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6일 토요일 오전 07시 20분 29초 제 목(Title): 강준만/최규장 기자 유신과 M&A를한 어느 기자의 40년 체험기/강준만 '신념을 바꾸기보다 직업을 바꿨다' 나는 언론인들이 내는 책은 일단 다 산다. 재미있으면 사자마자 다 읽고 재미없을 것 같으면 대충 살펴본 뒤 후일 써먹기 위한 용도로 잘 보관해 둔다. 최근 최규장씨가 쓴 {언론인의 사계:세계화 기자 40년 체험기}(을유문화사, 1998, 286쪽, 9천 원)라는 책을 읽었다. 매우 재미있고 유익해서 이 책을 손에 잡자마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다. 감히 자신있게 독자들께 일독을 권한다. 최규장씨는 매우 기이한(?) 길을 걸은 기자다. 그는 언론 자유를 위해 투쟁하거나 헌신한 기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권언유착을 하면서 국민 위에 군림하는 재미를 만끽해 온 기자도 아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유신과 싸워 펜을 지킬 만큼 강하지 못했고, 언론의 밝은 새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내다보리만큼 현명하지 못해 유신과 M&A를 했다." "물가에 가지 않으면 목을 축일 수 없고 너무 깊이 들어가면 익사할 수 있다. 기자와 권력은 불가원불가근이다. 권력의 시녀나 권언(勸言)유착, 언론 장학생도 가증하다. 기자는 권력의 영원한 아웃사이더이다. 나는 차라리 펜대를 버리고 인사이더가 되기로 했다. 신념을 바꾸기보다 직업을 바꾼 것이다. 기자는 나에게 천직이었다. 직업정신을 잃었을 때 직업인으로 나는 이미 죽은 것이다. 살기 위해 보도하지 않고 보도하기 위해 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말을 듣자면, 최규장씨는 기자를 하다가 유신 때에 유신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물론 나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형의 언론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을 어떻게 포장하건 기자 하다가 정·관계에 진출했으면 그걸로 끝이거니와 그걸 불명예로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나와 나 같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최규장씨의 경우 '기이하다'는 건 그가 언론계에서 정·관계로 옮겨간 언론인들의 전형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에게 'M&A'의 목표는 출세는 아니었다는 게 너무 확연히 드러난다. 아니 오히려 출세와는 거리가 먼 쪽으로 거꾸로 살아 왔다는 느낌마저 갖게 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정당화나 미화를 시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한 '언론인의 사계(四季)'를 드러내면서, 언론학 교재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언론에 대한 매우 재미있고 유용한 지식을 제공해 준다. 인간 최규장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께서 직접 책을 읽어 보시고 하시라. 나는 이 책의 재미있고 유용한 부분을 소개하는 걸로 그치겠다. 한국일보 창업자 장기영에 얽힌 일화 최규장씨는 합동통신 기자, 한국일보 기자, 중앙일보 기자를 거쳐 외교관(공보관)과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일하다가 현재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 책은 그의 첫 직장인 한국일보사의 사주 백상 장기영씨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에서부터 시작한다. 나는 내 책 {카멜레온과 하이에나}에서도 장기영씨에 대해 거론한 바 있지만, 장기영씨는 한국 언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1960년대의 장씨는 매주 화요일 편집국에 스피커를 걸어 놓고 찌렁찌렁 고막이 울리는 목소리로 다음과 같은 강론을 했다고 한다. "사건은 휴일에 터진다." "제목은 시(詩)같이 붙여라." "신문은 아무도 이용할 수 없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한국 신문에 최초로 상업주의의 바람을 불어넣은 주인공도 바로 장기영씨였다. 그의 학력은 선린상고 중퇴가 전부다. 나는 제발이지 고등학교를 중퇴한 신문사주가 앞으로 많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란다. 