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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4일 목요일 오전 11시 56분 19초
제 목(Title): 창비/이윤재  김지하론-종교적교감을 통한 


김지하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 졸업.
1969년 『시인』지에 작품 발표 시작.
1970년 첫시집 『황토』 간행 이후 『타는 목마름으로』(1982), 『애린』(1986), 
『별밭을 우러르며』(1989) 등과 대설 『남(南)』(1982∼85), 담시 모음집 
『오적』(1985) 등을 간행함.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의 로터스 상 수상.
1981년 국제시인회의(Poetry International)의 ‘위대한 시인상’ 수상.
1992∼93년 『김지하 시전집』 간행.
 
이윤재
  李潤載.
문학평론가.
1963년 광주 출생.
연세대 경제학과 졸업.
연세대 국문과 석사과정 재학중.
창작과비평사의 제5회 창비신인평론상에 「종교적 교감을 통한 치유의 
언어-김지하론」이 당선되어 등단함.
 
▶ 제5회 창비신인평론상 당선작 



 종교적 교감을 통한 치유의 언어 
  
  --김지하론 





  이윤재   




  
 
1

  
 최근 김지하 시인이 ‘율려(律呂)문화운동’을 제창했다.註1) 신문기사라는 
한계를 감안하고 대강의 윤곽만을 살핀다면 이 운동은 ‘우주와 인간의 근원적 
합일을 중시한 동양사상에서 전지구적 구원의 길을 찾으려 한다’는 취지로 요약될 
수 있겠다. 최근까지 행보를 이어온 그의 후기 사상적 흐름의 연속이고 확장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필자의 ‘후기(後期)’라는 말은 물리적 시간의 전후관계를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것에는 은연중 초기 또는 중기와의 대립구도가 스며 
있다. 그의 시에 대한 세간의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시세계의 변모를 
지칭하는 초기시·후기시, 또는 저항시·서정시·생명시 등의 어구 속에 이미 
저항-비저항의 대립구도가 주류의 위치에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자의적인 구성적 결합으로서의 이항대립적 구도는 차이와 동일성을 쉽게 
구분케 해주는 발견적 원칙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비평담론적 편의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만 반면에 대립을 통한 단절을 강제함으로써 자칫 변모 속에 
이어지는 내적 연속성을 놓치게 한다. 또한 평가와 분석에 적용될 때 한번 설정된 
구도를 쉽게 고착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정독(靜讀)의 실패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것을 야기하기도 하고, 눈에 보일 정도로 
명백하긴 하지만 상대적으로 표층적인 변모에 집착하여 나온 산물이라는 
지적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단 하루의 단절도 용납하지 않는 삶의 연속성 속에서 과연 개인에게 그것이 
시적이든 인식론적이든 단절이나 대립구도가 성립할 수 있는 것일까. 주어진 것의 
표면을 넘어서면 현상의 저편에 전혀 다른 힘들이 존재한다는 것, 보이는 것들을 
선행하고 통제하고 설명하는 심층의 의미가 있다는 추론이 이 글의 동력이 될 
것이다. 또한 이 글은 잘 알려진 시인에 익히 통용되는 평가라는 세상의 
풍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나와 주체적 독법을 수행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어려웠던 지난 시기에 그의 시는 무엇이었으며 또다른 의미에서 위기에 처한 
‘지금-이곳’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그의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의 시를 
다시 읽어가는 과정중에 그 심층을 이루는 종교적 치유효과가 드러날 수 있을 
것으로 본다.註2) 
  
 
2

  
 물체의 절단면을 적분하면 부피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수학의 공리이다. 스타일 
혹은 문체의 분리와 혼합을 축으로 서구 문학사를 통찰한 에리히 아우어바흐(E. 
Auerbach)의 『미메시스』에서 인상적인 것은 각 작품의 모든 요소를 함축한 문장 
선택의 정확성과 그 짤막한 인용을 바탕으로 풀어놓은 분석의 치밀함과 
통찰력이라고 생각된다. ‘단면적의 부피에 관한 적분의 모티프’라고 할 수도 
있고 전형성 또는 프로이트의 ‘꿈작업’에서 보이는 압축의 원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지하와 같이 긴 시간 동안 적지 않은 시를 생산해낸 시인에게 
적용하기에 일정한 유용성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다만 시 전체를 투영할 수 있는 
전형적인 작품의 인용이 관건이 될 것이다. 

