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4일 목요일 오전 11시 41분 02초 제 목(Title): 서경식/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서경식 1951년 일본 교또(京都)에서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남. 1974년 와세다 대학 문학부 프랑스문학과 졸업. 저서로 『길고 험한 길』 『황민화 정책에서 지문 날인까지―재일 조선인의 ‘소화사(昭和史)’』『나의 서양미술순례』 등과 편역서 『서형제(徐兄弟)의 옥중 편지』가 있음. 현재 일본 호오세이(法政) 대학 출강. 재일조선인이 나아갈 길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서경식 ■한국의 독자들에게 이 글은 작년 5월 24일 일본의 역사학연구회에서 발표한 논문의 요지이다. 원래의 논문은 『歷史學硏究』(靑木書店) 1997년 10월 증간호에 게재되었는데, 이번에 약간 손질하였다. 작년의 역사학연구회 대회는 ‘근대 일본의 마이너리티(minority)’를 주제로 오끼나와(沖繩)·여성·재일조선인 문제를 거론했는데, 필자는 그 가운데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보고를 의뢰받았다. 여기서 확인해두고 싶은 것은, 이 글에서 말하는 ‘재일조선인’이란, 한국에서 종종 오해되듯이 조총련에 소속된 재일동포라는 의미가 아니며, 또 일본정부가 부과하는 외국인 등록에서 ‘조선적(朝鮮籍)’으로 기재된 사람이라는 제한된 의미도 아니다. 필자는 어떤 재일 민족단체에 소속되어 있건, 또 외국인 등록에 어떻게 기재되어 있건, 본래 조선반도에 동일한 출자(出自)를 갖고,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의 결과 구종주국인 일본의 영역에서 생활하게 된 민족집단의 총칭으로서 ‘재일조선인’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에 대해 ‘재일한국인’이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 국민이라는 ‘국민적 귀속’ 개념으로 ‘재일조선인’이라는 ‘민족적 귀속’ 개념의 범주에 포함되는 좀더 작은 집합을 가리킨다. 일본사회와 매스컴 등에서는 ‘재일 한국·조선인’이라는 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 용어야말로 분단체제를 반영한 호칭이다. 또한 최근에는 그저 ‘재일(在日)’이라는 용어로 재일조선인을 가리키는 경우도 많지만, 이는 ‘일본에 산다’는 상태를 표시할 뿐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거주하게 된 역사적 경위를 은폐하고 재일조선인이 조국과 맺은 정치적·정신적 연관을 단절시키는 기능을 하는 호칭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 필자가 주장하는 논점 중 하나는, 조국에서의 민주화의 추진과 민족통일의 실현, 나아가 재외동포까지 대등한 구성원으로 삼는 전민족적 ‘네이션’(nation)의 형성이라는 정치적 과제들이, 재일조선인에게도 자기해방을 위한 불가결한 전제조건이라는 점이다. 재일조선인은 조국의 남북동포와 손을 맞잡고 이러한 과제에 들러붙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이 글의 결론에서는, 간단하긴 하지만 이처럼 새로운 ‘네이션’의 발전 방향을 구상해보았다. 재일조선인은 식민피지배와 민족분단이라는 고난의 민족사가 낳은 이산민(diaspora)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한국 국내동포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이해는 결코 충분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우리 재일동포도 당연히 조국을 알기 위해 좀더 노력해야 하지만, 국내동포 역시 재외동포까지 포괄하는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분단체제’를 극복할 진정으로 새로운 ‘네이션’을 구상하는 노력이 요청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내동포가 가진 ‘민족’ 관념에 가령 혈통주의적 내지 문화본질주의적 경향이 있다면, 그 경향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족’ 관념을 발전시켜야만 할 것이다. 국내동포는 재일동포를 일본사회의 ‘마이너리티’로 간주할 것인가, 아니면 함께 창조해갈 새로운 ‘네이션’의 대등한 구성원으로 생각할 것인가? 정부당국뿐만 아니라 재야단체들도 자신의 정치과제와 장래구상 속에 재일동포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인지 자문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 글이 국내동포와 재일동포를 잇는 그런 활발한 논의의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민족’ ‘국민’ 등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nation’은 어느 하나의 고정적 기성개념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 원어 그대로 사용했다. ‘ethnicity’도 마찬가지임을 밝혀둔다.) ------------------------------------------------------------------------------- - 재일조선인의 현재 ‘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맺음말─재일조선인 입장에서의 ‘네이션’ 구상 나는 처음부터 ‘일본의 마이너리티’라는 주제로 보고하는 데 저항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어떤 장소에서 ‘정의’내릴 것인가 하는 문제, 말하자면 ‘자기정의의 권리’와 관련된 저항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를 일방적으로 분류·규정’하는 행위는 분류하는 쪽에 ‘보편’ ‘권위’ ‘정당성’의 위치를 부여하여 권력을 장악하게끔 만든다”註1)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최근 매우 우려되는 것은 ‘제국(帝國) 다시 한번’이라는 담론의 흐름이 일본 학계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이다. 