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3월 4일 목요일 오전 11시 16분 31초 제 목(Title): 이종구/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단상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한 단상 이종구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한일관계의 단절과 연속 10월초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방문은 한일관계라는 묵은 쟁점을 다시 한번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 공식적 장면의 한일관계는 실질적으로 보수 기득권세력의 인적 유착관계였다고 풀이해도 지나치지 않았다. 한국에서 민주화의 숙원을 풀며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통령의 방일은 여러모로 한일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초래할 것이라 기대되고 있다. 특히 재야 민주인사 김대중의 면모를 기억하는 많은 일본 지식인과 시민운동가들은 깊은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김대통령과 일본의 인연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1973년 8월 토오꾜오에서 서울로 납치되는 시련을 겪었다. 이는 일본에서도 전후 최대 정치사건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김대중구출운동을 계기로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일본 시민운동 세력은 암울했던 군사정권 시절에 민주화운동을 가장 크게 도와준 친구가 되었다. 일본 내부에서도 김대중구출운동은 국경을 넘어서는 시민적 연대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었으며 사실상 모든 진보세력들이 참가할 수 있는 마당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김대통령의 방일은 어디까지나 한국 국가원수로서의 공식적인 행사이다. 따라서 대통령의 일정도 양국의 공식적 현안 처리가 중심이었던 것은 당연하며 집권 이전에 인연을 맺은 인사들은 리!션에 초대받는 선에서 회포를 달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정계·관계·재계가 아니라 순수한 시민사회 영역에 김대통령을 아껴온 일본 친구들이 많다는 사실 자체가 오히려 공식적 장면에서 그가 발언권을 높일 수 있는 암묵적 계기로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김대통령은 이전에 일본을 공식 방문했던 한국의 어느 대통령보다도 명분과 정당성, 그리고 도덕적 권위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사실상 IMF 법정관리 상태에 있어 몇 달러의 외화라도 아쉬운 실정 때문에 김대통령은 일본의 정관재 유착구조라고 불리는 보수 기득권세력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답답한 입장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이 점은 기본적으로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지속되어온 공식적 한일관계의 기본 틀로부터 ‘국민의 정부’도 자유롭지 않다는 냉엄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식민지지배에 대한 텐노오(天皇)註1)와 수상의 사과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우익 행동대가 스피커의 음량을 높여 과거를 사과하는 자국 정부를 규탄하고 있었으며 국회의원을 포함한 일부 우익 정치인도 여기에 가세했다. 이번에 종군위안부를 비롯한 침략전쟁 피해자에 대한 배상문제는 거론되지 않았지만 김대통령이 재일동포의 지방참정권 허용을 요청함으로써 일본정부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검토되던 곤혹스러운 쟁점과 대면하게 되었다. 대통령의 방일 직전에 독도를 공동관리 수역에 포함한 새로운 어업협정이 타결되고,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30억 달러의 저리 자금과 특혜관세 대상국 자격을 제공하기로 합의한 것은 두 나라가 함께 사로잡혀 있는 과거사의 주박(呪縛)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외환위기로 고생하는 한국에 30억 달러는 분명히 큰 돈이이지만 지금의 경제규모에서는 1965년 당시 타결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의 청구권이 가졌던 만큼의 영향력이 발휘되리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 시장은 미국의 끈질긴 압력으로 문턱이 낮아질 만큼 낮아졌고 이미 수출산업의 주력이 중화학공업인 한국은 가격이 아니라 품질이 경쟁력의 핵심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혜관세 적용은, 어려울 때 그나마 의지가 되는 이웃사촌의 인심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터이다. 1965년 한일회담 당시에는 일본 어선의 한국 연안 남획이 문제되었지만 이번에는 한국 어선의 일본 연안 조업규제가 현안이었다는 측면에서 한국 수산업의 발전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다만 독도가 분쟁지역으로 국제공인될 가능성은 더욱 높아졌다고 보인다.註2) 어쨌든 급전 제공과 바다 경계 조정이라는 교환관계가 재현되었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공동선언에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우려가 들어간 것도 안보공동체 관계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현재의 한일관계가 1965년 회담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북한이 우주에 쏘아올린 물체의 정체를 둘러싸고 인공위성이라는 한국과 미사일이라는 일본이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인용부호를 넣은 ‘미사일’이 공동선언에 등장했다는註3) 일화에서도, 북한을 햇볕정책으로 포용하려는 ‘국민의 정부’와 1955년 성립된 보혁동반체제가 부스러지고 있지만 수습책이 떠오르지 않아 내부 결속용으로 외부의 침략 위협이 필요한 오부찌(小淵惠三) 정권의 입장 차이를 볼 수 있다. 