장기영씨는 1960년대 초 우리 나라에선 최초로 기자를 공채하는 시험을 시행하면서 응시자의 학력 제한을 없앤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장기영씨는 사장실을 굉음이 쿵쾅거리는 윤전실 옆에 차렸는데, 신문 찍는 소리가 나야 잠이 잘 오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이다. 이 책은 장기영씨에 얽힌 일화와 더불어 '편집의 마술'을 실증하는 재미있는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기사가 1백 냥이면 제목이 9백 냥이라나. 그 유명한 대구의 껌팔이 소년 이윤복 군의 이야기(<저 하늘에도 슬픔이 있을까>)도 바로 최규장씨의 히트작인데, 히트의 자세한 비화(秘話)를 밝히지 않은 건 유감이다(내가 듣기론 탁월한 '연출'이 있었다던데……). 최초의 베트남전쟁 종군 기자 최규장씨는 새로 생긴 중앙일보사에 스카우트되어 최초의 베트남전쟁 종군 기자로 맹활약을 했다. 베트남전쟁에 관한 그의 이야기는 재미도 있거니와 대단히 깊이 있는 것들이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보는 미국의 시각을 비롯하여 당시 우리가 전혀 모르고 넘어갔던 비화들이 소개돼 있다. 그는 미국의 정치·외교에 관해 미국에서 나온 주요 책들을 다 읽고서 그걸 간단히 요약해 소개하는데, 그 솜씨가 일품이다. 전쟁과 언론의 관계에 대해서도 각종 이론을 소개하는 등 저자의 해박함이 돋보인다. 그가 다음과 같이 '기록과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 이르러선 공감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노벨상 수상자이며 {분노의 포도}, {에덴의 동쪽} 등 그늘진 삶을 주로 다룬 존 스타인백은 {뉴스 데이} 특파원으로 사이공에 와 있었다. 죽음을 앞둔 늙은 소설가도 전장에 뛰어드는데 "한국의 소설가는 어디 갔는가" 했더니 {불꽃}의 선우휘가 사이공에 와서 하는 말이 "춘원(이광수)이 {수양대군}을 쓸 때 수양을 만나 보고 썼는가. {모비딕}을 쓴 멜빌은 고래잡이 근처에나 가 본 줄 아는가."라고 되묻는 것이었다. 이제 전쟁은 역사의 장막 뒤로 아스라히 멀어져 갔다. 그렇다 하여 전쟁의 재조명과 값진 피의 교훈을 재음미하는 토론조차 사라져서야 될 말인가. 이따금 뜬금없이 불거지는 용병론 시비가 고작일 뿐이다. 베이컨은 역사는 시간의 딸이라 했던가. 하지만 지나친 역사 방임주의에 진실이 왜곡당할 수 있다. 우리가 피 흘려 겪은 역사의 진실을 남이 쓸 것이다. 최규장 기자는 베트남 특파원으로 일한 이후 미국과 여러 나라들을 취재하는 국제통 기자로 활약했다. 그게 그의 딜레마였을까? 그는 국제적 안목과 감각을 가진 기자로서 언론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국내 정치 상황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런 고민의 일단을 <한국 기자의 자화상>이라는 에세이에 담았다. 이건 당시 암울했던 유신 체제하의 기자 생활에 대해 쓴 것으로 관훈클럽 창립 15주년 기념 논문으로 {신문연구} 1972년 봄호에 실렸는데, 언론계에 적잖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규장 기자가 쓴 이 '1972년의 기자론'은 오늘날 언론학과 교과서에 실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명문(名文)으로 당시의 언론 상황에 대한 날카로운 직언이다. 이 글의 일부를 길게 인용한다. 1972년 '한국 기자의 자화상' 요즘 우리는 '언론 자유'란 말을 별로 쓰지 않기로 하고 있다. 자유권의 일부를 보자기에 싸서 유보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우리에겐 기자가 지사(志士)로 통했던 시대가 있었다. 독립 운동이나 계몽 운동, 그리고 민주주의의 길을 걸었던 선배 기자의 기질, 굽은 것을 펴고 약한 것을 쳐들며 민중의 편에 서서 추앙을 받던 영웅…… 그 의협심이나 낭만성은 이젠 식어졌다. 4·19 때만 해도 마산에 출장 간 기자들에게 택시 운전사가 돈을 받기를 사양했고, 여관 주인이 여관비를 받지 않겠다고 하리만큼 기자는 민중의 영웅이었다. 세상은 달라졌다. "민중의 소리를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테냐"고 '오늘의 기자'에게 윽박지르고 나서게끔 됐다. 언론 화형식도 있었다. …… "일제(日帝)때의 신문 탄압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요즘은 신문이 정간(停刊)도 없고 기사가 깎인 것도 볼 수 없고…… 또 일제때 신문 만든 사람은 누구이고 지금 신문 기자는 누구인가요. 목숨이 그전보다 아까워서 그럴까요."(이만갑 교수의 말) 그러기에 오늘의 신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에 '햄릿'과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 기자는 '단순하고 순수한 기술인(技術人)으로 충실해야 하는가' 또는 '신념적이고 행동적인 사명인(使命人)이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마음속에 명쾌한 대답을 지니고 있는 기자는 얼마나 될까. 