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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20일 토요일 오전 02시 37분 51초
제 목(Title): 퍼옴/발해인의 광복운동 


제 목:[발해사]발해인의 광복 운동. 
 올린이:parkbae (박현배 ) 98/01/29 20:57 읽음:157 관련자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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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번째 이야기-----------------------------------------------

 발해인의 광복 운동 및 활동.

 발해 멸망 후 발해인들은 여러 갈래로 국가 재건을 위해서 노력한다.
첫번째로 거란이나 여진에 합류하여 활동한 발해인과,두번째 발해 내지
에서 국가 재건을 위한 투쟁을 한 발해인,세번째로 고려로 내려와 
고려인과 공동으로 요와 대항했던 발해인이다.
 북한에서는 신라가 아닌 고려를 첫 민족 통일 국가로 보듯이,고려는 
적극적으로 발해인을 포용하여 민족적 단결을 도모하였다.당시 고려로 
내투한 발해인들은 세자 '대광현'이하 수십만명이나 되었다.
 10세기 초 고려 인구가 200만이었으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며,
이들은 고려의 적극적인 포용 정책에 의해서 고려에 거주할 터를 
마련하였다.당시 발해인들의 국가 수복 의지를 나타내는 '은계종'의 
애기는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한테도 크나큰 감명을 준다.

 928년 9월 은계종이 고려로 내투했을때 왕건은 직접 그를 왕궁에서
만났다.은계종은 보통 의식(두번 절 하는 것)과 다르게 고려왕에게 
3번(세번 절 하는 것)의 예를 드린 것으로 하여 고려 관료들 사이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그러나 그때 관료들 중에서 대상 함흥이 "나라 
잃은 사람들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3배를 하는 것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의례의 형식이다."라고 해명함으로써 문제는 자연히 
해소되었다.

 이 3배는 요컨대 자기 나라의 상실을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그에
항거하여 앞으로의 국가 회복을 결심한 사람들이 하는 의례 형식으로
된 것이다.1)
 발해인들은 고려의 북방 개척에 적극적인 협조와 더불어,고려와
요의 3차례 전쟁시에도 많은 활약을 하였다.문헌에 나오는 1차
전쟁 때 소손녕을 상대하여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중랑장 
'대도수',2차 전쟁 때 '곽주 전투'에서 이름을 날린 대장군 '대회덕'
등을 들수 있다.이들은 그나마 발해 왕실의 성이기 때문에 명확히 
발해인 출신이라고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외 많은 발해인들은 
고려인과 연합하여 요와 싸웠고, 북쪽 지역에 대다수 살면서
고려 영토를 넓히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발해의 옛 고토에서 일어난 첫 국가는'후발해'였다.
928년 후발해는 후당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였고,송나라는 
후발해 왕을 '오사성 발해왕'이라고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후발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수 있는 자료는 없다.
언제 건국하여 멸망했는지 사료에는 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후발해는 태자가 건재하였고 남해부을 통제하며 중앙 정치
기구도 존재하였다.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정안국'도 발해인에 
의해서 건국되었다.이들 두 나라는 중국 세력과 연계한뒤 요에 대항
하면서 군사적 활동도 펼치는 등 국가적인 모습이 드러나지만 70-80년
정도 존속되다가 멸망하였다.요사에 보면,995년 요군과 후발해국과의
전투가 등장한다.

 "요 성종 통화 13년에 거란인들은 자기 관하 해족의 '왕화삭노'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대군을 이끌고 후발해국으로 침입하였는데 
이때 국왕 오소경의 지휘하에 발해인민들은 견고한 성을 의지하고
결사전을 전개함으로써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이를 격퇴
하였다." 2)

