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0일 토요일 오전 03시 19분 07초 제 목(Title): 이재호/수많은 오역이 역사를 망친다 문화유산 파괴의 현장 제 24호 1997.05.01 ------------------------------------------------------------------------------- - 『삼국유사』 『삼국사기』 국역에 문제 있다 수많은 오역이 역사를 망친다 李載浩 <부산대 명예교수·국사학> 20년 경남 함안 출생부산대 교수·명예교수저서 『한국사 批正』 『조선정치제도 연구』 역서 『삼국유사』 『삼국사기』 『금오신화』 『반계수록』 『정다산문선』 ------------------------------------------------------------------------------- - 『최근 고전국역사업이 붐을 이루면서 고전 자료들이 한글로 번역돼 시중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들 출판물 중 상당수가 생경한 표현과 수많은 오역으로 민족학 연구의 밑거름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학문연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높다. 한 원로사학자의 입을 통해 고전번역의 문제점을 살펴본다. [편집자주] 동양의 고전은 물론 우리 전통사상의 연구와 민족사관 정립에 필수적인 방대한 수량의 고전들은 거의 한문으로 기록·편찬돼 있다. 따라서 한문 원전을 숙독·이해하지 않고서는 전통사상이나 민족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광복 이후 근 30년 동안 학교에서 제대로 된 한문교육을 실시하지 않아 후학들의 한문 해독력은 모두가 「어로불변」(魚魯不辨·魚자와 魯자도 구분못한다는 의미)의 딱한 처지에 놓여 있다. 정부 당국에서도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여 지난 68년도부터 국고지원으로 고전국역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사회 각계의 호응도 높아 국역사업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문제는 국역 붐이 일면서 표현이 생경하고 오역이 적지 않으며 외관만 그럴 듯하게 만든 위조품들을 전문학자의 교열도 거치지 않고 출판사들이 경쟁적으로 펴내 고전의 진가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한문 고전을 통달하려면 무엇보다도 중국의 경사(經史)에서 기본지식을 얻어야하고 이를 위해 무엇보다 사기·통감 등을 완전히 익혀 역사적 사실을 파악하고, 문장의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그 다음에 『사서오경』 등을 정독·완미(阮味)하여 전통사상의 근원을 구명하고 사물의 추리능력을 연마해야만 비로소 한문 고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고전의 번역에는 현대적인 논리와 수사적 문장력이 뒤따라야만 되니 이러한 실력을 구비한 학자가 우리나라에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따라서 이같은 기본지식이 없는 인사들이 번역한 출판물들이 오역으로 가득찬 것도 당연하다 하겠다. 필자는 지난 67, 71년에 우리나라의 옛날 역사를 보다 정확히 일반에 알리기 위해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역주(譯註) 출판한 적이 있는데 근일에 이 작품을 다시 개판(改版)하려고 점검해 보니 필자의 노작(勞作)를 표절, 도작(盜作)한 복제품들이 공공연히 서점가에서 판매되고 있는 현상을 목격하게 되었다. 이같은 현상은 우리의 출판문화의 근본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학문연구의 걸림돌이라는 점에서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전통사상의 근원이 되는 중국의 경서(經書)와 우리의 고전을 번역한 시중의 출판물들을 살펴보면 이같은 상황을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근래 각 출판사에서 펴낸 10여종의 『논어』 번역본 중 어느 것도 「언근이지원」(言近而旨遠)한 성인의 말씀을 올바르게 번역한 것을 찾아보기 힘들어 한심한 생각이 들 지경이다. 여기서는 지면관계상 우리나라 고전 중 대표작으로 꼽히면서도 특히 오역이 심한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유사』는 전기체(傳記體)로 꾸며진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의 역사기록으로 원전(原典)이 난삽할 뿐만 아니라 인용자료가 중국측 기록보다는 우리나라의 옛날 기록을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기록을 검증하는 작업이 자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이 책의 초창기 번역본에는 무수한 오역들이 발견된다. 지난 1957년에 발간된 『역주 삼국유사』(이병도·동국문화사)에는 오역이 무려 3백70여 곳이나 나왔고 북한이 발간한 『삼국유사』(고전연구원 펴냄·1959년)에도 상당한 오역을 발견할 수 있다. 필자는 67년에 우리의 귀중한 역사서적을 오역 속에 방치할 수 없다는 심정으로 몇해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삼국유사』를 상·하 두권으로 번역·출간한 바 있다. 