한국의 명사들이 일본에 와서는 한반도 유사시에 일본이 무력으로 도와줄 수 있도록 전쟁행위를 금지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해 일본의 보수파들도 표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고 깜짝 놀라던 군사정권 시절과는 확실히 세상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두 나라 모두 명분의 단절과 실제의 연속이 결합된 미묘한 상황에 직면한 가운데 이루어진 김대통령의 방일은 21세기 한일관계를 전망할 때 지나칠 수 없는 몇가지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정치·경제적으로는 1965년 이래의 공식관계가 한일 양국의 신정권 사이에 재확인되었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문화교류의 중요한 금기가 철폐되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과거와의 단절이라는 성격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공동선언에서 김대통령은 일본문화에 대한 개방 방침을 밝혔으며 이는 한국 내부에서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또한 공동선언에 포함은 안되었지만 김대통령은 2002년 월드컵 개최 직전에 텐노오의 한국 방문을 추진한다는 방침도 밝혔다. 이밖에도 한일간의 과거사에 대한 인식 차이를 조절하기 위한 역사 공동연구도 강조되었다. 문화시장 개방과 신판 동도서기론 대통령의 귀국 후 국내 여론의 관심사는 문화시장 개방에 집중되고 있다. 찬성에서 반대까지 폭넓은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대세는 정부의 기존 방침대로 단계별 개방으로 가고 있다. 반대론자들은 민족정기의 훼손과 함께 저질문화의 대량 유입으로 취약한 국내 문화산업 기반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다. 찬성론자들은 이미 비공식 통로로 저질문화만 유입되고 고급문화는 차단되어 결과적으로 폐해가 크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개방하여 관리가능한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역설한다.註4) 김대통령도 한국문화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일본문화를 수용하자는 소신을 피력했다. 구한말의 담론에 비추어보면 위정척사(衛正斥邪)론에서 동도서기(東道西器)론으로 넘어가는 듯한 모습이다. 현실을 보면 골목길로 들어올 것은 다 들어왔다. 이미 국내 만화시장의 절반 가까이를 일본 만화가 점유하며, 일본 컴퓨터게임은 청소년들에게 대환영을 받고 있다. 일본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발휘하는 만화영화는 텔레비전 어린이 프로에서 대사만 바꿔 버젓이 방영되는 실정이다. 영화는 아직 동호인들끼리 돌려 보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문학 영역은 최근에도 무라까미 하루끼 등의 작품이 베스트쎌러 대열에 있으며 저작권료를 주면 국내 출판이 얼마든지 가능하므로 사실상 개방 상태에 있다. 그러나 시집이 번역 소개된 일은 아직 희귀하며, 고전문학은 물론이고 한국문학사와도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는 메이지유신 이후의 근현대문학 번역도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또한 취미생활, 경영실무에 관한 서적은 온통 일본색 위주로 되어 있다. 가벼운 일본문화론이나 일본인론의 번역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강남의 번화가 뒷골목으로 들어가면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일본식으로 꾸민 유흥가에서 선남선녀들이 일본식 음주문화를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이 이만큼 진행되었다는 것이 곧 어쩔 수 없으니 개방하자는 논의를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경제적으로 불가분하게 결합된 한국과 일본은 인적 왕래 또한 빈번한 관계이므로 문화의 유입만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발상은 원래 실효성이 희박한 접근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위성방송과 인터넷이 확산되고 있으므로 인위적 국경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문제는 일본문화 개방이 의미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이 달라질 것인가 생각해보면 당장 영화관에서 일본 영화가 상영되고 무대에서 일본 가수가 일본어로 공연할 수 있게 되며 음반·테이프·씨디롬이 정상 통로를 거쳐 수입 유통될 수 있을 것이다. 접근이 금지되었던 일본 문화상품이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고 저작권료 지불액도 늘어나리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대일 무역적자가 더욱 누적되리라는 우려가 현실감있게 다가오고 있다. 따라서 한국 문화산업의 경쟁력이 향상될 때까지 개방을 보류하거나 경과를 보면서 단계적으로 개방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마련이다. 이번에 ‘국민의 정부’도 단계적 개방을 선택했다. 이 지점에서 정말 냉정하게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53년이 지났는데도 일본문화가 그렇게 두렵게 인식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한국정부의 방침에는 수년 동안 단계적 개방수순을 밟아나가면 사회적 항체가 발생해 일본문화의 해악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이물질을 소화 흡수해 한국문화가 건강해지고 국제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판단이 함축되어 있다고 보인다. 