항로로 활발히 이용된 바 있으며, 화천이나 오수전 등의 중국 화폐가 그 항로의 요소 요소에 남아 있어 교류의 유력한 증거물이 되고 있다. 서남해안 항로의 주요 길목으로 여겨지는 해남 군곡리의 패총유적지에서 1∼3세기의 풍부한 유물과 함께 화천이 발굴된 바 있는 것으로 볼 때, 해남반도는 '옹관고분사회'의 대외교류의 거점, 즉 외항적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여겨질 수 있겠다. 마지막으로 나주시 다시면 일대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하자. 영산강본류의 북안에 위치한 다시면 지역은 시종면·반남면의 '옹관고분사회'의 중심부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이를 중심부의 일원으로 볼 것인가 혹은 주변부의 일개 세력집단으로 볼 것인가가 주저된다. 그렇지만 5∼6세기에 외래세력에 대하여 취한 대응양상에서, 다시면 지역세력은 시종이나 반남면 일대의 중심부 맹주세력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부의 일개 세력집단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 싶다. 다시면 일대의 지형을 보면, 동남 방향으로 영산강 본류가 흐르고 있고, 영산강의 소지류인 문평천이 북에서 남으로 흘러 본류와 합류하면서 다시면 일대를 동서로 구분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연변에 많은 옹관고분군들이 산재해 있다. 먼저 서부에는 영동리 영촌마을과 초동마을 등지에 상당한 규모의 고분들이 산재해 있고, 동부에는 복암리 일대에 있는 대규모 고분의 하부 지점에서 많은 옹관편들이 찾아진 바 있다. 그런데 복암리와 지근한 거리에 옹관고분의 축조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진토성이 있어서, 이 일대에 '옹관고분사회' 주변부의 유력한 세력집단이 있었을 가능성을 더욱 높여준다. 또한 다시면에서 영산강본류를 따라 상류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노안면 학산리와 영산포 등지에 2개의 계단식토성이 위치하고 있는데, 이 역시 다시면 세력집단과 관련된 시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상에서 몇몇 대표적 지점을 중심으로 '옹관고분사회'의 주변부 세력집단의 존재를 개관해 보았다. 그밖에 영산강의 하구인 무안군 몽탄면 일대에서 최근 대규모 옹관고분군이 확인되어 발굴조사가 진행중에 있다. 이의 조사 보고서가 나오면, 이 일대에서 또 하나의 주변부 세력집단의 존재를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듯싶다. 이에 대한 분석은 차후로 미루어 둔다. 4. '옹관고분사회'의 농업적 기반과 대외관계 '옹관고분사회'가 영산강유역을 무대로 하여 3세기 후반에서 6세기 후반까지 독자적 자기 발전을 지속시켜 갔다고 한다면, 이를 지탱할 만한 사회경제적 기반을 정정하고 이를 추적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영산강유역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생각해 본다면, 영산강변의 농경문화와 영산강 및 서남해의 水路 교통을 우선 꼽아볼 수 있다. 전남지역은 지석묘의 세계적 밀집지로 알려져 있다. 현재 확인된 바에 의하면 한반도 지석묘의 80%에 해당하는 20,000여기를 상회하고 있다. 이는 이 지역이 청동기시대에 인구밀집지역이었음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겠으며, 그만큼 농업생산력이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남지방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 초기에는 동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후기로 감에 따라 그 무게 중심이 서부 영산강유역으로 옮겨가는 경향성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후기 지석묘사회 구성원들이 영산강변의 농경지와 영산강과 서남해로 통하는 수로 교통을 기반으로 성장해 갔던 경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경향성은 3세기 후반 이후까지 이어져서 '옹관고분사회'가 대두하고 발전해 가는데 있어서도 영산강변의 농경지와 영산강 및 서남해의 수로가 주요한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이런 면에서 최근에 영산강 하구인 무안군 몽탄면 양장리 일대에서 발굴 조사된 농경 유적지는 우선적으로 주목될 만하다. 양장리 유적은 농경과 관련된 수리시설과 주거지 등의 생활유적이 조사된 복합유적으로, 그 중심 시기가 3∼5세기 대로 편년될 수 있어, '옹관고분사회'의 시대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실제 양장리 유적 주변의 몽탄면 일대에서 옹관고분군이 발굴·조사된 바 있어, 양장리 농경유적지를 '옹관고분사회'의 경제적 기반의 한 사례로 들 수 있으리라 본다. 