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20일 토요일 오후 02시 50분 07초 제 목(Title): 최원식/비서구식민지경험과 아시아주의망령 비서구 식민지 경험과 아시아주의의 망령 최원식 병자호란과 중화체제의 변용 병자조약과 중화체제에 대한 일본의 도전 다시 병자년에: 한반도와 동아시아 올해는 병자년(丙子年)이다. 서기 1996년을 전통적인 간지(干支)로 따져 병자년으로 환산하는 순간, 병자년을 에워싸고 있는 역사적 추억이 문득 우리들 현대의 두터운 지층을 뚫고 살아나온다. 그것은 일종의 위기의식이다. 자본의 광범한 물결이 우리들 생활 곳곳에 밴 ‘종족의 기억’을 급속히 지워버린 탓으로 요즘은 이 의식이 심각히 탈색되었지만, 지난 병자년(1936) 때만 해도 난리의 예감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던 모양이다. 채만식(蔡萬植)의 단편 「명일(明日)」(1936)에는 흥미로운 삽화가 나온다. 막벌이꾼의 아내, 문간방 색시가 말한다. “올에 난리가 난대유! (…) 올이 벵자년이람서유? 그래서 난리가 난대유. (…) 큰일 났어유. 도루 시굴루 가야 헐까배유.” 註1) 이 참언(言)은 그대로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태평양전쟁(1941~45)의 단초를 연 중일전쟁이 그 이듬해 발발한 사실을 상기할 때 그냥 유언비어는 아닌 셈이다. 병자년이 돌아오면 생생히 살아나는 이 공포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것은 청(淸)의 대규모 침공으로 나라가 쑥밭이 됐던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과 메이지(明治)정부의 함포외교에 굴복하여 병자조약을 통해 ‘은둔의 왕국’ 조선이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강제로 편입된 이른바 ‘개국’이란 일대 사건(1876)에서 비롯할 터이다. 세계사적 격동과 직·간접으로 연동한 동아시아의 대격변 속에서 조선의 운명을 가파른 도정으로 몰아넣은 사건들이 모두 병자년에 폭발했다는 점을 나는 먼저 음미하고 싶다. 병자호란과 중화체제의 변용 병자호란은 청 태종(太宗)이 10만 대군을 몰아 인조(仁祖) 14년(1636) 12월 조선을 침공한 사건을 이른다. 군신관계를 강요하는 청의 요구를 거절한 조선조정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한 이 침략은 명(明)을 치기 위해 배후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데서 감행된 것인데, 이미 지는 태양에 지나지 않았던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우며 대책 없는 강경책으로 나서던 조선조정은 이듬해 1월 항복으로 전쟁을 종결했다. 짧지만 가장 치욕적인 이 전쟁은 그후 한국인의 마음속에 아주 민감한 치부(恥部)로 또는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으로 역사적 기억의 창고 속에 숨겨져온 것이다. 우리나라는 외침(外侵)의 역사 속에서도 명예로운 의병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가령 일본의 침략으로 7년에 걸친 전쟁에 시달렸던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97) 때에도 관군이 무너지자 초야에서, 민중 사이에서 크고 작은 의병부대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어 왜군과 싸웠으니, 의병의 전통이 박약한 일본의 침략자들이 이에 크게 충격받은 바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임진왜란 시기에 활약했던 의병부대원들을 오직 민중으로만 파악하기는 어렵다. 아다시피 당시 의병은 “사림(士林) 가운데 명망있는 자가 창의(倡義)하여 문하(門下) 및 종유인(從游人) 등의 호응을 얻은 다음, 그 호응자들이 다시 각기의 노복이나 소거지(所居地)의 향민(鄕民)들을 동원하는 형태로 전개”註2) 되었기에 그 주도층은 사림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조(在朝)의 훈구(勳舊)에 대한 사림의 재야적 성격과 일반 인민이 관군이 아니라 사림의 의병에 가담하여 투쟁한 점을 아울러 생각하면 그 민중적 성격은 비교적 또렷이 부각될 듯싶다. 하여튼 역사의 고비마다 오늘날까지도 민중운동의 형태로 끊임없이 부활해온 이 의병전통은 한국 민주주의의 풍부한 원천의 하나인데, 병자호란에는 의병의 소식이 상대적으로 적막하다. 물론 이 전쟁이 너무나 빠르게 종결된 데 선차적 원인이 있겠으나, 그것은 이 전쟁을 바라보는 민중의 냉엄한 비판과 더욱 관련될 것이다. 준비 없는 강경책으로 전쟁을 자초하여 항복에 이른 당시 조정은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으로 일컬어지는 꾸데따로 광해군(光海君)을 쫓아내고 집권한 서인정권이다. 광해군은 왕자의 몸으로 임진왜란의 참화를 직접 겪었던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매우 날카로운 현실주의로 당시 대륙에서 벌어지고 있던 명·청의 대결을 주시하면서 양자에 대해 일종의 등거리 외교를 실험하였다. 이에 반해 서인정권은 광해군의 현실주의 외교노선을 폐기하고 전통적인 명분론으로 복귀하였다. 물론 우리는 당시 조정의 청에 대한 굴욕감을 이해한다. 아다시피 청은 본래 조선의 북방에 거주하던 유목민족, 여진족(女眞族)이다. 우리나라의 역대 조정은 이들을 때로는 정벌하고 때로는 회유하는 양면 전술로 변경의 안정을 도모해왔는데, 이들이 갑자기 강대해져 조선왕조에 대해 군신관계를 요구하니 기가 막힐 일이기는 하다. 문명국의 변경에서 복속하는 척 엎드려 있다가 일세의 영웅이 출현하면 삽시간에 위대한 제국으로 변신하여 중원천하를 덮치는 초원의 법칙이란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아마도 서인정권은 명과 연합하여 ‘문명국’이 아니라 ‘야만족’에게 사대(事大)하는 굴욕을 피할 수 있기를 간절히 그러나 부질없이 기원했던 것일까? 사정이 이러하매 병자호란을 바라보는 민중의 시각이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태준(李泰俊)의 「해방전후」(1946)에는 흥미로운 광해군론이 나온다. “직원님 의향 잘 알겠읍니다. (…) 명분을 말씀허시니 말이지, 광해조 때 일을 생각해보십시오. 임진란에 명의 구원을 받었지만 명이 청 태조에게 시달리게 될 때, 이번엔 명이 조선에 구원군을 요구하지 않었읍니까?” “그게 바루 우리 조선서 대의명분론이 일어난 시초요구려.” “임진란 즉후라 조선은 명을 도아 참전할 실력은 전혀 없는데 신하들은 대의명분상, 조선이 명과 함께 망해버리는 한이라도 그냥 있을 순 없다는 것이 명분파요, 나라는 망하고, 임군 노릇은 그만두드라도 여지껏 왜적에게 시달린 백성을 숨도 돌릴 새 없이 되짚어 도탄에 빠뜨릴 순 없다는 것이 택민파(澤民派)요, 택민론의 주창으로 몸소 폐위까지 한 것이 광해군 아닙니까? 