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19일 금요일 오후 04시 55분 58초 제 목(Title): 도정일의 신화읽기 7 근친상간, 양성(兩性) 존재, 그리고 괴물 도정일 1. 혼돈의 질긴 목숨 그리스 신화가 천지 생성의 출발점에 혼돈(Chaos)을 설정하고 있는 동안 세계 여타 지역의 창조서사들에서 혼돈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었는가? 흥미롭게도, 아프리카, 아시아, 북미 지역 신화들이 혼돈을 그려내는 방식은 대체로 그리스 신화의 혼돈 묘사와 유사하다. 그것은 형상, 분화, 차이, 분별의 부재 상태이며, 질서의 제로 포인트이다. 창조 또는 생성이라는 대사건의 발생 순서에 대한 서술도 극히 유사하다. 혼돈의 몸뚱어리에 (1)어느 순간 최초의 떨림, 꿈틀거림, 진동이 발생하고 (2)그 진동으로부터 천지가 만들어지며 (3)그 천지에 만물이 생겨난다. 혼돈의 몸뚱어리를 찔러 최초의 꿈틀거림을 있게 한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혼돈과 관계 없이, 혼돈의 외부에 존재한 어떤 지성인가 아니면 혼돈의 내부로부터 자생한, 혹은 혼돈이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갖고 있었던 어떤 신비하고 무의식적인 창조생성의 힘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창조’의 개념이 달라지고 상상력의, 또는 사유의 패러다임이 달라진다는 얘기를 이미 우리는 한 바 있다. 그리스 신화가 상상한 ‘혼돈’은 외부 지성의 개입에 의해 질서 생성이라는 방향으로 움직여간 피동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제 몸뚱어리를 바꾼, 말하자면 ‘능동적 변신’의 모태라는 것을 우리는 지적한 바 있고, 이 신화적 상상력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플라톤이 그 자신의 철학적 창조서사를 만들어냄으로써 신화의 거대한 서사 전통에 도전했던 경위도 이미 우리에게는 구문이다. 질서 생성이 ‘이성적(rational)’ 작업이라면, ‘질서 없음’인 혼돈 속에 그런 이성적 원칙이 내재할 수 없고 따라서 혼돈이 스스로 질서를 만들었다는 신화서사는 합리적 사유의 경계 바깥에서 작동하는 ‘이야기꾼’들의 우화라는 것이 플라톤의 강력한 신화 비판이었다는 것도 이미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다시 혼돈의 상상력으로 되돌아오는가? 미안하지만, 플라톤의 ‘혼돈 죽이기’에도 불구하고, 또 플라톤적 작업을 계승한 근대 서구 이성이 혼돈을 죽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퍼부은 모든 빛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혼돈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혼돈은 왜 죽지 않는가? 왜 그것은 죽은 듯하다가 다시 살아나고, 지치게 긴 세월을 살았으면서도 시빌(Sybil)처럼 “나는 죽고 싶다”고 말하지 않는가? 혼돈에게 모든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그에게 죽음은 단지 죽음의 외양(semblan-ce)이고 모조(模造)이며 되살아남의 반어법이다. 모든 신들이 죽어 자빠진 자리에서 혼돈은 다시 새로운 신들의 세대를 길러낸다. 이 이상한 혼돈, 죽지 않는 혼돈, 죽음을 거부하는 혼돈에 대한 상상력이 아니라면 문학은 무엇일까? 혼돈의 희열과 고통에 대한 상징적 사유가 아니라면 문학이 무엇일까? 신화적 상상력은 혼돈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혼돈의 생존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니, ‘끝난다’라는 말은 옳지 않다. 혼돈이 죽은 적 없듯 혼돈에 대한 상상력도 죽지 않는다. 이야기 할멈 치치나코처럼 신화는 이 죽지 않는 상상력 속에서 혼돈의, 혼돈에 대한, 혼돈을 위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학은 그 이야기들의 후속 세대이다. 이 기나긴 서사 전통 속에서 전개된 혼돈의, 혼돈에 대한, 혼돈을 위한 이야기들에서 우리가 지금부터 추적해보려는 것은 ‘근친상간(incest)’의 주제이다. 