오늘날만큼, 민족자결의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무질서하게 신봉되는 나머지, 국민국가가 우후죽순처럼 마구 생겨나 새로운 국제환경이나 질서의 청사진을 그려내기 어렵게 된 시대도 없다. 그래서 (…) ‘제국’의 경험과 시행착오를 되돌아보는 데 의미가 있다.註2) 이러한 어조는 구조적으로 발언자 자신을 아무런 의심 없이 ‘보편’ ‘권위’ ‘질서’의 위치에 놓는 것이며, ‘제국’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스스로를 ‘주권자=국민’으로 형성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무질서한 ‘야만족’이라고 ‘정의’내리는 것이다. 또한 위의 논자는 어떤 대담에서 “제국이라고 하면 바로 지배계급과 지배민족, 민족과 계급이 대응되는 듯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장치를 갖고 있죠. (…)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대일본제국이 조선을 병합했다는, 비판받아야 할 문제는 별도로 논의해야겠지만 말입니다”라고 말한다.註3) 그가 말하는 ‘장치’란 “제국이 갖고 있던 민족성을 초월한 듯한, 일종의 능력본위주의 혹은 업적주의”를 가리킨다. 그러나 지배민족이 자기에게 유익한 한도 내에서 피지배민족의 일부를 등용하는 장치는 결코 차별구조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교묘한 지배장치와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대일본제국’의 지배 아래서 ‘소수민족’으로서의 조선인이 어떤 지위에 놓였던가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부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대일본제국’은 대외적으로는 조선인을 ‘일본 국적’에 의해 ‘일본 신민(臣民)’이라는 지위로 묶어놓으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조선 호적’에 의해 본토의 일본인, 즉 ‘야마또(大和) 민족’과의 차별을 관철시켰다. 어떤 이는 이 교지(狡智)로 가득찬 구속과 배척의 씨스템을 가리켜 적절하게도 ‘일본인이라는 감옥’으로 표현한다.註4) 1. 재일조선인의 현재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을 맞아 조선인의 압도적 다수가 ‘일본인이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된 데 기뻐하며 스스로의 독립국가를 수립하여 그 주권자가 되기를 희구했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런데 조선반도의 남북분단이라는 사태가 조선인의 이러한 지향을 크게 제한하고 왜곡했던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는 ‘재일조선인’을 “일제 식민지지배의 역사적 결과로 구종주국인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라고 규정한다. 재일조선인이 ①‘소수민족’ 일반과는 달리 ‘본국’을 가진 ‘정주(定住) 외국인’이라는 점, ②‘이민과 그 자손’ 일반과는 달리 그 정주지(定住地)가 다름아닌 구종주국이라는 점, 이 두 가지를 명확히하기 위해서 이렇게 규정한 것이다. 덧붙여서 재일조선인은 ③ 본국이 분단되어 있고, ④ 그 본국(특히 ‘북’)과 일본이 분단되어 있는, 횡적으로도 종적으로도 분단된 존재이며, 그러한 분단선을 개개인의 내부에까지 보듬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멸해가는(?) 재일조선인─생활과 의식 1995년말 현재, 일본 내에 외국인 등록을 한 ‘외국인’은 1,362,317명인데 그중 ‘한국·조선’ 국적자는 666,376명(48.9%)이다.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는 한국·조선 국적자 수는 90년대 들어 격증하고 있으며, 95년에는 처음으로 연간 1만명을 넘어서서 10,327명이 되었다. 귀화제도가 시작된 1952년부터 지금까지의 귀화자는 모두 20만명쯤이다. 더욱이 1985년부터 일본 국적법이 부모 양계주의(兩系主義)로 개정된 결과, 한국·조선 국적의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 출생한 자식들이 일본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한국·조선 국적자 수는 연평균 5,500명씩 감소하고 있다.註5) 10년 후의 한국·조선 국적자 수는 484,300명으로, 20년 후에는 306,000명으로 감소하리라는 추계도 나와 있다. 이처럼 한국·조선 국적자 수가 감소 경향을 보이는 게 사실이지만, 이런 경향을 조건짓는 일본과 본국의 정치적·사회적 상황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으리라고는 단언할 수 없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약간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설령 최후의 한국·조선 국적자가 없어진 뒤일지라도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은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일조선인은 근대 일본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존재, 즉 일본이라는 국가 자체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이라는 국가가 최종적으로 해체되지 않는 한, 재일조선인은─그 내실이야 다양하게 변용된다 할지라도─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스스로 태어나기도 할 것이다. 