 황톳길에 선연한 
 핏자욱 핏자욱 따라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었고 
 지금은 검고 해만 타는 곳 
 두 손엔 철사줄 
 뜨거운 해가 
 땀과 눈물과 모밀밭을 태우는 
 총부리 칼날 아래 더위 속으로 
 나는 간다 애비야 
 네가 죽은 곳 
 부줏머리 갯가에 숭어가 뛸 때 
 가마니 속에서 네가 죽은 곳 ─「황톳길」 부분 

 첫 시집 『황토』의 맨 앞에 수록된 시이다. 억울하게 죽은 혼백을 부르면서 
화자도 그 길을 따라간다고 애타게 하소연하고 있다. 죽은 자는 분명 억울하고 
참혹한 죽음을 당했고 이곳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척박하며 화자가 갈 곳 
또한 고통스러운 곳임을 드러내고 있다. 한으로 가득 차 있고 전대의 사건에 대한 
한과 현재의 한을 융합시켜 풀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서구의 경우 
주인-노예 변증법에서 레쌍띠망(ressentiment)으로 이어져내려온 증오와 원한이고 
시인의 시는 그 증오를 동력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시는 우리의 경우 
6,70년대가 새로운 증오와 원한의 동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밀접한 
상동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이 시가 단순히 사회경제적 삶을 독특한 상징적 기호인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거나 사회적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화자는 
억울하게 죽은 혼백에게 자신도 똑같은 고통과 원한에 사무쳐 있고 또한 같은 길을 
갈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위로하고 있다. 시인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굿을 
하고 푸닥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와 그 사회의 역사를 
치유하는 종교적 의식을 수행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무당이고 사제이며 그의 시는 
제의의 문학적 상관물이 된다. 

 이 작은 반도는 원귀(怨鬼)들의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외침(外侵), 전쟁, 
폭정, 반란, 악질(惡疾)과 굶주림으로 죽어간 숱한 인간들의 한(恨)에 가득 찬 
곡성(哭聲)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소리의 매체(媒體). 그 한(恨)의 
전달자(傳達者). 그 역사적 비극의 예리한 의식. 나는 나의 시(詩)가 그러한 
것으로 되길 원해왔다. 강신(降神)의 시로.註3) 

 그의 시집 후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 이러한 의식은 그의 후기시에서도 
보인다. 

 내가 가끔 
 꿈에 보는 집이 하나 있는데 
  
 세 칸짜리 초가집 
 빈 초가집 
  
 댓돌에 피 고이고 부엌엔 
 식칼 떨어진 
  
 그 집에 
 내가 사는 꿈이 하나 있는데 
  
 뒷곁에 우엉은 
 키 넘게 자라고 거기 
 거적에 싸인 시체가 하나 
  
 아득한 곳에서 천둥소리 울려오는 
 잿빛 꿈속의 내 집 
 옛 고부군에 있었다는 
 고즈넉한 
 그 집. ─「逆旅」 부분 

 꿈을 매개로 했을 뿐 ‘핏자욱’과 ‘식칼’, ‘가마니’와 ‘거적’ 등의 
시어에서 밀접한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고부군’에서 암시하는 역사적 장면과 
현재의 화자를 시간적 원근법을 무시한 채 겹쳐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시작(詩作) 
과정을 꿈작업과 유사하게 생각한 논자들의 언급은 시인의 창작과정과 창작심리를 
이해하는 데 일정한 암시가 된다. 프로이트가 꿈작업이라 부르는 것의 요소 중에서 
복합적인 여러 요소가 겹쳐 있는 중층결정과 그로 인한 모호성을 드러내는 압축, 
그리고 위장을 위하여 잠재적인 꿈사상을 꿈의 요소들로 대치하는 전치(轉置)는 
시와의 유비에서 중요한 요소를 이룬다. 프로이트 이후 유사성과 인접성은 언어의 
두 가지 축으로 설정되었고, 뒤이어 유사성에 기초한 압축은 은유의 축에, 그리고 
인접성에 기초한 전치는 환유의 축에 제한됨으로써 은유와 환유라는 수사학적 
비유와 동일시되었다.註4) 발레리(P. Valery) 역시 꿈의 우주와 시의 우주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꿈은 독특하고 사적인 랑그(langue)를 
배경으로 해서만 이해될 수 있는 하나의 빠롤(parole)이며 신화에서처럼 그것의 
상징은 철저히 자의적인 기호라는 점도 시 분석시 유의해야 할 대목이다. 
초기시부터 후기시에 이르기까지 수미일관하게 보이는 종교적 치유의식은 
「황톳길」에서 보여준 정서가 시인의 시작 전체를 받치는 바탕이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검은 산 하얀 방』에 이르면 말에 들려 시를 쓰는 영매의 단계가 
보인다. 