신화 시대로부터 비극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 문학의 상상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것은 놀랍게도 이 근친상간의 주제이다. 이 주제야말로 유럽 문학 전반에 걸친, 따라서 현대에 들어서도 여전히 창작, 연구, 이론의 전 분야를 때로는 드러나게, 때로는 암암리에 관통하고 있는 매혹적 모티브라는 사실을 일단 언급해두기로 하자. 그러므로 이 추적 작업은 단거리 질주가 아니라 염소 창자처럼 꾸불대고 미노타우로스의 미로처럼 얽힌, 혼돈 그 자체처럼 길고 컴컴한 길 위에서의 장거리 여행이다. 이 길에 함께 오르는 독자여, 당신과 내가 숨을 고르고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헐떡거리지 않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가 필요하다. 그 우회로는 중국과 이집트이다. 중국 신화에 관한 문헌들 중에 ‘혼돈’을 그려 보이고 있는 주요 기록으로는 단연 『회남자(淮南子)』를 꼽을 수 있다. 『회남자』 「정신편」에 나오는 “아직 천지가 만들어지지 않은 아득한 옛날, 세계에는 오직 형상 없는 깊은 어둠만이 있었다”라는 대목의 ‘깊은 어둠(窈窈冥冥)’은 ‘혼돈’이다. 혼돈에 관한 이 짧은 묘사는 세계 여타 지역 신화들이 그려 보이는 혼돈과 비슷하다. 『회남자』는 이 혼돈 속에서 음양(陰陽)의 두 신성이 한 몸으로 태어나 천지를 만들고, 그런 다음 서로 몸을 분리하여 양신(陽神)은 하늘을, 음신(陰神)은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고 서술한다. 무덤덤하게 읽었을 때, 천지 생성에 대한 이 기술 역시 ‘천지’를 ‘음양’으로 대립시키는 중국판 이항 구조(binarism)말고는 “혼돈에서 분화의 질서가 나왔다”는 얘기란 점에서는 특별히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주목할 것이 없어 보일 때, 그 ‘보일 때’의 외피를 넘어 주목할 것을 발견하는 것이 ‘읽어내기’이다. 『회남자』의 서술에서 주목할 것은 (1)혼돈으로부터 음양의 두 신성이 “한 몸으로 태어나(有二神混生)” 함께 천지를 만들고 (2)그런 다음 두 신성은 “서로 몸이 갈라져 각각 음신과 양신이 되었다(於是乃別爲陰陽)”라는 대목이다. 그리스 신화에서처럼 이 중국 문헌에서도 창조의 지성은 외부로부터 혼돈에 작용한 것이 아니라 혼돈 그 자체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다. 음양 두 신성은 분별과 대립의 논리이면서도 ‘함께’ 혼돈에서 자생한 것이므로 처음부터 두 몸으로 분리되지 않고 한 몸뚱어리로 결합해 있다. 양자는 천지 생성의 다음 단계인 ‘천지 분리’의 시점에 가서야 서로 떨어져 분리된다. 두 대립 원칙의 이같은 원초적 결합상은 중국 창조신화들 가운데 복희와 여와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는 남성/여성 두 원칙의 형상화 원리이기도 하다. 뱀의 몸뚱어리에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는 복희와 여와는 서로 상체만 분리되고 하반신들은 마치 똬리 튼 뱀처럼 함께 얽혀 있다. 두 자웅은 아직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회남자』가 기술하는 혼돈에서나 복희/여와의 형상화에서 중요한 것은 ‘남성 원칙과 여성 원칙의 미분화적 융합’이며, 분리 이전의 이 원초적 융합이 ‘천지를 있게 한 창조의 힘’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의 천지 생성 서사에서도 이 중국 신화적 상상력과의 비교를 의미 있게 하는 어떤 평행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적 혼돈이 어떻게, 어떤 과정을 거쳐 땅과 하늘을 탄생시켰는지 알고 있다. 혼돈의 몸에서 먼저 가이아(땅)가 나오고 그 가이아로부터 우라노스(하늘)가 나온다. 그러므로 하늘을 낳기 전의 가이아는 남성 원칙과 여성 원칙의 미분화적 융합체, 다시 말하면 두 대립 원칙들을 ‘한 몸’에 담고 있는 양성혼재(androgyny)의 모형이며, 이는 『회남자』에서 음양의 두 신성이 “한 몸으로 태어났다”로 기술된 창조 원리와 직접 비교할 만한 유사성을 갖고 있다. 