재일조선인의 생활실태와 그 의식에 관한 조사가 충분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가지 유보 조건을 달 필요가 있는 매우 제한된 조사를 토대로 억측을 덧붙인 논의가 오가는 실정이다. 여기서는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진 두 가지 조사부터 간단히 소개해두기로 한다. 우선 1991년 쿄오또·오오사까·코오베를 중심으로 실시된 취업실태조사부터 보자.註6) 취업가능 연령자 2천명을 대상으로 한 앙케트에 365명이 응답을 보내왔다고 한다. 거기에 따르면 ‘자영’과 ‘피고용’의 비율이 거의 4:6인데, 1985년도 쎈써스에서 오오사까 부(府)의 자영 비율이 13.7%인 것을 감안할 때, 자영업의 비율이 현격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취직 때 차별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40%, 취직한 사람 중에서 이른바 연고(緣故) 취직이 55.6%, 학교 등의 소개로 취직한 경우는 14.9%에 불과하고, 약 반수는 같은 재일조선인이 경영하는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다음은 1993년에 실시된 조사註7)인데, 모집단을 18~30세의 일본 태생 한국 국적자로 제한하고 재일한국청년회(민단의 산하단체-옮긴이)가 보유한 명부를 토대로 무작위 추출한 것이다. 조사대상자 수는 1,723명, 응답자 수는 800명이다. 이 조사에서도 아버지 중 70% 이상이 영세기업이나 자영업에 종사하고 일반 종업원은 20% 미만으로 나와 있어, 아버지 세대에는 “일본 노동시장의 압도적인 폐쇄성”이 인정된다고 지적한다. 조사대상자 본인의 직업은 일반 종업원이 60%를 넘어 “부모 세대의 극단적으로 억압된 상황에 비하면 개선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중 약 25%가 재일동포 기업에 근무한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위의 두 조사를 종합할 때 드러나는 것은, 약간 개선된 방향으로 나아간다고는 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견고한 차별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두번째 조사에 따르면, ‘민족학교’ 등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10% 이하, 모국어를 전혀 읽지 못하는 사람이 약 70%, 민족차별을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약 40%, 과거에 민족적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약 60%, 일상생활에서 일본식 통명(通名)을 사용하는 사람은 약 80%이다. 또 ‘애착’을 느끼는 대상으로 일본을 든 사람이 약 70%, 재일동포 사회를 든 사람이 약 50%, 대한민국은 약 40%, 통일조국이 2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10% 미만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조사 결과에 근거해서 조사자들은 “전체적인 경향으로 모국·조국에 대한 애착심이 희박해지고 일본사회에 대한 애착심이 널리 공유되기에 이르고 있다. (…) ‘서로의 차이를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교류관계’를 원리로 삼은 ‘공생관계’의 구축이 바람직하다”고 결론내리고 있다. 이 조사가 재일조선인이 처한 현실의 일부를 반영한 것임을 인정하면서, 몇가지 의문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우선 ‘차별’에 대해서인데, 피차별자가 자신의 피차별 체험을 표명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문제가 있다. 피차별자에게는 자기가 받은 차별을 차별로 자각하는 것마저 회피하려는 심리가 작용한다. 왜냐하면 일본사회에서는 차별을 도덕적으로 악이라고 승인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피차별자는 약자이고 패자라는 가치관이 피차별자 자신에게까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피차별자는 할 수 있는 한 자기방어로 피차별 체험을 의식으로부터 지워버리려 한다. 그러한 심리에까지 파고들어가려면 이런 식의 사회학적 조사로는 한계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 ‘일본’이라는 것도, 그 내실은 과연 어떠할까?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이나 입에 맞는 음식, 친근한 벗 등에게는 어느정도 애착을 품을 테지만, 그것이 과연 ‘일본’에 대한 애착일까?민족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는 압도적 다수의 재일조선인 청년에게 ‘본국’의 이미지는 일반 일본인 청년이 갖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막연하고 종종 잘못된 것밖에 없다. 그들을 그런 현실에 얽어매는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모국·조국에 대한 애착심이 희박해지고 일본사회에 대한 애착심이 널리 공유되기에 이르고 있다”고 결론내려,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가의 틀 속에서 민족적 마이너리티가 되어가는 추세가 마치 필연적이고 ‘자연스런’ 일인 듯 묘사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화된 논의일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왜 ‘우리’ 의식을 보존하고 재생산해갈 수 있는 것일까? 