오늘의 기자는 방황하고 있다. 언론기업은 타락의 길을 걷고 있고 '데스크'는 묵묵부답 말이 없고 기자는 마치 궤도를 벗어난 우주인처럼 유영(遊泳)을 계속하고 있다. …… 기자의 조로(早老) 현상을 곧잘 연탄불에 비유한다. "기자란 연탄불 같아요. 불이 활활 타고 열량이 좋을 땐 실컷 써먹고 거진 다 타면 행길에 팽개쳐서 자동차 바퀴에 부서지더군요." …… 기자의 조로 현상은 전문화의 기반 없이 부에서 부로 또는 출입처에서 출입처로, 겉핥기식 일반화의 길을 걷는 동안에 찾아든다. 또한 경영자쪽에서 볼 때 '유지비'가 덜 들고(임금이 저렴하므로) 한창 '열량'이 좋은 젊은 기자를 10년 정도 주기로 회전하는 경영 철학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막 나온 병아리를 끓여 먹으려는 '영계 백숙' 경향 때문에 조로 현상은 불가피했다. …… 한국의 신문은 사람에 투자하기보다 차라리 '컬러(색채판)'에 투자하고 있다. 돈을 들여 유능한 인재를 길러 봤자 딴 신문에 빼앗길 성싶고 딴 신문에 유능한 사람이 있으면 데려오면 그만이라는 것이 경영자의 타산이리라. 어떤 기자들은 '조사(早死) 방지책'으로 학구를 결심했다가도 외국에 나갔다 오면 자리가 날아갈까봐 주저앉는다. 조로 현상을 개탄하면서도 기자의 관리직은 늘어만 간다. 은행식으로 '대우제'가 유행이더니 부국장·국장석·국차장·국장대리 끝에 '국장 느낌' 발령이 나올지도 모른다. …… P 기자의 아내는 <아내가 본 기자>라는 투고란에서 "기자 남편이 어린애와 같다"고 표현했다. 아내가 볼 땐 그 무슨 대단한 특종인지 알지도 못하는 기사를 가지고 특종이랍시고 흥분했다가 이튿날 '꽈당' 한 방 얻어맞으면 그리 대단히 피 나게 얻어맞은 것도 아닌 듯한데 얼굴이 푸르락 노르락 시름에 잠기곤 하는 남편이 어린애같이 보였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우리 집이 여관이냐"는 항변이 나오리만큼 새벽에 나갔다가 늦게 술이 취해 돌아오는 '매스컴 미망인'도 우리 주위에 수두룩하다. 더욱 '무관의 제왕'의 '왕비'를 실망시키는 것은 기자의 급료에 대한 무관심일 것이다. 임금은 근로자의 오직 하나의 생활 수단이다. 샐러리맨화했다고 스스로를 격하하면서 월급 액수에 급급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닌 듯이 초연한 것이 보통 기자들이다. 샐러리는 품삯에 불과하다. 품삯은 고상한 것이며 오직 하나의 생계 수단이기 때문에 "기자들 월급이야 적당히 주면 된다"는 생각이나 "월급이야 얼마든 적당히 받아 두면 된다"는 생각이 있다면 위험하기 짝이 없다. 기자들이 임금 투쟁에 나서리만큼 극성스럽지 못한 것은 어떤 든든한 부수입에 파이프라인을 대고 있어서가 아니라 정신 노동자나 인텔리 피고용자의 공통된 타성 때문이다. 전국 기자의 평균 급료는 근로소득세 과세 대상에서조차 면제된 2만 6.964원인데 이는 경제기획원에서 발표한 도시 생계비 3만 9,600원보다 훨씬 뒤지는 저임이다. 필자가 방미 중 어느 지방신문을 찾아갔을 때 급료 문제가 화제에 올라 내 월급이 얼마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 돈으로 30∼5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 그들의 10분의 1이 될까말까 한 '쥐꼬리'를 공개하기가 쑥스러워 "달걀 2,500개 값을 받는다"고 대답했더니 모두들 계산하기 어렵다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한국의 달걀이 꽤 비싼 것으로 여겼을까. …… 제4부(第四府)는 사부(死府)의 운명을 재촉받고 있다. 신문도 기자도 이제껏 '목탁'이니 '제왕'이니 '검보다 철필이 강하다'는 허무한 신화만 먹고 살아 왔음을 깨닫고 있다. 권력 앞에 의회도 겉치레가 되거늘 하물며 나약한 펜이랴. 시체에나 달겨드는 하이에나처럼 우리 언론은 강자 앞에 약하디 약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기자들은 지금 축 처져 있다. 칠면조의 울음 소리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말로 빙빙 꼬며 변죽만 올리거나 아예 침묵하고 있다. 지면의 획일주의와 제도화는 궤도에 올랐고 도피성 국제주의 경향과 주간지화는 가속되고 있다. 기자는 정공법 대신 앙케트나 제3자의 입을 빌려 기사화하려는 약은 수를 쓰지만 취재원은 인터뷰나 코멘트나 기고를 사양한다. …… 오늘의 기자는 냉소와 침묵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언론 자유를 지킬 최대 무기는 사실 보도임을 우리는 안다. …… 사명(使命)을 다하다 사명(死命)을 다할지라도 오늘의 기자는 슬기와 집념으로 사실을 캐는 노력을 부단히 계속해야 한다. 