가이아가 ‘하늘을 낳고’ 난 다음에야 천지의 분리, 곧 남성/여성 두 원칙의 분리가 발생했다는 그리스적 상상력도 음양 두 신성이 천지를 만들고 나서야 서로 떨어져 각각 하늘과 땅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회남자』의 분리 서사와 의미론상 동일 구조를 갖고 있다. 여기서 혼돈의 지위는 무엇일까? 그리스 신화에서 양성성의 모형인 가이아가 혼돈으로부터 나온 것인 한 그 혼돈은 이미 그 자체로 양성성의 더 원초적인 모태, 혹은 모순대립물들의 더 거대한 융합체이다. 마찬가지로 중국 신화에서도 음양 두 신성의 ‘혼생(混生)’ 또는 일신(一身) 생성을 가능하게 한 것이 혼돈이다. 두 신성의 혼생을 자웅동주(雌雄同住)라고 한다면, 혼돈은 이 양성성의 더 원초적인 모태이다. 그 자웅동주, 그 양성혼재가 ‘근친상간’의 신화 시학적 원형이다. 근친상간은 분리된 생성의 두 원칙이 분리 이전의 양성적 존재 형식, 곧 자웅동주의 조건을 회복하고 융합을 재연하려는 움직임이다. 재융합할 것이라면 애당초 분리될 이유가 무엇인가? 그 분리는 불가피하다. 원초적 융합상이 분화의 형태로 갈라서는 것은 그 이후에 오는, 또는 와야 하는, 모든 후속 질서의 모델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 갈라섬이 없다면 더이상 어떤 분화도, 구별도, 구별에 의한 질서 확립도 가능하지 않다. 만물 창조는 각기 ‘다른 것들’의 창조이며 이 다른 것들을 각각 ‘다르게’ 하는 것은 차이이고 이 차이 짓기가 질서 확립이다. 따라서 만물 창조는 차이, 구별, 분화의 지속적 실행을 요구한다. 이 실행의 시발점에 있는 최초의 규범적 실행 모델이 두 생성 원리 자체의 분화와 분리이다. 그러나 동시에 생성의 두 원리들은 분리된 뒤에도 만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다시 부단히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분리와 결합’의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는 생성의 원리들이 두 가지 다른 필요성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기묘한 운명에 빠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켠으로는 질서를 위해 분리 명령을 따라야 하고, 다른 한켠으로는 창조의 지속을 위해 결합 명령을 따라야 하는 딜레마이다. 신화적 상상력이 이 분리와 결합의 딜레마를 풀기 위해 고안한 가장 대표적인 형식이 오누이, 어미와 아들, 아비와 딸 사이의 근친 결합이다. 재융합이 근친상간일 수밖에 없는 것은 생성의 두 원칙들이 모두 같은 모태,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이다. 오누이, 어미아들, 아비딸은 모태 동일성 또는 동일 모태 관계를 대표한다. 『회남자』의 음양 두 신이 같은 뿌리(혼돈)에서 나온 존재들임과 마찬가지로 복희와 여와는 한 뿌리에서 나온 오누이들이다. 복희여와가 서로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자웅 결합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자웅이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모태 동일성의 표현이다. 중국 신화에서 인간(중국인?)은 이 오누이로부터 유래한다. 중국판 ‘홍수 설화’에 나오는 두 오누이도 그리스 홍수 설화의 두칼리온피라처럼(이 유사성은 놀라울 정도의 것이다) 홍수에서 살아남고, 결혼하고, 인간의 조상이 된다. 이 설화에서 여동생은 오빠에게 “날 잡아봐. 오빠가 날 잡으면 결혼해주지”라고 말하고 나무 사이로 도망치지만 오빠는 거북이가 일러준 꾀 덕분에 동생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그녀는 결국 잡히게 되어 있다. 우리에게 이미 친숙한 말레이 피그미 족의 창조설화에서도 두 오누이의 결합으로부터 인간이 유래한다. 이 일련의 설화들에서 오누이는 동시에 부부이다. 이 대목에서, 오시리스와 이시스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스 신화의 어떤 존재 못지않게 유럽 문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이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이시스(Isis)이다. 