거기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① 역사의 긴 그림자, ② 파편화되어 아직 남아 있는 ‘문화’, ③ 본국과의 교류, ④ 본국에 의한 구속, ⑤ 거주국(일본)의 동화 압력과 배제 압력, ⑥ 본국-거주국 관계(즉 한일관계, 조일관계)의 영향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 ①과 ②는 대개 ‘과거’의 투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보통 얘기되는 것보다는 훨씬 긴 그림자를 드리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한편 ③에서 ⑥까지의 요인은 실로 현재적인 요인들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각각 재일조선인의 생활과 의식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논자들은 ①과 ②에만 주목할 뿐 ③에서 ⑥까지의 요인은 경시 또는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러한 사고구조, 즉 재일조선인을 일본 일국(一國)의 틀 속에서 정태적으로 파악하는 사고구조가 ‘재일조선인=민족적 마이너리티’론의 공통점이라고 여겨진다. 뒤얽힌 정체성 식민지지배에서 해방된 지 50년이 더 지난 오늘날,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은 점점 더 뒤얽혀가는 것이 사실이다(【그림 1】 참조). 재일조선인 가운데 【그림 1】의 A에서 C, 혹은 A에서 B, B에서 C의 방향을 지향하는 경향이 서서히 증대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그림 1】뒤얽힌 정체성 A:‘본국’ 지향(‘네이션’ 지향) 단 ‘민족’(통일조선) 지향과 ‘국민’ 지향이 중층적으로 혼재 ‘국민’ 지향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향과 대한민국 지향으로 분열 a: 재일조선인 공동체(민족학교, 민족단체, 민족계 기업 등)로의 귀속의식이 중심 B:‘재일’ 지향(‘에스니씨티’ 지향) ‘한국·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지만, 일본사회의 ‘시민’이나 ‘지역주민’을 지향 b: 일본 국적을 취득, ‘조선계 일본인’을 지향 C:‘일본’ 지향(逆 ‘네이션’ 지향) 일본 국적 취득자. 귀화에 의한 ‘일본국민화’ 지향. 단, 자기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 국적에 편입된 사람들(귀화자의 자손이나, 국적법 개정 이후에 부모 중 한 명이 조선인인 가정에서 출생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지향’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 *주의할 점 ① 이 그림에는 성차(性差, gender)나 계급 등 재일조선인의 정체성 형성에 작용하는 다른 요인은 반영시키지 못했다. ② 이 그림을 고정적으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집단으로서만이 아니라 개개인의 내면에서도 A에서 D에 이르는 지향성이 중층화되어 갈등을 빚고 있으며, 정치적·사회적 조건들의 변화에 따라 크게 변동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여러가지 조건들, 즉 ① 본국의 분단, ②본국과 재일조선인의 분단, ③ 일본사회의 동화 압력과 배제 압력, 나아가 ④ 본국과 일본의 경제상태, ⑤ 본국 사회의 민주화 정도, 그리고 ⑥‘사는 보람’이나 ‘마음의 평안’이라는 도저히 계량화할 수 없는 정신적인 요소까지도 포함하는 조건들이 짜여져서 이루는 전체적인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원리적으로 말해 필연적인 일도 불가피한 일도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더라도, 나찌에 의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추방된 독일의 동화(同化) 유태인 같은 사례가 있고, 반대로 명말청초(明末淸初) 이래 십몇 세대에 걸쳐 숨죽이듯 살면서 본래의 언어나 풍습을 거의 다 상실했으면서도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 우대정책에 접하자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이름붙인 중국 허뻬이성(河北省) 사람들 같은 사례도 있다. 1950년대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귀국운동’이나, 60년대말 이후 친족방문·유학·취직 등 여러가지 동기에서 이루어진 대한민국으로의 귀국 동향도 이러한 정체성 형성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조건들에 의해 규정받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만일 본국이 분단되지 않았다면, 재일조선인과 본국의 자유롭고 광범위한 왕래와 교류가 가능했다면, 또 일본사회에서 ‘민족교육’을 비롯한 권리들이 보장되었다면, 재일조선인의 생활과 의식이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재일조선인의 정체성이 뒤얽힌 것을 마치 고정적인 것인 양, 또는 한가지 방향으로 움직여가게 마련인 양 파악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재일조선인 스스로가 자신의 인간적인 해방을 위해 바람직한 방향성을 모색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들을 변혁시키는 데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에스닉 마이너리티’인가 ‘네이션’인가 ‘에스니씨티’(ethnicity)와 ‘네이션’ 개념은 무수한 논의가 거듭 확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나는 우선 다음과 같은 정의를 염두에 두고 논의를 진전시키고자 한다. ‘네이션’과 ‘에스닉 그룹’(ethnic group: 민족집단, 여기서는 에스니씨티와 같은 개념-옮긴이)은 전자가 그 자신의 ‘국민국가’를 가지거나 그 획득을 목표로 한 ‘독립운동’에 관여하는 데 반해, 후자는 기존 국민국가 속에서 운동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점에서 다르다. (…) 에스니씨티는 19세기 국민국가를 상대화하는 움직임으로서 논의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 에스니씨티와 국민국가는 대립할 뿐만 아니라 병립하고 때로는 ‘공모’하는 관계에 있다.