 그러나 나는 단 한줄도 그것을 써내지 못했다. 그러던 중 해남에서 어느 날 밤 
우연히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상태에 접혀들며 속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한 소리, 
잇달아 떠오르는 느낌, 생각, 울부짖음, 마치 내가 아닌 그 누군가가 내 속에서 
불러주는 듯한 소리가 있어 그대로, 취한 듯 정신 잃은 듯 떠오르는 그대로 
구술하기 시작했고 아내가 그걸 받아썼다. (…) 그 소리 속에서 움직이는 종잡을 
수 없는 어둡고 비통한 흔들림과 눈부신 흰빛의 섬세한 떨림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 이것이 ‘검은 산’과 ‘하얀 방’이다.註5) 

 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발레리가 말한 ‘시적 상태’의 경험과 거의 유사한 
것이다. 

 내가 사는 거리를 따라 걷다가 나는 갑자기 내게 엎눌려지는 하나의 리듬에 
‘사로잡혔으며’ 그것은 곧 나에게 하나의 낯선 가동(稼動)작용의 인상을 
주었습니다. 마치 누가 나의 ‘살아가는 기계’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그러자 또 하나의 리듬이 와서 처음 것과 겹쳐졌습니다. 그리고 두 
법칙 사이에 나도 모를 어떤 ‘횡단’관계들이 성립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나의 걷는 다리의 운동과 내가 중얼거리던 아니 오히려 ‘나를 써서’ 
중얼거려지던 나도 모를 어떤 노래를 결합시키는 것이었습니다.註6) 

 ‘또 하나의 리듬이 와서 처음 것과 겹쳐졌다’는 대목은 시인이 ‘겹그늘’이란 
말로 표현한 바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생산된 시의 하나가 「호랑바우」이다. 

 돌이 소리 질렀다는데 
 나는 듣지 못했는데 
 돌 속에서 아이들이 노래불렀다는데 
 나는 아직 듣지 못했는데 
 돌 뒤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는데 
 난 보지 못했는데 
 엄마를 부르며 
 아빠를 부르며 
 아이들이 노래불렀다는데 
 나는 듣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돌 위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통곡해 울었다는데 
 나는 보지 못했는데 
 하늘은 어찌 저리도 푸른 것이냐 
 삼화사 종소리는 
 내 신발 끝에 눈물과 함께 떨어지는데. 
 ─「호랑바우」 전문 

 시인은 언어 밖에 있고 말이 시인을 사용한 것이다. 무당인 시인이 신에 들려 
굿을 함으로써 원혼을 치유하는 것이다. 시는 춤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때처럼 
무언가를 지시하거나 드러내려는 의도 없이 창작된 것이다. 또한 소리와 의미 
사이를 진동하는 그네추의 비유처럼 의미를 생산하는 데 소리와 리듬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의미의 일관성이나 인식지향적 성격보다는 단지 ‘말들을 써서 
시적 상태를 만드는 일종의 기계’로서의 시인 것이다. 
  
 
3

  
 거의 같은 시기에 씌어진 또 다른 작품을 보자. 

 하아따 
 꼴에 
 밭두둑에 반 묻혀 
 반만 나온 비닐 조각 씨허연 
 저 징그런 놈이 
 꼴에 
 바람결에 나붓나붓대며 
 아침 새 햇살을 
 먹어라 튕겨라 먹어라 튕겨라 
 하아따 
 꼴에 
 그 꼴에 
 하냥 할랑할랑하는 한 떨기 분홍꽃이여 
 날맞이 소복 무당 초가망석굿이여 웜메 
 파묻어도 안 없어지고 
 불살라도 공중에 그대로 남고 
 물에 뜨면 오대양 큰 바다 
 수백 수천 년 갈고 돌아다니고 
 썩도 않고 삭도 않고 끄떡도 않고 
 아 그런 징그런 놈이 
 꼴에 
 하아따 
 꼭 산 놈 같다야 
 밭에서 돋은 산 놈 
 어째 오늘은 꼭 
 무슨 영물 같다야 
 가사 한삼에 꽃고깔 쓴 영물 ! 
 ─「비닐」 전문 

