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7일 일요일 오전 01시 40분 34초 제 목(Title): 강준만/조지 소로스를 위한 변명 '환 투기꾼' 조지 소로스를 위한 변명/강준만 소로스의 '두 얼굴' "소로스는 자본주의의 악마." "소로스는 수치를 모르는 부도덕한 자." "소로스는 환 투기를 통해 아시아인들의 고혈을 빨아 먹고 있다." '아시아의 대변인'을 자처하는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가 국제적인 '환 투기꾼'으로 악명이 높은 조지 소로스를 향해 퍼부은 독설들이다. 이젠 마하티르의 측근들까지 나서서 "소로스가 아시아 경제에 저지른 짓은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에서 저지른 것과 같다"며 "소로스도 히틀러와 똑같은 최후를 맞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는 등 독설의 강도는 나날이 세지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소로스의 자선 사업에 대한 칭송의 소리도 높다. 환 투기꾼과 자선 사업가! 조지 소로스는 그렇게 '두 얼굴'을 갖고 있다. 그게 어떻게 양립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소로스의 자선 사업을 환 투기를 해서 좀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 전략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좀더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지난 1995년 5월 {조지 소로스의 핫머니 전쟁}(동녘, 260쪽, 6천 원)이라는 책을 펴낸 문화일보 박태견 기자는 좀더 정교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소로스의 실체는 무엇인가. '박애주의자'인가, 아니면 '침략자'인가. 이 물음에 대한 명답이 있다. 동구권 붕괴 후 러시아, 폴란드 등의 대통령 경제 자문역으로 오랜 기간 동구권의 시장 경제 도입에 깊게 관여하여 소로스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미국 하버드대학의 경제학 교수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는 소로스의 자선 행위를 '자선금이라는 이름의 투자'라고 정의한다. 삭스 교수는 평소 소로스가 '많이 쓸수록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특유의 투자 이론, 이른바 리플렉시버티(Reflexivity) 이론에 따라 행동해 온 점을 주목하라고 말한다. 소로스는 자선금이라는 이름으로 인적 자원에 투자하여 장차 자신에게 도움을 줄 충실한 동구권 지도자 그룹을 형성하려 한다는 것이 삭스 교수의 지적이었다."(66쪽)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나는 삭스 교수의 진단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진단만으론 불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삭스 교수의 진단은 너무 단순화돼 있다. 좀더 복잡한 그 무엇인가가 소로스에게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를 어떻게 평가하건, 누구나 다 동의하겠지만 그는 매우 희한한 사람이다. 매우 희한한 만큼 그의 '두 얼굴'도 좀더 희한한 분석의 대상이 될 가치가 있지 않을까? 평소 소로스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 오던 중이었는데 이번에 소로스의 저서가 번역·출간되었다. 형선호씨가 번역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열린 사회를 향하여}(김영사, 1998년 12월, 331쪽, 8천9백 원)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속된 말로, 환 투기꾼 주제에 이렇게 폼을 잡아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과 더불어 그의 정체가 더욱 긍금해지는 것이었다. 이 책을 번역한 형선호씨가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게 흥미롭다. "나는 소로스가 뛰어난 통찰력으로 국제 시장에서 큰 돈을 번 사람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일종의 '투기꾼'이라는 말을 했다. …… 그런데 그가 이 책에서 얘기하는 철학적, 사회적, 혹은 도덕적 가치관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어떤 학자의 글에서보다 (학자가 아닌) 소로스의 이 책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소로스는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가 아니면서도 철학, 사회학, 혹은 경제학에 대해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 '놀라운 통찰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소로스 나름대로는 제법 세계 질서와 경영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 왜 그런 사람이 어떤 사람들로부터는 '악마'라는 소리까지 듣느냐 이 말이다. 소로스가 그 '악마'짓을 더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 차원에서 이 책을 냈다고 보기엔 이 책에 담긴 메시지가 매우 진지하고 심각하다. 