더욱이 이 유적지는 저습한 농경지로서 당시 영산강변에 수전농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다음에 영산강과 서남해의 수로 교통를 활용한 대외교류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영산강유역 옹관고분과 방어시설의 분포상을 살펴보면, 대체로 영산강 및 그 지류의 연변과 서남해안에 몰려 있어, '옹관고분사회'의 세력집단들이 강과 바다의 수로 교통에 크게 의존하였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옹관고분사회'의 제세력집단들이 수로를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완만한 연맹체 관계를 이루어 갔음을 시사해 주는 것임과 동시에, '옹관고분사회' 외부 세력과도 수로 교통을 통해 무언가의 교류를 전개해 갔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옹관고분의 부장유물과 양장리 농경 및 주거 유적지의 유물들 중에서 왜와 가야, 그리고 백제와의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것들이 확인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주목되는 바라 할 것이다. 더나아가 '옹관고분사회'의 제세력집단은 3세기 말경에 중국 晋 왕조와의 교류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기사를 통해 대중국 교류의 실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가) 이에 張華를 '持節 都督幽州諸軍事 領護烏桓校尉 安北將軍'으로 삼아 전출하였다. 新舊의 세력을 무마하여 받아들이니 오랑케와 중국이 그를 따랐다. '東夷馬韓新彌諸國'은 산에 의지하고 바다를 띠고 있었으며 幽州와의 거리가 4천여리였는데, 역대로 來附하지 않던 20여국이 함께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왔다. 이에 먼 오랑케가 감복해 와서 사방 경계가 근심이 없어지고 매해 풍년이 들어 士馬가 강성해졌다. 張華는 晋代의 유명한 詩人이자 名宰相으로서 내외의 신망을 한몸에 받은 자였으나,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로 좌천되어 유주도독으로 전출되는 비운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유주도독으로 전출된 이후에 변방 정책을 훌륭하게 수행하여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윗 기사에 의하면 장화가 幽州의 도독으로 전출된 이후에 수행했던 변방 정책의 최대의 성공 사례로서 이제까지 來附해 오지 않던 '東夷馬韓新彌諸國' 20여국이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쳐오게 된 것을 특기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외교적 쾌거를 성취할 수 있었던 이유로 '撫納新舊 戎夏懷之'하는 그의 포용력있는 정치력을 들고 있다. 윗 기사에서 이 20여국이 조공을 바쳐온 사건을 얼마나 중시하고 있는가는, 이들이 조공을 바쳐온 것에 대해 '사방 경계의 근심이 없어지고 매년 풍년이 들어 士馬가 강성해졌다'라는 이례적인 코멘트를 붙이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이 '遣使朝獻'해온 사실은 다음의 {晋書} 帝紀에서도 확인된다. 나-1) 춘정월 … 甲午日에 尙書 張華를 都督諸軍事로 삼았다. 2) 9월에 東夷 29국이 歸化하여 方物을 바쳐왔다. 태강 3년(282) 정월에 장화를 도독제군사로 삼았고, 9월에 동이 29국이 방물을 바쳐왔다는 것이다. 나-1) 기사의 도독제군사란 가) 기사에 나오는 '도독유주제군사'를 지칭하는 것이고, 나-2) 기사의 '동이 29국이 귀화하여 방물을 바쳐왔다'는 것은 가) 기사의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의 '遣使朝獻' 사실을 지칭하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晋書}의 '張華條' 기사(가 기사)와 '帝紀'의 기사(나 기사)를 비교해 보면,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29국)이 282년에 처음으로 진에 '견사조헌'(귀화하여 방물을 바침)했으며, 이것이 또한 당시 진의 변방정책에서 매우 중요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가) 기사에 나오는 '동이마한신미제국'이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가) 기사에 의하면 '동이마한신미제국'은 '依山帶海'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고 幽州에서 4천여리 떨어져 있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지리적 조건으로 볼 때, 서남해안을 끼고 노령·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있는 전남지방, 그 중에서도 특히 옹관고분을 공통분모로 하여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지역 일대에서 연맹체를 이루고 있던 '옹관고분사회'으로 비정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그렇다면 282년에 '동이마한신미제국' 20여국, 즉 '옹관고분사회' 연맹체가 晋 왕조에 '처음으로' 견사조헌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기본적으로 '옹관고분사회'의 자기 발전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중국 왕조와의 원거리 교역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한 가지 더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3세기 후반이라는 시점이 한강하류역의 백제와 충청도지역의 마한연맹체 사이에 심각한 대결 양상이 벌어지고 급기야 백제가 마한연맹체를 병탄해버린 사건이 일어난 시기였다는 점이다. 