 익숙한 사물을 이리저리 굴려 낯설게 하는 시인의 재주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지각의 자동화에 대항하여 대상을 새로운 인식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의미론적 
전환으로 사물을 낯설게 하고 있고 지각의 어려움과 지속시간을 증가시키는 이러한 
과정이 「비닐」을 문학텍스트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비닐은 단지 낯설게 
하기 위해서만 고안된 시적 소재로 그치지 않는다. 물론 마들렌느라는 과자의 맛이 
어느 날 오후 프루스뜨(M. Proust)에게 옛날의 무의식적(또는 무의지적) 기억을 
되찾게 해주었듯이 비닐이란 소재 역시 전혀 우연의 문제이다. 그리고 낱낱의 
시편은 독립된 단위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시인의 여러 작품은 상호보족적인 
가족유사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한에서 상호계시적일 수 있다. 따라서 한 
시편이 다른 시편의 해설이 되어주는 경우도 많다. 

 소주에 취해 다시 보니 아뿔사 허허 
 새카맣게 까마귀떼 덮인 
 흰 소금덩어리, 흰 비닐덩어리, 흰 얼음덩어리 
  
 가끔씩 
 얼음에 갇힌 흙 꼼지락거려쌌고 
 풀씨 틔우려 이따금씩 보시락거려쌌고 
 ─「원주길」 부분 
  
 시드는 것이 좋다 
 살아 있기에 
 썩는 것이 좋다 
 산 것이기에 
 참말로 썩은 내 눈 
 참말로 피기도 전에 시들어버린 내 마음 
 이제껏 그토록 비닐만 좋아했기에. 
 ─「그 소, 애린 28」 전문 

 「원주길」에 나타난 비닐은 풀씨를 틔우기 위해 뚫고 나와야 할 극복의 대상인 
얼음과 같은 이미지로 사용되었고 「그 소, 애린 28」에서는 썩지 않는 속성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비닐」의 “파묻어도 안 없어지고……” 부분을 더한다면 
시인에게 비닐은 우연히 접한 사물이 아니라 의식의 심층에 도사린 불편한 감정의 
객관적 상관물이고 시인은 시작을 통해서 그런 감정을 수시로 처리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그것을 영물로 비유하는 대목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뭔가 낯익은 
것에서 느끼는 두려운 낯설음(Das Unheimliche)과도 연관지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은 시작을 통해서 비닐로 표상된 불편한 감정을 치유하고 있는 것이다. 시는 
관습적 방식의 인식과 가치판단을 부수기도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를 새롭게 
보거나 그것의 새로운 면을 보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동시에 우리가 거의 
통찰하지 못하는 존재의 근저를 형성하는 심오하며 이름 붙여지지 않은 감정들을 
드러내어 우리로 하여금 좀더 잘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치유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는 것이다. 「비닐」을 산문으로 쓴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저기 밭두둑에 반 묻혀 반만 나온 징그런 놈이 있다─한 떨기 분홍꽃 같기도 하고 
무당 초가망석굿처럼도 보인다. 그놈은 파묻어도 안 없어지고 불살라도 공중에 
그대로 남고 물에 뜨면 오대양 큰 바다 수백 수천 년 갈고 돌아다니고 썩도 않고 
삭도 않고 끄떡도 않고 아 그런 징그런 놈이다. 꼭 산 놈 같고 오늘은 무슨 가사 
한삼에 꽃고깔 쓴 영물 같다─그놈은 비닐이다! 

 
4

  
 「비닐」이 앞서 다룬 시들과의 변별점이 있다면 그것은 치유의 대상이 시인 
자신으로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타인의 가슴속에 있는 한과 고통이 이미 
자기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브레히트(B. Brecht)의 시 「후손들에게」에서 
(비록 당시의 스딸린주의에 대한 변호라는 색채가 강하지만) 적절한 표현을 얻은 
‘정의의 자기훼손 원칙’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훼손의 대상에서 거리가 
있긴 하지만 타인의 고통 한복판에서 병들어버린 시인 자신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고 본다. 시인 자신이 “때론 천둥과 번개 속에서 벌거벗고 떨었고 숱한 세월 
술에 파묻혀 허우적거렸는가 하면 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자지러지기도 
했다”註7)고 고백하듯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통과하면서 몸과 마음이 
지치고 나약해져 있음을 그의 많은 시는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외롭다─외롭다─’류의 시편들보다는 소외와 공포의 시에서 응축되어 나타난다. 
소외와 공포야말로 인간사의 모든 고통과 실패의 변형된 의식상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아직은 저를 데려가지 마십시오 
 아이들을 먹이고 키워야 합니다. 
 아이들을 제 수명까진 데려가지 마십시오 
 지난날에 이어 앞으로도 제 삶이라는 것 
 아예 없을 것이매. 
 ─「그 소, 애린 27」 전문 

