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14일 일요일 오후 06시 54분 32초 제 목(Title): 말/이재봉 북한 신천박물관 관람기 제 목 : ‘반미주의’연구 학자의 북한 신천박물관 관람기 “이럴 수가…” 믿기지 않는 충격의 기록 현재 북한 외교정책의 핵심은 ‘통미봉남(通美封南)’이라 지칭된다. 혹자는 이 를 두고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이 친미국가로 변모하고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북 한의 ‘반미’는 이데올로기로만 무장된 것이 아니다. 이재봉│원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지난 10월 초 북녘을 일주일간 방문해 북한 반미사상의 상징처럼 돼 있는 황해 남도신천박물관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 유학 10년 동안 ‘남한의 반미주 의’를 주제로 석사 및 박사학위 논문을 쓴 나로서는 북한의 반미주의의 역사와 현실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하지만 내가 신천박물관을 찾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용기가 필요했다. 당초 방북 목적은 전라북도 함경남도의 도시간, 대학간 자매결연 추진. 개인적인 관심사로 금수산기념궁전이나 신천박물관 등도 둘러보고 싶었다. 그러나 문규현 신부가 금 수산기념궁전에 들렀다가 구속된 사례도 있었고, ‘방북목적에 벗어나는 짓은 하 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방북승인서를 받을 수 있었던 터라 겁 많은 아 내는 옥바라지 할 자신없다며 극구 말렸다. 학교에서도 교수 한 사람 다시 뽑는 번거로움은 피하고 싶다는 농담으로 은근히 우려를 표명했다. 남북 양쪽 당국으로부터 받은 호의 그러나 북한사회 및 통일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흔치 않은 기 회를 놓칠 수 없었다. 김일성 주석이 태어났다는 만경대와 그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 등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를 어떻게 신격화하는지 확인하고 싶 었다. 교회와 사찰도 둘러보고 싶었다. 북한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화시설이나 혁명사적지 등을 방문해 예술이나 역사를 통해 사상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피부로 느껴 보고 싶었다. 짧은 일정이었지만 이 밖에도 직접 눈으로 보고, 듣고, 만나고 싶은 것들이 참으로 많 았다. 고심 끝에 관계 당국에 팩스를 보냈다. 그 취지를 충분히 설명하고 협 조를 구했다. “조심하라”는 단서가 붙긴 했지만 긍정적인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북쪽에서 도 적지 않은 배려를 해 주었다. 방북 한 달 전쯤 초청자인 조선아태평화위원회 에서 미리 제시한 체류 일정은 평양 2일, 금강산이나 묘향산 3일, 함흥 2일이었 다. 이에 나는 관광하러 방북하는 게 아니니 금강산이나 묘향산 일정은 빼고 자 매결연 대상인 함경남도 전역을 둘러볼 수 있도록 일정을 고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나의 새로운 요구까지 대부분 받아 주었다. 또한 다른 어떤 것도 강요하 지 않았다. 결국 남북 양쪽 당국으로부터 허락을 받고 보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나와는 정 반대의 대우를 받았던 ‘이중간첩’ 김낙중 선생이 떠오른 것이다. 북쪽에 가서 는 남조선에서 보낸 간첩으로 오인받아 감금당하고, 남쪽에 돌아와서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찍혀 감옥을 드나들게 되었던 선생. 마침 내가 방북하기 전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몫까지 통일운동을 해 달라고 부탁했으니……. 피카소가 고발했던 신천 양민학살 1980년대 말 미국에서 세계 각국의 반미주의에 관한 자료를 뒤지다가 미군들의 신천학살에 관한 신문기사를 처음으로 접했다. 1950년 10월, 38선을 넘은 미군들 이 황해남도 신천에서 52일 동안 머물며 당시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무고한 양민을 잔인하게 죽였는데, 그러한 ‘미제의 만행’을 기록한 박물관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1990년대 초에는 문학 예술 분야의 반미 관련 자료를 모으다가 신천 양민학살을 주제로 피카소가 1951년에 그렸다는 작품을 사진으로 보게 되었다. 조선에서 의 학살 (The Massacre in Korea)이란 제목이 붙은 이 유채화는 군인들이 벌거 벗은 임산부들과 아이들에게 총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한 국판 「게르니카」였다. 미술평론가인 윤범모 교수는 1989년 펴낸 반핵과 미술 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면서 재미있는 일화를 곁들였다. 1960년대 중반 어린이 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피카소 크레파스’가 어느 날 갑자기 판매금지 처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가 빨갱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994년 귀국해 보니 어디를 가든 피카소 미술학원이 유난히 눈에 많이 띄었다. 1995년 광주 비엔날레에서 피카소 특별초대전이 열린다고 해서 혹시 그 원작을 볼 수 있을까 싶어 경주에서 4시간이나 달려갔지만 허사였다. 1996년 에는 사회학자인 강정구 교수가 분단과 전쟁의 한국현대사 를 펴내며 표지에 그 그림을 실어 놓았다. 아무튼 30년 사이에 세상이 크게 변했다고 할까. “미군, 생화학 무기도 사용했다” 이제 신천으로 가 보자. 박물관에 들어서니 김병호 관장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1945년 신천 태생이라니 다섯 살 때 미군들의 만행을 지켜보았던 사람이다. 8년 째 일한다는 김광순 강사가 안내를 맡았다. 조그만 박물관에 강사가 13명이나 된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가 물었더니 하루 평균 3~4천명이 란다. 그들이 말하는 ‘조국해방전쟁의 날’ 6월 25일부터 ‘전승절(戰勝節)’ 7월 27일까지의 반미반제 기간에는 매일 1만명씩 찾는다고 했다. 평양에서 두 시간 거리의 조그만 군청소재지를 매일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게 믿기 지 않았지만 곧 의혹이 풀렸다. 