註8) 재일론 비판 1970년대 후반 이후, 재일조선인들 사이에서 “본국 귀국을 전제로 한 ‘조국 지향’”을 부정하고, “일본 정주를 전제로 한 ‘재일 지향’”을 주장하는 논조가 여러가지 형태로 거론되었다. 이런 논조는 통틀어 ‘재일론(在日論, 자이니찌론)’이라고 불리는데, 대개 재일조선인의 미래상을 ‘네이션’이 아니라 ‘에스니씨티’로 묘사해내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에스니씨티 개념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시각이 부족하지 않은가 생각된다. ‘재일론’은 대부분 문화적 다원주의 이론을 빌려서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공생(共生, 쿄오세이)’을 강조한다. ‘공생’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빈번히 사용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일 것이다. 이 사실은 일본 기업의 다국적화가 진행되어 일본 기업이 해외(특히 아시아)에서 활동거점을 늘리는 동시에, 일본사회로 다수의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된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다른 문화와의 충돌이나 마찰에 대처하는 것은 일본자본주의 자신을 위한 요청이기도 했다. 1985년 나까소네(中曾根康弘) 수상은 ‘국제화’를 제창하며 동시에 “국가와 국민은 오욕을 버리고 영광을 찾아 나아간다”고도 발언했는데, 이 두 가지 노선은 그에게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본과 정보의 국제화라는 맥락에서 ‘외압’과 자본의 요청에 부응하여, 종래의 단일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최소한의 필요한 수정을 가하면서 다문화주의적으로 디자인한 새로운 국가주의를 수립하려 한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전후 40년이 지난 일본이 다시 과거의 ‘다민족제국’의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고 할 것이다. 이리하여 ‘공생’이라는 용어는 마치 동상이몽처럼 시민측도 국가·정부측도 빈번히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전후 50년에 해당하는 1995년에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대대적인 ‘아시아 공생의 제전(祭典)’이 개최되었는데, 아시아 각국에서 1943년 ‘대동아회의’의 재현이라고 비판하는 여론이 비등했던 것은 매우 상징적이다. 이른바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은 “‘민족’을 대신할 재일사회의 새로운 통합이념으로서 ‘시민’에 주목하여, 시민사회의 일원이라는 공통된 입장에서 일본인과의 ‘공생’을 호소하는” 것이다.註9) 이 재일론의 대표적인 주장註10)은 대략 다음과 같은 논지로 되어 있다. 195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친 일본사회의 ‘고도성장’은 재일조선인 사회에도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민족’이라는 집단의식의 확실한 배양 기제”였던 ‘조선인마을’은 해체되고 거주환경이나 생활수준이 개선되자, 재일조선인의 의식은 ‘신(新)중산층’화하여 ‘조국’이나 ‘민족’이라는 ‘추상적인 대의’는 ‘신통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재일조선인의 “‘민족’과 연관된 가치의식이나 역사감각, 혹은 가치관”을 해체하고 풍화시켰다. 이리하여 재일조선인 구세대의 ‘관념적’인 ‘당위’로서의 민족관과는 인연이 먼 신세대의 ‘시민(주민)’으로서의 역사감각이 대두하고 있다. 이는 “국민국가라는 틀을 엄중하게 묻는” 것이다. 이러한 논지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이미 나름대로 비판을 가한 적이 있는데,註11) 여기서는 그 요점만 간단히 언급해두자. 첫째로, 이 재일론은 “일세(一世, 재일조선인 제1세대-필자)의 민족관이나 조국관”이 젊은세대의 ‘실감’과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는데, 바로 그런 ‘실감’의 유래를 검증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는다면, 그런 주장은 단순한 현상의 추인에 불과하다. 둘째로, 이 주장에서 역설하는 ‘고도성장’이 재일조선인에게 초래한 변화에 대해서인데, 고도성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너무 취약하지 않은가 싶다. 과연 고도성장의 결과 일본사회에 자립적인 시민이 착실하게 형성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히려 노동자계급이 기업사회로 포섭되는 과정이 진행되면서 시민의 자립성은 붕괴되어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이 공생론에 대하여 “우선 확인해야 할 점은,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의 공생이 곧 구조적 열세에 처한 재일조선인과 국가권력을 장악한 일본인의 본래적으로 불평등한 공존”註12)이라는 비판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아래 글은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이 파악하는 ‘실감’과는 다르게 영세한 가내공업에 묶여 있는 재일조선인 여성의 실감을 전해주고 있다. 재일동포가 자영(自營)하는 헵번 쌘들(여배우 오드리 헵번이 유행시킨 구두와 쌘들을 겸한 신발-옮긴이), 가죽·고무 가공, 철공 등의 영세가내공업에서 일하는 여성은 보호받고 있는 것일까? 