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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istory ] in KIDS
글 쓴 이(By): artistry (호연지기)
날 짜 (Date): 1999년 2월 14일 일요일 오후 05시 38분 15초
제 목(Title): 천지현/ 영화를 통해 보는 역사





영화를 통해 보는 역사
「쉰들러 리스트」「말콤 엑스」「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천지현 


「쉰들러 리스트」: 객관적 과거라는 함정 
「말콤 엑스」: 연대기적인 인물 묘사의 한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과거의 현재적 의미  


   
  
  아이를 키우는 애 어미가 문화생활을 하겠다고 극장을 찾아가기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그래서 필자도 영화란 으레 개봉관에서 상영할 때에는 신문광고 보고 
입맛만 다시다가 서너달 지나 비디오로 출시되면 그때서야 빌려다 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산 지가 꽤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는 시간을 내고 돈을 들여, 게다가 내가 극장을 찾지 않는 동안에 새로 생겨 
위치도 잘 모르는 어느 극장을 물어물어 찾아가서 당당하게 객석에 앉아 보았다. 
굳이 그렇게 한 데에는 내 나름의 몇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만큼은 
꼭 극장에 가서 보아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과도 같은 것이 영화를 개봉하기 
전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영화전태일제작위원회’가 결성되고 국민주의 형태로 
제작비 후원을 받는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에서 들으면서도 게으름과 무관심 그리고 
왠지 모를 어색함 때문에 선뜻 참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함께 관객의 
입장에서나마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선거가 있을 때마다, 매번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의 한표가 그 후보에게 그리고 그가 대변하는 대의에 힘을 보태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표를 찍듯이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나에게 개인적으로 
더 절실했을지도 모르는 또다른 이유는 영화를 보러 간 그 당시에는 스스로 별로 
의식하지 못했던 듯하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대학에 머무르면서 보낸 80년대와 
90년대 초반의 진지함에 대한 향수가 나도 모르게 「전태일」이라는 영화만은 꼭 
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각목과 화염병을 
든 학생들이 밖에서 호위를 하는 가운데 무언가 큰일을 하는 기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쭈그리고 앉아 「파업전야」를 보던 감격과 그러한 경험으로 가슴 
벅차하던 나의 대학시절에 대한 그리움, 또 그 시절의 내가 아직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미련 따위의 다소 감상적인 동기가 없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영화를 보러 가는 이런저런 이유들과 함께 마음속에는 막연한 걱정도 몇가지 
있었다. 우선 흥행이 안되면 어쩌나, 그래서 모처럼 어렵게 만든 영화인데 다들 
힘이 빠지면 어쩌나 하는 주제넘은 걱정이 없지 않았는데, 이런 걱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말 그대로 기우였다는 것이 증명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내가 찍은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될 때와 같은 기쁨과 함께, 영화가 말하려는 바에 귀기울이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을 보고 느끼는 뿌듯함 등이 걱정 대신에 마음속에 들어앉는다. 
영화를 보기 전에 머릿속을 맴돌던 더 심각한 걱정 중의 하나는 전태일에 관한 
영화를 만든답시고 공연히 힘이 들어가 목소리만 크고 영화로서는 재미도 가치도 
없는 그런 영화가 나오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사실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그렇게 만들어서야 극장에 관객이 들겠냐마는 흥행에 실패할까봐 지레 겁을 먹은 
것을 보면 ‘진지한’ 영화에 대해 내가 가진 선입견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과 선입견도 영화를 보는 동안에 완전히 해소가 되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렇게 깔끔하고 세련되게 잘 만든 한국영화는 처음 본다는 느낌이 들었고 
다른 면은 다 떠나서 그 한가지만으로도 극장을 찾은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느덧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서는데 오만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대학시절에 읽은 책들과 그 당시 소위 운동권이던 선후배, 친구들에 대한 기억이 
자꾸 새롭게 떠올랐고, 더 거창하게는 역사란 무엇인지, 영화를 통해 역사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하는 의문들이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까지 본 
적지않은 영화들, 특히 역사적 인물, 역사적 사건들을 재조명하려 했던 다양한 
영화의 여러 장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영화 「전태일」의 전체적인 내용과 
형식, 그 안의 부분부분들이 몇몇 영화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낸 것이다. 