현재 국내에 유통되고 있는 『삼국유사』 번역본은 대개 10여종에 달한다<표1 참조>. 이중에서 우선 필자의 출판물보다 먼저 간행된 이병도 박사와 북한고전연구원의 『삼국유사』가 저지른 오역의 실태를 살펴보면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시경에 무지한 북한학자들 진덕여왕이 당나라 고종에게 바친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紀異編」 제1권)란 시구를 이병도 역주본은 「하늘을 통송하매 고귀한 비가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매 물체마다 광채를 머금었다」(277쪽)고 번역하였고, 북한고전연구원은 「하늘을 대신하여 베푼 은혜 장할시고 만물을 다스려서 저마끔 빛을 내다」(129쪽)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은 모두 「雨施」와 「含章」의 출전을 모르기 때문에 생긴 오역이다 . 즉 「雨施」는 『역경』 권1 「乾卦象傳」의 「雲行雨施 品物流行」에서 나왔고 「含章」이란 글구 또한 『역경』 권2 「坤卦 六三 爻辭」의 「含章可貞 或從王事 无成有終」에서 나왔는데 「雨施」는 대자연의 작용을 이른 말이고 「含章」은 미덕(美德)을 속에 함축한다는 말이니 곧 지도(地道) 또는 지덕(地德)을 이른 말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대자연처럼 통치하고 만물을 땅처럼 포용한다」는 것이 이 시구의 올바른 번역이다. 특히 「崇雨」를 고귀한 비라고 번역했는데 「時雨」 「甘雨」라는 말은 있어도 「崇雨」라는 말은 어느 고전에도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학술어로 성립될 수도 없는 말이다. 더구나 「雨施」 「含章」 등의 술어는 『역경』을 읽지 않더라도 중국사전인 『사원』(辭源)에도 나타나 있는데 난해한 고전을 번역하면서 사전도 참고하지 않은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또 「기이편」 제2권 「駕洛國記」의 「以基月二十日 資始金陽」란 글귀 중 「金陽」은 「金湯」의 오기며 「金湯」이 성곽(城郭)인 줄 모르고 「그달 20일에 金陽에서 시작하여」(이병도·286쪽)라고 번역하고 있으니 이런 번역은 「金陽」을 지명(地名)인지 방위(方位)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게 만드는 모호한 표현이다. 북한고전연구원의 경우는 수로왕이 별세한 광경을 기록한 기사 중 「國中之人 若亡天只」란 글구를 「전국 인민들이 하늘이 무너진 듯 슬퍼했다」(271쪽)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도 「天只」란 글구가 부모의 대명사로 씌어 『시경』의 출전을 몰랐기 때문에 「나랏 사람들이 마치 부모를 잃은듯이 슬퍼했다」는 말을 「하늘이 무너진 듯이 슬퍼했다」고 오역한 것이다. 이밖에 원문에서 잘못 쓴 글자를 바로 고치지 않고 번역한 것들도 적지 않다. 「감통」(感通) 제7권 「광덕·엄장편」의 「莊菴悽南岳 大種力耕」이란 구절을 「嚴莊은 南岳에 菴子를 짓고 거기에 居하여 광작으로 田耕에 힘썼다」(이병도·435쪽), 「엄장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농사를 큰 규모로 부지런히 하였다」(북한연구원·519쪽)로 번역한 것이 그것이다. < 「표절도 제대로 베껴야지」 이런 번역들은 잘못 쓴 글자를 고증도 하지 않고서 그대로 오역한 대표적인 실례다. 산골에서 어찌 농사를 광작으로 또는 큰 규모로 지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구절의 「大種力耕」은 「火種刀耕」으로 정정(訂正)하여 숲의 나무를 베어내고 불살라 경작했다는 화전의 의미로 번역해야만 한다. 이와 함께 상식적인 학술어도 부주의하게 대충 풀이하여 착각을 일으킨 사례도 간간이 나타난다. 「효선」(孝善) 제9권 「大城孝二世父母」편의 대성이 그 어머니에게 아뢰는 「念我定無宿善 今玆困置矣」(저는 전생의 선업이 없었으므로 지금에 와서 곤궁하니)를 「생각컨대 우리가 집도 좋은 것이 없고 이와 같이 곤궁하니」(이병도·463쪽)로 오역한 것 등이다. 최근에 간행된 번역물들 중에는 고전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오역하거나 전작들을 그대로 베껴쓴 것들이 적지 않다. 강무학의 『한글해설판 삼국유사』는 중국 상고시대 성군인 요임금을 요나라로(권1·50쪽) 표현하는 등 역사상식의 결여와 한문 해독상의 문제점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김봉두 편역의 『삼국유사』는 역자가 편역했다고 했으니 이미 간행된 여러 사람의 번역서를 짜집기 했다는 의미인 것으로 여겨진다. 역자가 쓴 해제를 살펴보면 이병도·권삼로 등 학자의 역해본을 참고하고 편집체제를 종서(縱書)에서 횡서(橫書)로 고치고 원문을 함께 수록하여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했다고 하니 체제 개편의 노고는 수고롭지만 내용에 있어선 역문과 주해가 필자의 번역본을 원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례를 들어보면 「기이편」 제2권 「후백제 견훤편」의 맨 뒷부분에 「비록 항우(項雨), 이밀(李密)의 뛰어난 재주로도 일어남을 막지 못했는데」(雖項雨李密之雄才 不能敵漢唐之與·232쪽)라는 번역은 「비록 항우와 이밀과 같은 웅재로서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일어남에 대적하지 못했는데」(필자 번역본·266쪽)라는 번역의 부실한 복사다. 