하루종일 기계를 돌리지 않으면 일이 되지 않고 총동원된 가족 중에 누군가가 쉬면 다른 가족이 그만큼 노동해야 하는 노동조건 아래서는 누가 고용주이고 누가 피고용자인가는 문제가 안된다. (…) 사무직 여성이 된 동창생이 성장(盛裝)을 하고 출근하는 모습을 먼발치서 바라보면서 시너와 고무 냄새로 가득찬 공장에서 기름투성이, 먼지투성이로 선반이나 미싱을 돌릴 때, 젊은 딸은 성장을 하고 출근하는 회사에 취직할 수 없는 민족적 차별과 가족이 가내공업을 돕지 않으면 영위될 수 없는 재일조선인의 노동상황을 몸으로 터득한다.註13) ‘본국’이라는 요인 세번째로, 가장 중요한 비판점은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이 재일조선인의 삶을 규정하는 사회적 모순 관계로부터 ‘본국’이라는 요인, 그리고 ‘본국-거주국 관계’라는 요인을 제외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재일조선인의 삶은 남·북을 포함하여 ‘본국’의 정치·경제·사회 상황이라는 요인에 의해서도 크게 규정당하고 있다. 예컨대 재일조선인 사회는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분단이 진행되어 조선 국적자는 오랫동안(1992년까지) 한국 국적자에 비해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무권리 상태를 강요당해왔다. 한편 한국 국적자는 일본에서 생활하면서도 한국 관리·압박의 그물망에 편입되어 적지않은 수의 사람들이 인권이나 재산권을 위협받아왔다. 이런 사태는 일본의 ‘고도성장’과 같은 시기에 진행되었던 또하나의 현실이며, 그 현실은 ‘실감’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관계없이 재일조선인의 삶의 조건을 구속해왔고 지금도 구속하고 있다. 한국의 박정희정권이 국내외의 반대운동을 탄압하고 재일조선인의 의향을 묻지도 않은 채 식민지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애매하게 처리한 한일협정에 조인한 것은, 재일조선인에 대한 일본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시정하기는커녕 거꾸로 그것을 온존시키고 조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재일조선인의 인간적인 해방을 얼마나 가로막아왔던가. 재일론이 출현하던 시기에 한국 국적 재일조선인들은 친지방문·성묘·유학·무역·취직 등의 형태로 한국과 대규모로 왕래하게 되어 체득적인 의미에서 본국과의 연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970년대에는 상당수의 모국 유학생이 개개인의 정도 차는 있지만 어떤 형태로든 민주화투쟁이나 통일운동에 관여하여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받는 일련의 사건도 일어났다. 그 수는 무시해도 좋을 만큼 적은 게 아니다. 과연 그들은 ‘조국 지향’이라는 ‘당위’론에 사로잡혀 분별없는 비약을 시도했던 것일까? 적어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 또한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조선인으로서의 자기 현실에서 출발하여 자기해방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경험에 맞닥뜨렸다는 점, 달리 말해 그들의 경험도 재일조선인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현실의 일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재일론은 이러한 경험에 대한 고찰이 부족하다. 아니, 오히려 이 경험은 현재에 이르기까지도 그 역사적 의미가 똑바로 거론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카지무라 히데끼(梶村秀樹)가 1985년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귀중한 지적을 한 것은 기억해둘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정주하고 있으면서도 일본 국가에 대한 귀속을 부인할 때, 그 관념을 뒤집어 말하면 (…) 국가에 대한 귀속의식이라기보다는 전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귀속의식, 남북과 재일을 불문하고 고난과 싸우는 민중과의 일체감에 대한 희구라고 표현하는 편이 적당할 것이다. 강력한 모국의 보호를 받으며 거기에 의존해서 살아가려는 것이 아니다.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실존을 의식화해가면 갈수록 고난을 극복해나가려는 모국 민중의 과제에 주체적으로 참여해가려는 의식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註14) 양자택일론을 넘어서 1955년 조직이 결성된 이래 조총련은 재일조선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외공민(在外公民)’이라는 공식적 입장을 고수하여, 재일조선인이 일본 국내에서 시민운동이나 지역운동에 관여하는 것은 ‘내정간섭’이라는 식의 형식논리로부터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경직된 내정간섭론을 극복하고 재일조선인 역시 자신의 시민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해야 한다는 한에서, 나도 ‘시민사회론적 재일론’에 동감한다. 그러나 아마도 재일론의 문제는 그들이 부정하려는 형식논리를 그대로 뒤집기만 한 것, 즉 스스로도 ‘귀국인가 정주인가’ ‘조국이냐 재일이냐’라는 양자택일적 사고의 틀에 사로잡혀 있다는 데 있지 않을까?조총련이든 민단이든 기존 민족단체는 분단체제를 전제로 조선반도의 북쪽 또는 남쪽에 현존하는 ‘국가’로의 귀속의식을 강조하지만, 재일조선인 측에서 보면 그 귀속의식의 대상은 분단된 어느 한쪽의 ‘국가’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민족’이며, 아직 실현되지 못한 자기해방의 과제로서의 ‘통일된 조선’일 터이다. 