그들도 오누이 부부이다. 둘은 태양신 라(Ra)의 아들딸, 혹은 ‘하늘과 땅’의 아들딸이다. 늙은 태양신은 아들 오시리스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딸 이시스와 결혼시켜 이집트를 다스리게 한다. 둘은 비옥한 나일 계곡을 관장하면서 인간들에게 먹을 것과 문명과 법을 가져다준다. 다른 기회에 상론할 틈이 있겠지만, 오시리스는 구체적으로 ‘옥수수’의 신(생각할 거리―“왜 고구마의 신은 없고 옥수수의 신, 포도의 신은 있는가?”)이기도 하고 이시스는 사랑, 번식, 풍요의 여신이면서 죽은 자를 살리는 ‘소생 마술’의 여신이기도 하다. 오시리스가 죽은 자를 관장하는 하계의 신으로도 등장하는 것은 그가 한 번 살해되었다가 아내 이시스의 힘을 빌려 소생했기 때문이다. 오시리스이시스 신화의 이 부분은 중요한 것이어서 잠깐 소개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두 신에게는 세트라는 이름의 성질 나쁜 또다른 남자 형제가 하나 있었는데, 오시리스가 권력을 승계하게 된 것을 질투한 세트가 형을 유인해다 살해하고 시신을 여러 조각으로 토막내어 강에 내다버린다. 이시스는 오빠이자 남편인 오시리스의 시신 조각들을 수습하여 온전한 형체로 복원하고 생명을 다시 불어넣고자 하지만 시신의 중요한 한 부분을 영 찾을 수가 없다. 그 상실된 부분은 ‘페니스’이다.(시신 파편들이 강물에 떠내려가는 동안 물고기들이 그 부분을 따먹어버렸다는 얘기가 있다.) 이시스 여신은 진흙과 침으로 남근을 만들어 남편의 시신에 붙이고 코에 숨결을 불어넣어 죽은 오시리스를 소생시킨다.(‘오시리스 축제’의 모티브를 이루는 이 죽음과 부활, 생식 능력의 상실과 회복은 말할 것도 없이 옥수수의 운명과도 관계 있다. 그것은 쉽게는 옥수수의 죽음과 소생이고 조금 더 복잡한 상징성을 추구할 때 오시리스의 남근 상실은 옥수수의 사라짐―물고기 아닌 인간이 따먹어야 하므로―을, 그리고 이시스의 마술은 그 없어진 옥수수의 영원한 순환적 소생 질서를 상징한다. 유럽인의 상상력이 오시리스이시스에 매혹된 이유 하나는 오시리스가 늘 제 몸을 죽여 인간을 먹여 살리는 ‘희생의 신’이고 이시스는 그 죽어 없어진 것을 되살려 있게 하는 소생의 신, 특히 ‘남성 재생의 여신’이기 때문이다.) 오시리스와 이시스 사이에 아들 호루스가 태어나고 이 호루스가 이집트인의 조상이 된다. 이집트에서 다시 그리스로 갈 때, 올림포스 신들이 탄생하기까지의 역대 계보는 근친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우스와 그 아내 헤라는 오누이간이고, 이들의 부모 세대인 크로누스레아도 오누이이자 부부이다. 이 근친 결합의 전통은 이미 우리가 보았듯 가이아에까지 거슬러올라간다. 가이아는 아들 우라노스(하늘)를 낳고, 그 아들을 취해 남편을 삼는다. 이들의 관계는 그러니까 복잡하다. 우라노스는 가이아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가이아는 우라노스의 아내이자 어미이다. 이 근친 교합 관계는 매세대에서 되풀이된다. 제우스의 대에서 일단 정지하는, 그러나 없어지지는 않는, 그리스 신화 특유의 강력한 ‘반란 전통’에서도 어미가 아들과 작당하여 남편을 거세하는 반복적 모자(母子) 동맹의 패턴 역시 일종의 근친간적 관계이다. 제우스는 근친 결합의 존재일 뿐 아니라,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계의 여자들을 상대로 씨를 뿌리고 다니는 위대한 ‘파종자(disseminator)’이고 번식자이다. 근친상간과 간통은 그에게 창조의 형식이자 번식의 방법이다. 신화적 상상력은 신들에 의한 창조 행위를 지속시키기 위해 근친상간의 공식을 고안하고 이로써 분화와 결합의, 또는 질서와 창조의 두 명령을 충족시키지만 이 해결 방식은 한 가지 딜레마를 푸는 대신 또하나의 심각한 딜레마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계에도 근친상간을 허용할 것인가? 신들은 창조와 번식을 위해 근친 교합의 수단에 의지한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이 질문이 심각하게 대두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 자신의 번식을 책임지게 되면서부터이다.