원문을 옆에 기록하고도 이러한 문맥 불통의 번역이 나오는 것은 전작들을 복사(複寫)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수로 여겨진다. 비슷한 오역이 제8권 「피은」편의 혜현구정(惠現求靜)편 맨 끝의 찬(讚)에서도 발견된다. 「녹미(鹿尾)로 경을 전함에도 권태를 느껴」의 녹미는 주미( 尾·총채)의 오자(誤字)인데도 이런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각주(脚註)에 「녹미는 번뇌의 세계에서 삼거(三車) 즉 녹거(鹿車)·우거(牛車)·양거(羊車) 중에서 첫째인 녹거로 인도해 간다는 뜻」이라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을 하고 있으니 이것은 이병도 역주본의 잘못된 주해(453쪽)를 따른 결과다. 권상노 번역·한정섭 주해의 『삼국유사』는 권상노의 저술에서 원문은 빼고 역문만 수록했으며 주해는 필자의 것을 편저자가 표절한 것이 분명하다. 또 해제는 권상노가 쓴 장문(60여쪽)의 해제를 쓰지 않고 필자가 쓴 해제(5~10쪽)를 발행인이 복사하고 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기이편」 제2권 중 「聖德王·水路夫人·孝成王·忠談師·表訓大德」 등 4편은 누락시키는 등 서투른 솜씨로 작업해 오자와 탈자가 무려 2백50여 곳이나 발견된다. 이밖의 여러 번역본들도 위에 거론한 책들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표절·도용의 혐의가 짙다. 특히 『삼국유사』의 경우 본문의 오역보다는 주해의 오석(誤釋)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기이편」 제1권 「고조선 王儉朝鮮편」의 단군(檀君)에 관한 고기(古記)에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어 천하에 자주 뜻을 두고서 인간세상을 탐내어 구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서 삼위태백산을 내려다 보니 인간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는 「三危」에 대해 모두가 중국의 산 이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中文大辭典에 따르면 「三危」는 우리 말의 「三峰」과 같은 뜻이므로 「三危太伯」은 곧 삼봉인 태백산(太白山)을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앞뒤 문맥도 살펴보지 않고 멋대로 해석하니 「三危」를 「그 땅에는 세가지 위험이 있었다」(리가원·허경진·40쪽)는 해괴한 오역이 나오는 것이다. 또 표절의 대표적 실례를 든다면 필자가 「기이편」을 설명하기 위해 쓴 「기이권」은 신이(神異)한 사적에 관한 것이다」라는 부제(副題)까지 도용한(장백일·『삼국유사』) 실정이다. ▶ 계속… 『삼국유사』 『삼국사기』 국역에 문제 있다 수많은 오역이 역사를 망친다 李載浩 <부산대 명예교수·국사학> ------------------------------------------------------------------------------- - 국어에 무지한 서툰 표현들 이번에는 『삼국사기』의 경우를 알아보자. 삼국사기는 편년체(編年體)로 꾸며진 기전체(紀傳體) 역사로 원전의 문장이 유려하고 조리가 정연해 번역작업이 『삼국유사』보다는 쉬운 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도 국제관계 부분은 어려운 한문 전고(典故)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요구해 독해력이 빈약한 인사들의 번역물에는 해석이 틀리고 표현이 서툰 대목이 적지 않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삼국사기』 번역본 역시 7~8종에 달한다 이중에서 강무학의 『삼국사기』는 원문과 함께 해설까지 붙였고 김종권·최호의 『삼국사기』는 원문은 있으나 주해가 없다. 『삼국사기』도 오역된 부분이 많이 나타나는데 지면관계로 몇가지만 가려서 지적해 본다. 우선 「당나라 장수 薛仁貴가 신라 文武王에게 보낸 서신」의 경우 중국의 전고(典故)를 많이 사용한 까닭에 특히 오역이 많이 나타나는데 이중 강무학의 번역(190~194쪽)은 오역이 무려 50여곳에 달했다. 특히 「당 태종이 요동지방을 침공한 부분」(論曰 唐太宗聖明不世出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의 번역들을 비교해 보면 고전 국역의 전반적인 문제점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이를 논평한다. 당나라의 태종은 성명하여 세상에서 극히 드문 임금이다. 난을 평정한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수 있고 다스름을 이룬 것은 성왕(聖王)과 강왕(康王)에 가깝다」(이재호· 363쪽) 「사신은 논한다. 당 태종은 흔히 나지 않은 성스럽고 밝은 임금으로 난을 제거한 것은 탕왕·무왕에 견줄 만하고 다스림을 이룩한 것은 성왕·강왕과 거의 같다」(신호열 1편·369쪽) 「저자의 평: 당 태종은 어질고 명철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서 난을 평정하는 데는 상 탕과 주 무왕에 견주고 리치에 통달한 것은 주 나라의 성왕, 강왕과 비슷하였으며」(북한고전연구원·532쪽) 「사신(史臣)이 논하여 말하기를 당 태종은 성명함이 세상에 드문 임금으로 난을 평함은 (殷의) 탕왕, (周의) 무왕에 견줄 만하고, 정치로는 (周의) 성왕과 강왕에 가까우며」(이병도 상권·489쪽) 「김부식의 소론: 논하여 말하면 당 태종은 성명하게 뛰어나지 못한 임금이다. 