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6일 토요일 오전 07시 22분 49초 제 목(Title): 강준만/우리에게 과연 미국은 무엇인가? 13년간 미국과 씨름해 온 오연호 기자/강준만 우리에게 과연 미국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과연 미국은 무엇인가? 이젠 좀 진부하고 상투적인 질문처럼 돼 버렸지만, 이 물음을 피하면서 한국의 현대사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그 질문에 답하고 또 답한다 해도 어차피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우리는 흔히 사람들을 '친미주의자'니 '반미주의자'니 하고 분류하기를 좋아하지만, 친미주의자에게도 '반미'의 그림자는 어디 한 구석엔가 숨어 있을 것이며 반미주의자에게도 '친미'의 그림자는 어디 한 구석엔가 숨어 있을 것이다. 비록 그 '반미'와 '친미'가 어렴풋한 의식의 영역에 머무를망정 말이다. 친미주의자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반미주의자에게도 영어를 잘한다는 건 한국 사회에서의 생존과 번영에 큰 자산이 된다. 사대주의적 성향이 농후한 지식인을 가리켜 부르는 '기지촌 지식인'이란 말은 친미와 반미를 차별하지 않는다. 반미주의자도 얼마든지 기지촌 지식인일 수 있다는 말이다. 역설일까? 아니 우리에게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역설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언론 매체, 특히 극우 매체의 행태를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친미도 상품화하고 반미도 상품화한다. 진보적 지식인들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그들이 영어권 진보적 지식인에게 부여하는 권위와 그 권위에 자신도 기대려고 하는 의존성은 혀를 끌끌 차게 만들 때가 많다. 미국은 이미 우리의 육신과 영혼 안에 들어와 있다. 구조적으로 거시적으로 미국이 한국에 무슨 못된 짓을 했건, 그건 일반 대중의 일상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해방 직후의 혼란 상황, 한국전쟁, 그리고 개발독재 시대 내내 미국은 우리에게 은인과 같은 존재로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으며 미국 문화는 엘리트와 대중을 막론하고 한국인의 궁핍한 정신의 위안처였고 도피처였다. 이성으로 미국을 욕할망정 감성의 일부는 어느 덧 미국화돼 있었고 감성으로 미국을 욕할망정 이성의 일부는 어느 덧 미국화돼 있었던 것이다. 1964년생이 맞은 1984년의 대학 풍경 다시 묻자. 우리에게 과연 미국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놓고 한국에서 가장 고민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답할 사람이 한 명 있다. 그건 바로 오연호다. 그는 현재 진보적 월간지인 {말}지의 기자로 일하고 있다. 그가 최근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해냄, 1998년 6월, 7천 원)라는 책을 냈다. 아주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재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오연호는 어떤 인물인가? 나는 나름대론 '오연호 파일'을 만들어 오래 전부터 그에 대해 관심을 가져 왔는데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책을 보았더니 머리말에 내가 소개하고 싶었던 말을 오연호 자신이 다 해 버렸다. 반가운 기분도 들고 허탈한 기분도 든다. 그 머리말을 대폭 '표절'(?)해 여기 소개하는 것에 대해 오연호는 물론 독자들의 너그러운 이해를 바라마지 않는다. 오연호는 1964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1983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온마을을 합쳐도 50호가 안 되는 남도 산골 촌놈에게 서울은 별천지였으며 난생 처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 본 것도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였다고 한다. 아마 1학년 시절은 그렇게 어리둥절하게 지내면서도 학생운동권에 가담해 전두환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의식을 쌓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1984년 전두환 정권은 이른바 학원 자율화 조치라는 걸 발표했다. 피룰 뿌릴 만큼 뿌리고 집권한 이후 이젠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던 걸까? 아니면 그 해 5월로 예정돼 있던 교황 방문과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둔 시점에서 국제적으로 '살인마 정권'이라는 이미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던 걸까? 