(신들은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진흙 공사로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땅에서 솟았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최초의 조상이 땅에서 솟은 것이지 그 이후의 인간 세대가 매번 땅에서 기어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 신들은 인간(이 단계의 ‘인간’은 남자이다)에게 인간 번식의 권리를 양도하는데, 신화에 ‘여자’가 등장하는 것은 이 ‘재생산(번식)의 권리와 책임’이 인간에게로 양도되는 순간이다. 번식(procr-eation)도 창조의 한 형태이므로 인간이 번식권을 인수한다는 것은 곧 생명 창조권을 상속하는 일이기도 하다. 여기서 딜레마의 첫 국면이 전개된다. 신들의 창조 행위가 자웅동주로부터 출발하고 근친상간의 형식으로 계속되었다면, 이 형식은 인간에게도 허여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허용될 경우 인간계에서 구별의 질서를 유지할 길은 없다. 근친상간은 정확히 구별과 차이의 무화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오누이 결합의 경우 아내는 아내이자 동시에 동생이고 남편은 남편이자 동시에 오빠라는 이중성(duality)을 갖는다. 이 이중성은 이미 차이 소멸이며 차이 소멸은 혼란, 곧 반질서이다. 근친 교합의 결과로 태어나는 후손들도 자신을 ‘누구’라고 명확히 정의할 수 없는 괴물성을 승계한다. 그러므로 질서를 위해 인간계에서의 근친상간은 금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을 금지했을 때 인간들이 순순히 복종할 것인가? 이미 창조의 권리를 승계한 인간이 그 창조의 주요 형식인 자웅동주와 근친 결합을 포기할 것인가? 그 형식들을 금지시킨다는 것은 인간에게 한켠으로는 창조권을 주면서 다른 한켠으로는 창조의 원형에 접근할 수 없게 하는 일이 아닌가? 더구나 그 금지는 창조의 모태인 가이아(땅, 자연)와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는가? “우리는 신들을 모방한다”고 인간들이 주장하고 나서면? 신들이 근친 결합/자웅동주의 금지를 인간계의 ‘법’으로 선포한다 하더라도 인간들은 따지고 달려들 것이 틀림없다. “어째서 신들의 세계에는 허용된 것이 우리에게는 법으로 금지되는가?” 신들은 지키지 않는 법을 인간은 지켜야 하는가? 그리스 신화는 창조의 문제에 얽힌 이런 딜레마를 지속적 화두로 유지하고 그 해소를 위해 상상력의 집중적 투입을 계속한다는 점에서 세계 여타 지역의 신화들과 구별된다. 물론 그리스 신화가 근친상간/양성성에 얽힌 딜레마를 풀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 특이한 신화 체계는 딜레마 해소를 위해 많은 상상력을 투자하고 온갖 이야기를 지어내면서도 딜레마를 여전히 후속 세대의 문제로서 부단히, 늘 다시, ‘제기’한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 신화의 힘이 딜레마 해소에 있지 않고 해소의 실패―딜레마를 미결의 문제로 살려놓는 능력에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모태로서의 혼돈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유, 창조가 아직도 계속되는 이유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리스 신화가 사회적 딜레마를 해소하고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또는 그 확립에 봉사하기 위해 공급한 형벌의 이야기부터 먼저 다루는 것이 좋다. 그것은 근친상간, 양성존재, 괴물을 죽이거나 처벌하는 이야기, 플라톤처럼 신화가 혼돈을 죽이는 이야기이다. 2. 문법 위반―그 형벌과 고통 그리스 신화가 자웅동주(양성혼재)와 그 파생 형식으로서의 근친상간에 대한 금지 명령을 사회적 문법으로 확립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금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경주한 서사적 노력은 화려하다. 