그래서 좀 어렵기도 하고 또 그래서 재미가 없기도 하다. 사람을 시켜서 쓴 것 같지도 않다. 아니 사람을 시켜서 썼다 하더라도 소로스가 몇 년 전부터 해 오던 이야기가 이 책에 잘 정리돼 있어 이 책의 메시지는 '이미지 메이킹' 이상의 것이라는 걸 의심하긴 어렵다는 말이다. 소로스는 지금 세계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그 원인은 바로 끝을 모르고 팽창하는 금융자본, 한계를 벗어난 자유시장 제도, 그리고 통제력을 잃은 국제 금융 기구 때문이란다. 그는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이른바 '시장 근본주의'를 공격한다. "공산주의는 시장의 기능을 무시하고 모든 경제 활동에 집합적인 통제를 부여했다. 반면에 시장 근본주의는 집합적인 결정을 무시하고 모든 가치들에 시장의 우월성을 부여한다. 이 둘 모두 극단적인 태도로서 잘못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와 시장의 균형, 즉 규칙을 만드는 것과 규칙에 따라 움직이는 것 사이의 균형이다." 앞으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소로스는 '규칙'을 강조한다. 나는 그것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얻기 위한 소로스의 도피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좀 단순화해서 이야기를 쉽게 풀어 보자. 내 해석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소로스가 어떤 인물인지 그걸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드리기 위해 우리 나라 이야기를 좀 해 보자. 도덕과 양심에 의존하는 시스템이 문제다 독자들께서는 내가 부동산에 투자를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게 '투자'인지 '투기'인지 그건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나는 과거에 "좋은 부동산이 나왔으니 빚을 내서라도 이걸 꼭 사 두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그러한 권유에 응하지 않았다. 그 권유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투자든 투기든 돈을 늘릴 목적으로 지금 당장 쓸 데도 없는 부동산을 사 둔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영 내키지 않아서였다. 우리는 주변에서 이런 따위의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때 그걸 사 두었더라면 지금 내가 수백억 또는 수십억 부자가 되었을 텐데!" 나 역시 그랬다. 그때 그 권유자의 말을 들었더라면 수십억 돈방석 위에 앉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동네 부자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다.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지금이야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아 그리 실감이 나지 않지만, 바로 한두 해 전만 해도 우리는 부동산 이야기만 나오면 그걸 '투기'라고 욕을 해 댔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투기든 투자든 우리 주변에서 부동산을 사 두어 재미를 본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선량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웃이야 어찌되건 말건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탐욕에 가득찬 악마 같은 부동산 투기꾼이 실제로 존재하는 건지 그 점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다. 추상적으론 악마 같은 부동산 투기꾼이지만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그들은 그냥 평범한 우리 이웃인 것이다. 나는 부동산 투기 바람이 거세게 불 때마다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저걸 '시스템'과 '규칙'으로 바로잡을 수는 없는 걸까? 법망을 요리저리 피해 어떻게 해서든 돈을 늘리려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훈계와 매도를 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늘 그렇게 도덕으로 대응하니까 도덕에 약한 사람들은 늘 손해만 보고 살고 도덕에 개의치 않는 사람만 늘 재미를 보는 게 아닐까? 그들이 법망을 도저히 피할 수 없게끔, 부동산으로 큰 돈을 벌 수 없게끔, 그런 규칙을 만들 수는 없는 걸까?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번 사람이 있다. 그는 지금도 기회만 있으면 부동산 투기로 더 큰 돈을 벌려고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또 기회만 있으면 이 나라의 법과 제도가 개판이라고 떠들어 댄다. 