나라들과 임군들 노름에 불상한 백성들만 시달려선 안된다고 자기가 왕위를 폐리같이 버리면서까지 택민론을 주장한 광해군이, 나는 백성들은 어찌 됐든지 지배자들의 명분만 찾던 그 신하들보다 몇배 훌륭했고, 정말 옳은 지도자였다고 생각합니다. (…)”註3) 해방 직전 일종의 반일연합을 형성했던 주인공 현(玄)과 김직원(金直員)이 해방 직후 각기 좌우합작론과 임시정부 봉대론(奉戴論)으로 균열하는 이 인상적인 토론에서, 광해군 옹호론이 전자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고 보면, 병자호란 이후 명분론에 기초한 북벌론(北伐論)의 이데올로기화 자체가 이 전쟁에 대한 민중의 비판에 대한 지배계급의 강력한 대타(對他)의식에서 비롯되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일찍이 지배계급의 무능을 이처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 바가 드물었던 병자호란 이후 조선왕조의 운명은 어떠하였는가? 임진왜란 직후 일본에서는 토꾸가와막부(德川幕府)가 성립하고 병자호란 이후 중국에서는 명에서 청으로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호된 전쟁을 치른 조선왕조는 오히려 끄떡이 없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하따다 타까시(旗田巍)는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 외압에서의 해방은 조선의 발전에 있어서 언제나 불가결의 요건이었으나, 그것만으로 조선의 발전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 이를테면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침입을 물리친 뒤에도 조선은 결코 눈부신 성장을 보이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 침략의 피해가 엄청나게 컸고, 그 회복이 참으로 곤란했다고 할 수 있으나 그것으로서는 석연치 않다. (…) 외압에서의 해방이 조선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외압에서의 탈출이 아니고, 동시에 조선 내부에 있어서의 해방과 결부되는 경우에였다.註4) 그런데 이는 임진왜란보다 병자호란에 더 들어맞는 것 같다. 이미 지적했듯이 임진왜란에서 매우 활발했던 의병의 봉기에서 보는 것처럼 이 전쟁은 뜻밖에 민중의 생명력을 깨워냈다. 물론 전후에 지배계급은 이렇게 생기(生起)한 민중의 힘을 압살하는 방향으로 수습함으로써 지배체제의 재정비에 나서지만 그게 그렇게 용이하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광해군의 현실주의적 개혁노선을 꾸데따로 엎은 인조반정은 아마도 그와 같은 위기의 표현이 아닐까? 이 점에서 병자호란이야말로 결정적이다. 병자호란을 통과함으로써 조선왕조의 지배체제는 일본에서 토요또미정권이 붕괴하고 중국에서 명이 멸망하는 특단의 위기상황을 너끈히 헤치고 부활에 성공하는 기적을 연출했던 것이다. 상상을 조금 더 밀고나가는 것을 허락한다면, 당시 서인정권이 전쟁의 도박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동족 반란군 이자성(李自成)이 아니라 이민족 청과 타협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으려 했던 명의 한족 지배층이나, 혁명의 예방을 위해 패망에 이르기까지 끝없는 확전(擴戰)의 길로 나섰던 일본 파시스트들의 행동양식과 비교해볼 만하다. 요컨대 조선을 전쟁터로 삼아 조선·명·청·일본이 복잡하게 얽혀 싸운 임진왜란에서 시작하여 병자호란으로 마감되는 이 긴 전쟁은, 1618년에 발발하여 독일 역사를 2세기나 낙후하게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유럽의 30년전쟁에 견줄 수 있겠다. 명백히, 농업 생산력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파괴시킨 것은 30년전쟁이었다. 많은 도시들의 동시적 파괴와 함께, 그로 말미암아 농민, 빈민, 그리고 영락한 시민 들의 생활수준은 오랫동안 가장 열악한 형태의 아일란드적 빈궁 상태로 격하되었다.註5)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거의 동시에 폭발한 이 큰 전쟁들은 17세기 위기설을 실감나게 한다.註6) 민중의 황폐 속에서 30년전쟁의 유일한 승리자는 제후였듯이, 임·병양란(壬丙兩亂)의 궁극적 승리자는 조선의 완고한 지배체제였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불행이요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의 화근으로 변모할 터인데, 여기에 중국과 일본이 한몫 거들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 1911년 신해혁명으로 붕괴될 때까지 지속된 청의 중국지배는 서구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이 거듭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국이 내발적 근대화로 나아가는 도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였다. 청은 중화에 대한 종족적 해석을 포기하고 종족을 불문하고 중화적인 문화전통을 계승하면 누구든지 중화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다시 말하면 자신의 태생인 유목민족적 특성을 재빨리 벗어버리고 중국화함으로써 중국문명의 수호자로서 이미지를 변신하는 데 성공, 놀라운 효과를 거두었다. 이는 상대적으로 더욱 비중국적 요소를 강조했던 몽골(元)의 중국지배와 차별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청은 만주족-한족 이원체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한족 지식인의 광범한 협조를 얻어 효율적으로 중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청의 성공이 마침내 중국의 불행으로 전화되고 만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만주족의 공적을 고찰함에 있어서 우리가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질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후에 가서 붕괴를 맞이하게 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질서의 위신이 다시없이 크게 생각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구질서의 각 분야에서 유지되고 있던 평형이 지극히 안정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제 제도와 가치관념을 급진적으로 철저하게 변혁시킨다는 것은 쉽사리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주족은 쇄신자로서가 아니라 계승자로서 성공한 것(…).註7) 만약 청이 중화체제의 계승자가 아니라 쇄신자, 더 나아가서 그 철저한 해체자로 나섰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동아시아사는 매우 흥미로운 전개를 보였을 터인데, 특히 호란 이후 청에 대한 복수와 복종 사이에서 정권을 담보한 조선조정의 기묘한 평형은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청의 중국지배는 대외적으로 미묘한 파장을 그리게 된다. 