그러나 재일론 역시 이러한 시각을 결여하고 있고, 현존하는 이러저러한 ‘국가’로의 귀속의식과 함께 장래의 과제인 ‘통일된 조선’으로의 귀속의식마저도 부인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기존 민족단체라는 소규모 ‘네이션’으로부터 이탈하더라도, 그 앞에 가로놓인 것은 이미 ‘보편적 가치’가 실현된 초월적 시민 공간이 아니라 상징천황제(象徵天皇制)를 내세운 일본이라는 구체적 국가 공간이다. 결국 재일론의 앞길에는 재일조선인의 시민적 요구를 흡수한 일본 국가가 새로이 형성할 ‘다민족제국’이라는 ‘감옥’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카지무라는 1920년대 이후 일본의 식민지지배로 말미암아 ‘국경을 넘어선’ 농민층 분해가 일어나 일본과 조선의 ‘국경을 넘어선 생활권 내지 생활의식공간’이 재일조선인에게 형성되었으나, 1945년 해방 이후 조선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조선반도와 일본이 단절되는 상황이 나타난 결과 이 ‘국경을 넘어선 생활권’이 분단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註15)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는 귀국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정주다”라는 식의 편협한 논리는 ‘귀국이냐 정주냐’를 성급히 강요하는 양자택일론의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재일조선인의 ‘있는 그대로’의 생활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재일조선인은 역사적 경위에서나 보편적 인권이라는 측면에서나 ‘국경을 넘어선 생활권’을 확보하고 주권자(국민)로서 본국과의 연결을 유지하면서 일본에서 정주외국인으로서의 권리들을 보장받아 마땅한 존재인 것이다. ‘원격지 민족주의’론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 국내에는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음-옮긴이)의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은 20세기 후반 지구 규모의 거대시장 형성과 교통·정보·통신수단의 비약적 발전 등에 의해 이른바 무국경화가 급속히 진행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가 시대착오적으로 되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제 “기억이나 관습, 신념이나 식생활 습관, 음악이나 성욕을 계속 유지한 채 세계를 방랑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 즉 ‘원격지(遠隔地) 민족주의’가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註16)매우 흥미로운 견해다. 민족주의가 그렇게 간단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관한 한, 나도 찬성이다. 그러나 그것이 간단히 없어지지 않는 이유를 ‘기억이나 관습, 신념이나 식생활 습관, 음악이나 성욕,’ 즉 넓은 의미의 ‘문화’에서 찾는 견해는 일종의 ‘문화환원주의’가 아닐까? 오히려 눈을 돌려야 할 곳은 문화 그 자체의 견고함이 아니라 원격지에 있으면서도 그러한 문화 아래 사람들을 결집시키는 것, 바꿔 말해서 ‘우리’라는 의식의 ‘하부구조’ 바로 그것이 아닐까?어떤 민족집단이 ‘본국’에서 경험하는 정치적 현실이 국경을 초월하여 타국(원격지)에 사는 같은 민족집단의 삶을 규정하고 조건짓는 현상은 광범하게 존재한다. 재일조선인이 바로 거기에 해당하지만, 예컨대 팔레스타인인이나 쿠르드인 등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러한 상황은 오히려 제국주의와 식민지지배 이후의 현대세계에서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앤더슨의 주장과는 반대로, 그들에게 ‘본국’의 정치적 현실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로서 ‘거주국’에서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인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상상의 고향’으로서의 조선반도에 향수나 애착을 갖기 때문이 아니라, 역으로 ‘상상’으로는 귀속의식을 거의 가질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선반도의 정치현실에 의해서 일상의 삶을 구속받기 때문에, 자기해방의 조건에서 본국이라는 요인을 제외할 수 없다. 즉, 민족적 ‘상상’이 아니라 민족적 ‘현실’이 국경을 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적인 인구이동을 둘러싼 논의는 대개 받아들이는 나라(거주국)에서의 ‘이민 문제’라는 시점에 편중된 경우가 많아, 내보내는 나라(본국)라는 요인, 혹은 역사적·현재적인 본국-거주국 관계라는 요인을 총체적으로 시야에 넣은 분석은 드문 것 같다. 앤더슨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요구되는 것은 당사자인 정주외국인(본국에서 보면 ‘재외국민’)의 시점에 서서 에스니씨티인가 네이션인가 하는 고정된 틀을 뛰어넘는 새로운 이론적 틀일 것이다. 맺음말─재일조선인 입장에서의 ‘네이션’ 구상 대의제에 의한 참정권이 반드시 유일·최고의 정치참가 형태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재일조선인은 일본에서는 물론 본국에서도 참정권을 갖지 못한 채, 식민지지배로부터 해방된 뒤만 따지더라도 실로 반세기가 넘도록 자기 운명에 관한 정치적 결정과정으로부터 배제당해온 게 사실이다.(정확히 말하자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에는 재일조선인 대표가 여러 명 선출되고는 있지만註17) 재일조선인 대중이 선출과정에 공개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다. 한편 대한민국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재외국민에게도 국회의원 등의 피선거권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영주귀국하지 않는 한 투표권은 없다.)