여기서 사회적 딜레마란 신들의 세계에서 허용되는 것을 인간의 세계에서는 어떻게, 무슨 구실로 금지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신화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매우 철저하게 그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다. 그 문제를 푸는 데 동원된 중요한 공식의 하나는 인간계를 신들의 세계와 동물 세계 사이의 ‘중간 거리’에 위치시킨다는 것이다. 신들의 세계가 하나의 극단이라면 동물계는 또하나의 극단이다. 인간은 이들 두 극단과 일정 자질을 나눠 갖지만 그러나 두 극단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중간 존재이고, 따라서 그가 거처하는 곳은 상계도 하계도 아닌 중간 지대이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고유한 ‘한계(limit)’이며 이 한계를 지키는 것이 인간의 ‘도덕’이고 ‘지혜’이다. 도덕은 극단의 회피이며 이 극단 회피의 능력이 지혜이다. 인간이 중간 존재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신들의 세계를 넘보거나 아래로 내려가 동물계에 빠지는 것은 존재의 문법을 어기는 중대한 ‘위반’이다. 위로 신들의 세계를 향해 기어오르는 것은 ‘오만(hubris)’이고 동물계로 하강하는 것은 ‘타락’이다. 신들은 이 두 가지 위반의 어느 것도 용서하지 않는다. 위반은 처벌되고 그 처벌은, “중간을 날아라”라는 아비 다이달로스의 당부를 무시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다 날개가 녹아 떨어져 죽는 이카루스의 경우처럼, 종종 죽음의 형태로 찾아온다. 인간의 구역을 전체 세계의 중간에 위치시키는 이 공식은 말할 것도 없이 근친상간의 문제에 대한 해법이기도 하다. 근친상간은 위로 신들의 세계에서, 그리고 아래로는 동물의 세계에서 허용되어 있다. 따라서 인간계가 근친상간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위로는 신들의 구역을 넘보는 오만이고 아래로는 동물계로 내려앉는 타락이다. 근친상간의 순간에 인간은 자기 한계를 넘고 질서를 어긴 범법자, 괴물, 오염 존재가 된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와의 근친상간 관계를 알고 난 다음 자신을 부단히 ‘괴물(monster)’로 규정한다. 그는 질서를 어김으로써 인간이면서 짐승인, 그러나 동시에 그 어느 것도 아닌, 더럽고 추악한 괴물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괴물이 되었다”라는 것이 그의 도덕적 죄이다. 그가 아비를 죽인 행위는 ‘모르고’ 저지른 정당방위라는 점에서 용서받을 만하다. 그러나 근친상간을 저지름으로써 신들의 세계를 넘본 오만과 동물계로 내려앉은 타락은 용서될 수 없는 도덕적 범죄이다. 구별의 질서를 깨고 위협하는 반사회적 존재, 오염원, 괴물로 자신을 규정한 오이디푸스는 죽음 대신, 그러나 의미론상 죽음과 다름 없는, ‘공동체 떠나기’의 형벌을 스스로 선택한다. 인간계의 근친상간이 반드시 죽음 등의 형벌로 끝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스 신화는 위반자의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들을 부지기수로 만들어내어 공급한다. 그 형벌은 당대에 끝나지 않고 결합의 소생들에게까지 연장된다. 아비 시니라스를 사랑하고 그를 속여 상간을 저지른 젊은 처녀 미라는 몰약나무로 바뀌고, 그 결합의 결과인 아도니스는 몰약나무 껍질을 뚫고 태어나지만 그 아도니스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도 죽고 맏딸 안티고네도 죽는다. 근친상간의 내력을 가진 괴물 스핑크스도 죽는다.(스핑크스가 다른 사람 아닌 오이디푸스의 손에 죽는다는 이야기는 신화적 상상력의 절묘하고도 복잡한 상징적 아이러니를 구성한다. 근친상간의 운명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인물이 근친상간의 결과물인 혼합 괴물 스핑크스를 처치한다.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 자신의 거울 이미지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바로 너다”라는 것이 스핑크스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이 대목 이야기는 지금 여기서의 몫이 아니다. 