중화의 정통적 계승자 명이 변경 유목민족에 의해 멸망한 충격적 사건으로 동아시아 중화체제 내부에 은밀한 균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이미 멸망한 명의 연호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써, 겉으로는 청에 복속하면서도 속으로는 우리야말로 중화문명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긍지를 자부했던 것인데, 이는 일본과 베트남에서도 두루 확인되는 것이다. 비록 왜곡된 형태일망정 근대민족주의의 맹아가 엿보이는 점에서 중세 보편주의 해체의 징후라는 일면 긍적적 의의도 없지 않으나, 그것이 대내적으로는 각 나라의 변혁을 억압하는 안보이데올로기로서 기능했다는 부정적 측면과 통합되어 있었다는 점을 명념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 때문에 이 시기 한·중·일 세 나라는 지배층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제한된 교류를 제외하고는 더욱 완강한 쇄국주의로 빗장을 걸어잠금으로써註8) , 서구 자본주의에 대응할 유연체제의 감퇴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이와같은 쇄국주의를 부추긴 것이 바로 조선을 전장으로 삼아 폭발했던 임·병양란의 영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둘 때 이들 전쟁은 비단 조선뿐 아니라 중·일 양국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조숙한 서구파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45)는 흥미롭다. 어둠속에서 섬광처럼 반짝이다 꺼져간 그의 삶은 광해군과 유사한 면이 없지 않다.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청의 인질이 되어 만주 심양(瀋陽)으로 끌려갔던 소현세자는 인조를 비롯한 완고한 지배층의 기대와 달리 청에 대한 복수 대신 조선의 개혁을 숙고하는 현실주의자로 귀환하였다. 그의 인질생활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1644년 북경에서 예수회 선교사 탕약망(湯若望, Johannes Adam Schall von Bell)과 교유한 사실이다. 리마두(利瑪竇, Matteo Ricci)의 후임으로 1622년 중국에 파견된 독일 출신 탕약망은 숙련된 천문가로 활약했는데, 명이 멸망하자 재빨리 새로운 지배자 청에 귀부한 노련한 인물이다. 1644년 명·청의 교체는 반전을 거듭했던 한편의 드라마였다.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자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은 자살하고 이로써 명조 300년의 역사가 허망하게 막을 내렸다. 그런데 청에 항복한 명의 장군 오삼계(吳三桂)의 인도로 청군이 만주로부터 내습, 여기서 이자성이 패함으로써 천하는 순식간에 청으로 넘어간 것이다. 청 세조(世祖)는 1644년 9월 19일 마침내 북경에 도착하였다. 그 며칠 후 황제를 뒤따라 소현세자도 그때까지 유수되어 있던 심양을 떠나 입경, 그해 11월 26일 귀국의 허가를 얻었으니, 그의 북경 체재는 70일을 넘지 않는 것이다.註9) 중원 천하를 둘러싼 거대한 쟁투가 바야흐로 청의 천하통일로 귀결되는 이 역사적 현장에서 외로운 나라의 인질 소현세자는 과연 무엇을 꿈꾸었을까? 북경의 70일, 소현세자는 탕약망을 통해 서구의 과학에 매혹되었던 것이다. 소현세자를 통해 조선에 대한 천주교의 무혈입성을 노렸던 탕약망이 세자의 귀국선물로 성물(聖物)과 천문학 기구 및 과학서적을 보내자 현명한 세자는 성물들은 정중하게 반환하고 서구과학만 소중히 안고 귀국길에 올랐던 것이다. 내가 나의 왕국으로 돌아가면 그것들을 궁정에 소개할 뿐만 아니라 출판하여 식자(識者)들에게 알리고자 합니다. 그들 또한 머지않아, 사막으로부터 박학의 전당으로 인도된 행운을 감사하게 될 것이고, 우리 국민들도 그들이 서구인의 과학 덕분에 그리 된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註10) 이는 8년의 유수 끝에 귀국하는 소현세자가, 작별의 선물로 서구의 과학 기구와 서적 들을 보내온 탕약망에게 띄운 편지의 일부분이다. 숨막힐 듯한 중화체제의 압박 속에서 특유의 탈아론(脫亞論)을 꿈꾸었던 그의 조숙성은 비록 예수회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아름답다. 동아시아의 망령으로부터 해방되어 “박학의 전당”(le palais du l’e′rudition)에 들기를 갈구했던 그의 염원은 환국 두달 만에 의문의 죽음으로 좌절되는데註11) , 그의 꿈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8) 이후 서구근대의 맹목적 추종이라는 통속적 형태로 횡행하는 것 또한 통렬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병자조약과 중화체제에 대한 일본의 도전 병자호란이 발발한 지 240년 뒤, 다시 맞은 병자년에 강화도조약(1876)이 조선과 메이지 정부 사이에서 조인되었다. “조선국은 자주의 나라로 일본국과 더불어 평등의 권리를 보유한다”(朝鮮國自主之邦 與日本國保有平等之權)고 겉으로 선언하고 있지만, 실제로 이 조약은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다. 더구나 이 조약 체결의 배후에는 이른바 운요오호사건(雲揚號事件, 1875), 즉 조선의 수비대와 민간에 가한 일본 군함의 만행이 있었으니, 일본은 미국의 페리(Perry)함대의 위협 아래 개국한(1854) 이후, 서구 열강과 잇따라 불평등조약을 맺었던 경험을 조선에 모방적으로 적용한 셈이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이 개국함으로써 세계시장의 고리가 완결되었다. 사실 조선은 그 사이, 프랑스함대의 침략을 물리치고(병인양요, 1866), 방자한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우고(1866), 미국의 육전대와 장렬한 전투를 치르면서까지(신미양요, 1871),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되기를 거부해온 마지막 국가였다. 그런데 비서구지역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서구열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왜이(倭夷)라고 멸시해 마지않던 일본에 의해 개국되는 기이한 경험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서양의 계속되는 개항 요구에는 완강했던 조선이 어찌하여 일본에는 그처럼 수월하게 응했을까? 물론 서양이 일본을 내세워 조선을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시킨 사실 자체가 당시 조선의 반침략 투쟁의지의 강도를 반증하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무엇보다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에 결연히 저항했던 대원군정권(1864~73)의 붕괴라는 조선 내부의 정국변화가 큰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다. 