어찌 됐건 학원 자율화 조치는 우선 당장 학원에 상주하던 경찰 병력이 철수하는 가시적인 변화를 보여 주는 동시에 1백 명 가까운 해직 교수와 1천3백여 명의 시국 관련 제적생을 복직·복학시켜 줌으로써 적지 않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이제 공부나 열심히 하자'며 돌아선 학생들이 있었던가 하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학원 자율화를 규탄하는 이들도 많았다. 오연호는 '역사와 민족은 여전히 우리에게 전두환 정권의 비민주성을 국민들에게 알릴 것을 요구한다'고 믿는 자들의 편에 섰다고 한다. '독재 정권이여, 감사합니다' 그게 바로 오연호 인생의 갈림길이었을 것이다. 오연호는 1998년 봄 여섯 살 난 딸 은별이와 17개월 된 아들 민혁이와 함께 모교인 연세대 교정으로 소풍을 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상하였다. "대학 2학년 때의 그 선택은 그 후의 내 인생을 두고두고 규정했다. 내가 감옥에서 사계절을 보낸 것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된 것도, 당시에 '제도언론'이라는 말을 들었던 대기업 언론사의 기자가 되지 않고 대항언론계에서 일하게 된 것도 그때의 선택 때문이었다. 그 길은 역사가 내게 부여한 책무였고, 나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음을 늘,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98년 봄, 그 길의 진달래에 입맞춤하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면서 나는 그 시절의 노래를 읊조린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 날 쓰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비집고 나온다. 인생을 살면서, 부르면 저절로 가슴 깊은 곳에서 눈물이 나는 노래 하나쯤 갖는 것도 복이라면 복일 것이다. 98년 봄 백양로를 걸어가고 있는 후배들이여, 그대들은 무슨 노래를 부르면 저절로 눈물이 나는가? 아, 역사여, 끌려간 선배여, 함께 울던 친우여, 그리고 독재 정권이여, 감사합니다. 눈물 흘리면서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내게 선사해 주신 것을."(<'짭새', 플래카드, 그리고 진달래>, {미래의 얼굴} 1998년 5/6월, 21쪽.) 오연호의 의식 속에 미국이라는 괴물은 1985년 5월에 성큼 들어섰다. 그때 별명이 '촌놈'이었던 절친한 대학 친구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주한 미 문화원에 침입, 건물을 점령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당시 자신의 곁에 있어야 할 친구가 미 문화원을 점령하고 있는 사태를 어떻게 풀이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미국을 미국이라고 부를지 미제국주의라고 부를지를 놓고 철야 토론을 벌이는 선배들을 보면서 미국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가를 처음으로 심각하게 고민해 봤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고민의 결과였을 것이다. 1986년 여름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교육부장이었던 그는 전국의 중·고생들에게 보내는 한 장의 편지를 썼다. 학생들에게 전두환 정권이 왜 나쁜지, 그 정권을 지지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가 왜 나쁜지를, 그 나름대로는 매우 부드럽게 밝힌 편지였다고 하는데, 그 편지는 연세대 총학생회실에서 등사기로 4만 장이 복사돼 전국의 중·고등학교로 보내졌다. 이것이 바로 당시 각 일간지의 사회면 톱을 장식한 그 '(일명) 연애 편지' 사건이다. 오연호는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간 형을 살았다. {식민지의 아들에게} 등 4부작 그 사건 후 오연호는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았다. 미국을 나쁜 나라라고 비방한 편지를 보고 어린 학생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그들에게 미국이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기회를 갈망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갈망 끝에 오연호는 월간 {말} 기자가 되어 전국을 돌면서 현대사의 행간에 숨어 있는 추상적인 미국을 구체적으로 복원해내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화순 탄광에서, 하의도에서, 안동에서, 천안에서, 용산에서, 파주에서 그는 '한국 속의 미국'이 저지른 과거사를 들춰냈던 것이다. 