그 '개판'이 문제인 것이지 자기는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 개인의 도덕과 양심에만 의존해 사회를 건전하게 하겠다는 발상과 그 발상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는 기존의 모든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자기가 도덕과 양심을 지킨다고 해서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사람이 자기 대신 반드시 재미를 볼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부동산 투기로 큰 돈을 버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 대신 자기는 그렇게 해서 번 돈 가운데 반을 자선 사업에 쓰고 있기 때문에 자기야말로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거다. 나는 그 사람을 칭찬하거나 예찬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누가 그 사람을 '악마'라고 욕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변명할 뜻은 충만하다. 개인의 도덕과 양심을 전제로 해서 만들어지는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지 그 시스템의 결함을 파고들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욕하는 건 부질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 사람이 누군가? 바로 소로스다. 지금 나는 그 정도 선에서 소로스를 위한 변명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칼 포퍼는 소로스의 영웅 소로스는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으로 출생했다. 그는 14세 때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끌려갈 뻔하는 위기를 겪은 적도 있다. 그는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헝가리로 돌아왔지만 다시 소련 군정을 피해 영국으로 떠났다. 영국에서 그의 생활은 비참했다. 밤에는 웨이터 생활을 했고 쓰레기통을 뒤져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해서 모은 돈으로 런던 정경대학(LSE)에 입학했다. 여기서 그는 당시 그 대학의 교수로 있던 세계적인 석학 칼 포퍼를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소로스가 포퍼의 강의를 직접 들은 것도 아니고 자주 만난 것도 아니었다. 딱 두 번 만난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도 포퍼는 소로스의 영웅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소로스가 1979년에 설립한 '열린 사회 재단'도 포퍼의 저서인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따온 것이며, 자신이 세운 회사에 '퀀텀(Quantum) 펀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포퍼와 무관하지 않다. 퀀텀은 양자(量子)를 의미하는데, 이는 칼 포퍼가 철학적 도구로 애용하던 양자역학에서 빌려온 것이다. 소로스의 투자 이론을 가리켜 '리플렉시버티(Reflexivity) 이론'이라고 한다. 박태견 기자는 이 이론을 '재귀(再歸) 이론'으로 번역해 부르고 있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의 역자인 형선호씨는 '반사성 이론'으로 번역해 부르고 있다. 그 무엇으로 번역해 부르건, 이 이론은 관찰하는 행위 자체가 관찰당하는 쪽에 영향을 준다는 포퍼의 이론을 원용한 것으로서 소로스의 말을 빌리면 이런 것이다. "투자가가 경제 상황과 국제 정세 등을 관찰하고 전망하는 행위만으로도 시장 심리에 영향을 주어 가격 자체를 변화시키게 마련이다. 하물며 실제 투자가 시작되면 시장 가격은 매 분 매 초 변화하며, 동시에 가격 변화가 투자자의 전망 자체를 변화시킨다." 소로스는 "수요와 공급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스스로 균형을 찾는다"는 고전적 시장 이론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이론"이라고 단언한다. 이 같은 이론은 "시장에 참여하는 투자가나 생산자, 소비자가 한결같이 완벽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건데, 현실 세계에서 투자가는 결코 전지(全知)하지 못하며 편향된 선입관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이다. 소로스는 관찰자는 관찰 대상에게 영향을 주고, 그런 영향을 받아 변화된 관찰 대상은 반대로 관찰자에게 영향을 준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역동적이며 변증법적인 상호 침투 관계, 즉 '리플렉시버티'가 바로 현실 투자 세계를 작동시키는 기본 법칙이라는 것이다. 소로스의 국제적 언론플레이 그 당연한 귀결로 소로스에게 언론플레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언론플레이가 곧 투자 행위인 것이다. 그의 국제적 언론플레이는 지난 1992년 영국 은행들과 벌인 그 처절한 전쟁시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이에 대해 박태견 기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을 때는 영국의 {더 타임즈}, 프랑스의 {르 피가로} 등의 신문·잡지에 직접 기고하는 형태를 취해 왔다. 그러던 그가 이때만은 신문, 잡지, TV 등 모든 언론 매체의 인터뷰 요청에 적극 응했다. 