이 정권의 등장과 붕괴는 당시 동아시아로 뻗어오는 서구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협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영불연합군에 의한 북경함락(1860)은 중국뿐 아니라 중화체제 아래 포섭되어 있던 조선과 일본에도 심대한 충격을 선사했다. 그 얼마 뒤 조선에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으로 무장한 대원군의 집권이 이루어지고 그의 정책이 안팎으로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었을 터인데, 그럼에도 중세체제의 부분적 개혁으로 서구자본의 공세를 차단하려 했던 대원군정권은 조만간 실패할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거둔 대원군의 작은 승리의 순간에 그의 실각의 씨앗이 배태되었다고 할까? 이 점에서 중국의 위기를 전기로 삼아 긍적적이든 부정적이든 체제변화에 일단 성공한 메이지유신이 대원군정권의 붕괴를 촉진했는지도 모른다. 평양감사로서 제너럴 셔먼호를 격퇴하는 데 진력했던 박규수(朴珪壽)가 그후 오히려 병자조약 체결에 적극적 역할을 행사한 데에서 보이듯 개국을 통한 체제변화론이 하나의 뚜렷한 흐름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이제 바람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서 불어온다. 다시 묻건대, 서양의 개항요구에 그처럼 강경했던 조선정부가, 아무리 대원군정권이 붕괴했다 하더라도, 그리고 열강의 간섭을 불러올지도 모를 동아시아의 무력충돌을 두려워한 청이 강화도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조선정부에 넌지시 권유했다고 하더라도註12) , 일본에는 왜 비교적 쉽게 응했을까? 대원군과 재야 지식인들의 개국 반대론에 대해 당시 정부는 병자조약이 일본과의 ‘구교(舊交)의 계속’이라고 주장하면서 양이(洋夷)와의 쇄국정책 고수를 다짐하였다. 이처럼 일본과 양이를 구별한 정부의 논리를 “위정척사론자의 반격에 대한 고충의 변명”註13) 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것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일본에 대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교린(交隣)관계를 생각할 때 조선정부가, 서양의 충격 아래에서도 나라를 보존할 뿐 아니라 체제변화에도 일정하게 성공한 일본의 경험으로부터 동병상련적 학습의 나눔을 호의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일본은, 쑨원(孫文)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면, ‘동양왕도의 아성’이 아니라 ‘서양패도(覇道)의 주구(走狗)’, 즉 서구자본주의의 아시아 침략의 대리자 또는 하위 파트너로 전락했다. 후꾸자와 유끼찌(福澤諭吉)는 “아시아 동방의 악우(惡友)를 사절”하자고 아우성쳤지만, 과연 누가 나쁜 친구인지 적반하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랴? 조선정부의 무능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 점에서 개항에 반대한 위정척사론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註14) 은 날카롭다. 그는 양복을 입고 양박(洋舶)을 타고 양포를 쏘면서 몰려온 일본이 과거의 ‘왜이’가 아니라 이미 양화(洋化)한 ‘금수(禽獸)’이기 때문에 병자조약이 결코 ‘구교의 계속’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금수’란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척사론자의 저주가 묻어난 용어인데, 유신 이후의 일본을 과거의 왜이와 구분한 그의 안목은, 답답한 쇄국론의 회로에 갇혀 있을망정, 정곡을 얻은 터이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에도 이를 병자호란에 비기는 논의가 있었던 모양이다. 청과의 관계가 강화(講和) 이후 오히려 안정되었듯이 강화도조약도 그와 유사한 효과를 거두리라고 전망하는 일부의 논의에 대해 면암은 예의 금수론에 입각, 메이지정부를 중세적 이적(夷狄)인 청과 엄격히 차별지었던 것이다. 요컨대 1876년 인천 앞바다에 출현한 일본은 근대 이전 무수히 한반도에 출몰했던 왜구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근대 자본주의의 첨병 ‘양이(洋夷)’라는 점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다. 과연 일본은 당시 조선 조야 일부의 우려 섞인 기대를 배반하고 ‘양이’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에 조선정부는 뒤늦게 1882년(고종 19년) 미국·영국·독일 등과 수호조약을 잇따라 맺음으로써 청·일을 견제하면서 자강을 도모하려 하지만 이 또한 오판이었다. 서구열강, 특히 영·미는 일본의 조선 및 중국 침략을 후원함으로써 일본을 아시아의 경찰로 키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비단 서구뿐만이 아니다. 엥겔스가 청일전쟁을 “러시아 정부가 일본을 도구로 사용하여 도발”註15) (맑스의 딸 라우라 라파르그에게 보낸 편지, 1894. 9.)한 것으로 파악했듯이, 이 전쟁에 즈음한 러시아의 양면전술은 대표적이다. 러시아는 “중국에 대해서는 선심을 쓰는 척하면서도 일본을 부추겨 중국에 대한 침략전쟁을 발동하게 함으로써 일본의 손을 빌려 중국 봉건군벌들의 세력을 조선으로부터 몰아내며 나아가서는 중일 양국이 지친 틈을 타서 중국 동북과 조선에 대한 저희들의 침략의도를 진일보 성취”하려고 획책하였던 것이다.註16) 그런데 러시아의 기대와는 달리 청은 너무 빨리 패배하고 이에 따라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지탱해온 전통적 중화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 엥겔스가 그 편지에서 예견한 대로 청일전쟁은 “낡은 중국의 모든 전통적 체계들의 철저한 와해”(der vo¨llige Zusammenbruch des ganzen traditionellen Systems im alten China)를 가져왔던 것이다. 일본이 만약 이때 중화체제를 철저히 해체하고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연대론에 입각해 동아시아의 근본적 평화를 가져올 새로운 질서의 건설자로서 자기 역할을 진지하게 고려했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일본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스스로 팽개쳤다. 중화체제를 대신하여 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려는 일제의 계속적 기도가 어떻게 세계적 대재난으로 확대되어갔는지는 이 자리에서 다시 되풀이할 필요도 없다. 한반도가 세계사적 모순의 가장 예민하고 가장 난해한 결절점의 하나라는 점이 여기에서도 증명되는 바인데, 그 근원에 메이지유신의 성격이 가로놓여 있다고 해도 좋다. 