그중에서도 「전태일」이 강하게 연상시키는 영화가 두 편 있었다. 2차대전 당시의 
유태인 학살사건을 흑백필름으로 그려낸 저 유명한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와 미국 내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을 
인종문제를 일생을 통해 부딪혀낸 한 인물의 일대기를 진지하게 더듬어나간 「말콤 
엑스」(Malcolm X)가 그것이다. 과거에 실제로 존재했던 사건이나 인물을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그려내려 한 점이나 전체적으로든 부분적으로든 흑백영화의 형식을 
도입한 점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억압을 받는 자들의 현실과 그들의 싸움을 그린 
점 등 이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특징과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영화들이 지니는 서로 다른 모습들에 대한 생각이 앞뒤없이 떠올라 언제가 
되더라도 한번은 정리를 해야 할 문제로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이렇게 
영화수상을 쓰게 되었으니 그 과제를 더이상 미룰 필요가 없겠다. 따라서 이 글은 
「전태일」 「쉰들러 리스트」 「말콤 엑스」, 이 세 편의 영화를 비교하는 글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평론이 될 가망은 아예 없는 것 
같다. 영화 보기를 즐겨서 남들보다 영화를 조금 많이 보기는 하지만 체계적으로 
영화에 관해서 공부를 해본 적도 없거니와 영화에 관해 아는 것이라고는 오다가다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얻어들은 것이 전부인 필자로서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느낀 바를 솔직하게 말하고 나 자신이 품고 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쉰들러 리스트」: 객관적 과거라는 함정 
   
     
 「쉰들러 리스트」가 화제 속에서 국내에 개봉되고 곧이어 아카데미상을 
휩쓸다시피 하면서 주가를 올릴 당시 이 영화에 대한 찬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나찌에 의한 유태인 학살이라는 잔혹하고 어두운 역사를 극도로 사실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오늘에 되살려냈다는 평이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흑백의 화면을 사용한 것과 다큐멘터리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핸드카메라를 
도입한 것 등이 사실성을 높이는 데에 한몫을 한 것으로 지적되곤 했다. 게다가 
유태인 게토와 수용소를 재현한 방대한 세트와 소도구, 의상, 적재적소에 동원된 
엄청난 수의 단역배우 등등을 상기해보면 이 영화가 객관적인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 노력한 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성이 무엇을 위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마련된 것인가, 감독이 과거를 
되살려내면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에 이러한 사실성이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에 다가가는 하나의 방법으로 위에서 말한 다큐멘터리적인 기법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자. 한곳에 고정되지 않은 채로 
피사체의 움직임을 좇아 이리저리 함께 움직이고, 때로는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나찌에게 쫓겨다니는 유태인들의 공포와 당시의 급박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데에 탁월한 역할을 한다. 게다가 그러한 장면들이 흑백의 
화면을 통해 펼쳐질 때 관객은 마치 한편의 기록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주인공 쉰들러의 모습을 포착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고 느껴진다. 우왕좌왕하는 유태인들의 모습을 담을 
때와 달리 그 와중에 당당하게 서 있는 쉰들러의 모습을 잡을 때에는 카메라가 
갑자기 멈추어 안정된 상태에서 다가가 그의 표정과 신체부위, 소지품 등을 
반짝이는 화면 속에 담아낸다. 쉰들러가 주인공이고 영웅이라는 것을 카메라가 
선언이라도 해주는 꼴이다. 그러고 보니 쉰들러는 헐리우드가 좋아하는 주인공의 
특징을 참 골고루도 갖추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고 사업을 하면서 협박과 
뇌물공여 등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지만, 밉지 않은 외모에 여성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추었으며 현실적인 수완을 발휘해 경제적·사회적으로 여봐란 듯이 