그러면 지금까지 비공식 통로로 계속 유입된 일본문화에 대한 면역 기능이 왜 충분하게 형성되지 못했는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실질적으로 해방 이후 무한대로 개방된 미국문화 역시 저속·퇴폐·폭력성 조장이라는 비난을 받아왔지만 아직 한국사회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선별 흡수하여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담론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더구나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정치·경제적 영향력 때문에 미국문화에 대한 비판적 언동을 하면 용공이나 좌경으로 몰릴 위험성이 상존했으며 최소한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사실상 미국문화는 자유·민주주의·여성해방·청년문화 등의 밝고 멋있는 긍정적 이미지로 한국사회에 다가왔지만 내용에 함축된 사회적 의미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가담했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전반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심야 음악프로에서 자유롭게 흘러나온 미국의 반전가요는 신나는 팝송에 불과했다. 그러나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비판한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는 유신정권 반대를 외치다 구속된 청년학생들의 용공성을 입증하는 증거물로 법원에서 채택되었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원산지와의 정치·경제적 역학관계가 외국문화 수용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마련이며 상대국의 사회사정에 대한 이해 없이 이루어지는 문화교류가 한국문화의 재생산 능력을 향상시키리라고 판단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또한 군사정권하에서 노래 테이프마다 건전가요를 삽입해야 하고 고무줄식 검열에 걸려 퇴폐나 좌경 판정을 받으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긴 세월을 보내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문화 창작능력 자체가 위축되고 왜소해진 역사적 경험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외국문화에 대한 경쟁력 문제는 미시적으로는 문화정책의 기조와 관련되지만 거시적으로는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을 보장하는 사회체제의 확립 여부와도 직결된 논점이다. 또한 한국에서 공식화된 일본문화 개방 논의가 생산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위해서는 민족정기나 국내 문화산업의 수지타산도 중요하지만 냉엄한 현실 국제정치라는 맥락 위에서 진행될 필요가 있다. 일본측 입장에서 본다면 한국의 태도 변화가 반일감정의 사회적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더구나 일본이 강세를 보이는 애니메이션이나 컴퓨터게임을 즐기는 세대는 기성세대가 아닌 청소년층이다. 즉 일본에는 문화상품 수출에서 생기는 돈보다도 문화적 친밀감의 확산에서 오는 헤게모니의 확보가 더욱 중요하다는 판단도 가능하다. 일본문화에 대한 시장개방에는 해방 이후의 한 시대를 마감하는 한국측의 과거사 청산이라는 의미가 있다. 반면에 이에 상응하는 일본측의 과거사 청산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일단 개방이 공식화되어 시장원리가 좀더 강력하게 작동하기 시작하였으므로 한국에 유용한 문화품목을 선택적으로 도입한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정책이 아니다. 싫든 좋든 WTO라는 세계시장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일본문화의 유입과 보급을 규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보면 한일간 문화교류는 더욱 활성화될 것이고 자금·상품공급력·마케팅기법에서 한국보다 일본이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당분간은 문화상품 교역에서도 대일적자 증가를 각오하는 것이 속 편할 것 같다. 지금 가장 필요한 대책은 국내 소비자들이 균형된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일본에 대한 지식을 생산하고 보급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 문화뿐 아니라 역사·정치·경제·사회·과학기술 등을 포함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의 내용과 성격을 정면으로 분석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은 소수에 불과하다. 한국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경쟁상대에 대한 정보력이 취약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정신적 집착이다. 대외개방과 내부개혁을 분리하는 맹목적 자존심은 19세기 중반 이양선이 연안에 출현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도 고쳐지지 않는 한국 위정자들의 악습이다. 일본문화 개방정책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것이 국내의 문화적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사회개혁과 연동되어 추진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개혁은 정신·제도·주체세력의 총체적 변화를 의미하는 개념이다. 19세기말 전체 구조가 아니라 부분만을 고쳐서 대외개방에 적응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나온 조선의 동도서기론, 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에 입각한 접근이 모두 엄청난 비용을 발생시킨 시행착오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도 상기해야 한다. 텐노오의 방한과 과거청산의 의례화 일본에 침략당한 지역 가운데 전후에 텐노오가 방문하지 못한 곳은 남한과 북한뿐이다. 일본측의 입장에서 김대통령이 텐노오의 방한을 받아들인 것은 과거청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이다. 한일간에는 워낙 예측하기 곤란한 돌발사태가 많이 발생해왔으므로 텐노오의 방한이라는 21세기 초두의 일대 사건을 놓고 양국을 뒤흔들 격동이 발생할 가능성을 아직 배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텐노오는 패전 이전에는 살아 있는 신이었으나 미군 점령기(1945~52)에 인간의 자리로 내려왔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상징적 존재로만 남게 되었다. 