헐떡이지 말고 남겨두자.) 근친상간에 부여되는 이 괴물성의 공식은 그리스 신화(그리고 비극)에서 괴물과 괴물의 죽음이 지니는 중요한 상징적 차원 하나와 연결되어 있다. 이미 우리가 테세우스의 미노타우로스 처치 장면에서 다루었듯, 괴물의 괴물성은 정확히 이질대립모순적 성질들을 한데 뭉친 혼합성(hybridity) 또는 혼재성에 있다. 반인반수의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황소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듯이, 괴물이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이것이면서 저것이다”. 이 이중적 혼합성 때문에 괴물은 정의(定義)되지 않으며, 괴물이 구현하는 혼합성은 차이와 구별을 없애는 ‘무화(無化)의 모형’이 된다. 여기서 괴물의 괴물성과 근친상간의 괴물성이 연결된다. 아니, 연결되는 정도가 아니라 양자의 괴물성은 동일한 것이다. 근친상간도 차이와 구별의 무화이다. 오이디푸스는 어머니이자 아내인 요카스타에 대하여 남편/아들 어느 쪽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그의 혼합성은 구별의 경계선을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이 혼합성의 또다른 형태가 양성존재(androgynes)이다. 그리스적 상상력이 그려낸(이 상상력의 뿌리는 지금까지 보았듯 사회적 딜레마에 박혀 있다) 대표적 양성존재는 플라톤이 『향연』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통해 소개하는 양성인간(hermaphrodite)―곧 남성과 여성이 자웅동거의 형태로 한 몸에 뭉쳐 있는 인간 모형이다. 이 양성인간이 어떤 운명을 걷게 되었는가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이다. 양성을 합친 이 인간은 힘이 세고 앞뒤를 동시에 보고 몸이 원형이어서 빠르게 이동한다. 이 힘과 능력은 신들의 권능에 대한 도전, 위협, 오만이며 이는 신들의 분노를 사기에 족하다. 제우스는 도끼로 양성인간을 쪼개어 남자/여자로 항구하게 갈라놓는다. 근친상간의 괴물성과 괴물의 괴물성이 처벌되듯이, 양성존재의 혼합적 양성성도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괴물들은 죽어야 한다.(후일 플라톤 서사를 발전시켜 ‘양성존재의 신(Hermaphroditus)’을 만들어낸 것은 오비디우스이다. 그러나 이 신의 운명도 무사하지 않다.) 이상의 논의들을 일단 정리하면 우리는 혼돈, 양성존재, 근친상간, 괴물은 그리스 신화에서 사실상 동일한 상징적 은유적 패러다임(유사 의미 집단)을 구성하고 있고 이 유사성의 가족 구성 단위들 중에 단연 원초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혼돈’이라는 그림을 얻을 수 있다. 이 패러다임의 구성소들은 분할과 분리 아닌 융합의 모델이며, 이 융합성은 상반성, 대립성, 모순성을 함께 끌어안고 있고 바로 그 이유로 형벌, 제거, 죽음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무수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그 패러다임은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혼재와 융합의 형식을 통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힘의 기원으로 작동한다. 융합성의 시각적 은유는 플라톤의 양성존재에서 보듯 흔히 둥근 어떤 것, 원이거나 알이다. 가이아는 가끔 ‘거대한 알’로 이해되기도 한다.(한반도에도 전해지는 난생 설화의 ‘알’은 이 관점에서의 해석이 가능하다. 그 알에서 깨어나는 것은 언제나 남자아이지만, 그를 탄생시키는 알은 양성 원칙의 융합태이다. 신화적 양성태인 알이 제시됨으로써 아이의 현실적 기원으로서의 아비어미는 사라지고 대신 알이 기원으로서의 신비한 권위를 획득한다. 여기서 알의 기능은 아이의 기원을 밝히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데 있다. 