성공을 한다는 점 등이 그러한 인간적인 허물을 덮어주고도 남으며, 하물며 
박해받는 유태인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걸고 분투하는 
인간미마저 갖추었으니 더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렇다면 쉰들러에게 이렇듯 뛰어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준 유태인 
학살의 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며, 감독이 이 역사 속에서 
찾으려는 교훈은 도대체 무엇인가. 솔직히 말해 필자는 이 영화를 다 보고 난 
다음에도, 유태인들이 엄청나게 모진 박해와 핍박을 받았다는 것,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들은 끝내 살아남았다는 것, 또 그 과정에서 어느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인간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이런 것 이상의 의미를 
찾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들이 당한 광기어린 탄압은 인류가 공히 분노해야 할 
일이요, 그 탄압 속에서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이를 지키려는 노력도 숭고한 
것이겠지만, 영화가 한 민족의 수난사에 대한 사실적이기만 한 묘사와 한 인물의 
무용담과 같은 활약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필자가 바라던 역사에 대한 인식은 
실종되어버렸다. 다시 말해 나찌의 광기를 낳은 독일 역사의 맥락에 대한 관심도, 
그 광기가 유독 유태인에게 집중된 원인에 대한 반성도 없는 한, 이 영화가 
사실적으로 재현해냈다는 과거의 사건은 오늘의 우리에게 조금 더 절박하고 심각한 
상황에 처한 인디애나 존스의 모험담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런 엄청난 어려움을 이기고 살아남은 유태인들이 오늘날 보여주는 행태와 지금 
팔레스타인이 처한 현실에 대한 언급이 한마디도 없는 것을 보면 이 영화의 
사실적인 형식이 제대로 된 역사적 의미를 찾지 못했다고 아쉬움을 표하는 
것만으로 끝낼 일은 아닌 것 같다. 하나의 작품이 ‘객관적이고 사실적’이려는 
노력에 성공하더라도, 아니 성공하면 할수록, 은연중에 배제된 또다른 현실이 
은폐되고 그 작품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성공적’으로 유포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는 섬뜩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말콤 엑스」: 연대기적인 인물 묘사의 한계 
   
     
 「쉰들러 리스트」가 과거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도 그 역사적 의미를 오늘의 
관점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에 비해 「말콤 엑스」의 현실적인 맥락은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상당히 명확하게 제시된다. 영화의 타이틀이 올라가면서 
백인이 흑인을 억압해온 역사를 고발하는 말콤 엑스의 연설 소리가 울리고 
타이틀자막 너머의 화면에는 LA흑인폭동의 도화선이 된 로드니 킹 구타사건을 담은 
장면과 불타는 성조기의 모습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흑인에 대한 억압을 통해 
미국사회의 모순을 보려는 영화의 시각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뒤이어 펼쳐지는 영화는 말콤 엑스라는 한 흑인 지도자의 일생을 차근차근 
좇아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감독인 스파이크 리(Spike Lee)는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와 같은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준 실험적인 형식과 
선동적인 목소리를 자제하고 담담하고 사실적인 논조를 택한 것이다. 영화가 말콤 
엑스 자신의 구술을 바탕으로 한 『말콤 엑스』라는 책에 기초를 두고 있기에 그 
기본구조는 한 인물의 변화와 성장, 활동, 죽음 등을 중심으로 한 전기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어떤 영화가 한 사람의 일대기를 그리는 것이라고 해서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라는 법은 없다. 이 영화의 전반부도 말콤 엑스라는 
한 개인의 성장기와 청년기를 보여주면서도, 백인의 인종차별에 대항하다가 
KKK단에 살해당한 그의 아버지에 대한 회상을 통해 흑인들이 헤쳐나온 고난과 
저항의 역사를 드러내기도 하고, 할렘에서 자라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결국은 교도소에 가는 그의 전력을 통해 흑인 사회의 다양한 모습을 맛보게 
해주기도 한다. 백인처럼 보이기 위해 곱슬머리를 곧게 펴고 건들거리며 거리를 
배회하는 철없던 시절의 말콤 엑스를 따라다니다 보면 관객은 어느새 흑인들의 
밑바닥 삶을 그려놓은 한편의 풍속화를 감상하게 된다. 