난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는 중국의 탕왕·무왕에 비할 수 있으며 사리의 기틀에 이르러서는 성왕·강왕과 같다」(강무학·488쪽) 북한의 번역은 「致理」의 「致」자가 고려 성종의 이름 「治」자를 피하여 쓴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리치에 통달한 것」으로 잘못 번역한 것이며 강무학의 번역은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不世出」이란 용어의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또 「당 태종이 요동 침략전에서 패전한 일을 논평한 대목」(史論曰 好太喜功 勒兵於遠者 非此之謂乎 柳公權小說… 又曰 大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摩黑旗被園 帝大恐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司馬 公通鑑不言者 豈非爲國諱之者乎) 역시 오역의 대표적인 실례를 보여준다. 『역사 평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이 아닐까? 류공권의 소설에서… 또 황제의 친솔한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위축되어 있을 때에 척후병이 영공의 휘하에 있는 검은 기발이 포위되었다고 하니 황제가 성을 크게 내었다(恐을 怒로 착각:필자 주) 하였다. 비록 나종에 몸을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 당서와 사마관의 통감에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을 위하여 말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겠는가』(북한고전연구원 상권·541쪽) 『사가의 논평에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여 군사를 먼곳에 몰아세웠다는 것이 이를 두고 이름이 아니겠는가. 유공권의 소설에… 또 육군(六軍)이 못하게 되자 보고하는 자가 영공의 지휘하는 흑기가 포위를 당했다고 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비록 스스로 탈퇴함에 그쳤으나 이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당서(新舊唐書)나 사마공의 통감(通鑑)에 말하지 아니한 것을 어찌 나라를 위하여 일부러 말하지 않은 것이라 아니 하겠는가』(신호열 1편·374쪽) 『사론에 「대를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며 군사를 먼 데까지 강요하였다」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유공권의 소설에 말하기를… 또 6군(軍)은 고구려의 승리가 되어 거의 떨치지 못하였다. 염탐하는 자가 알리기를 「영공(英公·李世勣)이 거느리는 흑기가 포위되었다고 하니 당주가 크게 두러워하였다」하였다』(이병도 상권·500쪽) 『역사에서 논하여 말하기를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여 군사를 먼 데까지 강요하였다」함은 이를 이르는 것이다 . 유공권의 소설에 이르기를… 6군이 이 틈을 타서 고구려에 침입을 하였지만 장수들은 거의가 부진하였고… 』(강무학·496쪽) 『사론에서 「과장하기를 좋아하고 공 세움을 기뻐하여 군사를 먼 데까지 끌고 갔다」고 말한 것은 이것을 일컬은 것이 아닐까? 유공권의 소설에 … 또 이런 말이 있다. 「황제의 육군이 고구려 군대에게 뒤쫓겨져서 거의 떨치지 못하게 되려 했을 때 척후병이 영국공(英國公)의 대장기인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아뢰니 황제는 크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스스로 빠져나가기는 했으나 위태로움이 그와 같았는데도 신당서·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는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니 어찌 자기 나라의 체통을 위하여 이 사실을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이재호·369쪽) 이상의 번역들을 살펴보면 모두 「大」가 과대·과장의 뜻이 있는 것을 모르고 「好大」를 그냥 「큰 것을 좋아한다」고 번역했으니 결국 고증의 소홀과 표현의 미숙으로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수하지 못한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대강 지적한 바와 같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교수나 박사 등의 직함만을 내걸고 함부로 고전 번역에 손을 대거나 타인의 노작물을 쉽게 표절·도용하는 일이 다반사로 행해져 고전의 참된 가치를 매몰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이같은 오역투성이의 번역물을 검증없이 받아들여 시중에 내놓는 무책임한 출판사들에 의해 학문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개탄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