내가 그 곳에 도착한 때는 10월 7일, 수요일 오 전이었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었고, 또 일군의 관람객들이 광장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강의를 듣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박물관은 건물 두 채로 이루어졌다. 제1관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로동당 신천군 당위원회 청사였다가, 1950년 10월부터 신천지구 주둔 미군사령부로 바뀌어 ‘대 중학살의 본거지’가 되었던 건물이다. 1958년에 박물관으로 꾸며 문을 열었단 다. 전시실은 한마디로 “미제 침략자들이 신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잿더미 속에 파묻으라고 지껄이면서 1950년 10월 17일부터 12월 7일까지 52일 동 안 신천군 주민의 4분의1에 해당하는 3만5천3백83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가장 잔 인하고 야수적인 방법으로 학살하는 천추에 용납 못할 귀축 같은 만행을 감행했 다”는 사실을 온갖 자료들을 통해 보여 주고 있었다. 9백여 명의 무고한 인민들을 강제로 방공호에 몰아넣은 뒤 공기구멍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 학살했다든지, 수많은 여성들을 온천휴양소에 붙잡아다 놓고 농락 한 뒤 연못에 빠뜨리고 수류탄을 던져 무참히 죽였다든지, 1천2백여 명의 주민 들을 얼음창고에 감금해 놓고 1주일 동안 개를 풀어놓아 물어뜯게 한 뒤 휘발유 를 뿌리고 수류탄을 던져 학살했다든지, 어느 노동자의 두 다리를 두 달구지에 각각 걸어 놓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소를 몰아 학살했다든지 하는 ‘차마 그랬을 까’ 싶을 정도로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자료가 있었다. “미군들의 만행에 항거하다 희생되었 다는 리헌수 소년”에 관한 자료였다. 구탄인민학교 소년단위원장이었던 그가 미 군들에 반대하여 싸우다 죽으면서도 피로써 지켜냈다는 인공기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그의 모교를 ‘리헌수중학교’라 고쳐 부르 기로 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야말로 ‘북녘판 이승복’이었다. 제2관은 지난 9 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50주년을 맞아 문을 열었다. 제1관이든 2관이든 남한 학자로는 처음이라 했다. 이 신관에서는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미제의 야만적인 세균전 화학전만행’을 고발하는 자료와 기록들이 전시돼 있었 다.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우리 남쪽에서는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몇몇 진보적 학자들만이 미국의 화생방무기 사용의혹을 제기하는 수준이기 때문이었 다. 그 옆의 전시실에서는 ‘남반부 인민들에 대한 미제와 남조선 괴뢰들의 학 살 만행’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제주 4 3항쟁, 4월혁 명, 5 16쿠데타, 광주항쟁 등에 관한 자료에 이어 오연호 기자가 『말』 1988년 11월호에 쓴 주한미군범죄에 관한 기사도 전시돼 있었다. 줄 잇는 관람객, 원초적 반미감정 뿌리 깊어 박물관에서 약 1km 정도 벗어나 부녀자들이 무더기로 희생되었다는 현장을 찾 았다.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1950년 12월 초순 어느 날, 살인마 해리슨 놈은 어머니와 어린이가 같이 있는 것은 너무도 행복한 일이라고 지껄이면서 어머니들과 어린이들을 두 개의 창고 에 각각 따로 가두어 어머니들은 간이 타 죽고, 어린이들은 애가 타 죽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해리슨 놈의 명령에 따라 미제 승냥이들은 어머니들과 어린이들을 두 개의 창고에 갈라넣었으며 나중에는 창고 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4 백명의 어머니와 1백2명의 어린이를 무참히 학살하였다.” 희생자들의 묘소를 둘러보는 동안 먼저 왔던 수십 명의 인민학교 학생들이 선생 님의 인솔로 들판을 가로질러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옳든 그르든, 또는 바 람직하든 않든, 저런 식으로 북녘 사람들의 골수에는 반미사상이 사무치게 되리 라. 박물관 팜플렛에 나와 있듯이 신천박물관은 북녘 사람들에게 “실로 산천초 목도 원한에 사무쳐 분노에 떠는 신천은, 천추만대를 두고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미제침략자들의 천인공노할 죄행을 력사의 심판대에 제소하는 증언자로서 미제의 침략적 본성과 극악무도한 야수성을 만천하에 고발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북녘 주민들이었다는 최장집 교수의 논문구절에 대해 요즘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계층은 무슨 빨갱이 같은 소리냐며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미군 조종사들이 더 이상 폭격할 목표물을 찾지 못할 정 도였다면, 한국전쟁 중에 북쪽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으리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 할 것이다. 작년에 어느 정치학회에서 한 학자가 북미관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북한 이 냉전종식 이후에는 친미 국가로 변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속된 표현으 로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대꾸한 적이 있다. 북한이 이른바 ‘통미봉남 (通 美封南)’ 외교를 펼치는 것을 굳이 친미라고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 정치행위로 써 당국자들에 의한 외형적이고 도구적인 ‘친미’라고 보여진다. 신천박물관 은 북한에서의 ‘반미’가 이데올로기로 무장된 ‘반미’만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다. 북한 사람들은 그들이 ‘학살자’라고 부르는 이들에 대한 ‘원초적’분노 를 가지고 있었다. 이재봉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에서 정치학과 평화학을 연구, 강의하고 있다. 특 히 통일문제와 평화연구에 관심을 갖고 주로 미국의 대외정책과 남북관계에 관 한 글을 발표하며, 북녘동포돕기운동 전북본부 연구위원 및 경실련 통일협회 정 치분과 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 정기구독 문의는 02) 711-2552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