비상한 때일수록 기자의 메모는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지 않고 오늘 못 쓰면 내일, 내일 못 쓰면 역사에 쓰리라는 역사의 기록자가 되리라. '김대중이 당선되면 서울 거리에서 탱크를 보게 될 것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이 오늘날의 언론과 크게 다른 게 없어 놀랍다. 현재 우리 언론에 대해 많이 쓰이고 있는 '하이에나'라는 표현을 최규장 기자가 이미 1972년에 썼다는 것도 놀랍다. 아무래도 그 표현의 지적 소유권자는 최규장씨로 분명히 해 두는 게 좋겠다. 최규장 기자는 그런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국 기자직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 그가 그런 결심을 하던 당시의 언론 상황은 구체적으로 어떠했던가? 최규장씨의 말을 들어 보자. 유신이 선포되자 정론이 마른 자리에 유비통신만 무성했다. 글쟁이들은 스스로 자기 검열의 빗장을 걸고 취재를 포기했다. 더러는 하릴없는 정보 거간꾼이 되기도 했다. 수집된 정보가 기사화되지 않고 브리핑용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박정희·김대중 후보가 마지막 선거 유세 대결을 벌일 때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김대중이 당선되면 "서울 거리에서 탱크를 보게 될 것"이라고 미 CIA 책임자에게 했다는 말은 언론에는 뻥긋도 안 했지만 입에서 입으로 활달하게 옮겨다녔다. 이것이 유신 시대의 인터넷이었다. 군이 이토록 무서운 때라 군 출입 기자는 회사 최고 경영층의 부름을 받기 일쑤였다. 편집국장도 바이패스였다.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알토란 같은 재산 한 귀퉁이를 떼 주어야 했던 재벌 오너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원군을 보낸 베트남은 기울고 실업자 사태에 오일 쇼크까지 겹쳐 정부건 개인이건 생존의 문제가 목을 죄던 때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최규장씨는 그런 상황에서 유신 정권과 M&A를 하면서 새로운 변신을 하였는데, 그의 첫 직장은 말레이시아 대사관 외무서기관이었다. 1973년 5월 11자로 사령장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전문 외교관으로서 외교 최일선에서 박정희와 카터의 갈등을 지켜보았으며, 이는 후일 그의 박사 학위 논문 주제가 되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외교 정책 결정 과정론:카터의 주한 미군 철수 결정 백지화 과정 연구}(을유문화사, 1993)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언론인의 사계}에는 외교와 관련해 미국 언론에 대해서도 매우 유익한 정보를 많이 제공하고 있다. 언론학 교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외교와 언론의 관계에 대해서도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가 만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된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듯, 그는 대단히 학구적이다. 미국에서 열린 '한국 미술 5천년전'도 그의 작품이라는 것도 밝혀 둘 필요가 있겠다. 미국에서 처참하게 구겨진 한국의 이미지를 문화로 회복하겠다는 최규장씨의 당시 생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5·18과 신군부의 막가파식 '언론플레이' 최규장씨는 외교관 생활을 끝내고 대통령 정무비서관으로 옮겼는데, 그의 비서관 생활은 오래 갈 수 없었다. 그가 어찌 전두환 정권을 감내해 낼 수 있었겠는가. 그는 청와대에서 지켜본 5·18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숲속에서 나무가 쓰러져도 신문에 나지 않으면 나무는 쓰러지지 않은 것인가. 하지만 서울의 봄에 된서리가 내리고 탱크가 구른 5·18의 아침이었다.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5·18 직후 각 언론사의 발행인과 편집인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12·12와 자신의 중앙정부부장 임명, 그리고 5·18 조치에 대해 미국의 사전 양해를 얻었으며 한미 관계는 어느 때보다 확고하다." 미국 정부는 이 같은 전씨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길길이 뛰었다. AP통신은 서울 발신으로 전씨의 말은 거짓이라고 타전했지만 당시 한국의 언론은 한 줄도 싣지 않았다. …… 한국의 언론은 실리지 않을 기사는 아예 판을 짜지도 않았다. 