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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0일 토요일 오전 04시 03분 58초
제 목(Title): 강봉룡/나주시의 연혁 


나주시의 연혁(2) 강봉룡 


1. 나주시의 선사문화 

2. 나주시의 고대문화 

---이상 최성락 교수 집필 


3. 백제 및 통일신라시대의 나주 


백제가 영산강유역으로 진출하여 이를 영역화하고 지방제로 편제한 것은 6세기 중반 
이후였다. 그 이전 영산강유역에는 20여개의 세력집단들이 독자적인 고대 연맹체를 
구성, 유지해 오고 있었다. 영산강유역에서 고대 연맹체를 구성한 이들 
세력집단들은 옹관고분이라는 특유의 고총고분을 지배층의 공통 묘제로 쓰고 
있었고, 또한 특유의 계단식 토성을 그들의 방어시설로 축조하는 등 정치·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었다. 

영산강유역 고대 연맹체사회의 중심 맹주세력이 웅거했던 곳은 영산강의 지류인 
삼포강 연변의 영암 시종면과 나주 반남면 일대였다. 시종면과 반남면 일대는 
최대급 옹관고분의 최고 밀집지역일 뿐만 아니라, 계단식으로 축조된 
성틀봉토성(시종면)과 자미산성(반남면)이 있어 맹주세력의 입지처로 보아 손색이 
없다. 이중 삼포강 하류의 시종면 일대가 전반기의 중심지였다고 한다면, 상류에 
위치한 반남면 일대는 후반기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다. 

백제는 이러한 영산강유역 고대 연맹체사회를 6세기 중반 이후에 접수하여 영역을 
크게 확대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하여 새로운 지방제를 정비하였으니, 
方郡城制가 그것이었다. 방군성제란 전국을 5개의 
광역행정구역(동·서·남·북·중방)으로 구분하고, 각 방을 다시 기초 행정단위인 
郡과 城으로 세분하여 편제한 지방제를 말한다. 그 때 영산강유역은 '南方'의 
관할로 편제되었고, 이는 다시 여러 개의 군과 성으로 세분·편제되었다. 

백제 남방의 관할지역 중에서 오늘날 나주지역에 대한 편제 실태를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찾아 보면, 
發羅郡·水川縣·阿老谷縣·伏龍縣·豆?縣·半奈夫里縣·未冬夫里縣·實於山縣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백제시대에는 기초 행정단위명으로 縣의 명칭은 쓰이지 
않았고 郡과 城의 명칭만이 쓰였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여기에 열거한 縣들은 
당시에는 모두 '某城'으로 칭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본다(<표 1> 참조). 

나주지역에 대한 백제의 이러한 편제에서 주목되는 것은, 이전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중심지였던 반남면 일대에 대해서는 하위의 행정단위인 일개 
성('반나부리성')으로 편제했던 반면에, 이제까지 두각을 나타내지 않던 나주시내 
일대에 대해서는 오히려 그보다 더 상위의 행정단위인 군('발라군')으로 
편제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영산강유역을 지배하는 백제의 독특한 방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백제는 영산강유역의 기왕 세력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지배한 것이 아니라, 기왕의 토착 맹주세력을 억누르는 한편 새로운 
지역의 새력집단을 중심으로 재편성하여 지배하려 했던 것이다. 

영산강유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660년에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하면서 
종결되었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5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내었으며,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웅진도독부와 7주 52현체제로 개편하여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전남지역에는 사반주·대방주·분차주의 3주를 설치하려 하였다. 
이중 나주지역을 대상으로 한 것이 대방주였다. 그러나 당의 이러한 지배정책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고 단순한 圖上 계획에 끝나고 말았다. 이는 신라가 백제 
유민 포섭책과 대당 견제책을 써서 당의 지배야욕을 성공적으로 분쇄했기 
때문이었다. 

767년에 신라가 당군을 완전 축출하고 백제의 전 지역과 고구려의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일단 달성하게 되자, 확대된 영역을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지방제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국을 9개의 광역행정단위인 州로 
구분 편제한 9州制가 그것이었다. 9주제 하에서 행해진 나주지역에 대한 州郡縣 
편제는 다음과 같다. 

먼저 발라군을 발라주로 승격시켜 백제시대의 남방 관할지역(오늘의 전남지역)을 
관할하는 州治로 삼았다. 이는 백제의 이 지역 지배의 기본 구도를 계승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신문왕 6년(686)에 이르러 武珍郡(오늘의 광주지역)을 武珍州로 
승격시켜 주치로 삼고, 發羅州는 發羅郡으로 다시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이어 반나부리성은 군으로 승격시키고, 나머지 백제시대의 성들은 모두 
현으로 개편하여 邑格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가 9주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백제의 옛 지배구도의 틀을 탈피하려한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특기해야 할 점은 각주에 1개씩(漢山州만 2개) 설치했던 신라의 
지방군단인 10정 중의 하나가 미동부리현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未多夫里停이 
그것인데, 이는 무진주 관내의 치안을 유지하고 토착세력을 통제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이상의 주군현 개편 과정을 통해서 다음 두가지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초기에는 오늘의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남일대의 광역행정단위를 편제하려 
하다가, 무슨 이유에서였는 지는 알 수 없으나 9주제 정비 과정에서 그 중심지를 
오늘의 광주지역으로 옮겨 정착시켰다는 점, 다음에 백제가 일개 성으로 
강등시켰던 반남면 일대에 대해서 군으로 승격시켜 준 것은 이전에 맹주세력이 
웅거하던 이 지역의 현실적 세력관계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는 백제의 이 지역에 대한 지배정책과는 대조적인 것으로서, 
나주지역의 현실적 세력관계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을 편제하려 했던 
것을 엿보게 해준다. 