즉 그 당시 마한연맹체를 병탄한 백제는 그 여세를 몰아 점차 낙랑·대방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가고 있었고, 이를 관리하고 있던 진 왕조로서는 백제를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에 진 왕조는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와의 통교를 통해서 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려 했을 것이고, '옹관고분사회' 역시 백제의 마한 병탄 과정에 위기를 느끼고, 진 왕조와의 통교할 필요성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282년에 '옹관고분사회'가 진에 대해 처음 견사조헌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후 진 왕조은 선비족에 붸겨 남으로 옮겨가 이른바 東晋의 시대를 맞게 되고, 이후 宋·齊·梁·陳이라는 南朝의 제왕조로 이어졌다. 중국대륙은 이른바 남북조의 분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와중에서 백제는 4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남북조의 역학관계를 적절히 활용하여, 서해와 남해를 통해 중국 남조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를 연결하는 해상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를 통해 일약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시의 백제왕인 근초고왕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366·368년) 일단 우호관계를 확보한 다음, 강력한 견제세력인 고구려를 수차례 침략하여(369·371) 기를 꺾어 놓는 한편,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침으로써(372) 공식 통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와 함께 369년에는 '옹관고분사회'와 가야의 해안지역에 해상교역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조치도 아울러 병행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기사에 잘 나타나 있다. (마) 神功 49년 3월에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장차 신라를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가 적어 신라를 깨뜨릴 수 없다는 의견이 있어, 沙白과 蓋盧를 보내 군사의 증원을 요청하니, 즉시 木羅近資와 沙沙奴?에게 명하여 정예군을 거느리고 사백·개로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두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 깨뜨렸으니, 이로 인해 비자발·남가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등의 7국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古奚津을 돌아 南蠻인 ?彌多禮를 屠戮하고 이를 백제에게 주었다. 왜군이 369년에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의 7개국을 평정한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古奚津[강진 지역으로 비정됨]을 거쳐 ?彌多禮[해남 지역으로 비정됨]를 약탈하고 이를 백제에게 넘겨 주었다는 내용이다. 마치 왜군이 주체가 된 침략 행위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이는 {日本書紀}에서 의도적으로 왜곡한 바이고, 실제로는 백제가 주도한 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일찍이 이 기사를 전거로 하여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전남지방 전역을 점령·지배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는데, 이 견해는 그간 별다른 이의 없이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계에서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에 대한 조사가 진척되어 감에 따라, 4세기 후반 이후에도 영산강유역 전역에서 독자적 세력집단이 오히려 더욱 강한 성장의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윗 기사는 기왕의 견해와는 다른 의미로 해석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발표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려 한다. 