빛 보지 못한 기사가 막판에 깎이면 제작 시간만 허비하기 때문에 알아서 기는 '자진 검열'의 꾀를 썼다. 미국 정부의 다단계 쿠데타 저지 노력은 신군부의 언론 통제에 말려 번번이 조롱당했다. 5·18에 대한 미국의 비난을 지지로 둔갑시킨 신군부의 거짓 정보(misinformation)와 광주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퍼뜨린 특전사의 무력 개입을 미국이 승인했다는 역정보(disinformation)는 워싱턴을 몹시 당혹케 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거센 항의와 함께 취소를 요구했지만 신군부는 들은 척도 안 했다. 한반도 안보를 불모로 삼은 정치군인들은 언론만 틀어쥐면 미국을 얼마든지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결국 최규장 비서관은 대책없이 청와대를 스스로 물러나와 실업자 신세가 되었다. 그는 서울 우면산 집에 틀어박혀 앞산에 올라 심호흡이나 하며 미 CIA 부국장 출신으로 존스 홉킨스대 교수로 있던 레이 S. 클라인의 {국력 평가}란 책을 번역했다. 외무부에선 외무부로 복귀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다. 명예훼손 소송 하나로 잃은 신문사 그에겐 오직 언론에 대한 미련만이 남아 있었을까? 최규장씨는 그렇게 지내다가 1983년 1월말 영자 일간지 {코리아 헤럴드}의 미국판 발행을 맡아 미국으로 떠났다. 이건 사실상 최규장씨가 모든 책임을 진 개인 사업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어떻게 일했던가? 나는 이름보다도 프로파갠다의 멍에를 벗기고 싶었다. 하지만 매일같이 스탠더드판 12면에서 선전 냄새를 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 언론에 재갈이 물려 '땡전' 시대가 아닌가. 9시 뉴스를 전하는 땡 소리가 울리면 전두환 대통령이 튀어나왔기에 땡전이었다. 나는 미국까지 와서 땡전아닌 '땜전'을 해야 했다. 서울에서 공수해 온 필름 봉투를 뜯어 보면 머릿기사에 대머리 대통령의 사진부터 나왔다. 나는 그것을 용감하게 도려내고 경제나 문화 기사로 땜질을 했기에 땜전이었다. 이 같은 모험은 8천마일 밖에 떨어져서나 시험해 볼 수 있는 나 혼자만의 실낱 같은 언론 자유였다. 그가 만드는 영자 신문은 미국 시장에 나가는 유일한 한국 신문이었다. 그는 그 신문을 만들면서 미국 내에서 일하는 몇 안 되는 한국계 언론인들의 모임을 주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84년엔 재미한국기자협회(KAJA)를 발족시켰다. 오늘날 그들이 정기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한국의 국익을 위해 애쓰게 된 건 순전히 최규장씨의 노력 덕분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오래 갈 수 없었다. 운(運)이 안 따라 준 걸까? 1985년에 일어난 이른바 '해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보도된 한 유학생이 한국 언론의 허위 보도로 교포사회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정신적 물질적 손실을 입었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던 것이다. 최규장씨로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가 발표한 내용을 기사화한 {코리아 헤럴드} 미국판을 낸 것 뿐인데, 한국의 {코리아 헤럴드}는 전혀 그 책임을 지지 않고 최규장씨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한다니 기가 막힐 일이 아니었겠는가. 당시 소송엔 최규장씨가 내는 신문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신문을 찍어내고 있는 동아일보,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세계일보와 워싱턴의 교포 TV 방송 등 7개사가 연루되었지만, 최규장씨가 속된 말로 '총대'를 메고 열심히 뛰었다. 그러나 3년간에 걸친 사법 투쟁에서 결국 패소하여 최규장씨는 신문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한 신문사와 교포 방송사도 문을 닫았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신문사를 잃고 빈털터리가 된 최규장씨는 골프장 매니저라는 육체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 가야 했고 뒤이어 때늦은 학생 신분으로, 프리랜서 칼럼니스트로 어렵게 살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당시의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일까? 