세칭 '아나운서 효과'를 겨냥한 고도의 언론플레이였다. 아나운서 효과란 일종의 바람잡이 전술로서 금융 시장과 투자가들에게 영향력이 절대적인 자신의 공개 예언을 통해 실제 시장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의미이다. 소로스의 이런 바람잡이 전술이야말로 서방 중앙은행 등 비판자들로부터 그가 '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는 최대 근거이기도 하다. 소로스는 언론을 이용해 분위기를 잡아 가는 동시에 자신이 운영하는 전세계 수백여 개의 헤지 펀드들을 총동원, '파운드화 팔자'와 '마르크화 사자' 주문을 계속 내면서 무자비하게 파운드화 폭락을 주도해 나갔다." 과연 소로스가 문제인가? 여러 나라 정부들이 그 동안 소로스를 '국제 통화 위기의 제1주범'으로 규정하여, 그를 법망으로 발목 잡으려 애썼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 나라 정부들은 "도리어 그와 가능한 한 돈독한 관계를 맺으려고 온갖 추파를 던지고 있다. 소로스의 막강한 정보 수집량과 날카로운 판단력, 그리고 엄청난 자본 동원력에 기초한 범세계적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더이상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소로스가 문제인가? 소로스처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로스보다 도덕성이 뛰어나기 때문인가? 소로스와 같은 '악당'들이 우글우글하는 게 국제 금융 시장 아닌가. 그렇다면 수많은 소로스들과 소로스 후보들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소로스만 욕해서 무얼 어쩌자는 걸까? <자본주의의 위협> 소로스는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책을 내기 전부터 자신의 구상을 이런 저런 기회를 통해 발표해 왔다. 그가 미국의 월간지 {애틀랜틱 먼스리} 1997년 2월호에 기고한 <자본주의의 위협>이라는 글도 바로 그런 경우에 속한 것이었다. 소로스는 그 글에서 칼 포퍼가 열린 사회의 적으로 규정했던 나치즘과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사라진 지금 자유방임주의를 바탕으로 한 시장 경제 체제가 유일무이한 대체 세력으로 부각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극도의 개인주의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때문에 불평등과 사회 불안이 심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적자 생존'이 문명 사회의 지도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으며 "우리의 도덕관념이 지나치게 돈을 잣대로 성공을 따지는 풍조로 인해서 위태로워지고 있다"는 경고까지 했다. 세상에 그토록 무자비한 환 투기꾼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처럼 재미있는 뉴스가 또 있겠는가. 소로스가 그 점을 노린 언론플레이를 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지난 몇 년간 소로스의 고정 메뉴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 언론 매체들도 소로스의 그 글을 <'자본가의 자본주의 비판' 화제>, <'금융시장 제왕', 자본주의에 칼 꽂다>와 같은 제목을 달아 널리 보도하였다. 소로스는 1998년 9월 미 하원 금융위원회에 출석해 IMF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함으로써 또 많은 사람들을 재미있게 만들었다. 그는 국제 통화 체제가 '조직적 붕괴' 상태에 있다고 경고하면서 IMF의 자매기관으로 '국제신용보험공사'(ICIC)를 만들어 국제 대출 업무를 엄격히 관리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또 "채권자 채무자간의 불균등한 대우 및 국제 금융 감독 기구의 부재가 현 금융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라며 "무리하게 투자한 채권자에 대해서는 그 동안 아무런 제재도 없었다"고 지적하면서 "타당성 검토 없이 무리한 투자를 한 채권자를 제재할 경우 금융 위기에 봉착한 국가의 부실 기업에 대한 투자를 억제하는 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로스는 1998년 11월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한 강연에서는 한 차원 높여 시장만능주의가 전체주의보다 더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소위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사회를 위기로 몰 수도 있다"면서 "이같이 잘못된 생각은 오늘날 어떤 전체주의 이념보다 큰 위협"이라는 것이다. 소로스는 '사악한 구세주'인가? 그런 일련의 발언들이 정리돼 있는 책이 바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이다. 소로스가 환 투기를 해서 번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그런 말을 하면 모르겠는데, 자선 사업에 많은 돈을 쓰는데다 개인적으론 믿기지 않을 만큼 검소하게 살면서 그런 말을 해 대니까 적잖은 사람들이 소로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게 생겼다. 