 단명의 공포가 엿보이는 시이다. 시인은 절대자에게 빌고 있다. 지난날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겠으니 자신을 아이들과 함께하게 
해달라고 빌고 있다. 시인의 모습에서 연민의 정을 느낀다. 자신이 단명하고 
자식들이 고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자신만만한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소외의식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까지 번져 있다.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 
 아이들마저 이제는 
 말대답이 느리다 ─「그 소, 애린 6」 부분 

 이 시기의 시편들은, 시인이란 존재는 자신의 실패를 항상 외부의 간섭 탓으로 
돌리지만 실은 가장 심오한 (자기)선택으로 본시 패하도록 구속된 사람이라는, 
시가 실패와 좌절에서 나온다는, 그리고 진정한 시인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패배를 선택한다는 말이 김지하 시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스스로의 구원이 가장 큰 문제가 된다. 자신을 치유하는 
종교로서 시를 설정한다. 또한 그 시는 독자를 치유한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이미 
상처입은 독자를 규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순한 생활 소묘를 다룬 시의 
배면에서 엿보인 고통과 쉽사리 해결될 수 없는 갈등은 시인으로 하여금 
분신(分身, Doppelg ger)체험의 시에서 모순된 자아에 대한 시적 해결을 시도케 
한다. 

 아슬아슬하게 두 사람 서 있다 
 옛날엔 번창했던 포구 
 고천암 막아 
 이제는 폐항 돼버린 해창 
  
 통운 창고 앞에 아득하게 서 있다 
 한 사람은 취해 한 사람은 깨어 
 개마저 짖질 않고 
 국밥집 터엔 바람만 불고 
  
 다가서는 나를 꼼짝 않고 노려본다 
 멀리서 물오리들 떼지어 헤엄치고 
 삭은 똑딱배 물결에 흔들리고 
  
 구름 낮게 드리운 날 거기 그 자리 
 내가 서 있다 
 반쯤은 취해 반쯤은 깨어 
 둘로 찢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사그라드는 노을 함께 
  
 아득하게 사라진다 
 짐차 떠나는 소리 
 차 모습마저 고개 너머 자취 없고 
 두 사람도 사라진다. 
 ─「해창에서」 전문 

 이제는 폐항이 되어버린 포구의 쓸쓸한 분위기와 창고 앞에 아득하게 서 있는 
화자 내면의 고독이 조화를 이룬 명편이다. 화자의 내면에서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는 자아의 모습이 시적 긴장을 획득하고 있다. ‘한 사람은 취해 한 사람은 
깨어 나를 꼼짝 않고 노려’보는 이들은 ‘반쯤은 취해 반쯤은 깨어 둘로 찢어진 
채 아슬아슬하게 (내가) 서 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화자의 분신임을 전하고 
있다. ‘노려본다’는 시구는 분신의 존재가 화자에게 그리 친화적이지 못함을 
드러낸다. 화자는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자신의 위태로움을 알고 또한 간절하게 
통합을 갈망한다. 그리고 분신들이 사라짐으로써 자아가 통합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하나의 자기가 있다는 생각은 하나의 도피적 시도일 수 있고 자신의 
역사적·실존적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던 자신감 결여와 갈등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적 도구로 이용될 때 그것은 시인에게 방어메커니즘으로서의 승화능력을 
부여한다. 즉 프로이트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말한 ‘반복강박의 
원리’(해결할 수 없는 문제, 제어할 수 없는 위협적인 상황에 다시 부딪쳐보고 
싶어하며 거기를 계속 직면하고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에 
의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통해서 현실로 
복귀하고 그것과의 긴장을 회복하려 한다. 시인에게 시작이란 결국 자아의 
분해뿐만 아니라 그것의 통합 수단이고, 자아로부터의 도피이면서 잃어버린 마음의 
평화를 되찾기 위한 매개인 것이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삶과 체념에 대한 면역은 
없는 것이며 분신체험은 쉬운 해결이고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허망한 것임을 시인은 
또한 말하고 있다. 