특히 해방에서 분단에 이르는 3년간 미 군정이 우리에게 어떤 짓을 했는가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는 노인들의 증언을 통해 들으면서 그는 현대사를 역류하여 과거의 한가운데에서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 증언들은 분단과 예속의 역사였고, 주한 미군의 역사이자 범죄사였으며, 기지촌 사람들의 한풀이였으니, 그가 어찌 담담할 수 있었으랴. 오연호의 그런 작업은 1989년 '발로 찾은 반미 교과서'라는 부제가 붙여진 {식민지의 아들에게}(백산서당, 7천 원)라는 책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그는 그 이후로도 그 작업을 계속했다. 1990년엔 {더이상 우리를 슬프게 하지 말라}(백산서당, 5천 원)라는 '발로 찾은 주한 미군 범죄 45년사'를 썼으며, 1992년엔 {살아나는 임진강}(돌베개, 4천 원)이라는 주한 미군 범죄가 파괴한 한 가정의 눈물겨운 복원사를 썼으며, 1994년엔 {우리 현대사의 숨은 그림 찾기}(월간 말, 5천5백 원)라는 미국의 한반도 정치공작사를 썼다. 이 밖에 오연호 기자의 저서로는 자유기고가 한상휘씨와 같이 쓴 {김영삼·김대중:경쟁과 공존의 역사}(의암출판, 1992, 4천8백 원)라는 책도 있다. 오연호는 어느 덧 적어도 대학가에선 현대사 연구가요 미국 전문가로 알려졌다. 그 문화권에선 알아 주는 '스타'였으며 '인기 강사'였다. 오연호는 정녕 중·고생들에 대한 '마음의 빚' 때문에만 그 어려운 일을 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는 더욱 큰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숨은 그림 찾기}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현대사를 바로 볼 수 있을까. 대학 시절 나는 우리 현대사의 진실에 목말라 있었다. 그래서 국립도서관에 약 한 달간 파묻혀 1945년 8월 15일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일간 신문을 통독해 봤다. 그 곰팡이 냄새 나는 활자들이 보여 주는 우리 역사의 구릉과 산봉오리와 산맥들은 나를 흥분시켰다. 그러나 신문은 현상을 보여 줬지만 본질을 보여 주진 못했다. 여전히 목이 말랐다. 신문에 보도되지 않은, 보도될 수 없었던 우리 현대사의 숨은 그림을 보고 싶었다. 그간 간행되었던 역사책들을 뒤졌다. 그 책들을 통해 나는 우리 현대사에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숨어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한국 속의 미국'이었다. 그러나 어렴풋했다. 그 바위덩어리에 대한 대략적인 서술과 분석은 있었으되 그 바위의 크기, 뿌리, 생김새, 성분을 파악하긴 힘들었다. 1988년 1월부터 월간 {말} 기자로서 그 숨은 그림을 직접 찾아 나섰다. 매 달 민중과 권부의 실력자들을 만나고 자료를 뒤적이면서 나는 그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우리 현대사의, 다른 곳도 아닌 심장에 꽂혀 있음을 발견했다. 그 바위덩어리를 뿌리째 파내어 들춰보지 않고선 우리 현대사의 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로부터 7년째, 초반의 부끄러운 결실이었던 {식민지의 아들에게}를 낸 지 6년째, 어느 날 문득 숨은 그림을 찾아나선 길을 되돌아보니 그것이 곧 한 권의 우리 현대사 쓰기였다." '재미없는 천국'과 '재미있는 지옥' 오연호가 쓴 네 권의 책은 그 자신의 말 그대로 '한미 관계사 속의 미국'에 관한 것으로 엄격히 말해 미국의 일부였다. 그는 그것만으로 미국을 전부 알아냈다고 말하기엔 기자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으며, 지금까지 취재해 온 '한국 속의 미국'과 앞으로 취재할 '미국 속의 미국'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현지에서 알아 내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면서 미국으로 떠났으며, 미국에서 2년 8개월간 살다가 돌아왔다.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2년 8개월간 미국 생활의 보고서인 것이다. 이 책 제목이 시사하듯이, 이제 그는 더이상 '반미 기자'로 알려졌던 오연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반미 기자'에서 '반미와 친미를 능숙히 배합하길 원하는 기자'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무조건 반미'나 '무조건 친미'를 배격하고 사안과 상황과 필요에 따라 반미할 건 반미하고 친미할 건 친미하자는 말일 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다. 세계에서 가장 폭력적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건재하면서 세계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게 단지 나라의 '사이즈' 때문일까? 그것만은 아닐 게다. 우리가 무언가 미국으로부터 배울 건 없을까? 아니 배우진 않는다 하더라도 미국을 꿰뚫어보면서 우리 스스로 고쳐야 할 점을 발견할 수는 있지 않을까? 이 물음과 관련하여 이 책은 매우 유익하다. 