이후 경덕왕 16년에 이르러 신라국가는 전국 군현들의 명칭을 중국식의 雅化된 
표현으로 개칭하였다. 백제 및 통일신라시대의 나주지역에 대한 군현 편제의 
연혁을 종합해 보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 백제 및 통일신라시대 나주지역의 군현 편제 

백제시대
 통일신라 초
 경덕왕 16년 이후
 현재
 
發羅郡
 發羅州→發羅郡
 錦山郡
 나주시내 일대
 
水川城
 水川縣
 여황현
 금천면 일대(?)
 
阿老谷城
 阿老谷縣
 野老縣
 노안면 남부
 
伏龍城
 伏龍縣
 龍山縣
 노안면 북부
 
豆?城
 豆?縣
 會津縣
 다시면 일대
 
半奈夫里城
 半奈夫里郡
 潘南郡
 반남면 일대
 
未冬夫里城
 未冬夫里縣
 玄雄縣
 남평면 일대
 
實於山城
 實於山縣
 鐵冶縣
 봉황면 일대
 
 


4. 고려시대의 나주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나주는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가장 먼저 나주 
지역을 차지한 것은 후백제의 견훤이었다. 일찍이 그는 신라국가에 발탁되어 
서남해 防戍를 맡는 裨將으로 출세하였으며, 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신라국가의 
지방통제력이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진성여왕 6년(892)에 武州(오늘의 광주)를 
중심으로 하여 독립세력을 구축하였다. 그때 나주 지역 역시 그의 영향력 하에 
있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나 나주 지역의 토착세력은 견훤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듯하다. 900년에 
견훤은 전주로 근거지를 옮겨 나라 이름을 후백제로 정하고, 政開라는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건국을 정식으로 선포하였다. 견훤이 중심지를 무주에서 전주로 옮겨 
후백제를 건국한 것은, 일차적으로 옛 백제의 중심지인 충청도와 전북 지역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고려에서였겠지만, 한편으로 나주를 위시로 한 전남지역 
토착세력의 비협조도 어느 정도는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주로 중심지를 옮겨 
후백제를 건국한 그 이듬해, 즉 901년에 견훤이 나주를 공략하여 그 연변 부락을 
약탈했던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말해 주는 좋은 사례이다. 

나주지역 토착세력이 이처럼 견훤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은 제3 세력의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했다면 그 후원세력으로는 후고구려의 
왕건세력을 우선 들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왕건이 903년에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를 따라 내려와서 錦城郡 및 10여 군현을 공취할 수 있었던 것은 왕건과 
나주지역 토착세력과의 우호적 관계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예성강을 무대로 성장한 왕건세력과 영산강유역에서 성장한 나주지역 
토착세력은 해상세력으로서의 공통점을 가지며, 이 점에서 일찍부터 양지역의 
세력집단은 해양을 통한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고 상호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 왔을 
것이다. 

이후에 나주는 왕건의 확고한 정치적 거점이 되었다. 예를 들어 909년에 왕건은 
견훤세력의 위협을 막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수군을 이끌고 염해현(오늘날의 무안군 
해제)에 상륙하여 나주지역에 들어와 머문 적이 있었는데, 이는 날로 도를 
더해가고 있던 궁예의 폭정에서 화를 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914년에도 
왕건은 광평성 시중직에서 해임되자 나주지역에서 일어난 초적을 진압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다시 나주를 찾아서 적극적인 구휼정책을 씀으로써 초적의 발호를 
진정시킨 적도 있었다. 이에 따라 나주지역 토착세력은 친왕건적 성향을 더욱 
강하게 띠어갔다. 이처럼 왕건이 궁예로부터 화를 모면했던 것은 물론, 더나아가 
918년에 궁예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건국할 수 있었던 것은 
서남해안지방의 중심지인 나주지역이라는 강력한 거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할 것이다. 나주지역 토착세력과 왕건세력 간에는 상보적 관계를 강화해 갔던 
것이다. 