 바람 스산타 
 스산함 타고 앉으면 
 바람 속이 내 집 
  
 어렵구나 
 이리 쉬운 걸 
 아직 채 못 깨쳤으니 
 깨쳤건만 
 아직도 스산하니. ─「진리」 전문 

 미적착각이란 의식적인 자기기만의 한 형태이며 상상적 해결일 뿐인지도 모른다. 
  
 
5

  
 시인은 이제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절박한 상황에 서 있다. 시인의 
절박한 심정은 그의 시 도처에서 그 표현을 얻고 있다. 「그 소, 애린 50」에서 
이미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이거나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이고 “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 끝”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제 ‘캄캄 벼랑’으로 묘사되는 
「생명」을 보자. 

 생명 
 한 줄기 희망이다 
 캄캄 벼랑에 걸린 이 목숨 
 한 줄기 희망이다 
  
 돌이킬 수도 
 밀어붙일 수도 없는 이 자리 
  
 노랗게 쓰러져버릴 수도 
 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 
 이 마지막 자리 
  
 어미가 
 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 
 생명의 슬픔 
 한 줄기 희망이다. ─「생명」 전문 

 “캄캄 벼랑”에 이어 “돌이킬 수도/밀어붙일 수도 없는” 그리고 “노랗게 
쓰러져버릴 수도/뿌리쳐 솟구칠 수도 없는/이 마지막 자리”라고 말함으로써 그 
절박감과 비장함은 더하지만, 기실 한 줄기 희망으로서의 생명을 깨달은 기쁨을 
노래하고 있고 위의 절박감의 표현은 환희의 감정을 표현하는 반대급부로 사용되고 
있다. 생명이란 단어를 사용하면서 느껴지는 다분히 추상적 성격은 
“어미가/새끼를 껴안고 울고 있다”라는 구체적 묘사로 상쇄되고 일정 정도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시인의 생명에 대한 사랑은 어미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새끼를 넘어서 자연으로 확장된다. 시인은 자연의 왕성한 생명력에 기대어 자신의 
치유를 기도한다. 

 내가 타죽은 
 나무가 내 속에 자란다 
 나는 죽어서 
 나무 위에 
 조각달로 뜬다. ─「★★부분」 

 상처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자신과 죽어가는 자연만물의 동일시와 상호교감을 통해 
자연의 생명 살림이 곧 시인 자신을 살림임을 알고 시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다.註8) 교감이 종교의식적인 요소를 내포하는 경험의 개념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과의 교감 역시 종교적 의미를 띠게 되고, 시작으로 매개되는 교감과 
동일시를 통한 치유 또한 종교적 성격을 지닌다. 나아가 합일의 대상은 우주의 
삼라만상과 무궁한 시간의 연속으로 확장된다. 

 내 속에 
 텅 빈 속에 
 바람처럼 움트는 
 웬 첫사랑 우주사랑 ─「無」 부분 

 그러나 그의 시는 “내 나이/몇인가 헤아려보니//지구에 생명 생긴 뒤 
삼십오억살/우주가 폭발한 뒤 백오십억살/그전 그후 꿰뚫어 무궁살//아 
무궁”(「새봄 8」, 『중심의 괴로움』)에서 보듯 사소한 일상과 구체를 
잃어버리고 만다. 김지하 시인의 시적 성취에 대한 전면적인 동의를 미루는 것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의 종교적 교감에 대한 정당성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성취를 문제삼는다면 시인의 생명시편들은 일상과 구체의 
소멸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태초에 생명이 있었고 언어는 생명의 
그림자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를 포함한 모든 문학장르에서 
중요한 것은 추상적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구체를 통해서 매개된 관념이요 
이념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나 대상이 먼저이고 그 속에 관념이 숨어야 한다고 할 
때 생명시편들의 시적 성취는 미진하다고 할 것이다. 
  