우리 언론에 보도된 그런 사례도 적지 않다. "주변 사람들은 '소로스는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것, 자신을 위해 사치를 한다는 것 등에 일종의 경멸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소로스에게는 이른바 '재벌급' 친구들이 없다. 그럴 여가도 없다. 소로스는 요즘 시간의 80%를 자선 사업 재단 운영에 쏟고 있다." "이렇게 돈을 많이 벌지만 소로스는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한다. 소유욕이나 사치를 경멸한다. 그 흔한 자가용 비행기도 없고 취미라고는 테니스 치는 것이 전부다. 오랫동안 맨해튼의 조그만 원룸 아파트에서 궁상스럽게 살았다. 재혼한 뒤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했을 때 비로소 뉴욕 5번가의 2층짜리 맨션으로 옮겼다. 그렇게 검소하게 살면서 연간 소독의 반을 자선 사업에 쓰는 것이다. 그때마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부자 나라에서 번 돈을 가난한 나라를 위해 쓴다'는 것." "그는 투기꾼인가, 아니면 자선가인가. 월가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월가의 생리를 잘 아는 대우증권 국제 영업팀 곽영교 팀장은 '소로스는 자선가이다.'라고 잘라 말한다. '헤지펀드는 돈 냄새를 맡으면 하이에나처럼 달려든다. 그러나 그들의 개인적 면면을 들여다보면, 소로스는 자선 사업에 헌신하고 있고, 존 템플턴은 술·담배와 관련한 주식에는 절대 투자하지 않을 만큼 청교도적이다.'라고 말했다. 헤지펀드에 대해서도 그는 '일부가 물을 흐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헤지펀드는 통화와 주식 가치가 잘못 평가되어 있을 때, 이를 시정하는 국제 경찰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소로스를 따르는 미국의 박애주의자들은 한 술 더 떠서 그를 카네기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소로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소로스의 자선을 더욱 수상한 눈길로 바라본다. {타임}지가 이름붙인 '사악한 구세주'니 뭐니 하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소로스의 자선 행위를 "메시아주의적 심리 구조에서 비롯된 과대망상증의 초기 증세"로 보기도 한다. 소로스의 '지적 허영심'? 그런가 하면 소로스의 지적 허영심과 변화 가능성을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중앙일보} 김영희 국제 문제 대기자는 1998년 1월 10일자 <소로스가 어때서>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투기꾼 소로스는 한국 경제의 회생 가능성과 방법과 투자 대상으로서의 한국을 진단하고, 돈만 가지고는 성이 안 차는 지적(知的)인 허영심을 가진 철학자 소로스는 역시 지적 호기심과 지적 허영심이 강한 김대중 당선자와 교유(交遊)했다. 소로스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는 1992년 이전엔 당시 미국·소련·영국의 지도자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고 {뉴욕 타임즈}나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 한 번 하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고 자랑한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세일즈맨이 되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대통령 당선자가 월스트리트의 큰손을 직접 만났다고 뒷공론이 무성하다. 무책임하고 한가한 발상이다. 지금은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다. 선진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의 지원은 필요하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투자가들이 돌아와야 한다. 소로스가 오면 투자가와 투기꾼들도 움직인다. 대통령 당선자는 더 많은 소로스들과, 심지어 그만 못한 사람들도 더 많이 만나야 한다. 금융.외환에 관해 대통령이 한밤중에라도 국제 전화로 의견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자산이 어디 있겠는가. 다양한 취향을 갖고, 이젠 돈보다 인간의 조건에 더 관심이 있다고 자부하는 소로스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대체적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이긴 하나, 소로스의 생각을 단지 '지적 허영심'으로 표현하기엔 좀 무리가 있고 그가 '이젠 돈보다 인간의 조건에 더 관심이 있다'고 보는 건 좀 순진한 생각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소로스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그 어떤 선행을 하건 그와 동시에 '악마' 소리를 듣는 일을 전혀 개의치 않을 거란 말이다. '시스템과 규칙이 문제다' 왜 그런가? 