신비화는 분명 알의 기능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일을 가능하게 하는 기능도 갖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가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에 나오는 놀라운 ‘혼돈’ 이야기 한 편에 주목하고자 한다. 원가(袁珂)의 『중국신화전설 I』(전인초·김선자 역, 민음사, 1992)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고 서구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이 짧은 이야기는 “남해의 천제를 숙이라 하고 북해의 천제는 홀이라 하며, 중앙의 천제는 혼돈이라 한다”로 시작된다. “숙과 홀은 자주 혼돈에게 놀러 갔는데, 혼돈이 그들을 대접하는 것이 매우 은근하고도 치밀하였다. 어느 날 숙과 홀이 어떻게 하면 혼돈의 은덕에 보답할 수 있을까 하고 의논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모두 다 눈, 코, 귀, 입 등 일곱 개의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음식을 먹고 하는데, 혼돈에게는 구멍이 하나도 없으니 뭔가 부족함이 있지. 우리가 가서 그를 위해 구멍을 몇 개 뚫어주는 것이 어떨까.’”(위의 책, 142쪽) 그렇게 해서 숙과 홀은 도끼, 끌 등을 갖고 가 혼돈에게 하루 하나씩 이레 동안 구멍 일곱 개를 뚫어준다. 그러나 친구들이 구멍을 뚫어주자 오히려 “혼돈은 죽어버린다”. 『중국신화전설』의 저자 원가는 이 이야기를 ‘익살스런 얘기’라 소개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익살이 아니다. 그게 장자의 독창인지 아니면 그가 어디서 수집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메시지의 비판성에 주목하면 아무래도 그것은 장자의 풍취를 물씬 풍기는, 장자다운 이야기이다. 그것은 혼돈(자연, 야성)을 살려두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신랄한 도가적 비판을 담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강한 매력은 그것이 한켠으로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야기들(위에서 본 형벌의 이야기 같은)을 공급하면서도 그 사회적 기능의 수행만으로 끝나지 않는, 그래서 혼돈의 이상한 힘을 살려두는 다른 많은 암시들도 제공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하나의 목소리로만 말하지 않고 다른 목소리로도 말한다. 많은 경우 이 ‘다른 목소리’는 때로는 명시적 이야기의 형태로, 때로는 암시와 상징과 모티브로, 이야기의 표층 밑에 감추어진 복화술의 형태로, 부단히 고개를 내밀어 표층 질서를 위협하고 전복한다. 그리스 신화는 딜레마를 한편으로 해소하면서 한편으로는 해소하지 않는다. 후대의 문학적 상상력이 자극되는 것은 바로 그 해소되지 않는 지점, 해소가 거부되는 지점들에서이다. 우리가 혼돈에 주목하는 이유도 거기 있다. 혼돈을 살려두지 않고서는 창조적 상상력은 말라비틀어지고 문학은, 장자의 혼돈처럼, 죽어버린다. 문학은 인간세계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신과 동물의 세계로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으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 노력은 오만도 타락도 아니다.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와 가장 낮게 내려갔을 때, 그 두 극단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고 만나는가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 문학의 충동이다. 이 충동 때문에 문학은, 그리고 예술은, 부단히 창조의 원초 형식으로 되돌아가 융합을 재연코자 한다. 그것이 창조의 희열이고 예술의 즐거움이다. 창조를 배태하는 그 융합상의 원초적 형태를 혼돈이랄 때, 혼돈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다.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