4세기 후반에 백제가 왜와 함께 가야 지역에 대해 군사적 위협을 가하여 '백제-가야-왜'로 연결되는 국제 交易網을 결성하고, 그 여세를 몰아 남해안을 따라 西進하여 강진을 거쳐 해남 지역을 공격·점령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연안 해로를 통한 국제 교역에서 그간 주요 중간 기착지로 성황을 누리던 해남 반도의 어느 한 지점을, 4세기 후반에 백제가 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게 된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이후 백제는 해남지역을 해로 상의 거점으로 활용하면서 국제 교역에 대한 주도권을 선점하는 한편, 점차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사회'로 그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병행해 갔을 것을 예상할 수 있겠다. 그러나 5세기에 들어 고구려의 강력한 남하정책의 벽에 부딪히게 되어 백제의 이러한 시도는 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은 4세기 말부터 백제와 왜에 대한 대대적 공세를 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이어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본격 추진해 가더니, 475년에는 급기야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분간 백제는 신라와 가야와 왜 등과 동맹을 결성하여 고구려의 남하 추세를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 5세기 후반 경에 이르러 국제정세의 안정을 일단 되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제는 다시금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회복하려 했고, 이를 위해서라도 교역로의 요충지인 서남해안지역, 더나아가 영산강유역에 대한 진출을 꾀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그러나 백제는, 아직 내부적으로 政情의 불안정성을 완전히 불식시키지 못한 상태였으며, 외부적으로는 그 사이에 급성장한 倭가 국제 교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백제의 경쟁 상대로 나서게 되자, 더 이상 국제 교역을 그의 의도대로 주도해 갈 수만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백제가 '옹관고분사회'로 영향력을 확대해 간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의 영산강유역에 대한 직접 경영은 6세기 중반 이후에나 가능했을 것이다. 5. 맺음말 옹관고분을 고고학적 지표로 하는 영산강유역 고대사회를 '옹관고분사회'라 명명하였다. '옹관고분사회'의 시간적 범위는 3세기 후반∼6세기 전반에 걸치고 있고, 공간적 범위는 영산강유역과 서남해안 일대로 설정할 수 있다. '옹관고분사회'는 영산강유역에 산재해 있던 여러 세력집단들이 점차 결집하여 성립해간 일종의 연맹체였으며, 그 맹주세력의 입지처인 중심부는 영산강의 큰 지류인 삼포강의 남안을 따라 연접해 있는 시종면과 반남면 일대였다. 그런데 초기에는 시종면 일대가 그 중심이었던 것에 반해, 6세기 중반을 넘어서는 후기로 가면서 그 중심지는 반남면 일대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의 영도를 받는 주변부의 제세력집단이 산재해 있었으며, 그 대표적 사례로 함평군·해남군·나주 다시면 일대의 세력집단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옹관고분사회'가 영산강유역에서 독자적 勢力圈을 유지하면서 발전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청동기시대 후기 이래 영위되어온 영산강변의 농경문화와 영산강 및 서남해를 통한 수로 교통이 기반이 되었다. '옹관고분사회'의 농업문화의 한 사례로 양장리의 농경 유적지를 들 수 있으며, 수로를 중시한 흔적으로는 옹관고분 및 토성이 주로 영산강변과 해안가에 배치되어 있음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수로 교통을 통해서 '옹관고분사회'는 문화를 공유하고, 더나아가 정치적으로 결집하여 하나의 연맹체를 형성해 갔던 것이다. '옹관고분사회'는 백제·가야·왜와의 교류를 전개해 갔으며, 더나아가 3세기 후반 경에 멀리 중국 진 왕조와의 교류도 시도했다. 그만큼 '옹관고분사회'가 국제사회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갔던 것이다. 그후 4세기 후반에 이르러 백제가 국제 해상 교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해남 반도의 일부를 해상교역의 거점으로 확보하게 되자, '옹관고분사회'는 본격적으로 외풍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에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의해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옹관고분사회'는 6세기 전반 경까지 독자적 지위를 의연히 유지해 갈 수 있었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