오연호는 미국에 있는 동안 미국 보수 기독교 세력의 유력 인사인 팻 로버트슨 목사가 세운 리전트대학에서 저널리즘 석사 과정을 마쳤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 기독교인이 되어 새로운 삶의 기쁨을 얻었다고 한다. 또 서너 끼쯤은 양식이나 햄버거로 식사를 해도 김치나 된장찌개를 그리워하지 않을 만큼 입맛도 변했다고 한다. 사실 오연호는 그게 두려워 귀국을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한 동안 박사 과정까지 마칠까 귀국할까 고민을 했다는데, 미국에 주저앉을까봐 두려워 서둘러 귀국을 했다는 것이다. 그에겐 할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게 무얼까? "열정을 가지고 개혁시켜야 할 것들이 많지 않다는 점에서, 50년만의 정권 교체 같은 극적인 대하 드라마 같은 것이 나올 수 없는 나라라는 점에서, 언론과 사상의 자유가 완벽하고 공정한 게임의 룰이 잡혀 있다는 점에서 미국은 내게 '재미없는 천국'이었다. 반면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었다. 나는 한국을 재미있는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 젊은 한국인 기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일보를 그대로 두고 기본이 설까? 오연호는 기자라는 직업을 사랑한다. 그것도 오만방자하고 부패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거대 언론사보다 {말}지와 같이 작지만 깨끗하고 꿈이 있는 언론 매체에서 일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매월 월간 {말}에 <워싱턴 통신>을 보내고, MBC 라디오 <세계는 지금>을 통해 1주일에 세 번씩 리포트를 하는 등 언론 활동을 쉬진 않았다. 이제 그는 기자라는 직업의 진정한 명예를 위해 언론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한국이 더이상 미국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IMF 충격과 김대중 정권의 출범이라는 환경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언론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언론 개혁의 기본이어야 하는가? 한 마디로 폼 좀 잡지 말라는 것이다. 폼 잡는 것을 중단하고 세계의 흐름을 잡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란 말이다. 어떻게? 간단하다.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기자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의 전환. 모든 국민은 기자다. 커뮤니케이션의 역사를 거슬러올라가 보면 애초에 기자라는 직업은 없었다. '새 소식을 전해 주는 이웃들'만이 존재했다. '모든 국민은 기자다'라는 명제 아래에서 겸손하게 출발할 때에만 한국 언론계의 후진성은 개혁될 수 있다. …… 나야 폼 잡을 것도 없는 대항언론 기자, 한 달에 한 번 독자와 만나는 월간지 기자지만, 그래도 강단에 몸을 바친 교수들이 회갑 기념 논문을 내듯이 취재 현장에 한 생을 바쳐 회갑 기사집을 내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나부터 반성하고 정신차려야겠다."({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 214∼215쪽) 그의 그런 자세 때문이겠지만, 오연호는 현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오연호의 '기자 만들기'>라는 강좌를 열고 있다. 제1기는 이미 끝났고 제2기가 1999년 1월 23일부터 3월 13일까지 매주 토요일마다 열린다. '대학언론 일꾼 및 언론 진출자'를 대상으로 20명 정원에 회비는 15만 원이다. 게다가 오연호는 현재 조선일보의 위선과 기만을 폭로하는 {말}지의 언론 개혁 운동에 앞장서고 있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판이다. 지난 1월 2일 밤 우연히 텔레비전을 켰다가 무슨 토론 프로그램에 오연호가 출연한 걸 보고 무척 반가웠는데, 더욱 반가운 건 그가 토론 말미에 코리아나호텔의 사우나 비리와 관련하여 조선일보의 뻔뻔함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그 날 토론이 우리 사회의 '기본'이 어떻고 하는 것 같았는데, 무슨 말들이 그리 많을 필요가 있단 말인가? 조선일보를 성역으로 점잖게 모셔 두고서 이 나라에 기본이 설 것 같은가? 오연호는 {말}이 {월간조선}보다 많이 팔리는 세상을 염원하며 그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어찌 생각하면 기가 막힌 세상이다. 모두가 다 기본이 선 사회를 원한다고 떠들면서도 {말}보다는 {월간조선}을 읽는 사람들이 더 많다니 말이다. 정말 이 나라 사람들이 기본이 선 사회를 원하기나 하는 것인지 나는 그걸 모르겠다. 그게 바로 한국이 미국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닐까?◈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