신격을 부정하는 조서를 발표하여 인간선언을 한 히로히또(裕仁) 텐노오는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전국을 순회하였으며 이는 전후 일본의 사회적 재통합을 상징하는 행위였다고도 해석된다. 최소한 사회의식의 영역에서 텐노오는 전전과 전후를 잇는 가교 같은 존재였으며, 전범재판을 거쳐 처형된 일부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회 지도층인사로 복귀한 전전의 보수파 엘리뜨층이 사회적 정당성을 주장하는 암묵적인 기반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다른 측면에서 상징천황제는 전후에 급진적 노동운동의 진출에도 불구하고 보수세력이 계급의식의 확산을 저지하는 방파제를 구축하고 문화적 헤게모니를 재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일본의 저항능력을 과대평가하여 텐노오의 지위를 보전하는 간접통치 방식으로 군정을 폈던 미군의 정책은 일본의 우파를 친미파로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거의 반세기 만에야 텐노오의 방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양국간에 지속되어온 갈등의 심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텐노오 방한 이후에는 일본의 침략행위에 대해 한국이 공식적으로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기 곤란하며, 과거사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확인하는 결과가 초래될 것은 분명하다. 망언·사과·보상요구 등으로 얽힌 한일관계를 일단 말끔하게 정리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30억 달러의 저리 차관 제공 정도가 아니라 무상 제공도 아깝지 않은 일본 외교의 일대 개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본 내부에서도 텐노오의 정치적 기능을 재확인하는 현실적 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전전에 일본이 텐노오의 이름으로 한민족에 저지른 행위는 역사적 사실로 엄연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피해를 발생시키고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다른 것은 논외로 하고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 문제만 보아도 과연 텐노오 방한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재일동포 문제는 일본에서 시민사회적 합리성이 가장 관철되지 않는 영역의 하나이다. 재일동포 젊은이들이 취직차별을 견디다 못해 일본 국적을 취득하고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혼담이 깨지는 경험 끝에 귀화를 후회하고 다시 민족명(民族名)으로 살아가려는 사례가 나타날 정도로 일본사회의 진입 장벽은 높다. 전쟁 피해자를 차별하는 그늘진 모습을 가려놓은 채 이루어지는 텐노오의 방한이라는 의전절차가 일본사회에서 합리적 시민정신을 함양시키는 방향으로는 결코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군의 최고지휘관이었던 텐노오 히로히또의 명령에 의해 2차대전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군인들은 연금 지급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물론 현재의 텐노오는 히로히또의 아들로서 본인이 직접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국가 상징의 지위를 계승하였으므로 역사적 책임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직도 일본에서 텐노오와 전쟁책임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은 나가사끼(長崎)의 모또시마 히또시(本島等) 시장 저격사건註5)에서 볼 수 있듯이 생사를 좌우하는 모험이다. 이는 텐노오의 존재가 일본에서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사회세력을 반영하는 상징이며 현실적으로 사회적 담론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이 방일할 때마다 한국 언론은 ‘유감이다’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 ‘조선반도의 모든 사람들이 입은 고통에 대해 사과한다’는 텐노오의 추상적 발언의 표현 강도나 문서화의 수준으로 정상외교의 성과를 저울질하고 있다. 이를 읽는 일본측 실무자들은 다음에 사용할 ‘비슷한 말’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국제법정에 가서 소송할 것도 아닐 텐데 문서로 사과를 받는 것이 현재도 고통을 겪고 있는 피해 당사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식민통치를 해서 기술도 가르치고 근대화시켜 한국이 발전했다’는 유형의 망언이 재발하면, 문서가 있으니까 혼내주겠다고 한국정부는 큰소리를 치고 있으나 이것도 외교적 자해 소동을 벌여 유권자에게 이름을 기억시키려는 조무래기 정객들의 선거운동을 돕는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텐노오의 방한과 월드컵이 연계되어 벌어지는 호들갑 가운데서 한일간의 과거사가 다시 한번 회칠한 무덤 속으로 가매장되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한국인 전쟁 피해자의 해원(解寃)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만일 텐노오가 ‘조선인이라고 해서 집을 임대해주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며 재발을 방지하도록 국민 설득에 노력하겠다’라는 수준의 말을 할 수 있다면 차라리 과거사가 청산되기 시작한다고 한국인들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과연 텐노오가 한국에 올 때 일본 황족(皇族)이 원폭 피해자나 종군위안부를 찾아가 만날 수 있을 정도로 반성하고 있는가도 앞으로 관찰해볼 만한 주제이다. 