  그러나 말콤 엑스가 교도소 안에서 회교의 교리를 접하고 흑인으로서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중반부에서부터 영화의 초점은 그가 
나름대로 발전시켜가는 사상, 회교 교단을 통해 그가 행하는 정치적·종교적 활동, 
교단 내의 입장 차이와 그 자신이 고수하는 신념 등에 대한 진지한 고찰로 
옮겨간다. 물론 이러한 고찰은 그 당시 흑인운동을 이루고 있던 중요한 흐름 중의 
하나를 말콤 엑스라는 인물의 변모과정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는 미덕을 지닌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되는 과정에서 영화의 시각이 어쩔 수 없이 회교 교단의 
울타리 안으로 축소되어간다는 데에 있다. 말콤 엑스가 언론을 통해 미국의 모든 
흑인들에게 흑인문제 전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영화 안에서 그가 직접 접하는 인물은 교단 내의 사람들밖에 없게 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도 교단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그의 명성과 영향력을 시기하는 교단 내 다른 세력의 배신행위와 교주인 일라이자 
무하메드의 부정한 사생활, 그에 대한 말콤 엑스의 환멸 등이 영화 후반부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고, 애초에 그러한 운동을 낳은 흑인의 현실과 인종문제의 
본질에 대한 관심은 영화의 전면에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암살을 당하기 
직전에 그가 자신에게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는 교단 내 반대세력의 배후에 더 큰 
조직적 힘이 있음을 깨닫는 대목이나, 그의 전화를 도청하는 백인 기관원들의 
모습을 얼핏 보여주는 대목 역시 그가 회교 교단 내의 암투에 희생당하는 것처럼 
그려진 중반 이후의 논조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게다가 그가 
인종문제에 대해 더욱 유연하고 포용력있는 자세를 가질 것이라고 입장의 변화를 
천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회교의 원리 안에서 흑백을 넘어선 형제애를 발견한 
것으로 처리되고 있으니, 그렇게 그려진 그의 변모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찾기란 
더더욱 어려워지고 만다. 
  필자는 이제까지, 말콤 엑스가 전체 미국민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극히 
위험한 인물로 지배세력에게 비쳐진 것은 그가 교단의 원리주의와 결별하고 이전의 
입장보다 한결 융통성있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알고 있었다. 
교단의 힘 안에서 과격한 목소리로 철저한 흑백 분리주의를 주장할 때보다 
진보적인 흑백 세력간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연대를 주장하는 ‘온건한’ 입장을 
택했을 때 말콤 엑스는 사회적으로 더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이 되었으며, 
이러한 그가 반대 세력들에게 한층 심각한 위협으로 여겨져 마침내 암살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속에는 이와같은 그의 변화에 대한 고려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라 여겨지는 그의 
변모도 단순히 그의 일생 가운데 한 부분으로 서술되고 있을 뿐이다. 사실과 
시간적 흐름에 충실한 기록고 함께 감독의 창조적인 개입과 적극적인 해석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관객으로서는 주어진 사실을 단지 하나의 사실로만 받아들이게 
될 뿐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모순에 대한 더 높은 차원의 인식을 얻을 수는 없지 
않을까. 영화의 마지막 부분을 일종의 에필로그처럼 마무리하는 만델라의 격려사를 
듣고 “내가 말콤 엑스예요!”(I’m Malcolm X!)라고 외치는 흑인어린이의 
모습을 보면서도, 또 X자를 크게 새긴 티셔츠차림으로 영화관 앞에 긴 행렬을 
이루고 서 있는 수많은 흑인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이 의문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과거의 현재적 의미 
  
   
  몇년 전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을 보면서 그 영화의 마지막 대사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오랫동안 궁금해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당국의 수배를 받아 탄광촌에 은신해 있던 주인공이 다시 그곳에서 도망을 가며 
열차 안에서 이런 독백을 한다. ‘우리들이 오늘을 무어라 부르든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은 오늘의 어둠에 절망하지만, 보다 찬란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 그 어둡고 어두운 70년대를 산 
두 젊은이의 이야기 「전태일」이 이 마지막 독백의 의미를 밝혀주었다고 한다면 
필자 혼자 제 흥에 겨워하는 지나친 비약일까. 