나는 메이지유신을 비서구지역 근대화의 교과서로 미화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그렇다고 이를 과소평가하고 싶지도 않다. 메이지유신이 위로부터의 변혁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사망한 숫자가 약 3만명에 달한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하지만註17) , “좋든 나쁘든 일본인들이 전국에 걸쳐 근본적인 변혁을 이룩한 것은 일본의 역사에서 메이지유신이 단 하나의 예”註18) 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봉건체제를 수호하는 수구세력의 강고함을 뚫고 더구나 그것이 서구열강의 근본적 위협이라는 조건 아래에서 유신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과 중국에서 유신을 모델로 한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과 무술정변(戊戌政變, 1898)이 모두 실패로 끝난 것을 상기하면, 메이지 10년대까지 반전을 거듭하며 진행된 유신의 변혁과정이 그 이후에 이루어진 메이지국가보다 위대하다는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의 지적이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대단한 일을 해낸 근대일본은 어찌하여 아시아의 침략자로 돌변하는가? 여기에 메이지유신의 근본적 문제가 있다. 유신변혁을 추동한 주된 담당층이 막말기(幕末期)의 부르조아적 세력과의 제휴가 약한 사족적·귀족적 반대파에서 배출됨으로써 일찍부터 아니 처음부터 ‘황국와해’(皇國瓦解) 방지론에 입각한 국가주의에 경사했다는 점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봉건제로부터의 해방을 열망하는 인민에 의거하는 것을 거부하고 (…) 봉건영주계급과의 타협 위에 자기의 진로를 구”하는 모순에 빠졌다.註19) 이 반인민적 성격은 대외적으로는 아시아 이웃에 대한 침략주의와 긴밀하게 호응한다. 요시다 쇼오인(吉田松蔭)이 “교역으로 러시아와 미국에 잃은 바를 토지로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겠다고 말했듯이, “대(對)아시아의식만 있고 아시아의식을 결한 ‘아시아의 일원’인 일본의 비극”註20) 이 여기에서 싹텄던 것이다. 특히 정한론(征韓論)은 악명 높은 것이다. 1873년 조선정부의 왜관 봉쇄를 계기로 사이고오 다까모리(西鄕隆盛)가 주창한 정한론이 그중 뚜렷이 드러난 바이지만, 그 연원은 막부 말기로 소급된다. 구미열강의 압박과 양이파(攘夷派)의 대두 속에서 위기에 몰린 막부는 1860년대 초, 돌연 정한론으로 그 돌파구를 모색하였다. 막부에 적대적인 웅번(雄藩)의 군사력을 오히려 해외로 돌려 막각(幕閣)독재의 재확립을 획책하였던 것이다.註21) 그런데 막부의 안보이데올로기로 제기된 정한론을 유신정부도 거의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내정의 주도권 장악이 군사적 권위의 확립과 직결된 메이지국가의 속성을 염두에 둘 때, 지배층 내부의 권력투쟁이 조선 침략의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 바로 이 문제와 연동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1873년 사이고오의 정한론이 이와꾸라(岩倉具視)파에 의해 좌절됐을 때 그의 몰락은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와꾸라파가 조선 침략에 본원적으로 반대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은 사이고오의 자멸 이후 운요오호사건으로 조선을 도발하여 결국 강화도조약을 맺었던 것이다.註22) 요컨대 구미열강에 대한 종속의 대상(代償)을 가까운 이웃 아시아의 침략에서 구하는 요시다의 방향이, 열강의 힘의 균형을 이용하여 ‘소독립국 일본’에의 길을 추구했던 하시모또(橋本左內)의 꿈을 압도함으로써 메이지 일본은 군국주의가 조숙했던 것이다. 이리 된 데는 물론 “중국이 구미의 외압의 방벽을 이루고 있었던 것, 조선이 구미의 침략을 모면하여, 일본이 그 대행을 완수한다는, 동아시아의 특수한 조건”註23) 을 감안하더라도, “국내의 모순이 대외침략으로 전화하는 관계로서가 아니라, 대외침략이 국가권력의 유일한 존재이유라는 점에 의해서, 국내의 계급억압도 성립하는 천황제”註24) 에 근본문제가 있을 터이다. 해방 직후 임화(林和)는, 일본의 조선통치가 근대 제국주의국가의 식민지지배라기보다는 고대의 정복에 가까웠다고 지적하면서, 그 근본원인으로 일본제국주의의 후진성을 든 바 있다.註25) 신통하게도 최근 모리시마 미찌오(森島洞夫)가 임화와 아주 비슷한 논의를 펼쳤다. 그는 정복된 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민을 노예화해버린 일본제국주의의 흉포성의 원인을 역시 그 후진성에서 구한다. 이와같은 일본의 ‘제국주의’는, 결코 맑스·레닌·스위지적(的) 의미의 제국주의가 아니다. 그러한 ‘제국주의’는, 맑스주의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인 독점자본주의단계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일본 경제가 아직 유년기·청년기에 있었던 때에, 일본은 이미 해외침략을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註26) 우리는 물론 일본자본주의의 후진성이 식민지 조선에 ‘플러스 개발’의 뜻밖의 효과도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음을 보아야 하지만 그 기본은 역시 ‘마이너스 침탈’이라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과연 일본제국주의의 흉포성은 가혹한 조선지배를 축으로 아시아로 침략을 확대함에 따라 더욱 증폭되고 말았다. 이 세계적 재난은 침략당하는 민족들뿐 아니라 급기야 일본 민중의 고통으로 전화되었으니, 그 후유증은 분단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이 지역 여러 나라들에 상기도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병자년에: 한반도와 동아시아 20세기에 맞은 마지막 병자년, 1996년은 병자호란이나 강화도조약 같은 대격변을 겪지 않은 채 상대적으로 평온하게 넘어가는가 싶더니, 동해안에서 작은 전쟁이 터졌다. 이 사건을 빌미로 우리 내부의 수구세력의 공세가 고삐를 죄는 형국이더니 슬그머니 ‘기우뚱한 균형’ 속에 일상으로 복귀하였다. 예전 같으면 한바탕 법석이 일어날 법한 일인데, 확실히 무언가 나라 안팎의 상황 변화가 가져온 어떤 힘을 실감케 된다. 일반 국민들도 그 극성스런 사재기 없이 의연하다. 이를 정부에서는 안보불감증이라고 몰아세우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냄비 끓듯 이리 쏠리고 저리 치는 그런 요동질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은 우리 사회가 성숙한 탓일까? 그럼에도 우리가 위기로부터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것은 결코 아니다. 