소로스는 '규칙'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다시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로스는 영국인들이 "우리가 세금으로 바친 돈을 소로스가 가로채 갔다"고 분개하자 "내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다른 사람 몫이 됐을 것"이라고 대꾸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시스템과 규칙의 문제인 것이지 그 시스템과 규칙에 따라 돈을 번 자신을 탓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소로스 온 소로스(Soros on Soros)}에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환 투기를 필요악으로 본다. 나는 규칙 안에서 일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규칙이 깨지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규칙을 만든 자들의 잘못이다. 나는 합법적 참여자일 뿐이다. 나의 이런 소신은 매우 건전하고 정당하기 때문에 나를 투기꾼이라고 불러도 한 치의 거리낌 없다. …… 투기꾼이 돈을 번다는 것은 곧 당국이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됐나 하는 자기 성찰을 도외시한 채 투기꾼들더러 밤길을 밝혀 달라고 하는 식인 것이다." 소로스가 {뉴스위크} 한국판 1998년 12월 16일자 인터뷰에서 한 말도 마찬가지다. 그는 "증시의 과잉이 민주주의와 시민의 덕목을 손상시킬 수 있다고 보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소로스:나는 증시 참가자 및 경쟁자로서의 역할과 시민 및 규칙의 제정자로서의 역할을 구분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증시에 나타나지 않는 집단적인 이익에 대해서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가 점차 불안정하고 부당해지도록 방치하는 셈이 된다. 뉴스위크:투기꾼들이 증시가 안정을 되찾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학문적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평생 증시 투기 일을 해 오지 않았는가. 학자들과 같은 견해라면 귀하가 해 온 일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것이었다고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식으로 귀하가 해 온 일을 정당화할지 이해하기 힘들다. 소로스:나는 이익을 얻기 위해 그 일을 한다. 더 큰 선(善)을 행하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니다. 더 큰 선(善)을 위해서는 책을 쓴다. 경쟁자와 규칙 제정자로서의 행동은 별개다. 나는 규칙의 변경을 옹호하는데 그 이유는 금융 시장, 특히 세계 시장에 대한 감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용 거래에 대해 제한을 주어야 한다. 그 이유는 차입 자본에 의한 투기가 불안정을 초래하는 주요 원인에 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 동안 이 점을 주장해 왔다. 나는 의회 증언을 통해 '차입 자본으로 투기를 하는' 파생 상품들이 기본적으로 안정을 해치고 있다고 말했다. '양심은 돈벌이를 방해한다' 소로스는 한 모임에선 "나 같은 자들은 비즈니스계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 말을 인용한 박태견 기자는 "다분히 쇼맨십이 강한 발언이지만, 그 이면에서 지금의 상황에 대해 소로스가 실제 느끼는 위기감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고 논평하고 있다. 박 기자가 말하는 위기는 투기꾼들조차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려든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현재의 국제 금융 질서가 소로스 같은 능구렁이들조차 한 치 앞을 예견하기 힘들 정도로 극한적 혼란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도 소로스가 그런 위기감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쇼맨십이 강한 발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아마도 자신을 잘못된 시스템과 규칙의 산물 정도로 생각하고 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스템과 규칙을 탓할망정 자신이 마음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을 것이다. 왜? 앞서 인용한 바 있지만, 그가 1992년 이전엔 당시 미국·소련·영국의 지도자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고 {뉴욕 타임즈}나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 한 번 하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즉, 돈이 그에게 발언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는 그 기회를 누리는 재미와 의미를 만끽하기 위해 결코 '악마'노릇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로스가 {중앙일보}(1998년 1월 26일자) 김영희 대기자와 다음과 같이 말을 주고받은 것도 그냥 가볍게 넘길 게 아니다. 