  이 영화는 잘 알려진 대로 노동자 전태일의 이야기를 다루는 흑백 부분과 
전태일의 행적을 더듬어가는 지식인 김영수의 모습을 그리는 컬러 부분이 자유롭게 
교차하면서 전개된다. 김영수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의 시점이 전태일이 죽은 지 채 
5년이 지나지 않은 때인 것을 감안한다면, 90년대에 이 영화를 보면서 흑백은 
과거, 컬러는 현재를 담은 것이라고 편리하게 구분지어버리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보다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부분은 흑백으로, 실존인물에서 
따오기는 하였지만 허구의 인물임에 틀림이 없는 김영수의 이야기는 컬러로 처리된 
것이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합리적일 듯하다. 
  그러나 영화의 전체적인 구조가 김영수라는 인물이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추적하는 과정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객관적인 과거의 
사실을 한 인물이 해석하고 재구성하여 책으로, 역사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과거의 현실이 바로 이것이었다라고 보여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이 영화가 과거의 사실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사실 영화를 통해 거의 완벽하게 재현된 
70년대의 학원과 거리, 평화시장의 피복공장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이 영화가 이룬 가장 뛰어난 성취 중의 하나라는 칭찬을 듣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카메라가 서있을 자리도 없다는 듯이 천장 쪽에서 비쳐지는 
좁아터진 변소의 모습과 먼지가 거미줄처럼 엉겨 있는 공장의 모습, 그 안에서 
쭈그리고 앉아 바쁘게 손발을 놀리는 어린 여공들의 새된 목소리들, 이 모든 것이 
모여 당시의 상황을 여실하게 포착해낸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일하던 한 
여공이 기침을 하다가 피를 쏟고 피 묻은 손을 씻을 데가 없다며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대목에 오면, 우리는 사실적인 배경 묘사의 가치가 사실성 
그 자체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 현실 속에서 전태일은 자기 몸을 태워 죽기를 결심한다. 그가 이러한 결심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의 시각에 대해 아쉬움이 아주 없지는 않다. 이를테면 
그가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기까지 엄청난 현실의 벽에 
부딪치고 깨지면서 느꼈을 인간적인 좌절이나 고뇌가 지나치게 생략된 감이 있고,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그들을 탄압하는 세력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 없다는 것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70년대의 노동현실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해석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전태일에게 분신을 강요한 당대 사회의 뿌리깊은 
모순이 노동자들의 건의를 무시하는 노동청의 한 직원이나 협박과 횡포를 일삼는 
몇몇 업주들에 대한 묘사로 대표되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영화를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동료 노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자신의 
죽음과 맞바꾸려한 청년노동자의 결심이 자칫 그 설득력과 역사적 의미를 잃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영화를 보면서 느낀 이러한 위기감을 어느정도 풀어준 것은 김영수의 
이야기였다. 김영수를 통해서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70년대 학원의 
시위 모습, 야학에서 근로기준법을 교재 삼아 한자를 배우는 노동자들의 모습과 
노조설립을 위해 힘을 다해 싸우는 여성노동자 정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전태일의 죽음이 70년대의 맥락 속에 어떤 의미로 자리잡았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김영수가 전태일의 삶과 죽음을 통해 자기 삶의 의미를 찾고 ‘어둠 
너머에 있는 생명’의 희망을 볼 때 우리가 그 희망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은, 
세간에 거의 알려진 바 없던 한 노동자의 삶과 죽음, 과거 속에 묻혀버렸을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을 그가 자신을 비롯하여 우리 모두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역사로 
되살려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전태일의 몸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붉은색으로 
살아나는 것은 공연한 수사가 아닌 것이다. 
  도대체 역사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한 마당에 역사와 영화의 관계에 
대한 뭔가 멋진 이야기를 할 자신은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영화라 하더라도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으며, 그런 
영화를 보면서 그것이 자신이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만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영화 「전태일」은 
사실성은 사실성대로 살리면서 그것에만 집착하지 않고 그 너머의 진실을 포착하려 
한,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과거 사실의 참뜻을 찾고 그렇게 찾아낸 뜻을 
바탕으로 내일을 바라보려는 지지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리고 전태일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한 사람만이 아니라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한 수천 명의 사람들, 이 
영화를 본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 그리고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마지막 외침을 몸으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언제나 새롭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95년 중년이 되어 평화시장을 다시 찾은 김영수가 스쳐지나가는 어는 
노동자의 모습에서 전태일의 모습을 다시금 보게 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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