새로운 한일관계를 위하여 김대통령의 방일은 한일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동선언에 나타난 과거사 정리 방침은 한일관계를 경제협력·안보협력·반성과 배상 등 협력과 갈등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에 입각해 파악하는 사회적 타성을 지양하고 담론의 다양화를 촉진할 수 있는 사회적 공간을 확장한 긍정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과거사 정리의 공론화는 민주화운동의 투사였던 김대통령만이 가질 수 있는 대국민 설득력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보인다. 이미 한국의 지일파 식자들 사이에는 김대통령 방일에 즈음하여 국가간에는 협력하고 과거사 논쟁은 시민사회 수준에서 해결하여 시민적 한일관계를 구축하고, 이를 아시아 시민사회로 확대해나가자는 구상도 제시되고 있다.註6) 이에 대해서는 국가와 시민사회가 과연 분리되는 존재인가 하는 원론적 의문도 제기되지만 한국과 일본에 역사 청산을 책임질 만한 시민적 주체가 과연 형성되어 있는가에 대한 허심탄회하고 솔직한 대화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각도에서 접근할 경우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는 종군위안부에 대한 국가책임 문제가 적당히 넘어가는 가운데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을 조성하여 개별적인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짓자는 일본측의 행동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 일이다. 시민사회끼리의 역사청산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오히려 양국 시민사회의 취약성을 상호보완할 방안을 모색하는 일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현실적으로 시민사회 차원의 한일 협력관계를 구축해가자는 구상은 양국 시민사회 영역의 보수성을 지양하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7,80년대에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일본 시민운동이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협력한 경험은 귀중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이 함께 직면한 시급한 과제는 WTO체제에 맞도록 경제구조의 틀을 새로 짜는 일이다. 일본뿐 아니라 아시아의 후발공업국들이 미국계 투기자본의 횡포 때문에 경제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는 진단하에 공동대응 전선을 구축하자는 논의도 등장하고 있다. 국내 진보적인 경제학자 가운데서도 최근에 일본이 제안한 1,000억 달러 규모의 ‘아시아통화기금’(AMF), 미야자와(宮澤喜一)플랜에 의한 동아시아 외환위기 탈출을 위한 3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 제공, 한일자유무역지대 창설 등의 구상을 긍정적으로 검토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註7) 황인종이 대동단결하여 백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고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하자는 태평양전쟁 당시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은 중국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고 있으니 무조건 배격할 필요는 없는 제안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는 결국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국제관계를 포괄하는 넓은 시야로 한일관계를 볼 것을 촉구하는 담론이지만, 각국 시민사회 상호간의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오히려 갈등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총체적으로 보아 오늘의 상황은 한일관계를 개방적 주체성에 입각해 파악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외환위기 가운데서 경제적 도움을 얻는 것이 급하기는 하지만 일본에 대한 객관적이며 분석적인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정신적 여유는 가져야 한다. 협력과 비판을 모순으로 파악할 필요는 없지만 과거사 청산이 근현대사를 논의하지 말자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사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사실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하는 것이 양국 정상이 발표한 공동선언에 따라 ‘화해와 선린우호 협력에 입각한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정립하는 길이다. ------------------------------------------------------------------------------- - 1) 일본에서 현재 즉위하고 있는 왕은 ‘텐노오’라고 부른다. 쇼오와(昭和), 헤이세이(平成)는 연호이다. 사망한 왕은 연호를 붙여 예컨대 쇼오와 텐노오 같은 호칭을 사용한다. 2) 김영구, 「독도 잠정합의 수역서 제외돼야」, 『조선일보』 1998. 9. 29. 3)「김대통령 방일 뒷얘기」, 『인터넷 중앙일보』 1998. 10. 19. 4) 김창남, 「日 대중문화 수용자세」, 『문화일보』 1998. 10. 13. 5) 히로히또 쇼오와 텐노오가 사망(1989. 1. 7)하기 직전 텐노오에게도 전쟁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한 모또시마 시장이 1990년 1월 우익단체 행동대원에게 권총으로 저격당해 폐에 관통상을 입었으나 목숨은 건졌다. 모또시마 시장은 다음 선거(1991. 4. 21)에서 재선되었다. ------------------------------------------------------------------------------- - 6) 김영호, 「시민적 한일 관계로」, 『조선일보』 1998. 10. 6. 7) 정운영, 「함께 사는 길」, 『인터넷 한겨레』 1998. 10. 6. ------------------------------------------------------------------------------- - �� �後後� �짯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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