중앙일보:돈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소로스 회장에게 돈은 무엇입니까. 소로스:돈은 내게 자유를 의미합니다. 중앙일보:가난한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군요. 소로스:덜 자유롭지요. 중앙일보:뜨거운 가슴으로도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소로스:돈은 가슴이 아니고 머리로 벌어요. 사회적인 양심은 돈벌이를 방해합니다. 소로스는 큰 선(善)을 위해서는 책을 쓴다고 했으며, 경쟁자와 규칙 제정자로서의 행동은 별개이며 자신은 규칙의 변경을 주장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정작 썼어야 할 책은 '자본주의론'이기에 앞서 '윤리론'일 것이다. 자신의 특유의 솔직함으로 기존의 윤리가 그것에 구속되는 사람들에겐 족쇄가 되고 그것에 구속받지 않는 사람들에겐 경쟁자를 제거해 주는 날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먼저 이야기했어야 했다. 그게 규칙의 변경에 앞서는 문제가 아닐까? 기존의 도덕이 안고 있는 허구성이 영향력 있는 소로스의 입을 빌어 좀더 설득력 있게 폭로된다면,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소로스를 닮기 위해 발버둥친다면, 굳이 소로스가 애써 역설하지 않더라도 시스템과 규칙의 변경은 보다 손쉽게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나 하나 양심적으로 살면 그만'이 아니다 그러나 소로스에겐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다중 인격자'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할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소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종종 나에게 다중 인격이 있다는 느낌을 갖곤 했다. 그것들은 사업적인 인격 하나, 사회적인 인격 하나, 그리고 개인적인 인격 하나(혹은 그 이상)이다. 이 같은 역할들은 종종 나를 혼란시켜서 끊임없이 당혹감에 빠지게 만들었다. 나는 그 동안 내 존재의 다양한 측면들을 통합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일에 성공했다고 기쁘게 얘기할 수 있다. 내가 기쁘게 얘기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정말로 그렇기 때문이다. 그 같은 통합이 나에게 큰 만족을 주곤 했다." 하긴 그런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능력임엔 틀림없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헤지펀드와 더불어 악마라는 소리를 듣게 된 심경"을 묻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한 바 있다. "그 일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유일한 대응 방법은 마음을 터놓고 대화에 참여하도록 하며 시장 기능을 설명하는 길뿐이다. 나의 허수아비가 불태워졌지만 대개는 내가 그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일로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렇다. 불태워지는 건 허수아비일 뿐이고 그걸 직접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도덕은 실질은 아니다. 소로스에게 중요한 건 실질이며, 그는 실질과 무관한 일에 대해선 초연할 수 있다. '소로스를 위한 변명'은 기존의 도덕 체제하에선 착하고 양심적인 사람은 영원히 패배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직시하자는 것이다. 착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겐 좀처럼 착하게 양심적으로 살자고 떠들 기회조차 오지 않는다. 그런 기회는 현실 세계에서의 승리를 쟁취했을 때에만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착하지 않게 비양심적으로 살자고 선동하는 건 아니다. 세계 금융 시장의 시스템과 규칙을 바꾸는 일은 소로스에게 맡겨 둘망정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시스템과 규칙을 바꾸는 일에 있어서 '나 하나만 착하고 양심적으로 살면 그만'이라는 개인플레이를 재고해 보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그 처세술을 자식들에게도 물려줄 것이다. 결국 대를 이어 손해만 보는 것이다. 운동권 투사로 나서라는 게 아니다. 아주 조그마한 관심과 참여면 족하다. 아니 그 도사 같은 냉소주의만이라도 버려 달라. 이게 바로 나의 '소로스를 위한 변명'의 메시지인 것이다. 소로스만을 욕하는 것은 기존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을 은폐하는 문제를 낳는다. '악마'를 탓하지 말고 '악마'의 활약을 가능케 하고 있는 시스템과 규칙에 눈을 돌리자는 것이다. 소로스가 앞장서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걸 이미지메이킹 수법이니 또다른 투자 기법이니 하고 비아냥대는 건 온당치 않다. 왜 우리 나라엔 소로스와 같은 개인 또는 집단이 없는 걸까? 나는 제발 꿈에서라도 조선일보가 우리 나라의 언로(言路) 구조와 관행을 바꾸자고 떠드는 모습을 보고 싶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