 
6

  
 모든 발생학적 인과관계가 어떠한 미학적 등가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작품의 미적 가치는 심리적 등가물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작품에 
대한 심리적 접근은 형식적 주조물의 자율성과 그것의 미학적 특성에 관해 
설명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어떤 감정적 동기가 예술적 의미를 얻는 것은 그 
동기가 들어 있는 작품의 전후관계에 힘입은 것이지 그 동기가 담고 있는 체험의 
전후관계로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이 살아온 내력이 아니라 시 
자체로서 예술적 생명을 갖는다’고 했듯이 김지하 시인의 시적 성취는 뛰어난 
서정성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시 자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시적 
성취와 더불어 종교적 성격의 치유기능을 동시에 수행해온 것으로 파악된다. 
역사적 현실과 자아 사이에 놓인 거리의 유무와 시적 형상화에 있어 구체성의 
다소에 관계없이, 그것의 배면에는 형태만 달리할 뿐 지나간 혼백들과 자신, 독자, 
그리고 세상만물과의 교감을 통한 치유의 언어가 흐르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지만 그러한 치유적 효과도 직접경험의 유행성과 시간의 풍화 앞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치러낸 지난 십년 세월의 양극단에서 
김지하의 시가 울리는 심장 박동수가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시인의 작품이 시간의 
풍화에 침식당하는 부실한 작품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직접경험의 단단치 못함을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비평은 직접경험에서 출발하지만 비평이 이에 
의거해서 구축될 수는 없다는 것, 문학의 직접적 경험을 비평의 구조에 
끼워넣으려고 할 때 취미의 역사에 관한 여러가지 변체(變體)가 나오게 되고 
역으로 비평을 문학의 직접적 경험에 개입시키려고 한다면 이 양자가 각각 가지는 
자체의 일체성은 파괴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한다고 할지라도, 그의 시가 주는 
울림과 치유적 효과는 반감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 가리지는 못할 것이다. 
시인에게 어떠한 형태로든 기능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싸르트르(J. P. 
Sartre)의 지적대로 ‘앙가주망(engagement) 불가(不可)’註9)라는 시 장르 자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가장 ‘유연한’ 노동력을 찾아 헤매는 제국주의적 
자본과 국가 단위의 도박판을 휩쓰는 국제투기자본에 무방비로 노출된 노동에 
대한, 그리고 세기말의 문명 전환에 대한 명쾌한 대비책을 내놓으라고 채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익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공연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지난 겨울 드레퓌스(Dreyfus)사건 백돌을 즈음하여 씨라끄 
대통령이 에밀 졸라와 드레퓌스 가족들에게 프랑스의 이름으로 공식 사과서한을 
전달한 행사가 있었다. 이를 두고 한 비평가는 “그것이 사필귀정의 측면보다는 
오히려 지식인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우울한 조종(弔鐘)으로 비치며 졸라의 죽은 
혼에 프랑스 정부가 헌정하는 항복의식은 지식인의 죽음을 선포하는 프랑스 정부의 
유연한 자신감의 표현 또는 능란한 예방혁명의 책략이기 십상”註10)이라고 했다. 
여기서 ‘능란한 예방혁명의 책략’이란 아마도 “그리스도가 돈 많은 젊은이더러 
그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일렀을 때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려 한 것이 아니고 돈 많은 젊은이를 도와주려 한 것”註11)이라고 한 헨리 
조지(Henry George, 미국의 경제사상가)의 해석과 유사한 의미일 것이다. 여기에 
얼마전 김대중 대통령의 망월동 방문을 연결시킨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예수의 
충고를 탓할 수는 없다. 씨라끄의 행위를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더하여 
김대통령의 망월동 헌화 역시 차라리 때늦은 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삼라만상 
모두를 긍정하고 사랑하는 태도 역시 한편으로 허점이 생길 수 있으며 누군가 그 
허점을 역이용하는 경우가 허다함을 우리는 보아왔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본래의 의도와 관계없이 기성체제의 현상유지와 지배계급의 이익에 봉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경구를 들추는 것은 선각자를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는 
우매와 불경스러움일지도 모른다. 하여튼 김지하 시인은 지금 ‘율려’라는 
또하나의 씨를 뿌리려 하고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내 별명 중의 하나다. 씨만 
제대로 뿌리고 간다 해도 억울할 것은 없겠다. 다만 만연된 죽임 속에서 삶을 
삶답게 살리려 애쓰노라면 그 과정이 곧 꽃이 아니랴!” (「自序」, 
『밤나라』)라는 시인의 말은 지금 이 시점에서도 걸맞다고 생각된다. 아직은 
활자로 구체화되지 않은 그의 새로운 생각의 씨 뿌리기가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현존사회주의의 몰락과 신자유주의의 발흥, 그리고 ‘제3의 