탈냉전 이후 거대 동맹의 상실로 대규모의 전쟁 가능성이 거의 사라진 시대에 들어섰다는 예측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국지적 분쟁은 증가하는 추세를 우리는 똑똑히 목격하고 있다. 한반도는 그 가능 지역에서 제외된 적이 없다. 체제를 달리하는 두 정부가 휴전선이라는 아주 불안정한 경계를 사이에 두고 적대하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 그것도 유난히 ‘단일민족 신화’에 지펴 있는 ‘두 나라’가 엄청난 열전을 치른 후 반세기 가까이 상대를 향하여 총구를 겨누고 대치하는 한반도의 현실. 한반도의 표면적 평화는 얼마나 아슬한 것인가? 한반도를 분쟁 가능 지역 목록에서 영구히 제외할 방안은 무엇인가? 분쟁의 씨앗을 머금은 이질적 체제들의 상호의존적 대치를 극복할 창조적인 체제동질화 방법의 모색, 여기에 관건이 있을 터이다. 이 점에서 근대 이후 우리 사회를 움직여온 기제들에 대한 발본적 재검토가 요구되는 것이다. 장구하게 지속된 중화체제의 압박을 자력으로 극복하지 못한 터에, 근대 이후 그에 도전한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직접적 지배 아래 신음한 한국은 일찍이 이 동아시아로부터 일종의 내적 망명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속에서, 알면 알수록 싫어지는 이웃의 ‘나쁜 친구들’을 멀리 피해서 서구를 모델로 삼는 개화파적 경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갑신정변의 혁명가 김옥균(金玉均)은 다짐한다.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세아의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註27) 흔히 그는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아 정변을 일으켰다고들 한다. 물론, 아시아의 영국을 지향하는 일본에 대해 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 같은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단순한 포부로 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다짐을 곰곰이 새겨보고 싶다.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영국의 이미지는 “안정된 입헌군주제의 모국”으로 찬양되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와 같은 영국식 타협이 국왕까지 처형했던 과격한 “17세기의 혁명의 성과로서 실현되었다는 인식이 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註28) 이에 비해 영국보다 늦게 혁명의 소용돌이에 말려든 프랑스의 이미지는 급진적이었다. 김옥균의 꿈은 위대한 공화국의 수립이었을까? 과연, 당시 조선의 객관적 조건을 염두에 둘 때 그 꿈이 실현될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지만, 그는 소현세자보다 더욱 철저한 근대적 서구파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작 주목해야 할 일은 우리 사회에서는 김옥균과 같은 빛나는 서구파는 지극히 예외적이고, 얼개화꾼들이 주류를 이루어온 점이다. 수구세력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재등장하는 개화파의 맹목적 근대 추종은 오늘날에도 남한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 기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러시아혁명(1917) 이후 맑스주의, 정확히 말하면 레닌주의 또는 스딸린식 일국사회주의가 서구화모델에 대한 대안으로 수용되어 우리 사회에서 또 하나의 강력한 흐름으로 부상해왔다. 이 비상한 열광은 서구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구는 한국민중의 벗이 아니라 일제의 후원자요 남한 역대 독재정권의 지지자라는 뼈아픈 사실을 확인하면서, 우리의 레닌주의자 또는 스딸린주의자 들은 서구적 근대를 생략하거나 가능한 한 단축한 채, ‘근대 이후’로 진입하려는 열망 아래 자본주의 세계체제로부터의 탈각을 꿈꾸었다. 근대성에 대한 안이한 성찰에 기반한 이 부서지기 쉬운 낭만적 근대부정의 경향은 위정척사파의 사고와 내밀히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식적 성격에서는 개화파의 새로운 변형이라는 중층성을 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남한의 민족민주운동은 이 두 모델을 넘어서는 대안의 추구를 중심적 과제로 삼아왔다. 동구적 ‘탈근대’가 환멸의 디스토피아로 현현된 우리들의 시대에, 서구적 근대를 역사의 종말로 찬미하는 논의가 한편으로 무성하지만, 자본을 새로운 황제로 섬기는 자본주의가 이 지상에 유토피아를 구현할 마지막 힘이라고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매우 순진한 노릇이다. 일찍이 루카치는 자본주의적 도시를 “이 새로운 단떼적 연옥”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한국사회, 터보엔진을 단 흉포한 도시화의 물결, 그 연옥 속에서 인간다운 삶에 대해 진지하게 사유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또다른 곳’(heteropia)을 꿈꾸지 않을 수 있을까? 현존사회주의의 붕괴, 동구사회주의는 물론 그 동아시아적 변형들도 서구적 근대의 진정한 극복이 아니었음이 더욱 뚜렷해진 지금이야말로 서구적 근대의 문제성을 더욱 체감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 운동의 대안적 자각을 한층 고양해 마땅한 터이다. 북한문제는 그 첫 시험대이다. 북한을 괄호치고 남한의 변혁에 선차성을 두는 운동론이나 북한을 기지로 삼아 남한을 ‘해방’하는 운동론의 적실성이 급격히 퇴색한 이 시점에서 분단문제를 어떻게 슬기롭게 푸느냐가 우리 운동의 관건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백낙청(白樂晴)의 분단체제론이 주목된다. 한반도의 분단현실은 “상호대립과 갈등과 단절 그 자체가 분단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데 교묘하게 기여하고 있는 일종의 체제”註29) 를 형성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이 실천적인 담론은 베트남식 무력통일과 서독식 흡수통일을 넘어서 남과 북의 수구세력에 대한 남북한 민중이 주도하는 분단체제의 변혁운동으로 조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창조적인 운동의 결과, 통일이 이루어진 한반도는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일부로 남”으면서도 “주민들의 자유와 평등이 좀더 신장된 그러한 자본주의 사회”의 건설을 통해서 “자본주의 세계체제 자체의 변혁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다는 세계사적 사명”을 담지하는 사회로 될 장기적 전망까지 그는 내다본다.