 그러나 이들 나라가 멸망한 후 발해인들의 광복 운동은 쇠퇴하다가,
1029년 요동 지방에서 발해인들의 투쟁이 일어난다.'대연림'은 발해
왕손이지만,요에서 '동경용원부 대장군'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대장군이라는 직책을 가졌으니 친거란파의 발해 유민이었다.
'대연림'은 당시 야기된 민심 동요를 틈타 거사하였다.먼저 대연림은
동경 유수 부마 '소효선'과 '남양 공주'를 가두고 '한소훈'.'왕가'
등을 살해한뒤,이곳에서 즉위하여 나라 이름'흥료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경'이라 하였다.
 하지만 '대연림'는 처음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같이 계획을
세웠던 '왕도평'은 거사 도중에 도망갔고,보주의 발해 출신 태보
'하행미'도 거란에게 대연림의 공격 예정 사실을 고발하여 발해 출신 
병사 800여명을 죽게 하였다.오직 대연림에게 힘이 될 수 있었던
세력은 남북의 '여진 부락'과 수차 전쟁을 치렀던 '고려'뿐이었다.3)
 대연림은 병력을 이끌고 요의 심주(오늘의 심양)성을 공격하는 등 
군사적 활동과 더불어,고려에 무려 5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적극적인 군사적 지원을 바라고 있었다.
당시 형부 사서 '곽원'은 현종에게 흥료국 군사적 지원을 건의하였다.
이런 정세를 이용하여 흥료국과 연합하여 공격한다면,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옛 고구려 영토도 회복할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대다수 관료들은 요와의 전쟁에서 패하면,더 큰 화를 당하기
때문에 외교적인 방법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하였다.고려군의 출병은
끝내 무산되고,곽원에 의한 요구에 소수 병력의 고려군은 요의 보주성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고려의 북방 출병은 이것으로 끝나 버렸다.
당시 요의 보주성에 있던 병력이 불과 5천명도 안 되었으니,고려군의 
무기력함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대연림'는 주위의 지원 없이 요의 대군을 맞아 포수에서 접전하지만,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후퇴하고 요군은 요양 전선에 와 있던 소수의 
고려군(이들은 서북면 소속 고려군들로,독자적으로 흥료국을 지원한
것 같다.)과 여진군의 진군로를 차단하고 추격하였다.
 다시 수산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대연림은 병력을 이끌고 요양성으로
후퇴하였다.대연림는 요의 대군을 맞아 1년동안 성을 사수하였다.
하지만 대연림의 부하였던 '양상세'가 요와 내통한후 성문을 열어주어
요양성은 함락되고 국왕 대연림은 사로잡혔다.이리하여 발해 멸망 
백년 후에 '흥료국'을 세우고 고국을 회복하려던 발해인들의 투쟁은
1년만에 끝나 버렸다.4)
 이 투쟁 이후 요는 발해 유민들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등 발해인들의
부흥 운동을 막을려고 하였다.
 1116년 발해인 '고영창'은 요동 지방에서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대발해국' 연호는 '융기'로 하여 건국하였다.그의 거사에 호응한 
발해 병사들만 8천명이나 되었고,동경요양부를 쉽게 점령하였다.
대발해군은 장림이 이끄는 거란군과 30여차에 격전을 벌리며,태자하 
근처에서 요군을 섬멸시키는 등 짧은 기간에 세력을 확장하였다.
 대발해국은 요동 지역의 50주를 점거하고,여진인들이 세운 금나라와
협상도 하는 등 유리한 입장이었지만,고영창은 황제를 고집하는 등
경직된 협상을 벌이다 오히려 금군의 공격을 받는다.금군은 먼저 
요군을 괴멸시킨 후,대발해군이 있던 요양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고영창은 금군에 참살당하고 성밖에서 싸우던 5천여 
대발해군들은 성이 함락되어 갈 곳이 없자,장송도의 섬으로 들어가 
계속 요와 항쟁하였다.그 해 7월 춘주에 있던 발해인 2천여호가 
요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곧 진압되었다.
 발해가 멸망한지 190년이 지났지만 발해인들은 떳떳하게 '대발해국'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으며,이런 계승 의식 때문에 나라 멸망 200년 
후에도 '발해인'으로써 고려로 내투한 것이다.




-인용한 글-

1)[발해사] -이론과 실천- 박시형 지음.송기호 해제 p.264.
김일성 종합 대학 출판사.1979. )

2)[발해사] -이론과 실천- 박시형 지음.송기호 해제 p.288.
김일성 종합 대학 출판사.1979. )

3)[발해의 대외 관계사].한규철 저.새롬서원.p.261.1994.

4)[발해사] -이론과 실천- 박시형 지음.송기호 해제 p.308.
김일성 종합 대학 출판사.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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