왕건이 나주 출신 중소 호족인 오씨의 딸과 인연을 맺은 것은 왕건과 나주지역 
토착세력을 더욱 밀착시켜주는 계기가 되었다. 후에 고려 태조가 된 왕건은 이 
오씨녀를 莊和王后로 삼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武를 태자로 삼아 급기야 그의 
뒤를 이어 즉위케 하였으니, 이가 고려 제2대왕 혜종이다. 당시 태조는 전국의 
유력한 호족의 딸들과 결혼함으로써 정국의 안정을 기하려는 혼인정책을 써서 무려 
29명의 왕비를 두고 있었다. 그 중 장화왕후는 나주의 중소 호족의 딸에 
불과했으므로 그녀와 그녀가 낳은 무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미약했다. 따라서 유력 
호족과 측근들의 반대가 빗발치는 가운데, 무를 그의 후계자로 지목한다는 것은 
일대 모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조는 그의 심복인 박술희에게 무의 
후원자가 되어줄 것을 부탁하여, 결국 그의 뜻대로 무를 고려의 2대왕으로 등극케 
하였던 것이다. 이는 태조의 나주지역에 대한 지대한 관심의 표현이기도 하였다. 

태조의 나주지역에 대한 관심은 나주지역에 대한 편제정책에도 반영되었다. 즉 
태조는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한 직후인 918년 9월에 羅州道大行臺를 
설치하고, 전광평성 시중 具鎭을 나주도대행대 시중으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나주도대행대란 고려의 중왕정부와는 별도로 나주를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특별기구였다. 이처럼 나주를 특별구역으로 편제했던 것이나, 이를 다스리는 
우두머리의 직명을 중앙의 최고관직인 시중이라 칭했던 것, 그리고 전광평성 
시중을 그 우두머리로 파견했던 것 등은 나주지역에 대한 일대 파격적 대우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고려의 나주지역에 대한 파격적 대우는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성종 
2년(983)에 지방제도를 일차 정비하여 전국의 중요 지역에 12牧을 설치할 때 
호남지역에는 나주와 승주와 전주의 세 지역에 牧을 설치하였고, 이후 현종 
9년(1018)에 지방제도를 완비하면서 12목을 8목으로 조정할 때에는 승주와 전주는 
제외시키고 나주만을 호남 유일의 목으로 남게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 
나주는 御鄕으로서 명실상부한 최고의 지위를 유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피해 나주를 피난처로 택했던 것도, 고려 왕실의 번병으로서의 
나주의 위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려시대 전남지역에 대한 편제가 나주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에 고려 건국 이전까지 전남지역 편제의 중심지였던 
광주지역은 海陽縣이라는 일개 현으로 강등되었다. 이는 마지막까지 친후백제의 
노선을 견지하던 광주지역에 대한 고려국가의 단호한 대응조치였다. 

고려의 지방제도의 중심은 牧이었다. 현종대에 전국을 5道 兩界로 획정하는 
지방제도가 갖추어졌지만, 도 단위의 안찰사는 도 단위에 대한 임시적 감찰 업무만 
수행할 뿐이었고, 도 단위에 대한 항상적인 지휘업무는 牧의 界首官의 몫이었다. 
이 점에서 나주목은 오늘날 전남지역의 군현에 대한 감독업무를 수행하는 중심 
치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주목을 정점으로 하는 고려시대 전남지역의 지방 
행정편제를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고려시대 나주지역의 군현 편제 


羅州牧 - 屬郡 5 : 務安, 潭陽, 谷聲, 樂安, 南平 

屬縣11 : 鐵冶, 會津, 潘南, 安老, 伏龍, 原栗, 여황, 昌平, 長山, 珍原, 和順 

(領郡·領縣) 

長興府 - 속현4 : 遂寧, 會寧, 長澤, 耽津 

靈光郡 - 속군2 : 壓海, 長城 

속현8 : 森溪, 陸昌, 海際, 牟平, 咸豊, 臨淄, 長沙, 茂松 

靈巖郡 - 속군2 : 黃原, 道康 

속현3 : 毘미, 海南, 竹山 

寶城郡 - 속현7 : 同福, 福城, 兆陽, 南陽, 玉果, 泰江, 荳原 

昇州郡 - 속현4 : 富有, 突山, 麗水, 光陽 

海陽縣 

珍島縣 - 속현2 : 嘉興, 臨淮 

綾城縣 

耽羅縣 


고려시대 군현제의 특징은 기초 행정단위를 領郡·領縣과 屬郡·屬縣으로 
구분하였다는 점에 있다. 지방관이 파견된 군현을 영군·현이라 칭하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군현은 속군·현이라 칭했던 것이다. 영군과 영현은 몇 개의 속군 
혹은 속현을 거느렸다. 위의 <표 2>에 나타나 있듯이 속군과 속현은 반드시 
소속하는 목과 영군 및 영현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각 지역의 호족 상호 간에 성립되어 있던 전통적 상하 관계가 지방제도 
편성과정에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牧은 가장 많은 속군과 속현을 거느린 기초 행정단위이면서, 
동시에 관내의 영군과 영현을 지휘 감독하는 界首官이기도 하였다. 나주목의 경우 
5개의 속군과 11개의 속현을 직할하면서, 동시에 1부 4군 4현의 영군·현을 지휘 
감독하는 위치에 있었다(<표 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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