註30) 나는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하나 걸리는 문제는 통일 이후 한반도 사회의 이미지가 범범(泛泛)한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그의 판단은 냉철하게 현실적이다. 나 자신도 자본주의 문명 이외에 그 어떤 대안의 단서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나는 분단체제를 푸는 창조적인 작업에서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라는 매개항에 대한 숙고를 다시 한번 환기하고 싶다. 아시아의 일원이면서도 아시아의식을 결한 일본이 아시아주의의 이름 아래 서구의 대리자로서 아시아 침략에 나섰던 악몽의 경험을 상기할 때, 아시아로부터의 내적 망명 상태에서 서구주의에 대한 더욱 세찬 숭배가 횡행하는 한국의 현상황을 점검하면 일말의 우려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압도적 현실성을 냉철히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그를 넘어설 새로운 세계형성의 원리를 탐구하는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의 일원으로서 한국인의 역할에 대한 자각이 지금 절실히 요구된다.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를 들고 나오면 즉각적으로, 미국의 세계지배를 새로운 국면에서 관철하려고 획책하는 문명충돌론에 우리 스스로 말려들어가는 일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우리 지식인 사회의 풍조다. 여기에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나, 우리는 구미(歐美)나 러시아나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두, 아시아 연대론에 대해서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간을 놀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간책은 지금도 앞으로도 크게 변하지 않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하기는 구미나 러시아만 탓할 수는 없다. 한반도를 중심에 두고 동아시아 각국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각축으로 말미암은 그 틈이 그들의 이간을 자초한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아시아가 단결하여 백인종 대신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자는 헛된 선동을 하자고 아시아론을 제기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나는 최근 유재건(柳在建)·한정숙(韓貞淑)이 번역한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고대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창작과비평사 1990)을 흥미롭게 읽었다. 세계사의 보편법칙으로 우리가 의심없이 수용하곤 했던, 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제, 이 발전 경로가 서유럽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라는 전제 아래, 동구 및 아시아에서는 엄격한 의미의 노예제적 생산양식이나 봉건제가 성립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에 처음에는 동방적 요소를 우정 배제하려는, 다시 말하면 일종의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한 아시아적 정체성 명제로 복귀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도 없지 않았지만, 한편 한국사의 경로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딴은 그렇다. 이제는 억지로 노예제를 찾고 우격다짐으로 우리식 봉건제를 설정하려고 헛애를 쓸 일이 아니다. 역사적 경험의 서구적 차이를 강조하는 앤더슨이 궁극적으로 “서구의 사회주의혁명이 러시아혁명이나 동구를 모델로 삼을 수 없”음을 시사하고 있듯이(유재건의 「역자 후기」, 344면), 우리도 몰역사적 보편주의의 망령에서 벗어나 한국 및 동아시아 사회의 독자적 역사 경험을 존중해야 마땅할 것이다. 동아시아론에 대해서 중국과 일본의 전술에 한국이 스스로 말려드는 짓이라는 비판 또한 흔한 일이다. 최근 중국과 일본에서, 기묘하게도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제휴하면서 자본주의 문명을 넘어설 만병통치약으로 아시아를 내세우는, 그리하여 실은 패권주의의 부활을 은밀히 꿈꾸는 ‘신판 중화주의’ 또는 ‘저강도 대동아공영론’이 분주하다. 더구나 이러한 흐름이 한국 자본의 위상 제고와 함께 우리 사회 일각에도 뚜렷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비판이 적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근대 이전의 중화체제는 물론이고 특히 패전 이전 일본의 경우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결국은 아시아 침략의 변증(辨證)으로 전락한 아시아주의의 함정을 상기할 때, 아시아에 대한 숙고가 자칫 국수주의의 확대판과 혼동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는 얼마전, “아시아는 하나”(Asia is one)라는 유명한 선언으로 시작되는, 일본 아시아주의의 원류, 오까꾸라 텐싱(岡倉天心: 1862~1913)의 『동양의 이상』註31) 을 큰 흥미를 가지고 읽었다. 그는 메이지유신 이래의 구화주의(歐化主義)에 대한 반동으로 태어난 편협한 일본국수주의자들과 일정하게 차별되지만, 그럼에도 “아시아의 사상과 문화를 의탁한 진정한 저장고”로서 일본을 특권화함으로써註32) , 그의 아시아주의를 좀더 세련된 국수주의로 볼 밖에 없을 소지를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더욱 주목할 점은 그의 아시아주의가 서구로부터 학습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를 일본미술로 처음 인도한 사람이 동경대의 미국인 은사 페놀로사(Ernest Fenollosa: 1853~1908)다. 철학교수로 부임한 페놀로사는 일본미술에 심취, 그 연구의 개척자로 활약하면서 일본정부의 문화정책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바, 그의 충실한 학생이 바로 텐싱이었던 것이다.註33) 그런데 이 책에는 니베디타(Nivedita)의 서문이 붙어 있다. 북아일란드 출신의 영국인 부인 마가렛 노블(Margaret Noble), 런던에서 비베카난다(Vivekananda)의 신지학(神知學) 강연에 매혹, 교사직을 팽개치고 그의 제자가 되어 1899년 인도 캘커타로 이주, 이름마저 인도식으로 바꾼 이 여성이 텐싱의 인도 협력자였다. 텐싱은 인도에 체재하면서(1901~2) 이 책의 원고를 마무리하였는데, 실제로 니베디타는 이 책의 완성과정에서 거의 동업자에 가까웠다는 것이다.