최규장씨는 최근 조선일보가 시도했던 '최장집 죽이기' 사건에 대해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조선일보}대 최장집'의 경우도 최장집 교수 논문의 아슬아슬한 완곡 어법과 {월간조선}의 돌출 편집이 빚은 혼란으로 보지만 벌금을 때려 미래의 논의를 막은 서울지법의 결정은 언론 자유에 대한 위협이다. 언론 자유를 위축시키는 이 같은 위협에 대해서는 언론이 공조하는 것이 선진 언론의 길인데도 대다수 언론은 침묵하거나 동업자를 잡으려는 극단론에 흐르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유일한 대목이다. 나로선 이 책의 '옥(玉)의 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예훼손 소송 하나 때문에 신문사를 잃은 최규장씨의 쓰린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또 나도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처지라 공감이 전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이건 좀 경우가 다른 것 같다. 최규장씨가 서울지법의 판결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독자들께서 이 책을 읽으실 때 이 대목은 좀 주의를 해서 읽기 바란다. 언론의 IMF 사태 보도에 대한 탁견 책 뒷부분에 이르러 최규장씨는 IMF 사태와 언론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엔 이 주제로 그간 우리 나라에서 나온 글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언론이 사이렌을 울릴 때와 물 뿌릴 때를 착각했으며, 섣부른 대안 찾기를 했으며, 거품 경제에 대한 거품 보도화 현상이 심각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보가 정보로 전달되지 못하고 인포테인먼트(오락)나 인포머셜(광고)로 새나가는 현상과 언론의 감상주의를 지적한 대목은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는 그 밖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대목도 가슴에 와닿는다. 근거 없는 '외국 음모론'도 패배주의와 외국인 혐오감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IMF 신탁 체제에 대하여 '시일야방성대곡'이라 비분강개하던 언론이 IMF 협약에 대한 재협상 주장을 매국노로 몰아붙이는 모순에 빠져들어갔다. 언론이 주도한 금 모으기 운동은 우리 나라가 아니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다시 일어나자는 사회 캠페인으로부터 황당무계한 평화의 댐 건설 모금 운동에 이르기까지 언론이 종종 펼쳐 왔던 일과성 애국 운동은 열린 생각, 막힘 없는 사고보다는 마음의 빗장을 거는 폐쇄주의를 키울 수도 있다. 환란 직후 여학생들이 외제 학용품을 쌓아 놓고 불사르는 장면이 전세계에 비쳤다. 당장 브라질의 무역 관광 장관이 아시아에서 오는 수입품을 규제하겠다고 나섰다. 한국 언론에는 한 줄도 비치지 않았다. 브라질은 라틴아메리카의 기류를 이끄는 세계 9위의 경제 대국이다. 우리 나라의 수출 시장으로 대일(10%), 대미(15%) 시장보다 큰 16%일 뿐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아시아, 동유럽과 함께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할 60%의 시장임을 우리는 잊고 있다. 한국 언론연구원의 웹 홈페이지에 수록된 기사(1994∼1998년)를 보면 세계화를 부르짖던 시기인데도 브라질에 관한 기사는 단 7쪽뿐이었다. 그러다가 브라질이 IMF 체제에 들어가자 그제야 브라질이 우리의 지도에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언론 보도가 얼마나 미국 일변도에 빠져 있는지를 말해 주는 본보기다. 나는 최규장씨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 나라가 참 인력 활용을 못 하는 나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최규장씨는 매우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최씨처럼 매우 유능한 기자 출신으로서 외교관으로 오래 활동한 사람은 거의 없다. 게다가 그는 정치학 박사에 비즈니스의 경력까지 갖고 있다. 국가 PR을 할 수 있는 최상의 인력인 것이다. 어떡하겠는가. '줄서기'를 하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가 아니더냐. 나는 국익을 생각하는 언론학도로서 최규장씨가 국가 PR과 관련된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다음 작품에 담아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