길’을 모색하는 전지구적 조류 속에서 ‘동양사상에서 전지구적 구원의 길’을 
도모하는 시인의 암중모색의 결과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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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일보』 1998년 9월 26일. 
2) 텍스트는 솔 출판사에서 간행한 김지하 시전집 1권 『밤나라』(1993)와 2권 
『모란 위 四更』(1993), 그리고 『중심의 괴로움』(1994)으로 한다. 
3) 한얼문고판 『황토』(1970) 후기, 『밤나라』 313면. 
4) “프로이트의 꿈에 관한 작업에 대한 이와같은 언어학적인 적용은 이번에는 
알뛰쎄르가 그것을 역사적인 사건 자체에 적용함으로써 다시 배가된다. 역사적 
사건들은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인과적으로 중층결정된 것으로, 한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전이로서의 전치의 과정과 혁명적 순간에 역사적 구조에서 그때까지의 
모든 개별적 부분들이 속속들이 정치화되고 서로 동일시될 때의 압축의 과정을 
형성한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거기서는 정치적 혁명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표현하는 하부구조 내에서의 심층적 모순들의 제시나 재현과 같은 무엇으로 
보인다.” 프레드릭 제임슨, 윤지관 옮김, 『언어의 감옥─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 1985, 104~5면. 
5) 분도출판사판 『검은 산 하얀 방』(1986) 서문, 『모란 위 四更』 316면. 
김지하가 “고등학교 3년 동안 서울에 넘쳐흐르는 외국문화의 흡수에 몰두하여 
모더니즘적인 것을 쫓아다니다. 오든, 스티븐 스펜더, 루이 맥니스, C.D. 루이스와 
초현실주의적인 딜런 토마스 등의 시를 외국어로 읽고 그중 딜런 토마스에게 가장 
매료되다”(『밤나라』 330면)는 기록을 보면 시인에게 이러한 경험이 그리 낯선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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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발레리, 박은수 옮김, 「시와 추상적 사고」, 『발레리선집』, 을유문화사 
1971, 193~94면 
7)「自序」, 『밤나라』 10면. 
8)‘아스라한’ 경계에서 더 나아간 곳이 자연과의 교감과 동일시를 통한 
합일이라는 점에서 볼 때 백무산 시인에게서 놀라운 유사성을 인지하게 된다. (두 
시인의 유사성이 영향과 수용에 이은 지음知音의 신호인지, ‘영향 없는 유사성’ 
또는 유사한 문학적 표현들을 생성시킨 사회적 구조의 필수적인 유사성을 의미하는 
‘자생’self-generation이론의 개인간 문학적 변용인지에 관해서도 논의할 만하나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옛길 버리고 왔건만 
 새 길 끊겼네 
 (…) 
 나아가지 못하나 머물지도 못하는 곳 
 아스라이 허공에 손을 뻗네 
 나 이제 모든 경계에 서네 
  ─「경계」(『인간의 시간』, 창작과비평사 1996) 부분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사람들이 지나간다 
 새들 날아와 가지에 들어와 앉고 
 잎들은 밖으로 난다 
 안에서 밖으로 난다 밖에서 안으로 난다 
 환하다 
 (…) 
 비갠 여름날 오후의 공단천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 
 플라타너스가 걸어간다 
  ─「플라타너스」(『인간의 시간』) 부분 

  그러나 백무산의 변별점과 미덕은 그가 플라타너스와의 교감을 통해 자연의 
생동력을 얻고(비갠 여름날 오후처럼 환해지고)난 후 다시 구체적 공간인 
공단천변으로 돌아온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9) J. P. 싸르트르, 김붕구 옮김, 『문학이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1972, 
14~15면.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작곡가가 음악에 의미를 붙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감히 화가나 음악가에게 그 자신을 구속할 것을 
요구할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예를 든 화가나 음악가의 경우와는 반대로 작가는 
의미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그 안에서도 또 구별이 필요하게 된다.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갖는 영역 그것이 산문이다. 그러나 시는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 쪽에 가깝다─어째서 내가 시를 구속하려 하겠는가?” 그러나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말라르메, 랭보 등 상징주의 시인을 예로 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의 시 
전체에 대한 전면적 적용은 유보되어야 할 것이다. 
10) 최원식, 「지식인 사회의 복원을 위한 단상」, 『문학과사회』 1998년 봄호, 
110~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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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A. 하우저, 백낙청·염무웅 공역,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 
창작과비평사 1974, 15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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