註34) 그러고 보면 서문에 나오는 “위대한 어머니 아시아는 영원히 하나”, 니베디타의 이 구절을 축약하면 텐싱의 “아시아는 하나”라는 간명한 구호로 된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다. 하여튼 서구적 실용성을 보완하는 아시아적 영성(靈性)의 부활이라는 이상에 기초한 텐싱의 아시아주의가 아시아주의의 원산지 인도 벵골지방의 지적 분위기에 심취한 한 영국부인에 의해 강화되었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텐싱의 아시아주의가 동양에 심취한 서양인들의 또다른 의미의 오리엔탈리즘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야말로 통렬한 반어다. 하기는 인도의 아시아주의 역시 고대 인도의 정신적 장관(壯觀)에 주목한 서구 지식인들의 발견에 적지 않은 영향을 입고 있는 점註35) 과 인도 최고의 아시아주의자 타골(Tagore)을 배출한 벵골지방이 인도에서 가장 먼저 영국의 직접 지배 아래 편입된 곳註36) 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때, 아시아주의가 내발적이기보다는 서양에 대한 대타의식에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터이다. 아시아에서 인도와 일본에서 유독 아시아주의가 번성한 이유도 아마 이 두 나라가 서구의 충격에 가장 이른 시기에 전면적으로 노출된 사정과 연관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중국이 문제다. 아시아의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게 서구와 접촉한 후 파경적 충돌을 거듭했던 중국에서는 왜 아시아주의가 중요한 쟁점의 하나로 되지 못했을까? 아마도, 일찍이 식민지로 전락한 인도와 반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시아 침략국으로 변모한 일본과 달리, 중국은 반식민지적 상황 아래에서도 끝내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았던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중국의 보전이라는 초미의 과제 앞에서 어느 겨를에 아시아를 본격적으로 사유할 수 있었을까? 매우 예외적인 쑨원의 아시아주의조차 일본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한 불구적 형태로서 기실 일본의 침략적 아시아주의자들과 연계되어 있었던 “중국 위주의 정략”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註37) 동서양의 종합을 지향하던 발생 초기의 인도와 일본의 아시아주의도 두 나라의 역사적 행보에 따라 각기 변모를 겪는다. 아시아의 영성에 의한 서양의 정복을 선언한 간디(Gandhi)가 타골을 대신하면서 인도의 아시아주의는 독립의 원리로 되고, 서양문명의 대안으로 설정된 아시아의 영성을 폐기하고 국수주의로 경사한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아시아 침략의 논리로 둔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빌미는 이미, 국수주의자인 동시에 세계주의자인 텐싱의 절충 속에 예비되고 있었다. 그는 아시아의 영성의 중심을 인도에 둔 인도의 아시아주의를 일본 중심으로 번안하였으니, 이로부터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하나의 망령으로서 아시아를 배회하는 가여운 운명에 봉착하였다. 요컨대 “일방으로 아시아를 주장하고 타방으로 서구를 주장”註38) 하는 모순에 빠진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아시아의 이름 아래 아시아적 원리를 방기함으로써 서양에 대한 거부라기보다는 서구 모방의 완성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이러매 새로운 동아시아론은 중국의 중화주의와 그를 대체하려고 했던 일본의 아시아주의의 전철을 답습할 수 없다. 또한 타골의 길이건 간디의 강령이건 인도의 영성을 중심에 둔 인도의 아시아주의도 우리를 인도할 북극성은 아니다. 아시아의 정신을 서양의 물질문명과 그토록 표나게 대비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순진한 이분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문명적 대안의 씨앗을 아시아의 전통적 지혜로부터 길어올리려는 본질적 과제를 폐기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문제는 장기적 과제로 노력을 경주하되, 먼저 분쟁과 갈등으로 점철된 아시아 여러 나라, 여러 민족 사이에 민중적 연대의 통로를 구축하는 작업에 더욱 공들여야 하겠다는 판단이다. 아시아주의의 망령으로부터 해방되는 일, 그로 말미암아 뿌리박은 아시아의식의 결핍으로부터 해방되는 일, 이 두 개의 해방을 동시에 밀고 나가는 작업의 중요성이 지금 우리에게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이 과정에서 유의할 점은 “아시아는 하나”라는 언술을 일단 접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명제의 배후에는 언술자가 소속한 국가를 특권화함으로써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하려는 의식적·무의식적 기도가 복재하고 있음을 우리는 이미 텐싱에서 목격한 바이다. 아시아가 어째 하나인가? 아시아의 풍요로운 다양성을 그대로 승인하자. 이때 비로소 커다란 틀을 잊지 않으면서 아시아 각 권역대로의 작은 연대를 착실히 다져나가는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전될 수 있을 터인데, 고르디우스의 매듭 동아시아를 어떻게 푸는가, 이것이 우리의 문제다. 얽힌 실타래의 한가운데 포박되어 있는 한반도의 남북 민중이 분단체제를 고도의 슬기로 타파하는 것이 관건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힘뿐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싸고 복잡한 대립을 거듭해온 주변 4강의 이해를 획득하는 변수가 가세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특히 한일 연대를 어떤 수준에서 어떻게 구축하는가가 난제 중의 난제다. 그동안 한일간의 교류는 대체로, ‘한일유착’을 기본으로 한 미약한 민중연대라는 근본 성격 속에서 진행돼왔다. 이래 가지고는 백년하청이다.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를 기회로 삼아 기존의 한일교류의 틀을 근본적으로 넘어설 새로운 방안의 모색을 진지하게 고려할 시점이다. 이상화(李尙火) 시인이 노래했듯이, 언젠들 안 갈 수 있으랴, 갈 테면, 우리가 가자, 끄을려가지 말고! ------------------------------------------------------------------------------- - �� �後後� �짯後� �後� �碻碻碻� �碻碻� �� �� ┛┗ �� �� �� �� �後後� �碻�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