‘국민’을 근대 국민국가라는 정치공동체의 ‘주권자’라고 파악할 경우, 전지구를 뒤덮고 있는 현재의 국민국가 씨스템에서 주권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당해온 구식민지인들이 스스로를 ‘주권자’로 형성하려는 것은 당연하고도 정당한 요구라 할 수 있다. 이런 요구가 대두하는 것은 결코 문화본질주의적인 ‘국민’ 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민족자결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무질서하게 ‘신봉’하기 때문이 아니며, 구식민지 출신자들이 지금도 계속 차별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본국과 거주국의 이중적 구속 아래 놓여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는 부단히 양자의 외부로 배제당하고 있는 재일조선인은 그러한 독자적 입장에서 자신을 포함한 전체적인 ‘네이션’을 구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림 2】는 현시점 재일조선인 입장에서의 ‘네이션’ 구상을 도식화한 것이다. 【그림 2】재일조선인 입장에서의 ‘네이션’구상 【1】 ① 본국의 남북 대립 ② 북과 일본의 단절 ③ 재일조선인의 분열 ④ 재일조선인과 본국 간의 결핍된 교류 (특히 북과의 단절) ⑤ 재일조선인의 일본에서의 무권리 상태 【2】 ① 본국 남북의 대폭적인 긴장완화와 교류 ② 북과 일본의 국교·교류 ③ 재일조선인의 자주적 ‘주체’ 형성 ④ 재일조선인의 본국(남북) ‘참가’ (PNC 모델?) ⑤ 재일조선인의 일본에 대한 ‘정주외국인’ 으로서의 권리 증진 * 일본의 ‘과거 극복’이 불가결 【3】 ① 본국의 통일 ② 본국과 일본의 안정적인 우호 관계 ③ 본국의 ‘재외 네이션’으로서 재일조선인의 ‘참가’(본국 참정권?) ④ 일본의‘정주외국인’으로서 재일조선인의 권리 실현(지방 참정권?) (PNC 모델?) 【4】 ① 본국과 일본의 항구적인 평화·우호 관계 ② 재일조선인과 본국의 자유롭고 광범한 교류 ③ 다원주의적 ‘네이션’으로서의 본국, 그 구성원으로서의 재일조선인 ④ 다원주의적 ‘네이션’으로서의 일본, 그 정주자로서의 재일조선인 【1】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①부터 ⑤까지는 현상을 기본적으로 규정하는 조건들을 든 것이다. 【2】 이하는 이렇게 분단된 존재인 재일조선인이 자신을 ‘네이션’으로 형성해나갈 진로를 단계에 따라 묘사해본 것이다. 각각의 원문자 숫자는 각 단계마다 달성되어야 할 조건들을 나타낸 것이다. 【2】 ④의 ‘PNC모델’이란 팔레스타인 민족평의회(Palestine National Council)를 말한다. 본국의 남북, 그리고 일본·미국·중국·구소련 정주자를 포함한 조선민족 모두가 평등한 자격으로 구성할 최고의사결정기관 같은 것을 상정하고 있다. 【3】의 단계에서 본국 참정권 문제와 일본에서의 지방 참정권 문제가 부상하는데, 재일조선인은 두 가지를 다 보유해야 한다는 견해註18)에 나도 큰 틀에서 찬성한다. 다만, 본국 참정권을 ‘한국 국적’ 보유자만을 대상으로 해서 졸속으로 실시하는 것은 재일조선인의 한국국민화, 분단의 심화로 이어지리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4】에 이르러 비로소 재일조선인은 본래의 ‘국경을 넘어선 생활권’에서 걱정 없이 생활하게 된다. EU의 동북아시아판 같은 구상이 다소라도 현실감을 갖게 되는 것은 겨우 이 단계에 와서의 일일 것이다. [任城模 옮김] ------------------------------------------------------------------------------- - 1) 鄭暎惠, 「アイデンティティを越えて」, 『差別と共生の社會學』, 岩波書店 1996. 2) 山內昌之, 「結び 帝國ふたたび」, 山內昌之 外 編, 『帝國とは何か』, 岩波書店 1997. 3) 山內昌之와 大澤眞幸의 대담, 「世界帝國と民族幻想」, 『大航海』 15호, 新書館 1997. 4) 小熊英二, 「‘日本人’という牢獄: 大日本帝國における朝鮮人の戶籍と國籍」, 『情況』 1997년 4월호. 5) 金敬得, 『在日コリアンのアイデンティティと法的地位』, 明石書店 1995. ------------------------------------------------------------------------------- - 6) 在日高麗勞動者連盟, 『在日朝鮮人の就勞實態調査: 大阪を中心に』, 新幹社 1992. 재일고려노동자연맹은 오오사까 지역 재일교포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민족적 권리의 개선을 위해 1983년에 결성된 조직으로, 재일동포노동문제연구회(1979년)가 그 전신이다-옮긴이. 7) 福岡安則·金明秀, 『在日韓國人靑年の生活と意識』, 東京大學出版會 1997. 8) 佐藤成基, 「ネ-ション·ナショナリズム·エスニシティ」, 『思想』 1995년 8월호. 9) 鄭章淵, 「‘パックス·エコノミカ’時代の到來と在日社會」, 『季刊 靑丘』 1995년 겨울호. 10) 文京洙, 「在日朝鮮人にとっての‘國民國家’」, 歷史學硏究會 編, 『國民國家を問う』, 靑木書店 1994. ------------------------------------------------------------------------------- - 11) 졸고, 「‘재일조선인’의 위기와 기로에 놓인 민족관」, 『역사비평』 1996년 여름호. 12) 鄭章淵, 앞의 글. 13) 金伊佐子, 「在日女性と解放運動」, 『日本のフェミニズム 1·リブとフェミニズム』, 岩波書店 1994. 14) 梶村秀樹, 「定住外國人としての在日朝鮮人」, 『思想』 1985년 8월호. 15) 같은 글. ------------------------------------------------------------------------------- - 16) ベネディクト·アンダ-ソン, 「遠隔地ナショナリズムの出現」, 『世界』 1993년 9월호(원출전은 B. Anderson, “The New World Disorder,” New Left Review 1992년 5~6월호). 17) 1995년 현재 8명의 대의원이 있다고 한다. 金敬得, 앞의 책, 204면-옮긴이. 18) 같은 책.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